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장르 중에 SF, 그리고 스페이스 오페라는 어렵다. 그래서 추리, 스릴러 등의 장르 분야보다도 더 소수의 독자들만 읽는다. 왜냐하면 과학의 발달된 미래를 그리고 있고, 황당무계한 과학적 공상은 재미를 보장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가가 구축한 세계의 설정들을 이해했을 때 가능한 지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들 작품들은 시작부터 처음 듣는 낯선 용어들이 잔뜩 등장해 겁에 질리게 만들고, 인물들 간의 관계를 파악하기도 전에 완전히 새롭게 구축되어 있는 특정 세계관을 이해하도록 거의 강요한다.
앤 레키의 데뷔작인 <사소한 정의> 역시 첫 페이지부터 행성, 함선, 보조체, 닐트인, 라드츠 우주, 저체온 세트, 케프, 병력 수송선.... 등등 낯선 단어들로 빼곡하다. 평범한 배경의 소설만 읽어왔던 당신이라면, 내용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단어들을, 문장들을 머릿속으로 읽고 흘려 보내면 된다. 그렇게 읽더라도 어느 순간 극중 화자에게 감정 이입해 광활한 우주를 체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테니 말이다. 이 작품의 놀라운 점이 바로 그것이다. SF나 스페이스 오페라를 처음 접한 독자들에게도 매혹적인 작품이라는 것.
세이바든을 눈 구덩이에서 끌어내려고 가뜩이나 빠듯한 시간과 돈을 들였는데, 대체 무슨 소용일까? 자기 뜻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면 세이바든은 또 어디 가서 얻어맞거나 케프를 할 테고, 그 지저분한 술집 같은 데에 제 발로 기어들어가 이번엔 정말로 죽어 버릴 텐데. 그게 세이바든이 원하는 바라면 내가 막을 권리는 없다. 그러나 죽고 싶다면 왜 남들처럼 자신의 뜻을 당국에 알린 다음 의사에게 가는 깔끔한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고, 인간인 체하며 지내온 지난 19년도 생각만큼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먼 미래 우주. 인간의 몸으로 무려 19년 동안이나 살아왔지만, 여전히 인간들이 하는 행동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엄청나게 많다고 생각하는, 이 작품의 일인칭 화자는 바로 인공지능이다. 당연히 AI는 실체, 즉 몸이 없기에 합병된 지역 사람들의 죽은 신체에서 만들어져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브렉은 우주선에서 떨어져 나온 보조체로, 스스로를 그 함선의 인공지능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처럼 행동하며 살고 있기도 하다. 라드츠 제국은 전 우주 인류를 병합하려 했던 그 날 이후, 19년이 지났고 닐트 행성에 홀로 나타난 브렉은 과거 그 현장에 함께 있었던 대위, 세이바든을 우연히 구해준다. 브렉은 현재 라드츠 제국의 지배자이자 자신의 창조자이기도 한 아난더 미아나이에게 복수를 하려고 무기를 찾아 다니고 있는 중이다. 아난더 미아나이는 3천 년 동안 라드츠 우주를 다스린 절대군주로 수천 개의 몸을 가지고 있어 병합 현장마다 존재했다.
그렇게 이야기는 라드츠의 지배자에게 복수를 꿈꾸고 있는 현재와, 그녀가 행성 궤도를 도는 병력 수송선이던 19년 전의 과거가 교차되어 진행되고 있다. 폭발의 유일한 생존자로 천 년 동안 냉동되어 있다가 깨어난 세이바든 대위의 현재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오만한 확신을 하던 과거와 대립하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정작 그녀를 구한 브렉은 세이바든을 돌봐주긴 하지만 연민하지는 않는다. 브렉은 창조주인 라드츠 군주의 명령에 따르고 충성해야만 하지만, 일련의 사건에 의해 그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 그래서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을 하게 된 상태에 있다. 물론 이것은 그저 인공지능의 능력상 오류로 읽을 수도 있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그것이 '자아'처럼 느껴진다는 데 방점이 있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도는 인간과 고장난 프로그램이라는 유사성. 인공지능에 의해 사회 바깥으로 밀려나는 인간과 그런 인간을 뛰어 넘는 인공 지능의 자아와 인간성이라는 아이러니.
