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세계보다는 감정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어떤 상황을 경험하기보다는 이해하는 편이 더 쉽다고 말하는 뛰어난
심리학자이지만, 파킨슨 병이라는 치명적인 친구를 데리고 사는 남자 조.
전작인 <용의자>에선 살인 혐의로
체포가 되더니,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는
딸은 범인에게 납치를 당하고, 아내는 별거를 요구한다.
역시나 이번 신작 <내 것이었던 소녀>에서도 사건을 조사하는 내내 그의 삶은 점차 수렁으로 빠져 든다.
이렇게나 주인공을 수난에 빠지게 만들고 못살게 구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마이클 로보텀은 조를 매 작품마다 시험에
들게 만든다. 이제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데, 그
시리즈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는 과연 조의 곁에 누가 남아 있게 될지 걱정이 될 만큼 말이다. 게다가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사건을 따라가는데 수동적일 수가 없어 굉장히 피곤하게 책을 읽어야만 한다.
주인공의 눈으로 사건을 보고 겪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단순히 '감정이입'이라고 하기에도 모자랄 만큼 '실제 체험' 같다고 해야 할만큼의 강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중반부에 다다를 때까지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축축 쳐지고, 이야기 진행도 느리며, 대체 이 두꺼운 책이 언제 끝날지 아득하다는 느낌마저 경험해야 한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점은, 이 와중에
'지루함'이라는 단어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마이클 로보텀의 힘이 아닐까 싶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기억이 트라우마적인 과거 사건들의 저장소라고 말했지만, 그
사건들은 실제라기보다는 단순한 망상일 때가 많다. 현실 세계가 아니라 오로지 마음속에서 일어난 사건인
것이다. 우리 마음은 존재하지 않은 것들과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의 방대한 저장고다. 나는 가끔 내 기억들이 진짜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것들에
집중해서 너무 가까이 들여다보려고 애를 쓰면, 기억이 내 목을 틀어막아 나는 숨을 쉬려고 발버둥을
치게 된다.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난 열네 살 소녀. 시에나는 조의 딸인 찰리와
절친이다. 공황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시에나를 병원에 데려다 주고 보니 팔 안쪽에 자해의 흔적이
보인다. 그제야 그는 생각한다. 자신이 그 동안 자주
집에서 봐왔던 딸의 친구라는 보여지는 모습 외에 시에나에게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어
시에나의 방에서 죽어 있는 그녀의 아빠가 발견된다. 전직 경찰인 레이 헤거티의 옷에는 시에나의 피
묻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상황이고, 모든 증거와 정황이 그녀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조는 시에나를 믿고 싶다. 시에나의
주변과 사건을 점점 조사해갈수록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설명할 수 없는 확신 같은 것이 드는 것이다.
그것이 직관이든, 지각이든, 통찰이든 그저
그의 본능이 시에나가 자기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고, 그녀가 누군가를 보호하고 있다고 말이다. 형사도 아닌 일개 심리학자가, 결정적인 증거나 목격자를 찾은 것도
아니면서 용의자가 범인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니. 여기서 조 올로클린이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또 빛을
발한다.
독자 입장에서 보더라도 어쩐지 그의 생각보다는 다른 이들의 견해에 힘을 보태주고 싶을 만큼 무모해 보이지만, 꾸역꾸역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가는 우직함. 평범한 두 아이의
아빠답게 아이들 걱정에 잠을 설치고, 누군가 아이들에게 해를 가하려는 기색만 보여도 달려들 수 있는
과격함. 별거 중인 아내가 새로 데이트하는 상대에 대한 질투심을 고스란히 인정하는 사내다움. 아내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심리학자가 되었다고 할 만큼 아내를 사랑하지만,
가끔은 분위기에 휩쓸려 실수를 하기도 하는, 그리고 그걸 꼭 아내에게 들키고 마는
멍청함. 너무 젊은 나이에 찾아온 파킨슨 병이라는 무시무시한 친구에게 시달리면서도 아주 가끔은 그것을
농담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여유. 하루하루가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하는 때에도 상처 받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고, 누군가를 다치게 한 나쁜 놈을 벌주고 싶어하는 오지랖. 무엇보다 페이지가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그가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들 때문에 그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하고 달라."
