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디토리움의 음반가게
김정범 지음 / 비채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음악으로 위로를 받게 되는 순간이 있다. 멜로디, 곡의 분위기, 노랫말, 그리고 그 음악을 들었을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억이 더해져 타인의 언어를 내 것처럼 느끼고 나누는 공감의 과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인과 헤어졌을 때, 시험에 떨어졌을 때, 혹은 사랑에 빠졌을 때, 친구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을 때 음악을 찾아 듣는다. 음악은 세상 저 밑바닥에 떨어진 듯한 절망을 위로해주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기쁨은 그 배가 되도록 더해주니 말이다.

팝재즈밴드푸딩’, 세계적인 뮤지션들과 협업하며 화제를 낳은푸디토리움의 뮤지션이자 작곡가, 그리고 <롤러코스터> <허삼관> 등 다수의 영화음악을 만든 영화음악감독이자 대학교수인 퓨지션 김정범이 일상 속의 음악들을 하나씩 소개해준다. 이 글들은 마치 조용한 한밤에 이불을 뒤집고 누워서 뒹굴거리면서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설레이게 만들었다. 나도 한때는 음악을 기어코 찾아서 듣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 시절에서 너무 멀어져 버렸지만.

이 책에 소개된 음악들은 무려 100곡에 이른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면 푸디토리움의 음반가게에서 특정 음악을 찾아 들을 수도 있도록 곡명들이 소개되어 있다. 계절에 따라서, 사운드트랙만 골라서,  위로받고 싶은 날을 위해, 명상과 사색의 순간을 함께할 수도 있고, 재즈와 헤비메탈, 발라드와 얼터너티브록 등 장르에 따라서, 피아노, 바이올린, 베이스 등 악기에 따라서 골라볼 수도 있고 재즈 오케스트라, 현악 사중주, 듀오 등 키워드로 찾아 볼수도 있고, 김정범이 작업한 음반과 그가 만났던 뮤지션, 그리고 그의 꿈이 시작된 계기를 만들어준 음악들도 골라 볼 수 있다.

나는 요즘 영화 '라라랜드' OST를 틈이 날 때마다 듣고 있다. 물론 거의 24시간을 아이와 함께 있어야 하기에, 제대로 시간을 내긴 어렵지만, 아이를 할머니에 맡겨두고 잠깐 외출할 때나, 아이가 잠이 들었을 때 등 잠깐 시간이 되면 항상 내 귀엔 이 음악이 흐르고 있다. 그렇게 음악을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고, 아드레날린이 막 솟구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겨우 음악을 들었을 뿐인데도 그저 벅찬 감정이 떠오르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영화의 장면들이 주었던 그 어떤 것이 내 안의 뭔가를 건드렸고, 그걸 상기시켜주는 도구가 바로 그 음악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처럼 한 트랙 한 트랙 넘어갈 때마다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가 어마어마했다고 김정범이 추억하는 음반은 러시아 클래식의 미래라고 불리는 작곡가 블라디미르 마르티노프의 것이었다. 그는 기본에 충실하고 정교하며, 뛰어난 멜로디와 감성으로 풀어져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그 음악에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경이로움을 느꼈다고 말한다. 나는 이 음악을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감동이 어떤 건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요즘 내가 그렇게 음악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김정범은 이번에 이 책의 출간과 함께 싱글 싱글 [AVEC]를 세상에 내놓았다. ‘푸디토리움이란 이름으로 앨범을 발표한 것은 무려 4년 만이라고 한다. 궁금해서 음악을 찾아서 들어 보았다. 일렉트로닉에 감성이 더해졌다고 하는데, 굉장히 생소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상반된 느낌이 드는 묘한 느낌이었다. 분명 색다른 사운드인데도 계속 듣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고 할까. 이 음악을 들으면서 '푸디토리움의 음반가게'를 읽고 있자니, 오래 전의 기억들이 솟아나기도 하고, 추억 속에 잠겨 어떤 음악을 흥얼거리게 하기도 하며 자꾸 나를 그 어떤 시간 속으로 데려다준다는 느낌이었다. , 음악이라는 것이 이런 힘이 있었다는 걸 그동안 내가 잊고 살았구나. 싶어서 안타까우면서도 새삼 두근거리는 기분이었다.

