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의 조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신의 직업에 무려 '긍지'라는 것을 가지고 임하기란 사실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이 실제 꿈꾸던 일이랑 전혀 상관없는 것을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사람에게도, 오랜 시간 바래왔던 일을 하고 있지만 현실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름에 좌절하는 사람에게도, 별 생각 없이 매일매일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일하는 사람에게도 자신이 하는 일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은 어디 딴 세상 일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세상 어딘가에선, 보잘 것 없어 보이고, 가족들을 돌볼 수도 없고, 매 순간 자신의 안위마저 저당 잡혀야 하고, 그렇다고 그만큼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의 직업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가가야가 체포되었을 당시는 경시청 내부는 물론, 뒷 세계에서도 쾌재를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적을 만들기 쉬운 임무를 맡아 화려한 생활을 누려왔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2심이 시작되면서 가가야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각성제 수사나 권총 적발을 둘러싼 조직의 속사정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상사 명령이나 상사와의 관계에 대해 증언을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경찰의 위신을 지켰다는 것이었다. 그와 연관되었던 뒷 세계나 폭력조직 관계자도 가가야를, 제 몸을 챙길 수 있었을 텐데도 그들을 팔아넘기지 않은 남자로 보기 시작했다. 폭력배들의 말에 따르면 가가야야말로 조폭 담당 형사의 귀감이라는 것이었다.

전작인 <경관의 피>에서 세이지, 다미오, 가즈야에 이르는 삼대가 모두 경찰로 일하는 모습을 그려내어 경찰 수사극보다는 가족 드라마에 가까운 이야기를 그려내었던 사사키 조는 이번 <경관의 조건>에서 가즈야를 중심으로 제대로 된 경찰 수사극을 보여주고 있다. 전작에서 아버지인 다미오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랐기에, 아버지와 그다지 각별하지 못했던 아들 가즈야도 결국 경찰이 되었다. 가즈야는 가즈야는 문제 경찰관을 대상으로 스파이 활동을 하라는 임무를 받게 된다. 폭력단을 담당하는 민완 형사 밑에서 일을 배우다 언젠가 증거를 쥐고 그의 뒤통수를 때릴 수밖에 없는 비밀 업무를 맡게 되었다. 아버지가 했던 잠입 수사와 색깔은 다르지만, 어찌되었던 비밀 업무를 말이다. 가즈야의 아버지 다미오가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은 신결 질환으로 폭력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였고, 그 덕분에 가즈야는 살아 생전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지 못했었다.

<경관의 조건> <경관의 피>로부터 구 년 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가즈야의 비밀 업무가 끝이 나면서 시작한다. 가즈야는 바로 어젯밤까지 아버지처럼 따랐던 상사 가가야를 각성제 소지 및 복용 의혹으로 상부에 고발한다. 각성제 단속법 위반으로 체포하는 건 가가야와 함께 밤을 보낸 여성 나가미 유카도 함께다. 나가미 유카는 얼마 전까지 안조 가즈야와 사귀었던 여성이다. 하지만 가즈야의 고발은 배신당한 여성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실 정해진 수순이었다. 가가야 히토시 경부는 폭력조직을 담당하는 수사원으로 도쿄의 뒷 세계에서 독자적인 정보 수집 루트를 구축했고, 권총 적발이나 각성제 거래 정보를 수집하는 데도 뛰어난 실적을 거둔 인물이었다. 다만 사생활이 엉망이라 뒷 세계와의 유착이 의심되었기에 상부에서는 그에게 부하를 붙여 그 소행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애초에 가즈야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가가야는 의원면직되고, 가즈야는 상사를 팔아 넘겼다는 차가운 시선을 받게 되지만,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간다. 그리고 구 년 후, 마약시장의 판도가 바뀌면서 상부에서는 가가야의 복직을 통해서 그 혼란을 해결하려 하고, 가가야와 가즈야는 상사와 부하가 아니라 라이벌로서 다시 대면하게 된다

아버지, 어째서 죽었습니까?

언젠가 아버지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맹세했는데,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른 아버지에게, 어느 날 언젠가 손가락질을 하며 이제 당신이 폭군으로 군림할 수 있는 자리는 없다고 통고해줄 작정이었는데,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에 당신이 충격을 받고,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눈길을 떨어뜨리고, 몸을 작게 움츠릴 날을 기대했는데. 언젠가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 그 괴로운 사춘기를 가출도 하지 않고, 어머니를 지키며 참아냈는데.

