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보다 따뜻한
와일리 캐시 지음, 홍지로 옮김 / 네버모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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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희는 그런 건 안 믿어서요. 저희는 기독교 가정을 꾸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라일 아주머니. 그런 옛날 방식은 믿지 않아서요. 옳지 않아 보이네요."

 

"옳지 않아 보인다고? 너 태어났을 때 네 궁둥이 때려준 게 누군데?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떠하냐'가 중요한 거야. 나 같으면 내가 스토브에 물 끓이는 동안 저기 눈밭에 구멍이나 파겠다."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의 작은 마을, 마셜의 외곽, 그곳은 목사 챔블리스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믿음만 있으면 뱀을 집어 올리고 독을 마시고 불을 얼굴 앞에 들어 올려 화상을 입는지 시험하는 등 무모한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중 많은 수가 화상을 입고 중독되었지만, 아프거나 다치더라도 의사를 찾아가겠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성경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극단적 기독교 근본주의 교회에서 신처럼 행세하는 목사와 맹목적으로 믿는 신도들. 그곳에서는 오래 전 그 말도 안 되는 예배로 인해 한 사람이 죽는 사고가 있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간이 흐른다. 그렇게 11년 뒤, 또 한 소년이 교회에서 진행된 예배 과정에서 죽게 되고 그것은 과거에 벌어졌던 일들마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마을의 비극이 시작된다.

이야기는 세 명의 각기 다른 화자를 통해 들려진다. 노부인 애들레이드 라일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목사 챔블리스 맞섰던 사람이다. 그녀는 챔블리스가 마을에 온 뒤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아이들에게도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녀는 챔블리스에게 그가 하는 일이 잘못됐다고 말하며 교회를 나왔고, 그로 인해 거의 평생을 간직해온 친구들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10년 동안 다시는 교회에 발을 들이지 않았지만, 그 시간은 챔블리스를 조금도 바꿔놓지 못한 채, 다만 그를 더 용감하고 무모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마약에 매달리듯 종교에 매달리곤 하며, 한 번 붙잡은 종교는 놓으려 들지 않으며 살아왔다. 마치 종교가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것만 같아서, 종교를 가진 뒤에는 이 산간벽지의 작은 교회들이 시키는 짓은 무엇이든 하려 들었고 말이다. 결국 사람들은 완전히 달라져 신앙 때문에 서로를 죽이고, 자기 아이들을 내다 버리고, 남편과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우고, 이루었을 때만큼이나 빠르게 가정을 무너뜨리게 된 것이다.

 

"결백하다고 생각했으면서 왜 죽인 거예요?" 내가 물었다.

"그야, 그 애가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 있었으니까. 때로는 그것만으로도 죽을 이유가 된단다." 고모할머니가 말했다. 그리고 지금, 교회 안에서 크리스토퍼에게 일어난 일을 떠올리는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한다.

두 번째 화자는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아홉 살 소년 제스이다. 어느 날 자폐증을 앓으며 전혀 말을 하지 않는 제스의 형 스텀프를 치료하겠다며 엄마가 교회로 데려가면서 그 모든 일이 시작된다. 제스는 어른들이 엿보지 말라고 했지만, 호기심에 단짝 친구인 조 빌과 함께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엿보러 간다. 그곳에서는 말 못하는 스텀프를 신앙의 힘으로 치유하겠다며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무서운 광경에 겁이 나 숲으로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얼마 뒤, 형 스텀프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오게 된다. 세 번째 화자는 마을의 보안관 클렘 베어필드이다. 그는 목사 챔블리스를 오랫동안 주시해왔지만, 그 동안은 애써 무시해왔다. 하지만 스텀프의 죽음으로 인해 그는 챔블리스와 정면으로 대립하게 된다. 아들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목사에게 의지하는 엄마 줄리, 슬픔과 분노로 폭발하기 직전의 아빠 벤 그리고 오랜만에 마셜로 돌아온 할아버지 지미의 위태로운 관계, 그리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만 제스의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간다.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잘못된 신앙이란 무지와도 같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던 작품이었다. 사이코패스 살인자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이런 보통 사람들의 광기가 아닐까. 집단이 휘두르는 신앙에의 맹목적인 믿음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광기의 일종이다. 와일리 캐시는 이 비극을 소년의 성장담을 통해 그려내면서, 아름답고, 담백하게 그려낸다. 코맥 매카시가 다시 쓴 <앵무새 죽이기>를 읽는 것 같다는 엄청난 평이 자연스레 수긍이 될 수밖에 없는, 대단한 데뷔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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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린다 작가정신 시그림책
함민복 지음, 한성옥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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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시를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 나만 해도 벌써 이 계절에 시집을 몇 편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시 초보자인 내가 느끼기에 소설, 에세이보다 시가 좋은 이유는 바로 '여백'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말의 빈자리, 풍경의 테두리, 단어의 부재, 그 속에서 자유롭게 해석하고 상상할 수 있는 자유.

