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 동화전집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1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한스 테그너 그림,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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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동화를 읽고 있는 동안은 뭔가 보호받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던 것 같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불만이 생기거나,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거나,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답답할 때, 나는 안데르센의 동화들을 은신처 삼아 잠시 동안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에게 잘 골라 펼쳐 든 한 권의 책은 방패이자 방화벽이며, 투명인간의 망토였던 셈이다. 어릴 때부터 북적북적 시끄러운 집안이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독서의 매력을 알아차려버린 것도 있지만, 나는 그 수많은 이야기들이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던 든든한 친구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눈의 여왕, 인어 공주, 성냥팔이 소녀, 미운 아기 오리 등등.. 안데르센의 수많은 동화들은 지금도 여전히, 내가 험난한 세상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르곤 하는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이번에 출간된 안데르센 동화전집이 가치가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가장 많은 작품이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는 거 아닐까 싶다. 그동안 국내에 소개되었던 안데르센의 전 작품은 156편이었는데, 이번에 12편이 더 추가되어 최초로 168편이 수록되어 있는 전집이니 말이다. 게다가 클래식 일러스트가 무려 64장이나 함께 담겨 있어, 읽는 내내 더할 나위 없이 향수를 느끼게 만들어주고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처음 만났던 동화의 판본에는 언제나 이런 일러스트가 함께 수록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안데르센의 동화는 어른이 된 지금에 와서 다시 읽어도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은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단순하지만 유치하지 않고, 짧지만 긴 여운을 남겨주며,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어른들의 삶도 비춰주고, 굉장히 판타지처럼 읽히지만 반대로 매우 현실적이기도 하니 말이다. 바로 그 보편성과 아름다움이 안데르센의 수많은 작품들이 아직도 여전히 각색되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이유이기도 할테고 말이다.

 

 

 

안데르센의 동화들은 너무도 유명해서 내가 거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이 책을 통해서 하나씩 읽어나가다 보니 많이 알려진 작품들 외에 너무 좋은 이야기들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동화'이기 때문에 웬만한 작가들의 '단편'보다도 더 짧은 이야기들인데, 어쩌면 그렇게 수많은 삶의 진리들과 보석같은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는지 말이다.

 

"이 세상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또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도 있는 거야. 이제 난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수 없어. 사람들은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걸 겪어 봐야 해. 그러면 결국 우리는 모두 탑지기처럼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게 된다구."

-'탑지기 올레' 중에서

 

"진딧물이라구! 사물을 올바르게 불러야지. 일상 생활에서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동화에서라도 올바르게 불러야 하는 법이야. " 동화 할머니가 큰 소리로 말했다.

 

-'녹색 옷을 입은 작은 병사들' 중에서

 

사람들은 말과 의미가 다른 말을 종종 한다. 사람들은 말은 많이 해도 의미가 별로 없는 말들을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다. 중상모략을 하는 말들이 많으며 해가 되지 않는 말들도 많다. 사람들의 말 속에는 진실과 유머가 숨어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중에서

 

안데르센의 <동화집>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의 경험에서 나온 거라고 한다. 그가 보고 행한 모든 것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영감을 준 것이다. 안데르센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쓴 이야기들은 나의 생각 속에 있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개울물과 한 줄기 햇살과 한 방울의 말루트 액만 있으면 꽃을 피우는 씨앗과 같다." 그는 이야기에 현실적인 측변을 살짝 가미하고 초자연적인 것을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는 삶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고, 끔찍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으며, 순조로울 수도 잔인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기에, 그의 이야기는 동화지만 모두 행복하게 끝나지 않는다.

 

 

 

무려 1280페이지의 두툼한 페이지이지만, 그 속에 수록된 168편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10분이면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짧다. 하루에 십분만 시간을 내어보자. 그리고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쳐서 그 이야기를 읽어보자. 어쩌면 그 이야기로 인해 당신의 하루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인어 공주, 눈의 여왕의 지배를 받아 심장이 얼음덩이가 된 소년 카이와 그를 찾아 세상 끝 라플란드로 떠난 소녀 게르다, 팔지 못한 성냥에 불을 밝히며 환상 속에서 잠들어 가는 소녀들이 당신이 잊고 있던 그 무언가를 깨닫게 해 줄 지도 모르니 말이다.

