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스맨
루크 라인하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머릿속에서 온갖 가능성이 폭발했다.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던 권태는 이제 불필요해진 것 같았다.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하며 점점 넓어지기만 하는 새로운 루비콘 강을 철벅철벅 금욕적으로 건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지금의 삶이 죽은 것처럼 지루한들 무슨 문제겠는가? 새로운 삶이 또 있는데, 만세!

정신과의사 루크 라인하트는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와 자신의 심리 치료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감정들이 쌓여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솟았고 눈 앞에 보이는 주사위를 보며 생각한다. 만약 저 주사위 윗면이 1이라면 아래층으로 내려가 동료의 부인을 강간하자고. 주사위는 던져진다. 1이었다. 처음엔 주사위의 결정에 충격을 받아 잠시 꼼짝도 못했지만, 이내 침실에 있는 아내에게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선언하고 아래 층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동료의 아내에게 말한다. "당신을 강간하려고 내려왔어요." 대체, 이 남자 제정신인 걸까? 주사위 눈이 1이 나올 확률은 겨우 6분의 1에 불과했다. 게다가 주사위가 그 순간 자신의 눈에 띌 확률은 아마도 100만분의 1쯤 될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강간을 저지른 것은 운명의 지시임이 분명했고, 고로 자신은 무죄라고 생각하는 남자라니.

 

치어리더 출신 아내와 귀여운 두 아이를 가진 가장이자 정신과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멀쩡한 남자의 삶이 주사위로 인해 조금씩 달라진다. 처음에는 주사위가 그의 삶에 그리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저 정상적인 자신이 그다지 내켜 하지 않는 대안들을 선택할 때 주사위를 이용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주사위가 그의 환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을 때부터 상황은 조금 더 걷잡을 수 없이 변화되기 시작한다. 그 동안 정신과의사로서 그는 이해심 깊고, 너그럽고,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과 잔인성과 헛소리를 받아주는 성자처럼 굴어왔다. 그런데 주사위를 핑계로 환자들의 초라한 약점이 눈에 띌 때마다 노골적으로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더니, 그 동안 억눌려온 충동을 발산하며 새로운 세계가 열린 듯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는 주사위를 한 번 던질 때마다 자신이 새로 태어나는 것 같다고 느낀다.

 

"이 위대한 망할 놈의 기계 사회는 우리를 모두 햄스터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세계를 보지 못해요. 오로지 한 가지 역할만 할 수 있는 배우라니, 그런 헛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무작위 인간, 주사위족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주사위족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주사위족이 생겨날 겁니다."

루크는 수동적인 태도와 자신만의 공상에 빠져 있는 환자에게 당신은 강간이나 절도나 살인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리고는 진료실 밖에 새로온 접수원이 예쁘지 않냐고. 그 여자를 강간하라고 시킨다. 사실 그 직원은 중년의 콜걸로 루크가 그 환자와 데이트를 시키기 위해 일부러 고용한 사람이었다. 그런 식으로 벌어지는 이해하기 힘든 진료와 그가 여러 사람들과 벌이는 성에 대한 실험들, 스스로를 주사위맨이라 칭하면서 마치 주사위 인생을 종교라도 되는 식으로 환자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믿도록 만드는 이 작품의 스토리를 이해하거나 공감하기는 다소 어렵다. 게다가 개인의 작은 일탈로 시작했던 루크의 '주사위'가 후반부로 갈수록 각지에 주사위 센터가 설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사위족이 되어 가는 식으로 일종의 종교처럼 퍼져나가는 단계에 이르면,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잣대에 대한 기준마저 모호해지게 된다. 과연 이들이 벌이는, 사회적 통념상 허락되지 못할 행위나 비도적적이고 무질서한 행동들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이해해야 할 지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작품이 바로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사소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어떤 선택은 우리 삶의 방향을 완전히 달라지게 만들기도 하니, 일상의 그 수많은 선택들이 쌓여 나라는 한 인간을 만든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더라도 이 작품은 '컬트 소설'임이 분명하다. 바로 그 선택이라는 것의 주체를 인간이 아닌 주사위를 통한 무작위성의 우연에 기대도록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주사위 눈 개수에 맞춰 여섯 가지 선택지를 쓰는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지만, 최종 결정을 해주는 것은 주사위를 통한 랜덤의 우연이고, 그 결과를 행동으로 옮겨 그것을 운명으로 만드는 것은 또 자신의 의지이다. 모든 괴로운 일을 주사위의 손에 맡겨서 주사위가 강간을 지시하면 강간하고, 금욕을 지시하면 금욕하고, 낯선 나라로 날아가라고 하면 그곳으로 간다. 과연 이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