특히나 이번에 만난 책은 내가 사랑하는 그 '여백'이 아주 극대화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름하여 '시그림책' 이란다. 시인 함민복의 「흔들린다」와 우리나라 1세대 그림책 작가 한성옥의 컬래버레이션이다.

집에 그늘이 너무 크게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
참죽나무 균형 살피며 가지 먼저 베어 내려오는
익선이 형이 아슬아슬하다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장석주 시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시인들은 말을 모으는 자들이 아니라, 말을 버려서 의미의 부재에 이르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의 바닥에 닿으려고 말을 지우고 빈자리를 만들면, 그 말의 빈자리에 시가 들어선다"고. 이 말만큼 시를 간결하고도 핵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와닿았던 말이었다. 함민복 시인은 “시인은 삶을 옮기는 번역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시는 자본주의 시대에 소외된 개인의 삶을 육화해 가난을 일으켜 세우는 긍정의 힘을 노래해 왔다. 이번 작품 <흔들린다>에서 그는 커다랗게 자란 참죽나무의 가지를 치는 과정에서 목도한 생(生)을 노래하고 있다.

 

 

수채화처럼 보이다가도, 수묵화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간결하고 투명한 느낌의 그림들의 분위기는 지금 이 계절을 닮아 쓸쓸하면서도 가슴 한켠을 시리게 만든다. 마치 정말 숲에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들고, 구름 한점 없는 높은 하늘을 올려다 보는 듯한 기분도 든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살면서 우리는 누구나 흔들림의 과정을 겪어 왔다. 흔들릴 수밖에 없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고, 내면의 욕심때문에 흔들렸던 적도 있을 테고, 혹은 대의를 위해서, 또는 누군가를 위해서 등등의 수많은 이유로 우리의 생은 그렇게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심을 잡고, 자기 자신을 잊어 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그래야 살아 나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시 한편을 나뉘어 그림을 곁들인 페이지에 조금씩 뿌려 놓은 것이 하나의 책이기 때문에, 뭔가 텍스트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겨우 시 한편으로 어떻게 책을 만들 수 있지? 싶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냥 그림으로만 읽을 수도, 오직 한 편의 시만으로도 읽을 수 있는 특별한 '시그림책'이다.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 고요한 산의 정경에서 시작해서 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치고, 어둠에 휩싸인 세상이 보인다. 집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의 푸르름은 가지가 베어지고, 점점 더 시간을 견뎌가면서 모습을 달리한다.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튀우는 일이었구나

 

 

이 책은 여백도 많고, 글자도 많지 않아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고, 앉은 자리에서 금새 다 읽어버릴 수도 있는 책이지만, 어쩐지 책장을 덮고 나서 여러 번 다시 들춰보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시를 소개하면서 그림을 곁들이고 있는 책은 많지만, 이렇게 시 한 편을 오롯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스토리를 만드는 그림이 함께하는 책이 또 있었던가 싶다.

흔들리냐, 나도 그렇다.

아프냐, 나 역시 그렇다.

가끔 바람이 부는 쪽으로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어떤 목소리들이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데, 주변에서 나를 가만두지 않을 때,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이고, 가족들에게 시달리고, 친구에게 실망하고,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가 당신에게 바로 쉼표가 필요한 순간이다. 조금 쉬어 가고 싶은 순간, 이 책을 읽어 보자.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느껴지는 휴식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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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11-04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석주 시인의 말에 공감하게 됩니다. 소설은 덧셈이고 시는 뺄셈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피오나 2017-11-05 00:16   좋아요 0 | URL
오.. 소설은 덧셈이라는 생각에도 공감이 되는데요. ^^
 
그렇게 쓰여 있었다 - 어렸을 적이라는 말은 아직 쓰고 싶지 않아, 일기에는…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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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역으로 향하는 인파에 섞여 홀로 터벅터벅 걷는다. 사실 '터벅터벅' 보다는 '터덜터덜.' 서글픈 영화에 전염되어 나도 서글픈 기분이 넘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인생을 보내게 될까.

인생이란 뭘까.

