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들의 수집가
루스 호건 지음, 김지원 옮김 / 레드박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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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두아의 경우 로라가 이 집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쟁반보 때문이었다. 앤서니는 면접을 보면서 그녀에게 차를 내줬다. 그는 정원이 보이는 방으로 쟁반을 가져왔다. 덮개를 씌운 찻주전자, 우유 주전자, 설탈 그릇과 집게, 컵과 받침, 은제 티스푼, 차 거름망과 받침. 쟁반보를 깐 쟁반 위에 그 모든 것이 놓여 있었다. 쟁반보는 새하얗고 가장자리에 레이스가 달린 리넨이었다. 쟁반보가 방점을 찍었다. 파두아는 쟁반보까지 포함해서 이 모든 것들이 일상인 곳이었다. 그리고 퍼듀 선생은 정확히 로라가 꿈꿔왔던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앤서니는 사랑하는 연인이 세상을 떠난 지 사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를 잊지 않는다. 약혼녀가 세상을 떠난 날 그녀가 선물했던 작은 메달리온을 잃어버리고는, 이후로 사람들이 잃어버린 물건들을 주워 서재에 보관하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물건의 주인을 찾아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의 서재에는 선반과 서랍마다 그가 사십 년 동안 모아온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했고, 각각의 물건에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물건을 발견한 날짜와 시간, 장소를 상세히 적고 어떤 것인지 기록해 둔 것이다.

어린 나이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던 로라는 유산과 함께 아이를 갖고자 하는 집착과 남편과의 불화로 수년을 불행하게 보냈고, 결국 남편이 바람을 피움으로써 결혼 생활을 정리한다. 불만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절망감에 의사에게 우울증 약을 처방 받기 위해 병원에 들어갔다가 대기실에서 잡지 광고를 발견한다. 남성 작가의 가정부 겸 개인 비서를 구한다는 광고에 지원한 로라는 앤서니를 만나게 되고, 그의 집에서 비서로 일을 하며 그와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예감한 앤서니는 비서인 로라에게 자신의 아름다운 집과 장미 정원, 전 재산을 물려준다. 단 그의 유언에는 조건이 있었으니, 자신이 그 동안 서재에 모아둔 수많은 분실물들을 잘 맡아서 주인을 찾아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물건들은 별 가치가 없고 돌려받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그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린 걸 되찾아줘서 행복하게 해주거나, 그의 부서진 심장이라도 고쳐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이다. 앤서니가 꽤 유명한 작가였던 탓에 로라는 동네에서 화제의 인물이 된다. 무뚝뚝한 가정부에게 앤서니가 모든 유산을 물려준 것이 수상했을 테니 말이다.

"로라, 내 친애하는 사랑스럽고 유쾌하고 영리하고 완벽하게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로라. 넌 대단히 크고 아름다운 집과 보물들과 섹시한 정원사까지 한꺼번에 물려받았어. 앤서니는 널 딸처럼 사랑했고 자신에게 귀중한 모든 것을 너한테 줄 만큼 믿었어. 그런데 좋아서 춤을 추는 대신에 넌 여기 앉아 징징거리고 있지. 그는 널 믿었어. 나도 항상 너를 믿고. 네가 숨는 상대는 선샤인만이 아니야. 넌 모든 것으로부터 숨고 있어. 그리고 이제는 숨는 걸 그만두고 인생의 엉덩이를 걷어찰 때가 됐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지옥으로나 가라고 해."

이야기는 현재의 로라와 40년 전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유니스의 사연이 교차로 진행된다. 그리고 앤서니의 서재에 있는 분실물들 각각이 품고 있는 사연들이 액자 소설처럼 중간중간 등장한다. 로라는 어마어마한 분실물들을 다 어떻게 돌려줘야 할지 감이 안 잡히고 부답스럽기만 하다. 그런 그녀의 곁에 보통 사람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녀 선샤인과 잘생긴 정원사 프레디가 합세해 잃어버린 물건들을 위한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꼬리표가 달려 있는 분실물들을 주인에게 찾아주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처음 단 몇 페이지 만에 그냥 훅 빠져 버렸을 정도로 아기자기하고 예쁘고, 설레고 뭉클한 것들이 가득한 작품이었다. 읽는 내내 책 속에 등장하는 도넛과 밀크티가 먹고 싶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심플한 플롯이지만 그 사이사이를 채우는 이야기들이 너무도 따뜻하고 유쾌해서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초반 설정부터 굉장히 동화스러운 인물들과 배경이 등장하는데, 이들 각각의 사연들이 굉장히 현실적이고 공감적인 부분이 많아서 단순하지 않은 여운을 남겨주었다. 언젠가 지하철 유실물 센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데, 물건에 담긴 한 사람의 고유한 추억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루스 호건의 이 소설처럼 잃어버린 물건에 얽힌 사연들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을 이어주기도 하고,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기도 하고, 그 속에 깃든 추억을 떠오르게 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자신이 반평생 동안 서재에 모아둔 수많은 분실물들의 주인을 찾아 달라는 유언, 이라는 설정 자체부터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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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너를 잃었는가 미드나잇 스릴러
제니 블랙허스트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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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2주 된 아들을 죽인 엄마입니다."

