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어처리스트
제시 버튼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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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극중 한 문장을 비유 삼아 말해보자면, 때로는 허구의 세계가, 비록 실제가 아니더라도 더 많은 걸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현실과 그것은 구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삶에의 비유가 삶이 남긴 혼란보다 더 근사하게 되는 그것. 바로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그것이다.

 

누군가 넬라의 삶을 들여다보았고, 삶을 흔들고 있다. 만약 이 물건이 실수로 배달된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요람은 아직 한 번도 쓰지 못한 결혼 침대와 영원히 순결을 지키게 될 것 같은 그녀에 대한 조롱이다. 감히 누가 그토록 무례한 장난을 치는 걸까? 개는 지나치게 세밀하고, 의자도 지나치게 정확하고, 요람은 지나치게 암시적이다. 미니어처리스트는 그녀의 사생활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열 여덟 가난한 소녀 넬라가 서른아홉의 부유한 상인에게 시집을 온다. 소녀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빚을 잔뜩 남겼고, 자신감을 잃어버린 엄마와 철없는 두 동생, 그리고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궁핍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소녀는 그저 그곳을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자신이 앞날이 그 동안과는 달라질 거라며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그녀를 맞이한 건 차가운 시누이와 어둡고 낯선 하인들이었다. 시누이의 날 선 목소리와 하녀의 경멸 어린 눈빛, 남편의 무관심은 어린 소녀를 좌절감에 휩싸이게 만든다. 소녀는 밤바다 남편의 손길이 자신에게 닿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기를 기다리지만, 아침에 눈을 떠보면 자신이 여전히 혼자라는 걸 깨닫고 만다. 그녀는 사랑을 말하지 않는 남편과, 끊임없이 자신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시누이와, 숨어서 키득거리는 것 외엔 웃을 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하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스럽기만 하다.

모든 여자는 자신의 운명을 설계하는 건축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크고 웅장한 캐비닛을 집에 가져온다. 결혼선물이라며 넬라에게 말을 건네는 요하네스가 커튼을 젖히자 드러난 캐비닛 내부는 아홉 칸으로 나뉘어진 미니어처 집이었다. 마치 실제 집이 줄어든 것처럼 정교함이 돋보이는 아홉 칸의 방과 작업용 부엌, 응접실, 다락방까지.. 완벽한 복제품이었다. 요하네스는 그것을 주의를 분산시킬 소일거리라고 표현했지만,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서 있던 넬라에게는 집안에서의 부실한 입지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난 이미 소꼽 놀이를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닌데, 대체 실제로 사람이 살 수도 없는 이런 곳을 가꾸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이후 넬라는 우연히 명부에서 발견한 미니어처리스트의 연락처를 보고 캐비닛 안에 필요한 물품 몇 가지를 주문하고, 얼마 뒤 주문한 상품을 받아보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녀가 주문했던 줄이 달린 류트와 약혼 기념 컵, 그리고 마지팬 한 상자는 마치 진짜처럼 느껴질 정도로 섬세한 기술과 정성이 들어가 있다. 마지팬에선 장미수 향기까지 풍기고, 류트의 줄을 당기면 실제로 선율이 흘러나오고, 약혼 기념 컵은 곡식 한 알보다 작은 크기지만 그 무엇보다 실제 같다. 그리고, 그녀가 주문하지 않은 물건들이 더 등장한다. 아래층 응접실에서 마린이 앉아 있던 아름다운 나무의자와 아기 요람이 바로 그것이다. 넬라는 이것이 실수라고, 다른 사람이 주문한 물건일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요하네스가 키우는 개 레제키와 다나 마저 미니어처로 등장하자 이건 진짜라는 예감이 들기 시작한다. 뭔가 침범 당한 것 같은 기분, 새 신부의 어리석음이 철저히 관찰 당하는 것 같은 기분 마저 들기 시작한다. 그 물건들은 그녀에게 혼란과 날카로운 두려움과 함께 휘몰아치는 호기심마저 불러오고, 그렇게 넬라의 삶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넬라는 다시 칼베르스트라트로 돌아선다. 미니어처리스트의 특별한 존재가 곰보딱지 같은 사람들에게 낭비되고 있다고, 넬라는 생각한다. 그녀가 어떤 사람으로 밝혀지건, 그 눈동자만으로도, 그 꿰뚫어보는 눈빛만으로도, 수많은 단서와 이야기로 가득 찬 믿을 수 없는 소포만으로도, 그녀의 존재는 특별할 것이다. 태양 간판 집에 그녀의 몸이 연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뒷목이 당겨지는 것 같아 얼른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칼베르스트라트는 여전히 고요하다. 그 한복판에 이상한 존재를 숨기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애초에 넬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미니어처 속의 세계를 부정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캐비닛 속의 미니어처 세계가 해답을 쥐고 있다고, 미니어처리스트가 구원의 불빛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미니어처리스트는 마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미리 내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의 미래가 담겨져 있는 미니어처를 넬라에게 보내기 시작하고, 넬라는 점점 더 그것들에 마음을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게 그녀가 미니어처의 세계 속에 푹 빠지게 될수록 그녀 주변의 실제 삶에서는 너무도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결국 그녀의 남편 요하네스가 그녀에게 캐비닛을 선물하려고 했던 생각이 옳았던 건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것이 그녀의 주의를 분산시켜 엉뚱한 곳만 쳐다보게 만든 거나 다름 없으니 말이다.

