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력의 사람들
발레리아 루이셀리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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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간을 중첩시키는 일을 하는 소설가를 만났다. 소설을 쓰는 일이 시간을 중첩시키는 일이라니, 대체 무슨 말일까 싶었다. 시간이 겹치거나 포개어진다는 건, 여러 개의 시공간이 뒤섞인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현재에 또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는 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무릇 소설은 긴 호흡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소설가들이 바라는 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면서, 모두들 긴 호흡이 어쩌고저쩌고하며 떠든다. 나에게는 갓난아이와 중간 아이가 있다. 두 아이들 때문에 숨 쉴 틈조차 없다. 내 글은 모두 짧은 호흡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숨이 가쁘다.

여자는 갓난아이와 중간아이, 그리고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두 아이들이 잠이 든 깊은 밤에 글을 쓰고 있다. 예전에는 밤낮 가리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몸이 내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이렇게 밖에 시간을 낼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이들을 돌보다가도 여유만 생기면 언제나 소설을 썼다.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 이유였으니 말이다. 남편은 주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지만, 티비 광고 문안이나 시를 쓰기도 한다. 그녀가 현재 쓰고 있는 글은 자신이 과거 뉴욕의 어느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던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쓰인 소설이다. 번역가 겸 도서 검토 위원으로 일하던 그 시절, 시간 속의 관계와 상황들을 그리고 있으나, 물론 그것이 모두 자전적인 것에서 기인하는지, 어느 정도의 허구가 섞여 있는지, 혹은 모두 상상 속의 이야기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우리는 그녀의 글을 수시로 훔쳐 읽고 과거사를 의심하는 남편처럼, 아마도 그것이 실제로 그녀의 과거에 벌어졌던 일들일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야기는 그렇게 아이들을 돌보는 가운데 틈틈이 시간을 쪼개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소설 쓰기에 매달리는 여자의 현재와, 그녀가 쓰고 있는 소설이 극중극 형태로 교차 진행된다. 소설 속 그녀가 출판사에서 하던 일은 당시 미국 문단에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주옥 같은 외국 작품을 발굴해 내는 것이었다. 문학이 설 자리를 읽어버린 비참한 위상이 단적으로 그려지는 그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마침내 한 작가를 발견하게 된다. 파멸과 붕괴에 맞서기 위해 글을 썼던 힐베르토 오웬이라는 작가였다. 그리고 이야기는 멕시코의 무명 시인 힐베르토 오웬의 그것으로 펼쳐진다. 그녀가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다니면서 그의 글을 읽고, 중요한 내용을 메모지에 적어 나뭇가지에 붙이면서 여러 계열의 시간과 공간이 그만큼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에즈라 파운드... 그렇게 예술가 유령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녀의 삶 속에서 그들은 무중력의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널찍한 집에서 우리 식구들은 가끔 숨바꼭질 놀이를 한다. 그런데 보통 숨바꼭질과는 놀이 방식이 좀 다르다. 일단 내가 숨으면, 다른 식구들이 찾아야 하는 식이다. 숨바꼭질 놀이는 때로는 몇 시간씩 걸리기도 한다. 나는 벽장 안에 숨어 다른 삶, 그러니까 나의 것이되 동시에 나의 것이 아닌 어떤 삶에 관해 장문의 글을 쓴다. 내가 숨어 있다는 걸 기억해낸 사람이 나를 찾아내고, 중간 아이가 '찾았다!'라고 소리칠 때까지 놀이는 계속된다

