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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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가 그 아이들한테 바라는 게 뭘까요, 라모나? 그 스포츠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게 뭘까요? 거기에 평생을 바쳐서 얻을 수 있는 게 기껏해야 뭘까요? 찰나의 순간들........ 몇 번의 승리, 우리가 실제보다 더 위대해 보이는 몇 초의 시간, 우리가 불멸의 존재가 된 것처럼 상상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에요.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조그만 도시 베어타운은 해마다 점점 일자리가 사라지고, 인구도 줄고, 매 계절마다 숲이 혜가를 집어삼키는 곳이다. 이 곳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아이스 하키라는 스포츠에 대한 사랑이다. 주목할 만한 게 거의 없는 곳이지만 이곳이 하키 타운이라는 것만은 모든 주민들의 자랑이자 그들을 유일하게 흥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청소년팀의 준결승을 앞두고 있다. 아이들의 하키 경기가 중요해봤자 어느 정도겠냐 싶지만, 그 경기에 이긴다면 온 국민에게 이 도시의 존재를 다시 일깨울 수 있다. 정부에서 이곳에 하키 스쿨을 설립할 수도 있고, 주변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아이들이 대도시가 아니라 베어타운으로 몰려들 것이고, 그러다 보면 후원사들이 늘어나고, 도로는 물론이고 컨퍼렌스 센터와 쇼핑몰들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시합은 중요하다. 이 도시의 경제가 걸려 있고, 자존심이 걸려 있으며, 무엇보다 주민들의 생존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배크만은 <오베라는 남자> <브릿마리 여기있다>에서 매력 만점 노년의 주인공을 그려냈었고,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에서는 애어른 같은 일곱 살 소녀를 매혹적으로 탄생시켰었다. 그리고 마치 동화와도 같은 짧은 단편 소설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에서는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과 천천히 헤어짐을 배워가는 손자의 세상에서 가장 느린 작별 인사를 아름답게 그려냈었다. 이번 작품은 그 중 가장 두툼한 페이지를 자랑하는 묵직한 이야기를 들고 왔다. 게다가 첫 장부터 매우 강렬하게 시작한다. 어느 날 한 십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게 된 사연에 대한 이야기라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 주민들이 하키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쳐 있는 이곳, 베어타운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신기하다. 어떤 사람이건 사랑을 시작하게 된 기점이 있는데, 이 사랑만큼은 아니다. 항상 사랑했고 심지어 아이가 존재하기 전부터 그랬다. 아무리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도 엄마와 아빠들은 감정의 파도가 그들을 치고 지나가서 완전히 나가떨어지는 충격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 사랑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기에 불가사의하다. 평생 암실에서 지낸 사람에게 발가락 사이로 들어온 모래나 혀끝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그 사랑은 영혼을 비행하게 만든다.

 

