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 살인 아르테 누아르
카밀라 그레베 지음, 서효령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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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성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사인은 목에 수업이 가해진 구타였고, 머리는 몸에서 잘려 현관을 향해 바닥에 세워진 상태였다. 피해자의 신원은 쉽게 밝혀지지 않고, 용의자로 지목된 남자 또한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다. 용의자로 지목된 남자는 의류 회사의 논란 많은 CEO로 미디어가 사랑하고 증오하는 연예인과도 같은 유명인사이다. 여자가 끊이질 않았던 악명 높은 바람둥이인 그가 과연 범인이었을까. 게다가 이 사건은 10년 전에 있었던 살인 사건과 소름이 끼칠 정도로 유사한 부분이 많다. 스웨덴 범죄 역사상 가장 대대적으로 수사가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미제로 남아 있는

어떤 복수가 공정한지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가 무언가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난 망가질 것이다. 내 몸 전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에스페르 오레와 같은 남자에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성공과 돈, 여자, 모든 것을 가진 남자 예스페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동일하게 보복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그가 내 집에 몰래 들어와 내 물건과 반려동물을 훔쳐갔다. 그는 내게서 직업과 돈, 아기를 빼앗아갔다. 하지만 올가가 옳을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그에게 같은 짓을 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의 화자는 모두 세 명이다. 각각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교차 진행되는데, 두 명은 현재, 한 명은 두 달 전에서 시작해 점점 현재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현재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두 인물과 그 사건의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모르겠지만 연관이 있어 보이는 누군가의 과거 행적이 함께 진행된다는 건데 덕분에 이야기는 시종일관 긴장감 있게, 페이지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흘러간다.

우선 강력계 형사인 페데르, 그는 일반적인 형사 캐릭터에 비해 성격이 좀 특이하다. 15년 전 사랑했던 야네트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있지만, 그는 부모로서의 책임도, 남편으로서의 의무도 회피한 채 여전히 혼자 지내고 있다. 아이는 엄마와 살고 있고, 그와는 일년에 한 두 번 만나는 정도로, 그는 스스로 여전히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한네는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지배적인 남편 오베에게 질려서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심리학자였던 그녀는 10년 전만 해도 경찰들과 업무를 협조해서 범죄 수사를 함께 했었다. 한때 페데르와 사랑에 빠졌었고, 그의 배신으로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바로 10년 전에 그녀가 담당했던 사건과 유사한 부분이 많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 수사에 참여하게 된다.

2개월 전, 클로즈 앤드 모어에서 점원으로 근무 중인 엠마는 회사 대표인 예스페르 오레와 비밀 연애를 하는 중이다. 그녀는 이모에게 물려받은 집과 재산으로 여유 있게 사는 편이었고, 알콜 중독이었던 엄마와의 불행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약혼 기념 식사를 하기로 한 어느 날 저녁, 아무런 연락도 없이 예스페르가 그녀의 집에 오지 않는다. 그렇게 그에게서 갑작스럽게 소식이 끊기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집에서 중요한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그 소녀에게 벌어질지 알 것 같았다. 아이는 오늘밤 얼어 죽거나 어딘가에 숨겨질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면 아이를 다시는 찾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엠마에게 다가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내게 남은 목숨이란 게 어떤 건가? 이 수사가 끝나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 남겠는가?

북유럽 스릴러 하면 그 독특한 분위기와 배경 때문인지 덮어놓고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카밀라 그레베가 출판사의 소개 문구처럼 요 네스뵈와 헤닝 만켈을 뛰어넘는 작가인지는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더 만나봐야 하겠지만, 이 작품이 매우 흥미로운 것은 분명하다.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캐릭터와 구성인데, 중심 인물 세 명은 여타의 스릴러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비해 굉장히 복잡하다. 그것도 심리학적으로, 그리고 내면적으로 말이다. 스릴러에서 '배경적'으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복잡한 인물을 선택하는 경우는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범인이든, 형사든 대부분 환경적인 요소에서 현재의 수사나 성격에 영향을 받게끔 설정하는 것이 현재의 플롯을 진행시키는데 유리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사실 사건 수사 자체보다 각각의 인물의 내면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각 캐릭터들의 목소리가 매우 뚜렷하게 시선을 잡아 끌고 있다.

