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도시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18
퍼트리샤 콘웰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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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행사로 사람들이 붐비던 숲에서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20대 남자가 심장마비로 즉사했다. 맥박도 뛰지 않았고, 생명의 징후도 없었기에 구급대원은 사망상태로 확인하고 영안실로 보낸다. 그런데 밤새 냉장실에 있던 그 시신은 아침에 피를 꽤 많이 흘린 상태로 발견된다. 시신이 인계될 당시만 해도 남자에게선 피가 흐르지 않았었는데, 죽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피를 흘릴 수도 있는 걸까. 구급대원들이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 걸까. 만약 영안실 냉장실 안에서 남자가 죽었다면, 그렇다면 아직 살아 있는 남자를 시트로 덮어, 영안실에 보관했다는 말이 된다. 이건 뭐 공포 영화도 아니고 말이다.

'숨기지 마.' 난 그에게 말한다.

하지만 그는 내게 숨기고 있다. 벤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만 쳐다보고 있다. 어둑한 계기판 불빛에 날카로운 옆모습이 비친다. 우리는 항상 이렇다. 비밀스러운 특정 정보들은 피한다. 우리는 비밀의 주위에서 춤을 춘다. 가끔은 거짓말도 한다. 처음부터 우리는 서로를 속였다. 그때 벤턴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우리 두 사람은 상대방을 속이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그건 자랑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직업적인 필요에 의해 서로를 속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벤턴은 비밀의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 난 진실을 원한다. 내겐 진실이 필요하다.

마침 스카페타가 6개월간 군법의관으로 근무 후 이제 복귀하려는 차에 이런 사건이 생겨 버렸다. 복귀 전 그녀가 막 부검을 마친 사체는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폭발 사고로 희생된 흑인이다. 아들의 어머는 죽은 아들의 정자를 추출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주입하는 일을 하게 해달라 요구하고, 그걸 거절하자 그녀에게 인종차별주의자라며 항의를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 자기 집 뒷마당에서 놀던 여섯 살짜리 아이의 머리에 누군가 못을 박아 죽인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범행을 자백한 사람의 어머니가 편지로 하소연을 한다. 아들이 아스퍼거 증후군이라 사람들의 압력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하버드에서 조니는 무인 정찰 차량에 관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을 했는데,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무인 정찰 차량이란 심장마비로 즉사했던 남자의 아파트에서 나온 모트와 같은 군대용 로봇이었기 때문이다. 스카페타는 이들 사건들 이면에 대량 살상을 유발할 수 있는 음모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고, 자신이 싸우고 있는 적이 누구인지 실체를 쫓아가기 시작한다.

죽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작품은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그것도 무려 18편이다. 국내에 출간된 시리즈로 아마 가장 많은 편수가 아닐까 싶은데, 법의학 스릴러가 독자들에게 얼마나 흥미로운 분야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재미있는 건,  이 시리즈에서 콘웰이 서술하는 기술들은 실제 법의학에서 사용되는 최첨단 기술들이라 매우 리얼하고, 복잡하고, 때로는 어렵기까지 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정보들로 가득한 법의학 스릴러의 시리즈가 이렇게까지 지속될 수 있다는 건, 분명 이 작품에 대단한 무언가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이 시리즈가 미드 CSI의 모태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그것에 힘을 더해주고 있고 말이다.

처음으로 죽은 환자의 차갑고 아무 느낌이 없는 몸에 메스를 대고, 처음으로 Y자형 절개를 했을 때 나는 뭔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 의사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신이나 영웅일 수도 있고, 죽음조차 이겨낼 수 있는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렸다. 나 자신을 포함한 어떤 생명체도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거부했다....아마 병리학을 선택한 덕분에 나는 대부분의 의사보다 정직해졌을 것이다. 죽은 사람들은 내가 아무리 정성껏 도와줘도 나나 내 의사로서의 태도에 감동받지 않는다. 그전과 똑같이 죽은 상태일 뿐이다. 그들은 감사 인사를 한다거나,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낸다거나, 아이들에게 내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다. 그건 병리학을 선택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을 실감한다는 건, 해군에 입대해서 아프가니스탄 산맥에 배치되고 나서야 진짜 전쟁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과 똑같다.