"브렉은," 내가 미처 대답하기 전에 단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걸어서 지나치던 미아나이가 끼어들었다. "슬픔으로 미쳐버린 인공지능의 마지막 남은 조각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공지능이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인간처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점일 것이다. 세상에, 슬픔으로 미쳐버린 인공지능이라니... 작가는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힌 설정을 했을까. 감탄스럽기 그지 없다. 브렉은 감정이 없으면 사소한 결정을 내리는 일조차도 끝없이 이어지는 하찮은 사항들을 비교해야 하는, 몹시 괴로운 일이 된다며, 오히려 감정을 가지고 처리하는 편이 훨씬 쉽다며 그것을 논리적인 필요에 의한 실용성으로 가볍게 정리하고 있지만, 극중 가장 열렬하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이렇게 인간과 인공지능의 역할과 공존에 대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3인칭 대명사를 모두 '그녀'로 통일한 부분인데, 사실 그래서 초반에는 읽으며 인물들이 그인지, 그녀인지 헷갈려 의아해하기도 했다. 라드츠 제국에서 쓰는 언어는 성별을 구별하지 않는 다는 설정 때문인데, 남성처럼 보이는 대상에게 여성 대명사를 사용할 때의 문맥상 느껴지는 것은 소박한 충격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책 전반에 등장하고 잇는 여성 대명사의 퍼레이드는 스토리를 해석하는데 다소의 어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행간의 여백을 생각지도 못하는 것들로 채워주어 더욱 다채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생각은 덧없고, 생각은 일어나는 즉시 휘발된다. 생각이 행동을, 물질적인 형태를 낳지 않는다면. 희망이나 의도도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선택을 하도록 등을 떠밀고, 어떤 행위를 이끌어내는 대의나 명분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게 아무리 하찮은 행동이더라도 말이다. 행동으로 이어지는 생각은 위험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생각은, 아무것도 아니라기보다는 비겁하다.
최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단연 인공지능일 것이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이 만나 성사된 세기의 대결, 즉 인공지능과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그 대결 덕분에 막연했던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의 실체를 목격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간이 잘 살기 위해 만들어낸 기술이, 언젠가는 인간의 삶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제 기정사실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말이다.
얼마 전 일본에서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문학상 1차 심사에 통과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인공지능의 고독한 심정을 묘사한 A4 3장 분량의 단편 소설인데, 실재로 읽어보니 사실 그다지 흠잡을 만한 부분이 없는 작품이었다. 물론 수많은 패턴을 분석하고 이야기 구조를 종합해서 만들어낸 글이겠지만, 감성을 건드리는 문장까지 인공지능이 썼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기술이 아닌 예술은 인간이라는 존재만 할 수 있는 영역인 줄 알았는데, 기계에게 감성 마저 생긴다면 이제 멀지 않은 미래에는 정말로 기계가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 순간도 오게 되는 것이 멀지 않았다. 이 짧은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인공 지능에게 자아라는 게 있는 듯한 기분이 마저 들었으니 말이다. 최근에 국내에 내한했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인공지능은 지능은 획득했지만 자신의 개인성 즉 '자아'를 가지지는 못했다"며 "지능은 그 자체로 흥미롭지 않고, 더 중요한 건 자아로서의 인식"이라고 말하며, "로봇이 '나는 컴퓨터다, 나는 소프트웨어다'라고 인식하는 단계부터가 핵심"이라며 "SF적 얘기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인공지능에게 자아와 감정을 부여한 기가 막힌 소설이 출간되었다. 바로 앤 레키의 <사소한 정의>이다. 얼마나 놀라운지, 기가 막힌 지는 직접 읽어 보아야 한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앤 레키는 2005년에 지역 글쓰기 모임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지도를 받으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녀의 스승인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 <킨>과 <블러드 차일드>도 곧 출간될 예정이라는 거다. 엄청난 스승과 그만큼 더 뛰어난 제자의 작품을 한꺼번에 만나 볼 수 있다니, SF 장르의 팬들에게는 올해가 굉장한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