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해자 - 상 북스토리 재팬 클래식 플러스 8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북스토리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오쿠다 히데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사소한 사건이나 계기로 산산조각 내어 버리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을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게 만들고는 한다. 가벼운 듯 보이는 유머와 너무도 평범해서 실제 일상처럼 보이는 삶과 폭력적으로 느껴질 만큼 사건들은 이야기로서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지만 어느 순간 외면하고 싶었던 무언가를 끝내 마주보게 만든다. 바로 그것이 오쿠다 히데오의 이야기가 가진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이고, 이 작품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볼까. 시게노리 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제일 좋다. 시계를 보았다. 서두르면 면회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괜히 또 시게노리의 기분만 상하게 할 뿐이다.

별것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평범한 우리 집에 큰 사건 같은 게 일어날 리가 없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공부는 때려치운 유스케는 불량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되는 대로 살고 있다. 어느 날 밤 중년 남자에게 돈을 빼앗고, 기분에 취해 비슷한 일을 저지르려다 경찰을 만나 혼쭐이 난다. 유스케와 그의 친구들을 때린 건 강력계 형사인 구노이다. 그는 부서장의 지시로 동료 형사를 감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장사를 하고 있는 전직 여경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어 복무규정 위반으로 처벌하기 위해 동료 형사의 뒤를 캐고 다니는 것이 마음 편하지는 않았으나, 윗 선의 지시라 그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 대상인 하나무라는 그걸 알고 있음에도 구노에게 복수의 이를 갈고 있는 중이다.

슈퍼마켓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평범한 주부 교코의 삶은 소박하다. 가끔씩 사치를 부리는 남편은 취미인 경마에서 돈을 땄다고만 하지만, 그녀는 뜻하지 않은 수입이 어딘가 석연치가 않다. 그러다 남편 시게노리의 회사에 의문의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마침 당직이자 최초 목격자인 남편을 형사들이 의심하기 시작한다. 남편의 회사 사람들이 집을 방문해 알 수 없는 당부를 하고, 형사들은 계속 찾아와서 남편에 대해 묻고, 교코의 가슴속에도 천천히 불안감이 생긴다. 점점 남편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증거들이 눈에 보이고, 그녀는 점점 초조하고 무서워져 현실을 외면하고만 싶다.

무서울 일은 전혀 없다. 우리 집은 가난하지도, 그렇다고 부자도 아닌, 평범한 가정인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은가.

하지만 세상의 모든 불행한 일들은 그렇게 평범한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시작되곤 한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버린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느 순간 일상에 스며들어 버리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범죄에 휘말리고, 자신도 모르게 위험한 일에 가담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한 번에 훅 가기도 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삶이다.

교코의 목소리가 떨렸다. 완전히 관계 회복의 길을 잘라 버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본성을 다 드러낸 것 같기도 했다. 지금까지 온화한 척했던 것은 쫓기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늘 관객 편에 있었다. 감상만 말하면 되었다. 미칠 듯한 사랑도, 빵 하나를 열 명이 나눠 먹어야만 하는 치열한 싸움도, 아무 것도 경험하지 않았다. 지금 그것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추한 모습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었다.

유스케는 괜한 치기로 벌였던 일 덕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구노를 눈엣 가시로 여기는 하나무라가 야쿠자와 결탁해 유스케를 이용하려고 하게 된 것이다. 하나무라는 유스케를 통해 구노의 폭력에 대한 피해 서류를 제출하게 만들고, 그것을 취하하게 만들기 위해 구노의 동료들은 유스케를 찾아가고, 유스케는 야쿠자와 형사들 사이에서 그저 도망치고만 싶다. 오래 전 교통사고로 임신한 아내를 잃고 장모에게 점점 더 의지하게 된 구노 역시 자의와 상관없이 상사의 지시대로 이행한 일 때문에 형사 일을 그만둬야 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구노는 시게노리의 방화 사건을 수사하면서 부인인 교코에게서 죽은 아내의 모습을 보게 되고, 자주 연락이 되지 않는 장모에게 더욱 신경을 쓰게 되면서 급기야 일에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어 동료들의 걱정을 산다.

시게노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그것은 일상을 부숴버릴 만한 짓이었을까.