이번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10년 만에 부활한 스카페타의 1인칭 시점 서술 방식일 것이다. 시리즈의 팬 입장에서야 수년간 듣지 못했던 목소리를 만나게 되는 반가움이 있을 테지만, 만약 이 작품으로 시리즈를 시작한다면 이 방식이 조금의 어려움을 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의 진짜 이면을 그녀가 발견하게 되기까지 숨겨진 부분들이 많고, 엄청난 정보들과 복잡한 인물들의 관계와 그들간의 이익 관계 등이 얽혀 있어 플롯을 파악하는 것이 극중 화자인 스카페타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반부의 진행에선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고, 몰입감도 좀 약한 편이다. 중반부까지 스카페타에게 감정을 이입해 읽어 나가다 보면, 대체 여기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던 거냐고 그녀처럼 소리지르고 싶어지니 말이다. 물론 다소의 지루함을 참아낸다면 스카페타 시리즈 특유의 탄탄한 재미를 결국 만날 수 있지만, 이번 시리즈는 조금의 인내는 필요하다. 연구실을 둘러싼 모종의 음모와 군대와 연관된 숨겨진 과거의 기억 등 그 동안 시리즈를 차근차근 읽어왔던 이들만 파악하기 쉬운 부분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리즈물 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 바로 인물들의 성장과 변화,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쌓아가면서 맛볼 수 있는 재미는 그 어떤 작품보다 스카페타 시리즈가 최고 아닐까 싶다. 처음, 마흔 살의 나이로 법의국장에 부임한 스카페타 박사와 그녀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던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의 강력반 형사 피트 마리노, 스카페타의 조카인 열살 컴퓨터광 루시, 점잖은 FBI 프로파일러인 벤턴 웨슬리에서 시작했던 이 시리즈는 18편까지 진행되면서 인물들이 나이를 먹고, 관계를 쌓고, 변하기도 하면서 그들만의 ''을 구축해나간다. 스카페타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던 루시는 어느 샌가 그녀의 곁에서 업무를 서포트해 주는 든든한 인력이 되었으며, 내연의 관계로 발전했던 벤턴과는 결혼해 부부로 생활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스카페타 주변의 인물들이 등장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녀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면서 이들은 점점 페이지 바깥으로 나와 살아 쉼 쉬는 캐릭터들로 성장하고 있다. 그것이 앞으로의 시리즈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책장에서 잠자고 있는 기존 시리즈들을 다시 한번 꺼내보게 될 계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사망했어도 시신 자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역시나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 역시 독자를 배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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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샐러드 - 밥반찬이나 술안주로도 제격인 야채 듬뿍 가정식 샐러드 100가지
노구치 마키 지음, 김성은 옮김 / 황금부엉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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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매일같이 샐러드를 만들고 있다. 채소를 원래 좋아하냐고? 노노. 샐러드 바에 가더라도 절대 풀 종류는 가져오지 않는 나이기에, 채소랑 원래 친하지 않다. 그런데 요즘 샐러드랑 억지로 친해지려고 하는 이유인 즉, 업무 특성상 점심을 자주 거르곤 하는 남편을 위해 도시락으로 샐러드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워낙 채소를 좋아하기도 하고, 샐러드야 아무 때나, 업무를 하는 와중에도 간편하게 먹을 수 있어서 시작한 건데, 어느덧 4개월째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야채 듬뿍 가정식 샐러드가 무려 100가지나 있다고 해서, 읽기도 전부터 호기심이 생겼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샐러드 레시피가 꼭 필요한 나에게 멋진 팁이 되어주길 바라며, 가정식 샐러드 레시피를 살펴 보았다.

기존에 보아왔던 샐러드 레시피북들이 거의 국내 저자들의 책이었던 탓에, 일본 저자가 쓴 <오늘의 샐러드>는 일본 가정식 특유의 심플함이 돋보이는 메뉴들이 많았다. 서양식 샐러드와 퓨전 샐러드도 구분되어 있었지만, 일본식 샐러드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 다른 레시피 북들과의 차별화가 아닐까 싶다.

 

자 샐러드, 당근 보리 샐러드, 고등어 통조림 샐러드, 토마토와 아보카도 바질 샐러드 등.. 반찬으로 사용할 수 있는 메뉴들도 돋보였고, 굴 오일 샐러드, 문어와 대두 파슬리 샐러드 등의 메뉴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저자 만의 개성이 돋보이는 메뉴였다. 일본식 샐러드 메뉴는 더욱 독특했는데, 유부 고명 샐러드, 파 두부 낫토 샐러드, 참마와 오이 매육 샐러드 등은 생각도 해보지 못한 재료들이라 그들이 섞여 어떤 맛을 낼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샐러드에 어울리는 드레싱도 10가지나 소개되어 있는데, 흔히들 자주 사용하는 시저 드레싱이나 요거트 드레싱, 레몬드레싱, 발사믹 드레싱, 사우전 아일랜드 드레싱, 머스터드 드레싱등은 이 책에 소개되어 있지 않다. 대신 참깨 드레싱, 초밥식초 드레싱, 고추냉이 마요네즈, 양파 드레싱, 태국식 드레싱등 주로 일본식 드레싱들이 소개되어 있어 새로운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책에 소개된 레시피 중에 30가지는 뜯어서 레시피 카드로 쓸 수 있도록 별도로 수록되어 있다. 요리할 때마다 책을 펼쳐놓고 레시피 확인하느라 번거로웠던 주부들을 위한 굿 아이템이 아닌가 싶다.