 

우리의 부모가 읽었고, 우리가 어린 시절 읽었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읽고 있으며, 우리의 자녀들이 또 읽을 수밖에 없는 안데르센의 동화들은 동물이나 식물, 돌들이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장난감이 생명을 가지고 영혼이나 요정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내가 살아온 인생사가 바로 내 작품에 대한 최상의 주석이 될 것이다.” 라고 말했던 안데르센의 어린 시절과 인생이 불행과 절망으로 얼룩져있었기에, 그가 작가로서 성공적으로 데뷔해 창작한 수많은 작품들 속에 아름다움과 더불어 처절한 슬픔도 함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배수아 작가가 안데르센의 동화들은 '내 어린 시절의 한 페이지를 완성해주었다'고 말한 걸 본 적이 있다. 누구에게든 그렇지 않았을까. 나에게도 안데르센의 동화들은 그만큼 특별하고 소중한 이야기들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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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1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어린시절 읽은 동화를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책 살 돈이 많으면 그림형제 동화 전집, 안데르센 동화 전집을 사고 싶어요. ^^

피오나 2017-01-12 19:16   좋아요 0 | URL
그림형제, 안데르센의 동화들은 아이들이 보기에도, 어른이 읽기에도 좋은 책이죠ㅎㅎ
 
당신의 완벽한 1년
샤를로테 루카스 지음, 서유리 옮김 / 북펌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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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당신에게 이런 숙제를 준다면 어떨까. 아침마다 감사한 것 세 가지 적어보기. 생각나는 것 뭐든지 상관없지만, 단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그리고 저녁에는 하루에 있었던 좋은 일 세 가지를 적어보는 거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 있냐고? 굳이 글로 적어보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감사한 것 정도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과연 그럴까? 상투적으로 감사할 것들 말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감사. 정말 '감사'라는 표현에 걸맞고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주고 아침에 일어날 때 가장 먼저 생각나고 밤에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을 때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그런 것이, 과연 당신에게도 그런 게 있을까? 이 책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을 제시한다. 가장 평범하고도 특별한 방식으로 말이다.

정말 사춘기 철부지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 무슨 쓰잘데기 없는 짓인가. 이럴 시간이 있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그의 삶에 감사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굳이 거창하게 적을 필요가 없단 말이다. 아버지처럼 치매에 걸리지 않아 망각의 위협이 없다.

예를 들어 감사한 것... ... 감사한 것은..........