남편에 대한 의심은 점점 커지고, 과거에 미심쩍었던 일부터 현재 의문이 가시지 않은 일들까지 모두 떠올라 교코를 괴롭힌다. 그러던 차에 아르바이트 사원의 처우 개선을 위한 시민운동에 가담하게 되면서 점점 직장에서 윗사람들과 부딪히게 되고, 급기야 계산대에서 창고로 업무 재배치가 된다. 매스컴이 남편의 범행을 의심하는 기사를 싣게 되자, 주변 사람들 모두 그들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하고 그녀는 점점 더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진다. 어쩌면 교코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감당하기 힘든 일에 직면했을 때 부딪쳐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순간을 모면하려고 미루고, 피하려고만 했던 게 아닐까. 그녀는 남편의 결백을 직접 본인에게 물어본 적도 없고, 앞으로의 대책을 함께 강구해보자고 의논하지도 않고, 그저 혼자 그 모든 문제를 끌어안고 전전긍긍하기만 한다. 남편은 소소한 부정을 저질렀을 뿐이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 말이다.

사소한 절도만으로도 가족의 울타리는 간단히 붕괴되고, 가족 중에 누군가 범죄자가 되면 그 가족 모두 같은 범죄자 취급을 받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 보니, 교코는 어떻게 해서든 가정을, 아이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런 그녀가 선택하는 마지막 한 방도, 그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태연자약한 이기심도, 너무도 현실적이라 서글프고 쓸쓸하기만 하다. 10년 넘게 성실히 경찰 일을 해왔지만, 어이없고도 허무하게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상황에 처한 구노의 삶 역시 안타깝기 그지 없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런 식으로 결정되어도 좋은 것인지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었지만, 사실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자신만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을 방해하는 일상의 수많은 것들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 이들을 보면서, 아마 누구라도 자신의 어떤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당장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니 말이다. 이들의 고군분투가 그저 허구의 이야기 속 상황 같지만은 않아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내내 이야기의 여운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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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업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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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불행과 위기를 겪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기거나, 혹은 그걸 기반으로 다른 방향으로 일이 풀릴 텐데..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 속 주인공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바로 그런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곤 한다. 웬만한 사람들은 버텨낼 수가 없을 만큼.. 정말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은 주인공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그렇게 생이란 경기장에서 강 펀치를 연속으로 맞는 그들에게 '그래도 삶은 살아야 한다' 는 것을 알려주려는 그의 노력은 그 동안 매우 다양한 이야기로 우리를 찾아 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편집이다. 복잡한 플롯과 다양한 인물 군상들과 기막힌 반전과 화려한 구성까지, 장편을 너무 잘 쓰는 작가의 유일한 단편소설집이라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사람은 평생 자유를 꿈꾸지. 그러다가 갑자기 반전이 일어나 재판을 다시 받고 교도소에서 나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는 거야. 그러자 무기수는 간수에게 말하지.

"바깥세상에 무엇이 있을지 두려워 떠날 수 없습니다."

자유를 갖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지. 하지만 넌 이제 자유를 얻었으니 맘껏 누리도록 해.

아니, 못해.

지금 네가 맞이한 순간을 꿈꾸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꿈꾸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달라.

-'전화' 중에서

                                                                                                   

<픽업>에선 횡령과 금융사기로 유명한 고학력 사기꾼이 등장한다. 그는 유령 회사를 차려 수많은 사람들의 돈을 가로채지만, 그는 단 한번도 법의 심판을 받은 적이 없고, 스스로에게 당당하기까지 하다. 적자생존의 세상에서 자신이 벌이는 횡령과 사기는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일종의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일생 일대의 위기가 닥쳐오지만, 배심원을 매수해 결국 무죄로 풀려나고 승리에 고무되어 자축의 술을 마신다. 하지만 뜻밖의 순간에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을. <전화>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는 한 통의 전화로 인해 그 동안 애써 이루어놓은 자신의 모든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로 한다. 고객과의 약속을 무례하게 취소해버리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료의 비밀에 대해 엘리베이터 안에서 폭로해버리고, 길거리에서 술을 먹다 경찰에게 쫓기기도 하고, 5년 동안 함께 해온 아내와 아이에게도 무책임한 발언을 해버린다. 그가 저지른 짓들은 누구나 한 번쯤 꿈꾸지만 절대로 실행으로 옮길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누군가를 업신여기고 괴롭히는 놈에게 쓴 소리를 해주고, 권위를 앞세우는 이들을 면전에서 망신 주고, 성공지상주의와 알량한 책임감도 집어 던지고 말이다.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은 한 통의 전화, 그리고 결국 그의 삶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실수>에서 촉망 받는 변호사인 그는 만난 지 일 년도 안 되어 첫 번째 부인과 결혼하지만, 점점 서로에게 소원해지다 결국 아홉 살이 된 딸을 두고 떨어져 지내기로 한다. 이후에 그는 또 변호사인 다른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결국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만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매 순간마다 그녀가 보여 주었던 모습들 속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뒤돌아보면 너무도 뚜렷이 보이는 명백한 순간들 조차 사람들은 대부분 알아차리지 못하니 말이다. 살다가 별안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미 오래 전에 진실을 목도하고도 스스로 애써 외면하려 해 왔다는 것을.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흔한 명제가 얼마나 끔찍하게 스스로에게 되돌아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각성>에서는 더욱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데, 촉망 받는 젊은 소설가였던 남자가 결혼을 하고 생활에 치이면서 점점 제대로 글을 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자, 희대의 작품을 완성시키겠다는 일념 하에 엄청난 일을 벌이게 된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는 퇴근해 집으로 돌아와 딸들과 놀아주고, 저녁을 먹은 뒤 밤마다 자정이 넘을 때까지 서재에 틀어박혀 하루에 다섯 페이지씩 소설을 써나갔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내리막길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조바심 때문에 점점 더 작품에 집착하고, 급기야 약물에 의지해 잠을 자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글을 써내려 가기 시작하는데... 처음 약을 두 알 먹었을 때만 해도 31페이지를 쓰고 있었는데, 어느새 원고는 448페이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이야기는 바로 그의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만다. 과연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누구나 어딘가로 떠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꿈꾼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 우리가 스스로 가두어버린 굴레에서 벗어나 단지 한 발짝만 앞으로 내디디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텐데 무엇이 두려워 옴짝달싹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우리는 술집에서 우연히 어느 여자를 본다. 가능성을 본다. 우리가 마땅히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삶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하지만 고개를 잠시 돌렸다가 그 자리를 보면 그 여자는 더 이상 거기에 없다.