남편 도시락으로 시작한 샐러드는 이제 가끔은 다이어트 중인 동생을 위해서도, 그리고 아이 때문에 제대로 끼니를 챙겨먹기 힘든 나를 위해서도 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온갖 종류의 드레싱이며, 재료들이며, 다양하게 만든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샐러드 레시피북을 여러 권 뒤적여보고, 인터넷 레시피를 찾아보기도 하고, 티비 레시피를 따라해 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매일같이 샐러드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색다른 레시피가 필요했다. 나처럼 웬만한 샐러드는 다 만들어보거나 먹어본 사람들에게, 이 책은 특별한 메뉴들을 많이 소개해주고 있어 활용도가 높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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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여름 스토리콜렉터 4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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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삼킨 소녀>에서 열다섯 주인공 셰리든은 강간, 낙태에다 우발적인 살인까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순간들은 모두 맞닥뜨렸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싶은 것들을 겪어야 했던 어린 소녀의 삶은 과연 이제 평탄해졌을까. 그러나 <끝나지 않는 여름>에서는 그녀가 전편에서 마주해야 했던 그 모든 일들보다 더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 잔인하고, 더 충격적이고, 더 혼란스러운. 사실 전작을 읽었을 때만 해도 엔딩 장면 이후 더 이야기가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농장을 떠난 셰리든에게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랬나? 내가 그를 믿은 건가? 그래, 그랬다. 내가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게 될 학교의 심리상담사인 패트릭 매커보이 박사는 객관적인 사람이다. 친절하고 싹싹했으며 이해심이 많았고 잘생겼다. 그것도 아주 미남이다. 그의 아내는 지금 수백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고,이 집에는 그와 나뿐이다. 내가 안긴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나에게 키스할까? 나와 잘까? 아니면 유혹을 물리치고 나를 밀어낼까? 이런 상상을 하니 심장이 두방망이질했다. 나는 시선을 떨어뜨리고 손가락을 꼬았다. 이런 생각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남자가 친절하게 대하거나 보호해주거나 위로해주면 나는 왜 곧장 섹스를 떠올리는 걸까? 내가 비정상인가? 시드니가 퍼부었던 욕설이 떠오르면서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 불에 덴 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열다섯 그 해 여름, 셰리든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었다.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고, 스스로가 어른인 줄 알았는데, 그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전작에선 엄마였던) 레이첼 이모가 벌을 줄 때도 고집을 부리며 불손하고 반항적으로 대응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 일쑤였던 다혈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사실 열다섯 이라는 나이에는 걸맞지 않게 문란한 애정 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3주 동안 거의 매일 섹스를 하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나서도, 단 세 시간 만에 잘생긴 카우보이를 만나 다시 몸이 달아올랐고, 남자가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주어도 섹스부터 생각하는 구제불능이었다. 거기다 친 오빠에게 하마터면 성폭행을 당할 뻔하고, 자신의 선생인 사람은 한때 그녀의 정부였고, 변태 경찰에게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첫사랑은 떠났고, 부모님은 그녀를 속였고,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는 그녀를 이용했다. 점입가경으로 그녀는 성폭행을 당했고, 한 남자와 아기를 죽인 살인자가 되고 만다. 그리고 스스로 이런 죄를 지었으니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셰리든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였다. 열 여덟 살이 되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믿었던 거다. 여긴 완전히 지옥이었으니,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 지루한 농부들의 땅을 떠날 거라고 생각했던 셰리든의 삶은 과연 그 이후 어떻게 됐을까.

내가 예전에 거짓말을 많이 하고 숨기는 것이 많았던 이유는 어쩌면 레이첼 이모가 유도질문의 대가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질문들에서 처벌을 예상할 수 있었다. 작은 거짓말이 고통과 언짢은 일을 막아준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어릴 때 깨달았다. 물론 처음에는 오로지 자기방어를 하느라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을 테지만 나중에는 거짓말이 생존전략이 되고, 결국은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반응이 됐다.