이 책은 2012년부터 현재까지 부산일보에 매주 기고한 칼럼들을 선별해서 모은 것이다. 음반이라는 주제로 쓰는 일주일의 이야기는 그에게 지난 시간을 담은 일기장과도 같다고 한다. 그는 삶과 음악이 만나는 '운명적 순간'에 집중하고, 그 경험을 나누고 싶었기에, 음악의 전문적인 용어들을 일부러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그저 일상을 그리고 있는 에세이처럼 편하게 읽힌다. 굳이 여기에 수록된 음악들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음악을 들을 시간도 없고, 음반을 찾아볼 마음도 없을 정도로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그 어떤 음악이든 듣고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시종일관 우리에게 "같이 들어요" 라고 속삭이고 있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한도전 컬러링북
무한도전 제작팀 지음 / 북폴리오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지금 무한도전은 7주간 휴식기에 들어가있는 상태이다. 당연히 결방하는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11년간이나 우리의 토요일을 책임져 온 국민 방송아닌가.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결방의 아쉬움을 달래줄 수 있도록 4주간 무한도전 멤버들과 함께 레전드 편들을 모아 보는 코멘터리 방송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그러자 어떤 기자가 <무도, 4주만의 컴백..재방송도 속절없이 좋구나>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는데, 어쩜 그리 무도 팬들의 속마음을 콕 찝어 냈는지 대단하다 싶었다. 재방송은 말그대로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질 만큼 알려지고, 볼만한 사람들은 다 본 코미디를 다시 보여준다는 얘기인데, 무한도전은 그런 방송조차 '속절없이' 그저 너무 재미있고, 좋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재방송 조차 너무 재미있는, 다시 봐도 여전히 빵빵 터지는 '무한도전'의 컬러링북이 이번에 북폴리오에서 출간되었다. 여섯 멤버들의 11년 간의 활약상을 한자리에 담아, 정교하고 유쾌한 컬러링 도안으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무려 1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500편 이상의 에피소드가 방송이 되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화제였고, 인기였고, 그래서 기억에 아직도 선연히 남아있는 65개의 에피소드가 컬러링북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한때 컬러링 북이 서점가에 열풍이었다. 국내에 출간된 컬러링북만 해도 200여종이 넘는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할 것이다.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 해봤음 직한 단순 색칠 놀이처럼 보이지만, 성인대상으로 나오다 보니 조금 더 복잡하고, 세밀한 도안들이 특징이다. 조해너 배스포드의 '비밀의 정원'으로 시작해서 국내에서 화제를 모으기 시작한 컬러링 북은 꽃과 나무, 동물, 정원, 인형 등을 정교하고 섬세하게 그려놓은 밑그림 위에 독자들이 직접 색을 덧입혀 완성하는 그림책이다. 도안만 그려져 있는 하얀 스케치북 같은 책에 색을 칠하다 보면 마음의 안정과 스트레스 해소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계속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조금 더 어려운 난이도의 그림을 찾게 되어 마치 문제를 푸는 것 같은 도전 의식이 또 다른 활력까지 주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무한도전 컬러링북은 정말 복잡하고, 세밀하고, 저절로 초집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주는 그야말로 컬러링북의 결정판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나처럼 한때라도 무한도전을 열심히 봤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동스레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에피소드들이 한 두개쯤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봅슬레이와 조정특집처럼 스포츠를 소재로 했던 에피소드들이 재미있었고, 영동고속도로가요제와 극한알바, 끝까지간다도 너무 재미있어서 열심히 봤던 기억이 난다. 그런 에피소드들을 집약해 한 장면으로 만들어냈는데, 멤버들의 캐릭터들도 너무 리얼하고, 당시 상황에 대한 깨알 묘사도 놀랍고, 단순히 컬러링북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정말 공들여 작업한 책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채색을 준비하는 내내, 그저 한번씩 훑어보는 동안에도 너무 유쾌해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회사에서, 가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길 없는 직장인과 주부들에게 적극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컬러링 북의 특성 상 채색을 하다 보면 한 순간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채색이 끝나고 나면 뭔가 완성했다는 뿌듯함마저 드니 일석이조이고 말이다. 컬러링 북이 정서를 안정시키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아트 테라피'의 일종이라고 하더니, 어느 정도는 맞는 말 같으니 말이다특히나 아이가 있다면 그림을 보여주면서 상황을 재미있게 설명해주고 나서 같이 채색까지 할 수 있어 더욱 다채로운 경험의 시간이 될 것 같다

 

, 그럼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에 그래도 가장 쉬워보이는 그림을 하나 골라 채색 준비에 들어갔다. 색연필 색상이 너무 많아서인지 오히려 뭘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한참 고민을 해야 했지만, 사실 컬러링북을 꼭 그림처럼 멋들어지게 채색할 필요야 없지 않은가. 물론 색감을 감각적으로 배치를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한 가지, 두 가지 색칠을 할수록 뭔가 더 고민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하핫.

