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벌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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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울한 미스터리나 서스펜스를 쓰는 소설가 안자이 도모야는 아내인 유메코와 함께 산장에서 신작 <어둠의 여인>의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서 와인을 마시다 잠이 든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묵직한 두통을 느끼며 일어난다. 이상한 건 자신은 선천적으로 알콜에 강해서 지금까지는 숙취에 시달린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목욕가운은 아내의 것이었는데, 아내는 섬세하다 못해 강박관념에 가까운 성격의 소유자라 목욕가운을 바닥에 내던져 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때, 그는 어디선가 곤충의 날갯소리를 듣는다. 설마 싶었지만, 소리가 들리는 창문으로 다가가 두꺼운 커튼을 열자 불쾌한 날갯소리를 내는 말벌이 보인다. 그는 의사의 경고를 떠올리며 온몸에 소름이 끼쳐 왔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 국어사전에 쓰여 있다. 시험적으로 식재(재앙을 막음)와 즉사라는 단어를 찾아봐라.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단어 사이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속재와 속산이다.

안자이 도모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신의 날갯소리>의 한 구절이다.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하고 실제로 사전을 찾아보면 그 사이에 적새라든지 족살 등 다른 단어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 비춰보니 기묘하리만큼 암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자이 도모야가 말벌을 보며 그렇게나 당황했던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는데, 3년 전에 우연히 말벌에 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던 거다. 퇴원할 때 의사는 벌침은 처음에 쏘였을 때보다 두 번째 쏘였을 때가 훨씬 위험하다며, 처치가 늦으면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내라면 몰라도 이렇게 눈 쌓인 산 위에 아직 활동 중인 벌의 둥지가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긴 했다. 거기다 외부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모두 차단된 상태였다. 휴대전화 충전기도 보이지 않았고, 컴퓨터의 전원 케이블도 없어졌고, 팩스기 배선 또한 이미 손을 본 상태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누군가 그를 함정에 빠뜨린 거라는 걸 깨달으며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바로 아내인 유메코라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범인을 찾을 때가 아니라, 일단 말벌로 부터 자신의 안전을 확보해야만 했다. 벌에 쏘일 경우를 대비해 준비한 간이형 주사기 에피펜마저 보이지 않았고, 그는 그야말로 말벌과의 사투를 벌여야만 한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초겨울, 해발고도 1,000미터가 넘는 곳에 있는 산장에서 혼자 말벌과의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모습이란 마치 악당과 대결을 하는 것만큼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쓰고 싶던 내용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예전에 생각하던 표현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구상하던 스토리가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는 그 녀석을 모델로 한 등장인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쓴 작품이다.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분신이 쓴 것이 아닐까?

거의 산장에서 온갖 방법으로 말벌을 피하고, 쫓고, 죽이려고 하는 인물의 모습에 대한 묘사만 백여 페이지 넘게 이어지지만,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 없이 전개된다는 점이 기시 유스케만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인간 내면의 공포에 대한 감정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이 작품은 말벌이라는 독특한 소재만으로 매우 간결하게 스토리가 진행되지만, 그럼에도 많은 것을 전달해주고 있다. 극중 미스터리 작가인 안자이 도모야와 동화 작가인 아내 유메코의 작품이 종종 인용되는데, 아마도 작가는 그런 부분들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미스터리에서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은, 마치 서술트릭처럼 독자들을 화자가 하는 말에 완전히 감정 이입하게 만든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최근에 화제가 되었던 몇몇 미스터리 물에서처럼 '믿을 수 없는 화자'가 등장하게 되기도 하고, 서술트릭에서처럼 독자를 당황시키는 '반전'이 출현하게 되기도 한다. 이 작품 역시 별 생각 없이 이야기를 따라 가다 보면 맞닥뜨리게 되는 결말은 과연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라 매우 흥미로웠다. 아무래도 기시 유스케가 공포를 바탕으로 한 심리 스릴러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작가라서 더욱 독자들이 깜박 속아넘어가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굉장히 짧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역시 기시 유스케의 작품답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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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너리스 1
엘리너 캐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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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균형을 상징하는 천칭자리이다. 연애나 친구관계, 금전적인 면 등 모든 면에서 밸런스를 유지하고, 무슨 일이든 극단적으로 달리는 일이 없으며, 대부분 냉정하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단다. 뭐 어느 정도는 맞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누군가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을 설명해준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재미로 운세를 보거나, 별자리 점을 보는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12개의 별자리로 각각의 성격을 규정해서 캐릭터를 만든다면 어떨까. 엘리너 캐턴의 이 작품 <루미너리스>는 바로 그러한 매혹적인 상상을 정교하게 건물로 구축한 소설이다. 2013년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그녀는 무려 스물여덟의 나이로 47년 맨부커상 역사상 최연소 작가로 등극하게 된다. 게다가 원서 832페이지로 역대 가장 긴 작품으로도 맨부커상의 기록을 갱신한다. 국내 번역본 역시 두 권으로 나뉘어 있긴 하지만 분량이 만만치 않다. 페이지를 빠르게 주르륵 넘겨서 읽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꺼운 분량은 이 책을 완독하는데 굉장한 부담을 주고 있다. 자고로 재미있는 책은 기본 500페이지 이상의 두툼한 두께를 자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이지만, 그런 나에게도 이 책은 만만치가 않았으니 말이다.