 

이런 작품이 세계 60개국에 번역되어 200만 부 이상 판매되고, 출간 4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20세기 최고의 컬트소설로 추앙 받는 이 현상이야말로 사람들이 주사위족이 되어 간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상하지만 색다르고, 단순하지만 도발적이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강렬한 작품이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권태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당신에게 이 작품을 추천한다. 극중 루크 처럼 당신의 삶도 송두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할 수도 있다. 금기를 깨트리는 것이 처음에야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 더 머니
존 피어슨 지음, 김예진 옮김 / 시공사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거대한 유산에 매혹되었다가 프랑스 제2제정의 벼락부자 가족이 어떻게 몰락했는지를 본 발자크는 "모든 막대한 재산 뒤에는 거대한 범죄가 있다"고 썼고, 스스로도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게티 가문에 벌어진 일을 보면 발자크도 당황할 것이다. 게티 가문 정도의 재산을 쌓으려면 더러운 짓이나 표리부동한 행위를 저질렀을 법도 한데 실질적으로 지적할 만한 범죄가 일어난 적은 없으니 말이다. 물론 '거대한' 범죄가 없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로 기네스북에 오른 석유재벌 진 폴 게티. 그는 자선은 물론이고 친자식들에게 돈 주는 것도 탐탁지 않았던 구두쇠였다. 덕분에 그의 아들들은 재벌 3세라면 흔히 예상하는 그런 사치스러운 생활이나 응석받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 아들은 게티가 죽기 3년 전에 자살했으며, 다른 아들은 알코올과 헤로인 중독으로 거의 비슷한 짓을 할 뻔했고, 세 번째 아들은 어린 시절부터 상속자 목록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게티의 큰손자는 이탈리아 마피아에게 납치되었고, 그 여동생은 에이즈로 고통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게티 가문의 재산에 관해 밝혀지지 않은 가장 큰 수수께끼는 어째서 그것 때문에 수혜자들이 그토록 고통을 받았는가에 있었다. 돈이 없어서 죽어간 목숨이 수백만인데, 그렇게나 거대한 부의 꼭대기에서 엄청난 돈을 가졌던 게티의 아들딸들은 그토록 큰 고통과 피해를 받아야 했을까.

"내게 손자가 열넷이나 있는데 지금 몸값에 1페니라도 냈다가는 열 네 명 모두 납치당하지 않겠소?"

 

폴 게티를 납치한 이들은 아이를 돌려받고 싶으면 자신들이 요구하는 돈을 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만한 돈이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아들의 몸값을 위해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지만 진 폴 게티의 반응은 정상적인 사람의 그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물론 그의 말처럼 그가 몸값을 지불하게 되면 다른 누군가가 또 다른 손자를 납치할 명분을 제공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맏손자가 현재 범죄자들의 손아귀에 있고 그들에게 생명을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폴의 할아버지는 그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충분히 되고도 남을 만큼의 부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자가 그냥 잡혀 있게 내버려둔다는 게 정상적인 사고 방식일까? 납치범들 또한 그가 몸값을 거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자기 혈육이 곤경에 처해 있는데 그냥 내버려둘 수가 있냐고. 미국 최고의 부자라면서 자기 손자를 구하기 위해 겨우 그만큼의 돈도 못 낸다니 말이 되냐고 말이다.

