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시선 - 합본개정판 모중석 스릴러 클럽 2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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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노릇은 예술가 노릇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 불안정하고, 위선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하며, 남들이 자신보다 훨씬 낫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빠져 사는 어머니들.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고, 초인적인 인내심을 보여주는 어머니들. 아이들을 위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방과 후 놀이거리를 끊임없이 만들고 또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레이스는 그런 엄마들의 삶이 상당히 불행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레이스 로슨은 사진 현상소에서 가족 사진을 찾아온다. 그녀는 부모를 일찍 여의었고,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아이들이 어머니를 생생히 기억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추억을 만들어주려 무던히 애썼다. 그래서 가족 사진도 부지런히 찍었고 말이다. 그런데 찾아온 사진을 보던 중에 이상한 사진을 한 장 발견한다. 다른 사람의 사진 한 장이 직원의 실수로 잘못 전달된 걸까. 오래되어 보이는 그 사진 속 사람들 차림을 봐서는 십오 년이나 이십 년 전쯤 찍은 사진 같아 보였다. 남자 두 명, 여자 세 명, 모두 십대 후반이나 이십 대 초반 정도쯤 되어 보였다. 그런데, 사진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다 가슴 한복판이 찌릿했다. 그 중 한 남자가 남편의 얼굴처럼 보였던 것이다. 정말 이 남자가 잭일까? 저녁때 집에 돌아온 남편은 사진을 보고 당황하더니 밖으로 나가버린다. 문제의 사진과 함께. 처음에는 그저 쇼핑이라도 나간 건 줄 알았지만 그날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고, 그레이스는 경찰에 신고하지만 범죄로서의 단서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경찰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리 만무하다.

그렇게 그레이스의 시선을 따라 전개되는 이야기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이야기들과 동시에 진행된다. 코벤의 작품들이 언제나 그런 것처럼 우리는 이 두툼한 책의 반 정도까지 와서도 대체 이야기의 방향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과거의 이야기와 현재 벌어지는 그것이 어떤 연관이 있는 거 같긴 한데,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체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는 건지, 범인의 동기는 무엇이고, 현재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의 원인은 무엇인지 말이다. 그레이스는 십오 년 전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죽었던 보스턴 대참사의 생존자이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것이 현재 남편의 실종과 그 어떤 연관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당시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남자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어 유족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지만, 그게 그레이스의 남편 잭과 관련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말이다. 대부분의 스릴러 작품에서는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되면 전체 플롯이 대충 짐작이 되게 마련이다. 이렇게 흘러가겠구나. 정도의 예상이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범인이나, 이해할 수 없는 범죄의 동기에 대한 의혹과 함께 적당한 균형을 맞춰 준다고 할까. 하지만 코벤의 작품은 대다수 그 예측할 수 없음에 두꺼운 페이지들을 넘기는 원동력이 주어진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마치 중독처럼 자꾸만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다 후반부에 그 모든 퍼즐 조각들이 한번에 쫙 맞춰지면서 결말에 이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몇 번의 반전. 콰쾅. 이러니 우리가 코벤의 작품을 매번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절대 뻔하지 않으니까.

만약 그가 오늘을 피해 찾아왔더라면 비트리스는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우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인생을 확 바꿔놓는 것은 대부분 우리가 알지 못하고, 제어하지 못하는 작고 무의식적인 일들이었다. 운명이라고 불러도 좋고 확률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으며 신의 장난으로 봐도 무방했다. 어쨌든 우는 그런 것들을 즐겨 떠올렸다.

세상에 비밀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고 싶은 진실이 과연 사실인가.에 있다. 코벤의 작품 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한다. 그것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하나쯤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어난 '사실'과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거짓' 사이에서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방황한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욕망을 위해 가짜 진실을 만들어내는 것도 서슴지 않고, 또 누군가는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도 한다.