생후 12주 된 아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치료감호소에서 3년을 보낸 한 여자.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들도, 아들 죽인 기억도 없다. 다만 엄마로서 헌신적이었을 뿐. 사람들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수전 웹스터는 이제 죽은 사람이었다. 분명하다. 4주 전에 내가 죽였으니까. 세상 어느 누구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몰라야 했다. 그래서 법적 절차에 따라 이름까지 바꾸었다. 가석방 감찰관조차 나를 엠마라고 불렀다. 아직도 가끔은 이 이름에 대답하는 것을 잊는다. 내 새로운 이름은 엠마 카트라이트다. 물론 사람들은 이 이름을 모른다. 4년 전만 해도 나는 수접 웹스터였다. 이 사실을 알고 어떤 사람들은 콧등을 찡그릴지도 모르겠다... 북부에 사는 사람이라면 '맞아, 아들을 죽인 여자 아니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고 중얼거릴 수도 있다. 하지만 북부가 아닌 곳에 사는 더 많은 사람은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생후 12주 된 아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치료 감호소에서 3년을 보낸 뒤 거주지와 이름까지 바꾸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하는 한 여인에게 편지가 도착한다. 봉투 앞면에 쓰인 글자를 보자마자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지우고자 했던 과거의 이름 수전 웹스터라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봉투 속에는 어린 남자아이의 사진이 있었고, 뒷면에는 그녀의 죽은 아들 딜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딜런은 생후 3개월 만에 죽었는데, 사진 속 아이는 두어 살쯤 되어 보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누군가의 못된 장난일까. 혹은 그녀의 본명을 알고 있다는 경고이자 협박인 걸까. 그녀는 신경이 쓰여 도서관에서 딜런 사건에 대한 기사들을 검색해보고, 그 와중에 자신의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섰던 매튜 라일리 박사가 최근에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기자가 그녀를 찾아온다. 당연히 그녀는 관심 없다며 기자를 내보내지만, 최근에 실종된 라일리 박사에 대한 글을 쓴 것이 그라는 걸 알게 되고 나자, 의문의 사진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그를 만나보기로 한다. 그렇게 수감 중에 만난 그녀의 유일한 친구 캐시와 기자인 닉과 함께 잊고 살고 싶었던 그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 사진은, 자신이 아들을 죽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걸, 아들이 행복하게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밝혀낼 기회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에게 남들이 했다고 하는 그 행동에 대해 전혀 기억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아들을 죽게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매일같이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 여태 하루하루를 버텨왔다. 물론 누군가 그녀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거나, 겁을 주려고 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사소한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고 싶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미친 소리 같겠지만 아들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조금의 기대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아기를, 내 아들을 해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끔찍하게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바로 내가 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신은 그토록 인정하기 힘든 사실을 우스운 방식으로 직면하도록 했다.

나는 두려움과 좌절로 한숨을 쉬었다. "캐시, 이건 가능성이 가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사건의 유일한 원인이야. 내가 저지른 일을 빨리 받아들일수록 내 상태가 나아질 가망이 커질 거야."