 

대부분의 가족들은 역경에 처했을 경우 서로를 도우며 더욱 끈끈하고 가까워지기 마련이나 게티 가문은 그렇지 않았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재산과 이탈리아에 연줄이 있었기 때문에 늙은 게티는 사실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손자를 얼마든지 빠른 시일 내에 구출할 수 있었다. 게일은 "빅 폴이 가장 중요한 사업을 다루듯 납치 문제를 해결했더라면 우리 폴은 아마 24시간 내에 풀려났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 책은 1995 <고통스러운 부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이번에 동명 영화 개봉에 맞춰 <올 더 머니: 세상의 모든 돈>으로 이름을 바꿔 재출간된 논픽션이다. J. 폴 게티 스스로왕조라고 불렀던 게티 가문의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는 모든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작가는 그의 천문학적인 부가 구축된 과정과 그것이 다음 세대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그들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를 추적한다. ‘007 시리즈의 작가 이언 플레밍의 생애를 다룬 책으로 유명한 저자 존 피어슨은 J. 폴 게티가 어머어마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과정과 수혜자들이 어째서 그토록 고통을 받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양한 일화들을 소개한다. 세계 제일의 갑부가 그 거대한 부에 잠식되게 된 스토리는 마치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게티 가문 사람들과 J. 폴 게티에게 고용된 전문가들, 그의 다섯 명의 부인과 수많은 연인들을 비롯해서 실제 인물들의 다양한 시각을 충실히 소개하고 있어 실화로서의 역할을 잊지 않고 있지만, 사실 그 내용이란 것이 평범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전혀 들어보거나 겪지 못할 것들이라 허구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정도이긴 하다.

동명의 영화는 리들리 스콧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J. 폴 게티의 손자 폴 게티 3세의 천문학적인 몸값이 오간 납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이 스토리는 대니 보일 감독이 10부작 TV 드라마로 촬영 중이기도 하다. 거장 리들리 스콧과 대니 보일을 모두 매료시킨 만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벌가 유괴사건을 다루고 있는 크라임 논픽션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한 남자가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인간이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어마어마한 부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부와 행복이 조화된 삶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극중 폴 게티 3세의 말처럼 '부자들은 사실 지구의 진정한 가난뱅이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영혼이 영샹실조에 걸려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니 말이다. 물론 전부 그렇지는 않겠지만, 아마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색기계 - 신이 검을 하사한 자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살인."

구마고로의 표정이 흐려지자 요하야는 말했다.

"참으로 구제할 길 없는 놈을 죽이는 거야. 아는 사이라면 마음이 편치 않겠지만, 그쪽은 법도를 어기고 사람을 죽인 악당이다. 우리가 신을 대신해 벌을 내리는 셈이지."

"신벌인가요?"

"그래. 사람들이 모를 뿐, 인생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부 신의 조화야."

이 작품은 독특하고 환상적인 세계를 그려내는 걸로 유명한 작가 쓰네카와 고타로의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이다. 에도시대는 미야베 미유키의 시대물들을 통해서 처음 만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덕분에 에도시대가 사람들의 소소한 드라마를 펼치기에도 훌륭하고, 신과 요괴가 등장하기에도 그럴듯하게 어울린다는 걸 알고 있다. 쓰네카와 고타로는 이 작품에 대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부자연스럽지 않을 근세의 산촌을 무대로 설정하고, 훗날 옛날 이야기의 원천이 될 법한 소재가 사방에 널려 있는 그곳에서 부조리한 운명에 항거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려냈다고' 말했다. 정말 인권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라 너무 쉽게 사람들을 죽이는 풍경이 펼쳐지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신처럼 생각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무런 위화감 없이 이야기 속에 녹아 들어 독자들의 정신을 쏙 빼놓고 있다.