그런데 아버지, 당신은 그 기회를 내게 주지도 않고, 멋대로 떠나버렸어요. 우리 가족 중 누구 하나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마지막 순간까지 이기적으로 가족도 돌아보지 않고, 당신은 가족들 앞에서 사라진 겁니다.

사사키 조야 워낙 경찰 소설의 대가이지만, 새삼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경찰이라는 조직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탐구, 조사 없이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가야가 조직의 비정한 음모 속에서 경시청과 조폭단 양 조직으로부터 전설이 되는 과정도 대단하고, 이후 다시 만난 가가야와 나름 자신의 자리에서 동분서주하는 가즈야와의 대립 구도도 매우 흥미진진하다. 특히 실제 일본에서 화제가 되었던 유명 연예인 각성제 사건을 모티프로 경찰의 조직개편 관련된 이야기는, 사사키 조가 이 작품의 구상부터 집필에 이르기까지 무려 사 년이라는 시간을 들였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경관의 피> <경관의 조건>은 모두 가즈야가 부는 호루라기 소리로 끝이 난다. 경찰의 필수 소지품인 호루라기는 범죄자를 쫓는 순간에도, 위험에 직면했을 때 동료를 부르기 위해서도 사용되는 소품이다. 가즈야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재직 중에 몇 번이고 긍지를 품고 불었을 그 호루라기의 음색을 듣는다. 그리고 자신이 배신했던 상사의 진심을 뒤늦게 알아 차리고 오열하듯이 호루라기를 분다.

가가야와 가즈야의 매우 흥미로웠던 구도가 마지막 장면에서 "대부님." "속 썩이기는."으로 마무리되면서, 아무래도 이 다음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되기도 한다. 사실 주인공은 가즈야였지만, 캐릭터로서의 임팩트는 다소 약했고, 가가야라는 인물이 훨씬 압도적이었어서 시리즈가 더 이어질까 우려가 되긴 하지만 말이다. <경관의 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호루라기가 <경관의 조건>에서는 더욱 묵직한 감동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시종일관 앞으로 달려가기만 하던 이야기의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해주고 있다. 그 호루라기는 상관을 과감히 고발했던 가즈야도, 부패와 탐욕의 상징이었던 가가야도, 그리고 자살로 처리되어 순직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던 할아버지 세이지도, 공안부의 스파이 노릇을 하다 불안신경증을 얻게 되어 아들의 존경을 받지는 못했던 아버지 다미오도, 역시나 모두 경관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코야마 히데오도, 곤노 빈도 일본 경찰 소설하면 언제나 제일 먼저 거론되는 작가들이지만, 사사키 조만큼 인간적인 경찰을 그리고 있는 작가는 없는 것 같다. '경관 안조' 시리즈 외에도 '제복경관 카와쿠보' 시리즈도, 나오키 상 수상작이었던 단편집 <폐허에 바라다>에서도 범죄를 수사하는 인물의 마음까지 그려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6-07-0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이달의당산적으로 적극 추천합니다

피오나 2016-07-04 12:04   좋아요 0 | URL
아이고 이런..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판타지는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허구의 이야기에서 뛰어난 상상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공중에 떠 있으면 읽는 동안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어 감정 이입이 어려워진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출발한 이야기라면, 어느 정도의 비약과 과장마저도 마치 진짜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가 넓어진다. 그런 면에서 옥타비아 버틀러의 장편 소설 <>은 출간된 지 벌써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당대의 현실 속에서 읽힌다. 무려 노예 제도가 나오고, 흑인 여성으로서의 불합리한 삶에 대해 그리고 있음에도 말이다.

루퍼스는 내가 지켜보는 동안에도 성장하고 있었다. 내가 지켜본 덕분에, 계속 목숨을 구해주었기 때문에 자라고 있었다. 나는 루퍼스에게 최악의 수호자였다. 흑인을 열등한 인간으로 보는 사회에서 흑인으로서 그를 지켜야 했고, 여자를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어린아이로 여기는 사회에서 여자로서 그를 지켜야 했다. 내 몸 하나 지키기도 벅찬 곳에서 말이다.

