드라이 - 죽음을 질투한 사람들
제인 하퍼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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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해들러 가족의 죽음에 대해 뭔가 명확한 게 나오면 그때 떠날 겁니다." 포크가 말했다. "그전에는 안 떠나요."

"이건 너랑 아무런 관련이 없어."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가족이 총에 맞아 죽었는데요? 내 생각에 이런 일에는 관련 없는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뭔가 이 문제에 대해서 강한 주장을 갖고 있는 모양이니까 당신부터 시작해야 할 수도 있겠군요. 공식적으로 해보자고요. 어떻게 생각해요?"

친구 루크의 비극적인 사건 소식을 접한, 에런 포크는 2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루크는 아내와 여섯 살짜리 아들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데, 갓난아기인 딸은 그 비극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 포크를 친구의 장례식에 초대한 것은 그의 아버지 제리였다. 현재 벌어진 일가족 살인 사건은 20여 년 전 과거에 있었던 한 소녀의 죽음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당시 강에 빠져서 익사한 엘리라는 소녀의 죽음에 대한 용의자로 그녀와 가까웠던 포크가 의심되었지만, 그 시간에 포크와 함께 있었다고 증언한 루크의 덕분에 알리바이가 만들어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사람은 그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크의 아버지와 포크의 아버지는 그들 중 한 명이었고 말이다.

루크는 거짓말을 했어. 너도 거짓말을 했지. 장례식에 와라.

그 사건으로 인해 포크와 아버지는 마을을 떠나야 했지만,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아들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금, 루크의 아버지가 묻는다. 루크가 전에도 사람을 죽였던 적이 있느냐고. 자신은 루크가 가족을 죽이고 자살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금융범죄 전문 수사관인 포크는 제리의 부탁으로 마을의 라코 경관과 함께 사건의 진상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미제로 남은 과거의 그 사건을 잊은 적 없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들에게 냉담하게 협조하지 않고, 급기야 포크에게 협박을 하기 시작한다. 과연 루크는 스스로 이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일까? 이 사건은 과거의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 대체 20년 전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며, 루크와 포크의 거짓말은 어떻게 된 걸까. 작은 마을에 안개처럼 퍼져가는 비밀들은 점점 무게를 더해가고, 백 년 만에 찾아온 사상 최악의 이상기온으로 바싹 말라가는 풍경 속에서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그것은 점점 더 견고하게 벽을 쌓기 시작한다.

"그 여자애가 죽은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없어요. 아버지, 없다고요. 당연히 내가 한 짓이 아니에요."

에런은 자신의 심장이 아버지가 움켜쥔 손아귀에 닿아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그는 트럭의 짐칸에서 덜커덕거리고 삐걱거리는 그들의 가장 소중한 물건들을 생각하고 루크 그리고 그레천과 서둘러 나눈 작별을 생각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엘리와 다시 나타날까 봐 그가 지금도 뒷유리를 통해 살피고 있는 디컨을 생각했다. 그는 분노의 전율을 느꼈고 아버지의 손을 확 비틀어 떼어내려고 시도했다.