한편 멕시코 영사관에서 서기로 일하는 오웬은 병마와 고독, 좌절과 가난에 시달리며 생의 남은 나날을 버텨내고 있다. 이야기가 오웬의 목소리로 전개되면서 시간은 192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여자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오웬의 유령을 만나게 되고, 오웬은 지하철에서 빨간색 외투에 다크 서클이 짙은 미지의 여성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지하철을 새로운 시간이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설정한 것 또한 굉장히 매혹적이다. 현실과 과거의 시간이 겹쳐지고, 실재와 허구의 이야기가 중첩되면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간의 흐름을 그려내고 있었다. 현실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작품 속의 작품 이야기로 들어가더니, 그 속의 인물을 다시 바깥으로 끄집어내서 유령들이 실재하는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만들다니, 놀랍기 그지 없었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거장 하면 보르헤스, 움베르토 에코, 카프카, 베케트, 제임스 조이스, 마르케스 등이 먼저 떠오른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환상의 요소를 가미한 작품도 있고, 언어와 구성에 실험성을 도입한 작품도 있고,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해서 현실에 꿈과 마술적 요소를 혼합한 작품들도 있지만, 사실 내게는 좀 만만치 않은 작가들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멕시코의 작가 발레리아 루이셀리의 첫 번째 소설인 이 작품은, 기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서사에서 많이 벗어나 있고, 쓰인 방식 역시나 어렵지 않게 쉽게 다가와 신선했다. 그러면서도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이 분명해 매우 평범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 매혹적이기도 했고 말이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가장 신선한 목소리'라는 홍보 문구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내게도 굉장히 신선한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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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나 오래 기다렸던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나왔다.

 

 

 

국내 최초 출간이라는 타이틀이 있지만, 사실 오래 전에 시리즈의 네번째 작품인 <웃는 경관>이 국내에 출간된 적이 있다. 2003년에 출간되었으니, 무려 14년만이다.

 

어쨌건 엘릭시르에서 다시 출발하는 시리즈라 전체 10권을 모두 다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아, 매우 기대가 된다. 벌써 번역은 5권까지 다 끝났다는 소문도 있고 말이다. ㅋㅋ

 

 

3대 북유럽 경찰 소설을 보통 헨닝 망켈의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와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에들란두르> 시리즈, 그리고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로 꼽는다. 특히나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요 네스뵈와 스티그 라르손 등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요 네스뵈는 이 시리즈를 일컬어 "범죄소설의 모범"이라고 했다.

 

 

국내에 출간된 헨닝 캉켈의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이다. 빠른 전개와 극적인 구성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북유럽 특유의 감성과 분위기가 매우 문학적인 시리즈가 아닐 수 없다.

 

 

국내에 출간된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에들란두르> 시리즈이다. 물론 지금은 모두 절판된 책이라 구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뭐 이미 읽어본 이들도 꽤 많을 거라고 짐작한다. 지금은 아이슬란드 작가들의 추리 소설이 몇몇 출간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매우 신선한 분위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자, 다시 <마르틴 베크> 시리즈로 돌아오면.. 국내 첫 정식 출간 기념으로 스페셜 패키지로 구매할 수 있다. 물론 특별 한정판이니 소진되면 종료된다.

 

 

책을 구매하면 이렇게 특별 제작 봉투에 담겨져 있다. 각각의 패키지 구성 엽서, 메모지와 함께 말이다. 내 돈 주고 내가 사면서 꼭 선물 받는 기분이라 포장을 뜯기 전부터 설레었다. ㅎㅎ

 

 

<로재나> 패키지 구성이다. 작가가 한국 독자들에게 남기는 멘트가 쓰인 엽서 뒷면에는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스톡홀름 지도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마르틴 베크의 범죄 수사 메모지.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패키지 구성이다. 역시나 엽서와 메모지가 함께 들어 있는데, 메모지의 프린트가 두 책이 달라서 소장용으로 더 가치가 있다.

 

워낙 유명한 시리즈이기에 그렇지만, 시리즈의 첫 번째, 두 번째 작품 모두 서문부터 화려하다. <로재나>의 서문은 헨닝 망켈이 썼고,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의 서문은 밸 맥더미드가 썼다.