일곱 살 소년 고헤는 어느 날 아버지의 몸 여기저기에서 불꽃이 탁탁 튀고, 몸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피어 오르는 것을 발견한다. 불꽃과 연기는 고헤에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강에 가자고 해놓고는 동네 강가가 아니라 인기척이 없는 지류로 향하고 있었다. 얼마 전 집에 온 아버지의 새 여자가 자신을 못마땅하듯 쳐다보던 것도, 축하할 일도 없는데 어제 저녁 진수성찬을 먹었던 것도 떠올랐다. 직감이 번갯불처럼 번쩍였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자신이 곧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아버지에게서 도망친 고헤는 두 번 다시 집에 돌아가지 않고 산적 패거리에 거두어져, 구마고로라는 이름으로 살게 된다. 그의 심안은 상대의 살의를 읽어내는 능력으로 동료들과 그를 아는 이들 사이에서는 전설로 회자되었고, 그는 이 특별한 능력으로 거대한 유곽의 주인으로 살고 있다.

 

 

계절이란 재미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해가 점점 힘을 잃고 산이 천천히 입을 다뭅니다. 나뭇잎이 울긋불긋 물들었다가 한꺼번에 떨어집니다. 겨울은 마치 죽음에 다가가는 듯한 느낌입니다. 마침내 얼어붙은 듯한 정적이 찾아옵니다.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가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그러면 눈과 얼음이 녹고 새싹이 돋습니다.

그 후에 피어나는 신록은 어찌나 눈부신지.