"안 그랬어요. 맙소사, 어떻게 그런 걸 저한테 물어보실 수가 있어요?"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때로 사실이 아닌 경우가 있다. 내가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기대하는 바가 상대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가끔 우리를 완벽하게 배신하곤 하니 말이다. 그 사람의 말투, 행동, 평상시 습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들이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포크는 루크의 거짓말이 자신을 위해서라고 믿었다. 어쩌면 그때, 아직 기회가 있었을 때 그에게 한번쯤 제대로 물었어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엘리가 죽던 날 오후 루크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지만 이미 후회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루크는 영원히 그에게 답을 들려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 그것은 가끔 감당하지 못할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저 잠시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 그저 다른 데 신경을 조금 더 썼을 뿐인데, 그저 내 가족을 지키고 싶었던 것 뿐인데.... 작은 순간의 이기심이 엄청난 댓가를 치뤄야만 하는 사건으로 연결되기도 하고 말이다. 이 작품은 아마존에서 엄청난 화제였던 작품으로, 출간 전 원고상태에서 영화화가 이미 확정된 제인 하퍼의 데뷔작이다. 작은 마을의 소문이 가져온 참혹한 피해를 섬세하고 날카롭게 그려나가면서 그 속에서 인간이 지닌 죄의식과 후회의 본질을 매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20년 전의 살인사건과 현재의 살인사건이 교차 서술되며 긴장감을 부여하고, 마을 사람들 제각각이 가지고 있는 비밀들의 무게가 점점 의심을 증폭시켜나가면서 페이지 끝까지 손을 놓을 수 없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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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프라우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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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번 보고 사랑에 빠진다는 게 가능할까? 안나는 단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심히 떨어진 눈길의 명령에 따라, 안나는 모든 신화가 정점에 이른 이 사건의 증인이자, 피해자, 노예가 되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그전까지의 모든 순간이, 중요했던 때와 중요하게 보이기만 했던 모든 때가 합쳐져 이 강렬한 순간의 총합, 단 한 순간이 되었다. 심장 한 번이 뛰는 짧고 날카로운 찰나에, 그녀는 이제까지 했던 말, 했던 일 중 그 무엇도, 앞으로 하게 될 말, 하게 될 일 중 그 무엇도 이 비극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안나는 프리크에서 뭄프로 가는 기차 창문을 내다보았다.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스위스인 남자와 결혼한 미국인 아내는 삶이 지루하고, 9년을 살았지만 스위스라는 나라가 불만스럽고, 외국어의 벽은 여전히 높게만 느껴지고, 무뚝뚝한 남편의 애정은 외롭기만 하다. 그러다 독일어를 배우기 위해 간 어학원에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스스로의 욕망에 고스란히 몸을 맡기면서 점점 파국으로 치달아가게 된다. 하지만 사실,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은 부질없다. 줄거리가 함축할 수 있는 건은 단지 줄거리일 뿐이니까. 사실 결혼한 여자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어디서 한번쯤 들어봤음 직한 스토리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한번쯤 들어봤음 직한 이야기'를 벗어날 수 있는 까닭은 그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불륜 외에도,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끊임없이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은 영어와 독일어 단어를 이용한 세련된 언어유희로 그려지고, 날카롭고 예리한 문장으로 진행되는 정신분석 상담 내용들은 놀라운 심리학적 통찰을 보여준다.