내가 감사한 것이 도대체 뭐지?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출판사를 운영중인 요나단은 대저택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지만 마흔 두 살인 현재 혼자이다. 부인인 티나가 그와 가장 친한 친구와 눈이 맞아 7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이혼을 요구했고, 자신이 주었던 그 모든 부를 기꺼이 버리고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한나는 사귄 지 4년이 넘어가는 남자 친구 지몬의 프로포즈를 기다리며, 자신이 10년 넘게 꿈꿔왔던 '꾸러기교실' 프로젝트를 친구인 리자와 함께 운영 중이다. 매사에 까칠하고 친구가 없는 요나단과 무한 긍정주의에 아이들을 사랑하는 리사의 이야기가 그렇게 교차로 진행된다. 요나단의 현재와 두 달 전 리사의 시간이 차례로 진행되다, 어느 순간 하나의 현재로 만나게 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여느 때처럼 새벽 조깅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요나단은 우연히 자신의 자전거 손잡이에 매달린 가방 속에서 두툼한 다이어리를 발견하고 어리둥절해한다. 가죽 표지의 다이어리 첫 페이지에는 '당신의 완벽한 1'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고, 날짜당 매 페이지마다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짧은 격언과 그날 해야 할 일들로 가득한 다이어리는 11일부터 1231일까지 모든 장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고, 가끔은 거창한 스케줄도, 또 가끔은 소박한 스케줄도 있었다. 게다가 다이어리의 글씨체가 자신의 어머니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가 10살 때 아버지와 이혼하고 떠난 어머니였으니 말이다. 한나의 남자친구 지몬은 자신이 내년 말까지 살아 있을 가망이 거의 없다는 선고를 받고 절망에 빠진다. 그래서 한나에게 프로포즈 대신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놓아주고 싶다고 이별을 선언한다. 갑작스러운 비극을 받아들일 수 없어하던 한나는 지몬을 위해 내년 계획을 짜기 시작하겠다고 선언한다. 매일을 위한 365가지 아이디어로 그의 미래를 위한 초석을 쌓겠다는 것이다. 오직 그를 위한 다이어리를 만들어서 그가 다시 힘을 내 병과 싸울 의지를 북돋아주고,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면, 적어도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시간이 되길 바랬기 때문이다. 정말 그의 마지막 1년이라면, 정말 완벽한 1년을 선물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몬은 다이어리를 선물 받고 얼마 뒤 완전히 잠적해버리고, 다이어리의 주인을 찾을 것인지 고민하던 요나단은 자신의 출판사가 파산 직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생을 낭비하기에는 하루하루가, 1초도 너무 소중했다. 걱정과 근심에 파묻혀버리기에는 너무 소중한 인생이었다. 삶은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 걸리느냐에 상관없이. 누구도 자기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지금' 그리고 '오늘'이다. '어제'는 상관없고 더는 중요하지 않으며 '내일'은 아무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죽을 병에 걸린 연인을 위해 새로운 사람을 찾아 준다는 설정은 매우 진부하고 뻔하지만, 사실 이 작품에서 이것은 매우 사소한 디테일에 불과하다. 완전히 다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주인공이 각자의 시간을 겪어내다가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초반부가 아니라 완전히 후반부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모른 채로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우연히 피해가기도 하면서 그들은 무려 500페지가 넘어서야 하나의 교집합으로 같은 시공간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그 많은 페이지에서 대체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는 걸까.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작성한 다이어리대로 일상을 채우는 한 남자가 자신의 삶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상황들과 사라져 버린 남자친구 때문에 절망했다, 그 다이어리를 통해 완벽한 삶을 살고 있을 어떤 남자를 찾으려는 한 여자의 일상이 겪게 되는 다이나믹한 상황들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과연 이들이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될까. 다이어리를 통해서 이들은 어떤 변화를 겪게 되고, 또 어떤 순간을 만들어가게 될까 매 순간 고대하면서 두툼한 페이지들이 끝을 향해 달려간다.

작가의 전작인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타인은 지옥이다> 모두 흥미롭게 읽었기에 이번 신작도 기대를 했다. 두 작품은 비프케 로렌츠라는 이름으로, 이번 작품은 그녀의 또 다른 필명인 샤를로테 루카스라는 이름으로 발표가 되었는데, 필명이 여러 개 인 것도 그렇지만 각각의 작품들이 분위기가 전혀 달라 이거 같은 작가가 쓴 게 맞나 싶을 만큼 완전히 달랐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는 유쾌한 캐릭터와 다소 황당한 설정이 풋풋한 재미를 주었던 작품이라면, <타인은 지옥이다>는 소름끼치는 오프닝이 돋보이는 본격적인 스릴러물이었다. 두 작품의 유일한 공통점은 독창적인 소재와 섬세한 심리 묘사 정도가 될 것이다. 이번 작품 <당신의 완벽한 1>은 유쾌발랄한 로맨스 소설처럼 읽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내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무언가를 던져주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극중 지몬을 위해 만든 한나의 다이어리 덕분에, 엉뚱하게도 요나단이 '지금 그리고 여기'의 삶에 집중하게 된 것처럼, 우리 삶의 수많은 우연들이 모여 인연을 만들고,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리고 내 현재를 가득 채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일주일이 훌쩍 넘었다. 나의, 그리고 당신의 올 한 해가 이들처럼 '완벽한 1'으로 만들어지기를 고대해본다. 어제보다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위해 살수 있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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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 컬렉터 링컨 라임 시리즈 11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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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 시리즈가 돌아왔다. 국내 번역이 2년마다 출간되고 있어 기다리다 목이 빠질 지경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링컨 라임 시리즈는 단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이번 <스킨 컬렉터>는 시리즈의 열한 번째 작품이다. 제목에서 다들 눈치챘겠지만,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본 컬렉터>와 연결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설적인 본 컬렉터의 모방범, 혹은 그렇게 보이는 범죄가 전면에 등장한다.