아홉 살 소녀 하루카는 집 밖에서 옆구리에 화살이 박혀 죽어가는 사슴을 발견한다. 딱한 마음에 연민의 정이 솟아 달래듯이 사슴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하루카의 손바닥으로 특별한 감각이 전해졌고, 계속 쓰다듬자 사슴의 눈빛이 편안해지더니 얌전하게 눈을 감았다. 고양이를 기르다 품에 안고 노는 사이에 고양이가 죽게 되는 일도 생겼다. 하루카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그녀의 특별한 재주를 남에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이른다. 그런데 어느 날 진료를 갔다 심한 통증 때문에 힘들어하는 노파가 더 이상 손쓸 방도가 없어 편안히 죽을 길을 찾고 있다며, 하루카의 재주를 사용하도록 한다. 하루카가 가슴에 손을 얹기만 해도 아픔이 싹 가시고, 기분이 편안해져 마치 잠에 빠지듯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소녀에겐 죽음의 손이었지만, 고통으로 죽어가는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구원의 손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고, 어느 날 자신을 해하려던 무사를 얼떨결에 죽이고 만다. 자신의 능력과 존재에 대한 회의감에 하루카는 집을 떠나고, 산속에서 '금색님'이라 불리는 신과 같은 존재를 찾아가게 된다.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에는 손을 대는 것만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녀, 타인의 살의를 알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년, 백성들 사이에서 마치 설화처럼 알려져 있는 산속 궁궐에 사는 도깨비들까지 독특하고도 신비로운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특별한 '금색' 존재가 예사롭지 않다. 대체 시대물에 이런 존재가 등장해도 되는 것인가 싶을 만큼 독특하다. 온몸이 금색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것을 보면 불상 같기도 하지만, 자세히보면 투구와 갑옷, 즉 갑주였다. 눈 부분에 녹색의 유리 같은 것이 박혀 있었고, 위잉,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하며, 무엇보다 인간의 말을 하고 다리를 움직이며, 힘도 세고, 무술 실력도 뛰어나다. 어떻게 보더라도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보다는 '로봇'에 가까운 존재가 에도시대에 등장한다니... 쓰네카와 고타로의 기발한 발상은 놀랍기도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 속에서 풀어나가고 배치하는 그 능력에 더 감탄하게 만들었다. 어릴 적 듣던 옛날 이야기나 동화 속 이야기처럼 신비로우면서도, 너무도 공감 가고 이해되는 인간적인 이야기는 현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특히나 시간대를 현재와 과거, 더 오래 전의 과거에서 현재와 가까운 과거로 종횡무진 옮겨가면서 여러 인물들이 엮이고 섞이도록 만들고 있어 읽으면 읽을수록 더 시선을 뗄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도중에 쉽게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몰입감이 뛰어난 페이지터너이기도 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뭔가 아련하고 감상적인 기분이 들어 책을 덮을 수 없도록 여운을 남겨주기도 한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이 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정말로 옛날이야기가 된다." 라고. 이 문장만큼 이 특별한 작품을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싶다. 이 작품은 제대로 된 이야기의 힘을 보여준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 지루할 틈 없이 몰입할 수 있으며, 뭉클한 뭔가도 남겨주는 엄청난 작품이다. ,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향연 속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완벽하게 새로운 세계, 세상에서 벗어나 옛날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던 세계가 당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리가 자연스러워지는 쿠킹 클래스 - 요리에 서툰 사람들과 함께한 '진짜 요리' 이야기
캐슬린 플린 지음, 최경남 옮김 / 현암사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그 누가 당신이 요리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가? 모든 음식을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것이 유기농이거나 현지 생산된 것이거나 목초에서 기른 것일 필요도 없다. 튜나 헬퍼와 <톱 셰프> 사이 어디쯤 자신에게 편안한 지점을 찾아보자. 태웠거나 눌어붙었거나 떨어뜨리거나 너무 익었거나 덜 익었거나 양념을 덜했거나 이도 저도 아닌데 그냥 실패한 음식을 만들었다 해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한 끼일 뿐이다. 내일이면 또 한 끼를 만들게 될 것이다. 100년쯤 지나면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가 될 뻔했던 어느 날, 캐슬린 플린은 마트에 갔다가 어떤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다. 세워진 카트 안에 스무 개 남짓한 인스턴트 파스타와 즉석 식품, 소스 병들이 반쯤 담겨 있었는데, 정작 '진짜' 음식은 하나도 없었던 거다. 카트의 주인은 30대 후반의 여성과 그녀의 10대 초반의 딸이었다. 캐슬린 플린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 모녀의 이후 쇼핑을 미행했고, 그녀가 와플 박스와 피자맛 프레츨, 냉동식품, 닭고기 포트파이 등을 잔뜩 카트에 채워 넣는 것을 보게 된다. 캐슬린은 무슨 까닭인지 일면식도 없는 낯선 그녀에게 뭔가 정보를 주고 싶다는 충동이 생겨,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쉽고, 건강하고 게다가 비용도 절약할 수 있는 팁을 알려주려 하지만, 도와줘서 고맙지만 자신은 어떻게 요리하는지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리고 그 우연한 만남은 캐슬린의 인생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된다.

캐슬린 플린은 파리의 유명 요리 전문학교 르 코르동 블뢰를 졸업하고 요리 저술가로 활동하며 몇 번의 작은 쿠킹 클래스를 진행했었다. 그녀는 마트에서 만난 모녀를 계기로 '사람들이 더 자주 요리할 수 있는 동기가 뭔지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사람들이 평상시에 요리하는 음식을 만들어보게 해서 어떻게 하는지를 본 다음, 부족해 보이는 기술을 중심으로 쿠킹클래스를 열고, 나중에 다시 찾아가서 그들이 이후에 어떻게 변화했는지도 살펴보겠다고 말이다. 그녀가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고 지원자들 중에 열 명의 참가자가 정해진다. 대부분 가공식품이나 패스트푸드를 규칙적으로 소비하며, 스스로를 '요리 젬병'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이 책은 저자와 그녀의 셰프 친구들, 그리고 10명의 요리 초보자들이 클래스에 참가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소설처럼, 에세이처럼 그려내고 있다. 요리와 쿠킹클래스가 주요 소재인데, 레시피 북이 아니라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어 색다르고, 그만큼 더 흥미진진했다.