할런 코벤의 작품은 매끈하게 잘 만들어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같다. 수많은 등장 인물은 이리저리 얽히고 설켜있고, 결국에는 퍼즐처럼 연결이 된다. 복잡하고 다채로운 플롯은 막판에 가서야 단순하게 정리가 되며, 끝을 향해 달릴 때까지 지루할 틈이란 단 한 순간도 없다. 그러니까 마치 롤러 코스터를 탄 것처럼. 서서히 상승하는 이야기가 클라이막스에 치달을 때까지 계속 더 높이, 더 높이 가다가 어느 순간 일시에 해소가 되는 스토리이다.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모든 캐릭터와 사건이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에 페이지가 아무리 두꺼워도 멈추고 쉴만한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러니 그의 작품들은 대개 독자들과의 암묵적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한 판 게임이다.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약속된 장르의 법칙 아래 이야기를 전개해나갈 것이니 복잡하다고 토 달지 말고, 어디서 본듯한 설정이라고 비웃지도 말라는 선언에 동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코벤 표 롤러코스터의 레일을 성실하게 따라가면서 즐기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니까. 코벤의 작품에서는 평범한 설정과 익숙한 스토리마저 결국 우리네 삶을 비추는 예리한 거울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그저 공감하고, 감탄하고, 뜨끔하다가, 서글펐다가, 당황하고, 마지막으로 안도하면 된다. 사실 그게 우리네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 아닌가.

 

 

이번에 할런 코벤의 작품 목록을 정리 하다 보니, 스포츠 에이전트 탐정 '마이런 볼리타' 시리즈가 생각보다 꽤 많이 출간되었다. 그를 인기작가로 급부상하게 만든 시리즈라 그런지 농구선수이자 전직 FBI 수사관 출신의 주인공 '마이런 볼리타'에 대한 작가의 애정도가 충실한 것 같다. 물론 국내에는 무려 이십 년 전에 두 편이 출간되고는 이후 소식이 없지만 말이다. 국내에는 스탠드 얼론 작품들이 주로 출간되고 있는데, 어딘 가에서는 코벤의 시리즈 작품들도 좀 순서대로 출간해주시길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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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니 2017-01-26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위험한 계약을 읽었는데
그냥 그럭저럭 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손 놓고 있었는데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운 좋게 페이드어웨이는 소장하고 있는데 밀약은 구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피오나 2017-01-26 08:24   좋아요 0 | URL
저도 위험한 계약은 당시에 그럭저럭이었던 거 같아요. 오래돼서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면 다를래나요? 그나저나 페이드 어웨이도 가지고 계시군요. 부럽ㅋ
저는 비채의 모중석 시리즈로 만나면서 코벤의 작품에 빠져들게 된 것 같아요^^

쭈니 2017-01-26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운좋게 알라딘 매장에서 2000원쯤 주고 샀습니다.
근데 워낙 오래전 책이라 상태는 좋지 못합니다.




피오나 2017-01-26 08:46   좋아요 0 | URL
근데 뭐 출간된지 이십 년쯤 되면.. 새책을 사도 상태가 썩 좋지 않더라고요^^;;

물감 2017-01-26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런 시리즈는 호불호가 많더라구요~ 그래도 스탠드얼론은 평점이 좋은편이라 모으는 맛이 있네요^^

피오나 2017-01-26 09:13   좋아요 0 | URL
오..마이런 시리즈는 호불호가 있는 작품이었군요. 호불호가 있다고 하니 어쩐지 다시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ㅋㅋ 가지고 있는 책부터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디자인 유어 라이프
빌 버넷.데이브 에번스 지음, 김정혜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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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사전에는 주어진 목적을 조형적으로 실체화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당연히 디자인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실체이기 때문에, 목적과 의도를 선택하여 합리적으로 구성하는 창조활동의 결과물, 그 실체가 곧 디자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미학적 측면이나 사물의 외관은 디자이너들이 특히 많은 공을 들이는 분야지만, 단 하나의 정해진 답이 없다는 데 있다.