그리고 세 명의 인물에게 저마다의 시점과 목소리를 부여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방식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 속에서 어느 순간 교집합이 되며 마주하게 되는 극강의 충격과 반전의 힘이 대단하다. 사실 작가가 중간 중간 복선과 단서를 잘 설정해두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지나면 대부분 짐작할 것이다. 화자의 말을 그대로 믿기에는 뭔가 이상한데? 라고 말이다. 그렇게 조금씩 싹트는 의심들이 쌓여 산처럼 높아져서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매우 끔찍하기도 하고, 소름 끼치기도 한다. 내가 역대 급 캐릭터한테 홀딱 넘어가 속았구나.를 깨닫게 되는 순간 이 작품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다시 쓰이기 때문이다. 카밀라 그레베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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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전이의 살인 스토리콜렉터 42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하윤 옮김 / 북로드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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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썽꾸러기에 성적이 바닥인 남학생과 세침 떼기에 모범생인 여학생이 서로 몸이 바뀌게 되면서 벌어지는 헤프닝을 그렸던 영화 <체인지>, 그리고 무술감독을 꿈꾸는 스턴트 우먼 길라임과 '까칠한' 백만장자 백화점 사장 김주원의 영혼이 바뀌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로맨스 판타지 드라마 <시크릿 가든>까지.. 그 동안 내가 보아왔던 작품에서 영혼 체인지는 '미스터리'가 아니라 '판타지' 였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성별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판이하게 다른 두 남녀가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한 가지밖에 없을 것이다. 직접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 완전한 상대방이 되어 그가 매일 느끼는 고민과 생각과 환경을 전부 체험해보는 것.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판타지를 통해서 영혼과 몸이 바뀌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두 사람을 세워 놓는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 사랑이란 이런 거라고.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러한 판타지를 빌리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이렇게 로맨틱한 판타지로 읽어 낼 수도 있는 그것을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SF 미스터리, 본격 추리물로 그려내고 있다. 사실 몸을 놔두고 인격이 바뀐다는 것만 보자면, 무시무시한 이야기이기도 하니 말이다. 게다가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여러 사람 사이에서 서로서로 교체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 얼마나 섬뜩하겠는가. 아주 공포 영화가 따로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A라는 백인과 B라는 흑인이 있다고 하자. 두 사람이 동시에 문제의 '체임버'에 들어간다. 그러면 A B는 자기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동으로 '스플릿 스크린'이라 불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 같은 것에 막혀 방 안쪽과 입구 쪽으로 갈라진다.

갈라졌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의 인격이 바뀌어 있다. , A라는 백인 육체에는 B라는 흑인의 '정신'이 들어가 있고, 반대로 B라는 흑인의 몸에는 A라는 백인의 '정신'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인격이 육체를 떠나 전이하는 현상을 매우 과학적으로 설명하면서 배경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놓고는, 한정된 공간에서 제한된 사람들이 서로의 인격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밀실 속 연쇄살인으로 매우 흥미로운 본격 미스터리를 선보이고 있다.

마치 옷을 갈아입듯이 하나의 인격이 각각 다른 육체에 잇달아 옮겨지고, 인간이 이 기능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면 어떨까. 좋은 방향으로 이용한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지겠지만, 악용한다면 그렇게 무시무시한 무기도 없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매스커레이드' 현상이라고 이름 붙인 이것은 인격 교환 시작되면, 피험자 중에 누구 하나가 죽을 때까지 교환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게다가 어느 정도 시간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지 그 주기와 법칙성 또한 밝혀지지 않았으니, 피험자들 사이에는 언제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매스커레이드가 평생 따라다닌다는 말이다. 게다가 한쪽 피험자의 육체가 사망한 경우, 그와 동시에 사멸하는 것은 그쪽 육체에 들어 있는 정신으로, 자신의 것이 아닌 정신이 들어 있는 상태에서 죽게 되면 남은 피험자는 평생 다른 사람인 채로 여생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인격이라는 게 일단 실체화되지 않는 한 그것을 교환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어. 하지만 자네의 말을 듣고 의문이 생겼지. 물론 실체화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그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를 수도 있어. 하지만 전이 과정으로 실체화되는 것이라면 눈에 보일 수 있지 않나, 하는 자네의 지적으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났지. , 어쩌면 형이상학적인 상태로 인격이 전이될지도 모른다고. 아니, 애초에 '교환'이나 '전이'같은 발상 자체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실체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설마 교환이나 전이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말은 아니겠죠? 실제로 이렇게....."