이 집에서의 삶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게임이고, 가짜 연습이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 이제 무얼 해야 하나?

그리고 열여덟의 넬라 앞에 닥쳐오는 일들은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다. 마치 일생이 한꺼번에 몰아쳐서 헤어날 길 없는 온갖 추측의 바다 속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충격적인 남편의 비밀과 마주하면서 더 이상 이런 삶을 감당할 수 없다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렸으면 좋겠다고 절망하지만, 그렇지만 그녀의 삶에 닥칠 파도는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도 영원히 아무것도 갖지 못할 것이라고, 엄마가 될 수도 없고, 은밀한 밤의 비밀을 나눌 수도 없고, 살아 있는 영혼이 자랄 수 없는 캐비닛 말고는 집안 살림을 꾸려갈 필요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스스로의 삶에 닥쳐온 일들을 감당하기가 벅차다. 사생활이라는 것이 전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넬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자신의 사생활을 원했으며, 그럴수록 점점 더 미니어처리스트가 보내는 물건들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이 캐비닛 속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아마도 넬라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정작 이야기를 하는 이는 넬라가 아니다. 그녀가, 의문의 미니어처리스트가 넬라의 삶을 실로 짜고 있는데, 정작 넬라 본인은 그 직물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저자인 제시 버튼은 아직 작가가 되기 전에, 낮에는 개인비서로, 저녁에는 배우로 무대에 서는 생활을 이어가던 중 네덜란드에서 보낸 휴가로 이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국립박물관에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재료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미니어처 하우스를 보고, 소유자의 인생에 대해 상상하다가 그것을 소설로 써보겠노라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후 사 년에 걸친 자료조사와 집필, 열일곱 번에 이르는 퇴고 끝에 탄생한 이 작품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이야기이다. 특히 책 전체를 통째로 외워버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문장과 눈부신 묘사가 압도적인데 예를 들자면, 이런 표현들이다.

'사랑은 리넨 헝겊 위의 핏자국보다 훨씬 더 모호했다', '두 사람 사이에 익숙해진 얼룩처럼 공격성이 번져간다', '그의 말이 한 조각 얼음처럼 그녀의 가슴에 박힌다', '설탕을 뿌린 과일 조각처럼 선명한 방 안의 에너지에 넬라는 진이 빠진다', '10월 말의 아침 햇살은 방 안의 모든 것에 냉혹한 선명함을 드리운다', '코르넬리아의 나눔 덕분에 껍질에 금이 가고 넬라는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흐너스는 불규칙한 파장으로 불행을 발산하는 것 같다', '찰나의 발가벗은 친밀감이 그녀의 몸을 관통하면서 춥고 어두운 밖으로 나가려던 욕망을 잠재운다', '넬라의 상상력이 자아낸 실이 대화를 수놓고, 대화의 조각보를 헐겁게 꿰매기 시작한다', '그녀의 심장이 콩알만큼 작아져서 갈비뼈 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밤은 깊어지고, 별들은 다정하지 않고, 추위는 그녀의 목에 닿는 칼날 같다', '달려가 편지를 집어 들고 읽는 순간 날카로운 두려움이 그녀를 벤다', '여자의 친절이 넬라를 찢어놓는다' 등등...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과 행간 사이에 숨겨진 비밀들은 페이지마다 넘쳐 흐르는 우아한 기품과 매혹적인 미스터리들과 함께 어우러져 한 여성의 삶을 단단하게 구축해나가고 있다.