, 그리고 이년 뒤, 열일곱이 된 셰리든의 삶이 <끝나지 않는 여름>에서 그려진다. 그런데 첫 장면부터 무시무시하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고용한 농장에서 엄청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무려 다섯 명이 죽고,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셰리든은 마침 그날 집을 떠난 참이어서 무서운 비극에서 희생되지 않았다. 그녀는 전작에서 밝혀진 그 진실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자신을 괴롭히는 에스라 오빠에게 현재의 연인인 목사 호레이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고 말았기에 호레이쇼를 위해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은 거였다. 결국 그녀는 모텔에서 에스라 오빠가 가족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고 충격을 받아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참극의 목적이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절망에 휩싸인다. 레이첼 이모는 언론을 통해 셰리든을 이 모든 비극의 원흉인 것처럼 떠벌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의붓 오빠들을 유혹한 배은망덕한 입양아로 알고 증오와 의심 섞인 눈으로 지켜보기 시작한다. 거기다 셰리든은 레이첼 이모가 자신의 시부모님을 살해했다는 사실까지 깨닫게 되고, 온갖 오명을 뒤집어쓴 상태로 다시 고향으로부터 벗어나려 도망치게 된다. 그 이후로 벌어지는 일들 역시 만만치가 않다. 대체 이 소녀에게 어디까지의 시련과 고뇌를 줄 것인지 작가에게 묻고 싶을 정도로, 그녀가 가는 곳마다 겪게 되는 것들과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셰리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아직, 지독한 여름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를 불쑥 깨운 꿈은 쉽사리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폴 서튼이 생각났다. 꿈속에서 그에게 느꼈던 감정이 떠오르자 내 몸이 욕망에 떨리기 시작해서 금방 부끄러워졌다. 빌어먹을,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아! 난 왜 실수에서 배우는 게 없을까? 사랑 받으려는 내 갈망은 지금까지 걱정거리만 안겨줬다. 하지만 모험을 감행할 용기가 없다면 나와 어울리는 사람을 어떻게 발견한단 말인가? 실망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겁쟁이라서 비참한 노파로 늙어갈 건가? 아니, 불안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숨어 지내기 싫었다.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제대로 살아가고 사랑 받고 싶었다!

전작에서는 너무도 파격적인 행동과 거침없는 사랑을 벌이는 모습에서 셰리든에게 공감하기가 쉽지가 않았는데, 그녀의 삶에 닥치는 풍파를 같이 느끼면서 보니 점점 안타까워지기 시작했다. 셰리든에게 걱정에 대해 이야기할 자매나 친한 여자 친구가 있었다면, 그렇다면 그녀의 삶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그녀는 언제나 아무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매번 모든 상황을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저 사랑 받고 싶었을 뿐인 10대 소녀에게 너무도 많은 시련과 고난은 그녀를 결코 평범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대체 그녀의 삶에 해피 엔딩이 오긴 올까. 마음이 아팠다. 사실 전작인 <여름을 삼킨 소녀>는 넬레 노이하우스 답지 않게 '소녀의 성장 소설'이라 지루하다는 평이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걱정은 접어 두어도 될 것 같다. 첫 장면부터 파격적인 스토리로 시선을 잡아 끌어, 스토리가 진행되는 내내 역시 넬레 노이하우스! 라는 생각부터 들테니 말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 작품은 전작인 <여름을 삼킨 소녀>를 읽지 않았더라도 전혀 상관없이 이야기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개인적으로 추천하자면, 이번 신작 <끝나지 않는 여름>을 먼저 읽고 나서, 플래시백으로 주인공의 과거를 만나는 느낌으로 <여름을 삼킨 소녀>를 만난다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작품의 강도가 훨씬 세고, 스토리도 더 다이나믹해서 몰입도가 좋은데다, 그렇게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되면 대체 이 소녀가 그 동안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인지 자연스레 궁금해지기 때문에 바로 그 때 그녀의 과거를 만나보면 가독성 면에서 금상첨화라는 거다. 사실 전편은 다소 루즈하고 지루한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순서를 바꿔서 읽으면 그런 부분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한 순간에 훅 읽어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나 이 작품을 읽게 되면, 넬레 노이하우스라는 작가가 추리 소설만 잘 쓰는 게 아니구나 싶은 감탄을 새삼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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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의 일기 밀리언셀러 클럽 146
척 드리스켈 지음, 이효경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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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프런트 직원이 총에 맞아 죽고, 객실에 있던 여자는 강간의 흔적과 함께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용의자는 여자와 함께 체크인 했던 남자로 경찰은 지문감식을 통해 그의 신원을 파악해 조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집에는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물건 외에는 없었고, 그가 누구인지 알만한 단서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소속된 회사도 유령회사에, 그가 졸업한 걸로 확인되는 대학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고, 초등학교건, 보건 기록이든 그에 관한 기록은 모두 찾을 수 없었다. 이쯤에서 자연스레 드는 의문, 대체 이 남자 정체가 뭐야?