키도 작고 근육도 없지만 그 누구보다 빠른 하키 신동 열다섯 아맛, 아이스링크 청소부로 일하며 아맛을 홀로 키우는 파티마, 체격과 손재주와 머리와 심장을 모두 갖춘 하키 팀의 에이스 열일곱 케빈, 하키팀의 거물급 후원자인 케빈의 부모, 케빈의 단짝이자 그를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잘생긴 얼굴과 슬픈 눈빛을 가진 싸움꾼 벤야민, 베어타운 하키단 단장 아빠를 두고 있는 열다섯 소녀 마야는 하키보다 기타를 더 좋아한다. 마야의 아빠 페테르는 이곳이 배출한 스타로 NHL까지 진출했던 하키 선수였다. 은퇴 후에 이곳으로 가족들과 함께 이곳으로 와 단장으로 일하고 있다. 페테르의 아내 미라는 변호사로 일하는 워킹맘으로 매사에 논리적이고 똑부러지지만,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하키에 평생을 바친 늙은 코치 수네, 곧 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젊고 패기 넘치는 다비드 코치 등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가장 큰 매력이 바로 캐릭터의 힘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작품이야말로 그의 장기가 유감없이 드러난 작품이라 하겠다. 그야말로 페이지 바깥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올 것만 같은 인물들로 가득한 베어타운에서 벌어진 비극이 더 가슴아프고, 와닿는 이유 또한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하키를 왜 좋아하느냐고? 하키에는 사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프레드릭 배크만을 왜 좋아하느냐고?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사연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오베라는 남자>에 등장했던 밉지만 짠한, 무섭지만 뭉클했던 쉰 아홉의 까칠한 오베,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의 나이에 비해 너무 성숙한데다 얄밉도록 지나치게 똑똑해서 왕따를 당하는 일곱 살 엘사, <브릿마리 여기있다>의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예순 셋 할머니 브릿마리.. 그리고 이번 작품 <베어타운>에 등장하는 페테르와 미라, 그리고 아맛과 마야에 이르기까지... 프레드릭 매크만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완벽하게 이야기 속으로 독자들의 손을 잡아 끈다. <베어타운>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 입에 척척 달라붙는 음식처럼 눈에 쏙쏙 들어오는 문장들,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노련한 구성과 스토리의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이제 프레드릭 배크만의 대표작은 <오베라는 남자>가 아니라 <베어타운>이 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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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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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 멘시크의 일러스트들은 삽화 정도의 느낌이 아니라 하루키의 글을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분량이 짧은 단편이지만, 그림책으로도 소장 가치가 있을 것 같은 예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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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버리기 연습 - 한국어판 100만 부 돌파 기념 특별판 생각 버리기 연습 1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유윤한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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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잡음이 현실감각을 완전히 지배할 대, 사람들은 둔해진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눈앞에 일어나는 일은 지나치게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에 별 볼일 없게 느끼고, 부정적인 생각이 주는 자극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은 새로운 자극을 얻기 위해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몰고 가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사고병, '생각병'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국내에 불었던 코이케 류노스케 열풍을 기억한다. 초판 표지였던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의 평온해 보이는 모습과 '생각 버리기 연습'이라는 제목에서 오는 어감이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지는 책이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나도 당시에 이 책을 읽었었고 특별판이 출간된 지금,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나는 과연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는 습관을 버릴 수 있었던지 돌아보게 된다. 실패를 자주 하거나 부정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생각이 많은 편이다. 지나치게 많은 생각이 사려 깊은 결정을 내리게 도와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부정적인 사고를 통제할 수 없게 해 마음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로 생각을 멈춰야 한다고 결심해도, 실제로 '생각 버리기 연습'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실행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책에서는 오감을 갈고 닦아 실제적인 감각을 강화시키는 연습을 통해, 생각을 자유롭게 조종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생각 버리기 연습을 통해 충전 시간을 가지고, 충전을 끝낸 뒤 예리함과 명철함으로 가득 찬 새로운 세계로 들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불교의 명상법이 생각을 다스리기 위한 트레이닝으로 무엇보다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잡다한 생각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해, 일상생활에서 습관을 다잡는 연습을 시작한다. 말하기, 듣기, 보기, 쓰기와 읽기, 먹기, 버리기, 접촉하기, 기르기의 영역으로 나누어서 바로 생활에서 해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다.  특히나 일반인들도 쉽게 할 수 있는 마음 조절법은 유용한 방법이다. '마음이 불안해지거나 긴장이 되면 일단 눈을 반쯤 감고,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는 걸로 시작하는데, 이런 게 뭐 대단한 거냐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순간이 찾아 왔을 때 이 방법을 떠올리고, 직접 실천해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 일단 시야를 차단하고 자기 마음의 움직임에 집중한다면, 그리고 자신의 호흡에 집중한다면 당신도 지나치게 많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소유하고 있으면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 마음이 늘 '이것은 내 것이다. 잃고 싶지 않다!'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기억이 잡음과 같은 생각을 일으키며, 무의식에서 마음을 어지럽힌다.

우리는 욕망에 쫓겨 불필요한 것을 쌓아두는 경향이 있다. 두 번 다시 읽지 않을 책을 서가에 늘 꽂아두고, 필요 없어 보이는 것도 거의 버리지 않는다. 버리기는커녕 필요 없어 보이는 것들이 점점 쌓여만 간다. 이런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항상 마음에 부담을 준다.     