이런 순간에 단어를 사용하다니, 이런 감정을 이렇게 묘사하다니,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쁨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이 작품은 나에게 너무 압도적이라 두 번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이미 한 번 읽을 순간 세계는 더 이상 어제와 같은 날이 될 수 없었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마치 세상이 변해 버린 것만 같은 강렬한 감각을 줄 수 있는 종류의 소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당신은 절대 이 작품을 놓치면 안 된다. 더없이 새롭고, 아름답고, 섬세하고 매혹적인 이 작품은 당신의 세계도 변화시킬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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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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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 옷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날씨다. '태양이 하늘에서 심벌즈처럼 작열하고, 발 밑에서 올라오는 습기는 물이 끓는 솥뚜껑을 연 느낌에, 누군가 뜨거운 물로 방금 샤워하고 나온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 마저 든다. 그렇게 마치 공기를 응결시키면 물처럼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은 축축하고, 후덥지근하고, 무더운 계절'이다. 이건 극중 찌는 듯한 더위로 가득 찬 방콕의 날씨 속에서 해리 홀레가 느끼는 계절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대한민국의 여름 역시, 올해는 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우리는 역대 최고의 무더위 속에서 최악의 여름이라 칭해도 과하지 않은 8월을 보내고 있다. 요 네스뵈는 이 작품을 쓸 때 머나먼 방콕에서 완전히 땀에 젖은 채, 이야기를 쓰고 또 썼다고 한다. 그러니 이 작품은 반드시 요즘 같은 계절에 읽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해리 홀레가 느끼는 대로 주어진 환경을 체감하고, 요 네스뵈가 구축하고자 했던 그 상황 속으로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이 작품은 페이지 마다 더위와 습기를 우리의 얼굴 가득 내뿜으면서 마치 최면처럼 우리를 이야기 속으로 이끌고 있다.

"여기 온 지 24시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 사건은 전혀 진전이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은폐하려는 뭔가가 있으니까요. 국장님이 아직 밝히지 않은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몰네스에 관해 뭘 알고 계시고, 그가 어떤 일에 연루됐는지."

"당신이 알아야 할 건 다 말했소. 그 이상은 없어요. 그렇게 못 알아듣겠소?" 토르후스가 신음소리를 냈다. "솔직히 얻고 싶은 게 뭡니까, 홀레? 당신도 이 일을 조속히 마무리하기를 바라는 줄 알았는데."

'저는 경찰이고 제 할 일을 하는 겁니다, 토르후스."

서른 셋의 해리 홀레는 전작인 <박쥐>에서 출장간 호주에서 살인 사건을 수사하고 돌아와 다시 음주를 시작한 상태로, 경찰에서 진작 쫓겨났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던 중 방콕의 사창가에서 노르웨이 대사가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정치적인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조용히 일을 처리해야 했던 터라 작년 겨울 호주에서 살인 사건을 해결한 이력이 있는 해리가 그 일을 맡게 된다. 해리는 방콕으로 가서 현지 경찰과 호의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용히 사건을 해결하라는 특명을 받고, 그는 동생의 사건을 조사할 기회를 달라는 조건으로 태국으로 향한다. 그리고 현지에서 사건의 배경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드러나는 진실들은 윗 선에서 뭔가 은폐하려는 것들을 보여주기 시작하고, 해리가 그저 적당하고 조속히 사건을 마무리하기를 바랐던 윗 선은 점점 그의 행보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왜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게요, 홀레?

방콕에서 그가 할 일은 사건을 깔끔하게 매듭짓고 소란을 피우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모두에게 골치 아픈 일을 피하고, 그 동안 그래왔던 대로 모르는 척 덮어두기도 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흘러가는 대로 두면 서로 편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해리는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신이 할 일은 그저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것이지, 오슬로의 몇몇 관료들의 뒤를 봐주는 일이 아니라는 거다. 사건 수사에 있어서 만큼은 융통성 제로, 고집 불통, 그리고 진실을 향한 무조건 적인 열정, 30대 초반의 해리 홀레도 역시나 우리가 그 동안 보아 왔던 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그의 오랜 팬으로서 그래서 젊은 그가 더 반갑고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바퀴벌레'는 한 마리가 눈에 띄면 보이지 않는 곳에 수십 마리는 숨어 있다는, 그러니까 박멸하기 쉽지 않은 벌레이다. 그렇게 어디에나, 아무 곳에나 존재하는 바퀴벌레들은 평상시에는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우리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다. 그저 못 본 척했을 뿐, 사방에 존재하는 불편한 진실들처럼 말이다. 요 네스뵈는 방콕이라는 배경 설정에 대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며, 완전히 미아가 될 수도 있는 도시' 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작품의 집필을 시작할 때, 아이디어라고는 오로지 장소, 하나뿐인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만큼 배경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이야기인 셈이다. 어두운 구석구석 바퀴벌레가 느물대며 기어 다니고, 성산업과 아동성애자들을 위한 시장이 엄청나게 거대하고, 밝은 도시의 관광지 뒤에 숨겨진 타락한 이면과 찌는 듯한 더위 너머 달콤한 휴양지의 매력이 넘쳐나는 그곳, 바로 방콕에서 해리 홀레는 숨겨진 진실과 마주하기 위해 또 한번 자신을 '무모하게' 내던진다. 시니컬 해 보이고, 반항적이고, 무심한 듯 보여도 살인 사건 앞에서는 언제나 세상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계산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히어로 해리 홀레이니 말이다.