 

그리고 제품 디자인을 하는 저자는 바로 이런 부분 때문에 디자인 사고가 우리 앞에 놓은 삶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도와주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최상의 방법이 될 거라고 주장한다. 애플이 아이폰을 만든 것처럼, 페라리가 잘 빠진 스포츠카를 만든 것처럼, 당신의 인생도 훌륭하게 디자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 어떤 사람이고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직업이 무엇인지, 나이가 얼마인지는 전혀 상관없다. 이 책을 통해서 당신의 인생에서도 디자인 사고의 혜택을 확인하게 된다면, 당신 역시 잘 디자인된 인생을 찾게 될 테니 말이다.

 

우리가 흔히들 생각하는 아래 세 가지 항목에 대해, 저자는 시작부터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전공이 경력을 결정한다? 아니다. 전체 대학 졸업생의 75퍼센트는 전공과 관련 없는 분야에서 경력을 쌓는다. 그렇다면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다? 아니다. 참된 행복은 자신에게 맞는 인생을 디자인하는 데서 나온다. 어쩌면 이미 너무 늦었다? 아니다. 좋아하는 인생을 디자인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

 

 

이 책은 여섯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이틀 밤에 걸쳐 진행한 스탠퍼드 디자인스쿨의인생 디자인세미나에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수업에 몰입한 나머지, 강의가 끝난 후에도 떠나기를 거부했고 결국 강의실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 이후 학생들의 끈질긴 요청 끝에 정식 강의로 개설되어, 지금까지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수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대체 어떤 강의였길래 이런 놀라운 인기를 얻게 된 걸까.

"학생들이 대학 시절은 물론이고 졸업 후의 인생을 디자인하는 사악한 문제에 디자인 사고의 혁신적인 원칙들을 적용하도록 도움을 주는 과목을 가르칩니다."

"미래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내기 위해 디자인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인생을 디자인하려면 우선 디자이너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디자이너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길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인생을 디자인하기 위해 배워야 하는 다섯 가지 사고방식은 호기심, 행동 지향성, 재구성, 인식, 극단적 협력이다. 이 사고방식으로 무장할 때 원하는 삶은 물론이고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1.호기심을 가져라.

2.시도하라.

3.문제를 재구성하라.

4.인생 디자인이 과정임을 이해하라.

5.도움을 요청하라.

끝없는 호기심은 잘 디자인된 인생의 핵심이다. 행동 지향적인 사람은 무슨 일로도 수렁에 빠지지 않는다. 재구성은 관점이 변하는 것이고, 거의 모든 디자인 문제는 관점의 전환을 시도할 수 있다. 인생 디자인이 과정임을 인식한다는 것은 좌절하거나 길을 잃지 않으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극단적 협력은 인생 디자인 과정에서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렵지 않다. 다섯 가지 사고 방식이 전부다. 이런 사고방식을 당신의 삶의 방식에 적극적으로 적용해볼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 책에서는 인생을 디자인하는 여러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행복 일기> 라는 항목이었다. 일상 활동들을 일기로 기록하는 건데, '깊이 관여하고 에너지가 샘솟는 때가 언제인지, 혹은 관여하고 에너지가 샘솟는 순간에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확인'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매일 작성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며칠에 한번은 일기를 작성하고, 그 훈련을 3주간 계속하게 되면 '관여시키고 에너지를 생성시켜준 활동과 그렇지 못한 활동을 더욱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건 꼭 시간을 내어서 직접 실행해보고 싶은 항목이었다.

 

 

 

인생은 많은데, 시간은 부족하다. 그러니 먼저 향후 5년에 대한 각기 다른 세 가지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2년은 너무 짧아서 미래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다는 불안감을 유발하고, 7년은 너무 길어서 그때쯤이면 상황을 변화시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때문에 5년이다. 자녀를 양육하는 기간을 예로 들면, 유년기, 미취학 연령기, 10대 초반, 부모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청소년기로 이뤄진다.   

인생을 디자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여러 삶을 디자인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매력적이었다. 향후 5년에 대한 각기 다른 인생 경로를 상상하고 글로 표현하는 것을 '오디세이 계획'이라 부른단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시나리오가 최소 세개는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고 말이다.