                                                                                        -'가능성' 중에서

 

이렇게 짧지만 다양한 12편의 단편들은 더글라스 케네디 특유의 장점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존에 만나왔던 그의 장편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중에 겨우 몇 가지 에피소드만으로도 별도로 다른 소설 한 편이 나올 수 있을 것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스토리를 이끌어가던 그의 능력이 단편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편에서도 여지없이 성공한 삶을 살고 있던 주인공들에게 위기가 닥치고, 왜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게 만들어주는 그의 탁월한 능력이 돋보이고 있다.

다들 매일 순간을 살아내기 바빠서 고민조차 없이 지나가버리는 것들에 대해서, 더글라스 케네디는 삶의 순간들을 멈추고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를 해준다. 물론 '모멘트' '리빙 더 월드', '파리5구의 여인'이나 '비트레이얼'에서처럼 스펙타클한 모험과 화려한 플롯은 없었지만, 오직 단편이라서 느낄 수 있는 예리한 순간 포착과 반짝거리는 매력이 가득해서 특유의 이야기로서의 즐거움은 여전히 가득 안겨주고 있다. 복잡한 이야기는 딱 질색인 분들이라면, 아마도 이 작품집이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출발점이 되어 줄 수도 있을 것 같고 말이다. 꿈만 꾸는 것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다르다. 소문으로만 짐작하는 것과 직접 체험해보는 것 역시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 동안 더글라스 케네디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을 당신, 이번에야말로 그 실체를 직접 경험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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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홈즈 Miss 모리어티
헤더 W. 페티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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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수많은 셜록 홈즈 이야기를 만나왔고, 그를 소재로 변주된 또 많은 이야기를 봐왔지만 셜록 홈즈 최고의 숙적인 모리어티가 여자라는 설정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현대의 런던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스토리라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셜록 시리즈만큼이나 색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저자가 셜로키언은 커녕 셜록 홈즈 시리즈의 팬도 아니었던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어정쩡한 셜록을 그렸을 리도 없고, 모리어티라는 이름을 이렇게 황당하게 사용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시도는 신선했으나, 원작에서 너무 멀어진 두 캐릭터는 다소 아쉬웠다

딱히 문 뒤에서 무엇을 보기를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셜록의 침실이 너무나 정상적이라 놀라고 말았다. 프레디가 살고 있었을 것 같기도 했고, 쇼니도 몇 년은 살았을 것만 같았다. 침대는 흐트러져 있었다. 여기저기에 옷들이 널려 있었고 벽에는 포스터까지 몇 장 있었다. 셜록 홈즈는 특이하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는데. 결론적으로는 셜록도 결국 런던에 사는 남자애일 뿐이라는 것을 이상하고도 생생하게 상기하게 된 기분이었다. 그 허탈한 느낌에 내가 직면해야 할 현실성이 되돌아왔다.