하지만 나는 자신을 믿지 못했다. 내 상태가 다시 좋아지리라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이야기는 수전의 서술과 과거 어린 소년들의 학창 시절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된다. 영아 살인 사건의 실체에 대해 추적하는 현재의 이야기와 소년들의 이야기는 전혀 접점이 없는 것처럼 별개로 진행되지만, 그 두 이야기가 교차되는 지점에 이르면서 현재의 미스터리에 숨겨진 비밀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실제로 산후 우울증을 겪던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살해했다는 비극적인 뉴스를 종종 접했었기에, 이 작품 역시 그 비극에 숨겨진 배경이나 여성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가 진행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작품의 플롯과 구성은 그런 예상을 완전히 비켜가면서 진행된다. 과거의 한 지점에서 멈춰버린 거대한 구멍, 자신의 삶에 생긴 그것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사건을 추적하는 인물,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숨기고 있던 진실은 경악스러울 만큼 끔찍한 과거를 드러낸다.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나 경찰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음에도 스릴러로서 페이지 터너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는 이 작품이 제니 블랙허스트의 데뷔작이라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어린 시절부터 범죄 소설을 즐겨 읽었다는 작가는 아끼는 소설로 가득했던 책장이 아이가 생기고 인형과 아기 용품으로 채워지고, 하루의 대부분을 아이를 먹이고 재우는 생활로 보내게 되면서 출산과 육아에 대한 경험에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개인이 어떤 사건에 얽혀 소중하게 지켜왔던 평범한 것이 산산조각 날 때의 감정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사실에 가깝게 그려내는 솜씨 또한 대단해, 그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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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 소녀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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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자>, <이름없는 자>, <영혼의 심판>의 작가 도나토 카리시의 스탠드 얼론 <안개 속 소녀>가 출간되었다. 오랜 만에 만나는 도나토 카리시의 신작이라 굉장히 기대가 되었다.

"왜냐하면 범인을 체포해야 우리가 조금은 더 안전하다고 그나마 '착각'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따지고 보면 대중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범답안은 따로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입니다. 진실을 알게 되면 우리도 사건에 연루가 되고 공범이 되기 때문이지요. 언론과 대중, 그러니까 모든 이들이 범죄자를 인간이 아니라고 여긴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범죄자들을 무슨 외계종족이나 남을 해하고 악을 행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여긴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그런 범죄자들을.... 대단한 인물로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힘주어 말했다.

국경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악지방에 자리 잡은 마을 아베쇼에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10대 소녀 애나 루가 실종된다. 처음에는 단순가출로 여겼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범죄의 가능성이 제기되어, 스타 형사인 포겔이 사건을 맡게 된다. 독실한 신앙 가정에서 자란 평범해 보이는 소녀에게 그 어떤 사건의 전조가 될 만한 내용도 보이지 않았고, 몸값을 요구 받은 적도, 가족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인물도 딱히 없었다. 아무런 증거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포겔은 이 사건을 누군가 소녀를 납치한 걸로 보고 수사를 지휘한다.