 

 

책의 옆면을 보면 제목 옆에 마르틴 베크(Martin Beck)의 M과 A가 보인다. 시리즈 10권을 모두 다 모아서 한꺼번에 세워두면 Martin Beck가 될 것이다. 원서의 책등은 이렇다. ㅎㅎ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한 출판사에서 내는 다른 잡지에서 각자 일하다가 만나게 되었고, 예전부터 품고 있었던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다 함께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스웨덴 사회가 십 년에 걸쳐서 변해가는 모습을 기록하고자 했던 그들은, 이 시리즈를 처음부터 10권의 이야기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열 권의 시리즈는 사실상 삼백 개의 장으로 이뤄진 하나의 긴 소설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렇게 일 년에 한 권씩 완성하여 십 년 만에 시리즈가 마무리 되었다.

 

이 책을 열일곱 살에 처음 읽었다는 헨닝 망켈은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로재나는 어느 면으로 보나 어마어마하게 매력적인 책이다. 이 자리에서 자세한 플롯이나 범죄의 해결에 관해 누설할 마음은 없지만, 한 가지만 짚어두겠다. 아마도 <로재나>는 범죄소설에서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이야기로는 최초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기가 자주 길게 이어진다. 로재나라는 여성을 살해하여 예타운하에 던진 범인에 대한 수사가 답답하게 답보하는 시기다. 그러다가 불과 몇 센티미터쯤 진척이 있는가 싶더니, 또 덜컥 멈춰 선다.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에게는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이 절망의 근원인 동시에 필요악이다. 참을성이 없는 수사관이란 중요한 도구 하나가 부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로재나>는 경찰의 근본적인 덕목, 즉 참을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이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소설이다. 생생하고, 간결한 세련미가 있으며, 교묘한 연출에 따라 플롯이 전개된다. 이것은 현대의 고전이다."

그리고 밸 맥더미드는 이 시리즈를 1979년 미국에서 미스터리 소설 전문 책방에서 처음 만났다고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책을 손에 넣는 방법은 내가 직접 가서 사 오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했다. 어마어마한 양을. 배낭에 담아 온 책들 중에는 빈티지 프레스 특유의 까만 표지를 입은 문고본 열 권이 있었다. 스웨덴의 부부 소설가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가 함께 집필한 열 권의 범죄소설이었다." 그는 즐리언 시먼스의 <블러디 머더>를 일고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이 사십 년 전에 처음 등장했을 때의 가치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경찰 수사물이라는 하위 장르에서 클리셰가 되다시피 한 갖가지 핵심적인 장치들이 바로 이 열 권의 소설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염세적인 한숨을 지으며 당연하게 여기고 마는 수많은 특징들이 바로 이들, 기자였다가 범죄소설가로 전업한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의 작품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 추리, 스릴러, 범죄, 경찰 소설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당장 이 책을 만나보길 바란다. 이 시리즈를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로 헨닝 망켈과 밸 맥더미드의 서문만큼 멋진 대답이 또 있을까 싶지 않은가. 이 시리즈 전체를 다 만날 수 있게 되어 너무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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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으니까, 오늘도 야식 - 힘든 하루를 끝내고, 내가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영혼을 달래는 혼밥 야식 만화
이시야마 아즈사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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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먹방 열풍이 뜨거워지더니 야식, 그리고 혼밥이 대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출근길 지옥철에서 시달리고, 회사에서 상사에게 한 소리 듣고,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기획안은 풀리지 않고, 연인은 속을 썩이고, 그렇게 종일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사람들에게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극대화가 된다. 그러고 퇴근해봐야 어두운 집에서 나를 반기는 건 아무 것도 없고, 대충 차려서 배를 채우고 거실에 앉아 멍하니 티비를 보고 있노라면 다음날 다가올 출근에 대한 압박으로 답답해지고 말이다. 이럴 때 나를 위한 야식, 나만을 위해 제대로 만든 혼밥이라면 정말 영혼까지 달래줄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요리를 하기 어렵다면, 북폴리오에서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것 같은 이시야마 아즈사의 야식만화 <수고했으니까 오늘도 야식>을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읽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넘어가고, 내가 뭔가를 먹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만큼 리얼한 야식만화이니 말이다.