 

 

나는 그녀에게 수업을 통해 가장 크게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자신감이요.” 그녀는 재빨리 대답했다. “어떤 요리법이든 보면 이제는 만들 수 있겠다는 걸 알아요.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녀는 조리대에 있는 셰프 나이프를 집어 들고 숭배하듯 다루었다. “칼질하는 법을 배운 게 모든 것을 바꾸었어요. 제가 요리에 겁을 먹었던 이유 중 하나가 칼질할 거리가 많은 것이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게 별 대단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요. 사실 칼질하는 순간이 좋기도 해요.”

스물 셋의 사랑스러운 여성 새브라는 맥도날드를 아주 좋아하는 패스트푸드와 청량음료 중독이었다. 컵라면, 감자튀김, 팝콘, 레드불을 온종일 달고 살았기에, 저녁을 만드는 데 20분 이상의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 했다. 예순한 살의 심리학자 트리시는 냉장고에 기본적인 재료는 갖추고 있었고, 요리를 할 수는 있었지만 결과에 별로 만족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새로운 요리를 자주 시도해도 결과는 늘 실망스러웠고, 하기도 전에 모든 걸 잘못할 게 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 아이를 가진 서른두 살의 전업주부 새넌은 요리를 하고자 하는 욕구와 동기, 시간은 있었지만 핵심 역량이 부족했다. 엄마에게도, 학교에서도 어떤 요리 기술도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구조조정으로 생활이 어려워져 음식을 살 돈이 제한되다 보니 마음대로 필요한 음식을 요리하지 못하는 경우, 습관처럼 음식을 대량 구매하고는 처리하지 못해 냉장고에서 시들고 상하게 놔두는 경우, 결혼 후 체중이 급격히 늘어나 다이어트 비법을 찾기 위해 몇 년간 온갖 노력을 하고 있는 경우 등등... 참가자들의 다양한 사연은 우리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캐슬린의 쿠킹클래스에서는 요리에 관심은 있지만 기초적인 도구와 기술이 부족한 참가자들을 위해칼질 쉽게 하는 법’ ‘남은 재료 활용하는 법’ ‘고기 해체하기’ ‘식재료비를 아끼는 장보기등 도구와 재료를 손질하고 현명하게 활용하는 법과 간단하게 써먹을 수 있는 요리 비법들을 알려준다. 무엇보다 '식습관을 바꾸고 요리와 친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는 패스트푸드 중독, 고당도 · 고지방 · 고염 식습관에 길들여지고, 사먹는 음식에 너무 익숙해진 현대인들의 식습관부터 걱정했다. 그래서 이 쿠킹클래스는 단순히 요리 레시피를 배우는 것을 넘어서 '제대로 먹기 위한' 요리를 가르친다는 점에 있어서 특별했다. 쿠킹 클래스가 모두 끝나고 참가자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들의 요리와 식습관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고, 무엇보다 요리를 하고 싶지만 방법을 몰랐던 요리 초보들에게 맛있고 건강한 요리의 비밀을 알려주고 있어 참 좋았다. 혼자 먹더라도 근사한 자신을 위한 요리, 혹은 가족에게 균형 잡힌 영양을 공급하는 요리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편의 그것이 들어가지 않아
고다마 지음, 신현주 옮김 / 책세상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옛날부터 내 차례가 되면 이상하게 기계가 망가지거나 내가 산 것만 불량품이거나, 그렇게 운이 나빠서 타이밍이 안 좋아서 손해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쩐지 '머피의 법칙'은 나한테만 집중되었다. 그래서 이번 일도 내 탓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산뜻하고 예쁜 표지에 들어간 제목의 어감이 참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띠지에 대문짝만하게 들어가 있는 문구라니.. 이건 뭔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면 첫 장부터 작가의 느닷없는 고백이 이어진다. '느닷없는 이야기지만 남편의 성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진지하게 하는 말이다. 교제기간까지 20, '성기가 들어가지 않는' 문제는 우리를 서서히 병들게 했다'라고. 그래서 '성기가 들어가지 않는 우리는 남매처럼, 혹은 식물처럼 조용히 살아가는 삶을 택했다'는 그녀의 선언은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궁금하게 만들어 주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부부 사이에 불화가 생겨 관계없이 살아가는 경우란 사실 흔하게 다루어지곤 하는 소재였지만, 애초에 관계를 할 수 없는 그 방식이란 것이 이렇게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시골에 살았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숫기 없는 소녀였다. 빠듯한 가정 형편에 그녀 아래로 고등학생과 초등학생 여동생까지 있었기에, 대학에 떨어지면 바로 취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대학 합격을 계기로 그녀는 시골을 탈출할 수 있었고, 학교 근처에 구한 자취집에서 같은 학교 남자 선배와 만나게 된다. 산후우울증과 독박육아로 고통 받던 엄마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고, 친구들과도 충분히 교류하지 못한 성격이었던 그녀였기에 갑작스레 다가온 남자 친구라는 존재가 굉장히 크게 느껴진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항상 사람을 깊게 사귀는 것을 피해왔던 그녀였기에 사랑을 하게 되면서 일상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그런데 당당하고 자유분방한 성향의 그와 처음으로 관계를 갖게 되었을 때,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문제가 생기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도, 믿기 힘들만큼 이상한 문제로 그들에게만은 가능하지 않은 행위가 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누구에게도 이 고민을 말하지 못한 채, 이후 수십 년의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

