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하이든
사샤 아랑고 지음, 김진아 옮김 / 북폴리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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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는 언제나 매혹적이다. 게다가 비밀과 거짓말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는 소설가라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한술 더 떠 작가도 아니면서 작가라고 뻥치고 남의 인생을 훔쳐서 살고 있는 소설가가 등장한다. 그러니 재미가 없을 래야 없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원칙적으로 서평을 읽지 않는 마르타와 달리 헨리는 모든 평을 한 자 한 자 다 읽었다. 특히 마음에 드는 칭찬에는 자를 대고 줄을 그었고 기사를 오려서 스크랩북도 만들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요새와 같다.' 헨리는 이 평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책 표지 접히는 곳에 굵은 글씨로 인쇄돼 있었는데 큰 신문사에서 문학 카럼을 쓰는 페펜코퍼라는 사람이 쓴 것이었다. 헨리는 '그렇지!' 단순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문장. 내가 써도 이렇게 썼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건 그에게서 나온 문장이 아니었고, 그 무엇도 그에게서 나온 것은 없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성공한 소설가 헨리는 자신의 작품 중 단 한 문장도 쓰지 않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사실 그의 모든 소설은 그의 아내가 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걸 아는 사람은 그 자신과 아내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아내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지극정성을 쏟아 부어도 모자랄 텐데, 이 남자 자신의 담당 편집자인 베티와 바람을 피우는 중이다. 거기다 베티는 임신까지 한 상태이다. 그 소식을 듣고 나서야 아내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 시작해 애인과 헤어지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세워져 있던 베티의 차를 보고는 충동적으로 차를 들이받아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 얼마 후 베티가 나타난다. 부인이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자신 대신 약속 장소에 나갔다는 것이다. 애인 대신 아내를 죽이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헨리의 삶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집필 중이던 원고는 마무리가 되지 않아 출판사에 넘길 수가 없고, 자신이 아내를 죽인 사실을 숨겨야 했고, 아내가 사라진 것처럼 일을 꾸며야 했다. 아내가 없어진 마당에 자신의 불륜 사실을 세상에 알릴 수는 없었으므로, 베티의 아기 또한 어떻게 할지 결정을 해야 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의 소설가 인생은 이제 완전히 끝이 나 버렸다는 것이다. 무려 8년 간이나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고, 무려 20가지 언어로 번역이 되어 팔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수많은 문학상의 수상자였던 그인데, 이제 한 글자도 새로 써낼 수가 없으니 앞길이 막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믿고 싶은 게 있다면 직접 해보는 게 훨씬 낫지. 지어낸 거짓말은 금세 잊어버린다. 기억을 해야 하는데 세부적인 것까지 정확히 기억하려면 신경이 많이 쓰인다. 그리고 거짓말이란 언젠가는 폭탄으로 변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오래된 거짓말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녹슬어간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말한 사람은 안심하게 되고 점점 부주의해진다. 그러다 결국 잊어 버린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잊어버린 거짓말이 어디 놓여 있는지 모른다면 그 부근 일대를 피하는 것이 좋다. 헨리의 지나온 인생은 그런 위험물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는 절대로 자신의 과거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온통 지뢰밭이니까.

그렇게 거짓 삶을 살던 소설가의 실체가 온 세상에 다 까발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야기는, 그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더 흥미로워진다. 단순히 아내의 이름 대신 소설가인 것처럼 살았던 게 전부가 아니라, 과거부터 악행을 거듭했던 나쁜 놈이었던 것이다. 한동안 잘난 소설가 행세하며 사느라 잠잠했던 그의 내면이 아내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깨어나게 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는 두 얼굴을 가진 하이드가 되어 간다. 아내의 죽음을 감추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거짓말에 거짓말을 거듭하는 그의 위태로운 삶은 과거로부터 그를 쫓아다니는 누군가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하고, 현실에서 의심을 받게 되어 쫓기기도 하면서 점점 더 엉망진창이 되어 간다.