낮에는 나가서 아르바이트, 야간에는 그림을 그리며 허름한 주택에서 여동생과 근근이 살고 있는 주인공의 유일한 낙은 바로 야식이다. 오늘 하루 열심히 일한 상으로 야간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에게 멋진 혼밥을 차려주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이 책에 소개되는 요리들의 레시피들이 전부 초간단, 대충대충, 뚝딱뚝딱이라... 요리에 '요'자도 모르는 사람들, 요리는 커녕 부엌에도 가보지 않은 귀차니즘, 혹은 야식이라는 걸 그다지 즐기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혹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라는 것. 게다가 또 얼마나 맛깔나게 표현되어 있는지... 몇 페이지 넘기다 보면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가고 만다.

굳이 흰 쌀밥과 정갈하게 차려진 반찬과 국이나 찌개만이 혼밥을 위한 진수성찬이 아니라는 거다. 갓 지은 밥에 팽이버섯 조림과 김을 얹고, 날계란을 톡 깨뜨린 다음 간장을 조금 넣는 것만으로도 근사한 한끼가 될 수 있고, 슈퍼에서 산 평범한 고로케도 마요네즈와 우스터소스를 듬뿍 가미해 크림 고로케 샌드위치로 변신할 수 있다. 양배추와 폰즈 소스로 볶은 후 가다랑어포와 참깨 가루를 뿌리고 ,매실장아찌만 조금 곁을여도 근사한 반찬이 되고, 가지와 피자 소스, 그리고 치즈만으로도 초간단 피자를 만들 수 있고 말이다.

어쩐지 이런 야식이라면 두 그릇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을 것만 같다는 환상마저 들게 할 정도로 마음을 온통 빼앗기는 요리만화가 아닐 수 없다. 이상하게 내 입맛에 꼭 맞는, 맵지도, 그렇게 짜지도, 지나치게 달지도 않으면서 조미료 하나 안 들어가도 감칠맛이 돌것 같은 그런 야식들이니 말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는 날,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누군가의 옷차림조차 견딜 수 없을 만큼그냥 다 그만두고 막 망가져 버리고 싶은 날, 그런 날 이 만화에 등장하는 야식을 한 가지만 만들어 먹어보자. 방법은 레시피라고 할 것도 없을 만큼 초간단하고, 재료도 대부분 냉장고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니 어려울 것도 없다. 아마도 하루 동안 나를 스트레스 받게 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은 내일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은 여유로움이 생길 수도 있고 말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나는 마치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을 먹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루 종일 아이와 부대끼며 지쳤던 마음과 온갖 스트레스들이 저절로 사라지는 기분도 들었고 말이다. 세상에 먹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뭐가 있겠냐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어떤 문제도 더 이상 껴안고 있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니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요리들은 우리의 허전하고, 외로운 마음마저 만져주곤 한다. 내일이 또 오늘 같이 반복될 거라는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서 또 스트레스 받고, 짜증내고, 지쳐갈 거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그런 시간들 뒤에 나만을 위한 이런 야식이 있다면, 그렇다면 조금은 힘을 내고 싶어지지 않을까. 맛있는 음식은 우리를 잠시나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곤 한다. 그렇게 되면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 거리들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요리들은 크게 한 끼 식사, 간단한 반찬, 달달한 음식, 여러 가지 야식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정말 말도 안 되게 간단한 레시피만으로 이렇게 마법같은 음식을 그려내는 게 놀랍기만 했다. 크림 고로케 샌드위치, 잔멸치 양하 찻물밥, 너트와 크림치즈를 얹은 따끈따끈 빵, 김치전골 죽과 간단한 오이무침, 날계란을 올린 우동, 계란과 민스와 양배추 케첩 덮밥은 근사한 한끼 식사였고, 봄철 양배추와 매실 가다랑어포 무침, 쫀득한 가지 피자, 가을연어와 느타리 호일찜, 양배추 시오콘부 무침은 정말 초간단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반찬들이었다. 호박 잼을 곁들인 아이스크림과 산뜻한 매실 젤리도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음식들이고 말이다.