채색을 하다 보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게 되어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그래서 컬러링북에서 다들 '힐링'을 찾겠다고 하는 거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잊고 사는 동심과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고, 독창적인 일러스트를 채색하면서 상상력도 키워가고 말이다. 컬러링 북은 스트레스 해소뿐만 아니라 일종의 '명상' 효과도 주는 것 같다. 괜히 '컬러링 테라피'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특히나 이 책은 무한도전이라는 국민 예능 프로그램을 고스란히 그림으로 구현하고 있어서 더욱 재미있게,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피곤하고, 지치고, 짜증나는 일들이 가득 쌓였을 때는 방송으로 무한도전을 보면서 아무 생각없이 웃어 보거나, 컬러링 북으로 색상을 마음껏 넣어 보면서 현실을 잠깐 떠나보는 건 어떨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린의 날개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을 일컬어 '가가 형사 시리즈 최고의 걸작'이라고 스스로 칭했다고 한다. 그 동안 이 시리즈를 모두 읽으며 가가 형사를 보아왔던 독자들이라면 기대가 될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이 시리즈도 벌써 아홉 번째 작품이다. 시리즈 캐릭터를 그다지 즐겨 사용하지 않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걸 감안하자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윗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아랫사람들이 생각할 필요는 없어. 우리가 할 일은 사실을 하나하나 밝히는 거야.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버리고 사실만 골라내다 보면 상상도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도 하지."

"사건의 이면에 의외의 진실이 있다는 말인가요?"

 

니혼바시 다리에서 중년의 남자가 가슴에 칼이 꽂힌 채 경찰에게 발견된다. 칼에 찔린 남자는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그 다리까지 걸어와 다리 중간쯤에 잇는 두 마리의 기린 조각상으로 장식된 기둥까지 가서 기도하는 자세로 쓰러진 것이다. 그리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내 사망하고, 곧이어 현장 근처 공원에서 한 청년이 경찰의 불심 검문을 피해 달아나다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불명이 된다. 그의 소지품에서 사망한 중년 남자의 운전면허증과 지갑 등이 발견되고, 자연스레 경찰은 청년을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한다. 청년이 너무도 쉽게 범인이 되나 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피해자의 회사에서 계약직 현장 근로자로 일하다 사고로 다쳤지만 산재 처리를 받지 못하고 계약 연장이 되지 않은 채 해고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복으로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혐의는 알리바이부터 증거까지 뭐 하나 들어맞지가 않고, 여론은 산재 은폐 기업에 대한 보도를 해대며, 회사는 그 모든 책임을 이미 세상을 떠난 피해자에게로 떠넘기려고 한다.

이 시리즈는 여덟 번째인 <신참자>에서부터 가가 형사의 비중이 많이 높아졌는데, 이 작품 역시 전작인 <신참자>와 마찬가지로 옛 도쿄의 정취가 어린 니혼바시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다 그 확장판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흡사하다. 니혼바시 일대가 워낙 서정적이고 사람 냄새 물씬 나는 풍경인데다, 가가 형사가 발로 뛰는 끈질긴 탐문 수사를 통해 그 일대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피해자의 행적과 동기에 대해 파헤치는 모습이라 더욱 인간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살인사건과 별 상관 없어 보이는 피해자의 알 수 없는 행적을 통해 밝혀지는 진실은 그의 가족에게 충격적인 파장을 던져주고, 살인사건의 동기와 범인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자식들과 소원했던 아버지가 가족들 몰래 신사를 돌며 해왔던 속죄와 구원의 기도,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해 감춰진 비밀, 어른이 어른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해서 벌어진 비극, 그리고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기고 싶었던 마지막 메세지까지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결코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인물들이 빚어내는 드라마는 매우 뭉클하게 다가온다.

