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마술사
데이비드 피셔 지음, 전행선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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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걸 위장해주길 바라시는 겁니까?”

바커스가 그를 엄숙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자네들이 그 장소를 숨겨서, 심지어 나룻배를 타고 가는 파루크왕도 항구가 어딘지 찾을 수 없게 해줬으면 좋겠네.”

재스퍼는 검지로 장난스럽게 모래를 저어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알렉산드리아 항구는 지금까지 그 어느 마술사도 공연해본 적이 없는 엄청 큰 무대였다. 마술사 경력 내내, 그는 오토바이, 여성, 상자, 심지어 가끔은 코끼리까지 사라지게 했지만, 항구 전체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총알이 퍼붓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전쟁터에서 적군의 폭격으로부터 항구를 보이지 않게 숨기고, 정찰대가 탱크를 평범한 트럭으로 보도록 만들고, 철도 차량을 모조 잠수함으로, 폐선박을 대형 전함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면 어떨까.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적군의 총 공습으로부터 항구를 지켜야 하는데, 누군가 항구를 감쪽같이 없애 준다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을 것이다. , 이 마법과도 같은 일을 해낸 당사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어딘가에 갇히게 된다면, 도망갈 계획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날아 가거나, 땅굴을 파거나,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간단히 투명인간이 돼버리는 거라고. 바로 이것이 마술로 만들어낼 수 있는 정말 믿기지 않는 실화의 한 장면이다.

이 책은 실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인 마술사 재스퍼 마스켈린의 활약상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사를 오가는, 사소한 실수조차 죽음으로 직결되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대체 마술사가 무슨 일을 한단 말인지 궁금했다. 전쟁 마술사라니 상상조차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재스퍼 마스켈린은 대대로 마술사 집안에서 태어난 유명한 마술사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쇼 비즈니스를 잠시 접어두고 무대 위의 마술 기법을 전쟁에 이용할 만한 수단이 없을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상상력과 지식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으며 살아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라는 점이 군에 입대하려는 그의 의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한다. 사실 군대에선 서른 여덟 살이나 먹은 마술사가 아니라 전장에 나가 싸울 젊은 청년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스켈린은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그들을 설득해 군에 입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아군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적군이 알지 못하게 숨기거나, 거짓으로 꾸미는 위장술 조직에 배치되어 활약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황당한 임무야.” 바커스가 말했다.

재스퍼도 동의했다. 왜 몽고메리 장군이 홍해를 반으로 가르거나 전염병을 일으키는 등의 합리적인 요구를 하지 않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재스퍼는 속이 울렁거렸지만, 이번에는 실패의 두려움에 기인한 증세가 아니었다. 기회가 왔다는 흥분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것이 온 것이다. 위대한 마술의 기회! 전쟁의 판도를 바꿔버릴 만한 매우 중요한 마술. 전장에서 지금껏 시도되었던 그 어떤 마술보다 더, 엄청나게 큰 규모의 마술.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가 수행했던 그 어떤 마술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마술. 마침내 그는 3년 전에 시작했던 그 일, 정확히 그 일을 수행할 것을 요구 받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술을.

 

 