활동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수수께끼를 해결해주는 임무를 맡으면 처음에는 기꺼이 전심전력을 다해 몰두하는 법이다. 하지만 토마스 발퍼의 에너지는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가 스스로 계획했던 것이 아닌 경우에는 오래가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상상력은 조급함으로 바뀌고, 낙관주의는 넘치는 게으름으로 변해버렸다. 그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가 그것이 더 이상 새롭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곧장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모든 일을 한꺼번에 시작하는 타입이었다.

1866년 뉴질랜드의 금광 호키티가 마을, 무디는 갓스피드호를 타고 금을 찾아 이곳에 도착하게 된다. 크라운 호텔에 묵게 된 그는 우연히 호텔 흡연실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열두 명의 남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항해 중에 폭풍을 만나고 배 안의 화물칸에서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그 덕에 두려움과 걱정으로 내향적으로 변했고, 그답지 않게 방 안의 분위기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이 이곳의 은밀한 회의 같은 것을 방해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토머스 발퍼를 통해서 그는 그곳에 모인 열두 명의 남자들이 특정한 의문과 그것으로 인한 불안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어떤 창녀, 그리고 젊은 갑부의 행방불명, 살해된 부랑자의 집에서 발견된 어마어마한 양의 금. 무디는 자신이 타고 왔던 갓스피드호의 선장 프랜시스 카버가 의문의 사건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열두 명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듣게 된다.

각양각색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열두 명의 시점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무려 500여 페이지 가깝게 들려지는데, 정리되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펼쳐지고 있어 몰입을 하려면 꽤나 애를 써야만 한다. 1권의 마지막 즈음에서야 토머스 발퍼의 이야기를 끝으로 무디가 스스로 사건을 정리하는 식으로 독자들의 편의를 봐주고는 있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려면 꽤나 인내심이 필요하다. 앨리너 캐턴은화자의 역할을 하는 무디가수성을 대표하며, 따라서 수성이 관찰되는 시기에 맞춰 그가 이야기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도록 구성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주요 인물인 12명의 남자는 각각 황도 12궁을 대표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대표하는 별자리에 맞는 성격과 특성을 지니고, 나머지 인물들은 행성에 속해 이들 사이를 넘나든다. 물론 각각의 캐릭터가 모두 핵심 역할을 수행하며 천체의 흐름에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걸 체감하려면 치열한 조사와 고민을 했을 작가만큼, 독자 역시 메모를 하거나, 각각의 비유와 상징들을 구분해서 기억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필요하긴 하다.

양자리는 집단적인 관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황소자리는 주관적인 태도를 단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쌍둥이자리의 규칙은 배타적이고, 게자리는 원인을 찾고, 사자자리는 목적을 추구하며, 처녀자리는 계획을 바란다. 하지만 이것들은 제각기 진행되는 일들일 뿐이다. 12궁의 두 번째 행동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천칭자리는 개념으로, 전갈자리는 재능으로, 궁수자리는 목소리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염소자리에서 우리는 기억을 얻고, 물병자리에서는 통찰력을 얻는다. 그리고 12궁에서 가장 오래되고 마지막을 점하는 물고기자리에 와서야 일종의 자아를 얻어 완전해진다.