 

그날은 다나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작가인 케빈과 작가 지망생인 다나 부부는 이사한 지 얼마 안 되는 참이라 너무 지쳐 있었기에, 둘 다 생일을 기념할 계획이 딱히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책이 엄청나게 많았기에 책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방 안이 흐릿해지고 주위가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나는 그렇게 집도, 책도, 전부 다 사라지고, 난데없이 야외에서, 나무가 자란 흙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앞에 있던 넓은 강 한가운데에 어린아이 하나가 허우적거리고 비명을 지르며 빠져 죽기 직전이었고, 다나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강으로 달려가 아이에게 헤엄쳐 가 아이를 구한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물가에 있던 아이의 엄마는 구해준 자신을 주먹으로 공격하고, 화가 난 남자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평생 처음 보는 긴 총신이 내려다 보였다. 그렇게 자신이 총에 맞는다는 생각에 딱 얼어붙은 순간, 다나는 다시 케빈 곁으로 돌아온다. 온통 젖고 진흙투성인 채로. 다나가 체감한 시간은 몇 분 정도였지만, 케빈은 실제 그녀가 사라진 시간은 기껏해야 십 초에서 십오 초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곳으로 가게 되는데, 처음 만났던 소년 루퍼스가 커튼에 불을 붙여 위험에 처했던 순간이었다. 소년은 처음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였고, 루퍼스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나는 그곳이 무려 100년 전인 1815년 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흑인이 검둥이라 불리며 천시받고, 백인들이 노예들에게 채찍질을 해대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 게다가 다나는 흑인 여성이었다. 그리고 루퍼스는 다나의 아주 먼 조상이었다. 이후 다시 현실로 돌아온 후 다나와 케빈은 자신이 과거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선지 루퍼스가 위험한 순간이었고, 다시 현재로 오게 되는 것은 다나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대체 언제 과거로 들어가게 되는 건지, 어떻게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었고, 속수무책으로 닥쳐온 현실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세 번째 경험에선 그 증상이 나타났을 때 케빈이 다나를 끌어 안았고, 케빈도 그녀와 함께 100년 전 시간 속으로 이동하게 된다.

나는 총을 보고, 그 총을 쥔 청년을 보았다. 계속 루퍼스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루퍼스는 계속 내가 틀렸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나는 그곳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맞아보기도 하고, 정신을 잃을 만큼 심한 벌을 받기도 하고, 흑인으로서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눈치를 보며 당시의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질병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고, 변변한 의술도 약도 없었으며, 흑인들은 백인들이 남긴 음식을 먹었으며, 주인의 눈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채찍을 맞거나 멀리 다른 곳으로 팔려가는 시대였다.

노예제도가 있었던 시대를 배경으로 인종과 젠더 문제를 다른 소설들은 그 동안에도 꽤 읽었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 내용들이 마음으로, 몸으로 와 닿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을 전혀 겪지 못한 세대가 전쟁 이야기 자체를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너무도 비현실적인 부분이라 공감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흑인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극중 다나가 겪는 수많은 경험들과 생각들이 리트머스 종이처럼 고스란히 나에게 흡수되는 느낌이랄까. 이토록 생생하게, 이토록 무참하게, 고통스러울 만큼 리얼하게 1800년대의 풍경을 그려내다니 책을 읽는 내내 너무 압도적이라 페이지를 덮을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손목을 다쳤어? 출혈로 죽을 수도 있었어! 설마 직접 그은 거야?"

". 그래서 집에 올 수 있었어."

"더 안전한 방법이 있었을 텐데."

나는 조심스럽게 손목을 문질렀다. "죽음 직전에 이르는 안전한 방법은 없어. 수면제는 무서웠어. 혹시...... 혹시 죽고 싶어지면 죽을 수 있게 챙겨간 수면제인데, 집에 오려고 그걸 썼다가는 당신 앞에서 죽거나, 어느 의사가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낼까 봐 겁이 났어. 아니면 죽지는 않더라도 소름 끼치는 부작용이 남을지도 모르잖아. 괴저라든가."

 

애초에 '타임 슬립'이라는 소재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단골 소재이다. 타임슬립은 판타지 및 SF의 클리셰로, 요즘에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TV 드라마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초자연현상 탓에 유발되는 타임슬립은 시간여행을 하게 된 맥락이나 과정을 설명하기 귀찮아하는 게으른 작가들에게 안성맞춤인 핑계꺼리이기도 해 허술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작품들도 꽤 많다. 타임슬립이 그저 이야기를 강요하기 위해 과거나 미래로 가는 가상의 복선에 지나지 않다면,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논리적 설명 따위야 별 관심을 두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타임 슬립' 이라는 소재를 진부하고 허술한 장치라고 생각했기에 그다지 반기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생각을 바꿔야 했다. '타임 슬립'이라는 소재를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사용할 수도 있구나 감탄해야 했으니 말이다.