 

이야기는 옷 가게 여직원이 지하실에 내려갔다 한 남자를 마주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바로 빌리 헤이븐, 인간의 피부에 집착하는 문신 전문가이다. 그는 여자의 복부에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문자를 문신으로 새긴다. 그런데 그는 잉크대신 독을 사용한다. 게다가 그가 자신의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해 도서관에서 몰래 찢어온 책의 페이지는 바로 링컨 라임이 해결했던 본 컬렉터 사건에 대한 내용이 담긴 책의 일부였다. 과연 그는 본 컬렉터의 모방범일까. 링컨 라임과 아멜리아 색스는 스킨 컬렉터가 피해자들의 몸에 남기는 문신을 통해서 그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범인도 접착 롤러를 갖고 다닌 게 분명해요. 최대한 주변을 밀고 다닌 것 같아요."

"난 영리한 범인이 싫어."

그럴 리가. 색스는 생각했다. 라임은 멍청한 범인을 싫어했다. 영리한 범인은 도전적이고 훨씬 재미있었다. 색스는 N95 호흡기 아래에서 미소 지었다.

"이제 대화 중단해요, 라임. 출입 통로를 조사해야겠어요. 맨홀요."

 

링컨 라임 시리즈에서는 메일 플롯만큼 서브 플롯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여러 개의 서브 플롯이 동시에 함께 진행되며, 어느 순간 반전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결말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인물들의 과거로 다가가기도 하며, 새로운 등장 인물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이번 <스킨 컬렉터> 역시 본 컬렉터의 모방범을 쫓는 수사 과정 외에 여러 개의 서브 플롯이 이야기를 풍부하게 이끌어가고 있는데, 그 중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이야기의 초반부터 등장하는 '시계공의 죽음'이다. 시계공이 죽었다니, 그것도 감옥 안에서. 누군가에게 피살당하거나 자살도 아니었고 심장 마비라는 진부한 사인으로. 이 무슨 김빠지는 전개란 말인지. 내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리즈를 여태 따라왔던 독자들이라면, 링컨 라임에게 시계공이란, 셜록 홈즈에게 모리어티와도 같은 숙적이자 라이벌 아닌가. 시계공은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 <콜드문>에서 화려하게 등장한 이후로 계속 시리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서브 플롯으로 매번 등장해왔다. 그러다 자신이 주인공이었던 <콜드문>에서가 아니라 조연으로 잠깐 등장했던 <버닝 와이어>에서 성형 수술후 링컨의 타운 하우스에 쳐들어 왔다 체포를 당하고 만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이 작품에서 죽음으로 등장하다니.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는 두뇌형 인간인 링컨 라임이 그의 죽음을 나름의 방식으로 애도하는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시계공은 라임이 만난 범죄자 중에 가장 흥미로운 인간이기도 했고, 라임을 앞질러 생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범죄자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라임이 그의 사망을 애도하면서 꽃을 보낸다는 설정은, 그 동안 라임을 알아왔던 그 누구라도 놀랄만한 일이었기에 매우 유쾌하기까지 했다. 물론 라임의 머릿속에 애도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는 플라스키에게 언더커버 임무를 주면서 언제나 수수께끼였던 시계공의 배후와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그의 죽음을 활용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시계공 만큼이나 그 동안 시리즈에 자주 등장했던 팸은 어느덧 열아홉 살로 대학에 다니면서 뉴욕에서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팸은 시리즈의 첫 편에서 어머니와 함께 본 컬렉터에게 납치당했었고, <콜드문>에서 엄마가 우익 테러리스트로 밝혀져 수감이 되고, 양부모와 함께 살게 되면서 현재는 색스의 여동생처럼 지내오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새로 생긴 남자친구와 같이 1년 정도 여행을 하면서 함께 살 거라고 해서 그녀를 부모처럼 걱정하는 색스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전편인 <킬룸>의 마지막에 결국 고생하던 퇴행성 관절염 수술을 받았는데, 그것이 마술 같은 효과를 발휘해 매 시리즈마다 항상 등장했던 그녀의 고질적인 관절염 통증에 대한 언급이 사라진 것도 이번 작품에서 보여지는 굉장한 변화라 하겠다. 

 

어떻게 나를 찾아냈지? 아니, 그건 정확한 질문이 아니다. '라임은' 어떻게 나를 찾아냈지? 그녀도 물론 솜씨가 좋다. 하지만 라임이 더 좋다.

좋아. 어떻게? 정확히 어떻게?

