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처럼 희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2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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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티그 라르손이 창조한 히로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작가, 살라 시무카의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 그 두 번째 작품을 만났다.

젤렌카의 마지막 한마디가 얼음송곳처럼 루미키의 마음을 후벼 팠다. 그녀는 젤렌카를 부둥켜안고 계속 설득하고 싶었다. 그녀가 얼마나 큰 위험에 처해 있는지 기어이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지도 알려주고 싶었고. 원한다면 그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수줍음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습관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누구든 쫓아다니지 마. 사랑이나 우정이나 신뢰를 위해 절대 애원하지 마.

열일곱의 루미키는 모든 문제에 대해 신중히 고찰하는 성격으로 급우들의 장난에도 가담하지 않고, 학교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고 늘 혼자 식사를 하면서도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는 당찬 소녀이다. 그녀는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으려 애쓰며, 항상 모든 일에 방관적 입장을 유지했는데, 그저 투명인간처럼 있는 듯 없는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무난하게 살고 싶었던 그녀는 어떤 일에도 참견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도 휘말리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다. 하지만 뭐, 인생이란 것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만 굴러가겠느냔 말이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피 묻은 돈 3만 유로로 인해, 그녀의 평화롭고 조용했던 생활은 산산이 깨지고 만다. 그렇게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피처럼 붉다>에서 어쩌다 보니 국제적인 범죄에 말려들게 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는, 열일곱 소녀의 파란만장한 모험기를 그렸었다.

이번 <눈처럼 희다>에서는 전작에서 피에 젖은 돈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국제적인 마약조직에 쫓겨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난 뒤, 체코 프라하로 혼자 여행을 떠난 루미키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허벅지에 총을 맞고 병원에 있다 퇴원한 지 이제 겨우 석 달 반이 지난 상태로, 일주일 뒤면 프라하 여행을 마치고 핀란드로 돌아가 가족과 여름을 보낼 예정이었다. 오로지 혼자 있고 싶어서 떠나온 낯선 도시에서 중부 유럽의 향긋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그녀에게, 어느 날 낯선 여자가 다가와 말한다.

"내가 네 언니인 것 같아."

스무 살인 젤렌카는 엄마와 함께 살다 자신이 열다섯 살 때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겨졌다고 말하며, 루미키에게 말을 건넨다. 과거에 루미키의 아빠가 프라하에 관광객으로 여행을 왔다가 그녀의 엄마를 만났다는 것이다. 아빠가 또 다른 딸을 두고 있었다니, 자신의 언니를, 그것도 바로 이곳에. 루미키는 혼란스럽고, 믿기지가 않는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달라질 거라는 사실 말이다.

"뭐 없어진 거 있어요?" 루미키가 자신의 물건을 챙기며 물었다.

그녀가 아파트에 놓아둔 것이라고는 옷과 세면도구 가방뿐이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닳아 해진 요 네스뵈 소설과 여권이 든 지갑만 지니고 다녔다. 소설을 챙겨 다니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이 도시에서는 조용히 책을 펼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루미키의 옷은 무사히 남아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녀의 브래지어들이 전부 뜯겨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침입자는 그녀가 얇은 컵 안에 국가 기밀이라도 숨겨놓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는 책의 판본도 작고, 페이지 수도 작은 편이라 가볍고 빠르게 읽히는 시리즈인데, 이번 두 번째와 세 번째 작품은 그 분량이 더 가벼워졌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여자가 나타나 갑자기 자신이 언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상하고,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작위적인 만남이기도 했지만, 평소 자신의 가족이 엄청난 비밀을 숨겨왔다고 의심하던 루미키였기에 젤렌카의 말을 조금씩 믿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가 '가족'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수상한 분위기의 컬트 종교단체였다. 위험천만한 종파나 컬트의 흔적을 집중적으로 조사해온 기자 이르지와 함께 펼쳐지는 루미키의 모험은 무대를 낯선 도시 프라하로 옮겨서도 그치지 않는다. 사실은 자신을 언니라 주장하는 젤렌카에 대해 자신의 부모에게 전화로 직접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껏 그래왔듯이 자신의 지적 능력에 의지해 직접 비밀을 파헤치는 것을 선택한다. 과연 젤렌카는 진짜 루미키의 언니일까? 루미키는 집단자살을 계획하고 있는 수상한 종교단체에서 젤렌카를 무사히 구출할 수 있을까? 프라하에서도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된 루미키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죽는 시간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신께서 정하시면 난 받아들일 뿐이라고."