"가가 씨가 본 것은 시체지 살아 있는 사람의 죽음이 아니에요. 저는 죽어 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봐 왔어요.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사람은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죠. 자존심이나 의지 같은 것을 다 버리고 자신의 마지막 소원과 마주하게 돼요. 그런 그들의 마지막 메시지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의무예요. 가가 씨는 그 의무를 소홀히 했어요."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손에서 태어나, 그의 작가 인생과 함께 20년이 넘는 캐릭터인 가가 형사 시리즈의 신작이다. 특히나 시리즈물을 주로 쓰는 작가가 아니라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라면 더욱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캐릭터이기도 할 것이다. 천재적인 수사 실력이나 뛰어난 직감 등을 가지고 있는 형사 캐릭터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많이 만나왔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는 따뜻한 캐릭터라 더욱 매력적이기도 하고 말이다. 가가 형사는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졸업>에서 형사가 아니라 교사를 꿈꾸던 대학생으로 처음 등장했다. 형사였던 아버지가 가정에 소홀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집을 떠났다고 생각했던 그는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하지만, 친구들의 연이음 죽음을 접하며 사건 해결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시리즈가 계속 진행되면서 가가는 교사를 사직하고 경찰이 되고, 현재까지 총 아홉 편의 시리즈가 출간되었다.

 

 

가가 형사 시리즈가 여타의 추리소설 시리즈물과 확연히 다른 차이점을 보이는 것 중의 하나는 이야기의 중심에 주인공이 있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사실 한 주인공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시리즈물일 경우, 그 인물의 개인사부터 시작해서 그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메인 플롯과 함께 성장해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시리즈 캐릭터를 필요 최저한밖에는 사용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그의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이 아니라 그 외 다수의 등장인물들 각각의 사연에 꽤 많은 분량이 할애된다. 살인사건이라는 메인 플롯보다 그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관계에 더 집중하는 방식이랄까. 그래서 읽는 동안 어쩐지 주객이 전도된 것 같다는 느낌도 들지만, 이상하게도 그 작은 모자이크 조각들이 모여 만드는 드라마가 매번 뭉클하고 따뜻하다.

히가시노 게이고 하면 한번 읽기 시작하면 절대 중간에 멈출 수 없는 속도감과 평범한 인물들이 벌어지는 사건에 어떻게 엮여서 살아가는지에 대한 감동이 먼저 떠오르는 작가이다. 취향에 따라 특별히 좋았던 작품은 있을 수 있겠지만, 이건 정말 별로다, 수준이 떨어지거나 재미가 없다라고 느낄만한 작품은 없는, 매번 일정한 수준의 작품을, 그것도 다작하는 작가이기도 하고 말이다. 밑줄 긋고 싶은 멋들어진 문장을 쓰지도 않고, 화려한 기교를 부리지도 않지만, 항상 인간에 포인트를 주고 그려내는 드라마라 감동을 만들어내는 작품을 보여주고 있는데, 가가 형사 시리즈야말로 정말 믿고 보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감 2017-02-21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인공만 조명받는 작품은 확실히 시들시들한 구석이 있죠. 근데 이 작가는 확실하게 캐릭터마다 잘 살리더군요! 그래서 몰입도가 좋은편인듯 해요^^

피오나 2017-02-21 14:13   좋아요 1 | URL
맞아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품에 등장하는 작은 역할의 인물들에게도 세세하게 신경쓰는 작가인 것 같더라고요ㅎㅎ
 
영혼의 무기 - 이응준 이설집
이응준 지음 / 비채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독히 싫어하는 단어 열 개로, 천국, 가족, 무지, 정치, , 율법, 영원, 희생, 속물들, 원망을, 지독히 좋아하는 단어 열 개로 비바람, , 나무, 짐승, 자유, 청춘, 해탈, 영혼, 고백, 그리고 김수영을 꼽는 작가, 이응준이 그 동안 자신이 세상에 선보인 산문과 혼자 간직하던 산문 들을 모아 이설집을 펼쳐냈다.

가을이다. 지하철 안 수많은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책은 고사하고 신문지 한 장 손에 쥐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나는 마치 우리가 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 타고 있는 듯한 착각에 소름이 확 끼친다. 내 직업이 책을 팔아먹고 사는 작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책을 외면하는 세상이 아니라 책에 대해 잘 모르는 세상이 다만 무섭고 슬픈 것이다. 책은 다양한 얼굴을 가진 물건이다. 책은 나무다.  푸르고 높은 아름드리나무로부터 책의 갈피갈피가 나왔으니 책을 품고 있는 우리는 푸르고 높은 아름드리나무를 햇살처럼 들고 다니며 그것 아래 고여 있던 그늘과 그것을 흔들던 비와 바람을 읽고 있는 셈이다. 뜻 깊은 책 한 권을 가진다는 것은 한 그루 영원히 자라는 영혼의 나무를 가진다는 뜻이다.