특히나 흥미로운 인물은 바로 소설가의 아내인 마르타인데, 천재적으로 글을 써내지만 정작 자신은 원고를 전혀 읽지도 않고, 그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으며 스스로의 작품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는다. 작품을 발표할 의사도 없었기에 남편이 출판사에 원고를 보낼 때 그의 이름으로 하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을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없으며 그저 글을 쓰는 것만을 좋아한다. 그리고 초고를 한번도 수정하지 않더라도, 매번 완벽한 글을 써내는 천재 작가이다. 그녀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메세지, “여보, 어떻게 끝날지 알겠어?”는 작품을 읽는 내내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들고,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 사실 나는 그녀가 살아서 남편 앞에 다시 나타나 엄청난 반전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의 속도를 휘몰아치게 만들어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려가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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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의 눈 -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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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상한 스파이 소설을 만났다. 이 책은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스파이가 등장하는 첩보물은 아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스파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스파이는, 오로지 자신의 일에 대한 신뢰와 투철한 자부심으로 움직이는 캐릭터가 아니던가. 애초에 스파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심하거나 의문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니 이 작품은 정말 이상한 기반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을 잃어버리면 무얼 할 수 있지?"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정작 기억을 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듯이.

"다시 시작하는 거지. 전부 다.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르잖아. 살면서 느꼈던 좌절감이나 실망감 같은 것, 이를테면 불가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거잖아."

"너는 뭐가 불가능한데?"

"다시는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 그때의 나, 참 괜찮았거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익명'으로 존재한다

D는 실종된 정신과 의사인 언니를 찾아 나서는 동생이다. 그들 자매는 한 번 본 것, 들은 것, 읽은 것을 거의 모드 기억하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무정부주의자이자 히피였던 그들의 부모는 아이를 낳고 정부에 등록하는 일을 하지 않았고, 그들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부모가 사라지고 어떤 가정에 입양되었고, 언니만 서류상으로 정부에 등록되었다. D는 여전히 이 세상에 기록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이제 그녀의 언니는 세상에 기록된 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언니 대신 진료실을 지키다 고민을 상담하러 환자로 온 X와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X는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잠들어 있었고, 깨어났을 때 십오 년의 세월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던 어떤 사람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퇴원 서류에 보호자로서 서명한 이는 Y였다. 누군가 나타나 그에게 그가 조직에 속한 특수요원이며, 스파이라고 말해준다. 그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의 상사라고 하는 남자가 건네준 자신의 파일을 읽는다. 자신에 관해 나열된 객관적 사실들을 읽으면서 그는 생각한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자신이 한 일이 세상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이 했던 모든 선택의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을 거라고 말이다.

Y는 다큐멘터리 작가 감독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녀는 X의 대학시절 친구 역할을 부여 받았다. 그의 보호감시 업무를 십 개월 동안 진행했고, 그가 깨어난 후 그의 지인으로 가장해 그를 원래 일로 복귀시키는 업무를 했다. 하지만 그 업무는 완벽하게 마무리되지 않아 징계를 받았고, 그 뒤 Z라는 소설가를 관찰하는 새로운 일을 받게 된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전문 요원으로 승진하는 것이다. B는 중년의 스파이로 그의 직책은 중간 보스이다. 해외에 나간 지 오 년 째인 아내와 아이와 떨어져 홀로 지내는 기러기 아빠이다. 남편에게도, 세상사에도 아무 관심 없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지내는 아내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늘 일등을 해온 아버지를 존경스러워하는 아이 속에서 그는 평생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Z는 별볼일 없는 서른 다섯의 소설가이다. 스물다섯에 소설가가 되고, 십 년 동안 소설만 썼지만, 특별한 학벌도 없는데다 작품이 팔리지 않는 시시한 작가라 출판사 또한 무관심한 작가이다. 현재는 창작기금을 받아 겨우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정말 알고 싶은 게 뭐야?"

"난 너의 진짜 냄새와 숨결과 땀을 알고 싶어. 그건 진짜겠지."