'타임 슬립'이 등장하는 작품에선 보통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을 거슬러 과거 또는 미래에 떨어지게 되는데, 대부분 과거로 돌아간 이가 뭔가를 변화시켜 미래를 바꾼다는 설정이 많았다. 그래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라는 아쉬움과 후회를 돌이키고 싶다는 열망이나 혹은 사랑하는 연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때로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시간의 흐름 속으로 뛰어 들어간 인물들의 모험이 주된 플롯인데, <>에서 주인공이 겪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SF가 미래나 우주뿐 아니라 시간 그 자체에 대해, 공간에 대해, 역사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기존에 출간되었던 작품 <야생종>에서 서로를 미워하지만, 서로를 죽이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도로와 안얀우 처럼 <>에서 다나와 루퍼스 또한 사랑과 미움이 뒤섞인 애증의 관계이다. 루퍼스를 잃어버린 아들처럼 사랑했지만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던 다나와 그녀를 자신의 반쪽처럼 생각했지만 다나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소유욕이 먼저였던 루퍼스는 그렇게 시종일관 극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미국의 노예 제도와 선과 악, 그리고 목숨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묵직한 주제는 이 작품 속에서 매우 아름답고도 고통스럽게 녹아 들어 읽는 이의 심장을 툭툭 건드린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왼팔이었다. 그리고 일 년에 가까운 인생과, 사라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귀한 줄 몰랐던 편안함과 안전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라는 이 작품의 처음을 열었던 문장의 의미는 500여페이지가 지나서야 엄청난 무게로 다가온다.  '' ''이라는 개념은 결코 완전하지 않고, 무언가를 얻을 때는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작가의 가치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이 문장은 작품 전체의 압도적인 서사에 방점을 찍으며 이 책을 결국 또 다시 읽게 만들어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당신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쪽을 택하겠는가, 아니면 두려워하지 않는 쪽을 택하겠는가? 글쎄,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로지 순간을 즐기며, 오늘만을 살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다 갑자기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들이 모조리 잘못된 거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면? 애초에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렇다면 전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까?

20여 년 전쯤에 쓴 일기장에서 이런 내용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재빨리,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한다. 이제 그 말을 다시 해볼까. 천천히, 곱씹어서. '.... 두려워할 것 없다."

쥘 르나르는 말한다.

"가장 진실한, 가장 정확한, 가장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말은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이다."

한때, 그러니까 어렸던 내가 죽음에 매혹되게 된 계기는, 요절한 천재 작가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이었다. 나는 이 책 덕분에 작가의 삶 자체에도 어떤 환상 같은 걸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영화로도, 책으로도 출간되었던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류의 작품들이 인기를 얻고 있던 터라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오래 전이라 출간 순서나 내가 먼저 만났던 작품이 어떤 건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아뭏튼 이 두 작품 때문에 감수성 풍부했던 그 시절 나는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고, 인생은 짧고 굵게, 불꽃처럼 살다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후에 꽤 나이가 든 후에 동생이, 난 그때 언니가 스무 살 까지만 살겠다고 해서, 당시에 진짜 무서웠다고 말해서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기억 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어느 정도 성인이 되고 지금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는 게 바빠서인지 '죽음'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 다행히도 주변에서 가까운 누군가 죽거나 했던 적도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 줄리언 반스의 이 책을 읽으면서 아주 오랜 만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줄리언 반스가 죽음을 이야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도 자살과 기억의 문제가 등장했고,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서도 사별과 살아남은 삶에 대해서 그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해왔던 '죽음'이 이번에는 전면에 나섰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에서는 반스의 가족과 친구, 지인들을 아우르며 회고록 같은 분위기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고도 유쾌하게 사유하고 있다. 신을 그리워하는 태도를 질척하다고 일갈해버리는 철학과 교수 형, 무신론자이자 공산주의자 어머니, 전신을 지배하는 병마와 싸우다 병실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등 줄리언 반스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그들의 죽음과 함께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는 가벼운 에세이처럼 읽히기도 하고, 어느 순간 묵직한 철학서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러다 허구의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줄리언 반스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여자들은 자식들이 집을 떠날 때 자신이 죽을 날을 전에 없이 예민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물학적 기능은 완료되었으니, 이제 우주가 그녀들에게 바라는 것이라곤 죽음뿐일테니까.