이 작품은 2018년 개봉을 목표로 영화화가 진행 중이며 [닥터 스트레인지], [셜록], [이미테이션 게임]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마스켈린 역으로 캐스팅되었다고 한다. 극중 마스켈린의 외모에 대한 설명으로 '키가 190센티미터를 넘었고, 당시의 가장 까다로운 기준을 들이대더라도 절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미남'이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잘생긴 외모와 세련된 기교의 화려한 마술사 역할에 그만큼 또 잘 어울리는 배우가 있을까 싶다. 사실 전쟁 소설인 만큼 이 두툼한 페이지 내내 전쟁이 벌어지는 전장과 그 뒤의 수많은 전략 등이 전쟁 용어와 함께 난무하는 이야기라, 술술 읽히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재스퍼 마스켈린이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의 마력에 푹 빠지게 된다면, 적을 속이기 위한 온갖 속임수의 마술에 현혹된다면 아마도 굉장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독특한 소재였고, 그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가 보여주는 드라마란 실화라는 것을 알고 읽어도 쉽사리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웠다. 마술의 힘을 활용한 수많은 위장술들은 모두 굉장히 기발하고, 훌륭했다. 마스켈린은 말한다. 인간의 본성과 기초적인 과학 원리를 이용한다면, 그 무시무시한 전쟁 기계 나치도 속일 수 있다고. 덕분에 그는 실제 히틀러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가 활약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의 그것이 나치 독일군을 제대로 농락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마스켈린의 상상력은 기상천외한 전술로 영국군의 위장술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마술이라는 것이 대부분 보조 장치가 필요한 속임수쯤이라고 치부했던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은 환상이 실제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치밀한 과학적 원리와 인간의 본질에 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전쟁이라는 소재로 만들어진 그 어떤 작품도 흥미롭게 읽어본 기억이 없는데, 이 작품만은 재스퍼 마스켈린이라는 매력적인 인물 덕분에 전쟁이라는 서사 자체를 다르게 보도록 만들어 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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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 권 독서법 - 하루 한 권 3년, 내 삶을 바꾸는 독서의 기적
전안나 지음 / 다산4.0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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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꽤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한달 평균 스무 권 정도, 일년에 이백 오십에서 삼백 권 정도가 된다. 그렇게 벌써 몇 년째이니 이제는 사실 독서법을 알려주는 책이 필요한 단계는 지났다. 하지만 책을 읽음으로써 삶에 뭔가 변화를 겪게 된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이 책의 저자는 14년차 직장인이며, 9년차 엄마로 누구보다 열심히 워킹맘으로 살았다. 하지만 직장 생활 10년 만에 에너지가 바닥나 무기력증을 느꼈고,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으나 무려 일곱 번이나 떨어지며 좌절한다. 당연히 신경이 예민해졌고, 아이에게 짜증이 늘었고,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자신의 삶의 전부였던 일과 가정에서 모두 실패했다고 생각하니, 우울함과 식욕부진에 시달렸고, 불면증이 심해져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회사에서 직무 교육으로 독서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강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뜨였다고 한다.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만 했고, 퇴근하자마자 당장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에 출근길 버스에서도, 점심시간에도 책장을 펼쳤고, 3 10개월 동안 꼬박 1천 권의 책을 읽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과연 독서를 통해서 어떻게 달라졌을까? 바로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지금까지 회사를 14년 동안 다녔지만, 한가했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하루 업무의 20% 이상은 계획하지 않은 일들이 우발적으로 생겼다. 매일 새로운 일이 생기고, 전에 없던 경우가 발생하는 게 우리가 전쟁을 벌이는 현장이다.

사실 대부분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의 핑계 중에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가 참 많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고 해서 시간이 남아 돌거나, 느긋하고 여유롭게 살고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책을 진짜 읽을 마음이 있다면, 없는 시간도 쪼개어서 읽게 된다는 사실이다. 나도 늘 쫓기듯이 정신 없이, 바쁘게 사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어떤 날은 종일 엉덩이 붙이고 제대로 앉지도 못할 만큼 시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밤 늦게라도, 혹은 새벽 일찍이라도 꼭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누가 숙제를 내 준 것도 아니고, 책을 읽는 다고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강제성은 전혀 없다. 그저 내가 좋아서, 책을 읽기 않는 시간들이 너무도 아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회사에서, 가정에서 두 가지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내느라 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던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도,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된 강연 하나로 이런 엄청난 깨달음을 얻고, 그걸 또 바로 실천했다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서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느냐의 문제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쌓은 사람들은 대부분 독서를 삶의 우선순위에 놓았다.

나폴레옹이나 오바마는 분명 우리보다 훨씬 바빴을 것이다. 하루 24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서 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조차 다른 일보다도 독서를 우선순위에 두고 책을 읽었다. 그만큼 독서는 다른 일보다 중요하다.

저자가 <1천 권 독서법>을 시작한 뒤 매일 책을 읽으면서,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는다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나도 사람들에게 많이 들었던 말들이라 공감이 되면서도, 그만큼 책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가깝지 않구나 싶어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매일 책을 읽을 정도로 시간이 돼요? 애 보기도 바쁘던데....."