원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위안을 주는 환상 속에서 살 수 있다. 거짓된 현실에 속아주기도 하고 본래 의도를 감추려고 그 현실을 이용하기도 하면서. 이 거짓으로 쌓은 도미노가 길고 크고 복잡해질수록 어쩌면 우리는 더더욱 환상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성공적인 환상을 지키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스파이의 삶이다.

직장도 없고 애인도 없고, 심지어 할 일도 없어 보이는 무명의 소설가를 감시하는 스파이들. 반사회적이거나 반정부적이거나 반경제적인 구석도 없어, 애초에 무엇 때문에 그가 표적이 되었는지부터가 의문인 남자를 감시하는 그들의 임무 또한 그 실상을 알 수 없어 미심쩍기만 하다. 그렇게 무명의 소설가를 감시하는 스파이들의 이야기와, 그 속에 등장하는 비밀스런 독서클럽의 초대장, 그리고 그 곳에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길을 '패자의 서'라는 책 속에서 찾으려는 이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각의 스파이들의 자기 자신에 대해,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스파이라는 각자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한 인간을 지탱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도 함께 던지고 있다.

'가난은 극복할 수 없는 것이며 그저 그렇게 살다 죽는 건 억울한 일이 아니며 아무것도 바꿀 수 없도록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졌다'는 단정적인 작가의 어투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끊임없이 시니컬하게 내뱉고 있는 세계의 존재 이유와 현대인들의 고루한 삶에 대한 시선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가 바꾸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들 가운데 우리의 진실이 있다

현대 사회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작되고, 감시 당하는 거야 뭐 기존에 다른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었던 설정이었지만, 이렇게 독특한 '스파이'는 난생 처음이었던 터라 신선하고 색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아닌 나로 살면서도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아무런 고민 없이 살아가는 숱한 사람들에게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말한다.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한다고. 어차피 우리 삶의 선택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그것들 모두 진실이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정말 위대한 것까지 상상하고, 꿈꿔보라고. 불리할 수는 있어도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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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신저 23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염정용 옮김 / 단숨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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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수십 명의 승객들이 크루즈선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왜냐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그곳만큼 완벽한 장소도 없기 때문이다. 난간에서 한번 뛰어내리기만 하면 그걸로 끝, 시체도 목격자도 찾을 수 없으며, 실패할 확률도 전혀 없었으니 말이다. 진짜 무서운 것은 이런 일들이 이 작품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꽤 많은 사람들이 크루즈선과 페리에서 바다로 떨어져 사라지고 있다.

 

"지금 현재 대양을 누비고 다니는 모든 크루즈선에서 우리는 매년 평균23명의 승객들이 뛰어내려 자살을 한다고 추정합니다."

그래서 패신저 23이군!

이제 그녀는 다니엘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명확히 깨달았다.

"당신들 배에서 또 한 명이 실종되었나요?"

우리 배에서 패신저 23이 발생했어요!

"아뇨." 다니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그런 걸 감추는 것쯤이야 우린 밥 먹듯이 하니까요."

 

잠입 수사관인 마르틴 슈바르츠는 5년 전 아내와 아들을 잃은 후, 삶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당신은 최대한 빨리 배를 타야만 해요."

술탄호는 크루즈선으로 5년 전 마르틴의 아내가 아들을 뱃전 밖으로 던져 버리고, 스스로 50미터 아래로 뛰어 내려 자살을 했던 바로 그 배였다. 그는 그날 이후,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 이상 크루즈선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다짐했었지만, 그는 그 배에 탈 수밖에 없었다. 이름 모를 노파가 전화로, 아재가 자발적으로 죽으려 뛰어내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가족들이 어쩌면 아직 살아 있다는 단서일지도 모르겠다며, 그에게 누더기가 된 조그만 테디 곰 인형 하나를 건네준다. 그것은 아들 테디의 것이었다.