그러나 주요한 논점은 당신이 죽은 후에 당신의 자식들이 '당신을 이어 살아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절멸하는 게 아니며 이런 선견지명이 의식적인 혹은 잠재의식적인 차원에서 위안이 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이 책을 읽으면서 죽음이란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다는 말과도 같다. 줄리언 반스 처럼 자신이 그린 최고의 죽음까지 꿈을 꿀 필요까진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언젠가 자신에게 죽음이 온다는 생각을 자각한다면 말이다. 이렇게 묵직하고, 어둡고, 우울한 주제를 이렇게나 경쾌하고, 깔끔하고, 가볍게도 그려낼 수 있다니 새삼 줄리언 반스의 글에 감탄한다. 여전히 그의 에세이보다는 소설이 더 좋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놓친다면 당신은 언젠가 꼭 후회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플레
애슬리 페커 지음, 박산호 옮김 / 박하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수플레는 재료가 매우 간단하다. 계란과 설탕, 바닐라 시럽과 크림 그리고 버터와 소금 조금이면 된다. 달걀을 노른자와 흰자로 분리하고, 노른자에는 바닐라 시럽과 크림을, 그리고 흰자를 따로 거품 내어 두 가지를 잘 섞은 뒤 오븐에 구우면 완성이다. 레시피 또한 재료만큼이나 간단한데, 사실 완벽하게 부풀어 오른 수플레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븐 안에서 멋지게 부풀어 오른 수플레라도 조금만 있으면 푹 꺼져 버리기 때문에 누군가에 대접하기 위해선 오븐에서 갓 구워져 나온 따뜻한 수플레를 내어 줘야 하는 까다로움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라니. 마치 구름을 떠먹는 것 같은 맛이다. 우리네 인생 또한 수플레와 닮아 있다. 한껏 부풀어 오른 듯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푹 가라앉아 바닥을 치게 만드는 게 삶이니 말이다.

여기, 완전히 다른 세 나라 세 도시의 전혀 다른 부엌에서 하나의 수플레가 만들어지고 있다

수플레는 변덕스러운 미인과 같다. 아무도 그녀의 기분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다. 그 어떤 책에도 수플레를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비결이 없다. 그 어떤 사람도 수플레를 완벽하게 만드는 법을 말할 수 없다. 오븐에 넣고 25 30초가 됐을 때 꺼내야 한다고 할 수도 없고, 그 어떤 오븐을 써도 완벽한 온도를 맞출 수 없다. 모든 요리사는 수플레를 수없이 만들어보면서 자신만의 최선의 조리법을 찾아낸다. 그릇과 오븐을 수십 번도 넘게 써서 시도해본 후에야 최고의 수플레를 만들어낸다. 그릇과 오븐이 닳도록 만들어보고 마침내 아주 긴 전쟁 끝에 생긴 자제력을 얻고서야 그런 수플레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아니와 릴리아는 30년이 넘는 결혼 생활을 이어오다 최근 몇 년 전부터 각방을 쓰고 있다. 베트남에서 입양한 아이들 장과 덩에게 그들은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무한한 사랑을 주며 정성을 다해 키웠지만, 자식들은 자라면서 점점 부모가 소원해졌고, 정부에서 입양으로 보조금을 받으며 자신들을 이용해서 돈을 벌었다고 오해하고 비난했으며, 가끔 집에 놀러 와도 한 시간 이상 머무는 법이 없었다. 결국 아이들을 위해 장만한 방 일곱 개와 무수한 벽장들과 욕실이 네 개나 딸린 거대한 집에 아니와 릴리아 단 둘만 남았다. 남편인 아니는 우아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자신의 습관과 시간을 존중하길 원했고, 릴리아는 점점 더 고독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녀는 남편이 뇌혈관 이상으로 쓰러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마크와 클라라는 22년 동안 결혼하고 줄곧 같은 아파트에서 살아왔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클라라를 위한 널찍한 부엌 외에는 침실 하나에 매우 작은 아파트였지만, 그들은 너무도 행복하기만 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지만 입양은 원하지 않았던 그들이었기에, 둘만의 생활에서 안정을 찾았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둘이 공유하는 사소한 일상의 목록들이 늘어가는 만큼 행복은 커져만 갔다. 여느 때와 같았던 금요일, 마크는 화랑에서 일찍 퇴근해 집으로 가는 길에 케이크 가게에 들러 디저트를 몇 개 샀다. 하지만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평소처럼 커피 향이 나지 않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서자 클라라가 부엌 조리대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여전히 수플레 실험을 계속했다. 이제 웬만한 조리법은 다 외워서 특별한 종류의 수플레에 들어가는 재로를 볼 때만 그 책을 한 번씩 보면 됐다. 그렇게 만든 수플레 한가운데가 금방 꺼져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가끔은 꽤 오랫동안 부풀어 오른 채 있기도 했다. 릴리아는 수플레의 맛과 그 조리법에 완전히 빠져버렸다....수플레가 꺼질 때까지 기다리는 그 흥분된 순간과 그에 따른 실망이나 행복한 감정은 그녀의 의미 없는 일상에서 가장 달콤한 부분이 됐다. 얼이 금요일 밤마다 해가 지기 18분 전에 촛불을 켜는 것처럼, 카노가 해가 뜰 무렵에 기도를 하고 울라가 가부좌를 틀고 무릎에 손을 얹은 채 명상을 하는 것처럼 릴리아는 그런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위로를 받았다.