"책 내용이 머릿속에 남긴 해요? 시간이 좀 걸려도 제대로 읽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에이, 거짓말하지 마세요. 어떻게 하루 한 권씩 책을 읽어요? 그냥 희망 사항이겠죠."

"시간이 정말 많은가 봐요. 저도 책 읽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요."

저자는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단번에 불식시킬 수 있는 자신만의 독서법을 소개하고 있다. 하루 한 권씩 지치지 않고 매일 읽는 법, 바쁜 와중에도 짬짬이 독서 시간 확보하는 법, 효율적인 독서를 보장하는 분위기 조성법, 내게 맞는 책 고르는 법, 독서 리스트와 응용 노트 활용법, 독서 권태기 극복법 등 대한민국 직장인에게 최적화된 실현 가능한 독서법 등등... 매일을 바쁘게 사는 사람들도 독서 시간을 확보해서 실천할 수 있는 실용적인 방안들을 제시한다.

하루 24시간을 분으로 환산하면 1,440분이다. 이 중 1%, 15분만 시간을 내면 한 달에 한두 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 더 여유를 가지고 4%, 1시간만 내면 일주일에 한두 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녀가 알려주는 짬짬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은 누구라도 알아보기 쉬울 정도로 자세하게 도표로 소개되어 있다. 이렇게까지 방법을 제시하는데도 시간이 없다는 말만 한다면, 당신은 아직 책을 읽을 마음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은가. 우선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시작이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이 책의 저자가 알려주는 대로, 제시하는 방법대로 따라하기만 해도 당신은 벌써 몇 권의 책을 읽게 될테니 말이다.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한 다음, 기록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저자는 알려준다. 그녀는 책을 읽은 뒤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그 내용을 기록한다고 한다. 첫 번째 방식은도서 평가표를 만드는 것이다. 책 읽은 날짜와 분야를 순서대로 정리하고, 만족도를 적어둔다. 두 번째 방식은독서 응용 노트이다. 내용과 느낀 점 등을 기록해서 언제든 활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세 번째 방법은나만의 서재 꾸미기자신이 좋아하는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책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책 읽는 기쁨은 배가 될 수 있다.

특히나 흥미로운 대목은 저자가 먼저 책을 읽기 시작했더니 남편과 아이도 따라서 책을 펼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어린 자녀가 있는 집에서는 아마 대부분의 부모들이 어떻게 하면 책을 읽게 만들 수 있을까 한번쯤 고민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부모가 하는 행동을 자연스레 따라하게 되는 것이 바로 아이들이다. 실제로 저자의 초등학교 2학년인 첫째는 학교 갈 때 읽을 책을 따로 챙겨가고, 남편도 내게 추천할 만한 책이 없는지 종종 묻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 받침 있는 단어는 읽지 못하는 여섯 살짜리 둘째도 형을 따라 책 읽기에 돌입했고 말이다. 이렇게 독서는 나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사는 가족들도 함께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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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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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라 페인이 우리에게 평가 없이 빈 종이와 마주하라고 말했던 그날, 그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절대 알 수 없을 것임을. 단순한 생각 같지만,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녀가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생각한다. 늘 생각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얕보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 자신을 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를.

 

오래 전에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소설을 읽으며 퉁명스럽고 무뚝뚝하지만,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여인 올리브에게 한 눈에 반했던 기억이 난다. 삶이란 수많은 순간들과 더 많은 관계들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삶은 선물이라는 걸, 그리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을 아는 거라고 말해주는 뭉클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첫번째 장편이었던 <에이미와 이저벨>을 거쳐, 이번에 만나게 되는 작품 <내이름은 루시 바턴>은 그 동안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우선 전작들에 비해 분량이 굉장히 얇은 편이고, 삼인칭이 아니라 일인칭 시점의 글이다. 게다가 마치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작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극중 화자는 오래 전에 자신이 구 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었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어지는 며칠 동안 어머니의 딸의 대화들은, 현재의 생각들과 과거의 기억들을 오가며 이어지는데,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기억의 조각들이 툭툭 던져 있는 듯한 구성이라 일반적인 소설의 서사를 기대했다면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의 구성 방식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글을 쓰는 방식과 같다는 점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형적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떠오른 장면들을수집해짤막하게 글로 옮긴 뒤 커다란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각 장면들의 연결성을 떠올리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그러니 사실은 조금 낯선 그녀의 이 작품이야말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라는 작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셈이다. 루시 바턴이라는 허구의 인물이 내는 목소리를 통해서 실제 작가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굉장히 매혹적이다.