같은 시간, 열다섯 딸 리자와 함께 배에 오른 율리아는 남편의 배신 이후로 3년동안 삭막한 시간을 보내오다, 이번 크루즈 여행을 통해 딸과 호젓한 휴가를 보낼 꿈에 부푼다. 그런데 딸의 멘토 교사이자 잠깐 연애 상대였던 톰이 전화를 해서, 딸이 남자와 함께 등장하는 지저분한 영상의 존재에 대해 알려주고, 그것이 인터넷에 퍼져 리자가 자살할지도 모른다고 당장 배에서 내리라고 말하지만, 이미 배는 출발한 상태였고, 리자는 이 넓은 배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현재 이 배의 관계자들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사건은 바로, 8주 전 술탄호에서 어머니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나타난 아누크라는 여자아이였다. 해운 회사의 오너는 마르틴에게 그 아이의 실종에 대한 수사를 해달라고 제안한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크루즈선은 엄청난 금전적 손실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낸다면 마르틴이 가족의 죽음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당신의 생각 하나하나가 시럽에 젖어 유리 가루 범벅이 된 듯한 느낌이 들 겁니다." 그녀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당신이 따님을 간절히 생각할수록 그 생각들은 당신의 마음속의 드러난 상처에 더욱 피가 나도록 비벼댈 겁니다. 당신의 머릿속에서는 적어도 두 목소리가 동시에 외칩니다. 한 목소리는 당신의 따님이 도움이 필요했을 때 당신이 왜 그 자리에 있지 않았느냐고, 어째서 그 징후를 알아보지 못했느냐고 외치죠. 또 다른 목소리는 당신의 삶의 의미가 사라져버린 마당에 무슨 권리로 손을 놓고 여기에 우두커니 앉아 있느냐고 비난에 차서 묻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갈래로 진행된다. 실종되었다가 다시 나타난 아이를 통해 사라진 자신의 가족에 대한 단서를 수사하는 마르틴과 딸이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율리아는 선장과 함께 수색에 나서고, 누군가에 의해 특정 공간에 갇힌 채 살면서 자신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을 고백해야만 하는 여자가 등장한 다.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는 크루즈선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밀도 있는 스토리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무엇보다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이 주는 가장 큰 재미는 무엇보다 '예측할 수 없음'에 있다. 그동안 만나왔던 전작들에서도 그랬지만, 두툼한 페이지를 숨쉴 틈 없이 달려가 범인이 밝혀지고 난 다음에도 해결과 해소의 안도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그 어떤 예정된 것에 대한 불안감, 그러나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한 기대감까지 차오르게 만들어주는 이야기. 치밀하게 계산된 설계도를 따라 가다 보면, 결국 지나쳐 온 모두가 복선이 되어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반전도 재미있지만, 그 모든 것의 결론이 난 뒤에도 남아 있는 주인공에게 벌어질 일들에 대한 우려는 너무도 오싹하고, 충격적이고, 당황스럽다. 그렇게 항상 여운(?)을 남기는 그의 작품은 사이코 스릴러라는 장르에 걸맞게 파격적이고, 끔찍하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감정적인 부분들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사이코 스릴러, 심리 스릴러의 대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본인은 가족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담으로 받아들인다고는 하지만,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것은 가족들 속에 근원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여전히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언젠가 후회하게 될 그 순간에 충분히 귀 기울이지 못하곤 한다. 누군가의 죽음에 직면해서야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들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이미 나쁜 결말이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내가 그때 왼쪽으로 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갔더라면 이라는 선택에 대한 후회, 그때 나를 기다리고 있을 미래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정한 행동으로 인한 파급효과들은 어쩔 수 없이 비극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다시는 되돌릴 수 없지만, 다시 한번 시간의 끝을 잡고 돌아가고 싶은 회한의 선택들. 하지만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한들, 나라는 인간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결국 내가 하는 선택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걸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생에서 하는 수많은 결정들로 인해, 결국 우리의 미래가 달라지는 것처럼, 미리 조심하지 못하고 물이 엎질러진 다음에야 우리는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다. 늘 그렇지 않은가. 그 가슴 아픈 회한의 순간으로 피체크는 우리를 초대한다. 이것은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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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10-21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피체크 마니아시군요! ^^