미궁에 빠진 실종사건, 신에게 맹목적으로 헌신하고 스스로에게 엄한 규율을 적용하는 공동체 속에 스며든 악의 기운,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온 마을 전체가 어쩔 수 없이 관심을 집중해야 하는 상황.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항상 우아한 정장과 완벽한 수제 구드로 차림새에 신경을 쓰는 포겔 형사이다. 사건을 해결해야 할 형사가 언론을 선동해 화제를 만들고, 그로 인해 주목을 받고 스타가 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주인공이 영웅이 아니라 수사를 망친 장본인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데에 놀라움이 있는데, 작품의 후반부에 터지는 몇 번의 반전 또한 역시 도나토 카리시라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임팩트를 준다. 사건을 수사하는 담당 형사가 수사 감각이 탁월하지도, 추리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인물이라 매우 당황스럽지만, 과거 증거조작으로 무고한 사람을 연쇄살인범으로 몰았던 일로 불명예를 겪었기에 이번 사건을 재기를 위한 발판으로 여기고 달려든다는 점에 있어 동기부여는 확실해 공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중반 정도 지점에 이르면 새로운 등장 인물이 나타나 서사를 이끌면서 무게 중심을 나눠 잡으면서, 간단한 것처럼 보였던 플롯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보르기는 불면의 시간이 이어지는 동안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다름 아닌 실종된 소녀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소녀의 행방이나 생사 여부에 대해서는 알려고 들지도 않았다. 언론과 대중, 심지어 경찰조차 다른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사는 여학생을 어떻게 살해했을까? 살인 전에 강간을 했을까? 사람들은 이미 소녀가 살해당한 게 확실하다고 믿고 그저 자신들의 병적이고 노골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왜 여학생을 살해한 건지 그 동기나 이유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범죄는 7초 간격으로 일어날 정도로 많지만, 그 중에서 미디어를 통해서 다루어지는 사건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렇게 각종 기사와 프로그램, 전문가들이 동원된 사건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급기야 범죄가 막대한 수익을 거둬들이는 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제대로 된 스토리로 엮은 범죄는 기록적인 수준으로 시청률을 끌어 올리며 각종 스폰서와 광고를 몰아오고, 사건이 벌어진 지역을 찾는 외지인들의 수가 늘어나며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범죄사건이 최고의 흥미거리로 부각되는 이유를 논리 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극중 포겔 형사는 그 방면에 뛰어난 직감과 동물적 감각이 있었기에 명성을 쌓아 올려 스타 형사가 되었던 것이다. 폐쇄적인 마을 아베쇼의 주민들도 점차 소녀의 행방과 안위보다는 범인으로 추측되는 인물에게 집중하기 시작하고, 자극적인 범죄 행위 자체에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우리 모두에겐 괴물이 필요했었습니다, 선생님. 우리 모두는 다른 누군가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느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도나토 카리시는 작가 이전에 이탈리아의 범죄학자로 유명했다. 범죄학과 행동과학의 전문가로 그에 대한 논문을 썼었고, 실제 자신이 참여한 사건을 소재로 집필한 <속삭이는 자>로 데뷔했다. 그래서인지 굉장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묘사와 리얼한 수사 과정과 생동감 넘치는 장면들이 돋보이는 작품을 써왔다. 그의 작품에서는 어떤 장면도 '그냥' 흘러가는 법이 없을 정도이다. 매 장면 풍부한 묘사와 흡입력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꼼꼼하게 복선을 깔고, 설계했는지 책을 마지막까지 다 읽고 나서 잠시 동안은 어리둥절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가 처음 그의 작품을 읽었을 때, 마지막 페이지에 와서는 맙소사. 라고 탄식 어린 한숨을 내뱉고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만큼 작가가 구축해놓은 이야기의 설계도가 완벽하고 탄탄해서 빈틈이 없다는 얘기가 되겠다. 무엇보다 작가는 독자를 이렇게 홀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그런 솜씨니 말이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범죄를 사람이 관계된 사건이 아닌 막대한 수익이 창출되는 또 다른 리얼리티 쇼로 소비하는 현대인의 민낯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기존에 만나왔던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만, 여전히 도나코 카리시만의 탄탄한 플롯과 엄청난 한 방을 날려주는 반전이 인상적이었다. 시작은 영화의 시나리오로 쓰인 거였고, 그것을 소설로 재집필해서 선보이게 된 작품이라, 영화로 만나게 되면 또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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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 제155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난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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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을 때는 여름이 아직도 한참 계속되겠다 싶었는데, 돌아가는 길에는 어느 틈에 가을이 찾아왔다는 걸 알았다.

저녁 바람은 선선하고, 역 앞 로터리 원형 화단에는 코스모스 꽃이 한들거렸다. 소담스레 핀 코스모스 꽃 속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 아이가 서 있었다. 원피스 군데군데에 해바라기 꽃이 피어 있다. 어디까지나 모티프니까, 색은 하늘색.

, 계속 여기 있었구나.............내 그림자는 하나뿐이었지만, 나는 둘이 전철을 기다렸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죽은 딸을 여전히 잊지 못하는 남편과 아내에게는 5년 동안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았다. 그들 부부에게는 아직 지겹도록 긴 인생이 남아 있지만, 산다는 것에 흥미가 없어지고, 체력과 기력이 떨어지는데도 아무런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 날아온 기모노 카탈로그를 보게 되고, 죽은 딸을 대신해 성인식에 참석하기로 한다. 열다섯 살에 죽은 딸이 여전히 살아 있다면 이제 곧 성년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진짜 스무 살 젊음들과 함께 서기엔 그들의 나이를 속일 수가 없고, 그들 부부는 그곳에서 딸의 친구들까지 만나게 된다. 자신의 딸은 여전히 열다섯 살인데, 남의 딸이 성장한 모습을 보는 기분이란 어떨까.