무려 팔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마치 벽돌처럼 두툼하지만 새빨간 표지의 도발 덕인지 너무 쉽게 읽히는 이상한 책 한 권을 만났다. 산문가도, 소설가도 아닌 이설가를 꿈꾸었다고 말하는 작가 이응준은 등단 26년차 시인이자 소설가이고 칼럼니스트이며, 각본가에 영화 감독이기도 한,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독특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예전부터 이응준이라는 이름은 익히 들어왔지만, 내가 그의 글을 처음 만난 것은 그의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년 전 신경숙 작가의 표절 의혹에 관한 길고도, 진중하고, 날카롭고 매서운 칼럼에서였다. 한국문단과 한국문학에 대한 그의 예리한 글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어쩌면 그런 글을 쓸 수 있었던, 다소 무모하고도 대담했던 용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신이 아니고서야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없으니, 우리는 악한 사람이기도 하고, 선한 사람이기도 하다고 말했던 그는, 그러나 악한 일과 선한 일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글을 쓴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신경숙과 그 자신이 죽어서 흙이 된 다음에도 한국어가 살아있는 한 한국문학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도 오래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그는 애정을 표현할 때도 과격하게, 분노를 표출할 때도 치열하게 글을 써내고 있다. 똑같은 책을 긴 세월 동안 반복해서 읽는다는 게 참 드문 일이지만, 자신에게도 그런 책들이 서너 권 있는데, 그 중 최고는 단연 <김수영 전집 2>이라고 애정을 보이고 있다. 책이 너덜너덜해지면 아무런 갈등 없이 새로 산 다음, 낡은 것은 화장실에 비치해두는 짓을 벌써 세 차례나 되풀이하고 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그는 <김수영 전집 2>를 백 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다만 주의할 점 한 가지로 좋아는 하되 닮지는 말 것.이라고. 왜냐하면 작가를 닮아 성격이 상당히 비뚤어질 수 있다며 자신이 그랬다고 마치 농담처럼 덧붙이고 있다. 그렇게 이 산문집은 무섭게 치열하지만, 능청스럽게 농담처럼 읽히기도 하고, 절절한 고백처럼 들리지만 정치와 세상과 문학에 대해 매우 논리적인 해설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소설을 황당한 이야기쯤으로 생각하곤 한다. "소설 쓰고 있네" "말 같지 않은 소리 집어치워라"는 뜻의 관용구인 것은 그런 까닭이다. 물론 때로 어떤 부류의 소설들은 황당한 이야기를 육체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된 소설이라는 전제 하에서, 소설은 황당한 이야기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려낸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뻥이 심한 친구에게 "소설 쓰고 있네?라고 타박하는 것은 기실, "넌 어쩜 그렇게 말을 말같이 하니"라는 칭찬이 될 수도 있다. 독자가 소설의 내용이 사실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의 구조 때문이다. 현대소설에 있어 이야기 자체는 공사장의 자재들일 뿐이다. 작가는 그것들을 가지고 설계도에 따라 이야기의 구조물인 집, 즉 소설을 짓는다. 소설가는 건축가이자 막 노동꾼이다.

신문 칼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평론, 시인, 소설가인 문인으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인터뷰, 대담, 그리고 그가 사랑한 문인들에 대한 글과 그의 독서 편력을 볼 수 있는 여러 책에 대핸 소개 글도 있고, 그의 반려견 토토와의 이야기는 정말 백미이다. 이응준이 또 애정을 표현하는 대상이 둘 있는데, '인생의 반은 토토이고, 나머지 반이 성호 형' 이라며, 시인 함성호 씨와 애견인 시추 토토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도 쏟아내고 있다. 재미있는 건, 그 두 대상을 가리켜 전자는 아예 말이 없고, 후자는 나한테만 하는 말이 너무 무섭고 황당한 소리들뿐이라며 말이다.