 

 

 

잘 디자인되고 균형 잡힌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 하루를 네 조각의 파이처럼 생각해보자. 각 조각은 일, 건강, 가족과 친구, 놀이와 즐거움을 의미한다. 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삶의 영역이 어디인지는 자신만이 알 것이다.

 

내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한 후회, 그 모든 것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옅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내 삶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건지, 대체 왜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는건지 의심이 드는 건 어느 위치에 있건 마찬가지일테니 말이다. 인생을 디자인하라. 삶을 디자인하라. 디자이너처럼 생각하라. 그냥 말로 하긴 쉽다. 하지만 이들처럼 이렇게나 구체적이고, 상세하고, 실제로 해볼 수 있도록 문서화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저 이 책에서 제시하는 것들만 고스란히 따라가더라도, 당신의 내일이 어제와는 완전히 달라질 테니 말이다. 이 책은 특히  대학에 진학했지만 미래에 자신이 없는 학생들, 그리고 오랜 직장 생활에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매일 쳇바퀴 돌듯이 생활하고 있는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꼭 권해주고 싶다. 당신의 삶도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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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c Grammar in Use 3rd 세이펜버전
Cambridge University Press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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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머 인 유즈는 한때 영어 공부 좀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책이다. 문법에 관한 굉장히 여러 버전이 있지만, 그 어느 출판사의 그 어느 버전도 그래머 인 유즈의 명성은 따라 올 수 없는 것 같다. 해외 연수나 유학 등의 준비 시에 꼭 챙겨가게 되는 책이기도 하고 말이다. 특히나 이 책은 실생활에 밀접한 상황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법을 익힐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딱딱한 영문법에 질린 이들이라면 더욱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문법책을 세이펜으로도 공부할 수 있는 버전이 나왔다고 하니 굉장히 기대가 됐다. 사실 세이펜은 주로 아이들을 위한 책에서만 등장하던 아이템 아닌가. 종이책의 페이지를 펜으로 콕 짚는 것만으로 원어민 발음을 그냥 들어볼 수 있다니 세상 참 좋아졌다 싶기도 하다. 하핫. 

이 책은 Basic Grammar in Use의 새로운 개정판으로, 기존 판을 풀컬러로 전면적인 업데이트를 하여 새롭게 출간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세이펜과 함께 그래머 인 유즈의 명강의를 바로바로 들으면서 학습할 수 있어 졌다.

이제는 따로 시간내고, 비용을 들여 영어 강의를 들을 필요 없이 책과 세이펜만 있으면 평생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과, 공부하다 궁금한 부분을 바로 세이펜으로 찍으면 원어민 발음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편리성도 있다. 세이펜이 단지 영어 문장을 읽어주는데 그치지 않고, 문장을 번역하고, 문법 강의도 해주고, 연습 문제 풀이 설명과 해설까지 들을 수 있다.

 

 

게다가 알록달록 레인보우 컬러의 세이펜은 디자인도 너무 컴팩트하고 예쁘다. 다섯 가지 색상 중에 나에게 온 것은 밝은 오렌지 컬러인데, 아이가 보자마자 달려들어 만지작거렸을 정도로 눈길을 끄는 아이템인 것 같다. 충전은 동봉되어 있는 5핀 케이블을 통해 컴퓨터로 가볍게 할 수 있고 충전 시간도 짧아 이용하기에 편리했다.

 

세이펜의 앞쪽 센서 부분을 세이코드가 적용된 책의 페이지에 갖다대면 소리가 나는 방식인데, 블루투스 수신 연동방식으로 스마트 기기에 바로 연동해서 세이펜 음원을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는 세이고 기능과 핸드폰을 연결해 펜을 분실 또는 미아 방지를 할 수 있는 세이콜 기능, 그리고 안드로이드 기기의 앱과 연동하여 펜으로 책을 찍으면 스마트 기기에서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할 수 있는 세이패드 기능도 탑재되어 있다.