그의 이름은 게이지 하트라인이다. 물론 본명은 아니다. 그는 미 육군에 입대해 훈련을 수석으로 마친 후 초고속으로 진급해 특수부대 후보생으로 차출되었고,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으로 보스니아에서 포격으로 인해 전사한 걸로 확인된다. 당연히, 이것은 기록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살짝 평균 키 이상에 체격 좋고 100킬로 조금 안 되는 몸무게. 머리는 연한 갈색에 짧고, 새치 조금 도는 턱수염이 덥수룩해. 독일어 완벽하고 미국식 영어하고."

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게이지 하트라인을 이보다 완벽하게 설명하긴 어려울 것이다.

현재의 게이지는 누가 보더라도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처럼 보인다. 옷차림도 평범했고, 근육질의 체격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며, 언제나 고개를 숙인 채 걸었고, 혹시라도 걷다가 남과 어깨라도 스치면 예의 바르게 죄송하다고 인사하는 사람이었으며, 여자를 위해서 언제나 문을 열어 주었고, 수작을 부리지도 않았으며, 남의 일에 개입하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관심 있게 자세히 본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정글과 사막에서 입은 자잘한 상처로 얼룩진 크고 강한 손, 벙벙한 옷 밑으로 감춰져 있는 철저하게 가꾼 강인한 몸, 근육으로 꽉 들어차서 날렵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체격은 그를 절대 평범하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드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게이지의 겉모습만으로는 그의 과거를 아무도 짐작할 수 없거니와, 그 자신에게도 과거란 필사적이고, 절대적으로 감추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조금씩 드러나는 그의 과거는, 현재의 그가 벌이는 행동에 어떤 실체를 부여해 점점 하나의 뚜렷한 캐릭터를 구축해나간다. 과거 최정예 요원으로 선발되기 위해 그가 받은 무시무시한 훈련들과 그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그 사건 이후 철저히 혼자로서 살아온 삶의 흔적들 또한 모두 현재의 그를 더 비밀스럽게, 더 매혹적인 캐릭터로 만드는 데 한 몫을 한다. 그는 과거의 그 사건 이후 더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자신의 기술을 비폭력적인 일에만 동원해 피를 볼 가능성이 있는 일은 무조건 피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그 날 이후로는 단 한 명도 죽인 적이 없다. 이번 사건에 휘말리기 전에는 말이다.

이 일기장들은 안네 프랑크 이래 가장 엄청나고 가장 스펙터클한 문학적 발견이라고 전하심 돼요." 잠시 뜸을 들인 뒤 이어 말했다. "아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능가할 거요. 영화, 부수적 저작물과 연구는 물론이고 수 개월간, 수주가 아니라 수 개월간, 밤마다 뉴스 방송에 오르내릴 겁니다. 20세기에 가장 악명 높은 인물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릴 만한 파격적인 일기장이라고요.

