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의 여자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은 킬러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보스의 명령에 불복종한 그는 쫓기는 신세가 되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여자를 지켜야 한다. 이 작품은 클리쉐가 난무하는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범죄 소설이지만, 이상하게 가슴 시리고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다. 책장을 덮고 그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랬더니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원래 미스터리 소설에서는 언제나 플롯보다는 캐릭터가 우선이지 않았나. 물론 모든 작품이 그런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미스터리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소설이라면 캐릭터로부터 플롯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실 위대한 미스터리는 그냥 캐릭터 그 자체이다. 복잡하고 정교한 플롯이 아니더라도, 엄청난 반전이나 한 방이 없더라도, 그저 매력적인 캐릭터 하나만으로도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바보 같은 남자, 올라브와 사랑에 빠진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는 전작에서 보아왔던 완벽하게 짜여진 구성과 치밀하게 계획된 플롯도 없고, 긴장감 넘치게 매우 실감나는 수사 과정도 없고, 수많은 인물들을 엮어내는 기막힌 퍼즐도 없으며, 꼼꼼한 복선과 감탄사를 불러 일으키는 반전도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엄지를 척 올리며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어진다면, 이유는 딱 하나. 바로 캐릭터 때문이다.
어쨌든. 요약하자면 이렇다. 나란 인간은 천천히 운전하는 데 서툴고, 버터처럼 물러터진 데다 금방 사랑에 빠지며, 화나면 이성을 잃고, 셈에 약하다. 책을 좀 읽기는 했지만 아는 게 별로 없고 쓸 만한 지식이라곤 더더욱 없다. 내가 글을 쓰는 속도보다 종유석이 자라는 속도가 더 빠를 것이다.
그러니 대체 다니엘 호프만이 나 같은 인간을 어디에 써먹겠는가?
그 답은 (여러분도 이미 짐작했겠지만) 해결사다.
운전할 필요도 없고, 대부분 죽어 마땅한 인간들을 죽이며, 복잡하게 계산할 것도 없다. 지금부터는 얘기가 달라지지만.
올라브는 해결사로 일한 지 4년, 킬러지만 천성이 유약하고 예민한 남자이다. 그는 셈에 약하고 집중력도 떨어진다. 난독증을 겪고 있지만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어 한다. 너무 빨리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빠지게 되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아빠에게 폭력을 당하는 엄마를 지켜봐 왔기에, 여자를 때리고, 붙잡아 겁주는 일은 절대 못하고, 다른 남자들이 여자를 때리는 것도 참지 못한다. 누군가를 죽이는 일도 그에겐 그저 의뢰 받은 일에 불과하다. 그저 해야 하는 일을 하되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기가 그의 신조인데, 이제 문제가 생긴다. 그의 보스 호프만이 자기 아내를 죽여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자가 불쌍하거나 일 자체가 어려운 건 당연히 아니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그가 여자를 처리한 후에, 경찰의 조사가 시작되면 자신이 보스의 미래를 좌우할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보스는 평소 그가 받던 보수의 다섯 배를 주겠다고 한다. 뭐 어차피 그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그렇게 걱정을 해본다.
그리고 보스의 아파트 건너편 호텔에 작은 방 하나를 빌려, 며칠간 그 여자를 지켜보기로 한다. 그런데,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만다. 그녀의 얼굴, 입술, 금발 머리, 가는 팔, 햇빛에 반짝이는 것 같은 눈까지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고, 그렇게 그는 사랑에 훅 빠져 버린다. 그는 지나치게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게 되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라도 짐작이 갈 것이다. 올라브는 보스의 여자 대신, 그녀의 젊은 남자를 해치우기로 한다. 그리고는 보스에게 보고한다. 사모님 대신 애인을 보냈다고. 사모님은 그 놈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그러나 이어지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던 보스의 대답. "네가.... 하나밖에 없는....내 아들을 죽여?" 아들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올라브는 당황하지만, 애초에 그가 보스 대신 그녀를 선택할 때부터 상황은 그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엄마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그렇다고 누구의 이야기가 맞는지 알아내기 위해 니테달 호수에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내게 사랑에 대해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아니, 그렇지 않다.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 사실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는 이 작품을 프리뷰단으로 작년 연말에 원고로 먼저 만났었는데, 처음 이 원고를 읽고는 굉장히 놀랐었다. 분명히 내가 알던 그 작가가 맞는데...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작가가 맞나? 싶을 만큼 낯선 요 네스뵈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분위기며 스타일이 기존 그의 작품과 너무 달라서, 만약 작가를 모르고 텍스트만 먼저 만난다면 그의 작품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색다르다. 몇 몇 장면에서 요 네스뵈가 즐겨 쓰는 익숙한 문장들만 아니라면, 그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라니 새삼 그의 실력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짧고 간결한 문장, 군더더기 없는 최소한의 단어들. 이야기의 길이가 줄어들수록 밀도는 더 진해져 진한 에스프레소 처럼 묵직한 향을 남겨준다. 굉장히 진한 에스프레소도 그 맛을 알게 되면, 달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요 네스뵈의 이 작품은 마치 갓 내린 원두로 뽑아낸 찐한 에스프레소에서 쓴 맛을 알아야만 느낄 수 있는 그 소중한 단맛 같은 느낌이었다.