은행에서 일하는 남편 브루노를 따라 미국에서 스위스로 온 지 9년이 된 안나는 매우 수동적이고 비사교적인 인물이다. 그녀에게는 여덟 살 빅터, 여섯 살 찰스와 아기인 막내딸 폴리 진이 있다. 낯선 타국에서 자신의 운명에 좌절하고 비참해하는 그녀에게 브루노는 정신과 의사를 만나도록 권유했고, 그녀는 현재 메설리 박사에게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고 있다. 메설리 박사는 그녀에게 독일어 수업을 들어보라고 했고, 어학원에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스코틀랜드인으로 그녀처럼 외국인 체류자였고, 어학생이었다. 안나에게는 친구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없었지만, 그나마 자신처럼 각자의 남편을 따라 스위스로 이사를 온 이디스와 메리와 가깝게 지내는 편이었다. 그녀는 운전을 하지 못해 스위스의 정확한 열차 시간표에 일상을 맞추고, 아이는 자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남편을 두고 끊임없이 낯선 남자들을 만나 바람을 피운다. 스토리만 보자면 티비만 틀면 만날 수 있는 막장 드라마의 소재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스위스 버전 사랑과 전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교차 진행되는 현재와 과거, 외국어를 통한 언어적인 분석을 부서질 것 같은 내면 묘사로 그려내는 솜씨는 굉장히 신선했고,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박사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주장을 밀고 나갔다. "안나는 불행한가요? 좋아요. 이따금 슬퍼할 이유가 있겠죠. 스위스 관습은 아직도 익히지 못했죠. 안나의 결혼 생활은 힘들고 -모든 결혼 생활은 힘들어요, 안나, 아무리 좋은 결혼이라도 - 그리고 안나는 친구도 거의 없고 여가도 없어요. 아이들은 아직 어리죠. 손이 많이 가죠. 이 모든 게 힘들겠죠. 하지만," 메설리 박사는 말을 이었다. "안나가 자신의 슬픔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놓은 모든 이유만큼, 안나는 단순히 비참한 상태를 연상시키는 것 말고는 아무런 목적도 수행하지 않는 핑계를 대고 있는 거예요. <난 까다로운 스위스인들을 바꿀 수 없어.> 안나는 징징대죠. <브루노가 좀 더 관심을 갖게 할 도리가 없어.> 안나, 단순히 남편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 달라고 부탁해 봤나요? <난 너무 내성적이라 친구가 없어.> <애들 돌보는 데만도 기력이 전부 소모돼.> 인생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죠? 그게 바로 가장 큰 핑계예요.? 안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이 작품은 출간되자마자 '현대판 안나 카레니나'로 독자와 평론가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니 여기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볼 수밖에 없겠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하우스프라우'의 첫 문장은 이렇다. "안나는 좋은 아내였다, 대체로." 섹스 냄새를 풍기며 집에 돌아와 손자를 돌봐준 시어머니에게 저는 샤워부터 할게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에게, 좋은 아내라니. 이야기는 시작부터 바람난 아내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지만, 작가는 첫 문장을 '대체로' 좋은 아내인 여자를 소개한 것이다. 대체로, 요점만 말해서, 일반적으로는 그렇다는 이야기는 그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자면, 일상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말과도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만고만하게 행복하게 보이더라도, 사실 각자의 방식으로 어려운 점도, 불행한 부분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라는 거다. 톨스토이가 바라보는 가정의 행복이라는 것도, 우리의 매일같이 겪어야 하는 일상 속의 삶이라는 것도 말이다.

이 작품의 제목인 [하우스프라우Hausfrau]는 독일어로 가정주부, 기혼 여성을 뜻한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하는 한 여성의 내면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불륜이라는 기본 서사 구조만 보자면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와의 거리가 몇 뼘 되지 않을 정도이고, 안나의 육체적 욕망에 대한 파격적인 묘사로 보자면  E. 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못지 않게 선정적이고 노골적이다. 이 작품이 독보적인 부분은 바로 섬세한 내면을 그리고 있는 매우 놀라운 방법일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정신분석 전문가가 아니므로, 극중 메설리 박사가 한 말을 소설 이상으로 받아들이지는 말라고 당부하고 있지만, 사실 저자의 남편이 정신분석학을 연구하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매우 전문적이고, 예리하고, 공감적이었다. 결론은 뭐 어떻게 읽더라도 이 작품은 굉장히 야하고, 선정적이고, 수치스럽고, 도발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질 알랙산더 에스바움은 그 모든 것들을 매우 세련되고, 우아하고, 아름답고, 통찰력 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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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되면 그녀는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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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감기와 비슷하다.

감기 바이러스는 어느새 몸 속으로 침투하고, 알아챘을 때는 이미 열이 난 상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열은 사라져간다. 고열이 거짓말처럼 여겨지는 날이 온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이 그 순간이 찾아온다.

그 무렵, 하루는 말했다. 나는 언제까지고 후지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 말을 되풀이 했다. 그러나 후지시로와 하루만 예외일 수는 없었다.