 사실 세이펜은 아이들의 동화 전집에 활용하는 것만 이야기를 들어왔기에,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린 아들이 사용할 일이 없어서 그 기능이 궁금하기만 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사용해보니 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세이펜으로 책 읽기를 권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너무 편리하고, 쉽고, 흥미를 유발시키기도 좋고, 디자인도 예뻐 눈길을 끌기에도 부족함이 없고 말이다. 그리고 MP3기능도 있어서 음원을 넣어서 들을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블루투스를 활용한 기능들이 눈길을 사로 잡았다.

세이펜이 이렇게 그래머 인 유즈랑 호환되면서 어린이 뿐만 아니라 성인까지 활용 범위를 넓혔는데, 굉장히 유용할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고 말이다. 무엇보다 너무 가볍고 손에 딱 맞는 사이즈라 장소에 구애없이 들고 다니면서, 지하철이나 카페 등에서도 쉽게 영어 공부에 몰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고성능 녹음 기능도 있어 공부를 하면서 사용자의 발음을 그대로 담아내주어 영어 발음을 직접 확인하고 교정할 수도 있고 말이다.

 

내가 만난 버전은 그래머 인 유즈 베이직 편이라 굉장히 기초단계 문법인데, 한글판이 아니라서 전부 영어로 되어 있다. 물론 그럼에도 간단히 직역이 가능할 만큼 쉽고, 알아보기 쉽게 짜임새를 갖추고 있어 부담스럽지 않고, 지루하지 않게 그림도 곁들여 있어 아이들이 처음 시작하는 영어 공부로 도전하기도 좋을 것 같다.

나 역시 내가 먼저 한번 복습하듯이 보고 난 뒤에, 아들이 조금 더 자라면 처음 시작하는 영어 공부를 이 책과 세이펜으로 쉽고 재미있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었으니 말이다

 

각각의 유닛은 딱 2페이지로 구성되어 있고, 필수 문법 사항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전체 116 유닛이면 가볍게 문법 책 한권을 마스터 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 전체 풀컬러 버전이라 지루할 수 있는 문법 공부를 조금 덜 지루하게 만들어준다고 할까. 풀컬러 그림들 덕분에 아이들도 더욱 집중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영어 공부! 언제나 늦었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다시 한번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그래머 인 유즈와 세이펜으로 말이다.

 

한때 영어 공부 좀 안해 본 이가 어디 있으랴. 학교에서 주구장창 주입식 영어 공부를 해왔고, 대학에 가서도, 직장에 가서도, 영어 공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따라서 많이 들으면 늘어지는 테잎부터, 음질이 좋아진 씨디, 그리고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엠피쓰리 파일과 영어 방송까지.. 꽤 많은 히스토리를 거쳐오면서 나름 영어 공부를 해왔지만 글쎄, 의지의 문제인지 방법의 문제인지 아직까지 꽤 만족스러울 만한 실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영어였다.

어쩌면 그래머 인 유즈와 세이펜과 함께라면 올해 다시 한번 새롭게 도전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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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드의 영역
쓰쓰이 야스타카 지음, 이규원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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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우주라는 말을 다들 한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우주에 지구만 생명체가 존재할 리 없으며, 평행하는 다양한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절대 갈 수 없는 것이 또한 평행선이다. 그것은 만날 수 없는 선이니 말이다. 평행이란 나란히 가는 것이기에 존재해도 서로 만날 수 없는 세상이다. 우리가 일백 번 고쳐 죽어도 다른 차원의 자신이나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는 없다. 물론 평행하는 우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도피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진짜 평행우주가 존재하고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될 두 세계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쓰쓰이 야스타카의 신작은 바로 그것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농담 같은 이야기이다.