결혼 3년차인 쇼코는 아이가 태어난 지금이 되어서야 비로소 연애와 결혼은 다른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매번 일을 핑계로 늦게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일에도 지치고, 혼자서 어린 딸을 키우며 육아에 매달려 있는 것도 힘들고, 남편이 거의 집에 없는데도 가까이 사는 시어머니는 툭하면 나타나 잔소리를 해댄다. 좁은 아파트에서 혼자 칭얼칭얼 울어대는 아이를 달래다 보면, 자신도 밖에 나가고 싶고, 회사에 다시 나가 일하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그러다 결국 불만이 극에 달해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친정으로 아이를 데리고 짐을 싸 집을 나오고 만다. 그런데, 그날부터 이름도 없는 낯선 주소의 메일이 도착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남편이 장난을 한 것이라 여겨 화가 났는데, 남편은 그 일에 대해 전혀 알고 있지 못했고, 쇼코는 의문스러운 옛 말투의 그 메일이 과거에서 오는 거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 작품에 실린 여섯 개의 단편은 모두 가족에 얽힌 이야기들을 그리고 있다. 5년 전 죽을 딸을 잊지 못하는 부부, 오랫 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엄마가 치매에 걸리고 나서야 화해하게 된 딸, 결혼을 앞두고 해변의 조그만 마을에 있는 이발소를 찾아온 청년, 남편에게 실망해 친정으로 돌아온 여자의 이야기 등등... 익숙한 듯 보이지만 특별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들이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가족이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담백하고 잔잔하면서도 뜨거운 이야기는 아련하게 남아있는 먼 기억들을 불러오며 따뜻한 향수를 불러오기도 한다.

거울에 공을 들인 것은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손님이 바다를 바라보며 이발할 수 있다는 건 구실이지, 사실은 저 자신을 위한 거였어요.

이발사는 늘 커다란 거울 앞에서 일하는 직업이죠. 손님에게 언제나 모습을 보여야 하는 장사입니다. 그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발하는 동안 바다를 보고 있으면 제 얼굴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내 얼굴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언젠가 당신 살인자지, 하고 누가 손가락질할 까봐 두려워서.

세상에서 가장 가까워야 할 관계가 바로 가족이다. 나의 맨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감정을 꾸미거나 속일 필요가 전혀 없는 그런 관계.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관계'라는 걸 맺게 되는 곳이 바로 집이란 걸 떠올려보자면, 어쩌면 그래서 이렇게 서툰 건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가족 관계를 통해서 앞으로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맺게 될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나가게 된다. 가족 관계에 따라 앞으로 수많은 인간관계가 그와 유사하게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그래서 어릴 때 사랑을 받지 못했다거나, 가족에게서 거부당한 적이 있다거나 할 경우 자존 감이 낮아지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비슷한 상처를 주거나 받을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서로 아끼고 보듬고 사랑을 키워야 할 가정이 잘못하면 불행을 키우는 씨앗을 만들어내는 곳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 지긋지긋하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관계가 바로 가족이다. 이 작품은 가끔은 고통스럽고, 어쩔 땐 짜증나고, 꼴도 보기 싫고, 미울지라도, 가족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언젠가는 서로의 상처를 다독이고 위로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것을 믿고 싶어지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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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 쿠마몬
구마모토 현 지음, 임종민 옮김, 코야마 쿤도 감수 / 북폴리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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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계절 별로 쿠마몬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 4컷 만화들은 귀요미 캐릭터에 맞춰 번역체도 깜찍 그자 체이다. 손이 커서 안 들어갔다몬, 밤길은 위험해몬, 등잔 밑이 어둡네몬.. 등 이른바 쿠마몬의 ~몬체는 정말 중독성이 있어 나도 모르게 따라 하고 싶어지게 하고, 심플한 이야기 속 여백에서 느껴지는 유머와 여유로움이 슬그머니 미소짓게 만들어준다.

 

 

쿠마몬은 일본 구마모토 현에서 만든 마스코트이다. 2010년 규슈 신칸센 개통 이후 지역에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곰을 뜻하는 쿠마와 사람을 뜻하는 현지 사투리 몬이 합해져 만들어진 이름으로, 일본 현지에선 헬로키티 이후 가장 성공한 캐릭터 상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쿠마몬은 국가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구마모토 현은 전년 대비 관광객이 2배로 늘고, 쿠마몬 상품 매출도 수익에 한 몫 했으며, 구마모토 현이 고속철도 종착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른바 '쿠마몬 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일본 규슈에 위치한 구마모토 여행 패키지를 '쿠마몬을 찾아 떠나는 구마모토 여행'이라고 판매하기도 한다. 구마모토 역의 기념품 가게에 가면 온통 쿠마몬 아이템으로 가득한데, 쿠마몬 컵, 문구류, 티셔츠.. 심지어 쿠마몬 롤케이크까지 판다고 한다. 가게 메뉴판에도 수건에도 쿠마몬을 만날 수 있고, 쿠마몬 과자부터 맥주까지 마니아들을 열광시킬 만한 아이템들이 가득한 곳이라고 한다.

