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 옷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날씨다. '태양이 하늘에서 심벌즈처럼 작열하고, 발 밑에서 올라오는 습기는 물이 끓는 솥뚜껑을 연 느낌에, 누군가 뜨거운 물로 방금 샤워하고 나온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 마저 든다. 그렇게 마치 공기를 응결시키면 물처럼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은 축축하고, 후덥지근하고, 무더운 계절'이다. 이건 극중 찌는 듯한 더위로 가득 찬 방콕의 날씨 속에서 해리 홀레가 느끼는 계절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대한민국의 여름 역시, 올해는 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우리는 역대 최고의 무더위 속에서 최악의 여름이라 칭해도 과하지 않은 8월을 보내고 있다. 요 네스뵈는 이 작품을 쓸 때 머나먼 방콕에서 완전히 땀에 젖은 채, 이야기를 쓰고 또 썼다고 한다. 그러니 이 작품은 반드시 요즘 같은 계절에 읽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해리 홀레가 느끼는 대로 주어진 환경을 체감하고, 요 네스뵈가 구축하고자 했던 그 상황 속으로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이 작품은 페이지 마다 더위와 습기를 우리의 얼굴 가득 내뿜으면서 마치 최면처럼 우리를 이야기 속으로 이끌고 있다.
"여기 온 지 24시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 사건은 전혀 진전이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은폐하려는 뭔가가 있으니까요. 국장님이 아직 밝히지 않은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몰네스에 관해 뭘 알고 계시고, 그가 어떤 일에 연루됐는지."
"당신이 알아야 할 건 다 말했소. 그 이상은 없어요. 그렇게 못 알아듣겠소?" 토르후스가 신음소리를 냈다. "솔직히 얻고 싶은 게 뭡니까, 홀레? 당신도 이 일을 조속히 마무리하기를 바라는 줄 알았는데."
'저는 경찰이고 제 할 일을 하는 겁니다, 토르후스."
서른 셋의 해리 홀레는 전작인 <박쥐>에서 출장간 호주에서 살인 사건을 수사하고 돌아와 다시 음주를 시작한 상태로, 경찰에서 진작 쫓겨났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던 중 방콕의 사창가에서 노르웨이 대사가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정치적인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조용히 일을 처리해야 했던 터라 작년 겨울 호주에서 살인 사건을 해결한 이력이 있는 해리가 그 일을 맡게 된다. 해리는 방콕으로 가서 현지 경찰과 호의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용히 사건을 해결하라는 특명을 받고, 그는 동생의 사건을 조사할 기회를 달라는 조건으로 태국으로 향한다. 그리고 현지에서 사건의 배경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드러나는 진실들은 윗 선에서 뭔가 은폐하려는 것들을 보여주기 시작하고, 해리가 그저 적당하고 조속히 사건을 마무리하기를 바랐던 윗 선은 점점 그의 행보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왜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게요, 홀레?