캘리포니아의 조그만 햄버거 가게에 우연히 손님으로 모이게 된 7명의 남녀는 갑작스런 지진으로 가게에 있던 셀터로 대피하게 되는데, 사실 그곳은 사람의 인격을 교체하는 매스커레이드 현상을 연구하는 연구 시설이었다. 성격도, 성별도, 국적도 너무도 다른 7명의 남녀. 헤어진 여자친구를 찾아 미국으로 날아온 일본인 토마 에리오, 할리우드 배우 지망생인 미모의 여성 재클린, 가게의 유일한 종업원인 우락부락한 흑인 바비, 프랑스와 일본인 남녀 커플 알랭과 아야, 대머리 마초 스타일의 미국인 랜디, 아랍계 외국인 유학생 하니. 그들의 인격은 서로에게 교체되고, 앉아 있는 순서대로 인격전이가 순차적으로 계속 교체된다. 치료 방법은 없고, 매스커레이드는 평생 반복되는데, 모두 살아 있는 한 아무도 이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물론 인격 전이가 끝없이 반복되다 육체와 정신이 일치하는 순간에, 나머지 6명이 그 상태 그대로 죽는다면 마지막 1명은 이 지옥에서 구원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침 다른 사람들이 죽은 시점에서 자신의 마음이 원래 자기 몸에 들어가 있을 확률은 상당히 낮기 때문에, 그들이 이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어 보인다.

탈출 할 수 없는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체험을 강제적으로 해야 하는 위기에 처한 이들 사이에서는 급기야 누군가 누군가를 죽이는 연쇄살인이 벌어지는데... 그 누구도 범인을 섣불리 추리할 수 없는 것은 계속해서 인격전이 현상이 예고도 없이 뒤죽박죽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반 쯤 가면 누가 누구인지 독자들까지 막 헷갈리게 되는데, 그래서 인물들의 인격전이를 수첩에 정리하면서 읽을 수 있도록 사은품으로 예쁜 수첩을 주고 있다. 하지만 잘 집중만 한다면 사실 메모를 하지 않고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이야기에 오롯이 집중해야만 하지만 말이다. 대체 누가 누구를 죽인 건지에 대한 반전의 추리 속에 마지막에 살아남게 되는 생존자와 드러나는 범인에 대한 추리만큼이나 로맨틱하기까지 해서 거짓말 같은 엔딩의 재미 또한 매우 흥미진진하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역시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평범한 소재도 특별하게 바꿀 수 있는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나 영화 <체인지>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어렵지만, 그들에게선 만날 수 없었던 특별한 플롯과 뭉클한 엔딩이 있으니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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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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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반복되는 하루가 무의미하고 지루해서 회사만 그만둔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던 때가 있었고, 외부의 상황으로 인한 남자 친구와 위기의 순간에는 그저 평생 그를 볼 수 있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회사를 관두고 전업주부가 되었고, 사랑하는 그의 곁에서 매일 아침을 시작하지만 내가 회사를 다닐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다던 간절한 바람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최정화의 소설은 그렇게 우리의 인생에서 더 낫거나 덜한 것, 그때 원했던 것과 지금 원하는 것, 그때 충족되지 못했던 것과 지금 충족되지 못한 것들에 대해 그리고 있다.

그는 그녀가 왜 행복한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가 한 말을 믿고 있었다. 그게 그녀가 다섯 음이나 높은 톤으로 말을 하고, 그토록 웃음이 많아지고, 그리고 거짓말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이유였다. 그녀는 지금 어엿하게 제 앞길을 닦아나가는 장성한 아들을 두고 있었고, 우연히 마주친 남자의 관심을 받을 만한 요조숙녀였다. 게다가 생전 처음으로 남에게 주목을 받고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그녀를 궁금해했고 그녀는 그들을 만족시키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더 이상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즐거워 보이는 게 아니라, 즐거웠다.