아이가 생기고 육아에 나의 스물 네 시간을 다 쏟아 부어야 하는 나날이 지속되니,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사랑스런 아이를 보는 것은 좋으나, 책을 제대로 읽을 시간도, 충분히 내 시간을 가질 여유도 없이 그저 아이만 쫓아다니다가 하루가 다 가버리곤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내 생활은 아이의 삼시 세끼를 챙겨주는 데 맞춰졌고, 겨우 아이에게 저녁을 먹이고 나면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의 저녁상 차리기 바쁘고, 그 후에는 아이 목욕시키고 재우느라.. 사실 나를 위해 요리를 한다거나, 제대로 된 밥을 차려 먹은 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야식은 커녕, 저녁도 제대로 못먹고 지나가는 나날이라고 할까. 

그런 나였기에 이 책은 단순히 야식만화가 아니라 잊고 있던 내 식욕을 일깨워 주고, 식사의 소중함을 새삼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멋진 책이었던 것 같다. 하루 종일 수고한 당신에게, 오늘만큼은 다이어트를 잊어버리고 나 자신에게 멋진 야식을 한번 만들어주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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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때 천사였다
카린 지에벨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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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언젠가 한번은 죽는다. 하지만 그 언젠가를 당장 몇 개월 뒤나, 며칠 뒤로 예상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비극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 여기며 자신은 늘 안전한 곳에,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믿고 있겠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이 완전 오산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삶이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으니 말이다.

프랑수아는 아주 서서히 자신의 실존이 이제 종점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생에서 쌓아 올린 커리어나 재력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사생활을 돌보지 않으면서 커리어를 쌓기 위해 분투했지만 결국 부질없는 짓이었을 뿐이다.

변호사 프랑수아는 조금이라도 계급 사다리의 상층부로 올라가기 위해 미친 듯 일만 하면서 살아 왔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뇌종양을 앓고 있으며 수술도 불가능한 상황이며 항암 치료를 하지 않을 경우 남은 시간이 몇 달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가난한 형편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며 뒷바라지 했는지 알기에, 성공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자신의 시간 대부분을 오로지 일을 하느라 다 소비하며 살아 왔던 그였다. 당연히 부모님에게 자주 찾아 뵙지도 못했고, 돈이나 값비싼 물건들만 던지듯 드렸으며 마음을 다해 표현하지도 못했었다. 오로지 궁핍한 삶에서 벗어나야겠다는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놓치거나 간과해버린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지만, 이제는 남은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냔 말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마음 놓고 웃어본 게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라니, 그의 일상이 어땠을 지는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프랑수아는 병원을 나와 아내와 사무실 동료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리옹 인근에서 히치 하이킹을 하는 폴을 만나 어쩌다 보니 동행을 하게 된다. 스무 살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폴과 마흔 일곱의 죽음을 앞둔 프랑수아는, 얼핏 보면 부자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 모두 딱히 목적지가 없는 탓에 발길 닿는 대로 길을 다니고, 숙소를 잡아 쉬고, 다시 길을 떠난다. 그렇게 두 남자의 로드 무비처럼 흘러가던 이야기는 폴이 살인청부업자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급변하게 된다. 폴이 가지고 있는 마약 때문에 총격전이 벌어지고, 하마터면 두 사람 모두 죽을 뻔한 고비도 넘기면서 프랑수아는 생애 처음으로 이상한 모험을 겪게 된다. 폴을 쫓는 패거리들을 당장 경찰에 신고하자고 하는 프랑수아, 절대 경찰은 믿을 수 없다며 그들에게서 훔친 마약을 몰래 팔아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겠다는 폴. 그들 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도, 가치관도 극과 극이다. 폴은 이번 한 건만 제대로 마무리되면 이 바닥에서 완전히 손을 씻겠다고 하지만 글쎄, 그 전에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만만치 않아 보이니 말이다.