여고생 제임스 모리어티는 6개월전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 가족들을 전혀 돌보지 않는 경찰 아빠 대신 세 남동생을 돌보며 살고 있다. 죽은 엄마에게 집착하는 아빠는 술만 마시면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특히나 엄마를 쏙 빼 닮은 모리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진 후 모리에게 집은 더 이상 안전할 수 없는 공간이었고, 그녀는 언제나 집에 들어가길 두려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화재 대피 훈련이 있던 날 선생님의 부탁으로 반에서 가장 괴이하기로 악명 높은 홈즈를 데려오기 위해 극장 지하에 있는 그의 비밀 연구실에 가게 된다. 화학 실험실 자체는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마치 거품과 연기를 지휘하는 미친 교향악단 지휘자처럼 묘하게 격정적으로 우아하게 실험대 주변을 돌아다니는 셜록은 그렇지 않았다. 너저분한 교복과 앞으로 뻗친 대걸레 같은 웃기는 머리카락에 보자마자 그녀에 대한 자신의 추리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모습은 인상적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어린 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막아서고 동생을 잘 토닥이고 난 뒤 모리는 집에서 나와 자신만의 아지트인 리젠트 파크 공원에 가고, 그곳에서 다시 한번 셜록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공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함께 해결해보자고 게임을 제안하게 된다. 그렇게 화학 실험실에 틀어 박혀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있는 셜록과 수학 천재 모리어티가 함께 살인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라면 흥미로울 것 같았다. 안하무인에 거들먹거리고, 관찰력과 추론이 뛰어난 셜록과 계산에 밝고 영리한 모리어티가 함께라면, 비록 그들이 고등학생일지라도 무능한 경찰이 찾지 못하고 있는 어떤 단서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가 허리를 쭉 펴자, 나를 내려다보게 되었는데, 여전히 내 눈에는 그가 너무나 어리게만 보였다. 스스로를 진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나를 찾고 있는 그냥 또 하나의 어린아이가.

"아니. 아니야, 그건 아니지. 이건 공원에서 죽은 사람들에 대한 거고, 나의 세계는 100만 덩어리 무쇠로 박살이 나서는 전부 내 주변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데, 거기에서 내가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게 이 일의 의미야, . 이건 온전히 혼자서 산사태와 싸우는 나에 대한 거라고. 그리고 네 규칙에 맞춰 주지 못하고 이번에 너의 게임을 섞여 들게 한 것은 미안해."

이 작품의 화자가 셜록이 아니라 모리어티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원작에서도 셜록이 주체로 등장한 적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모리는 '왓슨'의 역할도 아니고 (심지어 그녀가 대역을 맡고 있는 배우의 남자친구가 왓슨으로 등장한다) '모리어티'라는 역할로 보기에도 상당히 애매하다. 그저 수학 천재에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라는 것 정도만 모리어티스럽다고 할까. 애초에 셜록과 사랑에 빠지는 모리어티라는 설정이 시작이었으니 뭐 할 수 없지만. 사실 왜 이들 캐릭터를 셜록과 모리어티라고 설정했는지 조차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의아해진다. 이 설정을 빼고 보자면 이야기 자체는 지루하지 않다. 베리 리가의 '나는 살인자를 사냥한다'의 느낌도 나고, 극중 모리와 그의 아버지 관계, 그리고 그녀가 사건을 파헤쳐가는 스토리 자체는 흥미로우니 말이다.

, 이 모든 과정에서 셜록의 역할이 거의 없다. 그는 가끔씩 등장해 그녀에게 키스를 하거나, 그녀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거나, 위험한 순간에 그녀를 구해주는 게 전부다. 그냥 모리어티의 남자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역할. 나의 셜록을 이렇게 평범하고 존재감 없게 만들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게다가 모리가 셜록을 ''이라고 부르는 것도 좀 오글거린다. '셜록'도 아니고, '홈즈'도 아니고 ''이라니...... 만약 이 작품이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의 첫 번째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두 번째 작품부터 셜록이 제대로 활약하고, 이들 간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프리퀄 같은 거였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건 내가 셜록 홈즈라는 캐릭터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에 반해서 생기는 반발심이니,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미스터리가 섞인 가벼운 로맨스로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지루할 틈 없이 시작하면 끝까지 이야기를 읽게 만드는 작품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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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7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탐정 오페라 밀키 홈즈>라는 일본 만화가 있는데요, 거기에 나오는 여자 캐릭터가 탐정으로 나오는데 이름이 ‘셜록 셰린포드’입니다. 심지어 이 캐릭터의 할아버지가 홈즈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

피오나 2016-09-07 19:46   좋아요 0 | URL
오..그런 작품도 있군요ㅋ 홈즈는 정말 많이 변주되었던터라...제가 모르는 작품들도 많더라고요. 그러니 완성도보다는 아무래도 다양성을 인정해야겠죠? ^^;;;
 
헤밍웨이 죽이기 - 엘러리 퀸 앤솔러지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외 지음, 엘러리 퀸 엮음, 정연주 옮김, 김용언 해제 / 책읽는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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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런 거였으면 좋겠군요." 개빈 삼촌이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렇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쪽이, 이미 일어난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라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어떻게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일 수 있죠? " 보안관이 말했다. "그가 마음먹었던 일을 어떻게 끝낼 수 있겠습니까? 이미 감옥에 갇혀 있는 데다, 그를 자유로이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주민은 본인이 죽였다고 자백한 아내의 아버지인데?"