예전에 병원에 들른 적이 있었다. 어쩌면 거기서 미량 증거물을 묻혀서, 조심했음에도 나도 모르게 클로이 무어의 시체 옆에 조금 떨어뜨렸을지도 모른다.

 

링컨 라임 시리즈는 항상 링컨과 색스를 비롯한 수사팀의 시선과 범인의 시선으로 교차 진행되는데, 매 편마다 경찰이 어떻게 자신을 찾아냈는지, 자신의 범행 수법을 알아냈는지 궁금해하는 대목이 등장해왔다. 연쇄 살인범이 자신의 기가 막히게 완벽한 범죄 행각에 자신만만해 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경찰이 그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음을 감지하게 되는 순간, 그와 동시에 범인이 라임과 색스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하게 되면서 범행 타겟이 원래의 목적과 함께 그들에게로 향하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매번 링컨 라임과 아멜리아 색스는 죽음의 위기를 겪게 된다. 목 위 부분과 왼손 약지만 운동 가능한 전신마비 환자로 처음 시리즈에 등장해 이제는 오른손으로 글록을 잡고 범인을 겨냥할 정도로 오른손 기능이 회복하긴 했지만 여전히 라임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범인에 비하면 너무 쉬운 타겟이기도 하고, 직감이 뛰어나고 권총 명사수이지만 언제나 현장 감식을 혼자서 진행해야 하는 색스는 전직 모델 출신에다 늘씬한 몸매와 긴 빨강 생머리는 어디서나 눈에 뛸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특히나 이번 신작은 이들 두 사람을 처음 만나게 했던 <본 컬렉터> 사건을 변주한다는 점에 있어서 더욱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경찰 애인에게 배신당해 경찰이라는 직업 자체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순찰 경관 색스와 사고로 전신마비를 당하고 경찰을 퇴직해 삶을 포기하려던 라임이 인간의 뼈에 집착하는 본 컬렉터 사건을 맡으면서 시리즈가 시작되었고, 수많은 사건을 겪으면서 연인이 되고, 든든한 동료가 되어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라임의 투덜거림을 다 받아주는 톰과 여전히 신참 같은 매력을 풍기는 론 풀라스키를 비롯해 멜 쿠퍼, 론 셀리토 등 라임의 수사팀들도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해주고 있고 말이다.

 

 

제프리 디버에게 반전의 제왕이라는 수식어 자체는 평범할 수도 있지만, 링컨 라임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반전은 그야말로 기가 막히는 수준이다. 반전에 반전, 거기다 다시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고, 꼬면서 몇 번의 반전이 거듭되어도, 개연성에 대한 의심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의 탄탄한 플롯을 자랑한다. 게다가 디버의 범인들은 너무도 치밀하고, 집요하고, 잔악하고, 완벽해서 잡는다는 게 더 이상해 보일 정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링컨 라임이 실패를 거듭하다 결국에는 승리한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선악구도에다, 여러 번의 반전 롤링과 익숙한 패턴에서 반복감을 느낄 수도 있는 공식이지만, 사실 스릴러 작품이 이 정도 수준쯤 되면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링컨 라임 시리즈 자체가 하나의 장르처럼 느껴질 정도이니 말이다.

<스킨 컬렉터>를 읽고 서평을 쓰면서 정작 작품에 대한 줄거리는 별로 없고 엉뚱한 얘기만 늘어놓은 것 같지만, 사실 링컨 라임 시리즈를 읽고 나서 줄거리며 플롯을 자세하게 분석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직 작품을 읽지 않는 독자들에 대한 굉장히 매너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줄거리만 따라가는 것은 이 시리즈의 매력 중에 겨우 절반만 느끼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궁금하다면 직접 읽어 보시라. 시리즈를 꼭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흥미를 느끼는 시리즈 그 어디서 시작해도 상관없다. 기왕이면 이번 신작에서 출발해도 좋고 말이다. , 한번 시작하면 절대 발을 뺄 수 없으리라는 것만은 장담한다. 무조건 전 시리즈를 정주행하고 싶어질 테니 말이다. 링컨 라임 시리즈는 현재 열두 번째 작품 <스틸 키스>가 이미 출간되어 있다. 부디 이번에는 2년이나 기다려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기를 고대해본다. 그리고 올해에는 중순쯤에 제프리 디버의 또 다른 히로인 캐트린 댄스 시리즈의 그 세 번째 <XO>가 출간될 예정이다. 이 작품에는 우리의 링컨 라임과 아멜리아 색스도 찬조 출연한다고 하니, 설레 이는 마음으로 기다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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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코다 이발소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로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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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상황에 큰 불만은 없다. 이발사 일에 자긍심도 느끼고, 자신의 기술도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인생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여전히 야스히코를 괴롭히고 있다. 쉰세 살이나 된 중년 남자가 이 꼴이다.