너무 막중한 책임이군요." 해리가 말했다.

", 그래도 때로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을 책임지는 편이 더 쉬운 것 같아요.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을 보살펴야 해요, 해리. 산 사람들요. 어쨌든 그런 책임감이 우리를 이끌어주죠."

책임감. 작년에 해리가 묻어두려던 것이 있다면 바로 책임감이었다. 산 사람을 위해서든 죽은 사람을 위해서든, 자신을 위해서든 남을 위해서든. 하지만 죄책감에 시달릴 뿐 어떤 식으로든 돌아오는 것이 없었다. 아니, 책임감이 어떻게 그를 이끌어주는지 깨닫지 못했다. 어쩌면 이번 일에 대해서 토르후스가 옳았는지도, 어쩌면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은 해리의 동기는 그리 고상하지만은 않았는지도 모른다.

국내에 시리즈가 열 권이 넘게 인기를 얻어 출간되는 작품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은데,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 시리즈도,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도, 나는 시리즈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은 편이다. 그런데 유독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는 시리즈 출간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현재 10권으로 시리즈는 2013년에 끝이 났는데, 우리가 만나게 되는 번역본으로는 아마도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폴리스>는 내년이 되어도 보지 못할 것 같으니 말이다. 물론 시리즈라고 해도 반드시 출간된 순서대로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순서대로 읽을 경우 성장하는 캐릭터와 독자가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에 감정 이입이나 공감이 쉬워 몰입도도 높아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해리 홀레 시리즈는 역주행을 했을 때 그 매력이 더 빛이 발하는 시리즈가 아닌가 생각한다. , 출판사에서 국내에 출간된 순서 그대로 읽었을 때 말이다. (스노우맨->레오파드=>레드브레스트->네메시스->데빌스스타=>박쥐->바퀴벌레)

왜냐하면 잘 생각해보라.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의 과거를 궁금해한다. 아마 다들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알기 전 그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누굴 만나고,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떤 시간을 보냈었는지 말이다. 그가 겪어온 시간은 고스란히 그의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으니까. 시간 여행을 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사랑에 빠진 대상의 과거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만큼은 얘기가 달라진다. 당신이 영어 원서를 한글만큼 술술 읽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국내에 출간된 순서 그대로 해리 홀레를 만나왔을 것이다. 마흔 살의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 반장이었던 <스노우맨> <레오파드>를 거쳐서 삼십 대 중반의 이제 막 경위로 승진한 <레드브레스트>에서 <네메시스>, <데빌스스타>를 거쳐오면서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외톨이에 술고래인 그를 보아 왔고, 다시 삼십대 초반의 젊고 열정적인 <박쥐> <바퀴벌레>를 통해 해외에서 활약하는 그를 만났다. 우리가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 그는 전대 미문의 연쇄 살인범을 만나 손가락을 하나 잃어 버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그녀의 아들이 연쇄 살인범 손아귀에 들어가기도 하는 등 최악의 상황만 골라가며 겪었던 지치고 엉망으로 피폐했던 모습이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젊은 해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금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 속에 서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혐오스럽다고 꼭 나쁜 건 아니지."

"그럴지도. 그래도 착한 애들은 아닌 것 같아요. 개들은 그냥 '존재'하는 거예요."

수십 년의 시간 동안 형사계 살인 사건 전담반에서 일을 하는 하는 형사라면 매일 다른 범죄가 매일 새로운 방법으로 일어나는 것을 겪으며 조금씩 스스로의 모습에도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일같이 사람들의 거짓말과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들으며, 피묻은 옷과, 창백한 시체, 냉혹한 범행 수법들이 어느 순간에는 무덤덤해질 때도 올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고스란히 축적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의 과거를 만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먼저 사랑에 빠지고, 천천히 그가 지나온 시간들을 따라갈 수 있는 기회라는 건 아무 때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물론 이건 주인공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오슬로 삼부작에서 해리 홀레만큼이나 큰 역할을 하는 매력적인 악당(?) 톰 볼레르가 해리 홀레를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 같은 건 숨겨놓은 보물상자를 찾은 것 같은 기분 마저 들게 했다. 그들의 대립이 절정에 이르는 <데빌스 스타>에서 각자의 역할을 떠올려보자면, <바퀴벌레>에서 그들의 첫만남이 더욱 흥미진진하고 말이다.