그렇게 조용히 살고 싶었던 게이지를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만드는 시발점은 바로 프랑스 정보부의 의뢰를 수행하던 중에 유대인 학살의 희생자가 남긴 일기장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게다가 그 일기장 속 여인은 평범한 유대인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자였던 아돌프 히틀러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에게 학대당했던 여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히틀러가 유대인인 사생아를 남겼다니, 세계 역사가 놀랄 만한 일이 아닌가. 사실 히틀러는 정치적인 이유로 생전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염문설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반 자살한 그의 연인과 죽기 전 결혼 서약을 함으로써 공식적인 아내로 기록되긴 했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자식은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진위 여부는 물론,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자식을 남긴 적이 없던 그의 자손이 생존해 있다는 주장과 자신이 히틀러와 연인 관계였고 그의 자식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았기에, 척 드리스켈은 바로 그런 역사의 미스터리에서 이 작품의 모티브를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소재를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 작품에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이면에 숨겨진 충격적인 진실의 폭로만큼이나 더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다. 아니 대체, 안네의 일기를 넘어선 놀라운 기록이라고 여겨지는 그것보다 더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싶겠지만, 그것이 바로 척 드리스켈의 진정한 한 방이다. 이렇게 엄청난 폭탄을 초반부터 빵하고 터트려놓고선, 정작 시종일관 작품에 몰입도를 주는 것은 다른 지점이다. 물론 그건 당신이 직접 이 책을 읽어 보아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면, 게이지가 공개되면 전 세계 역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충격적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일기장의 존재에 충격을 받고 있을 때, 그에게 바로 그 일을 맡겼던 장은 그가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뭔가 대단한 걸 발견했다는 걸 알아 차리고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한편, 게이지는 일기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선 그것의 가치를 알아 보기 위해 중고 서점을 운영중인 연인 모니카의 사촌오빠 미셸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재정적으로 궁지에 몰렸던 미셸이 일기장을 팔아 보려고 하다 프랑스 마피아와 마찰이 생긴다. 잔인한 폭력과 살인도 서슴지 않는 악질의 프랑스 마피아 두목 '니키'와 그 일당들, 그리고 프랑스로 휴가를 왔다 우연찮게 이 일에 관심을 갖게 된 미 육군 대위 데미안 엘리스는, 그리고 독일 경찰과 프랑스 경찰, 미국의 정보부원들까지. 각자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 복잡하게 얽힌 관계가 게이지 하트라인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엮이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종횡무진 각국을 누비며 시종일관 쫓고 쫓기는 자의 긴장을 격렬한 박동으로 엄청난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킨다. 어떻게든 자신을 쫓는 이들로부터 일기장을 지켜내어 기록 속에 있는 히틀러의 자손에게 일기장을 돌려주려하는 게이지의 신념은 결국 엄청난 것을 희생하게 만드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이 작품은 첩보 액션 장르만의 명쾌한 스릴과 허구의 이야기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극강의 재미를 통해 완벽하게 엔터테인먼트 적인 역할을 수행해낸다. 사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가장 중요하고 일차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재미, 오락으로서의 목적이 아니던가. 그 누구도 공부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단지 교훈을 얻기 위해 재미없고 지루한 소설을 읽으려 들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정말 '끝장나게' 재미있다.

"저도 압니다. 제 잘못이 없었다는 거 압니다. 대령님 잘못도 없었습니다. 살면서 나쁜 일들은 생기기 마련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좋은 일을 해서 나쁜 일을 상계시켜야죠. 잘못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할 수는 있을 겁니다."

, 여기서 대중들이 사랑하는 수많은 첩보 영화들을 잠시 떠올려 보자.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나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에단 헌트. 이들은 모두 넔을 잃을 만큼 재미있는 최상급 대중 영화들이다. 그리고 그 속엔 잘 만들어진 시리즈물 만이 창출할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중심에 있다. 긴장감 넘치는 서스펜스에 박력 넘치는 액션이 시종 꼬리를 무는 탁월한 오락영화가 첩보 액션 장르의 걸작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탁월한 영화적 테크닉도 필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인물의 힘이다. 나는 게이지 하트라인 시리즈를 제임스 본 시리즈와 비교해보고 싶은데, 이유는 바로 제이슨 본이 마치 살인병기로 만들어진 것처럼 탄탄한 액션을 선보이지만, 인정 앞에선 흔들리는 킬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연인을 죽인 킬러를 만난 그는 그녀가 살인을 원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한다. 그가 진실한 마음과 도덕성을 지닌 캐릭터이기에, 언제나 그를 위기에 몰아넣는 요인 또한 바로 그 도덕성인 것이다. 그는 살인을 멈추고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폭력만을 행사하고자 한다. 그는 어린아이들과 함께 있는 암살 대상자를 죽이지 못해 총상을 입은 채로 바다로 뛰어들고, 우연히 암살 대상자와 같이 있었기에 죽여야만 했던 여인에게, 기억을 잃은 다음에조차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사려깊은 킬러란, 매력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게이지 하트라인은 과거 군 작전 수행 시 뜻하지 않은 실수로 민간인 아이들을 죽게 한 이후로 죄책감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 사건 이후로는 단 한 명도 죽인 적이 없으며, 자신의 기술을 폭력적인 일에만 동원했고, 피를 볼 가능성이 있는 일은 무조건 피했다. 당장 월세와 생활비가 궁한 처지라 각국 정보부에서 청탁하는 비폭력적인 업무만을 싼값에 의뢰 받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살인 용의자로 오해 받아 쫓기고 있는 와중에도 그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필요한 정보를 취하기 위해서 호텔 직원을 잠시 기절만 시키고, 자신을 추적한 경찰관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에도 그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 그의 인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가 바로 그 순간이기도 했는데, 게이지를 쫓다가 오히려 그에게 경찰 재킷을 빼앗기고 포박당한 경찰은 그 긴장되는 상황에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자신을 느낀다. 게이지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있으면 해치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왠지 믿음이 갔던 것이다. 게이지에게서 어떤 악의도 발견하지 못했고, 폭력적인 상황에서 조차 상대에게 예의를 다하는 진심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과거 군에서 요원으로 복무했을 때의 평가 역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나무랄 데 없는 정직함과 성실함' '직업 군인의 표상' '뛰어난 지성과 논리적 사고력' 그와 함께 일을 했던 상관들은 모두 그에게 빛나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정도까지만 보더라도, 게이지 하트라인 역을 어떤 배우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맷 데이먼의 제이슨 본만큼 완벽한 캐릭터가 탄생할 수도 있을 거라고 자연스레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그레타의 일기>는 판권이 팔려 영화로도 제작 중이라고 하니 말이다.