정신과 의사인 후지시로는 수의사인 야요이와 곧 결혼할 예정이다. 그들은 웨딩플래너를 만나 일년 뒤에 있을 결혼식 준비를 하는 중이다. 그들은 도심에 자리 잡은 고급맨션에서 삼 년째 함께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시절 첫사랑에게서 편지가 한 통 온다. 구 년 만에 연락을 한 그녀는 볼리비아의 우유니라는 새하얀 소금호수로 에워싸인 도시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체코 프라하,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 인도의 카냐쿠마리를 거치며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를 기점으로 대학 사진부 동아리에서 처음 만나 연인이 되는 후지시로와 하루의 이야기와 첫사랑과 갑작스레 멀어지고 이후 수 년간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없었던 후지시로가 야요이를 만나게 된 스토리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전개된다. 후지시로가 야요이를 만나던 당시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지만 직전에 파혼을 하고 그와 만나기로 했었다. 그리고 삼 년의 연애 후 결혼을 앞두고 있는 지금, 그녀는 또 다시 결혼식을 앞두고 사라져 버린다.

대학시절 첫사랑, 한 순간의 오해로 멀어진 관계, 그리고 오랜 시간에 지난 뒤에 갑자기 첫사랑으로부터 온 편지라는 플롯 자체는 다소 진부하다고 느껴질 만큼 평범하지만, 가와무라 겐키는 그것을 굉장히 특별한 연애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다. 결혼식을 앞두고 파혼을 거듭하다 급기야 사라져버린 약혼녀, 아이 없이 섹스리스 부부로 살고 있는 그녀의 여동생, 출중한 미모를 가지고 있지만 남자와 연애라는 감정에 전혀 관심이 없는 동료 나나, 그리고 첫사랑의 실패 이후 자신보다 상대를 더 생각하는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후지시로를 통해서 '연애가 사라진 세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후지시로는 야요이와 삼 년 째 동거 중이지만, 이년 동안 섹스를 하지 않는 상태로 각자의 방을 쓰며 지낸다. 특별히 다투거나 사이가 안 좋아서가 아니라, 부족한 것 없이 커뮤니케이션하며 그저 그 상태로 편안하게 말이다. 후지시로의 부모님은 최근에 이혼하기로 했는데, 그의 어머님은 아직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인생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야요이의 여동생 준은 나이 차이가 많은 남편을 만나 평범하게 잘 살고 있지만, 결혼 전부터 그와 섹스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에 여러 명의 섹스 파트너를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다고. 하지만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후지시로의 동료 나나는 사람들이 결혼이나 섹스에 거는 기대가 너무 큰 것 같다고 말한다. 애정이라는 감정이 무조건 아름답고 멋진 것만은 아니라고 말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한 순간이잖아요."

오른쪽에 하루의 떨리는 작은 손을 느끼며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때 자기의 손도 떨렸다는 건 기억하지 못했다.

"그 한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거라고 믿는 건 환상이에요. 그런데도 남자와 여자가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에 빠지고, 평생 동반자로 서로를 사랑하는 게 전제가 되는 건 이상하죠. 누구랑 연애를 하든 다다르는 종착지는 똑같아요. 그러니 결혼 후의 섹스리스도 당연하단 생각이 드네요."

"그렇게 절망적으로 말하진 마."

후지시로가 씁쓸하게 웃으며 내려다보던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의 감촉이 멀어져 갔다.

이 작품은 [너의 이름은], [분노], [악인] 등의 흥행작을 프로듀스한 창작자이자, 130만부 판매, 화제의 소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저자로 유명한 작가 가와무라 겐키가 2년 만에 출간한 신작소설로 사랑이 점차 사라져 가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한때, 나도 사랑이 영원하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극중 하루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이 한 순간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지면, 섹스하고, 결승점으로 결혼하게 되어 있는 게 대부분인데, 이 작품은 그런 사회 통념에 대해 전면으로 부딪치고 있다. 평생 누군가와 사랑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니, 사랑에 빠진 그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거라 믿고 결혼을 한다는 건 환상이라고 말한다. 함께 사는 그 혹은 그녀가 상대를 계속 사랑한다는 걸 어떻게 확인하느냐고. 그저 어느 정도 연령이 되면 결혼하고, 그 후에는 서로만 사랑하며 끝까지 가족을 지키며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규칙처럼 되어 버린 것 아니냐고 말이다.