현재란 곧 죽음이다. 플로랑스는 죽었고, 그도 곧 죽으리라. 요즘은 밤마다 죽음을 상대로 싸우다가 현기증 나는 추락을 맛보곤 한다. 마지막 여행길에 나선 그에게 표지판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라고는 애송이 녀석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주 중인 녀석이다. 아무리 도망쳐도 그는 결국 죽음을 맞아야 할 테지만 녀석은 살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카린 지에벨은 국내에 출간된 작품이 꽤 많은 작가이다. <빅 마운틴 스캔들>, <그림자>, <너는 모른다>, <마리오네트의 고백> 등 기존에 만나왔던 작품들은 심리 스릴러의 귀재라 불리는 그녀 답게 꽤나 두툼한 분량을 자랑했다. 그런데 이번 작품 <그는 한때 천사였다>는 우선 분량부터 많이 차이가 날 정도로 작아졌다. 그리고 전개방식과 분위기도 매우 달라졌다. 기존 작품들이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 패스가 주요 인물로 등장해서 인물의 심리 묘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스릴러였던 반면에, 이번 작품은 평범한 두 인물의 로드 무비 형식으로 진행되어 매우 빠른 전개가 돋보인다. 사실 기존 작품들에선 다소 지루한 부분들도 어느 정도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군더더기 없이 마치 영화라도 보는 것처럼 한 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달려나가는 플롯이라 제대로 페이지 터너로서의 면목을 뽐내고 있다. 분위기가 너무 달라져서 약간 기욤 뮈소의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지루한 건 딱 질색이라 기존 작품 보다는 이번 작품에 한 표를 던져주고 싶다.

 극중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프랑수아의 삶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지지만, 그는 짧은 시간 동안 아들처럼 함께 지내온 폴이 꼭 살아야 한다고, 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이런 말을 한다. 사탄도 원래는 천사였다고. 신이 인간들에게 부정적인 에너지로 시험에 들게 하고 저항하는 법을 알려주려는 의도로 사탄을 보낸 건데, 사탄인 루시퍼는 인간에게 부정적인 기운을 불어넣어주다 보니 그 자신이 죄에 물들게 되었던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신은 이미 사탄을 용서했고, 사탄도 다시 천사가 될 거라고. 폴이 어린 두 동생들을 고아원에 보내고 앵벌이, 날치기, 도둑질 등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다가 마피아 조직의 킬러가 되어 결국 그들이 시키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불법적인 일을 하게 된 것이 그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불행한 삶을 살아오며 암흑가를 전전해온 것을 마냥 개인의 부도덕이라고만 치부하지 않고, 비정한 사회시스템에서 찾으려는 작가의 의도가 성서의 사탄과 타락한 천사로 연결되어 한 편의 근사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 같다. 그녀의 다음 작품은 또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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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소원
톤 텔레헨 지음, 김소라 그림, 유동익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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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는 한숨을 쉬었다. 당연히 아무도 안 올 거야.

편지를 침대 옆에 내려놓고 등을 대고 누웠다.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슬펐다. 외로움은 나에게 속한 거야, 내 가시처럼.

혼자 사는 고슴도치는 외롭다. 그의 집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누군가 지나가다 문을 두드리더라도 고슴도치가 문을 열까 말까 너무 오래 망설이는 바람에 그 누군가는 다시 가던 길을 가 버리곤 했다. 이제껏 그 누구도 초대해 본 적이 없었던 고슴도치는 어느 날, 밖을 내다 보고 앉아 있다가 생각한다. 누군가를 한번 초대해볼까?

보고 싶은 동물들에게, 모두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안 와도 괜찮아.

고슴도치는 편지를 써놓고는 계속 고민한다. 편지는 안 보낼 거야. 지금은 아니야.

아마 다들 못 온다고 할 거야.

내일 모두 올 거야. 모두 다 같이.