피오나 2016-10-21 23:17   좋아요 0 | URL
하핫. 좋아하는 작가예요! 반전이 특히 매력있는 작가인데, 감정적인 부분도 놓치지 않거든요! ㅎㅎ
 
길 위의 소녀 - 개정판
델핀 드 비강 지음, 이세진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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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길 위에 서 있다. 가끔은 어디로 가야 하는 지도 알 수 없고, 때로는 이 길이 맞는지 의문도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구나 자신 만의 길 위에 서서 앞으로 가야만 한다. 누군가는 서로 손을 맞잡고 함께 걸어가기도 하지만, 결국 남겨지는 것은 혼자이며, 우리는 그 외롭고 힘겨운 길 위에서 버텨내야만 한다. 인생이란 결코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을 허용하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다.

여기 두 소녀가 있다. 집이 있지만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던, 스스로 자신이 좋은 방향으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열세 살 천재 소녀. 그리고 매일 어디서 자야 할 지 찾아야 하는,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는 열여덟 노숙자 소녀.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언제나 혼자라고만 느꼈던 그들이, 함께 걷게 된다.

책에는 주요한 순간들을 구분하는 장들이 있어서 시간이 흐르거나 상황이 변화하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때로는 부로 나뉘어 그림에 붙은 제목처럼 '만남' '희망' '몰락' 하는 식으로 어떤 전망이 실린 제목이 붙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에는 그런 게 없다. 제목도 없고, 플래카드도 없고, 표지판도 없다. '위험하니 조심하시오' '붕괴사고 자주 일어나는 곳' '실망 임박'을 가르쳐 주는 표시는 전혀 없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옷 한 벌 걸쳤을 뿐이지 완전히 혼자요, 행겨 그 옷이 완전히 누더기일지라도 별수 없다.

열세 살의 루 베르티냐크는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글 읽기를 다 뗀 천재 소녀이다. 몇 학년을 월반하고 현재는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지만, 너무 어린 탓에 좀처럼 같은 반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발표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녀는 무심코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노숙자라는 테마로 다음 발표 주제를 정하게 되고, 거리에서 사는 여자아이를 인터뷰해보겠다고 선언해버리게 된다. 그리고 평소에 자주 떠나는 열차를 구경하러 가던 역에서 열여덟의 소녀, 노를 만나게 된다. 살아오는 내내, 자신이 언제나 바깥에 있다고 느끼면서 지내왔던 루는 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처음으로 어딘가에 속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노라면, 진짜 인생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루의 가족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 슬픔이 목 끝까지 차올라 정상적인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수족관과도 같았다. 엄마는 벌써 몇 년째 집에만 처박혀 지내고, 아빠는 욕실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고, 그들의 하나뿐인 딸은 자신이 늘 혼자라고 느낀다. 루가 여덟 살 때 그녀의 동생을 갖기 위해 애쓰던 부모는 아기를 가진다. 모두의 축복 속에 루의 여동생이 태어났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영아 돌연사로 세상을 떠나 버리고, 그렇게 시간이 멈춰 버리고 만다. 엄마는 루를 더 이상 어루만지거나 안아주지 않았고, 식구들은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딴 세상 가서 살고 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가면 거실 한가운데 앉아 있는 엄마는 딸을 보며 일어나서 오늘 하루 잘 보냈냐고 묻지만, 질문은 매일같이 토씨 하나 안 다르고 똑같았으며, 루의 대답들은 그저 허공으로 흘러가버린다. 그들은 그렇게 엄마 역할, 딸 역할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전에는 '사정에'에 존재 이유, 숨겨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에는 그런 의미가 세상의 구조를 관장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이유, 나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망상이다. 그런 면에서 문법은 명제들이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공부를 하면 그 논리를 파헤칠 수 있다고 믿게끔 만드는 일종의 기만이다. 숱한 세월을 거쳐 이어온 기만. 이제는 나도 인생이 휴지와 불균형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한 연속에서, 질서는 그 어떤 절박한 필요에도 결코 부응해주지 않는다.