우리는 왜 타인을 사랑할까. 그리고 왜 그 감정이 사라져가는 걸 막을 수 없는 걸까. '나의 사랑' '당신의 사랑'이 똑같이 겹쳐진 건 지극히 짧은 한 순간의 찰나에 불과하다. 달과 태양이 겹쳐지는 한 순간의 기적. 사랑하는 서로의 마음이 겹쳐진, 일식 같은 순간.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부터 믿을 수 없는 기적이라고. 누군가에게는 생애 단 한번만 찾아오기도 하고, 아예 찾아오지 않기도 하는 그 기적을 우리는 왜 유지시킬 수 없는 걸까. 살아있는 한 사랑은 떠나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감정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의 마지막 즈음에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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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컷 울어도 되는 밤
헨 킴 지음 / 북폴리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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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팔로워만 해도 60만이 넘고 그림마다 2만 개 이상의 공감을 얻고 있는, 그야말로 웬만한 유명 인사들의 수준을 넘어선 일러스트레이터 HENN KIM의 아트에세이가 출간되었다. 블랙과 화이트, 모노톤으로만 이루어진 트랜디한 작화와 함축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독특한 그의 작품은 해외에서도 반응이 뜨거워 러브콜을 받고 있는, 현재 가장 핫한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에는 그의 작품 중에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150여점을 선별한 것으로 크게 네 가지 주제로 나뉘어 실려 있다. 힘든 하루를 겪은 스스로에 대한 위로, 연인과의 관계와 사랑, 꿈으로의 매혹적인 여행, 일상에 여유를 주는 위트 있는 상상이다.

 

그림과 함께 실려 있는 각각의 짧은 제목과 짧은 글은 너무도 위트 있고, 감각적이고, 예리하다. 그림을 메인으로 작업하는 작가이지만, 글도 그에 못지 않게 임팩트가 강하다. 평범한 일상을 어루만지고, 사랑의 숨겨진 면을 꿰뚫어 보고, 누구나 한번쯤 꿈꿀 법한 세계를 그리고, 빡빡한 시간들 속에 잠시 숨을 쉬게 만들어 준다고 할까. 심플하고, 강렬한 그림과 단순하고 간결한 글이 만나서 빚어내는 이미지들은 정말 굉장하다.

 

 

'밤이 되길 기다렸어' 챕터에 실린 그림들은 좀 섬뜩하다고 느껴질 만큼 사실적이고, 슬프다. 이런 저런 일들이 풀리지 않았던 지친 하루가 끝나고, 쇼파에 엎드려 있는 여인의 모습은 마치 피를 흘리고 있는 시체처럼 보인다. 아무리 힘들어도 무뎌지진 말자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그림은 머리를 연필깎이 칼날에 집어 넣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울고 싶은 날 충분히 울어도 된다고 말하는 그림에는 침대가 수영장처럼 변해 눈물에 푹 잠겨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내일 하루를 떠올리며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그림에는 찻잔 속 음료에 반짝이는 밤하늘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도 하다. 하나같이 얼굴이 가려진 여자들의 모습은 오싹하도록 기괴하기도 하고, 마음을 다독이는 것처럼 뭉클하기도 하다.