그리고 그의 내밀한 고백이 담긴 3년간의 일기도 있으며, 문학 파트너 시인 함성호와의 일화와 페이스북의 글등등.. 600편의 글. 멀게는 무려 2001년에 쓰인 글부터, 가깝게는 2016년에 쓰인 글까지. 압도적인 분량과 그 속에 담긴 너무도 자유 분방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의 내용은 이응준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후반부에 수록된, 그가 매일 남긴 일기이자 수기 같은 짧은 글들의 편린은 시간 순서대로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어 한 작가의 내밀한 부분까지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 '영혼의 무기'라는 엄청난 제목만큼 이 글이 누군가의 가슴에 와 닿아 그의 영혼을 일깨울 수 있기를. 요즘 같은 시국에 정말 필요한 전투적이고 치열한 이 글들이 상처받은 누군가의 영혼을 달랠 한 조각이 되어 주기를 바래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이킬 수 없는 약속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은 얼마나 먹먹한 표현인가. 우리는 지나가 버린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 누군가에게 준 상처도, 지나고 하는 후회도, 한번 내뱉어 버린 말도, 어긋나 버린 시간도, 이미 엎질러진 실수도.. 절대 돌이킬 수 없다.

[그들은 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서, 그때의 사카모토 노부코의 얼굴이 뇌리에 달라붙는다.

설마, 그때 한 약속을 지키라는 건가-?

말도 안 돼. 그런 약속을 지킨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잖아.

나는 편지지와 봉투를 꾸깃꾸깃 구겨 찢어버렸다.

무카이는 레스토랑 겸 바의 공동경영자로 일하며,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사업파트너인 오치아이는 15년 전 무카이가 바텐더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났던 손님으로 인연이 되어 현재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로 도착한 편지 한 통으로 그의 평화롭던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라고만 적혀 있는 편지는 온통 거짓으로 만들어진 무카이의 과거의 봉인된 기억을 차츰 끄집어 낸다. 어릴 때는 온갖 나쁜 짓을 죄책감도 없이 저질러 온 그였지만, 지금은 자신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인 아내와 딸이 있었으니 말이다. 무카이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를 잃을 수 없다며, 지금의 내가 과거의 그런 약속을 지킬 수는 없다고 애써 편지를 모른 척 해보려고 한다. 애초에 지킬 필요 따윈 없는 꺼림칙한 요구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의 과거에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과거를 외면하고 싶었던 무카이의 바램과는 달리 편지는 다시 도착하고, 지금 당신이 행복한 것이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며,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당신 주변에도 자신과 똑같은 재앙이 덮칠지도 모른다는 경고로 불안감에 휩싸인 그의 일상은 차츰 엉망이 되어 간다. 그는 덮어 두었던 자신의 과거를 찾아가 일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지 찾아 보려 하지만, 이미 시간은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가버렸고, 약속의 가치는 그가 현재 가진 행복만큼이나 높아져 있어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카이는 가족과 동료들에게 알리지 않고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그를 절벽 끝으로 내몰기만 한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깨닫기 전부터, 책장을 넘기면 이제 막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서스펜스는 이야기에 엄청난 긴장감을 부여한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한마디로 '한번 읽기 시작하면 절대로 쉽게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가 염려하는 주인공에게 무언가 끔찍한 일이 곧 벌어질 거라는 공포야말로 최고의 페이지 터너가 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소이니 말이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하게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목숨의 가치라는 게 다른 것 같다.

지금이니 드는 생각이지만, 그 무렵의 나는 내 목숨과 인생을 가볍게 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야 할 존재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게는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야 할 존재도 있다.

어린 딸이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범인이 체포되었지만 극악무도한 죄에 비해 가벼운 처벌을 받고 결국 십여 년 만에 사회로 복귀한다면, 그들에게 딸의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딸이 당한 능욕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잔학한 방법으로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마음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정말 실행에 옮긴다면, 대체 그 범인과 당신이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이 작품은 사적인 복수에 대해, 그리고 한 번 죄를 저지른 사람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지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회파 추리의 강자 야쿠마루 가쿠는 매번 묵직한 사회파 미스터리를 그려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용서와 복수라는 다소 어둡고 무거운 주제가 이렇게 술술 읽혀도 되나 싶을 만큼 수월하게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이 그의 작품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고 말이다. 이번 작품 역시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문제를 비롯해서 진정한 용서와 응징에 대해서, 그리고 전과자가 선택할 수 있는 삶에 대해서도 그려내고 있다. 사실 누구인들 과거에 저지른 잘못 한두 가지를 숨기거나 만회하려고 노력해보지 않았겠는가. 물론 그 잘못이라는 것이 사소한 것일 수도, 누군가의 생명을 좌지우지 하는 커다란 것일 수도 있을 테니 객관적으로 가치 판단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든 상관없이, 현재의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 사람인지도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항상 그랬든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은 매우 쉽게 읽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한동안 생각에 잠기게 만들어 준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