쉰세 살의 야스히코는 스물여덟에 아버지로부터 이발소를 물려받은 후 가업을 이어 이십오 년째 이발소를 꾸려오고 있다. 대학 졸업 후 광고 회사에 취직해 바쁘게 보내다, 아버지의 허리 디스크로 귀향을 결심했고, 이용학원에 다니면서 기술을 배워 아버지의 뒤를 잇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스물셋의 맏아들 가즈마사가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발소를 맡겠다고 선언한다. 이대로 가다 젊은 사람이 싹 없어지면 언젠가는 동네가 아예 없어질 지도 모른다며, 고향을 어떻게든 하고 싶다는 거다. 아내인 교코는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면서도 내심 기뻐하는 눈치고, 할머니 역시 할아버지가 하늘나라에서 좋아하실 거라며 눈물까지 글썽이지만, 정작 야스히코는 복잡한 심정을 풀 길이 없다. 인구가 날로 줄어드는 이런 시골에서 이발소에 앞날이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좀 더 큰 뜻을 품어 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도마자와는 한때 탄광 덕에 번성했던 마을이지만, 지금은 쇠락한 마을로 인구가 격감해 사람보다 소가 더 많은 시골이다. 그렇다면 보통은 시골을 벗어나 도시로 나가려는 자식들과의 갈등이 남겨진 노인들의 쓸쓸함과 대조를 이루는 드라마가 상상이 될텐데, 오쿠다 히데오가 그리는 건 그 반대다. 자식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주기를 바라지 않는 나이든 세대와 그리고 쇠락한 고향을 어떻게든 일으켜보려는 젊은 세대의 대립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사건들이 유쾌하고 따뜻하게 펼쳐지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고장 살리기'에 열을 올리는 공무원들과 야스히코의 아들 가즈마사를 비롯한 젊은이들로 구성된 청년단은 어떻게든 동네를 살려보려고 여러 방면으로 기획을 짜고 그로 인해 마을은 점점 시끄러워지지만, 야스히코를 비롯한 윗 세대들은 내 자식을 침몰하는 배에 그대로 남겨두고 싶지 않다고, 그들의 계획을 허황된 그것으로 치부한다.

나이 든 사람은 나이 든 사람끼리 얘기가 통하는 것일까. 괜한 간섭이라면 삼가야겠다는 생각에 야스히코는 한동안 지켜보기로 했다. 나이 든 사람들은 옆에 누가 없으면 외로워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현역 세대의 오만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여든이 된 어머니도 매일 하는 일이 없는데도 재미나게 살고 있다.

도미자와에서 매년 이어지던 여름 축제의 계절이 찾아오고, 여든둘인 바바 할아버지가 쓰러지시면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그들을 돕는다.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야스히코는 자신의 노후에 대해서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도미자아와에 노인네 혼자 사는 집이 수두룩했지만, 막상 가까운 이웃이 그렇게 되자 별다른 노후 대책도 없이 어영부영 살고 있는 자신들이 불안해진 것이다. 그렇게 축제가 끝나고 또 한번 마을을 떠들썩하게 한 것은 중국의 농촌에서 서른 살의 처자가 시집을 온 이야기로, 쉽게 결혼할 수 없는 농촌 총각들의 현실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거기다 조그만 술집이 새로 문을 열면서 마흔두 살의 매력적인 마담이 등장해 아저씨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고, 유명한 배우를 포함한 영화 현지 촬영진이 오게 되어 또 한번 마을 전체가 들썩이고, 마을의 한 집의 장남이 도쿄에서 사기단으로 엄청난 사건을 일으켜 전국에 지명수배령이 내려지면서 시끌시끌해진다.