 

<박쥐>에서 32살의 풋풋하고 열정 넘치는 해리 홀레는 호주라는 이국적인 공간에서 특유의 젊음을 보여주었고, <바퀴벌레>에서 33살의 그는 찌는 듯한 더위의 방콕에서 사건을 은폐하려는 철벽방어를 뚫고 노르웨이 대사의 살인 사건을 수사한다. <레드브레스트>에서 35살의 그는 미국 비밀경호원 총격사건으로 경위로 승진해서 국가정보국으로 발령을 받았고, <네메시스>에서는 은행 강도 사건과 전 여자친구의 자살 사건에 전작에서 죽은 동료에 대한 의혹을 수사하다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기도 한다. <데빌스스타>에서 36살의 해리 홀레는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이단아로, 경찰청의 외톨이이자 심각한 알콜 중독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이미 자기파괴적인 성향 속으로 파고 들어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로, 우리는 더 이상 경찰이 아닌 해리 홀레의 모습까지 상상해봐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 여기 '오슬로 삼부작'까지가 해리의 30대를 담은 시리즈 전반부이다. 다음에 우리가 만나게 될 <리디머>에서는 아마도 38살에서 40살 사이의 나이일 것 같은데, 아무래도 <스노우맨> 바로 전 작품이다 보니 점점 더 어둠에 가까워지는 해리 홀레의 모습이 심도 있게 그려지고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여기서 다시 돌아보자면, 우리가 처음 만났던 <스노우맨> <레오파드>에서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 반장인 40살 그의 외모는 이랬다. 눈동자는 충혈됐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 빡빡 깍은 금발 머리에 192센티의 거대한 몸은 비쩍 마른 북극곰처럼 살이 빠져 근육질 몸에 지방만 쏙 빠진 상태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알콜 중독 상태였다. 그러니 시리즈를 거듭할 때마다 주인공을 지독하게 고생시키고 있는 요 네스뵈가 이어지는 <팬텀> <폴리스>에서는 대체 해리 홀레를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뜨릴지 심히 걱정이다. 하지만 시리즈를 역주행으로 읽고 있는 덕분에 그 고민을 아직은 조금 더 미룰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최악의 끝을 만나기 전에 아직 우리에겐 해리 홀레의 삼십대 후반 모습이 <리디머>에서 한번 더 남았으니 말이다. 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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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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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명의 사망자와 스물네 명의 부상자를 낸 콜럼바인 총격 사건 이후 이십 년이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세상을 경악하게 만드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져도 시간은 무심히 흘러가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그 비극의 한 복판에서 무려 16년 동안 멈춰버린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은 피해자의 가족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가해자의 가족들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이 책은 평범하고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을까를 묻고 또 물었던 가해자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끔찍한 폭력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나도 범인의 가족은 어떤 이들일까 생각했었다. 부모가 가엾은 아이에게 어떻게 했길래 저런 사람으로 자라났을까 생각했다. 따뜻한 환경에서 사랑으로 키운 아이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족에게 책임이 있다는 설명을 언제나 한 치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부모가 무관심하고, 무책임하고, 어쩌면 학대했을지도 모른다고 확신했다. 엄마가 아주 신경질적인 사람이거나, 숨 막히게 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무기력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1999 4 20,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콜럼바인고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학생 열두 명과 교사 한 명을 살해하고 스물네 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상 최악의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이 책은 사건의 주범이었던 두 학생 중 한명인 딜런의 엄마가 쓴 글이다. 그 끔찍한 날 뒤로 16년 동안, 여전히 자신이 알 수 없는 일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보냈던 그녀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때 벌어졌던 학살을 속죄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이 책은 왜 필요한가? 가해자인 자신의 아들을 두둔하고 싶었던 한 부모의 목소리를 우리가 왜 들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던 평범한 고등학생이 어떻게 한 순간 세기의 괴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당시 누구라도 이 사건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자신이 낳고 기른 아들에 대해서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애썼던 저자도 처음에는 아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려고 애쓰면서도, 여전히 아들이 자의로 누군가를 죽였을 리 없다는 현실부정을 놓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나마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타협하자면, 어쩔 수 없이, 혹은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을 거라고 믿고 싶었을 테니 말이다. 그저 딜런은 마지막 순간에 에릭에게 끌려간 무고한 희생자라는 믿음을 놓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이 애초에 그 엄청난 학살을 미리 계획하고 사람들을 죽일 명백한 살해의도가 있었던 살인자라는 걸 받아들이기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사건 이후 하나씩 드러나는 사실들은 부모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길의 끝에 서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가해자의 부모든, 피해자의 부모든, 세상 모든 부모에게 자식이란 존재는 내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만한 존재,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 만한 존재이니 말이다. 언젠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침묵의 거리에서>를 읽는데, 피해자를 둘러싼 가해자 4명의 부모가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아이 위주로만 사건을 바라보는 모습이 기가 막혔던 기억이 난다. 그들에게 사건의 진상 따위야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내 아이가 사건과 연관되지 않기만을, 내 아이가 다치거나 상처받지 않기만을 바라는 부모의 모습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그것과도 같다. 그들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부모란 존재의 본질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딜런이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막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목숨을 죽은 사람들 대신 내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천 개의 열렬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나는 내 아들 때문에 망가지거나 스러진 삶을 기리며 살려고 애쓴다. 내가 하는 일은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또 내가 아직도 딜런에게 느끼는 사랑에 매달리기 위해서 일한다. 아무리 끔찍한 일을 저질렀더라도, 딜런은 언제까지나 내 아이다.

