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읽는 남자
안토니오 가리도 지음, 송병선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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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송나라, 당시의 유교는 사람의 신체에 칼을 대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대부분이 수술을 기피했으며, 학자들조차 의학을 경멸했고, 행정가들은 수술을 미개한 학문으로 여기는 시절이었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시절에 과학적 수사 방법과 검시법을 체계화해서 역사상 최초의 법의학서인 <세원집록>을 집필한 인물, 송자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분은 당신이 생각하는 이유로 죽은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고인의 아버지가 말을 더듬었다. "말에서 떨어지는 걸 처남이 봤어요."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누군가가 목을 졸랐습니다."

가족들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는 목 양쪽으로 난 붉은 멍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에서는 송자가 법의학 저서를 집필하고 법관으로 있을 때의 과정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그저 그가 어떻게 세상의 천대를 이겨내고 그곳에까지 도달하기의 스토리를 펼쳐내고 있는데, 그의 삶에 얼마나 장애물이 많고 첩첩 산중의 고난과 역경이 거듭하는지 매 순간이 클라이 막스인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세상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고, 새롭게 그의 삶에 등장하는 이들 역시 결국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인지, 혹은 그를 배신할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들이 펼쳐지고, 매번 절벽 앞에 서 있는 사람 마냥 목숨을 걸고 고군분투해야 하는 삶을 살아내는 송자라는 인물은 굳은 심지로 오로지 정의롭거나, 철두철미하고 완벽한 천재형이 아니라 사람들을 쉽게 믿고, 그만큼 속고 배신당하는 어리석음도 가지고 있으며, 가끔은 비겁한 모습도 서슴지 않고 보여주는 매우 현실적인 캐릭터이다. 그렇게 완벽한 인물이 아니라서 더욱 감정 이입이 쉬워지는 부분도 있으며, 그만큼 그가 겪는 그 모든 부당하고, 위험천만한 상황들에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들어 주고 있다.

 

 

무엇보다 그 당시가 사람이 갑자기 죽으면 누군가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 믿고, 용의자를 잡으면 증거가 없어도 자백을 할 때까지 때리고 혀를 뽑아 고문하던 시절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그런 시절에, 현대의 과학 수사법과도 유사한 방식으로 시체를 검시하고, 증거를 수집해서 범인을 찾아내고, 죽음의 이유를 밝혀내는 것은 사람들에게 놀라움도 주었지만, 두려움이라는 감정도 함께 주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시대적 배경은 모든 사건에 특별한 제한을 두게 만들고, 그것에서 비롯되는 인물들을 둘러싼 상황들은 웬만한 대하 사극 못지 않은 스릴과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덕분에 이 작품은 역사 소설을 좋아하는 이에게도, 추리,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는 이에게도 모두 만족할 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시체 판독가라고?" 형부 내상이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시체를 읽는 사람입니다. 제 수제자입니다." 밍 교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를 가리켰다.

........ "당신과 같은 전문가가 놓친 것을 저자가 포착할 수 있다는 말이오?"

"아마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칸 내상은 마치 자가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밍 교수를 쳐다보았다.