                                                                       -윌리엄 포크너 '설탕 한 스푼'

한 남자가 보안관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내를 죽였다고 자수를 한다. "나는 내 아내를 죽였습니다" 이 한마디에 상황은 종료되고 그는 구치소에 갇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마치 감옥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 같다는 거였다. 아내를 죽였으니까 순순히 체포에 응한다기보다는, 감옥에 갇혀 감시 받기 위해 아내를 죽였다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그는 곧 감옥에서 감쪽같이 탈옥해버린다. 그럴 거였으면 대체 왜 들어갔던 걸까. 탈출하기 위해서? 굳이 전화를 걸어 살인을 자백해놓고 붙잡혔다가 다시 탈옥을 감행한 이유는 뭘까. 미스터리는 의외의 순간에 밝혀진다. 사람이란 잘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 습관과 버릇처럼 아주 사소한 부분이 무의식 속에서 드러나며 진상이 드러나는 이 이야기는 짧지만 날카로운 뭔가를 가지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도망자들이 결국 잡히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바로 숨어 지내는 동안에도 버릇을 못 끊기 때문이라는 건 수많은 범죄 소설에서 이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보던 잡지를 보고, 먹던 음식을 먹고, 마시던 맥주를 마시고, 같은 여자한테 전화를 건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예리한 관찰로 탄생한 거장들의 미스터리 모음집은 이렇게 한편, 한편이 모두 하나의 문학작품 과도 같다.

"아니오, 피터스." 지방 검사가 날카롭게 말했다. "살인을 저지른 동기 말고는 모든 것이 뚜렷합니다. 하지만 배심원들이 여성에 관해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뭔가 확실한 증거가 있기만 하면... 뭔가 내세울 물건이 말이죠. 이야기를 들려주는 물건. 이렇게 어설픈 살인사건과 일맥상통하는 증거가 필요해요."

헤일 부인은 은밀한 눈길로 피터스 부인을 바라봤다. 피터스 부인도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급히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수전 글래스펠 '여성 배심원단'

엄청난 거금을 도둑맞았고, 그 도둑을 잡았지만 세상에 드러낼 수 없어 그 돈을 되찾을 수 없는 부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아서 밀러의 '도둑이 필요해', 흉악범과 경찰들과의 쫓고 쫓기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맥킨레이 캔터의 '헤밍웨이 죽이기',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여인을 같은 여성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간파하는 수전 글래스펠의 '여성 배심원단, 그리고 반전이 돋보이는 마크 코널리의 '사인 심문'과 제임스 굴드 커즌스의 '기밀 고객' 등등... 12편의 단편들은 범죄라는 행위가 발생하지만 오로지 그것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기에 기존의 미스터리 작품들과는 조금의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존 코널리는 '죽이는 책'에서 장르소설과 순문학 사이의 경계는 몇몇 이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선명하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장르란, 아름다움처럼 보는 이의 눈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미스터리 소설은 형식이자 메커니즘이므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도구라고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위대한 소설들은 흥미롭게도 장르를 불문하고 그 핵심에 범죄를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노벨문학상.퓰리처상 수상 작가 12인의 미스터리 걸작선인 이 작품 <헤밍웨이 죽이기>를 엮은 엘레러 퀸의 의도는 매우 멋지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물론 '범죄를 제거하고 난 뒤에도 파괴되지 않는 소설은 범죄소설이 아니며, 범죄 요소를 없앨 경우 무너져버리는 소설이 범죄소설이라는 공식'에 대입해보자면, 이 작품의 꽤 많은 이야기들이 미스터리 혹은 범죄소설이라고 이름 붙이기에 애매하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 속에 미스터리의 본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다. 그만큼 장르의 경계를 지우는 매혹적인 작품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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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죽이기 - 엘러리 퀸 앤솔러지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외 지음, 엘러리 퀸 엮음, 정연주 옮김, 김용언 해제 / 책읽는섬 / 201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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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과 순문학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매혹적인 미스터리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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