실제로 그가 살아왔던 환경이, 그를 살인자로 만들고 방조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수많은 매체의 보도 속에서, 현실을 바탕으로 한 수많은 허구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말이다.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학대하고, 어떻게 낭떠러지로 내몰았는지 우리는 수많은 사례를 통해서 보아 왔다. 그리고 당연히 아이가 제대로 된 인격 형성이 되기 전이라면, 아이가 하는 행동의 거의 대부분을 부모의 책임이라고 봐야 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말이다. 하지만 부모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자신의 아이를 품 안의 자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바라보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아이는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우뚝 서서 세상과 소통하고,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하고, 혼자만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 시점에서 부모의 역할이란, 그저 아이가 원했을 때 고민을 나누거나, 도움을 주는 정도이니 이미 형성된 자아와 인격을 바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다르게 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사람은 가정에서만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십대의 경우에는 더군다나 그렇고 말이다. '양육'이란 한 사람이 접하는 모든 환경적 요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신이 아는 방식 중에 최선의 방법으로 아이를 기른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아이는 부모가 알 수 없는 존재로 성장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딜런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그의 부모님이 어떻게 해서, 혹은 어떻게 하지 않아서 딜런이 그런 엄청난 학살을 저지르게 된 것이 아니었을 거다. 딜런이 그런 상태에 이르기까지 부모님이 아들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숙하고 독립된 존재로 자라난 딜런이 자신의 내면을 부모님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감추었던 것이다.

딜런을 키우는 일은 끝이 났다. 이 아이를 만들어내는 데 들였던 모든 사랑과 노력이 끝이 났다.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수많은 것들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종종 있다.  특히나 부모, 혹은 형제 혹은 자식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의문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란 사실 무시무시하다. 가족이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존재이니, 거의 무조건 믿어야 하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부부와 닮은 아이들은 점점 자라면서 낯선 타인처럼 이질적이고 불가해한 존재로 변해가고, 어느 순간 아이는 친근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니 부모라면 누구나 한번쯤 과연 내가 알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진짜일까 생각해보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평범한 내 아들이 누군가를 죽인 살인자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일 것이다. 그렇게 지옥과도 같았던 시간들을 겪어야 했던 가해자의 엄마이자 이 책의 저자인 수 클리볼드는 16년이 지난 지금도 날마다 딜런과 에릭이 죽인 사람들을 생각한다고 한다. 그 동안 자신이 아들에게 잘못했던 무수한 것들과 아들이 남긴 끔찍한 파괴 둘 다에 대해서, 단 하루도 격한 죄책감에 휩싸이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고 말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지만,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끌어 안고 살아야 한다는 굴레와도 같다. 자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감수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매 순간 자신이 잘 하고 있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우리는 육아의 모든 책임을 부모에게 돌리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뒤집어, 아이가 괴물이 되고, 다시 아이가 되는 것을 보아야 했던 한 부모는 이렇게 말을 한다. 아이는 혼자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것이라고. 육아의 책임은 가정뿐만 아니라 학교, 사회에도 있는 거라고. 그러니 다 같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한번쯤 생각해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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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스토리콜렉터 46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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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다 신조의 집 시리즈 3부작 중의 두 번째 작품이 더위를 물리치러 돌아왔다. 폭염은 말할 것도 없고, 열대야로 인해 밤에 편하게 자기도 힘든 요즘, 제대로 더위를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마법과도 같은 작품이다. 미쓰다 월드에선 더위란 단어는 존재할래야 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오싹하고, 소름 끼치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덥기는커녕, 추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더위에 지쳐버린 당신에게 에어컨보다는 미쓰다 신조의 작품 세계에 입문하는 걸 추천한다.