 

시간은 늘 충분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내가 결혼생활에 안주하면 또다른 책,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책은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일리노이 주 앰개시-에는 가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 라고. 이것이 그 냉혹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루시 바턴이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건 맹장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는데, 갑작스럽게 열이 나기 시작했고, 음식을 넘길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난다. 병원의 어느 누구도 원인을 알 수 없었고, 그렇게 그녀는 오랜 시간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남편은 집안일로, 직장일로 바빠서 병원에 올 시간을 잘 내지 못했지만, 사실 병실의 풍경들을 견딜 수 없어 하기도 했다. 어린 아이들과 남편을 그리워하며 외롭게 지내던 어느 날, 그녀가 입원한 지 삼 주쯤 지났을 무렵 오래 연락을 끊고 지냈던 엄마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오랜 만에 듣는 애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그녀는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그렇게 엄마가 자신을 간병해줬던 닷새를 회상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엄마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고향 사람들의 사연 속에 루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그 시절의 추위와 배고픔과 외로움, 고향을 떠나고 싶어했던 마음과 동경했던 뉴욕에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자신의 인생들에 대해 돌아본다. 극중 화자인 ''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기억하고 돌아보면서 자신이 소설을 쓰게 된 이유와 경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것은 루시 바턴의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는 자신의 것이라고 말이다. 그녀는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한 고찰과 소설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그리고 소설을 쓰는 일 자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러니 이 작품은 허구의 인물인 루시 바턴의 이야기인 동시에 작가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이야기인 셈이다. 책이 그녀의 외로움을 덜어 주었고,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자신도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던 순간부터, 그녀가 글을 써나가고 작가가 되어 가는 과정의 편린들이 담백하게 그려진다.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 만들어지는 이 작품은 전작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모든 생은 선물과도 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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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우울 법의학 교실 시리즈 2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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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와 법의학자가 친해지는 건 상관없지만 상대를 잘 고르라고."

그 말은 역시 흘려 들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콤비란 건 말이지, 한쪽이 액셀러레이터라면 다른 한쪽은 브레이크 역할을 해야 해. 만약 둘이 동시에 액셀을 밟으면 어떻게 될까? 그야말로 폭주가 펼쳐지는 거지. 정확히 지금 너랑 그 선생이 딱 그 꼴이고."

 

전편에서 독단적이고 괴팍하기로 소문난 법의학계의 권위자 미쓰자키 교수와 자신은 시신을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는 미국인 조교수 캐시와 함께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에 합류한 마코토는 법의학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동안은 법의학을 죽은 자를 위한 학문, 범죄 수사에 이바지하는 학문이라고만 생각해왔었는데, 법의학이 살아 있는 이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죽은 자보다는 산 자, 부검보다는 치료라고 생각했던 사고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 이후로는 사법해부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출간된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 시리즈' 그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 정식 조교로 발령을 받게 된 마코토가 어엿한 법의학자로 성장해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모든 죽음에 부검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건 나에게 잘된 일이다. 사이타마 현경은 앞으로 현에서 발생한 자연사, 사고사에 모종의 음모가 있는지 의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내 이름은 '커렉터', 즉 교정자다.