방콕에서 그가 할 일은 사건을 깔끔하게 매듭짓고 소란을 피우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모두에게 골치 아픈 일을 피하고, 그 동안 그래왔던 대로 모르는 척 덮어두기도 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흘러가는 대로 두면 서로 편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해리는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신이 할 일은 그저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것이지, 오슬로의 몇몇 관료들의 뒤를 봐주는 일이 아니라는 거다. 사건 수사에 있어서 만큼은 융통성 제로, 고집 불통, 그리고 진실을 향한 무조건 적인 열정, 30대 초반의 해리 홀레도 역시나 우리가 그 동안 보아 왔던 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그의 오랜 팬으로서 그래서 젊은 그가 더 반갑고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바퀴벌레'는 한 마리가 눈에 띄면 보이지 않는 곳에 수십 마리는 숨어 있다는, 그러니까 박멸하기 쉽지 않은 벌레이다. 그렇게 어디에나, 아무 곳에나 존재하는 바퀴벌레들은 평상시에는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우리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다. 그저 못 본 척했을 뿐, 사방에 존재하는 불편한 진실들처럼 말이다. 요 네스뵈는 방콕이라는 배경 설정에 대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며, 완전히 미아가 될 수도 있는 도시' 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작품의 집필을 시작할 때, 아이디어라고는 오로지 장소, 하나뿐인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만큼 배경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이야기인 셈이다. 어두운 구석구석 바퀴벌레가 느물대며 기어 다니고, 성산업과 아동성애자들을 위한 시장이 엄청나게 거대하고, 밝은 도시의 관광지 뒤에 숨겨진 타락한 이면과 찌는 듯한 더위 너머 달콤한 휴양지의 매력이 넘쳐나는 그곳, 바로 방콕에서 해리 홀레는 숨겨진 진실과 마주하기 위해 또 한번 자신을 '무모하게' 내던진다. 시니컬 해 보이고, 반항적이고, 무심한 듯 보여도 살인 사건 앞에서는 언제나 세상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계산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히어로 해리 홀레이니 말이다.
너무 막중한 책임이군요." 해리가 말했다.
"네, 그래도 때로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을 책임지는 편이 더 쉬운 것 같아요.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을 보살펴야 해요, 해리. 산 사람들요. 어쨌든 그런 책임감이 우리를 이끌어주죠."
책임감. 작년에 해리가 묻어두려던 것이 있다면 바로 책임감이었다. 산 사람을 위해서든 죽은 사람을 위해서든, 자신을 위해서든 남을 위해서든. 하지만 죄책감에 시달릴 뿐 어떤 식으로든 돌아오는 것이 없었다. 아니, 책임감이 어떻게 그를 이끌어주는지 깨닫지 못했다. 어쩌면 이번 일에 대해서 토르후스가 옳았는지도, 어쩌면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은 해리의 동기는 그리 고상하지만은 않았는지도 모른다.
국내에 시리즈가 열 권이 넘게 인기를 얻어 출간되는 작품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은데,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 시리즈도,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도, 나는 시리즈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은 편이다. 그런데 유독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는 시리즈 출간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현재 10권으로 시리즈는 2013년에 끝이 났는데, 우리가 만나게 되는 번역본으로는 아마도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폴리스>는 내년이 되어도 보지 못할 것 같으니 말이다. 물론 시리즈라고 해도 반드시 출간된 순서대로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순서대로 읽을 경우 성장하는 캐릭터와 독자가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에 감정 이입이나 공감이 쉬워 몰입도도 높아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해리 홀레 시리즈는 역주행을 했을 때 그 매력이 더 빛이 발하는 시리즈가 아닌가 생각한다. 즉, 출판사에서 국내에 출간된 순서 그대로 읽었을 때 말이다. (스노우맨->레오파드=>레드브레스트->네메시스->데빌스스타=>박쥐->바퀴벌레)
왜냐하면 잘 생각해보라.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의 과거를 궁금해한다. 아마 다들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알기 전 그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누굴 만나고,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떤 시간을 보냈었는지 말이다. 그가 겪어온 시간은 고스란히 그의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으니까. 시간 여행을 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사랑에 빠진 대상의 과거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만큼은 얘기가 달라진다. 당신이 영어 원서를 한글만큼 술술 읽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국내에 출간된 순서 그대로 해리 홀레를 만나왔을 것이다. 마흔 살의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 반장이었던 <스노우맨>과 <레오파드>를 거쳐서 삼십 대 중반의 이제 막 경위로 승진한 <레드브레스트>에서 <네메시스>, <데빌스스타>를 거쳐오면서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외톨이에 술고래인 그를 보아 왔고, 다시 삼십대 초반의 젊고 열정적인 <박쥐>와 <바퀴벌레>를 통해 해외에서 활약하는 그를 만났다. 우리가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 그는 전대 미문의 연쇄 살인범을 만나 손가락을 하나 잃어 버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그녀의 아들이 연쇄 살인범 손아귀에 들어가기도 하는 등 최악의 상황만 골라가며 겪었던 지치고 엉망으로 피폐했던 모습이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젊은 해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금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 속에 서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혐오스럽다고 꼭 나쁜 건 아니지."