                                                                                            -'홍로' 중에서

 

<구두>의 주인공은 가사 도우미 면접을 보러 온 여자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느낀다. 산 지 적어도 오 년은 지나 보이는 낡은 구두를 신고 온 여자는 마치 주인공의 집과 남편과 아이를 자신의 집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일자리를 구하러 온 사람의 머뭇거림이나 위축된 모습이 아니라 새집에 첫발을 디디는 이의 설렘 같은 게 묻어 있는 여자의 흡족한 미소가 주인공을 불안하게 만든다. <팜비치>에서 오 년째 승진에서 쓴 물을 마시고 있는 남편이 피서지에서 겪는 일련의 일들은 그와 아이, 아내 사이에 뭔가 소통의 벽 같은 것을 느껴지게 만들고 있다. <오가닉 코튼 베이브>에서 끊임없이 강박적으로 자신에게 부족한 것에 탐닉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아내는 여러 상황에 따라 그 폭을 넓혀 가지만 충족되지 못하고 여전히 악몽을 꾼다. 끝도 없이 모습을 바꿔가며 평온한 현재를 위협하는 온갖 두려움의 요소들에 시달리는 그녀의 모습에는 현대인의 불안 심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틀니>의 아내에게 남편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월등했고 존경스런 존재였다. 남편은 오 년 전 교통 사고로 여러 차례 대수술을 한 뒤 구조상 임플란트가 불가능해 틀니를 끼우게 되었는데,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만 틀니를 빼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그녀는 집에서는 틀니를 빼고 있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막상 틀니를 뺀 그의 해괴망측한 모습을 보게 되자, 그녀의 마음속에는 한심하다는 어떤 감정이 일어나더니 점점 그를 무시하게 된다.

<홍로>에서 계약으로 아내 역할을 하고 있는 여자를 동창 모임에 데려가야 하는 남자는 그들의 관계가 친구들에게 드러날 까봐 노심초사한다. 말이 없고 순종적이고, 살짝 주눅이 든 태도에 마치 태어날 때부터 오십 대였을 것 같은 표정의 그녀가 삼십 년 전에 사고사한 아내에 비해 부족한 점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찜찜했던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의 질문에 조심스럽게 대답을 하던 그녀에게 그가 무심코 거짓말을 보태자 그것에 호응하기 위해 시작한 말이 그녀를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버린다. 평상시 그녀의 목소리보다 다섯 음 정도 톤이 높아지고, 쉴 새 없이 떠들어대고, 하이톤의 웃음소리로 한껏 들떠 있게 된 것이다. 이랬으면 좋겠다 싶었던 바램이 거짓말로 현실이 되자, 마치 자신이 진짜 그 세계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된 것이다.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는 시골에서 여름 한 철을 보내며 작품을 쓰는 소설가와 그녀가 묵고 있는 집의 주인 여자와의 기묘한 우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가와 가깝게 지내게 되면서 그녀의 원고를 읽어주고 모니터링 해주다 점점 자신의 말에 좌지우지 되는 선생님의 모습에 우쭐해진 집주인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 앞에서 흔들리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묘한 장난기가 발동하게 되고, 스스로의 의도와는 달리 점점 선생님과 거리가 멀어지고 만다. 그녀의 집착과 피해의식이 어쩌면 '내성적인 살인'으로 까지 가게 될지도 모르는 그 과정은 너무 차분하고 담담해서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진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인생이란 언제나 원하지 않는 것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인형 뽑기 기계다. 시은으 제한되어 있고, 집게는 헐거우며, 인형은 모두 하나같이 조악하다. 나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쥐고 있다. 가장 작고 가벼운 인형이 뽑힐 확률이 가장 높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동전을 넣지 않을 이유가 무어란 말이냐. 타협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

                                                                                        -'대머리' 중에서

 