10대 무렵의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아, 이런 밤에는 어쩐지 불안하다.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는 오랜 만이다. 이 책은 마흔과 오십 사이에 서 있는 작가 자신의 일상에서 포착한 어린 아이 같은 순간을 담고 있다. 누구나 내면에 그런 아이 같은 모습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공감 백퍼센트를 불러 오는 마스다 미리의 이번 작품 역시 기대가 되었다. 마스다 미리는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의'란 존재들은 모두 그 모습 그대로 그 시간대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어린 시절 빵집으로 달려가던 길의 작은 웅덩이가 무서워 걷던 모습, 중학교 입학식 날 교복을 입고는 어색해 했던 모습.. 그 아이들 각자가 자신과 닮은 얼굴로 어른인 내 안에서 그대로 살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이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의 나, 대학 시절의 나, 첫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하던 시절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남편과 만나 사랑에 빠졌던 내 모습을 거쳐, 한 아이의 엄마가 된 현재의 나에 이르기까지... 가만히 떠올려 보면 비슷하면서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나에 비해 지금의 내가 가장 어른의 생각과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속의 내가 가지고 있던 모습들은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글을 읽다 보면, 내 안의 그 '아이들'에게 자꾸만 말을 건네고 싶어 진다. 그렇게 그녀는 우리 어른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녀는 마흔의 한가운데에서 어른의 전성기를 보내며 '어른들의 일상'을 이야기한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페루 요리를 먹고, 친구들과 함께한 어른들의 소풍에 대해서도, 애프터눈 세트를 처음 먹으러 간 날 홍차를 무려 다섯 잔씩이나 마셨던 일과 아버지와 영화를 보러 간 일 등등... 정말로 소소하고, 평범하고, 우리 주위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그런 글들이다.

 

 

"일 년이 눈 깜짝할 새 사라졌어."

연말이면 어른들이 그 말을 하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무척이나 이상했다. 어린 나는 일 년이 엄청나게 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리고 나도 "세월이 너무 빨라."라는 말로 서로의 쓸쓸한 기분을 조용히 공유하게 되었다.

 

이제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 라고 가장 처음 느꼈던 순간은 바로 커피를 좋아하기 시작하던 즈음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꼭 한약처럼 시커멓고, 쓴 냄새가 나는 그걸 엄마가 매일 같이 마시는 게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너도 어른이 되면 이 맛을 알게 될 거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쓴 커피가 더 이상 쓰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순간,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이제 내가 어른이구나 싶어 기분이 묘했다. 마스다 미리는 어릴 때 어른들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열심히 할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무슨 얘기냐고 끼어들면 "애들은 몰라도 돼."라며 절대 알려주지 않았던 그 비밀들이, 사실은 별로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고. 그래서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어렸을 대의 자신을 만나러 간다면 가르쳐주고 싶다고.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던 터라 큭큭 대며 웃고 말았다. 마스다 미리의 글들은, 그녀의 생각들은 어쩜 이리 공감되는 대목들이 많을까 신기해하면서 말이다.

 

아이 없는 싱글 여성의 삶을 멋지게 살고 있는 그녀라 그런지, 나이에 비해 일상의 모습과 생각들이 나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어 놀랄 때가 종종 있다. 그녀의 소녀 같은 마음과 행동들이 참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느낌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재에 대한 걱정들이 책을 읽는 동안 조금씩 옅어진다고나 할까. 그녀의 긍정 마인드가 내게도 전염되는 기분도 들고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스다 미리의 작품을 읽는 것일테고 말이다. 나도 언젠가 마흔이 되고, 오십이 가까운 나이가 될 텐데.. 그 시기가 되었을 때 그녀처럼 즐겁고 씩씩하게, 긍정적으로 일상을 보내고 생각하며 살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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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요일 스페셜 (시요일 APP 1년 이용권 + 특별 한정판 시집 5종) 시요일
고은.신경림.백석.김수영.신동엽 외 지음, 시요일 엮음 / 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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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매일 아침을 시와 함께 시작하고 있다. 시요일 애플리케이션 덕분이다. 사실 매달 수십 권의 책들을 읽어대면서도 ''라는 장르는 어쩐지 어렵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하루에 한 편씩 앱으로 시를 받아 보다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시라는 것이 공감하기도 쉽고, 마음을 어루만져주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 한편씩 그날에 어울리는 시를 손안에 배달해준다니,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 아닌가.