중국 최초의 법의학 저서인 <세원집록>을 집필한 송자. 그는 법관으로 있을 때 청렴하게 법정을 펼쳐 간악한 자를 엄징하고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었던 걸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저서에 기술된 법의학 검험에 관한 것은 근대 과학 원리와도 부합되는 점이 많아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시체 읽는 남자>는 이런 송자의 인생을 재구성한 팩션으로 스페인의 역사소설가인 안토니오 가리도의 작품이다. 중국의 역사 속 인물을 스페인의 작가가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독특했고, '세원집록'이라는 책 외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송자라는 법의학자에 대한 궁금증도 일었다. 작가 역시 자료조사 과정에서 송자의 일생이 수십 권의 책에서 발췌한 서른 개의 문단에 불과했기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당시의 정치와 문화, 사회와 법, 경제와 종교, 군사와 성 영역을 총 망라한 자료 수집으로 인해 매우 리얼하게 현실에 충실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송나라로 시간 여행이라도 떠난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어 주고 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서사' 위주인 작품보다는 작가 고유의 문체나 문장이 돋보이는 상징적인 작품이나 감정의 흐름과 인물의 정서에 치중하는 작품에 더 관심이 많지만, 이 작품만큼은 예외로 하고 싶다. 그만큼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재미와 머리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역사적 배경과 정보, 그리고 살아 숨쉬는 것 같은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주는 매력이 굉장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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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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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10 15일 파리, 검은 실크 스타킹과 실크 레이스로 장식된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여우털로 소매와 옷깃을 장식한 발까지 늘어지는 긴 모피 코트를 입고, 펠트 모자와 검은색 가죽장갑까지 착용한 한 여인이 감방을 나와 처형 부대가 대기하는 장소로 향한다. 그녀는 눈을 가리지도, 묶이지도 않은 채 침착한 모습으로 자신을 처형할 군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두 명의 병사들이 몸을 곧추세우고 총을 어깨에 바짝 붙이는 순간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던, 여전히 태연했고 두려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던 그 여인은 그렇게 총살되어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녀의 이름은 마타 하리, 죄목은 스파이 혐의였다.

죄가 없다? 어쩌면 이건 정확한 표현이 아닐 겁니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이 도시에 첫발을 디딘 이후로 죄가 없던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정부 기밀을 원하는 자들을 조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독일, 프랑스, 영국, 스페인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에게 저항할 수 없으리라 여겼지만 결국은 내가 조종당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죄로부터 도망쳤고, 나의 가장 큰 죄는 남자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실제로 이용한 것이라고는 상류사회 살롱에서 떠도는 풍문들뿐이었지만 나는 스파이라는 죄명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이중 스파이 혐의를 받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마타 하리의 삶을 재구성한 소설이다. 아름다운 미모로 유럽의 사교계를 오가던 무희였던 여자가 어떻게 프랑스와 독일을 오가며 정보를 판 이중간첩 혐의를 받게 되었을까? 생의 마지막 그 순간까지 떳떳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품위를 지켰던, 팜므 파탈의 대명사 마타 하리, 나는 그녀에 대해서 뮤지컬 작품을 통해 먼저 알게 되었다. 파리 물랑루즈의 유명 댄서로서도 신비롭고 관능적인 무희였고, 유럽 각국의 최고 권력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실제로 이중 스파이였는지 여부와 별개로 매혹적이고 아름다웠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목숨을 걸어도 좋을 만큼의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매혹적인 무희이기도 했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던 터라 한 여자로서의 삶도 매우 궁금했고 말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마타 하리를 독립적인 삶을 택했고 남성 중심 시대에서 여성의 권리를 표명했던, 20세기 첫 페미니스트였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당시 권위자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이란 이유로 그녀에게 죄를 전가했다고 말이다. 그는 실제로 제네바에서 유엔평화대사로 활동하면서 여성의 권리를 위해 힘쓰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사랑과 여성의 권익에 대해 관심이 많은 작가가 그려내는 그의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해서 마타 하리를 그려내면서도 소설적으로 풀어내고 있어 누구나 쉽게 그녀의 삶에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안드레아스 부인이 내게 정확히 이런 표현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우리 인생은 가장 사소한 부분까지 계획되어 있노라고, 태어나 공부하고 남편감을 찾기 위해 대학에 가고, 비록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남자일지라도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도록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늙어가고, 거리의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인생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척하지만 사실은 '너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어' 라고 말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잠재우지 못한 채 생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했고, 누군가는 그녀를 시기했다. 마타 하리는 고위 관료들과도 친분을 쌓으며 두터운 인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이중 스파이 의심을 받게 되자 그들은 모두 등을 돌렸다. 그녀는 자신이 모든 걸 가졌을 때 항상 다정했고 자신을 돕고자 했던 친구들이,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순간에도 변함없이 곁에 있어 주리라 믿었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권력의 그늘 아래 확증도 없이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감옥에 갇힌 순간에도 그녀의 영혼이 여전히 자유로웠다는 데 그녀의 가치가 있다. 물론 마지막까지 자유를 위한 투쟁을 벌였지만 총살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죽는 이유는 말도 안 되는 간첩 혐의 때문이 아니라 항상 꿈꿔온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고, 꿈에는 언제나 비싼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이 작품을 쓰면서 대화 일부를 만들어냈고, 일부 장면들을 삽입했으며, 사건의 순서를 약간 바꾸었고, 서사와 관련 없다고 판단한 것들을 생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에 쓰인 내용들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다. 오직 사랑만을 갈구했고, 언제나 스스로이기를 원했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사라진 여인. 마타 하리가 실제로 스파이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비밀이 해제된 영국의 제1차 세계대전 관련문서에는 그녀가 군사 정보를 독일에 넘겼다는 어떤 결정적 증거도 없다고 밝히고 있으며, 그녀가 한때 유럽을 들끓게 한 뇌새적인 미모를 가진 만인의 연인이었다는 사실만 남아 있을 뿐. 이 작품은 그녀의 일대기라고 부르기에도,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허구의 소설이라고 단정짓기에도 애매할 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마타 하리라는 한 여성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여전히 권력에 의해 무고한 삶이 희생되는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혹은 우리 여성들에게), 삶의 어느 순간에도 진정한 나로 살고자 했던 그녀를 통해서 우리들의 권리를 포기하지 말고 잃어버리지 말자고 말이다. 마타 하리같은 여성들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 버리지 말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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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14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과 마타 하리의 실제 삶을 묘사한 책을 안 봐서 모릅니다. 코엘료가 마타 하리를 ‘20세기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치켜세운 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최초‘라는 말만 넣지 않았으면 부정할 수 없는 평가라고 생각해요. ^^;;