고등학교 탈의실에서 여학생들의 경험담이 들려올 때마다 머리부터 뒤집어쓴 파도의 파편이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는 듯했다. 이상한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닐까. 들어가지 않아, 들어가지 않아, 하며 한탄하지만 들어가면 들어가는 대로 괴롭지 않을까. 몸도 마음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멍하니 어둠을 응시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그렇게 그들은 육체적인 결합이 되지 않는 관계임에도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결혼까지 하게 된다. 더 이상한 건 두 사람 모두 다른 상대와는 문제없이 그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왜 아무 상관없는 타인과는 문제없이 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당연히 가능해야 할 상대와는 왜 되지 않는 것일까. 분명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뭔가 의학적으로 진단을 받아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만약 소설이었다면 설정부터 애초에 너무 말이 안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만큼. 그런데,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자전적 에세이이다. 그 어떤 소설적 허구나 해석, 미화된 부분이 없는 저자의 솔직한 감정과 살아온 이야기인 것이다. 그 사실이 파격적인 제목보다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남편과 나란히 교사가 되어 그녀가 겪게 되는 이후의 일들은 더 할말을 잃게 만든다. 대체 삶이란 것이 한 인간에게 어디까지 고난을 겪게 할 것인가.에 대한 그 결정판이라고나 할까. 교실붕괴로 인한 스트레스, 자살을 생각하게 될 정도의 심리 상태, 인터넷 사이트를 통한 의미 없는 즉석 만남... 세상의 모든 안 좋은 일이란 모두 그녀에게 찾아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안타까웠다.

물론 누구나 타인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저마다의 외로움과 상처와 숨기고 싶은 아픔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 속 그녀처럼 자신의 오랜 상처와 비밀을 거침없이 드러내서 이야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평범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름 거듭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내린 선택이니 틀렸다고 가볍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그녀의 목소리는 당당하게 보였다. 시종일관 자책을 하고, 타인의 눈치를 보고, 상처 받아도 아닌 척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던 수동적인 모습들이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이 작품이 책으로 출간될 당시에도 그녀가 글을 쓴다는 사실을 남편이나 부모님은 몰랐다고 한다. 자신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이 책을 가족에게 내밀려고 한다는 그녀의 진심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그녀에 비하면 너무도 평범하고 순탄한 삶을 살아온 내가 이해하기엔 다소 어려운 삶의 방식들이었지만, 어느 샌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삶을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