2010년 한국어판 초판 발매 이후 100만 부 돌파 기념으로 이번에 특별판이 출간되었다. 코이케 류노스케의 <생각 버리기 연습>, <나를 지키는 연습>, <화내지 않는 연습> 세 권이 지금 계절과도 닮은 화사한 컬러의 표지로 새로 옷을 갈아 입었으니 누군가에게 선물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언제부턴가 자려고 누우면 이런 저런 생각들이 찾아와 쉽게 잠이 들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늘 시간에 쫓겨 생활하는 탓에 가급적 수면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인 생활 패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몸과는 정반대로 생각병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불면증까지는 아니지만 누워서 편하게 바로 잠에 드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정도로 피곤한 습관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만난 이 책이 더욱 반갑고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쓸데없는 생각의 잡음을 누르기 위한 명상법부터 일상생활의 소소한 습관들까지 제시되어 있어, 복잡한 머리 속을 비우기 위한 가이드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나도 생각의 잡음이 사라진 상태에서 하루를 상쾌하기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기분도 들었고 말이다. 생각하지 않고 오감으로 느낌으로써 어지러운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그렇게 뇌를 쉬게 할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생각이 많아 잠 못 이룰 때,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운 생각을 비우는 일상의 기술이 당신을 또 다른 세계로 이끌어 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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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모에가라 지음, 김해용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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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오리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은하철도의 밤》을 받아 들었다.

“미야자와 겐지는 도호쿠에서 성장기를 보냈어. 누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도쿄로 이주해 살았지만 단 한 번도 일본을 떠나본 적이 없었지. 그런 사람이 은하여행을 그린 책을 쓴 거야.”

가오리가 차창으로 들이비치는 아침햇살에 눈이 부신 듯 커튼을 반쯤 내리며 말했다.

가오리가 내 눈을 바라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어디로 떠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미야자와 겐지는 아마도 병든 누이와 은하여행을 떠나고 싶었을 거야.”

만약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어떤 시간 속으로 가고 싶을까 생각해 본다. 누구에게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 혹은 그런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게 첫사랑일 수도 있고, 뭔가에 대한 첫 번째 경험일 수도 있고, 잊을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모에가라는 과거에 만났던 연인 가오리를 평생 잊을 수 없었다. 분명 그녀를 만난 날 자신의 인생이 달라졌으며, 비로소 오래도록 멈춰 서 있던 고장 난 생의 시계가 째깍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고 기억한다. 이 책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생의 가장 특별했던 순간, 바로 그 시절로 돌아가게 만들어 준다. 나 자신보다 더 소중했던 존재가 누구의 삶에서나 단 한번은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이 만들어진 배경은 굉장히 특별하다. 일본의 평범한 샐러리맨이 트위터에 올리기 시작한 글이 9만 명이나 되는 팔로워로부터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며 결국 단행본으로 출간이 된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트위터에 140자씩 글을 써서 올리다 보니 ‘140자 문학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고. 게다가 저자인 모에가라는 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는, 그저 평범한 마흔 세 살의 중년 남자에 불과했다. 그저 자신이 살아온 생의 경험들을 글로 풀어내는 것만으로는 소설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모에가라는 수많은 독자들의 열광과 공감을 얻어냈던 것일까.

"국회도서관에는 우리가 앞으로 50년쯤 더 살고,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는다고 해도 끝내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출판물들이 있어. 세계인구는 70억을 넘어 점점 더 불어나고 있지. 우리가 앞으로 50년을 더 산다고 해도 모든 인류를 다 만나볼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난 건 기적이나 다름없어."

그렇다. 세키구치가 그나마 이런 녀석이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까지 함께 해올 수 있었다.