이렇게 눈으로 뒤덮은 쇠락한 탄광 마을이 조용해 보이면서도 끊이지 않는 사건으로 좌충우돌하는 동안 어른 세대와 젊은 세대의 화합이 자연스레 어우러지고, 사생활이 없어 아무 생각 없는 선의마저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시골 생활의 단점이 누군가를 따스하게 포옹해줄 수 있는 계기로 변화하기도 하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보이는 철없던 아들이 아버지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깊은 속내를 보여 감동시키는 등 따뜻한 유머와 푸근한 감성과 아기자기한 재미로 왁자지껄하게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우울할 때는 오쿠다 히데오를 읽어라'는 출판사의 소개 문구처럼, 이렇게 우울한 뉴스가 도배하는 연말, 달력이 넘어가도 별다른 희망은 보이지 않는 새해에는 이런 작품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평범한 듯 지루하지 않으며, 유쾌한 듯 보이지만 감동스럽고, 조용한 듯하지만 활기차고 말이다.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명랑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희망이 느껴지는 따스한 작품이, 당신의 내년 한 해를 힘차게 시작하게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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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감옥 모중석 스릴러 클럽 41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끝이 보이지 않은 지평선과 맞닿아 있는 바다, 그림 같은 풍경 속의 호수 모두 바라보는 건 좋아하지만, 수영을 하거나 물에 들어간 적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는 인감의 심연과 닮아 있어 오싹하고, 잔잔한 표면 아래 뭘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호수 또한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전혀 다른 걸 감추고 있는 우리네 사회와 닮아 있어 무서울 때가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 물의 감옥에 갇힌 한 남자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잠수를 잘하는 남자라 스스로를 칭하는 그가 호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이유가 뭘까.

그녀는 마비된 느낌이었다. 프랑크가 들려준 이야기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자기 삶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내용이 명백하게 담겨 있어서 허무했다.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은 늘 발생하고, 상황이 좋게 변할 때도 있고 나쁘게 변할 때도 있다. 그녀 스스로도 이런 일을 겪었고, 수잔 살인사건 이후로 잃어버린 행복의 흔적을 되찾기 위해 지난 3년 동안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가 되찾았다고 느낀 안전은 착각이었다. 살인범은 나를 언제나 지켜보고 있었어. 그러니까 이렇게 쉽게 다시 찾은 거지. 조금 빨리 걸었으면 나를 성큼성큼 따라잡을 수 있었을 거야.........

누군가 한 여인을 물속으로 세차게 밀고 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여자의 몸을 에워쌌고, 죽고 싶지 않아 물속에서 숨을 쉬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던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만다. 목으로 들어온 물 때문에 숨이 막혀왔고, 폐가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제멋대로 날뛰던 경련이 서서히 느려지고, 그렇게 마지막 숨을 내쉬고는 침묵이 찾아온다. 이 작품은 물 속에서 죽는 한 여자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모든 형태의 죽음이 그러하겠지만, 익사는 그 대상에게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카운트 다운을 알리는 방식이라 특히 잔인한 것 같다. 여자들을 익사시키면서 그것을 그녀와 함께 춤을 춘다고 표현하는 이 남자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강변에서 익사체가 발견되고, 타살이 분명한 시신의 배에는 전기인두를 사용한 경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대상은 바로 에릭 슈티플러 경정으로 한때는 잘나가는 경찰이었지만, 지금은 싸구려 브랜디에 기대며 명예퇴직할 날짜만 기다리고 있다. 마누엘라 슈페를링 경위는 이제 막 경찰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강력계 살인 담당 부서에 배정된 참이다.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는 오만한 상사와, 살인사건 전담팀 내 다른 남자 형사들의 은근한 따돌림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일을 해야만 한다. 의류 할인점에서 근무하고 있는 라비니아는 그 남자가 자신을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과거의 그림자에 쫓기는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녀의 외로움은 사방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여전했다. 그러다 여전히 정체 모를 남자에게 쫓기다 우연히 탄 택시에서 택시운전사 프랑크를 만나게 된다. 프랑크는 신경계 질환을 앓고 있었고 그로 인해 수면발작과 수면장애, 탈력발작 증세를 겪으며 일상을 버티고 있다.