, 1권보다 조금 더 두꺼운 페이지를 자랑하는 2권에 이르면, 이야기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배경 설명이 계속 이어져 다소 장황하고 집중하기 어려웠던 1권에 비해, 2권은 본격적으로 사건이 시작되고 그에 따른 반전이 등장해 숨겨진 진실들이 드러나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인물들의 관계와 그들의 행동 이면에 있는 음모들이 마치 폭죽처럼 터지기 시작한다. 각각의 장마다 구분되어 있는 별자리의 특성을 인물들과 결부시켜 보면, 이 작품의 이야기는 더욱 매혹적으로 변신한다. 크게 한몫 잡아보겠다는 생각으로 금을 찾아 모인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점에서는 현대의 우리와 닮아 있다.

제목인루미너리스luminaries’는 점성술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두 별인 해와 달을 뜻한다고 한다. 별들이 가장 찬란하게 그 빛을 발한 뒤 소멸하는 것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좇는 것도 결국은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마는 허황된 꿈 혹은 찰나의 행복에 불과하다. 하지만 벼랑 끝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그 순간이나 바닥 끝까지 추락해 스스로의 삶에서 밀려나 있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일지라도 붙들고 있을 수 있는 희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그들의 절실함은 누군가의 탐욕으로 핏빛으로 물들고 말지만 말이다. 별이 쏟아지는 것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그들 별자리에 숨겨져 있는 의미가 궁금해 본 적이 있다면, 그렇다면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당신에게 그 숨겨진 비밀을 제공할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해도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은 작품이지만, 이 두터운 책을 시작하려면 어느 정도 각오는 필요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 속에서 반드시 길을 잃어버리고 말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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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09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권 내용이 지루해서 한번은 이 소설을 선정한 맨부커상 심사위원들의 생각을 의심했습니다. ㅎㅎㅎ

피오나 2016-03-09 14:32   좋아요 0 | URL
하핫.저도 너무 지루해서..페이지가 안넘어가더라고요. 읽는데 한참 걸렸답니다ㅋㅋㅋ
 
캐롤 에디션 D(desire) 9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그책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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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디자이너를 꿈꾸는 열아홉의 테레즈는 백화점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는 중이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인형을 사주려는 사람들을 상대하던 어느 날,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은 그렇게 운명처럼 그녀에게 각인된다. 테레즈는 일상이 불안했고, 자신의 꿈에 대해 자신이 없었으며, 항상 갈팡질팡했고, 스스로의 삶이 처량했다. 게다가 연인인 리처드와 만난 지 열 달 정도 되었지만, 그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그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와 사랑에 빠지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캐롤은 남편과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오다 이혼을 앞두고 있었고, 딸의 양육권 관련해서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그녀 역시 삶에 아무런 기쁨도 찾을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렇게 생에 지치고 외로웠던 두 여자가, 한 눈에 상대를 알아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맞닿았다. 테레즈는 상자를 열다가 고개를 들었고, 때마침 여인도 고개를 돌리는 순간 두 시선이 부딪쳤다. 여인은 늘씬한 몸매에 금발이었으며 넉넉한 모피 코트를 걸친 모습이 우아했다. 한 손을 허리에 대고 있어서 모피 코트 앞섶이 벌어졌다. 눈동자에 붙들린 테레즈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앞에 있는 손님이 재차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테레즈는 가만히 선 채 벙어리가 되었다......테레즈는 저 여인이 분명 자기에게 올 것임을 직감했다. 여인이 서서히 카운터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테레즈의 심장은 멈춰 섰던 순간을 만회하려는 듯 쿵쾅거렸다. 여인이 점점 다가오자 테레즈의 얼굴이 붉어졌다.

보수적인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여자와 여자의 로맨스를 그린 작품으로 보자면 상당히 파격적이지만, 사실 그저 한 존재와 다른 존재가 서로를 알아보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으로 이 작품을 보자면 여느 연애 소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무미건조하고 확신 없는 삶에 지쳐 있는 테레즈와 무기력한 결혼 생활에 지쳐 있는 캐롤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꼈고, 재고 따지고 할 것도 없이 가까워진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미국 서부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캐롤의 남편이 고용한 사설탐정이 그들을 쫓아오고, 그는 캐롤에게 딸과 테레즈 중 한 사람을 택하라며 위협하고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사람들의 이해를 얻지 못한 채 위기를 맞이한다.

