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프런트 직원이 총에 맞아 죽고, 객실에 있던 여자는 강간의 흔적과 함께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용의자는 여자와 함께 체크인 했던 남자로 경찰은 지문감식을 통해 그의 신원을 파악해 조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집에는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물건 외에는 없었고, 그가 누구인지 알만한 단서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소속된 회사도 유령회사에, 그가 졸업한 걸로 확인되는 대학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고, 초등학교건, 보건 기록이든 그에 관한 기록은 모두 찾을 수 없었다. 이쯤에서 자연스레 드는 의문, 대체 이 남자 정체가 뭐야?
그의 이름은 게이지 하트라인이다. 물론 본명은 아니다. 그는 미 육군에 입대해 훈련을 수석으로 마친 후 초고속으로 진급해 특수부대 후보생으로 차출되었고,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으로 보스니아에서 포격으로 인해 전사한 걸로 확인된다. 당연히, 이것은 기록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살짝 평균 키 이상에 체격 좋고 100킬로 조금 안 되는 몸무게. 머리는 연한 갈색에 짧고, 새치 조금 도는 턱수염이 덥수룩해. 독일어 완벽하고 미국식 영어하고."
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게이지 하트라인을 이보다 완벽하게 설명하긴 어려울 것이다.
현재의 게이지는 누가 보더라도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처럼 보인다. 옷차림도 평범했고, 근육질의 체격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며, 언제나 고개를 숙인 채 걸었고, 혹시라도 걷다가 남과 어깨라도 스치면 예의 바르게 죄송하다고 인사하는 사람이었으며, 여자를 위해서 언제나 문을 열어 주었고, 수작을 부리지도 않았으며, 남의 일에 개입하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관심 있게 자세히 본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정글과 사막에서 입은 자잘한 상처로 얼룩진 크고 강한 손, 벙벙한 옷 밑으로 감춰져 있는 철저하게 가꾼 강인한 몸, 근육으로 꽉 들어차서 날렵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체격은 그를 절대 평범하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드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게이지의 겉모습만으로는 그의 과거를 아무도 짐작할 수 없거니와, 그 자신에게도 과거란 필사적이고, 절대적으로 감추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조금씩 드러나는 그의 과거는, 현재의 그가 벌이는 행동에 어떤 실체를 부여해 점점 하나의 뚜렷한 캐릭터를 구축해나간다. 과거 최정예 요원으로 선발되기 위해 그가 받은 무시무시한 훈련들과 그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그 사건 이후 철저히 혼자로서 살아온 삶의 흔적들 또한 모두 현재의 그를 더 비밀스럽게, 더 매혹적인 캐릭터로 만드는 데 한 몫을 한다. 그는 과거의 그 사건 이후 더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자신의 기술을 비폭력적인 일에만 동원해 피를 볼 가능성이 있는 일은 무조건 피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그 날 이후로는 단 한 명도 죽인 적이 없다. 이번 사건에 휘말리기 전에는 말이다.
이 일기장들은 안네 프랑크 이래 가장 엄청나고 가장 스펙터클한 문학적 발견이라고 전하심 돼요." 잠시 뜸을 들인 뒤 이어 말했다. "아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능가할 거요. 영화, 부수적 저작물과 연구는 물론이고 수 개월간, 수주가 아니라 수 개월간, 밤마다 뉴스 방송에 오르내릴 겁니다. 20세기에 가장 악명 높은 인물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릴 만한 파격적인 일기장이라고요.