세상과 소통할 수 없어 외로웠던 소녀는 노숙자 소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노는 루에게 자신의 하루하루를 말해주며,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묘사해준다. 루는 그 모든 것을 노가 자신에게 주는 나름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색깔이 달라 보이게 하는 선물, 모든 이론을 뿌리부터 뒤흔들고 문제 삼는 선물. 사람들은 노를 가리켜 '너하고는 다른 세상에서 사는 애야.'라고 말하지만, 루는 자신이 세상들이 서로 소통하고 서로 겹치는 곳에 속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삶이 아무 단절 없이 쭉 이어지는 곳, 만사가 불현듯 이유 없이 멈춰버리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맥주를 마시고, 손톱을 물어뜯고, 자신의 삶의 송두리째 들어 있는 바퀴 달린 트렁크를 끌고 다니는 열여덟의 노. 말수가 적고 순종적인 만년 일등 열세살의 루. 그리고 거칠 것 없는 반항아에 아이들 사이에선 왕 같은 존재인 열일곱의 뤼카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우정의 풍경은 어른 들의 세계에서 소외된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해내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세상에는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으며, 어른이 되려면 분명히 그런 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차츰 깨닫게 된다.

홈리스는 전 세계 도시의 공통된 문제이다. 극중 루가 사람들이 거리에서 죽어가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걸 이해할 수 없어 하고, 노를 자신의 집에 데려오기로 결심하고 부모님에게 소개하는 장면은 매우 뭉클하다. 사실 어른들은 그럴 수 없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길을 걷다 노숙자들이 무리 지어 앉아 있는 것을 보며 불안해하거나, 무섭다고 느낀다. 노숙자는 인간의 실존적 두려움을 상징하니 어쩔 수 없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회학자 로라 휴이는 노숙자에 대한 두려움이 '사회적 낙오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며, 사회적 또는 도덕적 수모를 수반하는 감정이고, 궁핍해지거나 사람들로부터 잊히는 것에 대한 공포'라고 말하지 않았나. 하지만 아직 순수한 열세 살 소녀는 노숙자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 들인다. 그녀는 '원래 그런 것과 원래 그렇지 않은 것에 부딪히기로 결심한다면, 분명 많은 것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믿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엄마의 텅 빈 눈과 집 벽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 모든 슬픔 때문에 집에 들어가기가 너무도 싫었던 소녀는, 결국 극단의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리는 함께인 거지, ? 우리는 함께야?

노가 가끔 길에 멈춰 서서, 다짜고짜, 뚜렷한 이유도 없이 묻던 질문은, 루가 노와 함께 평생을 거리에서 살겠다고 집을 떠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렇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슬픈 진실.

이제 다시는 우리 집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나는 노와 함께 평생을 거리에서 살 거야.

루는 노를 통해서 자신이 속한 부분 집합에서 벗어나고, 자기 인생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생각보다 너무도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어떤 지침서나 사용설명서에도 나와 있지 않는 삶의 부작용들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그런 폭력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루는 한걸음씩 성장해나간다. 그녀는 이 일을 통해서 성장했고, 이제 더 이상 삶이 두렵지만은 않다. 그렇게 루는 자신 만의 길 위에서 더 이상 외롭지만은 않다. 그 길이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그 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길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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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단처럼 검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3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스노우화이트 신드롬'을 일으키며 스칸디나비아 스릴러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가 드디어 완결되었다. <피처럼 붉다>, <눈처럼 희다>, <흑단처럼 검다>로 이어지는 3부작은 백설공주 동화를 고스란히 변주하며, 그보다 더 풍부한 이야기들로 새로운 히어로를 탄생시켰다.

 

"내게 눈처럼 희고, 피처럼 붉고, 이 흑단 창틀처럼 검은 아이가 있었으면."

바늘에 손가락을 찔린 왕비의 바램처럼, 눈처럼 흰 피부와 피처럼 붉은 입술, 그리고 흑단처럼 검은 머리를 가진 백설공주, 루미키의 그 마지막 여정은 아름답고 잔인한 비밀 속으로 향한다.