페르다는 파리에 사는 딸 오이쿠와 매주 금요일 아침에 긴 통화를 하는 걸 낙으로 살고 있다. 지난 6년 동안 파리에 살아온 딸과의 통화로 마치 한집에 살면서 같은 문제를 공유하는 것처럼 느꼈고, 덕분에 막내딸이 그리워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 여느 때와 같았던 아침, 딸에게 온 전화라는 생각에 설레며 전화를 받은 그녀에게 어머니의 이웃에게서 연락이 온다. 어머니가 넘어지면서 뼈가 부러진 것 같다고, 최대한 빨리 오라고 말이다. 페르다의 어머니인 네시베 부인은 여든 두 살 된 노인으로 엄살이 아주 심하기로 유명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제부터 엄마를 모시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뉴욕, 파리, 이스탄불 세 도시에서 가정에 헌신해왔지만 남편과 자신들에게 소외된 고독한 릴리아와 삶의 전부였던 아내를 잃게 된 마크와 다치고 나서 점점 더 괴팍해지는 엄마를 모시면서 한 순간도 편히 살 수 없게 된 페르다, 세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소소하게 펼쳐진다. 특히나 이들에게는 각각의 소울 푸드가 있는데, 음식이 사람에게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어 더 이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해준다.

릴리아는 어렸을 때부터 불행하다고 느껴지거나 피곤해지면 항상 닐라가가 먹고 싶었다. 감자와 고기와 생선 소스를 넣은 양배추 수프가 바로 지금 그녀에게 필요했다. 그 친숙한 냄새가 그녀를 감싸고 위로해주며, 그 냄새가 그녀를 두 팔로 껴안고 잠시지만 모든 상처를 어루만져줬던 것이다. 페르다는 기운이 없거나 울적하거나 낙담할 때면 언제든지 살렙을 한 잔 만든다. 오이쿠는 야생 난초 뿌리로 만든 이 음료를 맛보고는 차이 라떼와 똑같은 맛이 난다고 했다. 페르다는 이 음료에 계피가루를 뿌려 마시면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마크가 아프거나 울적해할 때면 클라라가 몇몇 제철 채소를 알맞게 익혀 요리를 만들어주곤 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며, 몇 분만 있으면 자신의 따뜻한 품과 이 요리가 마법을 발휘할 거라며 그를 꼭 안아주곤 했었다. 그렇게 아내가 남긴 추억 속에는 항상 요리가 함께 했었기에,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게 되고 만다. 이들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이유로 수플레를 만들면서 부엌에서 만들어내는 작은 기적들은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준다. 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 목에 방울달기
코니 윌리스 지음, 이수현 옮김 / 아작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먼저, 내가 이 책을 만났을 당시의 상황부터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평일 내내 아기와 전쟁을 치르느라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상태에서, 토요일 아침부터 기차를 타고 울산에 내려가 결혼식에 참석하고 당일 밤 기차로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당연히 체력은 방전되고, 눈도 피곤하고, 졸리기 시작하는 즈음이었다. 옆에서 남편은 자기 시작했고, 나는 이 책을 펼쳐 들었다. 왜냐하면 집에 도착하면 다시 육아 전쟁에 뛰어 들어야 하므로, 기차 안에서의 두 시간이 유일하게 책을 볼 수 있는 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눈꺼풀은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었고, 어깨는 뭉쳐 있었고, 피곤으로 두통도 약간씩 오는 중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셈인데, 신기하게도 이 작품은 단 세 장 만에 내게서 잠과 피로를 확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삐딱하게 고개를 젖히고 최대한 허리를 눕히고 좌석에 기댄 상태로 책을 읽던 내가 자세를 다시 고쳐 앉고 집중하게 만들어 주었다.