선망과 열등의식이 만들어낸 집착에 휩싸인 여자, 자신이 한 거짓말을 사실로 믿어 버리게 되는 여자, 잘 안다고 믿었던 자신의 딸이 불가해한 타인처럼 낯설게 느껴진 남자, 남편의 망가진 모습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게 시작하는 아내, 신경증과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은 여자 등 이 작품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열등감이나 죄책감, 혹은 피해의식 때문에 다른 이들을 조금씩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극중 어떤 인물도 온전하게 '믿을 수' 없다. 모든 상황이 그럴 듯하지만, 사실 그 어느 것도 진실이라 단정할 수는 없는 불투명한 세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균열과 파동을 예민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가는 우리의 평범할 수도 있는 일상을 매우 예민하고,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때는 그 혹은 그녀만 곁에 있다면 세상에 다 내 것이 될 줄 알았지만, 어느 순간 해서는 안될 말들이 오가고 서로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짐승처럼 변하기도 하는 것이 사람들의 관계이기도 하다는 것이 서글프지만, 사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리가 과거에 원했던 것과 현재 바라는 것이 항상 같을 수는 없고, 당시에 충족되지 못했던 것과 지금 충족되지 못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인생에서 더 낫거나 덜한 것을 구분하기란 이렇게 어렵기만 하다. 그러니 내가 조금 어긋나고 조금 비뚤어진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거나 달라질 거라고 믿는 건 정말 순진한 일이다. 냉정하지만 담담한 시선으로, 예리하지만 섬세한 시선으로 현대인의 불안한 내면을 그려내고 있는 작가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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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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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는 그야말로 서점가의 '스테디셀러'이다.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항상 자기계발서는 몇 권씩 순위에 있고, 매년 가장 많이 팔린 책을 집계할 때도 역시나 자기계발서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런데 과연 '자기를 계발하기 위해' 자기계발서를 읽을 필요가 있는 걸까? 글쎄, 나는 의문이다. 사실 자기계발서는 거의 읽지도 않거니와, 읽어야 할 상황이 생겼을 때는 독서하는데 이삼십 분이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저 정보의 나열, 요약, 정리가 되어 있는 노트 같다는 느낌이라 깊은 사유 같은 건 할 필요도 없고, 대충 훑어 보기만 해도 대략적인 내용 이해가 가능하니 말이다. 물론 누군가는 자기계발서가 개인의 삶을 향상시키고, 스스로의 능력을 계발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믿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독자들은 저자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위해 일할 뿐이다. 조금 식상한 표현이라는 건 알지만, 바로 여기에 독서의 풍부함이 있다. 또한 바로 여기에 부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다. 당신은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가 되고 싶어 하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다. 당신은 스스로를 위해 일해야 한다. 노동의 열매는 달콤하지만 영양가가 높지는 않다. 그러니 당신의 열매를 남과 나누지 말고, 기회가 닿는 한 남의 열매에 눈독을 들여야 한다.

 

이 책은 신간 평가단 추천 페이퍼를 작성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제목 때문에 당연히 자기 계발서인줄 알았으나 소설이란다. 자기계발서를 유쾌하게 비판하는 글로 각 장이 시작되는 '소설'이라고 해서, 자기계발서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나였기에 제목만큼이나 도발적이고 거침없는 글 일거라 기대가 되었다. 모신 하미드는 우선 자기계발서라는 말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이야기를 시작해놓고는, 이 책은 자기계발서라고 말한다. 제목 그대로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을 보여주겠다고 말이다. 2인칭 소설의 주인공은 '당신'으로 지칭된다. 아시아 어느 나라의 가난한 시골 집안에서 태어난 당신은 도시에 나가 가족들 중 유일하게 대학에 다니고, 사업을 해서 '더럽게 부자'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계발'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열두 단계에 이르는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 저자는 그 열두 단계를 각 장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진행한다. 당신은 우선 도시로 나가, 교육을 받고, 사랑에 빠지지 않으며, 이상주의자를 멀리하고, 고수에게 배우고, 스스로를 위해 일하며, 폭력 사용을 마다하지 않고, 관료와 친구가 되며, 전쟁 기술자들을 후원하고,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고, 기본에 충실하며, 출구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엄청난 단계를 거쳐, 부지런히 자기계발을 하면 과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 과연 우리도 부자가 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당신이 이 이야기를, 내가 이 이야기를 창조하는 동안, 당신에게 그 동안 어땠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당신의 손을 잡아줄 사람, 당신과 함께 비를 피해 달려가던 사람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나는 잠시 여기서 당신과 함께 머물고 싶다.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당신의 허락 아래 공간을 초월해, 당신의 창조물 속에 머물고 싶다. 그것은 나를 애타게 하는 미지의 세계다.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해서 상상조차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런 상상은 참으로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이입이라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능력이다.