아트디렉터로 일하는 모에가라는 흔들리는 전동차 안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가 '알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글과 함께 한 여성의 이름을 보게 된다. SNS를 하다 보면 종종 내가 아는 사람 혹은 아는 사람과 연결된 다른 아는 사람들이 추천 목록에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여성은 바로 지난날 자신보다 더 소중했던 여자 가오리였다. 지나치게 친절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덕분에 그는 가오리의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현재 남편과의 생활과 일상들을 둘러보게 된다. 그러다 전동차 안의 밀려오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그만 실수로 가오리에게 친구 신청 버튼을 누르게 된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했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20대 초반 시절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별다른 꿈도 없이 에클레어 공장에서 포장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취업정보지 펜팔을 통해 가오리와 연락을 하다 만나게 되고, 연인이 되었다. 이야기는 17년 전 펜팔로 만났던 연인을 17년 후 페이스 북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의 그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가 살아낸 시간과 사는 동안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평범하고 소소하게 들리지만 8,90년대의 색채와 풍경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어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불운의 연속이었던 어린 시절을 거쳐 초등학교 시절 자신을 귀여워해주었던 스트립걸 누나, 에클레어 공장의 인간미 넘치는 동료 나나미, 오랜 세월 함께 일해 온 동료 세키구치 등등... 지금의 그를 잊게 만든 소중했던 사람들과의 관계들 속에 잊을 수 없는 연인 가오리도 있었다. 화려한 미사여구 없이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내 이야기가 된다. 자연스럽게 지나온 내 생을 돌아보며 나를 스쳐간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었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이를 만난 것이 바로 기적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우리가 만난 건 기적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그런 기적이 찾아올 것이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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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래빗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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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규칙을 어기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거야. 우리는 꾹꾹 참으며 규칙을 따르는데 너는 왜 안 참느냐, 너 때문에 질서가 망가진다, 라고 느끼도록 되어 있지. 큰 영향이 없는 규칙 위반이나 소소한 반칙이라도 화가 나. 거기에다 상대가 부끄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으면 더더욱 용서가 안 돼. 집단을 위기에 빠뜨릴 가능성이 있으니까 자신이 피해를 입든 말든 불쾌해져."

우사기타 다카노리는 젊은 기업가가 설립한 벤처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사람을 유괴하니까 제대로 된 회사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의 담당은 지정된 사람을 끌고 오는 역할로 매입 담당이다. 30분 전에도 여자 하나를 매입해 회사의 다른 담당자에게 넘긴 참이다. 그리고는 느긋하게 아내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는데, 밤늦도록 아내 와타코 짱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끔찍한 상상을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그날 밤 자정이 되기 직전에 전화가 온다.

"네 아내를 유괴했다."

 

유괴범의 아내가 유괴되다니, 대체 이게 무슨 어이없는 사건이란 말인가. 이사카 고타로는 이 심각한 장면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1년간 하늘에 대고 뱉은 침이 한 덩어리로 크게 뭉쳐서 머리에 떨어졌다.' 라고. , 대충 이 작품의 분위기가 짐작이 되는지. 이번 작품 역시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사카 고타로만의 위트와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는 이런저런 일이 있다. 그 말마따나 나쓰노메는 날마다 크고 작은 다양한 사건과 크고 작은 다양한 잡일에 힘쓰며, 지금은 이렇게 딸과 함께 걷고 있다. 우주를 기준으로 보면 찰나에 불과할 시간을 슬로모션처럼 늘려서 자신들의 인생을 영위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건 그것대로 득을 보는 기분이었다.

사실 우사기타의 아내를 납치한 것은 바로 그가 일하는 조직의 보스였다. 조직의 컨설턴트였던 오리오오리오가 경리를 꾀어 조직의 돈을 빼돌렸는데, 보스 입장에서는 조만간 거래 상대한테 돈을 보내야 해서 급박한 상황이었다. 보스인 이나바는 오리오오리오를 찾기 위해 우사기타의 아내를 납치해 그를 협박하고, 다급해진 우사기타는 사라진 컨설턴트를 쫓다 센다이시의 어느 단독주택에 침입하게 된다. 그리고 세 사람을 인질로 잡고, 경찰들에게오리오오리오를 찾아내라며 농성을 시작한다. 이게 바로 일명흰토끼 사건의 서막인데, 사실 이야기는 '유괴범의 아내가 유괴된 희대의 사건'이 시작에 불과할 정도로 기발하고 예상치 못한 반전까지 더해 놀라움을 준다.

이사카 고타로는 이 작품의 서문에서 10대 시절에 읽었던 '누워서 읽다가 어느 부분에 다다르면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킨다'는 아이라 레빈의 <죽음의 키스>처럼, 독자가 읽다가 깜짝 놀랄 만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마음으로 완성한 작품이라 그런지 독특한 트릭과 깜찍한 반전과 구성으로 세상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인질극을 만들어 낸 것 같다. 특히나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흰토끼'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그리고 별자리 '오리온자리'가 이야기의 중요한 코드로 작용하는데, 굉장히 흥미로웠다.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을 즐겨 읽어 왔던 독자라면 이번 작품 역시 대만족일 것이고, 처음 만나는 경우라면 제대로 이사카 월드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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