게이지는 자리에 기대어 모니카의 음성으로 그녀가 일기 내용을 전해주는 소리를 들었다. 두 눈에 눈물이 잔뜩 고였다. 그레타와 모니카. 비극적인 영혼들.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찢긴 여인들.

손으로 어깨를 문질렀다. 어깨 위에 숨겨 놓은 정의의 여신 테미스의 문신 위에 손을 가만히 올려 뒀다.

쓰다 보니 리뷰가 좀 많이 길어졌지만, 사실 할 수 있는 온갖 미사여구를 다 끌어온다고 해도 이 작품의 재미를 내가 글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저, 별점 다섯 개의 곱배기를 준다고 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재미있다는 것만은 장담한다. 그리고 아마도 게이지 하트라인이 리 차일드의 잭 리처나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존 코널리의 찰리 파커, 켄 브루언의 잭 테일러, 이언 랜킨의 존 리버스 등의 매력적인 캐릭터 만큼이나 오랜 생명력을 가지게 될 거란 것도 장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올해 초부터 5월 초까지 읽은 책이 86권이다. 그 중에는 헤닝 만켈, 이언 랜킨, 할런 코벤, 마이클 로보텀, 데니스 루헤인, 찬호께이, 프레드 바르가스, 요 네스뵈, 넬레 노이하우스까지 스릴러 분야에서 '재미'하면 절대 빠지지 않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도 난 이 작품을 내가 올해 읽은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고 싶다. 척 드리스켈이라는 다소 낯선 작가의 데뷔작이자 현재 시리즈가 4권 출간되어 있는 게이지 하트라인의 첫 번째 이야기인 <그레타의 일기>는 오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서 정말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한 부분이 없었으니 말이다. 순수하게 '재미' '스릴'을 줄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작품을 찾고 있다면, 당신에게 무조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시리즈로서 작품의 주인공이 가져야 할 매력과 비밀스런 배경, 그리고 방대한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배치하는 구성과 호흡, 영화와도 같은 장면 전환과 상상도 못했던 거대한 맥거핀 효과에다 수많은 인물들의 욕망이 얽히고 설켜서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지옥도까지 이 작품의 장점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게다가 올해 안에 게이지 하트라인 두 번째 시리즈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당신이 스릴러 분야의 책을 사랑한다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참고로, 다가오는 7월에, 무려 9년 만에 맷 데이면이 새로운 본 시리즈로 돌아오지 않나.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영화 <제이슨 본>과 관련된 마케팅을 펼쳐 <그레타의 일기>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 알려졌으면 하는데, 어려울래나. 하긴 이 작품 또한 영화화 될 예정이라 현실적으로는 무리한 바램일 것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이 딱 본 시리즈만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소박한 바램을 가져본다. 왜냐하면 그만큼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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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탐정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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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짙은 빨간색 운동복에,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어린이 교통안전용 노란 우산을 든 소년이 허름한 탐정사무소를 찾아 온다. 어린 소년을 보며 사와자키가 맨 처음 한 생각은 이거다. 열두 살 미만 어린이가 탐정을 고용할 수 있을까? 혹은 그런 어린이 앞으로 발행한 탐정 비용 청구서가 정당한 것일까? 의뢰를 하겠다며 탐정 사무소를 찾은 열살 소년도, 그런 아이를 보며 당황스러워하는 탐정도, 모두 어딘가 평범하지 만은 않은 상황이다. 과연 소년은 무슨 일로 이곳을 찾은 것이며, 사와자키는 과연 열 살 꼬맹이에게 고용 당하는 탐정이 될 것인가. 이번 작품집은 시작부터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돈은 있어요. 그 사람을 내일 아침까지 지켜주는 데 얼마나 들죠? 여기 오만 엔이 있는데 모자라면....."

"잠깐만, 꼬마야." 내가 말했다. "다시는 돈 이야기 꺼내지 마. 난 너 같은 꼬마에게 고용되고 싶지 않아. 또 돈 이야기를 꺼내면 바로 문밖으로 쫓아낼 거야. 알겠니?