 

 

'너와 나' 챕터에 실린 그림들은 사랑에 관한 여러 단상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굉장히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난 너를 사랑하는 걸까. 사랑에 빠진 나를 사랑하는 걸까. 라는 의문은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게 되는 아이러니 중의 하나이다. 작가는 이것을 포옹하고 있는 연인의 등 뒤로 셀카를 촬영하려는 포즈를 취한 여인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상징적이지만, 너무도 이해가 될법한 장면이라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연인의 전화를 기다리는 모습은 전화기 줄을 마치 체인처럼 온 몸에 칭칭 감고 있는 여인이 등장하며, 절대로 헤어지지 말자는 집착을 서로의 꼭 잡은 손 위로 스테플러를 찍는 섬뜩한 장면으로 상징하고 있다. 상대를 더 잘 알고 싶어하는 모습은 뒤 돌아 앉아 있는 여인의 등으로 남자가 머리를 쑥 들이밀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으며,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는 연인의 모습은 밤하늘 위로 외줄을 타고 있는데 남자가 그 선을 가위로 쓱싹 잘라 버리는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굿 나잇' 챕터에서는 좀더 순화된(?) 이미지들이 등장하는데, 누구나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꿈과 소망들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더랜드로 떠나고 싶어 책 등에 엎드려 있는 가 하면, 수면제로 먹는 사탕은 영롱한 지구와 우주 전체이다. 달을 풍선으로 매달고 벌룬 기계로 야간 비행을 하기도 하고, 달을 낚겠다며 우주 속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기도 하다. 메리 포핀스처럼 우산을 쓰고 구름 위를 날아서 달까지 날아가려는 여인도 등장하는 등 대부분 달과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그림들이라 아름답다.

 

 

'선데이 무드' 챕터에서는 집에서 뒹굴거리는 일요일의 몽상을 쇼파가 되어 버린 사람으로 보여준다거나, 침대에서 겨우 일어나는 모습을 커피 컵 빨대를 가지고 장대높이 뛰기를 하는 것처럼 그리고 있기도 하다. 눈뜨자 마자 커피부터 마시며 잠을 깨는 모습은 아예 커피 잔 속에 머리부터 푹 담그고 있는 것으로 보여주고, 녹아 내릴 것 같은 더위를 바닷가에서 피자로 된 파라솔을 쓰고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한가로운 주말, 여유 있는 휴일 하루 동안의 몽상을 위트 있는 그림들로 보여주고 있다.

 

 

살다 보면 음악이나 그림 같은 걸로 위로를 받게 되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연인과 헤어졌을 때, 시험에 떨어졌을 때, 혹은 사랑에 빠졌을 때, 친구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을 때 음악을 찾아 듣거나 그림을 보면서 위로를 받거나 공감을 느낀다. 특히나 그림이야말로 하나의 상황과 감정을 압축된 이미지로, 누구나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보여주는 예술이라 공감하거나 이해하기 정말 쉬운 도구가 아닌 가 싶다. 헨 킴의 그림들은 정말 대체 불가, 독보적인 독창성으로 이미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이렇게 책을 통해서 만나게 되니 각각이 전체로 읽히고 하나의 커다란 스토리로 형상화 되는 것 같아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현재 가장 역량 있는 젊은 작가를 선정하는 대림미술관 구슬모아당구장 프로젝트에 개인 전시를 진행 중(7/29~10/1)이라고 하는데, 한번쯤 들러서 그의 작품을 더 많이 감상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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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변호사
존 그리샴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수첩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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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변호사들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인간쓰레기를 변호할 수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달고 산다.

나는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요" 라고 재빨리 대답하고 자리를 뜬다.