피오나 2016-11-15 12:37   좋아요 0 | URL
하핫. 그거야뭐 개인의견차이니까요. cyrus 님께서 생각하는 20세기 첫 페미니스트는 누구인지 궁금하네요^^

cyrus 2016-11-15 13:52   좋아요 0 | URL
정말 어려운 질문입니다. ㅎㅎㅎ

물론 제 의견도 꼭 맞다고 볼 수 없어요. 제 생각에는 버지니아 울프인데, 사실 지금 딱 생각나는 20세기 페미니스트가 울프 뿐입니다. ^^;;

피오나 2016-11-15 18:15   좋아요 0 | URL
오호..버지니아 울프도 있었군요!! 멋진 의견이십니다^^
 
콘돌의 6일 버티고 시리즈
제임스 그레이디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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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시드니 폴락 감독,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영화 콘돌(Three Days Of The Condor)의 원작 소설이다. 그렇게 영화로 먼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이 작품은 첩보 스릴러의 모던 클래식으로 손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70년대의 잘 만들어진 첩보물이라는 점 외에도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콘돌이라는 캐릭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현장 훈련도 받은 적이 없는, 총이라고는 사냥할 때 딱 한 번 쏴본 게 전부인, 그런 첩보물의 주인공은 난생 처음이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대부분의 첩보물에 등장하는 히어로들과는 너무도 다른, 그 어디서도 만난 적 없는 이상한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말콤은 권총 사격을 평생 딱 한 번 해봤다. 친구가 가진 22구경 모델이었다. 달아나는 다람쥐를 향해 쏜 다섯 발은 모두 빗나갔다. 그는 미시즈 러셀의 권총을 허리 높이에서 발사했다. 자신이 방아쇠를 당겼다는 걸 그가 인지하기도 전에 귀청이 터질 듯한 총소리가 골목에 메아리쳤다.