테레즈와 캐롤이 서로를 알아가는 초반의 분위기는, 남녀가 미묘한 떨림을 간직한 채 서로를 탐색하는 그것과 매우 비슷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한참 이 책을 읽다 보면 굳이 이걸 레즈비언 소설로 구분 지어야 하나 의문이 들만큼, 그저 사랑에 빠진 인물들의 심리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이 하필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것만 다를 뿐, 테레즈의 사랑 또한 다른 이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것을 다르게 보는 이들의 사회적 시선을 완전히 배재할 수는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그럼 부끄러워할 일인가요?"

"맞아, 너도 알잖아." 캐롤은 또렷하게 말했다. "이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건 혐오스러운 일이야."

캐롤의 말에 테레즈는 차마 웃을 수도 없었다. "당신은 그걸 믿지 않는군요."

"사람들은 하지네 가족하고 비슷해."

"그들이 이 세상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들만으로도 차고 넘쳐. 너도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내 말은, 너더러 지금 당장 누굴 사랑할지 결정하라는 소리가 아니야." 캐롤은 테레즈를 쳐다보았다. 이제 캐롤의 눈동자에서 미소가 천천히 차오르며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내 말은 이 세상에서 남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책임감이란 게 말이지, 그게 네 것이 아닐 수도 있어. 지금은 안 그래도 돼. 네가 뉴욕에서 알아야 할 나쁜 사람이 바로 나거든. 왜냐, 내가 널 마음껏 즐기고 자라지 못하게 막을 테니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의 집필을 막 끝내고, 돈에 쪼들리는 상황이라 몇 푼이라도 벌려고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 대형 백화점에서 판매 사원으로 일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시끄럽고 정신 없는 장난감 코너로 배치되어 인형 카운터에서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아침 모피 코트를 걸친 금발 여성을 만나게 된다. 여느 때와 별 다를 것 없는 판매 과정을 거쳐 여자는 돈을 지불하고 떠났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환영을 본 듯 기분이 들떴으며, 머릿속이 이상하고 어질 해서 기절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퇴근을 한 후 혼자 사는 아파트로 돌아가 그날 저녁, 주제를 정해 플롯을 짜고 여덟 쪽 정도 되는 스토리가 느닷없이 펜 끝에서 줄줄 흘러 나오게 된다.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시간 동안 <캐롤>의 줄거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주로 서스센프 소설을 썼던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레즈비언 소설 작가라는 딱지가 붙을 까봐 필명으로 이 책을 내기로 했고, <소금의 값>으로 출간된 이 작품은 당시 엄청난 흥행에 성공한다. 책이 출간된 1950년대의 미국에서 당시 동성애자들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 대가를 치뤄야 했고, 외롭고 비참하게 단절된 삶을 살아야 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동성애 소설 중에서 처음으로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작품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후 동성애 소설은 다시 쓰지 않았고,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의 대가가 쓴 자전적 소설이자 유일한 로맨스 소설로 남게 된다.

이 책이 출간된 지 7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동성애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편견은 존재한다.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는 나라가 늘고, 동성애를 다룬 작품들도 늘어나고, 당당히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말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동명 영화가 온갖 영화제를 휩쓸고, 사람들의 호평을 받고 있지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 또한 영화만큼이나 아름답다. 물론 케이트 블란쳇의 캐롤과 루니 마라의 테레즈는 원작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매력적이고, 영화가 그려내지 못하는 미세한 감정의 떨림들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단한 문장들로 힘을 발한다. 인생에 단 한번, 당신의 그 사람을 만나게 된 순간을 가지고 있다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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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타인들 속에서/조 월튼 (지은이), 김민혜 (옮긴이) | 아작 |

 

만약 내 어머니가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악한 마녀라면? 어머니의 음모를 저지하려다가, 쌍둥이 자매를 잃고 불구의 몸까지 된 열다섯 살 소녀는 홀로 본 적도 없는 아버지를 찾아간다. 아버지에겐 세 명의 쌍둥이 고모가 있어, 소녀를 평범한 아이로 만들어 버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SF와 판타지 소설에 탐닉하는 이 소녀의 이야기는 짧은 시놉만으로도 궁금증을 마구 유발시키는 작품이다.

 

 

 

 

 

피에로들의 집/윤대녕 (지은이) | 문학동네 |

 

윤대녕 작가의 무려 11년만의 장편 소설이다. 그는 수년 전부터 ‘도시 난민’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해왔다고 한다. 가족의 해체, 타인과의 유대 붕괴 등을 비롯해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을 것 같다.