우리는 정말 공정한 재판을 원하는 것일까? 아니,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건 정의의 실현, 그것도 신속한 실현이다. 이때 정의란, 그때그때 우리가 정의로 여기는 것이다.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며 잠을 자는 서배스천 러드는 이름난 거리의 변호사이다. 그는 전통적인 의미의 사무실을 운영하지도 않으며, 합법적으로 총기를 가지고 다닌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살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마약 중독자, 악마 숭배자, 연쇄 살인범 등 그 누구라도 공정한 법의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는 그이기에 극악무도한 피의자를 변호해야 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덕분에 전에 살던 아파트와 옛 사무실이 폭탄을 맞아, 그 이후로는 각종 살림살이와 비밀 총기 보관함이 내장된 특수 방탄 벤이 현재 그의 사무실이다. 그는 누구나 꺼리는 소송을 전담하는데, 그 이유가 자신이 이타적인 사람이거나, 정의에 목매는 바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 매우 독특하다. 탈옥을 감행하는 희대의 범죄자의 편에도 있었다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선량한 시민을 죽이고 범죄를 은폐하려는 경찰 조직에 맞서기도 한다. 한 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라고나 할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경찰과 사법 제도, 정부를 완벽한 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서배스천 러드가 매번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싸움에 그야말로 몸을 내던지는 것을 공감하거나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악당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인군자도 아니고, 평범한 변호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물 변호라고 할 수도 없는 캐릭터이니 말이다. 그가 굳이 왜 거리의 범죄자들을 변호하며 아웃사이더를 자처하고, 판사와 검사를 비롯한 경찰들을 적으로 돌리는 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지 사실 잘 모르겠다. 스스로도 자신이 왜 실제로 끔찍한 짓을 저지른 인간들을 보호하는 데 인생을 바치고 있는 건지 의문을 가지는 장면도 등장하고 말이다. 게다가 아이러니한 것은 이 작품이 줄곧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거다. 일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스토리에서 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없다는 건, 물론 명백하게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르겠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다소 어려운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도감 있는 전개와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벌이는 드라마는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어 준다. 단지 부당한 법과 체제에 부당한 방법으로 맞서는 것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그가 정의의 수호자 쪽에 가까워야 말이 되지 않을까. 어쨌건 그가 변호하는 형사 피고인들은 누가 봐도 명백한 범죄자들이니 말이다. 뭔가 부조리한 현실을 보여주며, 부당한 법과 사법 체계를 비판하는 건 맞는데, 애초에 도덕적 기준이 없는 인물이 하는 거라 과연 누가 악당이고 아닌지 종잡을 수가 없다.

나는 세 사람에게 내가 전형적인 변호사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내게는 마호가니와 가죽으로 채워진 근사한 사무실 따위는 없다. 유명한 회사건 아니건, 큰 로펌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다. 변호사협회를 통해 착한 일을 하는 인물도 아니다. 나는 외로운 총잡이, 체제와 싸우고 불의를 증오하는 불량배다. 내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는 당신들의 아버지에게, 또 당신들에게 일어날 일 때문이다.

내게 존 그리샴은 90년대의 스타 작가라는 느낌이었다. 물론 최근까지 계속 작품을 내고 있고,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잘 나가는 작가이지만 말이다. 아마도 법정 스릴러라는 장르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고, 히트를 시킨 장본인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내게는 좀 오래 전 작가라 그의 작품도 굉장히 오랜 만에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대 로펌 소속의 거물 변호사 이야기가 아니라, 거리의 범죄자들을 변호하는 아웃사이더 변호사가 주인공이란다. 그는 괴짜 변호사를 통해 조각나고 일그러진 사법 제도의 치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폭로하는 작품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새로운 캐릭터 외에도 구성도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의 커다란 흐름으로 이어지는 기승전결 구도가 아니라, 같은 주인공이 계속 등장하지만 에피소드들이 달라지는 연작 단편집처럼 진행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하나의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그 뒤에도 출연해 장편 소설처럼 호흡을 가져가고는 있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법의 부조리함과 어두운 면을 소개하는 다양한 에피소드의 나열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다섯 개의 개별적인 사건들은 모두 정의라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하나의 결론으로 달려간다. 유죄 평결을 받는 게 정의보다 훨씬 중요한 검사와 판사, 아무렇지 않게 부정행위를 하고, 범죄를 은폐하고, 윤리를 무시하는 법의 수호자들이란 사실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공정한 재판 뛰는 절대로 없고, 무죄 추정의 원칙은 이제 유죄 추정의 원칙으로 바뀌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부조리한 현실을 입체적으로 보여 준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지만, 완전히 달라진 존 그리샴의 작품에 적응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여전히 재미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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