 

 

시요일은 창비에서 만든 시 큐레이션 전문 앱 서비스이다. 3 3천여편의 시를 자유롭게 감상하고, 원하는 시를 검색할 수 있으며, 분위기와 주제에 어울리는 좋은 시를 엄선하여 추천해 주는 기능도 있다. 게다가 시를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면 공유 기능을 통해 누군가와 나눌 수도 있다. 앱 다운로드는 무료이며, 오늘의 시·테마별 추천시·시요일의 선택 등 일부(라고 하기에는 꽤 많은) 콘텐츠가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전체 콘텐츠를 이용하고 싶을 경우 기간별 이용권을 결제하여 기간 동안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데, 이용권 가격도 책값에 비해 그리 비싼 편이 아니라 너무 좋다.

 

 

시요일 홈페이지 https://www.siyoil.com/

시요일 앱 다운로드(구글 플레이 스토어) http://bit.ly/2piIvMf

시요일 앱 다운로드(애플 앱스토어) http://apple.co/2nYtI9f

시요일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siyoil/

 

시요일 서비스 내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시요일 특별판 시집 5종 세트>이다. 신경림 『농무』, 백석 『외롭고 쓸쓸하니』,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고은 『만인보 1』로 구성되어 있다

 

 

신경림 『농무』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백석 『외롭고 쓸쓸하니』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고은 『만인보 1

너와 나 사이

여기에 머나먼 별빛이 온다

부여땅 몇천리

마한 쉰네 고을마다 변한 진한 마을마다

나와 너 사이 만남이 있다

 

시요일 앱은 무엇보다 나처럼 시가 어렵게 느껴졌던 초보자들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굉장히 훌륭하다. 우리는 누구나 스마트폰 중독이라고 할만큼 하루에 꽤 많은 시간을 모바일 화면을 들여다 보면서 보낸다. 그 시간 중에 잠깐, 하루에 오분 정도만 시간을 내어 당신에게 배달되는 시 한편을 읽어본다면 어떨까. 그렇게 하루, 하루가 쌓이면서 당신의 삶이 조금씩 달라지는 건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살면서 누구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믿었던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고, 기대했던 일에 실망하기도 하고, 막막한 절벽 앞에서 주저 앉아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한다. 그렇게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지쳐 있을 때, 곁에 사람이 있어도 문득 외롭다고 느껴질 때, 그럴 때가 바로 당신에게 ''가 필요한 순간이다. 그리고 그런 당신에게 매일 무료로 ''를 배달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시요일>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없다. 지금 당장 구글 플레이 스토어 또는 애플 앱스토어에서 '시요일' 앱을 다운로드 해보자. 이런 세계가 있었다니 싶을지도 모르겠다. 시 애플리케이션은 아마도 <시요일>이 세계 최초일테니 말이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시를 찾고, 읽고, 선물할 수 있다니 말이다.

 

사람에게 치이고, 세상에 실망할 때마다 시를 읽어보자. 그 무엇으로 마음이 달래지지 않을 때마다, 화가 나고 억울해서 울고 싶을 때마다 시를 한편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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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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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허구의 세계가, 비록 실제가 아니더라도 더 많은 걸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현실과 그것은 구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삶에의 비유가 삶이 남긴 혼란보다 더 근사하게 되는 그것. 나는 제시 버튼의 전작을 읽고 그런 경험을 했었다. <미니어처리스트>는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과 행간 사이에 숨겨진 비밀들이 페이지마다 넘쳐 흐르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우아한 기품과 매혹적인 미스터리들과 함께 어우러져 한 여성의 삶을 단단하게 구축해나가는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이번에 만난 두 번째 작품 <뮤즈>에서는 1960년대 영국과 1930년대 에스파냐를 오가며 여성 예술가가 '뮤즈'라는 허울 아래 연인, 모델, 영감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던 어두운 시대를 그려내고 있다. 차별과 억압 이전, '예술가'로서 여성들이 지녔던 진짜 욕망은 제시 버튼의 글을 통해서 눈부시게 그려진다.

 

 

누구나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배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거나, 인생의 여정을 바꾸어놓는 여러 순간을 마주하는 것은 순전히 행운에 좌우된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그 누구도 추천서를 써주거나 비밀을 털어놓는 상대로 골라주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가 내게 준 가르침이다. 운이 좋으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패를 제대로 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행운이 찾아왔던 날은 무척이나 더웠다. 나는 구두 매장에서 유니폼 블라우스 겨드랑이가 젖은 채로 일하고 있었다.