 

 

 

 

 

 

 

 

 

바람의 안쪽 | 밀로라드 파비치 (지은이), 김동원 (옮긴이) | 이리 |

 

그리스 신화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전설과 베오그라드를 배경으로 두 연인의 이야기가 나란히 펼쳐진다. 헤로의 이야기는 20세기 초 베오그라드와 프라하를 배경으로, 레안드로스의 이야기는 17세기 남동부 유럽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신화 속 전설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하는데, 궁금한 작품이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ㅣ이기호 (지은이), 박선경 (그림) | 마음산책 |

 

웃고 싶은가, 울고 싶은가, 그럼 ‘이기호’를 읽으면 된다(소설가 박범신)", "이기호의 소설에는 심장 박동 소리가 난다(시인 함민복)"와 같은 평에 부응하는 40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부담없고 짧지만, 웃을 수 있고 울수도 있는 그런 소설을 보고 싶다.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ㅣ모신 하미드 (지은이) |

안종설 (옮긴이) | 문학수첩 |

 

제목 때문에 당연히 자기 계발서인줄 알았으나 소설이란다. 자기계발서를 유쾌하게 비판하는 글로 각 장이 시작되는 '소설'이라는데, 제목만큼이나 도발적이고 거침없는 글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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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로키언
그레이엄 무어 지음, 이재경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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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런 장면을 상상해봐요. 두꺼운 유리창을 때리며 비가 마구 쏟아져요. 창 밖 베이커 가의 가스등 불빛은 너무 약해서 보도에도 못 미치고, 공기 중에 맴도는 안개 때문에 노란 불빛만 어슴푸레 빛나요. 음침한 구석마다, 어두운 방마다 미스터리가 바람처럼 일어요. 그리고 한 남자가 그 어둑하고 안개 낀 세상으로 걸어 나가죠. 남자는 소매의 마름질만 보고 상대의 인생사를 알아맞혀요. 지력과 담배의 힘만으로 답답한 어둠에 불을 밝히고요. , 이런 게 낭만이 아니면 어떤 게 낭만이죠?

사실, 홈스가 살았던 1895년의 런던에는 윤락녀가 이십만 명에 달했고 매독이 만연했으며, 큰길마다 배설물이 널렸고, 인종차별적인 문화와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성차별이 만연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백 년 전의 영국을 현재보다 훨씬 더 친숙하게 여기며, 그 시대를 낭만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셜로키언들이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셜로키언을 자처하며 셜록 홈즈와 아서 코난 도일에 대한 모든 자료를 모으고 탐구하는 작업에 매진해 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레이엄 무어의 <셜로키언>은 바로 현실의 그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유명하지만 지독하게 괴팍한 남자, 이야기 속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이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실존 인물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남자. 바로 셜록 홈즈. 하지만 이렇게 유명한 캐릭터에 비해 바로 그 인물을 창조한 작가 코난 도일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그리 많은 것들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실제로 의사였던 그는 한평생 대단한 역사 소설을 쓰고 싶었으나, 출판사와 독자들이 그에게 원했던 것은 대중적인 탐정 소설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대충 써낸 것이 바로 셜록 홈즈였다고 한다. 의사로서 수입이 신통치 않아 시간이나 때우고자 시작했던 그 작품에게 대중이 열광하기 시작하자, 그는 사람들이 어째서 이따위 소설을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음울하고 까칠한 냉혈한 홈스는 그가 애착을 느끼기에는 너무 싸늘하고 너무 무심하기도 했고 말이다. 결국 그는 홈스가 세상에서 제일 역겹다며, 자신이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가 자신을 죽였을 거라고 분노하며 작품 속에서 홈스를 죽여 버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홈스가 실존인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도일을 살인자 취급하며 허구의 인물을 위한 부고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한다. 독자들의 항의와 주변 사람들의 핍박때문에, 혹은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코난 도일은 결국 홈스를 살려내기에 이른다. 모리어티와의 결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홈즈가 몸을 피해 3년간 은신했던 것으로 이야기를 설정해 다시 셜록 홈스 시리즈가 부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셜록 홈즈의 공백기에 대한 이야기가 전 세계 셜로키언들의 무수한 상상력을 자극했고, 이 작품 역시 그에 대한 아주 매력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결국 그럴 줄 알았지! 다시 살려낼 거죠?"

"누구를 말입니까?"

