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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이야기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다이안 세터필드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평점 :
아무리 아껴가며 책을 읽고, 조심스레 공들여 보관하고 관리해도 시간이 지나면 책 등은 누렇게 변색되고 고슬고슬한 책장은 뻣뻣해지게 마련이다. 2007년에 내가 처음 만났던 <열세 번째 이야기>도 상태가 깨끗한 편이긴 하지만 책 등이 바래고 페이지들도 거칠거칠해졌다. 무려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손때 묻고,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껴안고 있는 오래된 책이 좋다. 도서관에 가면 특유의 향기가 있는데, 그건 바로 오래된 종이에서 나오는 냄새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 낡은 종이 냄새를 사랑하고,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윈터 여사는 이야기를 멈추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방 한구석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고정된 바로 그곳에, 그녀의 지나온 세월이 지금 이 순간보다도 더, 그녀 앞에 앉아 있는 내 모습보다도 더 선명하게 펼쳐져 있는 듯했다. 그녀의 입가에, 그리고 눈동자에 슬픔과 혼란이 뒤섞인 무언가가 스쳤다. 그녀와 그녀의 과거를 잇는 가느다란 줄을 바라보면서 나는 한편으로는 그 줄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까 봐 두려웠고, 한편으로는 이야기가 중단될까 봐 두려웠다.
아버지와 함께 헌책방을 꾸려가며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의 전기를 쓰는 마가렛 리는 어느 날 영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비다 윈터로부터 편지를 받게 된다. 오랜 세월 비밀스러운 과거로 유명했던 그녀가 이제야 비로소 진실을 말하겠다며, 자신의 전기를 써달라고 제안해온 것이다. 마가렛 리는 현대물이 아닌 고전에 매혹되어 왔고, 그래서 항상 죽은 작가들의 전기만을 써왔다. 게다가 그녀는 비다 윈터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어 본 적이 없다. 마가렛 리는 비다 윈터의 책 <변형과 절망의 열세 가지 이야기>를 아버지가 수집한 희귀 초판본으로 우연히 만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된다. 그런데 그 작품은 마지막 열세 번째의 이야기가 실려 있지 않았다. 사라진 이야기에 대한 의문을 품고 비다 윈터를 만나게 된 그녀가 만나게 되는 것은, 시골 마을 앤젤필드의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음산하고 기괴한 이야기였다.
옛날 옛날에, 유령이 사는 저택이 있었지!
옛날 옛날에, 책으로 둘러싸인 방이 있었어!
옛날 옛날에, 쌍둥이가 있었어........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고, 신경질적이고, 오만하고, 어느 면에서는 다소 무례하기까지 하며 진실을 말할 거라고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비다 윈터를 마주한 마거릿은 그녀의 저택을 떠나려하다,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뒤를 돌아보고 만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쌍둥이 자매가 있었고,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그녀를 잃었으며, 그 사실을 여태 숨겨온 부모 덕분에 최근에서야 그 비밀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직업이 오직 진실만을 다루는 전기 작가였고, 자신이 한 눈에 사로잡힌 <열세 가지 이야기>를 쓴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자신이 늙고 병들었으므로 그 동안 세상에 보여준 수많은 거짓말 대신 진실을 말해야겠다고 외치는 비다 윈터의 목소리에서 두려움과 비슷한 무언가에 사로잡힌 감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거릿은 엔젤필드라는 마을의 대저택에 살았던 가족, 조지와 마틸드, 그들의 아이들인 찰리와 이사벨, 이사벨의 아이들인 에멀린과 애덜린의 삶과 운명, 그리고 그들의 두려움과 그들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제 이야기에 대해 물으셨죠?"
내가 말했다.
"이야기 따윈 없다고 자네가 말했지."
"제게도 이야기가 있어요."
"있고말고. 그 사실을 의심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네."
윈터 여사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와 함께 헌책방을 운영하며 책을 읽는 것이 오로지 낙인 소녀와 대저택에 거주하며 은둔생활을 하는 비밀스런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것만으로 이 작품은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저 설레임을 주는 작품이다. 게다가 공포와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의 배경들은 고딕 소설로서의 매력도 충분히 보여주며, 비다 윈터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뒷조사를 하는 마거릿의 이야기는 웬만한 미스터리 소설 못지않게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대저택에서 일어난 의문의 화재, 금기를 뛰어 넘는 사랑, 가문의 저주, 유령의 존재,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한 비극, 그렇게 18세기 영국 시골 마을 엔젤필드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들은 매우 고풍스러우면서도 전혀 지루하거나 촌스럽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푹 빠져들게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이미 나는 9년 전에 이 책을 읽은 터라 내용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점차 폐가로 변해가는 대저택과 그곳에 버려진 쌍둥이 소녀의 이야기와 비다 윈터가 들려주는 말 속에서 진실을 찾기 위해 애쓰는 마거릿의 이야기가 계속 교차되며 어느 순간 과거와 현재가 만나면서 이야기는 절정에 이른다.
결혼이나 죽음, 고귀한 희생이나 기적적인 소생, 비극적인 이별과 뜻밖의 재회, 엄청난 파멸과 꿈의 실현... 그런 것들이야말로 기다릴 가치가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마거릿은 비다 윈터의 작품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현대 소설에 대해 아는 게 전무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합리적인 결말을 가지고 있는 오래된 소설을 사랑했고, 항상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렸기 때문에 죽은 자들의 이야기만 써왔기 때문이다. 부업인 전기 작가 일 외에 그녀의 본업은 책방에서 책을 '돌보는 것'이었는데, 마치 죽은 자의 무덤을 보살피듯 그녀는 책을 보살핀다. 책을 닦아주고, 작은 흠집을 보수하고, 말쑥한 상태로 유지하며, 날마다 책을 한두 권 뽑아 몇 줄, 몇 페이지를 읽으며 죽은 자의 목소리가 자신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마거릿이 매일 책을 아무거나 뽑아서 몇 줄, 몇 페이지씩 읽는 대목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사실 이것이야말로 책을 제대로 보살피는 방법이 아닐까 싶었다. 책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책장 가득 진열해놓고 수집하는 것도 아니고, 먼지를 닦아주며 오로지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도 아닌, 책을 끊임없이 읽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책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그 순간이야말로 책이 지닌 가치가 빛을 발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렇게 아주 오랜만에 만난 이 작품은 여전히 페이지 곳곳에 책에 대한 애정이 가득 묻어 있어,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게다가 개정판은 두툼한 두께는 비슷하지만, 작은 판형으로 사이즈가 콤팩트해서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 더욱 좋아졌고 말이다. 내 책장 속에서 초판본 책이 그 동안 먼지를 쌓아가며 시간을 버텨내는 동안 나는 또 얼마나 변했을까. 9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외모도, 성격도, 가치관도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책 속의 이야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작품 덕분에 책장 속에 가득한 책들을 한번 더 살펴보고, 꺼내어 보게 되었다. 극중 비다 윈터의 말처럼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는 마치 가족과도 같은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그들을 잃었다고 해도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 있으니까. 그들에게서 멀어지거나 등을 돌려도 가족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 아닌가. 그러니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에게나 이야기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어느 화창한 날, 당신의 하나의 이야기, 소설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당신이 이 작품 <열세 번째 이야기>를 읽게 된다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