그렇게 조용히 살고 싶었던 게이지를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만드는 시발점은 바로 프랑스 정보부의 의뢰를 수행하던 중에 유대인 학살의 희생자가 남긴 일기장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게다가 그 일기장 속 여인은 평범한 유대인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자였던 아돌프 히틀러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에게 학대당했던 여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히틀러가 유대인인 사생아를 남겼다니, 세계 역사가 놀랄 만한 일이 아닌가. 사실 히틀러는 정치적인 이유로 생전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염문설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반 자살한 그의 연인과 죽기 전 결혼 서약을 함으로써 공식적인 아내로 기록되긴 했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자식은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진위 여부는 물론,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자식을 남긴 적이 없던 그의 자손이 생존해 있다는 주장과 자신이 히틀러와 연인 관계였고 그의 자식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았기에, 척 드리스켈은 바로 그런 역사의 미스터리에서 이 작품의 모티브를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소재를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 작품에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이면에 숨겨진 충격적인 진실의 폭로만큼이나 더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다. 아니 대체, 안네의 일기를 넘어선 놀라운 기록이라고 여겨지는 그것보다 더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싶겠지만, 그것이 바로 척 드리스켈의 진정한 한 방이다. 이렇게 엄청난 폭탄을 초반부터 빵하고 터트려놓고선, 정작 시종일관 작품에 몰입도를 주는 것은 다른 지점이다. 물론 그건 당신이 직접 이 책을 읽어 보아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면, 게이지가 공개되면 전 세계 역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충격적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일기장의 존재에 충격을 받고 있을 때, 그에게 바로 그 일을 맡겼던 장은 그가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뭔가 대단한 걸 발견했다는 걸 알아 차리고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한편, 게이지는 일기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선 그것의 가치를 알아 보기 위해 중고 서점을 운영중인 연인 모니카의 사촌오빠 미셸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재정적으로 궁지에 몰렸던 미셸이 일기장을 팔아 보려고 하다 프랑스 마피아와 마찰이 생긴다. 잔인한 폭력과 살인도 서슴지 않는 악질의 프랑스 마피아 두목 '니키'와 그 일당들, 그리고 프랑스로 휴가를 왔다 우연찮게 이 일에 관심을 갖게 된 미 육군 대위 데미안 엘리스는, 그리고 독일 경찰과 프랑스 경찰, 미국의 정보부원들까지. 각자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 복잡하게 얽힌 관계가 게이지 하트라인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엮이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종횡무진 각국을 누비며 시종일관 쫓고 쫓기는 자의 긴장을 격렬한 박동으로 엄청난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킨다. 어떻게든 자신을 쫓는 이들로부터 일기장을 지켜내어 기록 속에 있는 히틀러의 자손에게 일기장을 돌려주려하는 게이지의 신념은 결국 엄청난 것을 희생하게 만드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이 작품은 첩보 액션 장르만의 명쾌한 스릴과 허구의 이야기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극강의 재미를 통해 완벽하게 엔터테인먼트 적인 역할을 수행해낸다. 사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가장 중요하고 일차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재미, 오락으로서의 목적이 아니던가. 그 누구도 공부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단지 교훈을 얻기 위해 재미없고 지루한 소설을 읽으려 들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정말 '끝장나게' 재미있다.
"저도 압니다. 제 잘못이 없었다는 거 압니다. 대령님 잘못도 없었습니다. 살면서 나쁜 일들은 생기기 마련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좋은 일을 해서 나쁜 일을 상계시켜야죠. 잘못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할 수는 있을 겁니다."
자, 여기서 대중들이 사랑하는 수많은 첩보 영화들을 잠시 떠올려 보자.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나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에단 헌트. 이들은 모두 넔을 잃을 만큼 재미있는 최상급 대중 영화들이다. 그리고 그 속엔 잘 만들어진 시리즈물 만이 창출할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중심에 있다. 긴장감 넘치는 서스펜스에 박력 넘치는 액션이 시종 꼬리를 무는 탁월한 오락영화가 첩보 액션 장르의 걸작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탁월한 영화적 테크닉도 필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인물의 힘이다. 나는 게이지 하트라인 시리즈를 제임스 본 시리즈와 비교해보고 싶은데, 이유는 바로 제이슨 본이 마치 살인병기로 만들어진 것처럼 탄탄한 액션을 선보이지만, 인정 앞에선 흔들리는 킬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연인을 죽인 킬러를 만난 그는 그녀가 살인을 원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한다. 