말콤 미국문학사협회에서 근무하는 CIA 조사원이다. 그가 하는 일은 문학 분야에 기록된 모든 스파이 활동과 관련 행위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스파이 스릴러와 살인 미스터리 물을 읽고, 미스터리와 아수라장을 다룬 단행본 수천 권에 등장하는 모든 행동과 상황들을 대단히 상세하게 기록하고 분석한다. 그렇게 모든 서적의 플롯과 거기에 사용된 방법들을 요약하고, 본부로부터 위생 처리된 일련의 보고서를 날마다 수령하는데, 그 보고서에는 실제 사건들을 묘사한 요약 본이 담겨 있고, 그것을 토대로 사실과 픽션을 비교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둘 사이에 중요한 상관관계가 드러날 경우, 심층 조사에 착수하고, 상층에 있는 기밀부서에 검토용으로 제출되는 것이다. 소설이 단순히 작가의 상상력으로 얻어낸 결과물이 아니라, 어떤 사상적 배경으로 인해 쓰여졌다고 믿는 음모론이야 말로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의 하나이다.

재미있는 건 당시 스물 셋이던 작가 지망생 제임스 그레이디가 이런 설정을 구축할 때만 해도,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직업이 아니었다는 거다. 게다가 당시만 해도 CIA를 다른 책은 한 권도 없었다고 한다. 굉장하지 않은가. 세계에서 출판된 모든 모험물들과 소설들을 읽고, 플롯들을 (추잡한 수법들과 암호들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그것으로 CIA의 실제 계획과 작전들과 비교하면서 정보 누설자들을 찾아 낸다니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KGB에 그런 업무를 하는 비밀 사업부가 생긴다. 바로 콘돌에서 영감을 얻어서, 소설가 지망생이 지어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2,000명이나 되는 인력이 투입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재출간을 하면서 작가의 고백이라는 부분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작품의 탄생 배경과 그 외 수많은 부분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부분은 무려 30 페이지가 넘는다. 작가의 말이 이렇게 길게 수록되어 있는 것 또한 난생 처음인데, 소설 본문 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말콤은 신중하게 계산한 위험을 감수했다. 가장 눈에 띄는 은폐 장소가 가장 안전한 곳인 경우가 잦다는 에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 원칙을 활용한 그와 웬디는 의사당행 버스를 탔다. 그들은 협회에서 채 4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이스트 캐피톨 스트리트에 있는 여행자용 숙소를 임대했다. 우중충한 호스텔의 여주인은 오하이오에서 온 신혼부부를 환영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평범했던 어느 날, 말콤의 동료 중 하나가 과거의 기록들을 조사하던 중에 잃어버린 책 두 상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말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그가 발견한 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그걸로 인해 그 사실을 알게 된 모든 이들이 전원 학살당한다. 마침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주문하러 나왔던 말콤만 살아 남게 되고, CIA 본부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다. 요원들과 접선하기로 한 곳에 나간 말콤은 그 중 한 명이 오늘 아침 협회에 있었던 이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아보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다. 그에게서 도망치는 와중에 말콤은 생애 두 번째로 권총 사격을 하게 되고, 그것은 남자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하며 박살을 낸다. 그렇게 아무도 믿을 수 없어진 상황에서 그들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코드네임 콘돌이 벌이는 6일 동안의 활약이 펼쳐진다.

미국문학사협회의 직원들을 모두 사살한 CIA 내부의 이중 첩자와 그 모든 사태를 파악하려는 CIA 본부의 주요 인물들과 그들과 긴밀해 협조해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아내려 하는 콘돌의 이야기는 그가 초짜 현장 요원이라는 데서 더 긴장감을 부여한다.  물론 책상에 앉아 문서만 분석하던 그가 숨 가쁜 추격 전에서 너무 쉽게 달아나고, 적들을 물리친다는 허술함이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비현실적인 히어로들에 비해 인간적인 주인공이 가진 매력으로 인해 상쇄가 될 만큼 흥미롭다. 분석관에 불과한 그가 복잡하고 위험한 포위망을 얼마나 잘 피해 다니는지 사실 너무 이상하지만, 실제 세상에는 그보다 더 이상하고 어이없는 일이 더 많이 벌어지지 않은가.