가게 안에 빵 굽는 냄새가 가득 차고 반지하층에서부터 그 고소한 향이 거리로 흘러 나가 행인들이 고개를 살짝 쳐들고 코를 움찔거리는 개점 직전 시각, 시마가 반지하층에서 커다란 쟁반에 담아 매장으로 옮긴 바게트를 보고 마사히코는 낯이 창백해지고 가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매일 보던 동물 모양의 작은 바게트 수십 개 위에 단 하나, 떡 하니 놓여 있는 바게트가 인간의 한쪽 팔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게트로 구워진 여성의 오른팔 모양은 실물 크기에 길이는 40센티 정도, 팔꿈치 조금 위부터 곧게 편 손가락 끝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강변 둔치에서 미대 학생이 여성의 오른팔을 발견한다. 어깨부터 절단된 여성의 팔은 깨끗하게 절단된 것도 아니고 난폭하게 뜯겨진 것도 아니고 어깨에서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온 것처럼 보인다.  사건을 조사하러 현장에 나온 경찰과 대화하는 감식반의 쓰쓰미는 그것을 이렇게 평가한다. '아마도 하느님이 아담과 함께 만든 이브의 팔도 이렇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여기에는 평범한 여성의 팔에서 엿보이는 보편적 에로티시즘이 있다', 팔에 관한 자신의 의견 피력을 무려 두 페이지 가깝게 늘어놓는다. 손 페티시스트가 아닌가 싶을 만큼 말이다. 평범한 미스터리처럼 시작한 이 작품이 독특한 것은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다. 살해된 여성이 누구인가. 대체 왜 이런 범죄를 저질렀으며,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가.는 이 작품에서 중요하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여성의 오른팔' 바로 그 자체가 의미심장한 것이다.

뒤이어 한쪽 다리가 발견되지만, 행방 불명 된 여성 중에 그런 팔이나 다리에 어울리는 피해자는 없었고, 수사에 더 이상의 진척이 없을 때 경찰서로 기이한 메일과 투서가 들어온다. 아트베이커리라는 빵집에서 여성의 팔을 본뜬 바게트가 판매되고 있는데 그것이 강변 둔치에서 발견된 여성의 오른팔과 매우 흡사하다는 주장이었다. 아트베이커리는 미대생을 알바로 고용해 동물 모양의 바게트를 파는 걸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알바생 두 명이 휴가를 가면서 임시로 고용된 미대생이 그저 재미로 팔 모양 바게뜨를 만들게 되었다. 그것을 단골이었던 유이노 교수가 보고는 극찬을 하며 사가서 신문 칼럼에 그 이야기를 기고하면서 팔 바게뜨가 유명해진 것이다. 그런데 경찰이 찾아갔을 때는, 그것을 만들었던 미대생이 알바를 그만두고 연락이 안 되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갑자기 유이노 교수가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행동과 말을 하고 다니기 시작한다. 자신을 신 혹은 그것에 가까운 존재라고 주장하며, 무슨 일이든 뭐든지 안다고 예언 비슷한 말을 하며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글쎄 말했잖아. 나는 뭐든지 안다고."

"꼭 하느님 같네요."

오가와 요시미는 절반은 경악하고 절반은 야유하는 투로, 그리고 자신의 실책을 까밝힌 데 대한 분노까지 보태서 애써 웃는 낯을 꾸미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은 아니야."

교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그것에 가까운 존재이기는 하지만."

자신은 신이라며, 유이노 교수의 몸은 단지 빌렸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하고, 그렇게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공원에 모이는 사람들이 수백 명이 되고, 언론에서도 취재를 하러 오는 등 일대 난리가 난다. 그러다 한 남자를 가볍게 건드려 뇌타박상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고, 그 청년이 다음 날 멀쩡하게 일어났지만 일이 커져 재판에까지 이르게 된다. 자신을 신이라고 자처하는 과대망상에 빠진 이상한 남자와 벌이는 이상한 재판, 피고인에 대한 상해죄는 오직 그가 법정에 서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어찌되었든 법정은 그가 정신이상이라고 밝혀지지 않는 이상 그에게 구형을 해야 한다. 황당무계한 세계관처럼 들리는 것을 너무도 진지하게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이 이상한 이야기는 하나의 농담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굉장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힘도 느껴진다.