그건 그렇고, 뭐 이런 집이 다 있담....... 새삼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아직 자신이 그 집의 침대 위에서 이렇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 체험을 했으면서도 여전히 머물러 있으니까.

유령의 집을 무대로 한 호러 영화를 보면서 '어째서 저 끔찍한 장소에서 얼른 도망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이따금씩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게다가 그 무대가 자기 집이 되니 그렇게 간단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작은 임대주택에서 부모님과 셋이 살고 있었던 코타로는, 작년 가을 자동차 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여의게 되어 할머니와 함께 지내게 된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에게 어느 정도 있던 빚과 밀려 있던 임대주택의 집세 때문에 지방의 작은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된 할머니와 코타로.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 도착한 마을의 거리와 집을 바라보며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자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학여행을 제외하면 한 번도 전에 살던 치바 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기시감이 드는 길거리 한구석에 있는 정체 모를 숲에서 어쩐지 기분 나쁜 목소리의 환청도 들리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 새까매지면서, 깨어 있는 채로 악몽의 한복판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무시무시하게 소름 끼치는 느낌에 사로 잡히게 된다.

그렇게 꺼림칙한 기분은 밤이 되면 더욱 극대화되는데, 등 뒤의 복도에서 뭔가의 기척이 느껴지고, 척척척척 발소리가 다가오고, 문 너머에서 무언가의 숨소리가 들린다. 코타로는 할머니가 다다미방에 들어가고 나면, 자신만 이 집에 홀로 남겨진 듯한 불안감에 감싸이고, 무서워졌다. 자기 방으로 가는 것뿐인데도 마치 호러 영화에 나오는 낯선 지역의 흉가에 발을 들이는 방문자가 되는 듯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미신을 믿지도 않거니와, 괜스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마음에 코타로는 스스로 조사를 하기로 한다. 동네에서 새로 알게 된 친구 레나와 함께 도서관에 가고, 동네의 어른들을 통해 과거에 이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10년 전 자신이 이사를 온 바로 그 집에 살던 일가족이 처참하게 참살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게다가 10년 전 그 살인 사건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마저 깨닫게 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무시무시해진다.

어서 방 안으로 도망쳐야 해.....

그곳만이 안전지대 같다는 것을, 코타로는 요 며칠간의 체험과 오늘 노인에게 들었던 이야기로 확신하고 있었다.

척척척척.........

기척이 멈췄다. 그리고 등 뒤에서 무시무시한 공기의 압박이 느껴진다.

찾았다..............!

귓가에 소름끼치는 속삭임이 들렸다. 그 숨결까지 귓불에 느껴질 정도로.

'그것'은 고타로의 바로 뒤에 있었다.

어린 주인공의 시점으로 체험하는 괴이한 현상들과 끔찍한 경험들을 통해 전달되는 공포라 그런지, 감정이입하기가 매우 쉬운 편이다. 스멀스멀 나타나는 '그것'이 뒤를 돌아보면 우리 집 어딘 가에서도 나타날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미쓰다 신조가 그려내는 공포란 헐리우드 영화의 그것처럼 아무 의미 없이 사람들을 깜짝 놀래 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구제할 수 없는 절망, 불합리할 정도의 우월감, 끝을 모를 악의, 압도적인 광기, 소름 돋는 증오, 너무나도 제멋대로인 살의'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동기가 있어 출발한 공포라 더욱 섬뜩하다. 오싹하고 기분 나쁜 기운 자체는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사실 그 악의 기원을 따지고 보면 극도로 현실적인 배경에서 시작한 거라 그만큼 끔찍하고, 놀라운 것이다. 이 작품 역시 중반 이후에 밝혀지는 10년전 그 살인 사건의 진상이 매우 경악스러울 만큼 엄청나다.

시리즈의 세 번째 <재앙의 뜰>은 기존 '재앙이 내린 집'이란 기본 컨셉에, 기존 두 작품과는 다른 파격적인 설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더욱 궁금해진다. 괴이한 현상들과 끔찍한 사건들 너머로 또 어떤 엄청난 진실을 숨겨 놓고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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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퀸 : 유리의 검 1 레드 퀸
빅토리아 애비야드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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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피로 인해 신분이 결정되어 있는 세계이다. 붉은색 피로 태어나며 평범한 적혈과 은색 피로 태어나 초능력을 쓰며 적혈들의 위에 신처럼 군림하는 은혈로 이루어진 세계. '태어날 때부터 피로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의 피지배층 출신 소녀가 특별한 능력을 얻으면서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라고 요약되는 이 작품은 얼핏 <헝거게임>과 유사한 전개가 상상되지만, 흥미로운 건 작가가 구축한 세계가 절대 평범하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헝거게임>의 성공 이후, 그와 유사한 판타지 작품들이 얼마나 많이 등장했던가. 이제는 좀 다른 색깔의 작품을 만날 때가 됐다. 그 시작이 바로 <레드퀸>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수백 명의 이름이 있어, 능력을 가진 적혈들 수백 명의 이름이. 더 강하고, 더 빠르고, 새벽처럼 불타오르는 피를 가진 적혈들이."