"반드시 그래야 할 의무는 없어요. 당신 운명은 당신이 결정하는 거라고요."

그리고 전편에서 모두의 궁금증을 자아냈던 그녀의 옛 남자친구에 대한 에피소드가 이번 작품에서 비로소 공개가 되어, 스토리가 한층 풍성해지고 있다. 성질이 불 같고, 늘 흥분한 상태였으며, 변덕스럽고, 따뜻하고, 신랄하며, 잘생긴,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블레이즈는 그녀의 과거 속에서 등장하다,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 이르면 현재의 이야기 속에 드디어 나타나게 된다. 게다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더없이 건조하고, 너무도 시크 하고, 지나치게 독립적인 캐릭터로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려는 소녀의 이미지로만 알고 있었는데, 루미키가 블레이즈와 함께하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또 다른 매력을 만날 수 있어 더욱 흥미진진했다.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며, 아무리 암담한 상황에서도 포기를 떠올려 본 적이 단 한번도 없던 소녀 루미키의 마지막 여정이 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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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시간 형사 베니 시리즈 2
디온 메이어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noir(아르테누아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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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매일 밤, 죽음과 폭력을 끌고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가장의 삶이란 어떤 걸까.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따뜻한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에서 행복한 미소가 아니라 이들도 언젠가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부터 느껴야 한다면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체력을 가지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로 범인들을 검거하는 형사일지라도,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내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니까 말이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여전히 안나를 사랑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가 술을 끊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안나와 별거를 시작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매일 밤, 죽음과 폭력을 끌고 집으로 돌아올 일이 없으니까. 현관문을 들어와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들도 언젠가 뼈가 부러지고 사후경직으로 빳빳이 굳은 모습으로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야기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 열심히 일하고, 초과근무를 하면, 언젠가는 계급도 올라가고, 승진도 하고, 그리고 결국은 정의가 승리할 거라고 믿었던 남자. 그저 그거 하나면 충분했던 그 시절의 그는 이제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경찰에서 26년을 일했지만, 여전히 경위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고, 나쁜 놈들은 점점 늘어나고, 반대로 경찰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상대가 피해자이든 범죄자이든, 타인의 상황에 스스로를 이입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한 경찰이었던 그는 이제 알코올중독자 신세다. 그 뛰어난 능력 덕분에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를 버텨내기 위해 술을 마셔야만 했던 것이다. 희생자들이 누워 있는 현장으로 들어가면 비명 소리가 들리고, 그것은 한 번 들리고 나면 머릿속에 붙박인 것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지쳐갔고, 결국 그의 아내는 6개월 안에 술을 끊지 않으면 이혼이라는 통보를 받고 집에서 쫓겨나기에 이른다. 그리고, 술은 끊은 지 156일째가 되는 날부터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 시작된다.

 