다중우주 또는 평행우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외에도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실제 과학자들이 말하는 평행 우주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의 끝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 어두운 에너지로 가득 찬 신비로운 풍경 속에 존재하는 세계, 또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공간 안에 있는 세계.

"나나 당신들이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가능세계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는 이야기 말이야. 여기가 단지 소설 속의 세계라고 하면 어떨까. 독자가 보자면 나나 당신들이 있는 이 세계는 가능세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겠지. 당신들도 알잖아. 여기가 소설 속의 세계라는 것을."

"역으로 말하면, 우리 세계에서 보자면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의 세계야말로 가능세계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도 있겠지."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이 세계가 다른 세계와 공간적으로 겹쳐져 있다는 설정 자체가 매혹적이다. 이 작품의 서두에 등장하는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출현한 이유에 대해 양자역학으로 설명하는 대목도 매우 흥미롭고 말이다. 한쪽 세계에만 존재하는 누군가가 다른 한쪽 세계에 등장하면서 변수가 발생하고, 그 결과 이 모든 혼란이 생겼다는 쓰쓰이 야스타카의 논리가 모두 설득력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발상 자체는 흥미롭기 그지 없다. 50년이 넘는 작가 생활 내내, 전에 없는 난센스와 블랙 유머가 작렬하는 작품들로 '쓰쓰이스트'라고 일컬어지는 열광적인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SF 작가답게, 자신의 최고 걸작이며 아마도 마지막 장편일거라는 말에 부합하듯이 이 짧은 작품 안에 굉장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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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엔딩 노트
tvN [내게 남은 48시간] 제작팀 지음 / 북폴리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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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당신에게 죽음이 배달된다면? 게다가 오늘은 바로 당신이 죽기 이틀 전이라면 말이다.

앞으로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48시간이라면, 그렇다면 지금 당장 뭘 해야 할까.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음식을 먹으며 어떤 마지막을 꿈꿔야 할까.

'가상 죽음 배달'이라는 이상하고 오싹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tvN의 프로그램 [내게 남은 48시간 : 웰다잉 리얼리티]이라는 방송이었는데, 가상 죽음을 소재로 게스트가 출연해서 48시간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남은 인생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그 취지였다. 방송을 보면서, 처음 죽음을 배달받는 그들의 모습이 (비록 연출된 것일지라도) 굉장히 무섭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결국 언젠가는 누구나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일이니 말이다.

 

아무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죽을 날짜와 시간을 알게 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숱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혹은 소설 속에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인물들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왔는지, 우리는 참 많이 만나 왔다. 하지만 그건 모두 '남의 일'이었고, 정작 '내게 닥친 일'이 아니었기에, 그저 강건너 불구경 하듯 무심히 보아왔던 것도 사실일테고 말이다. 그 어떤 불행도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만 않다면, 사람들은 또 아무렇지 않게 순간을 살아내는 존재들이니까.

이 책 <해피 엔딩 노트>는 방송에 출연한 그들이 48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의미 있는 행동을 하기 위해 계획을 적어 내려가고,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었던 버킷 리스트들도 작성했던 '엔딩 노트'이기도 하다. 나의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돌아보며 다양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내가 미처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며 소소한 행복들을 일깨워주는 노트이기도 하고 말이다.

나를 위한 처방전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을까요? 내 몸과 영혼을 위한 좋은 일, 지금부터 시작해봐요)

'나를 위한' 이라는 대목부터 참 머쓱해졌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아이를 쫓아다니고, 아이를 위해서 뭔가를 챙기고, 그리고 남는 시간을 쪼개어 집안 일을 해치우고,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의 밥을 차리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한밤중이 되어 버리는 나날을 벌써 이 년 넘게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너무도 바삐 사느라 나를 돌아볼 여유도, 거울 한번 제대로 볼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지내고 있었으니, '내 몸과 영혼을 위한' 일 따위야 내 삶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어떻게든 하루에 몇 자라도 책을 읽으려고 애쓰는 것이 그나마 나를 지탱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그마저도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하는 나날이기도 했고 말이다.