마코토가 새로운 첫걸음을 내딛는 날, 법의학 교실을 찾아온 건 현경 형사부 고테가와 가즈야 형사. 그는 무뚝뚝한 말투에 투박한 매력을 발산하며 전편에서도 변사체 사법해부를 의뢰하느라 법의학 교실을 자주 드나들었던 인물이다. 마코토와 고테가와 티격태격하면서 사건을 해결하게 될 스토리가 시작부터 기대되었다. 그는 현경 홈페이지 게시판에 커렉터라는 이름으로 올라온 글에 대해 자문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그들은 그 글에 대해 경찰이나 법의학계 관계자가 벌인 장난 혹은 내부 고발쯤으로 치부하려 했지만, 차례로 올라오는 커렉터의 글은 모두 사인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들이라 마냥 무시할 수가 없다. 변사체, 자연사, 병사한 시신 등 다양한 사건, 사고에 대한 커렉터의 문제 제기는 의도를 종잡을 수 없고, 경찰서와 법의학 교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죽은 자의 마음을 헤아려 원통함을 풀어 주고 싶은 고테가와의 심정에는 백 퍼센트 동감한다. 또 경제적인 이유로 의사의 도움을 받는 환자와 받지 못하는 환자로 나뉘는 상황에도 강한 반발심이 들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 오로지 환자의 이익만 생각하며 어떤 의도적인 비행이나 해악은 범하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보지 않아도 줄줄 읊게 된 <히포크라테스 선서> 속 구절을 다시 떠올렸다. 죽은 자든 산 자든 똑같은 환자다. 그리고 환자인 이상, 경제적 이유 따위 상관없이 공평하게 대처해야 한다.

 

혹시 커렉터의 목적이 우리의 과로사가 아닐까라고 생각할 만큼 마코토는 불만을 토로한다. 커렉터의 의미심장한 글들 덕분에 법의학 교실의 부검 횟수가 나날이 늘어갔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분명 사법해부가 필요한 건도 있었지만, 자연사와 사고사 등 검시만으로도 충분한 건까지 포함돼 부검 요청은 갑절이 되었지만, 법의학 교실 인원은 단 세 사람뿐이었으니 말이다. 커렉터와의 대결 속에서 경찰과 법의학자들이 기댈 수 있는 아이러니하게도 유일한 단서는 '죽은 자의 목소리'뿐이었다. 전편에서 미쓰자키 교수는 살아 있는 인간은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지키기 위해, 조직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만, 시신은 오로지 진실만을 말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부검을 통해서 진실을 이야기하고, 각각의 사연들이 마지막에 하나의 진실로 이어지는 구성은 커렉터라는 존재로 인해 전편보다 더욱 흥미롭게 진행된다.

콘서트 도중 수많은 관중 앞에서 사고로 죽은 아이돌, 때아닌 무더위로 열중증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에 베란다에서 놀다 죽은 어린 아이, 화재로 불타 죽은 신흥 종교의 교주, 산책하다 갑자기 쓰러져 죽은 노인 등 다양한 죽음이 등장하는 가운데 커렉터라는 미스터리한 존재에 대한 의문도 점차 커져간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좌충우돌 활약하는 마코토와 고테가와 콤비의 활약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들의 관계가 시리즈 세 번째 정도 되면 또 어떻게 달라지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영미권의 법의학 미스터리가 그 완성도나 재미적인 면을 제외하더라도,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과 그 과정들 때문에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인데, 나카야마 시치리의 법의학 미스터리는 너무 술술 읽히고,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 시리즈' 가 앞으로 계속 이어지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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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 하나만 들어줘
다시 벨 지음, 노지양 옮김 / 현암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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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녀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던 걸까?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주 기본적인 것도 전혀 모르는데 그 사람을 과연 안다고 할 수 있을까? ............... 에밀리와 나누었던 모든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우리가 함께 보낸 그 모든 오후를 되감기해 보았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나? 내게 말하려 했지만 내가 듣지 못했던 것은 무엇인가?

교통사고로 남편과 남동생을 한꺼번에 잃고 싱글맘이 된 스테파니는 다섯 살 아들 마일스를 키우고 있다. 그녀는 전업주부이지만 파워블로거이기도 해 육아와 일상을 블로그에 올리며, 전 세계 엄마들과 소통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녀는 아들 마일스와 친구인 니키의 엄마 에밀리와 친하게 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에밀리가 연락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여느 때처럼 아들 니키를 잠깐 맡아 달라고 한 뒤, 그대로 연락 두절이 된 것이다. 에밀리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 밑에서 홍보 책임자로 일하고 있어 매우 바쁜 커리어 우먼이었지만, 늦어질 경우에는 언제나 전화나 문자로 아이를 챙기는 엄마였다. 예쁘고 날씬한 몸매에 값비싼 디자이너 의상을 걸치고 다니는 커리어 우먼이었지만, 충분히 아이를 사랑하고 책임감 있는 엄마이기도 했다. 그런데 말도 없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바쁜 업무 탓에 자주 출장으로 집을 비우곤 했던 에밀리의 남편 숀도 그 소식에 돌아오고,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여전히 에밀리의 행방은 알 수가 없다.