이야기는 배낭 여행 중이던 한 미국 소녀가 의문의 추격자들에게 쫓기면서 문을 연다. 대체 무슨 이유로, 누구에게서 도망치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그녀의 친구가 어젯밤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잡히게 되면 그녀 역시 마찬가지 신세가 될 거라는 것밖에. 그녀는 그렇게 줄기차게 도망을 치고, 무려 380여 페이지가 지나서야 소녀는 우리의 주인공 베니 그리설과 연결이 되며, 그 즈음 추격자들과도 만나게 된다. 신입들의 멘토링을 맡고 있는 베니는 부수무지 은다베니가 맡고 있는 미국인 소녀 살인 사건과 프란스만 데커가 맡고 있는 음반계의 스타 프로듀서 살인 사건을 오가며 범인을 쫓기 시작한다. 전혀 별개의 사건처럼 각각 진행되던 이 두 사건의 교집합은 작품의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나며, 누군가에게 쫓기며 홀로 공포에 떨고 있는 소녀를 구하기 위한 13시간의 사투가 시간대별로 차근차근 교차로 보여진다. 그렇게 새벽 5 36분에 시작했던 이야기는 저녁 7 51분에 이르러서야 마무리가 된다. 무려 550여 페이지 동안 펼쳐지는 스토리는 사실 짧다면 짧은 시간이고, 길다면 꽤 길기도 한 시간이다. 13시간은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시간이고, 누군가는 가정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시간이며, 누군가가 죽을 지도 모르는 시간이기도 하다. 과연 베니 그리설은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아내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과연 그는 두 사건을 해결해서 소녀를 구하고, 범인을 밝혀낼 수 있을까. 과거를 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문득 주버트는 한평생 지켜봐 온 동료이자 친구인 그리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설이 품고 있는 에너지에 비해 그의 활동 반경은 너무나 좁아서, 때로 그 에너지가 진동하며 쓰나미와 같은 열정의 파동을 뿜어낼 때가 있었다. 20년 전 그리설의 얼굴은 장난꾸러기 요정 같았다. 두 볼에는 궁정 광대처럼 장난기가 어렸고, 반짝이는 슬라브족의 눈과 커다란 입속에는 중독성 있는 웃음과 말도 안 되는 재치가 숨어 있다가 기회만 주면 언제든 활짝 기량을 펼쳤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얼굴에서 지난날의 장난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세월에 침식된 가느다랗고 깊은 주름들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작년에 국내에서 처음 만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 디온 메이어는 <오리온> <프로테우스>라는 작품으로 굉장히 인상적인 조우를 선사했었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국가가 가지는 특수성을 잘 활용해서 매우 견고한 스릴러를 탄생시켰다. 사망과 고문, 화학무기와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살인 목록과 비밀 작전에 관련된 문서 등 온갖 기만과 협잡에 관련된 문서들. 인종차별 정책의 근간이던 흑백 분리법과 인구등록법이 폐지되고 나서도 여전한 흑백의 차별. 그렇게 나라를 하나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비밀과 기만을 가지고 개인의 과거가 국가의 과거와 연결되어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개인적으로 <오리온>의 주인공 판 헤이르던이라는 인물에게 푹 빠졌었는데, 그는 전직 형사였지만 현재는 사설탐정으로 일을 하고 있는, 사소한 시비에도 주먹질을 해대며 엉망진창으로 살고 있는 인물이었다. 과거의 그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믿으며 살았었지만, 우연한 사고로 동료가 죽게 되고 그 순간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을 발견하게 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거였다. 그 사건으로부터 3년이 지났고, 사람들은 이제 그를 쓰레기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인칭으로 진행되는 그의 과거와 3인칭으로 전개되는 그의 현재와 교차 진행되는 방식 때문인지, 그가 원래 가지고 있는 면들이 더 도드라지게 부각되어 현재의 그 쓰레기 같은 인물에게 숨겨진 그것에 더욱 몰입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대체 왜 판 헤이르던이 시리즈로 작품이 출간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매력 만점의 캐릭터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드디어, 내가 고대하던 디온 메이어의 '시리즈' 작품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베니 그리설 시리즈는 현재까지 5편이 출간되었고, 그 중 3편은 영화 판권이 계약되어 '형사 베니 시리즈' 3부작 영화가 제작될 예정이다.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은 시리즈 첫 번째인 <악마의 산>과 두 번째인 <13시간>이라는 작품이다. 알콜 중독때문에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고 집에서 쫓겨난 형사라는 설정 자체가 특별할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니 그리설이라는 인물은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그런 캐릭터였다. 구제 불능의 알골 중독에 마흔 네 살에 경위 자리를 못 벗어난 채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평범한 형사, 술김에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고는 집에서 쫓겨나 6개월 안에 술을 끊지 않으면 이혼이라는 통보를 받고 잘 곳이 없어 살해된 피의자의 집에서 잠을 자는, 정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이 남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 수사에 있어서만큼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사건의 플롯을 따라가면서 인물에 저절로 감정 이입이 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랄까. 작년에 만나봤던 디온 메이어의 작품 속 캐릭터들과 완전히 다르면서도 매력 넘치는,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 넘치는 인물이다. 시리즈 다음 작품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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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4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황소연 옮김 / 북로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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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폭주하고, 범인은 갈수록 오리 무중이고, 완벽한 기억 속에 숨겨진 단 하나의 진실은 점점 더 무시무시해진다. 그렇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끈하게 잘 빠진 스릴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독특한 캐릭터에 대한 매력도 엄청나서 다음 시리즈를 기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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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4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황소연 옮김 / 북로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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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코널리의 찰리 파커도 아내와 딸을 연쇄 살인범에게 잃고 경찰을 그만두고 방황하다, 복수를 다짐하고 범인을 찾아 나서게 된다. 더글러스 프레스턴과 링컨 차일드의 펜더개스트도 사랑하는 아내가 살해당했다는 걸 알게 되고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복수를 결심한다. 그리고 데이비드 발다치의 에이머스 데커 역시 살인범에 의해 가족이 처참하게 살해된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각기 다른 캐릭터들이,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의 삶을 구원하게 되는지 비교해보는 재미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데이비드 발다치의 작품이 가장 대중적이고, 호불호가 없는 스타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다. 아무것도 잊지 못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감각 신경의 통로들이 교차했는지 숫자와 색깔이 연결됐고 시간도 그림처럼 눈에 보인다. 색깔들이 불쑥불쑥 생각 속으로 끼어든다. 나 같은 사람들을 '공감각자'라고 부른다. 나는 숫자와 색깔을 연결 지어 생각하고 시간을 '본다'. 사람이나 사물을 색깔로 인식한다.