내일부터라도, 나를 위해서 하루에 단 몇분이라도, 시간을 내어 보고 싶다.

 

분노 유발자들 (어처구니없는 직장 상사, 예의 없는 이웃, 환경오염. 분노 유발자들 속에서 살아남는 나만의 생존수칙이 있나요?)

 

하핫.. 분노 유발자들을 기재하는 페이지에 이르고 나니 그저 유쾌한 기분마저 든다. 지난 연말까지 나의 분노 지수는 그야말로 최대 게이지에 달했고, 나를 화나게 하는 것들과 그에 따른 스트레스 지수 역시 폭발할 지경에 이르른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모든 스트레스를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누군가에게 풀지 못해 그야 말로 화병이 생길 지경이다보니, 잦은 두통과 소화 불량으로 고생하기도 했었다. 여기 노트에 그것들을 몇자 적기만 해도 화가 어느 정도는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뭐, 말 다했지. 올해에는 분노를 다스리는 나만의 생존방법을 좀 진지하게 강구해봐야 할 것 같다.

살면서 내가 가지 못했던 길에 후회와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때 당당히 아니라고 말할 걸, 그때 왜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았을까에 대한 자각은 꼭 지나가고 나서야 들게 마련이니 말이다. 가끔은 이미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기고, 육아와 가사일 때문에 직장도 그만둬버린 내 삶에 더 이상의 선택은 없을 것 같고, 이제 갈림길 앞에 설 일은 생기지 않을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노트에 기재되어 있는 것처럼 마냥 미련만 남기고 있을 게 아니라, 그때 내가 그랬더라면 뭐가 달라졌을까를 구체적으로 적으면서 정리를 하게 된다면, 그럼 후회라는 감정도 좀 더 옅어지지 않을까하는 기분도 든다. 뭐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은 실제보다 더 커지고 부풀어져서 기억 속에 저장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한때 임종체험이 유행처럼 매스컴에 소개되는 걸 보며, 신기해했던 적이 있다. 실제로 영정사진도 찍고, 유서도 작성하고, 입관까지 직접 해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지만 실제로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면하게 되는 순간은 진짜 그 날이 오기 전에는 절대 짐작조차 할 수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우리가 모두 언젠가는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내게 남은 48시간]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서, <해피 엔딩 노트>라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처음부터 한번 돌아보게 되었던 것 같다. 내 어린 시절은 어땠으며, 대학이라는 사회에 처음 부딪쳤을 때는 또 어땠고, 졸업 후 첫 직장 생활, 그리고 나를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인연들과 지금의 남편을 처음 만났던 순간,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났던 그 순간까지 말이다.

 

이 노트는 그렇게 나라는 한 인간의 삶을 처음부터 현재까지 돌아보게 만들고, 추억에 젖게 만들고, 설레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그러다 후반부에 오면 나의 장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유언장을 써야 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다. 죽음이 찾아오기 마지막 10초를 남겨두고,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했던 다섯 장면을 꼽아보고, 가족들과 지인에게 보내는 나의 장례식 초대장도 작성해보고, 초대할 사람의 명단과 연락처 리스트까지 기재하고 나면 정말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다. 진짜 마지막에 다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이다.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남겨질 반려동물과 가족들에게,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단 한사람에게 내 주변을 정리해주길 부탁하는 글을 쓰게 될 즈음에 이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노트의 무게가 묵직해지면서 비로소 진짜 나의 마지막과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이런 마음 가짐이라면 내일부터 나에게 오는 온갖 스트레스와 짜증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죽고 나면 만사 무용지물인 그것들에 집착하고 얽매여 있을 필요가 뭐 있겠는가. 새롭게 나에게 주어진 매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고 아까울텐데 말이다.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래서 소중한 것 같다. 아무리 어리석은 이라도, 아무리 대담한 이라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초연할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나의 남은 생이 마지막까지 해피 엔딩으로 그려지길, 조심스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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