1974년 출간되었던 <콘돌의 6> 1975 <콘돌의 그림자> 이후 제임스 그레이디는 다른 작품들을 계속 써왔지만, 지난 2014 <콘돌의 다음 날>, 그리고 2015년에 <콘돌의 마지막 날들>을 출간하며 콘돌을 다시 재 탄생시켰다. "나는 이런 내용의 글을 읽는 사람이지, 그걸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라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정하던 그가 그럼에도 꽤 훌륭하게 그 모든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 남았지만, "요점만 얘기하면, 자네는 썩 훌륭한 현장 요원은 아냐." 라는 평가를 받았던 첫 번째 작품 이후, 또 어떤 활약을 보여주며 현장 요원으로서의 자질을 드러내게 될지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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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어 데스 스토리콜렉터 50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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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탈옥을 한다. 여기까지는 평범하다. 그런데 그 남자는 감옥에서 10년을 보내고, 출소를 하루 앞 둔 상태였다. 하루만 더 있으면 자유의 몸이 되었을 텐데, 왜 마지막 날 밤에 그런 짓을 했을까? 그렇게 탈옥수가 된 그가 잡힌다면 재판을 받고 다시 감옥에 들어와야 할 것이다. 아마도 20년은 더 수감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탈옥을 감행했다. 여기서부터 이 작품이 특별해진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특별한 스릴러의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뭔가를 기대한다는 건 그런 식이지, 하고 오디는 생각한다. 단 하나의 사건이나 단 하나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모든 게 뒤집힐 수 있다. 타이어에 펑크가 나거나 잘못된 순간에 보도에서 내려서거나 하필이면 급조 폭발물 옆으로 차를 몰아가거나. 오디는 사람이 자기 운을 만든다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또한 공정함 같은 건 생각지도 않는다. 피부색이나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가리킬 때만 빼고.

드라이퍼스 카운티의 무장 트럭 강도사건. 그날 네 사람이 죽었고, 한 명이 도망치고, 한 명이 잡혔다. 현금 700만 달러의 행방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는 바로 범인으로 지목된 오디 파머 뿐이다. 그런데 그는 감옥에 수감된 10년 동안 온갖 협박과 살해 위협에도 꿋꿋하게 버티며, 꾸역꾸역 살아남았다. 그가 감옥에 도착하고 몇 시간 안 되어 그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고, 사라진 7백만 달러에 대한 관심으로 오디는 매일같이 지독한 짓을 당해야 했다. 그는 첫날 열두 명의 남자와 싸워야 했고, 다음 날에는 새로 열두 명이 더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겁에 질려 하지도, 독방에 넣어달라고 애원하지도 않고, 그저 그 모든 것을 견뎌냈다. 그렇게 10년을 버티고, 출소 하루 전에 탈옥을 한다.

이 작품에서 감옥을 탈옥하는 과정의 드라마틱함이나 계획 따위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그가 탈옥을 하고 나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탈옥이 아니라 그가 탈옥을 한 이유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이 작품 전체를 굴러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그가 탈옥을 하고 난 뒤, 그의 옆방 동료였던 모스와 미해결 강도사건을 추적 중인 연방수사국 특수수사관 데지레, 10년 전 강도사건 현장에 있었던 보안관 발데즈,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추적자들까지 모두 사라진 오디를 쫓기 시작한다.

"우리가 되어야 할 사람이 된다는 게, 때로는 쉽지가 않단다."