......나도 한때는 평범했었다. 평범한 부류의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에이머스 데커. 대학 4년 내내 미식축구 선수였던 195센티의 거구. 나이는 마흔두 살인데 외모는 쉰두 살처럼 보이는 남자. 한때 유능한 형사였지만, 현재는 20키로그람 이상이 늘어 뚱뚱해졌고, 지저분하고 산발한 머리에 덥수룩한 턱수염에 원시인 같은 몰골을 하고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다. 그의 거처는 모텔 방에서 노숙자 보호소를 거쳐 공원의 침낭과 공원 주차장의 박스로 대체되었고, 그나마 현재는 사설 탐정으로 잡다한 일을 해가며 여관 방에 머물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의 삶은 밑바닥으로 추락한 상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도, 하고 싶은 일도, 인생의 목표도 전혀 없었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5개월 전, 그가 경찰로 일하고 있던 당시 오랜 잠복근무를 끝내고 집에 돌아갔을 때 그가 발견한 것은 처참하게 살해된 어린 딸과 아내, 그리고 처남의 시체였다.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범인은 현재까지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지못해 살고 있던 그의 삶이 달라지는 순간이 온다. 범인이 스스로 경찰서에 걸어 들어와 자백을 한 것이다. 데커가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을 죽였다고. 그런데 문제는 그 범인이라는 남자가 데커의 기억에 전혀 없는 인물이라는 거였다. 왜냐하면 그는 과잉기억증후군, 즉 모든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잉기억증후군이란 뭘까.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어떤 기억을 찾으려고 할 때 머릿속의 영상 저장 장치를 켜면, 눈 앞에서 그 형상들이 보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다. 마치 녹화된 비디오 카메라를 돌려 보기라도 하듯이. 그런 능력은 아무것도 잊지 못하도록 만든다. 거기에 더해 데커는 그것에 숫자와 색깔이 연결됐고, 시간도 그림처럼 눈에 보이는 공감각 능력도 가지고 있다. 색깔들이 불쑬 불쑥 생각 속으로 끼어들고 사람이나 사물을 색깔로 인식한다. 한때는 그도 평범한 인간이었다. 대학 때 미식축구 경기 중에 사고를 당했고, 잠깐 동안 죽었다 살아난 댓가로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렇게 완벽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왜 하필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그가 간과하고 있었던 과거의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데커는 그렇게 가족을 죽인 살해범의 뒤를 쫓기 시작하고, 마침 벌어진 고등학교의 총기 난사 사건에 연루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친다. 이야기는 폭주하고, 범인은 갈수록 오리 무중이고, 완벽한 기억 속에 숨겨진 단 하나의 진실은 점점 더 무시무시해진다. 그렇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끈하게 잘 빠진 스릴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독특한 캐릭터에 대한 매력도 엄청나서 다음 시리즈를 기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작품이었다.