스스로에게 자신은 정말 외롭지 않다고 거울을 보며 말을 건네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슴도치는 외롭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한 발 다가가기가 너무도 두렵고, 어렵기만 하다.

고슴도치는 여전히 침대 및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여기가 제일 안전해, 외롭지만 안전해.

여기선 나 때문에 불편할 일도 거의 없어.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는 고슴도치처럼 그랬던 것 같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반이 달라지니,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데 또 마음 맞는 친구를 찾아야 되는 상황이 매번 부담스러웠으니 말이다. 단짝 친구랑 학년이 바뀌고 나서도 서로 같은 반이 되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으니, 나는 매번 새 학년에 올라갈 때마다 걱정에 휩싸이곤 했다. 그래서 새로운 학년의 새로운 반에서 첫날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모르는 친구들만 가득한 교실에서 내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펼쳐놓고, 아무도 다가오지마! 라는 표정을 한 채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겉으로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책을 읽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한 해를 또 재미있게 보내려면 마음 맞는 친구 한 명은 최소한 필요한데, 이번에는 또 어떤 친구를 찾아야 하나 복잡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친한 친구가 생기고 나면, 그 친구가 나에 대한 첫인상을 꼭 이렇게 평가하곤 했다. 말도 걸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어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고 말이다. 어린 나는 그때 왜 그랬을까. 아마도 첫날 낯선 교실에서 다들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 텐데. 그러니 그렇게 혼자 강한 척, 관심 없는 척 안 해도 되었을 텐데 말이다.

<고슴도치의 소원>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줄곧 초등학교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먼저 다가가는 것이 두려워 가시를 세우고 있었던 나를, 사실은 외롭고 싶지 않았지만 안 그런 척 했던 나를, 실제로 행동하는 것보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들이 더 많았던 나를 말이다. 뾰족뾰족 가시 때문에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동물로 상징되는 고슴도치의 딜레마가 너무도 천연덕스럽고, 진지하게 그려지고 있는 이 작품은 동화라고 하기엔 너무도 공감할 부분이 많아서 그냥 짧은 소설처럼 읽힌다.

 

고슴도치는 숲에 사는 동물들을 초대하고 싶지만, 편지를 써놓고 보내지 못한 채 매일 같이 상상만 한다. 달팽이와 거북이, 장수하늘소, 코뿔소, 곰과 코끼리, 기린, 말벌 등등... 고슴도치는 친구들이 자신의 집을 찾아오고, 파티를 하는 모습을 그저 머릿속으로만 그려본다. 그리고 친구들은 고슴도치에게 말한다.

넌 정말 재미없어! 우리 그만 가자.

초대를 받고 왔어. 그런데 우리는 네가 무서워.

고슴도치는 고민한다. 나는 이상해. 겁을 주고, 외롭고, 자신감도 없어. 내겐 가시만 있어. 그리고 누군가 나를 찾아와 주길 원하면서 또 누군가 오는 걸 원하지 않아.............

가끔은 혼자이고 싶지만, 또 가끔은 절대 혼자이고 싶지 않은 게 대부분일 것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그걸 우정이든 사랑이든 어떤 형태로든 유지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너무도 피곤한 일인 것이 사실이니까. 그래서 먼저 다가가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 내게 다가와 손 내밀어주기를 바라기도 하고, 혹시 내가 하는 행동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서 다들 고슴도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랬어. 라고. 그래서 토닥토닥 위로해주고 싶은 기분도 들고, 안쓰러워 보듬어 주고 싶은 기분도 들고, 다들 그런 거라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질 것이다. 고슴도치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겪어 봤을 법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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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7-02-23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언가 마음 한켠의 외로움과 컴플렉스를 건드리고 공감하게 되는 책이네요, 덕분에 일단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좋은 서평 읽고 갑니다.

피오나 2017-02-23 10:13   좋아요 1 | URL
이 책이 딱 그렇더라고요. 누구나 마음 한 켠에 가지고 있는 감정을 건드려주는 책이었어요. 캐모마일님도 만나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