오디를 찾기 위해 온 데지레에게 모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 친구가 왜 탈옥했는지 알고 싶어 하시지만, 그건 잘못된 질문이라고. 왜 더 일찍 탈옥하지 않았는지를 물어야 하는 거라고. 오디는 감옥에 있는 내내 칼에 찔리고 목을 졸리고 두들겨 맞고 유리에 베이고 불에 지져졌다고. 일주일이 멀다 하고 간수들이 두들겨 팼고, 낮에는 마피아나 깡패들이 오디를 덮치려고 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오디는 단 한번도 증오나 후회나 나약함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이다. 이야기는 그렇게 탈옥한 오디의 뒤를 쫓는 인물들과 감옥을 나온 오디의 의문스러운 여정을 교차로 보여주면서 진행되지만, 우리는 이야기가 꽤 진행될 때까지 그의 의도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춰 버린다. 호흡이 짧고,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라는 장르에서 이런 느낌을 받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도로 위로 몸을 숙인 채 가슴을 들썩인다. 콧물이 흐르고 어딘지도 모를 곳들이 아파온다. 상실감과 당황 속에서 오디는 자신의 통제를 잃었다. 한때 품었던 모든 계획은 이제 더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가능해 보이지도 않는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짊어진 채 가고 있다. 통근객들, 쇼핑객들, 관광객들, 사업가들, 야구모자 쓴 소년들, 넝마를 입은 거지들. 자기 자신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 오디는 그저 존재하고 싶을 뿐이다.

마이클 로보텀은 이 작품으로 작년 골드 대거상을 수상했다. 올해 에드거상과 배리상에도 최종 후보로 선정되었고 말이다. 그의 대표작인 조 올로클린 시리즈가 그 재미와는 별개로 두툼한 두께만큼이나 느린 이야기 진행으로 책장을 넘기는 속도를 느리게 만드는 걸로 유명하지만, 이번 작품은 그 속도감이 대단하다. 그리고 550페이지를 앉은 자리에서 읽게 만드는 가장 큰 동력은 주인공 오디 파머 때문이다. 실제 그가 행하는 말과 행동보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기억하고 평가하는 걸로 우리는 그를 먼저 알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과거 그의 모습과, 실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면서 현재 그의 행동에 전혀 다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하고,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진짜 오디 파머의 모습을 알게 된다.

사랑은 남자를 그렇게 만든다. 남자를 미치게 만든다. 사랑은 남자를 장님이나 불사신으로 만들지 않는다. 약하게 만든다. 남자를 인간으로 만든다. 현실로 돌려놓는다.

단 하나의 사건이나 단 하나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다. 삶은 누구에게나 공정한 것이 아니며, 스스로 자기의 운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게다가 기대는 항상 현실과 일치하지 않으며, 삶은 가장 평범한 꿈도 짓밟고 꺽어 버리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뭐 하나 마음먹은 대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면, 대체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냐 싶을 수도 있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그 어떤 잘못을 저지르지도, 그 무슨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음에도 최악의 상황에 처해지게 된다면 당신이라면 어떨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기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누군 가에게는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누군 가에게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죽을 힘을 다해 버텨야 하는 일이라면 말이다. 글쎄, 나라면 오디 파머처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마이클 로보텀은 이 작품을 통해 책장에서 튀어나와 우리의 마음과 기억에 파고드는 인물을 창조했다는 것. 나는 그저 오디 파머가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마치 그가 실제로 살아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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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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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공항의 비즈니스 클래스 라운지 바에서 만난 두 남녀. 남자는 신생 인터넷 기업에 자금을 대고 조언하는 일을 하는 부유한 결혼 3년차였고, 여자는 여자 대학교에서 문서 보관 담당자로 일을 하는 미혼이었다. 어차피 그들은 평생 다시 볼 일도 없을 테니, 낯선 사람에게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인형 같고 동그란 얼굴은 나이를 먹으면서 둥실둥실해질 것이고, 핀업 사진 속 모델 같은 몸도 처질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그녀는 늙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죽일 거니까. 맞지? 난 그럴 계획이었다. 그녀를 죽이고도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굉장한 힘과 희열이 느껴졌지만 또한 두려움과 슬픔도 느껴졌다. 난 아내를 미워하지만 그 이유는 한때나마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해안가의 부지를 사들여 집을 짓는 중이었는데, 시공업자와 아내가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직접 눈 앞에서 확인한 그는 엄청나게 화가 났고, 아내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불륜 장면을 목격한 일주일 전부터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자문했던 질문, 아내를 죽이는 일에 대해 그녀에게 털어놓자, 놀랍게도 그녀가 이렇게 말을 한다. "나도 당신과 같은 생각이에요."