"셜록 홈스요!" 남자가 계단 꼭대기에서 몸을 돌려 아서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위층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남자를 후광처럼 에워쌌다.

"아무렴, 그럴 때가 됐죠. 홈스는 끝내주는 마약이었어요. 고달픈 하루를 버티는 데 그만한 낙도 없었지. 가족처럼 그립다니까." 남자가 낄낄 웃었다. "막말로 가족보다 낫지."

1893 8월의 어느 날, 코난 도일은 그 동안 벼르고 벼르던 일을 시작한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도 모르게 살짝 킬킬대기까지 하면서, 램프 불빛 하나에 의지하여 셜록 홈스를 죽인 것이다. 입술에는 살인의 달콤함이 느껴졌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를 느끼며 행복한 기분에 젖어든다. 그렇게 셜록 홈스가 죽은 지 칠 년이 흐른 뒤, 사람들은 여전히 홈스에 대해 쓰고, 홈스를 논하고, 홈스를 그리워하고, 홈스 이야기가 실렸던 잡지사마다 편재를 보내 그의 귀환을 애걸했다. 그리고 어느 날, 소포로 위장한 폭탄이 배달되는데 폭탄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에게 충격을 주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경찰은 폭탄이 그를 살해할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다며 전력을 다해 범인을 잡겠다는 말 뿐, 실제로 심각하게 수사에 착수하지는 않았다. 진지하지 못한 경찰의 행동에 화가 난 아서는 자신이 직접 조사를 하겠다고 나서고, 폭탄과 함께 온 편지에 있던 죽은 여성에 대한 기사를 추적하다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이 스무 편도 넘는 이야기 속에서 떠벌렸던 수사 방법을 실제 사건에도 적용하면서, 아서가 탐정 역할 특유의 지적 허세를 어느 정도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 경찰청에서 사건 기록을 뒤적이던 날에 비하면 이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스릴 있었던 것이다. 혼자 힘으로 실마리를 잡아내는 기분도 짜릿했지만, 아직 안개 속을 헤매는 상대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기분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직접 수사에 뛰어 들게 되면서, 과연 탐정에게는 청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갈수록 홈스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허구의 이야기로 단서 퍼즐과 허를 찌르는 반전을 구상하고 미스터리 플롯을 짜는 것과 현실에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가 그 동안 주장했던 주장하는 추리의 과학, 즉 인간사의 가장 어두운 이면을 이성의 힘으로 밝히는 능력이 저속한 속임수로 추락할 판이었다. 그가 자신이 소설에 썼던 그 수사 방법이 실제 사건에도 적용되는 게 아니라면 그 모든 것들이 싸구려 거짓말, 반 푼어치도 안 되는 쓰레기가 되어 버린 다는 것을 체감하면서 아서와 홈스는 이제 운명 공동체였다. 둘 다 사기꾼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해럴드는 셜록 홈스를 믿었다. 물론 홈스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다. 셜록 홈스를 믿는다는 게 그를 실존 인물로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홈스 이야기가 주장하는 바를 믿었다. 이성의 힘을 믿었고 추리라는 정밀과학을 믿었다. 셜록 홈스는 그걸 할 줄 알았다.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어. 해럴드는 생각했다.

1900년대의 아서 코난 도일에 이어 이야기는 2010년대의 셜로키언 해럴드 화이트의 현재 이야기로 진행된다.  그는 지금 셜록 홈스 연구 단체 중에서도 세계 제일로 꼽히는 스트리트 이레귤러스 회원으로 선정되어 단체에 입회하는 중이다. 스물 아홉의 그는 짧은 연구 경력에 회원과 특별히 초대받은 사람만 참석할 수 있는 이레귤러스의 만찬 초대 한 번 만에 회원 자격을 얻은 첫 번째 인물이었다. 열네 살때부터 셜록 홈스에 빠져 프린스턴 대학교 졸업식에도 자랑스럽게 디어스토커를 쓰고 갔을 정도로 그의 홈스 사랑은 꾸준했다. 수백 개의 셜로키언 단체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가장 권위 있고 가장 들어가기 어려운 단체인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스의 신입 회원이 된 그는 오래도록 원하던 것을 얻은 이 순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이날 밤 모든 회원들의 관심은 코난 도일이 죽은 후 행방불명 되었던 한 권의 일기였다. '마침내 발견된 사라진 일기'에 대해 홈스 권위자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알렉스가 다음 날 컨벤션에서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는 호텔방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모두가 기다린 사라진 일기는 흔적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피비린내 나는 살인 사건 이야기는 수없이 읽었지만 시체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던 해럴드는 현장에서 자신도 모르게 현장을 수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셜록 홈스라면 어떻게 할까요?" 해럴드가 물었다. 멍했지만 진지했다. 그는 알고 싶었다. 가능한 일인지 알고 싶었다.