"그놈 진짜 당신이랑 두뇌 싸움을 하고 있는 거네요."

"그런 것 같아요."

그녀는 몸을 펴고 하품을 했다. "이제 어쩌죠?"

"눈 좀 붙입시다. 그리고 생각 좀 해보죠. 뭐라도 떠오를지 모르니까."

"정말 그럴까요?"

"아니, 아마 아닐 거예요."

그에게 기억이란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건 이미 거기 있거나, 아니면 없는 것이다.

 

주인공 데커에게 있는 과잉기억증후군과 공감각 능력은 기존에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한 적이 있다. 과잉기억증후군, 즉 과거부터 현재까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기억하게 된다는 건데, 한번 본 것이 마치 사진 찍듯 머릿속에 저장된다면 대체 기분이 어떨까. 장용민의 <궁극의 아이>에 등장하는 앨리스는 일곱 살 이후 벌어진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했다. 그리고 실제로 전 세계에 수십 명이 이 증후군을 앓고 있기도 하다. 서프라이즈라는 티비 프로그램에 실제 과잉기억증후군을 가진 이들이 등장한 적도 있고 말이다. 몇 십년 전의 의미 없는 사건도 사진처럼 생생히 저장되어 산다는 것이 마냥 장점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의 좋았던 순간 외에 슬프거나 기분 나빴던 순간들도 망각의 행운을 부여받지 못하는 거니 말이다. 공감각 능력은 최근 티보어 로데의 <모나리자 바이러스>에 등장하는 신경미학자 헬렌이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단어 하나하나마다 색이 나타나고, 색을 보면 소리가 들리는 거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이렇게 특별한 능력으로 인물에게 남다른 개성을 부여한 데이비드 발다치의 솜씨가 워낙 뛰어나서 데커에게 푹 빠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출간되는 족족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고, 80개국 45개 언어로 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1 1천만 부가 팔린 작가. 출간 수익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범죄 소설 작가'인 데이비드 발다치의 작품 목록을 정리해봤더니, 각기 다른 시리즈만 무려 여섯 가지이고, 스탠드 얼론으로 출간된 책도 꽤 된다. 아래는 그 중에 국내에 출판된 책 기준으로만 정리했다.

데이비드 발다치의 작품은 국내에 드문 드문 출간되다, 한동안 만나볼 수 없었는데, 이렇게 가장 최신 작품을 만나볼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 게다가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는 작년 출간된 이 작품에 이어 올해 그 두 번째 작품까지 출간된 상태이니, 북로드를 통해서 조만간 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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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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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남편이 교통 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 간다. 내리막길 커브가 연속으로 있는 도로를 상당한 속도로 들이박은 것 같다는 사고 경위를 전해 듣는 여자는 남편이 대체 어디서 돌아오는 길이었을지 의아하다. 머리를 다쳐서 의식을 되찾을 가능성은 낮다고 하니, 아마도 남편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하나 의심이 되는 것은 그 방향이었다면 남편의 옛날 애인이 사는 곳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옛날 애인은 바로 여자의 엄마였다.

"가집을 내라고 한 것도 그 사람이에요. 한번 제대로 자기가 쓴 글과 동반자살을 해보라며."

"동반자살이라니, 그것도 넘치게 문학적이네."