소년이 흠칫 놀라 수건을 떨어뜨리더니 얼른 집어 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은, 어린이인 네가 어른인 나한테 도움을 받고픈 일이 있는데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겠다는 거야. 하지만 나보다 네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 또는 경찰이 너를 더 잘 도와줄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쪽으로 넘길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소년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거짓이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모두 사악하지는 않듯 어린이라고 다 정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과작 작가로 유명한 하라 료의 작품답게 국내 출간도 매번 엄청난 기다림을 동반하는 것 같다. 데뷔 이래 19년 동안 단 여섯 권만 썼고, 사와자키 시리즈도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가는데 6년이 걸렸으며, 네 번째로 가는 데는 4년이 넘게 걸렸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즐기려면 기다림과 인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그래서 국내에서 출간되는 그의 작품도 역시나 그랬는데,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내가 죽인 소녀>에 이은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안녕 긴 잠이여>를 만나는데도 무려 4년이나 걸렸고, 그 이후 또 3년이 다 되어서야 다음 작품을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실제 이 작품이 출시된 것은 <내가 죽인 소녀> <안녕, 긴 잠이여> 사이였고, 사와자키 시리즈 유일의 단편집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단편'집이라는 거다. 그게 뭐 대단하냐고? 기존에 사와자키 시리즈를 한 권이라도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다들 알 것이다. 하라 료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어떠했는지 말이다. 예를 들자면 지난 세 번째 시리즈에서는 탐정이 의뢰인을 만나기까지 할애되는 페이지가 무려 100페이지였다. 대체 의뢰인은 언제 나오는 거냐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가 되어서야 등장해서는, 그제야 본격적인 스토리가 진행되는 미스터리라니. 그러니 하라 료의 작품을 제대로 즐기려면 인내, 또 인내가 필요하다는데 다들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단편'이라니. 이건 뭐 전체 스토리 자체의 분량이 작으니 애초에 이야기의 호흡이 길어질래야 길어질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이번 작품집을 읽기도 전부터 신이 났다. 이번에는 정말로 가볍게, 마음 편하게 하라 료를 만날 수 있겠다는 설레임 때문에 말이다.

".........세상에는 무보수라도 배워야 하는 일이 있겠지만 탐정 일은 그게 아니라는 건 내가 보증하마."

슌이치는 내 위악적인 말투에 미소를 지었지만 이윽고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가 말했다.

"아저씨가 진심으로 자기 일을 그렇게 생각하신다고는 믿지 않아요. 탐정이라는 일은 훨씬 남자다운 삶이랄까, 살아가는 방식이랄까, 그런 것에 깊이 뿌리를 내린..... 뭐라고 해야 좋을지. 저는 잘 표현할 수 없지만 어쨌든 자신이 믿는 것에 확신을 갖고......"

"어디서 그런 어설픈 소리를 배워왔니? 탐정은 그냥 직업이야. 뭔가 수상하고 야비하고 하찮은, 그런 직업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그런 직업이라는 각오도 되어 있지 않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지."

이 작품집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에는 어린이나 청소년이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고 있다. 다짜고짜 한 여인의 경호를 부탁하는 열 살짜리 소년부터, 자신의 친부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는 열여덟 소년, 자살하려는 유명 아이돌 여가수, 아내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아버지를 미행하는 고등학생 딸 등...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이다. 하지만 사와자키는 그들을 어린애로만 취급하지 않고, 언제나 어른과 대등한 인간으로 존중하고 성의 있게 대해준다. 어린애한테 고용 당하고 싶지는 않다며 뒤에서 투덜대긴 해도 말이다.

사와자키 탐정은 챈들러의 필립 말로만큼이나 시크 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인데, 장편에서만 빛을 발하는 줄 알았더니 단편에서도 독특한 아우마를 뿜어 내고 있다. 다소 무덤덤해 보이는 행동, 툭툭 뱉어내는 시크한 말투, 가끔은 위험한 순간에도 무모하게 용기 있고, 손익을 계산해서 자신만 빠진다거나, 정의롭지 못한 일에 가담하거나 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캐릭터. 그야말로 온몸으로 '하드보일드'를 보여주는 인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매혹적이다. 음식으로 치자면 ''이 아니라 '풍미'가 좋다고 해야 할까. 논리적인 사고보다 인생관에 대한 사색을 중시하지만 사건 해결에 있어서는 날카로운 예리함으로 기지가 번뜩이고, 트릭이나 의외성보다는 분위기로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립탐정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을 따라가노라면 어디선가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진짜 보일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사와자키는 십대 아이들 곁에서 옆집 아저씨 같은 탐정으로 등장하더라도, ...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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