그가 진실한 마음과 도덕성을 지닌 캐릭터이기에, 언제나 그를 위기에 몰아넣는 요인 또한 바로 그 도덕성인 것이다. 그는 살인을 멈추고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폭력만을 행사하고자 한다. 그는 어린아이들과 함께 있는 암살 대상자를 죽이지 못해 총상을 입은 채로 바다로 뛰어들고, 우연히 암살 대상자와 같이 있었기에 죽여야만 했던 여인에게, 기억을 잃은 다음에조차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사려깊은 킬러란, 매력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게이지 하트라인은 과거 군 작전 수행 시 뜻하지 않은 실수로 민간인 아이들을 죽게 한 이후로 죄책감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 사건 이후로는 단 한 명도 죽인 적이 없으며, 자신의 기술을 폭력적인 일에만 동원했고, 피를 볼 가능성이 있는 일은 무조건 피했다. 당장 월세와 생활비가 궁한 처지라 각국 정보부에서 청탁하는 비폭력적인 업무만을 싼값에 의뢰 받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살인 용의자로 오해 받아 쫓기고 있는 와중에도 그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필요한 정보를 취하기 위해서 호텔 직원을 잠시 기절만 시키고, 자신을 추적한 경찰관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에도 그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 그의 인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가 바로 그 순간이기도 했는데, 게이지를 쫓다가 오히려 그에게 경찰 재킷을 빼앗기고 포박당한 경찰은 그 긴장되는 상황에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자신을 느낀다. 게이지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있으면 해치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왠지 믿음이 갔던 것이다. 게이지에게서 어떤 악의도 발견하지 못했고, 폭력적인 상황에서 조차 상대에게 예의를 다하는 진심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과거 군에서 요원으로 복무했을 때의 평가 역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나무랄 데 없는 정직함과 성실함' '직업 군인의 표상' '뛰어난 지성과 논리적 사고력' 그와 함께 일을 했던 상관들은 모두 그에게 빛나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정도까지만 보더라도, 게이지 하트라인 역을 어떤 배우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맷 데이먼의 제이슨 본만큼 완벽한 캐릭터가 탄생할 수도 있을 거라고 자연스레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그레타의 일기>는 판권이 팔려 영화로도 제작 중이라고 하니 말이다.
게이지는 자리에 기대어 모니카의 음성으로 그녀가 일기 내용을 전해주는 소리를 들었다. 두 눈에 눈물이 잔뜩 고였다. 그레타와 모니카. 비극적인 영혼들.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찢긴 여인들.
손으로 어깨를 문질렀다. 어깨 위에 숨겨 놓은 정의의 여신 테미스의 문신 위에 손을 가만히 올려 뒀다.
쓰다 보니 리뷰가 좀 많이 길어졌지만, 사실 할 수 있는 온갖 미사여구를 다 끌어온다고 해도 이 작품의 재미를 내가 글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저, 별점 다섯 개의 곱배기를 준다고 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재미있다는 것만은 장담한다. 그리고 아마도 게이지 하트라인이 리 차일드의 잭 리처나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존 코널리의 찰리 파커, 켄 브루언의 잭 테일러, 이언 랜킨의 존 리버스 등의 매력적인 캐릭터 만큼이나 오랜 생명력을 가지게 될 거란 것도 장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올해 초부터 5월 초까지 읽은 책이 86권이다. 그 중에는 헤닝 만켈, 이언 랜킨, 할런 코벤, 마이클 로보텀, 데니스 루헤인, 찬호께이, 프레드 바르가스, 요 네스뵈, 넬레 노이하우스까지 스릴러 분야에서 '재미'하면 절대 빠지지 않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도 난 이 작품을 내가 올해 읽은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고 싶다. 척 드리스켈이라는 다소 낯선 작가의 데뷔작이자 현재 시리즈가 4권 출간되어 있는 게이지 하트라인의 첫 번째 이야기인 <그레타의 일기>는 오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서 정말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한 부분이 없었으니 말이다. 순수하게 '재미'와 '스릴'을 줄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작품을 찾고 있다면, 당신에게 무조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시리즈로서 작품의 주인공이 가져야 할 매력과 비밀스런 배경, 그리고 방대한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배치하는 구성과 호흡, 영화와도 같은 장면 전환과 상상도 못했던 거대한 맥거핀 효과에다 수많은 인물들의 욕망이 얽히고 설켜서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지옥도까지 이 작품의 장점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게다가 올해 안에 게이지 하트라인 두 번째 시리즈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당신이 스릴러 분야의 책을 사랑한다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참고로, 다가오는 7월에, 무려 9년 만에 맷 데이면이 새로운 본 시리즈로 돌아오지 않나.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영화 <제이슨 본>과 관련된 마케팅을 펼쳐 <그레타의 일기>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 알려졌으면 하는데, 어려울래나. 하긴 이 작품 또한 영화화 될 예정이라 현실적으로는 무리한 바램일 것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이 딱 본 시리즈만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소박한 바램을 가져본다. 왜냐하면 그만큼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