 

, 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궁금한가?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인지 들어보시라.

이렌느 캐슬이 골프 클럽과 한 일이라고는 헤지테이션 왈츠뿐이었고, 나는 잠시 후에 불을 켜고 브라우닝의 책을 펼쳤다.

브라우닝은 플립을 알았던 게 분명했다. 플립에 대한 시라고밖에 볼 수 없는 '스페인 회랑의 독백'을 썼으니 말이다. 그는 확실히 플립이 시를 다 구겨버린 뒤에 나왔을 법한 "으아아, 이 골칫거리야"라는 구절을 썼고, "저기 내 심장의 혐오가 가네"라고도 썼다. 나는 다음에 플립이 계산서를 나에게 떠맡기면 그 구절을 읊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이 작품의 대략적인 스토리라인은 이렇다. 하이텍의 연구 개발부에서 1920년대 미국의 단발머리 유행의 기원을 찾는 사회학자 샌드라 포스터는 부서간 연락 보조원 플립의 실수로 잘못 배달된 소포를 전해주러 생물학부로 내려가게 된다. 그곳에서 혼돈이론을 전공한 생물학자 턴블 박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다 해진 코르덴 바지에 두꺼운 뿔테 안경, 발가락에 구멍이 난 캔버스 등... 도저히 무언가로 분류할 수 없게 만드는 독특한 스타일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오랜 시간 유행과 패션을 분석하며 보냈기에, 대부분 첫눈에 상대를 파악하는 편이었는데도, 유행과 전혀 무관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그의 스타일은 정의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샌드라는 유행에 대한 그의 면역능력이, 어쩌면 유행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풀어낼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플립이 턴블 박사의 연구비 신청서를 잃어버리는 덕분에 그를 도와주려는 샌드라의 제안으로 그들은 원숭이 대신 양으로 공동 연구를 진행해보기로 한다. 마침 그녀에겐 양 목장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커다란 플롯은 문서 작업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회사 내에서 단발머리 유행을 연구하는 사회학자와 혼돈 이론 학자가 만나 새로운 연구를 하게 과정이 전부이다. 그런데 사실 이 작품의 진정한 재미는 주요한 플롯이 아니라 이들의 자질구레한 일상에 있다. 애초에 셜록 홈즈도 그러지 않았던가. '사소한 것이야말로 두말할 나위 없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일상사만큼이나 기이한 것도 또 없다고 말이다. 이들이 하고 있는 연구도, 매일같이 바뀌는 유행도, 문서 작업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회사 하이텍도, 실수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하게 만드는 엉뚱한 플립의 만행들도, 사실 그 내용만 보자면 그렇게 사소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모든 작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들이 한데 모여서 한 개인에게 몰고 오는 '혼돈'은 절대 사소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사건이 다른 모든 사건에 영향을 주면서 반복과 재 반복을 통해 만들어지는 결과'란 사실 어마 어마(?)하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코니 윌리스의 정신 없는 수다에 취해서 이야기를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결론이 시종일관 떠들어대던 유행의 기원과 그 동기가 아니라 전혀 다른 곳으로 다다른 게 된다는 것 또한 독특한 재미를 더해 주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내 말 잘 들어." 나는 암양의 턱을 잡은 채로 말했다. "난 하루에 감당할 만큼은 다 겪었어. 직장을 잃었고, 평생 만난 사람 중에 양처럼 행동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도 잃었고, 유행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모르겠고 영영 알아내지 못할 거고, 이젠 질렸어. 순순히 날 따라왔으면 좋겠다. 당장 날 따라왔으면 좋겠어." 나는 디스크 조각을 바닥에 던지고 돌아서서 내 연구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양이 방울양 이었다. 내 뒤를 따라 총총히 생물학부까지 두 층을 내려가고, 연구실을 통과해서 방목장까지 갔으니 말이다. 마치 메리와 메리의 작은 양처럼. 그리고 나머지 양떼도 꼬리를 흔들며 뒤따라왔다.