널 사랑해.

내뱉긴 쉽지만 진심을 담긴 힘든 말이지. 하지만 난 진심이야. 이건 그냥 말이 아니라 나의 일부야. 내가 말하는 순간 이건 너의 일부가 되기도 해. 내 사랑이 네 안으로 스며드는 거지. 그 사랑 덕분에 넌 더욱 아름답고 강렬하고 눈부시게 빛나.

널 밤하늘의 어떤 별보다도 반짝이게 만들 수 있어.

넌 완전히 내 것이 되었어. 그게 바로 네 운명이야. 내 운명이고.

전작인 <눈처럼 희다>에서 프라하 여행 중에 컬트 종교단체의 집단자살에서 사람들을 구해내고 영웅이 되어 돌아온 루미키는 학교에서 공연하는 연극 '검은 사과'에서 주연을 맡는다. 이 작품은 '백설공주'라는 작품을 새롭게 해석한 연극으로 유리로 만든 관에 누워 왕자에 의해 눈을 뜬 백설공주는 왕자의 신부가 되는 걸 원치 않고, 왕자 역시 공주의 외모에 반했을 뿐 그녀의 마음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강렬하고 충격적인 작품이다. 이 연극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도 고결하고 도덕적이지 않다는 점이, 지극히 현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색다른 작품이다. 루미키는 여행에서 돌아와 삼프사라는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고, 그 와중에 스토커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며, 전 남자친구인 블레이즈 마저 등장하게 된다. 항상 루미키를 지켜보고 있다며, 그녀의 그림자를 자처하는 스토커로부터 이상한 쪽지와 문자는 계속된다. 그리고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언니의 존재에 대한 의문과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부모에 대한 의심은 여전하고, 그녀는 점차 어둡고 잔인한 진실에 다가가게 된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은 전작들에 비해 분량이 상당히 짧은 만큼, 군더더기 없고 간결한 문체로 스피디하게 진행된다. 중심 플롯도 스토커의 존재와 루미키의 대립만으로 흘러가서, 지나치게 심플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만큼 임팩트가 강하기도 하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에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냈던 루미키의 과거와 비밀들이 두 번째 작품에 이어, 세 번 째 작품에서야 깔끔하게 다 밝혀지면서 정리가 되어 시리즈로서의 완결성도 가지고 있다.

목소리는 루미키의 위에서 들려왔다. 움직이는 그림자. 목소리가 귀에 익었지만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동화 속 공주보다는 강할 줄 알았어. 어떤 독약도 널 오랫동안 잡아둘 수 없지. 넌 전사니까. 그렇게 싸우며 살아왔잖아. 날 맞아서도 그랬고. 한 순간도 두려워하지 않았어.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안개가 조금씩 걷혔다. 마침내 루미키는 장벽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녀는 관 속에 누워 있었다. 연극 소품인 유리관.

누구의 삶도 하나의 사건만 발생하고 마무리 되는 법은 없듯이, 누군가의 이야기도 여러 번에 걸쳐서 존재한다. 영원히 행복한 사람도, 영원히 불행하기만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공평하게 말이다. 시리즈에 걸쳐서 수많은 동화들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변주하면서, 루미키의 이야기는 '옛날 옛적에'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어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나온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지게 될 것이다. 열일곱 소녀가 열여덟이 되고, 고난과 역경을 거치면서 조금 더 단단하게 성숙해져 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듯이 말이다. 무엇보다 고독한 소녀였던 루미키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아무리 광활한 우주 속의 미약한 존재라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는 세상에 없으며,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인물은 없으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비밀은, 그 자체로 이미 치명적인 독과도 같다. 숨겨져야 할 이유가 있었기에 비밀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알 수 없기에 아름답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누군 가에게는 잔인할 수밖에 없는 비밀. 그것을 간직한 사람은 매혹적일 수 있지만 그만한 대가를 치뤄야만 한다. 아마도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는 독을 품은 사과처럼 아름답지만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누구라도 한입 베어 물고 싶을 만큼 치명적이고 유혹적인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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