"홈스라면 책 속으로 도로 기어들어가겠지. 홈스는 잉크와 소나무 펄프니까."

"홈스가 실존 인물이고 그의 이야기가 실화라면, 그럼 홈스는 어떻게 할까요? 해럴드는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다.

그는 홈스가 사건 현장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을 떠올리고, 시체에 다가가 자세히 살피기 시작한다. 경찰이 와서 현장을 엉망으로 만들기 전에 호텔 방을 조사해야겠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보더라도 현재 경찰의 살인 사건 해결률보다 홈스가 압도적으로 월등하니까. 지금 과학 수사대에다 정전기식 지문 추출법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 사건 해결률은 60퍼센트밖에 안되니 말이다. 그는 도난 된 '사라진 일기'와 살인사건에 대해서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셜록 홈스의 방식'으로 해결해보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해럴드가 이 일에 뛰어든 것이 살해된 알렉스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시야 너머에, 컴컴한 구름을 지나 밝은 창공에 엄청난 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정의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미스터리'를 풀고 싶었던 자신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알렉스의 이런 점이 매우, 셜록 홈스와 닮아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그의 주변 다른 셜로키언들은 이건 추리 소설이 아니고 현실이라고 그를 걱정하거나, 한심하게 생각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를 왜 사랑하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처럼, 그가 홈스를 사랑하는 이유도 설명하기 막막했다. “문제에 해답이 존재한다는 개념이 좋아서요. 홈스 이야기를 포함해서 그게 모든 추리소설의 매력이에요. 추리소설 속의 세상은 따져볼 수 있는 세상이에요. 모든 문제에 해답이 있는 세상이죠. 똑똑하면 인과 관계를 밝힐 수 있는 곳이에요

그레이엄 무어의 번뜩이는 상상력은 100년의 시간을 왕복하면서 과거의 코난 도일과 현재의 셜로키언이 추적하는 각각의 살인 사건을 전혀 별개의 이야기로 진행시키다 교묘하게 만나도록 만들어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 중 상당수는 실제로는 없었던 일이고, 등장하는 인물 중 상당수는 가공의 인물이다. 하지만 실존 인물들도 다수 등장하며, 엄연한 사실과 사실 가능성이 있는 일들과 100퍼센트의 허구가 섞여 있다. 코난 도일이 작고한 뒤 그의 유품 중에서 일부가 유실되었고, 그중에 사라진 일기 한 권이 있었다. 그리고 2004년 저명한 코난 도일 연구가가 사라진 문서를 발견했다고 발표했고, 그는 지인들에게 자신의 신변이 위험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그는 자택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아직까지도 미제 사건으로 남겨져 있다. 그의 죽음으로 전세계 셜로키언들은 살인자를 찾기 시작했고, 그의 죽음에 대한 그럴듯한 이론들이 속속 대두했다. 그리고 이 작품에 나오는 코난 도일의 생애에 관한 정보 모두 사실이며, 그의 지인으로 등장하는 작가 브램 스토커도 최대한 실제에 충실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렇게 실제와 허구와 매력적으로 얽혀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한 것이다.

이 작품은 물론 셜록 홈즈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셜록 홈즈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상관없을 만큼 흥미로운 작품이기도 하다. 내 인생 최초의 미스터리 소설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였다. 초등학생이었지만 지칠 줄 모르는 독자이기도 했던 나는, 셜록 홈스를 만나고 나서 한동안 다른 소설은 거의 읽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문학의 비현실성에서 현실로 걸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날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지만, 나에게 셜록 홈스란 절대 사라질 수 없는 존재이다.

당신은 셜록 홈즈 외에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살아 있는 캐릭터를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홈즈를 소설 속 인물이 아니라 형체를 갖추고 있는 실제 인간처럼 느낀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다면, 그레이엄 무어의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한다. 1887년경부터 무려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왜 아직도 홈스 이야기가 결코 끝나지 않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도 이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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