미래의 모서리에 서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턱 막힌다.

"메이븐이 그들을 죽이려고 할 거야,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먼저 닿을 수 있다면, 그들은....."

"이 세계가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위대한 군대가 되겠지."

전편인 <적혈의 여왕>에서 할 수 있는 재능이라고는 소매치기 밖에 없었던 소녀 메어는 우연히 궁에서 일을 하다가, 왕비를 선출하기 위해 초능력을 겨루는 퀸스트라이얼 도중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의 능력을 무심코 분출하게 되었다. 적혈이 초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왕의 계획으로 둘째 왕자인 메이븐과 약혼을 하게 된 메어는, 언제 들통날 지 모르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며 왕궁에서의 위태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그러다 메이븐과 함께 반란 군단인 진홍의 군대 일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나 따뜻하고 배려있는 모습의 메이븐에게는 메어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계략이 있었고, 결국 왕세자 칼과 그녀는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번에 출간된 <유리의 검>에서는 칼과 메어를 구축한 진홍의 군대 일원들과 메이븐 일행으로 부터 도피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전편이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고, 인물들을 설정하고 소개하느라 에필로그 식의 서두가 다소 길었다면, 이번에는 본격적인 두 세계의 대립과 전투 장면들이 압도적으로 휘몰아쳐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가 전개된다. 빠르게 진행되는 스토리 사이사이 메어의 고민과 고뇌 또한 계속 된다. 평범했던 열일곱 소녀가 온 나라가 주목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번개 소녀가 되기까지, 그리고 자신의 존재로 인해 핍박 받던 자신들의 세계를 다시 세울 수도 있을 거라고 희망을 가지게 되고, 믿었던 이의 배신으로 인한 충격과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사랑에 대한 혼돈까지... 메어의 성장기는 계속 된다. 잃어버린 몇몇 것들은 잊기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죽은 이들의 얼굴들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앞을 향해 달려나간다.

이제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부분, 내가 가장 심하게 저항했던 부분이 닥친다. 하지만 칼은 확고했다. 우리는 찢어져야만 해. 더 많은 영역을 커버하고, 더 많은 죄수들을 자유롭게 해 주고, 그리고 더 중요하게도 우리 자신이 안전하게 탈출하기 위해서. 그래서 나는 모여 있는 신혈들을 뚫고 흐름을 거슬러 가서 카메론의 옆에 선다. 그녀는 내 어깨 너머로 열쇠를 던지고, 킬런이 솜씨 좋게 그것을 받는다. 그는 우리가 가는 모습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지켜본다. 지금이 그가 나를 볼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다.

메어가 궁을 나와서 다시 처음으로 메이븐을 만나게 된 순간, "내가 그대를 찾을 거라고 했잖아." 라고 말하며 그녀의 생명을 위협하는 마치 로맨스 같으면서도, 소름 끼치는 공포를 안겨주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분명 남자 주인공은 칼인 것 같은데,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묘하게 메이븐이라는 캐릭터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물론 작가는 어린 시절 친구인 킬런과의 관계도, 그리고 여전히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칼과의 관계도 놓치지 않고 이야기의 균형을 적절하게 배치해 극적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다. 더 이상 소년과 소녀가 아닌 그들, 나이만 보자면 어린 아이들에 불과해야겠지만, 이제 그런 아이들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군대를 모으고, 초능력을 사용해서 누군가를 죽이고, 지키며 그 와중에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아야 하고, 사랑도 놓치지 말아야 했으니 말이다.

이번 시리즈의 마지막 장면도 전편과 마찬가지로 메어가 메이븐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 막이 내린다. 다른 점은, 이번에는 그것이 메어의 선택이었다는 거다.

"나머지 사람들을 보내 줘, 그러면 내가 너의 죄수가 될게. 내가 항복할게. 내가 돌아갈게."

그리고 그 엄청난 선택의 대가는 엄청나다. 마지막 장면에 드러나는 그것은, 우리가 이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을 계속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들어 준다. 평범하지만 특별한 소녀, 메어가 다음에는 또 어떤 상황을 겪게 될지, 어떤 방식으로 성장하게 될지, 그리고 그들이 결국 승리하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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