유행의 기원을 연구한다는 발상 자체도 재미있는데, 사실 그것을 몸소 실행하고 있는 캐릭터는 더욱 흥미진진하다. 샌드라 박사는 근무 시간 외에는 카페에서 디저트나 음료의 유행을 파악하거나, 도서관에 주기적으로 들러 베스트셀러와 도서관 운영 유행을 관찰한다. 그 주에는 어떤 예약 목록이 있는지 확인하고, 사서가 어떤 의상을 입었는지 체크하는데, 그 중에서도 그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도서관 운영 방침 중 하나에 온몸으로 대항한다는 점이다. 매년 출간되는 신간들로 인해 서가 자리가 언제나 부족하기에, 최근에 대출된 적이 없는 책들은 판매 전을 통해 숙청하게 된다. 작년 판매 전에서 그녀는 디킨스의 황폐한 집이 판매되는 것을 보고는 대체 왜 디킨스 책을 버리는 거냐며, 황폐한 집은 훌륭한 책이라고 소리쳤다. 그 후로는 그렇게 방출되는 책들을 막기 위해 책들을 직접 대출하기 시작했다. 집에 있어서 대출한 적이 없던 작품들이나, 모든 고전 작품들,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 읽고 싶어 할지도 모르는 낡은 책들 모두를 말이다. 그렇게 거의 1년 동안 대출이 없었던, 인기가 없는 책들이 그녀에 의해 구제된다.

다들 알다시피 찰스 디킨스는 '대놓고' 매우 장황한 작가이다. 그에 비해 코니 윌리스는 작품 전체의 페이지수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특유의 수다 덕분에 '장황하게' 느껴지는 작가이다. 디킨스의 <황폐한 집>은 범죄 및 공포 장르의 모든 형태가 존재하고 있는 엄청난 대작이지 않은가. 사실 나는 디킨스를 대하는 샌드라의 태도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을 마구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말 특이하고, 이상하지만, 자꾸 생각나는 캐릭터가 있으니 바로, 이들 과학자들의 일상을 가장 '평범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등장인물인 바로 부서간 연락 보조원인 플립이다. 그녀는 코걸이를 하고 흰올빼미 문신을 새겼으며, 무슨 일이든 해달라고 하기만 하면 한숨을 내쉬고 눈을 굴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무슨 일을 부탁하든 자신은 이런 일을 할 시간이 없다며 투덜대고, 정리하지 않아야 할 서류들은 청소한다는 명목으로 쓰레기통으로 넣어 버리고, 헤어 스타일이며, 의상이며 기괴한 유행을 쫓고,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샌드라에게 자신의 계산서를 떠맡기고 가버리는, 기본적으로 무례하고, 배려심 없고, 무능력하고, 지극히 개인주의에 입각해 있는 인물이다. 한마디로 아무데서나 불쑥불쑥 등장해, 지나치며 가는 곳마다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재능을 가진 이 인물은 극중 수많은 사람들의 골칫거리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돈으로 빠뜨리는,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아주 엄청난 캐릭터이다. 이런 캐릭터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일상이라니, 평범할래야 평범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의미 있는 과학적 돌파구가 현저히 많이 나타날 테고, 늘 그렇듯 혼돈이 군림할 것이다. 나는 멋진 일들이 일어나리라 예측한다.

과학적인 돌파구는 대개 사소한 사건들이 촉발했다. 욕조 물이 넘치는 광경, 산들바람의 움직임, 계단 위에 놓인 발의 압력. 길고 고생스러운 연구만큼이나 행운과 우연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거기서 코니 윌리스는 우리에게 '이전에는 아무도 연관시킬 생각을 하지 못한 발상들을 합치고, 전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던 관련성을 보는 것'이 비단 과학적인 돌파구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의 진부한 일상, 그 속의 따분한 반복과 관습 너머에 있는 무의미해 보이는 변수들에게 선을 그어 연결해보자.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혼돈이 평화롭고 고요한 일상을 벗어나 당신의 삶에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낼지 누가 알겠는가.

멋진 일들이 생기리라.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내게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코니 윌리스는 나의 평범한 일상을 다른 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그냥 보는 대신 관찰하도록, 듣는 대신 경청하도록, 평범한 속에서 특별한 것을 주목하도록 이끌었다. 이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그냥 이 작품과 한 눈에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