고든이 말한다.
"어떤 다른 사람들?"
"경찰 말이야. 경찰들은 과정을
알고 싶어 하지만 당신은 이유를 알고 싶어 하지. 그것도 간절히.
내가 어렸을 때 학대를 당했는지, 혹시 내가 어떤 아저씨나 교구 신부한테 후장이라도
뚤렸는지.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는지, 침대에 오줌을
쌌는지, 엄마가 그 벌로 나를 젖은 침대에 그대로 재웠는지.
당신은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생각하지. 그리고 그게 당신 약점이야. 이해해야 할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원래 사냥꾼으로
태어났어. 우리 모두는 그렇게 시작했어. 그렇게
살아남았고. 그렇게 진화했지. 우리 중 일부는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진화했고. "
이 작품은 실제로 1982년 호주에서
발생했던 리네트 도슨 실종사건을 토대로 쓰였다고 한다. 잘생기고 매력적인 학교 선생의 아내가 홀연히
사라지고, 어느 날부턴가 그 집에는 열여섯 살짜리 제자가 함께 살게 되었고, 경찰은 남편을 의심했지만 어디에서도 아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건은 미제가 되었고 사라진 아내의 가족들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녀를 찾고
있다고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라진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은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아이를 잃는다는 것은 그 어떤 고통스러운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그 누구의 이해도 넘어서는 영역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마이클 로보텀 역시 세 딸을 키우는 아빠로서 그런 부모로서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엄청난 기쁨 뒤에 숨겨진 고통과,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
뒤에 그것을 잃어 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함께 존재하는 일이니 말이다.
그는 극중 조의 생각을 빌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모 노릇이란 공중곡예와
같다고. 언제 놓아줄지 알아야 하고, 아이가 자신을
시험하는 과정을 지켜보아야 하며, 거기서 부모가 할 일이란 언젠가 아이가 다시 이쪽으로 날아올 때를
대비해 잡아줄 준비를 하고, 도착하면 잘 토닥이고 힘을 주어 다시 세상으로 쏘아 보내주는 일이라고
말이다. 아이들은 어느 시점이 되면 항상 너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정작 어른이 되어 버린 우리는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지만,
아이들이 그걸 깨달을 무렵이면 이미 너무 늦어버린 시점이 되고 말이다. 이 작품은 자식을
둔 부모들이라면 더욱 공감할 부분이 많은 감성 스릴러이기도 하고, 부모가 아니더라도 한때
소년, 소녀였던 자신의 시간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해할 수밖에 없는 심리 스릴러이기도 하다.

마이클 로보텀은 심리학자 조 올로클린 시리즈와 전직 형사 빈센트 루이츠 시리즈를 번갈아 가며 출간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건 각각의 캐릭터들이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작품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번 작품에서 빈센트 루이츠가 조 올로클린의 사건 수사를 돕는 것처럼 말이다. '조 올로클린' 시리즈는 첫 번째
<용의자> 두 번째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 이어 세 번째 <내 것이었던
소녀>가 출간되었는데, 심리 스릴러인 이 시리즈에
비해 조금 다른 느낌의 액션 스릴러로 진행되는 '빈센트 루이츠'
시리즈도 함께 나오길 기대해본다. 로보텀의 첫 작품인
<용의자>에서 루이츠는 조를 살인 용의자로 체포하는데, 용의자와 수사관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들의 시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사실 <용의자>에서 두 사람은
끊임없이 부딪히지만 서로를 믿지 못하고 뭔가 미심쩍어 하는 듯한 느낌으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앞으로
그들이 각별한 사이가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긴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작품인 <Lost> 이후로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위로를
주는 사이가 된다고 하니 대체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건지 이 작품도 궁금해진다.
올초 마이클 로보텀은 스탠드얼론인 <Life or Death>로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골드대거를 수상해 화제가 되었었다. 7월에
<Say You're Sorry>가 국내에 출간될 예정이고, 올해 <Life or Death>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첫 작품인 <용의자> 이후 다음 작품을 만날 때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는데, 올해만 마이클
로보텀의 신작을 무려 세 권이나 만날 수 있다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