...........세쓰코는 남편이 사용한 동반자살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했다. 이대로 계속 같은 노선으로 단가를 쓰면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세쓰코 자신이 아프리만치 잘 알고 있었다. 어느새 돌아보니 세쓰코보다 기이치로 쪽이 더 열심히 단가를 선별하고 있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보다 한번 무덤에 묻는 편이 서로를 위한 거야. 당신은 앞으로도 살아갈 테고."

엄마의 애인과 결혼한 여자, 게다가 그녀는 남편이 의식 불명으로 병원에 실려 있는 동안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다. 라고 하면 무슨 막장 드라마냐 하겠지만, 이상하게도 이 작품을 읽는 동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천천히, 느리게 흘러가는 이야기 탓도 있겠지만, 생각을 알 수 없는 여자의 담담한 일상과 그녀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사연들이 전혀 선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플롯만 보면 막장이지만, 이야기는 매우 신중하고, 진지하기 그지 없으니 말이다.

러브 호텔을 배경으로 젊은 나이에 연배가 있는 남자의 세 번째 아내가 되면서도 결코 그를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단언하는 여주인공이라니 정말 이상하기 그지 없다. 돈과 여유를 줄 테니 마음대로 살아보라는 청혼을 받아 들었을 때, 극중 세쓰코 처럼 반응할 수 있는 여자가 얼마나 될까. 게다가 그 남자는 오랜 세월 엄마의 애인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사랑이니 뭐니 운운하지 않는 만큼 담담한 결혼 생활이 평범하게 이어지다, 어느 날 이유를 알 수 없는 남편의 교통 사고 이후 그녀의 삶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애초에 돈으로 유혹 받아 돈으로 맺어진 부부의 관계, 게다가 그녀는 그를 '아빠'라고 부른다. 그런 남편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녀는 마음이 아프다는 감정 조차 누릴 수가 없다.

마음이 아프다는 건 대체 어떤 것일까.

살면서 좀처럼 '감정'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여자. 세쓰코는 단가를 쓰면서 자신의 내면을 글로만 투영해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성애와 허무를 기둥으로 하는 그녀의 작품이 매우 도발적이고 적나라한데 비해, 그녀의 평소 말투와 행동은 정반대였으니 말이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소리 높여 말하는 것이, 가정 폭력에 시달려온 어린 소녀라는 사실은 의미 심장하다. 그녀 역시 어린 시절 엄마에게 학대를 받았던 과거가 있었으니 말이다.

미치코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품위 있게 웃었다. 마유미도 역시 엄마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세쓰코는 미치코의 천진난만함보다 한마디도 하지 않는 소녀가 보이는 엄마와 똑같은 미소에 무서움을 느꼈다.

세쓰코는 자신도 어린 시절 리쓰코와 꼭 닮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딸은 엄마를 닮으며 자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같은 생물을 낳은 여자가 얼마쯤은 후회하게 하기 위해.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은 <굽이치는 달> <호텔 로열>에 이어서 세 번째로 만난다. 어린 시절 실제로 러브호텔을 하던 부모의 딸이었던 사쿠라기 시노는 열다섯 소녀였던 시절부터 학교에서 돌아와 호텔에서 청소를 했었다. 더러운 시트를 갈고, 욕실 청소를 하고, 손님들이 사용한 콘돔을 버리고 새것을 구비해놓는 등 부모의 일을 도우며 그녀는 러브호텔을 드나드는 다양한 인간을 마주해왔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절실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우울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극단적으로 불행한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이어지지만, 이상하게도 마냥 어둡지만은 안다는 것 또한 그녀의 작품 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부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삶에서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포착해내는 것 같다고 할까.

사쿠라기 시노를 '신 관능파 성애문학의 대표 작가라고 하는데, 확실히 이 작품은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처럼 읽힌다. 치정이 얽혀있고, 막장스럽고, 러브 호텔이 배경이라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치열한 애증과 욕망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아주 밑바닥까지 내려간 원초적인 욕망을 마주하고 나면 오히려 그것이 순수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가식과 허례허식에 둘러 쌓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제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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