 

 

일본의 제책 방식을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하는 이 만화는, 표지 역시 앞 면은 쿠마몬의 앞 모습, 뒷면은 쿠마몬의 뒷모습을 담고 있다. 게다가 제일 뒷장에는 잘라서 책갈피로 쓸 수 있는 깜찍발랄 쿠마몬 캐릭터까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까워서 어떻게 잘라 쓰나 싶긴 하지만 말이다. 하핫.

 

쿠마몬의 캐릭터 프로필이다.

 

성별: 남자아이
생일: 3월 12일(나이 미상)
출생지: 구마모토 현
특기: 구마몬 체조
성격: 응석꾸러기에 호기심 가득
직업: 구마모토 현 영업부장

 

구마모토 현 영업부장이라는 항목에서 빵 터진다. 실제로 쿠마몬이 구마모토 현을 위해 꽤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책에 실린 만화들은 구마모토일일신문에 일년 동안 게재된 4컷 만화들이다. 그래서 계절 별로 쿠마몬의 일상이 담겨 있는 것이고 말이다. 4컷 만화는 네 개의 칸으로 구성된 카툰의 한 장르로, 시사 풍자 만화에 주로 많이 쓰고 유머 카툰도 이 형식을 많이 쓴다. 국내에서도 예전에 주로 신문 만화로 보았던 적이 있는 것 같다. 4컷 만화는 주로 기승전결 구조로 내용이 전개되고 마지막 칸에서는 ‘결’보다는 반전을 주로 사용하는 형식인데, 그래서 짧고 간단하지만 여운이 남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코믹인데 여운이라니, 멋지지 않은가.

 

<코믹 쿠마몬> 책은 구석구석 너무도 세심하고 예쁘게 만들어졌는데, 이렇게 책 등 아래 쪽과 위쪽에도 쿠마몬 캐릭터를 만나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아래 쪽과 위쪽에 있는 쿠마몬의 표정도 다르고 정말 귀엽기 그지 없다.

 

 

 

책을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네살 짜리 아들이 다가와 자기도 보겠다며 손가락을 들이댄다. 아이가 보기에도 눈길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곰돌이 캐릭터였으리라. 손가락으로 하나씩 가리켜 가면서 뭐라뭐라 말을 하기도 하고, 재미있게 보는 것이 어른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보기에도 참 좋을 것 같았다.

 

 

글자는 별로 없고 그림이 대부분인데다, 극강의 귀여움을 자랑하는 쿠마몬 캐릭터 덕분에 아이의 시선을 사로잡아, 아이도 한참 책을 펼쳐놓고 들여다 보았다. 아이에게 4컷 만화의 내용을 몇몇 읽어주기도 했는데, 대부분 쉽고 간단해서 아이에게 알려주기에도 괜찮았다.

 

 

방탄소년단의 민윤기가 쿠마몬의 팬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일본에서 쿠마몬 캐릭터와 함께 사진을 찍은 것을 보니 잘 어울리더라. 역시 잘나가는 아이돌은 어울리는 캐릭터도 일본 최고의 귀요미 쿠마몬인가 싶은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리고 쿠마몬이야 워낙 호불호가 없는 캐릭터라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쿠마몬을 사용한 아이템들도 전부터 많이 판매되고 있어 모르는 이들이 없는 유명 캐릭터이기도 하고 말이다.

 

 

세상에서 먹는 걸 제일 좋아하고 풀 한 포기까지 소중하게 생각하는 온화하고 마음씨 좋은 쿠마몬. 그래서 사계절을 배경으로 한 쿠마몬과 구마모토 현 동물 친구들의 소소하고 즐거운 일상 속에는 음식과 관련된 4컷 만화들도 꽤 많이 보인다. 어리숙하고 순진해보이지만, 마음 따뜻하고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착한 쿠마몬. 그 일상을 따라가지보니 바쁘게 지내오는 일상들 속에서 잠시나마 쿠마몬의 느긋하고 여유로운 생각과 행동들이 마음에 가득 담겨왔다.

 

매일매일 너무 정신없이 바쁘서 뒤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잠시 따뜻한 커피 한잔과 달콤한 빵 한 조각과 쿠마몬 한 권이면 그대로 시간이 멈춰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록 책을 덮으면 다시 현실로 돌아오더라도,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쿠마몬과 함께 마음껏 여유도 부리고, 웃기도 하면서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잇을 것이다. 진짜 힐링 만화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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