1967, 영국 런던. 영국의 식민지였던 트리니나드 토바고 출신 흑인 여성 오델은 절친한 친구 신스와 함께 구두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영국으로 건너온 이후 5년 동안 온갖 회사에 지원했고 아무데서도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기다리던 연락이 오게 되고, 오델은 스켈턴 미술관의 타이피스트로 일하게 된다. 작가 지망생인 오델은 그곳에서 일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상관인 마저리 퀵의 도움으로 소설을 발표하게 되기도 한다. 신스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난 로리와 가까워져 데이트를 하게 되고, 그는 어머니 유품인 그림을 미술관에 가져와 보여준다. 그 그림은 요절한 천재작가 이상 로블레스의 미발표 유작인 걸로 확인되고, 화단은 떠들썩해지지만 오델은 마저리 퀵의 태도에서 어딘지 그 그림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1936,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열여덞 소녀 올리브는 화가를 꿈꾸며 미술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지만, 차마 부모님에게 보여주진 못한다. 당시만 해도 화가는 당연히 남자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시대였기에, 올리브 자신조차 그렇게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림을 거래하는 갤러리를 운영했고, 아름다운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다. 그들은 런던을 떠나 에스파냐 남부 시골로 막 이사를 온 참이었고, 그곳에서 집안 일을 도와주겠다고 찾아온 테레사와 이삭 남매를 만나게 된다. 가정부로 일하게 된 테레사와 친구처럼 가까워진 올리브는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고, 테레사는 그녀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본다. 올리브는 이삭과 사랑에 빠지면서 점점 더 그림에 몰입하게 되고, 그녀의 재능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테레사가 그림을 바꿔치기한 덕분에 올리브의 그림은 이삭이 그린 것처럼 되어 버린다. 하지만 올리브는 어차피 여자인 자신의 이름으로 그림을 발표할 수 없을 거라고, 이삭의 이름으로 그림을 팔게 되는 상황을 스스로 허용한다.

 

"모든 건 무너져요. 조금씩 변하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죠. 그러다 알게 돼요. 발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다리가 부러졌다는 걸. 그런데 그건 내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던 일이에요, 오델. 타인의 마음속에서, 혹은 당신이 만나지 못할 신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거죠. 그러다 어느 날, 돌 하나를 던지면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 돌이 힘 있는 얼간이의 차 창문에 맞아요. 그러면 그가 복수를 하려고 나서거나 자기 여자한테 멋지게 보이려고 들죠.  아니면 보병들이 움직이고, 다음 날 당신의 마을은 불에 타버릴 수도 있어요. 어리석음 때문에, 섹스 때문에, 당신 침대에는 관이 놓여 있어요."

현재와 과거가 하나의 그림으로 연결되어 미스터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각 시간대 속의 여성 캐릭터들 자체가 너무도 매혹적인 작품이다.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오델, 그녀는 로리의 사랑 고백이 어색했고, 불편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반면 사랑이라는 감정에 거침이 없는 올리브는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삭에게 드러내어 표현하고, 그를 향한 욕망으로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듯한 기분마저 느낀다. 테레사와 올리브의 관계는 마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의 아가씨와 하녀의 그것처럼 비밀스럽고, 친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전혀 다른 색깔과 분위기로 이야기는 진행되지만 말이다. 화려한 외모로 어디서나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지만 그럼에도 불행하고, 공허한 올리브의 엄마 세라는 사랑의 외로움을 알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제시 버튼은 전작인 <미니어처리스트>에서도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를 구축해 섬세하고, 미묘한 여성 심리를 그려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훨씬 더 다양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그들만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아티스트와 뮤즈가 등장하면, 우리는 당연하게 아티스트는 남자, 뮤즈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제시 버튼은 바로 그 편견을 뒤집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작품에는 남성의 도움 없이 여성이 다른 여성의 뮤즈가 되어주고,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예술 작품의 영감이 되어 그림이 탄생하는 모습도 등장한다. '여성이라는 존재를 작품을 통해 대상화하고 소비하며, 여성 예술가를 주변화 해온 미술의 역사에 대한 반격'이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미술사를 배경으로 우리가 그 동안 숱하게 보아온 여타의 다른 작품과는 뚜렷하게 다른 점을 보여주어 특별한 이야기가 탄생했다. 여성 화가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시대를 대변하고 있는 미술상 아버지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올리브의 모습은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통쾌하게 멋지다. '여자들은 할 수가 없어요. 여자들에겐 비전이 없어요. 내가 알기론 눈도 있고, 손도 있고, 심장도 있고, 영혼도 있지만. 나는 기회도 얻기 전에 실패했어요.'라는 극중 올리브의 외침이 오래도록 가슴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이야말로 단연 가장 페미니즘적인 소설이 아닐까라는 리뷰가 굉장히 와 닿았으니 말이다. 모든 여자들에게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제시 버튼은 여성의 삶을 그리고, 내면을 그려내는 데 정말 탁월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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