마지막 장에 이르면 저자는 '사실 이 책이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가 되기 위한 가장 완벽한 지침서는 아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가. 소설의 형식을 빌고 있는 자기계발서? 아니면 자기계발서를 흉내 낸 소설? 중요한 것은 아시아 어느 나라의 가난한 시골 집안에서 태어난 당신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지금 한국에서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인 당신으로 끝난 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3분 만에 상대를 설득하고, 7가지 습관으로 승자가 되며, 수세기 동안 단 1퍼센트만 알고 있는 부와 성공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책들을 읽으며 성공하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그렇게 더 나아지고 싶다는 동기가 항상 바라는 것을 다 이루게 만들어주지는 않겠지만, 과정 자체에서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 그대여, 굳이 자기 계발서 따위에 의존해서 타인의 도움을 구하려고 애쓰지 말라. 자신의 삶은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바뀔 수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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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엄마 그림책이 참 좋아 33
백희나 글.그림 / 책읽는곰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일이 바로 '육아'라 가끔은 누구나 하는 걸 과연 힘들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고 어려운 건 어쩔 수가 없다. 돈과 경력을 포기할 수 없어 눈물겨운 워킹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엄마도, 종일 집에서 아이만 돌봐야 하는 전업 주부인 엄마에게도 말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모자라 퇴근 하자마자 집에 와서 제2의 일을 시작해야 하는 워킹맘의 고달픔이야 실제 엄마가 아닌 사람들도 어느 정도 알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24시간 아이와 함께 지내느라 온 마음과 시간을 다 투자해야 하는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맘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오죽하면 매일같이 그만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던 직장 생활을 다시 하는 게 아이를 종일 돌보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겠는가.

 

서울에 엄청난 비가 쏟아진 어느 날, 직장에 있던 호호 엄마에게 연락이 온다. 호호가 열이 심해 조퇴를 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호호를 부탁하려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고 점점 걱정이 된다. 그러다 어렵게 전화 연결이 되고 엄마는 통화 속 상대가 호호의 할머니라 생각하고 호호를 부탁한다. 일 끝나자마자 곧장 갈 테니, 집에 가서 아픈 호호를 좀 돌봐 달라고.

 

'나더러 엄마라니..... 잘못 걸려 온 전화 같은데.

아이가 아프다니 하는 수 없지.

좀 이상하지만 엄마가 되어 주는 수밖에.'

 

그렇게 해서 '이상한' 엄마는 호호네 집을 찾아 내려온다.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호호는 낯선 아주머니를 보고 조금 겁이 났지만, 따스한 목소리에 어쩐지 마음이 놓인다.

이상한 엄마는 호호네 집 안 곳곳을 뒤져 냉장고에서 달걀을 발견해, 호호가 먹고 싶다는 달걀국과 프라이를 만들어 준다.

따뜻한 음식을 먹고 기분이 조금 나아진 호호를 이상한 엄마는 가장 크고 푹신한 구름을 골라 눕혀준다.

걱정 말고 한숨 푹 자고 나면 엄마가 올 거라고.

하루 종일 호호를 걱정하느라 호호 엄마는 얼마나 신경이 쓰였을까. 아마 마음은 호호에게 가 있어서 일도 제대로 못하고, 퇴근하자 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이상한 엄마를 만난 호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이상한 엄마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호호 엄마는 집으로 가 무사히 호호를 만나게 되었을까.

 

"호호야!"

잠결에 엄마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호호야! 어딨니?"

 

아이가 아프게 되면 거의 하루 종일 정신이 나가 버리곤 한다. 특히나 아직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가 아플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우는 건 다반사고, 일분 일초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혹시라도 아이가 잘못 될 까봐 밥 먹는 것도 잊어 버리고, 해야 할 일도 전부 미루고, 걸려오는 전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이 시뻘개지도록 종일 조바심을 내며 아이 곁을 지킨다. 엄마에게 아이란 그렇게 생의 모든 것. 전부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백희나 작가의 이번 신작은 일하는 엄마들, 고달픈 워킹맘들을 위한 스토리이긴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을 그려내고 있다. 아이가 바로 눈앞에 있다고 해서 걱정이 되지 않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니 말이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지만, 나는 이 짧은 이야기가 마치 나를 위한 것 같아서 읽고 또 읽고, 보고 또 보았다. 그냥 이 짧은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그냥 위로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엄마들은 이렇게 힘들게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비록 당신이 생각하기에는 부족한 것 투성이라도 사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여. 태어날 때부터 여자이기 때문에 당연한 수순처럼 겪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자. 생물학적으로 엄마가 되었으니 아이를 케어하는 능력까지 한꺼번에 갖추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지 말자. 당신은 엄마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람이다. 당신도 힘들 때는 위로 받아야 하고, 지칠 때는 응원이 필요하고, 아플 때는 의사가 있어야 하며, 어려운 일 앞에서는 도와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 버리지 말자. 엄마는 슈퍼 우먼이 아니다. 엄마라면 당연히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고, 무슨 일이든 견디고 감수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든 참아야 하고, 언제나 모든 걸 희생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현실을 살고 있는 엄마들에게, 백희나 작가는 조용하고 따뜻한 위로를 안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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