살다 보면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 상대방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이 있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그런 생각을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살아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말이다. 너무 괴롭고, 분하고,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 같은데, 그 순간 곁에 있던 누군가가 그 생각은 당연한 거고, 전혀 나쁜 게 아니라며 도와주겠다고 나선다면 어떨까.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고, 당신이 하는 건 그 사람의 죽음을 앞당겨주는 행동일 뿐이라고 말이다. 당신에게 나쁜 짓을 한 그 사람이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드는 사회의 암적인 존재이니, 사라져도 상관없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그 행동이 이후에 그로 인해 상처받을 많은 사람들을 구해주는 일이 되기도 한다고. 글쎄, 장난처럼 웃어 넘길 수도 있겠고,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며 정색하게 될 수도 있을 테고, 정말 그래도 될까 싶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라면 어떨까. 하지만 세상에 '죽여 마땅한' 사람들은 없다. 그가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렀다 해도 말이다.

"계획대로만 한다면 잘못될 일은 없어요. 하나만 물을게요. 만약 오늘 케네윅에 지진이 나서 미란다와 브래드가 죽었다고 해 봐요. 기분이 어떻겠어요?"

"행복할 겁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대답했다. "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그들은 죗값을 치르겠죠."

"우리가 하려는 일이 바로 그거예요. 지진을 만드는 거죠. 둘 다 매장할 정도의 지진. 제대로만 한다면 사건을 수사하게 될 경찰을 포함해 모두가 미란다는 브래드가 줄였고, 브래드는 도망갔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고는 브래드를 찾는 데 총력을 기울일 테지만 영영 찾아내지 못하겠죠. 당신을 잠깐 의심할 수도 있어요. 의심하지 않으면 이상한 거죠. 하지만 당신에게 불리한 증거는 전혀 나오지 않을 테고, 당신의 알리바이는 절대 깨지지 않을 거예요."

, 그렇게 아내의 불륜을 용서하지 못한 남편의 복수극이 짜잔.하고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의 오산이다. 이야기는 살인을 계획하는 남편 테드와 우연히 공항에서 만나 그를 돕는 릴리의 스토리와 과거 릴리의 행적이 교차 진행된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1인칭 화자였던 우리의 주인공 테드는 1장을 끝으로 이야기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시작된 2장은 릴리와 테드의 첫 만남 장면으로 이어지고, 이야기는 테드가 죽이려고 하던 아내 미란다와 살인 계획을 모의하다 혼자 남겨진 릴리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되기 시작한다. 마지막 3장에선 그녀들 외에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킴볼과 사건을 수습해야 하는 릴리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되며 이야기는 더욱 복잡해진다.

릴리가 이렇게 된 배경에는 그녀의 독특한 가정 환경과 어린 시절의 영향이 매우 컸지만, 사실 그녀를 그저 사이코 패스라고 치부하기에는 모자란 부분이 많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말 나쁜 것인지.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어차피 누구나 한번은 죽게 마련인데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라는 합리화, 그리고 내가 만약 누군가를 죽이고, 완벽하게 숨길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의문이다. 나라면? 과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애초에 살인의 당위성을 믿는다면 말이 안 되겠지만, 이상하게도 이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지점과 어느 순간 만나게 된다. 우리가 그 동안 옳다고 믿어 왔던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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