"그럴지도. 그래도 착한 애들은 아닌 것 같아요. 개들은 그냥 '존재'하는 거예요."
수십 년의 시간 동안 형사계 살인 사건 전담반에서 일을 하는 하는 형사라면 매일 다른 범죄가 매일 새로운 방법으로 일어나는 것을 겪으며 조금씩 스스로의 모습에도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일같이 사람들의 거짓말과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들으며, 피묻은 옷과, 창백한 시체, 냉혹한 범행 수법들이 어느 순간에는 무덤덤해질 때도 올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고스란히 축적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의 과거를 만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먼저 사랑에 빠지고, 천천히 그가 지나온 시간들을 따라갈 수 있는 기회라는 건 아무 때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물론 이건 주인공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오슬로 삼부작에서 해리 홀레만큼이나 큰 역할을 하는 매력적인 악당(?) 톰 볼레르가 해리 홀레를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 같은 건 숨겨놓은 보물상자를 찾은 것 같은 기분 마저 들게 했다. 그들의 대립이 절정에 이르는 <데빌스 스타>에서 각자의 역할을 떠올려보자면, <바퀴벌레>에서 그들의 첫만남이 더욱 흥미진진하고 말이다.

<박쥐>에서 32살의 풋풋하고 열정 넘치는 해리 홀레는 호주라는 이국적인 공간에서 특유의 젊음을 보여주었고, <바퀴벌레>에서 33살의 그는 찌는 듯한 더위의 방콕에서 사건을 은폐하려는 철벽방어를 뚫고 노르웨이 대사의 살인 사건을 수사한다. <레드브레스트>에서 35살의 그는 미국 비밀경호원 총격사건으로 경위로 승진해서 국가정보국으로 발령을 받았고, <네메시스>에서는 은행 강도 사건과 전 여자친구의 자살 사건에 전작에서 죽은 동료에 대한 의혹을 수사하다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기도 한다. <데빌스스타>에서 36살의 해리 홀레는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이단아로, 경찰청의 외톨이이자 심각한 알콜 중독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이미 자기파괴적인 성향 속으로 파고 들어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로, 우리는 더 이상 경찰이 아닌 해리 홀레의 모습까지 상상해봐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자, 여기 '오슬로 삼부작'까지가 해리의 30대를 담은 시리즈 전반부이다. 다음에 우리가 만나게 될 <리디머>에서는 아마도 38살에서 40살 사이의 나이일 것 같은데, 아무래도 <스노우맨> 바로 전 작품이다 보니 점점 더 어둠에 가까워지는 해리 홀레의 모습이 심도 있게 그려지고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여기서 다시 돌아보자면, 우리가 처음 만났던 <스노우맨>과 <레오파드>에서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 반장인 40살 그의 외모는 이랬다. 눈동자는 충혈됐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 빡빡 깍은 금발 머리에 192센티의 거대한 몸은 비쩍 마른 북극곰처럼 살이 빠져 근육질 몸에 지방만 쏙 빠진 상태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알콜 중독 상태였다. 그러니 시리즈를 거듭할 때마다 주인공을 지독하게 고생시키고 있는 요 네스뵈가 이어지는 <팬텀>과 <폴리스>에서는 대체 해리 홀레를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뜨릴지 심히 걱정이다. 하지만 시리즈를 역주행으로 읽고 있는 덕분에 그 고민을 아직은 조금 더 미룰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최악의 끝을 만나기 전에 아직 우리에겐 해리 홀레의 삼십대 후반 모습이 <리디머>에서 한번 더 남았으니 말이다. 하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