이 작품은 명백하게 '스릴러의 가면을 쓴 멜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올라브의 인생에는 두 명의 여인이 있다. 우선 마리아 미리엘. 약쟁이 남자친구 대신 빚을 갚으려던 그녀는 농아에 절름발이다. 호프만 밑에서 포주로 일하는 피네가 그녀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고 그를 때려눕히고 마리아를 구하고, 그녀 대신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그녀의 빚을 갚아 준다. 그리고 올라브는 가끔씩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그녀를 찾아가 무슨 문제는 없는지, 약쟁이 남자친구가 다시 나타나 깽판을 부리는 건 아닌지 확인한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의 초대에 응하지도 않고, 그녀가 사소한 호의라도 보일라치면 질색하며 물러섰으니 말이다. 나머지 한 명은 보스의 아내이자 자신이 없애야 할 대상인 코리나 호프만. 올라브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보스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도망자 신세가 되지만, 그녀와 함께 파리로 떠날 계획을 세우며 행복에 부푼다. 물론 그것조차 그에게 허락된 행복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 고독한 남자의 사랑은 물론 비극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처럼 순탄하지가 않다. 난독증을 겪고 있는 그는 책은 자신의 마음대로 해석해서 읽어내는데 아무 문제가 없지만, 세상과의 소통만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그리하여 클라이막스를 넘어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슬프고, 먹먹하고, 쓸쓸하고, 애처롭지만, 눈부시게 아름답기도 하다. 희디흰 눈, 붉디붉은 피. 눈을 뒤집어쓴 남자. 둑으로 막아뒀다가 터진 물줄기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랑조차 구원할 수 없었던, 피를 흠뻑 빨아들인 눈사람. 이상하게 아름답고, 마치 실제로 보고 있는 것처럼 눈이 시린 기분이 들게 만드는 특별한 장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이젠 죽을 수 있어요, 엄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더는 이야기를 지어낼 필요가 없어요. 이보다 더 좋은 이야기를 지어낼 순 없을 거예요.
펄프 소설은 1920 - 1955년 사이에 값싼 목재 펄프종이에 인쇄되어 간행되던 대중소설을 말한다. 요 네스뵈는 그 동안 공공연히 짐 톰슨의 <내 안의 살인마>를 좋아한다고 말해왔기 때문에, 어쩌면 그가 펄프 소설에 한번쯤 도전하리라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컨버세이션> 또한 요 네스뵈의 애정 리스트에 항상 있던 작품이었다. 요 네스뵈는 그렇게 자신이 사랑했던 펄프 픽션과 자신이 항상 매혹되곤 했던 1970년대의 음울한 분위기를 이 작품에서 유감없이 선보이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을 미국에서 도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대략 12시간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마치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스스로 올라브 요한센이라는 인물이 되어서 말이다. 게다가 실로 그의 초기작인 초기작인 <헤드헌터> 이후로는 오랜만에 만나는 1인칭 화자라, 굉장히 감성적이고 멜로드라마적인 느낌마저 물씬 풍기는 스릴러가 탄생했다. 세상에. 요 네스뵈가 이렇게나 멜로를 잘 쓰는 작가였다니 놀랍기 그지 없다.
일류 킬러에게 보스가 자신의 부인을 죽이라는 명을 내리고, 킬러가 그 목표와 사랑에 빠진다는 너무도 단순하고, 전형적인 플롯이 요 네스뵈라는 작가를 만나면 어떻게 감각적이고 아름답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 놓치지 마시라. 1970년대의 아름다운 오슬로를 배경으로 마치 영화 <펄프픽션>같은 느낌의 누아르를 만들어낸 그의 솜씨에 이어지는 연작인 <미드나잇 선> 또한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미드나잇 선>에서는 같은 시대, 다른 주인공이 등장해 연관된 사건을 펼친다고 한다. 그의 1970 오슬로 시리즈가 어떻게 완성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