 

범인의 사적 복수심은 분명 에릭을 향해 있고,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그의 모습은 수상하기 짝이 없으며, 그 와중에 갖은 핍박을 받으며 수사를 하는 마누엘라의 고군분투는 어떤 면에서 애처롭기까지 하다. 범인은 물과 관련되어 에릭과 어떤 연관이 있어 보이고,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라비니아는 프랑크를 만나 위로를 받지만, 그들은 각각의 이유로 여전히 외롭기만 하다. 그렇게 각각의 인물들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자신만의 플롯을 차곡차곡 쌓아가다 맞닥뜨리게 되는 조그만 반전은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고, 범인과 피해자의 내면까지 리얼하게 그려내는 심리 묘사는 공감과 이해를 불러일으킨다.

남녀 무용수가 두 개의 몸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이듯이 남자도 녹아서 여자와 하나가 되었다. 그의 심장도 여자의 박동에 맞추어 같은 박자로 뛰었다.

여자 얼굴은 그의 얼굴과 겨우 1센티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여자는 크게 치켜 뜬 기괴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자기가 당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그 눈은 그저 불안과 공포로 가득했고, 눈앞에 닥친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둘은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춤이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사라진 소녀들> <창백한 죽음>, 그리고 <지옥계곡> 이은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네 번째 국내 출간 작이다. <사라진 소녀들>에서는 시각장애인 소녀의 실종사건을 통해 인간의 사악한 본능에 대해 그렸었고, <창백한 죽음>에서는 소시오 패스의 실체를 생생히 추적해서 수사하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지옥계곡>에서는 절친이었던 친구들간의 관계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멀어지는데, 모두 다 악인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더 나쁜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었다. 세 작품 모두 겉으로는 평범하지만 그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내면을 집중적으로 묘사해 숨어 있는 악을 그리고 있으며, 빠르게 진행되는 이야기가 매 장면마다 긴박하고 섬뜩한 공포를 느끼게 만들어 주었던 공통점이 있다. 아마도 그래서 그를 심리 스릴러의 제왕이라 칭할 것이다. 우리가 도덕성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얼마나 나약한 토대 위에 세워진 모래성 같은 것인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일상 속의 지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말이다. 그는 스릴러와 호러를 오가며 인간 내면에 자리한, 가장 원초적인 본능과 악을 다루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언제나 말해왔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지옥을 겪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의욕 넘치게 일에 뛰어 들지만 혼자만 따돌림 당하며 겪는 마누엘라의 망연자실도, 친구를 잃고 몇 년간 불안감에 시달리는 라비니아의 공포도,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된 인간 관계조차 할 수 없는 프랑크의 외로움도, 품위와 명예와 자존심, 그리고 주변 사람들까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에릭의 허무함도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안드레아스 빙켈만은 매 작품마다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깊고 어두운 심연을 바라보며 그들만의 지옥을 그려내고 있다. 심리 스릴러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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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2-2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표지는 그림이 아닌가봐요. 이전 책들은 일러스트 (?) 같았던거 맞죠?

피오나 2016-12-21 13:11   좋아요 1 | URL
넹ㅎㅎ 사라진소녀들과 창백한 죽음은 뿔에서 나왔고요. 지옥 계곡과 물의 감옥은 비채에서 나왔거든요. 그래서 표지 이미지 느낌이 좀 다르죠^^

[그장소] 2016-12-21 18:35   좋아요 0 | URL
아.. 출판사가 달랐네요! 알려주셔서 감사~ ^^
저는 지옥계곡을 안봐서요. 그 전 뿔 것은 본거네요. ㅎㅎ

ICE-9 2016-12-24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피오나님 전작주의자시군요. 혼다 테츠야 때도 놀랐지만 설마 안드레아스 빙켈만도 다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피오나님 앞에서 전 감히 미스터리 매니아라고 말도 못 할 것 같네요. 저는 지금 ‘물의 감옥‘ 읽고 있는데 ‘지옥 계곡‘과 너무 다른 스타일이라 과연 빙켈만 맞나 하는 생각을 했네요. 피오나님 말씀대로 ‘심리 스릴러의 제왕‘답게 더 깊어진 심리 스릴러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피오나 2016-12-24 17:03   좋아요 0 | URL
전작주의자맞습니다ㅋㅋ 그래서 시리즈가 한두편 나오다가 말면..정말 아쉽더라구요. 괜찮은 작가의 시리즈도 많이 팔려야 계속 나올테니 출판사의 입장도 이해는 되지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