이야기는 에밀리가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에밀리가 사라지게 된 과정을 써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에밀리가 갑작스레 사라진 뒤 스테파니는 얼결에 그녀의 아들 니키를 맡아 돌보게 되고, 그녀의 남편 숀과 이야기를 나누고 걱정하며 점차 가까워진다. 스테파니는 에밀리가 사라지게 된 과정을 추적해 보기로 하고, 숀과 가까워지면서 그녀의 가정에 깊숙이 들어가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전혀 몰랐던 에밀리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스테파니는 에밀리와 그 동안 나누었던 모든 대화를 곱씹어 본다. 그들이 함께 보낸 그 모든 시간들을 떠올려 본다. 어떻게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이렇게까지 모를 수가 있을까? 그녀가 새롭게 알게 된 에밀리에 대한 모든 것들은 자신이 그 동안 알았던 그 친구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엄마가 된다는 건 충격이라는 말이었다. 아기를 안는 그 순간부터 아기에 대한 징글징글할 정도로 강력한 사랑이 치고 들어왔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나도 안다. 어떤 여자들은 그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기도 한다....엄마가 된다는 건 전기 충격을 받는 것이다. 결국 스테파니의 한심한 블로그를 하나의 부조리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 문장일 것이다.

누구나 가끔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의 진짜 모습을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마련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때로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으니까. 이는 내가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기대하는 바가 상대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스릴러 장르에 적용되는 법칙이 있다면 바로 이것 아닐까. 절대 그 누구도 믿지 말라.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을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할 때에는 대부분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 의한 것이니 말이다. 믿음과 의심 사이의 그 조그만 간격은 사실 종이의 앞면뒷면과 같다. 사소한 행동, 말투들이 쌓여 오해를 만들고, 견고하게 쌓인 세월을 넘어 믿음을 깨트린다. 사실 의심이란 씨앗은 단순하지만,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한번 시작된 의심은 절대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 사실을 알았던 순간으로부터 되돌아갈 수가 없다. 연인들의 헤어짐도, 친구들과의 다툼도, 부부 간의 신뢰가 깨어지는 것도 모두 단 한 순간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 쌓아온 신뢰와 구축된 관계들을 차례차례 부식시켜 바닥에 이르게 만드는 것은 각자 가지고 있는 비밀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는 어떤 사람을 절대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스테파니, 에밀리, 숀 모두 각자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는 세 파트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자의 1인칭 시점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파트가 바뀌면서 계속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시각이란, 그들이 숨기고 있는 비밀 만큼이나 매혹적이니 말이다. <나를 찾아줘> 이후로 심리 스릴러, 그 중에서도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도메스틱 스릴러 작품들이 엄청나게 출간되었다. 유사한 장르의 전개 방식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한 구성으로 진행이 되게 마련인데,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주인공을 파워블로거로 설정한 탓에 조금 더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실제 생활과 블로거를 통해서 글로 보여지는 것과의 차이에서 오는 반전 또한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 만큼이나 재미있고, 홀로 육아를 하며 생활을 꾸려가는 엄마의 소소한 일상들이 보여져 공감할 수 있는 대목들도 많고 말이다.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는 일상 속 사소함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얼마나 엄청난 폭풍으로 삶을 뒤흔들게 되는지, 마지막 페이지까지 손을 놓을 수 없는 긴장감 속에서 지켜본 것 같다. <나를 찾아줘> 만큼이나 재미있었던, 페이지 터너 스릴러가 아니었나 싶다. 출간 즉시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하는데, 스크린에서 펼쳐지게 될 작품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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