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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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경애가 그 '봉인'이라는 말을 얼마나 필사적으로 붙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에는 육체 너머의 것이 있다는 것, 어떤 사랑은 멈춰진 기억을 밀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 사라진 누군가는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의 인생에서 다시 한번 살게 된다는 것.

팀장 대리라는 어색한 직함을 단 채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상수. 팀장 대리란 팀장은 팀장인데 팀원이 한 명도 없는 사람을 일컬었다. 반도미싱에서 영업 일을 하는 상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열심히는 했지만 융통성이 없고, 거래처 사장들과 다투거나, 정치 얘기를 하다가 불화를 만든다거나 하는 등 동료를 비롯해 공장주들에게도 별로 인기가 없었다. 결혼은커녕 연애라도 하는지 알 수 없고, 동료 팀장을 짝사랑하는 한심한 그를 회사에서 어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부친이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인데다, 회장의 재수학원 동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렇게 10년을 흘러오던 상수는 팀장 대리라는 직함에 조금 익숙해지자 자신에게 팀원을 배정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총무부에 있던 경애가 오게 된다.

경애는 원래 홍보부에 있다가 총무부로, 이번에는 다시 영업부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유는 그녀가 3년 전 농성 때 불법 해고 처단 등을 목 놓아 외쳤던 이력때문이다. 당시에 파업 기간 동안 일어난 성희롱을 노조 측에 항의한 탓에 파업이 흐지부지 되었고, 덕분에 그녀는 여지껏 회사에서 버텨오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차라리 회사를 나갈까 싶기도 했지만, 엄마가 유방암 판정을 받고 미용실을 닫고 항암치료를 했던 탓에 도망가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 왔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삐딱하게 볼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분명하게 의사 표시를 하는 그녀와 상수는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운전하면서 클랙슨도 한번 안 누르고 규칙을 잘 지키는 남자와 운전대만 잡으면 세상의 모든 욕설을 내뱉는 여자가 그렇게 한 팀이 되었다.

상수의 인생에서는 늘 그가 예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져 낭패감 속으로 몰아넣었다. 인생의 대부분의 날들이 상수에게 실패라는 결론을 선언하기 위해 준비되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공상수 너 실패, 메뉴 선택 실패, 이메일 보안 실패, 언니로 살기 실패, 짝사랑 실패, 해외파견 실패, 팀장 실패, 아주 다 실패.

이렇게 너무도 달라 보이는 두 사람에겐 사실 그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삶의 교집합이 있었다. 경애는 고등학교 시절 하이텔 영화동호회 활동을 하며 학창 시절 유일하게 친구들을 사귀었었다. 그런데 호프집에서 화재 사건이 일어났고 무려 56명의 아이들이 그곳에서 죽었다. 마침 그곳에 있던 경애는 잠시 전화를 하러 나온 덕분에 사고 현장에서 살아남았지만,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 E를 사고로 잃고 만다. 상수 역시 같은 사고 현장에서 단 한 명의 소중한 친구를 잃었고, 그 친구가 바로 경애의 친구 E였던 것이다. 그리고 상수는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페이스북 연애상담 페이지를 7년째 운영하고 있었다. 팔로워가 2만명에 이르는 곳으로, 상수는 그 계정에서 언니, 라고 불렸고 그렇게 온라인 상에서 오랫동안 언니로 살았다. 경애는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산주 선배가 결혼을 한 뒤에도 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지 못하고, 연애상담 페이지에 편지를 쓰곤 했다. 물론 그에 대한 답장을 하는 '언니'가 상수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인상적인 이야기로 만났던 김금희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작년 봄부터 겨울까지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재하며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라고 해서 더욱 기대를 했었다. 이야기는 너무도 달라 보이는 두 남녀의 현재 이야기를 따라 가면서 그들 자신을 몰랐지만 한때 공유했던 과거의 시간을 함께 풀어 낸다. 반도 미싱에서 한 팀이 되어 근무하다 베트남에 파견되어 현지에서 일을 하게 되는 상황과 '언죄다' 페이지의 언니들이 상수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사랑의 여러 유형과 그들의 마음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여준다. 살다 보면 끝장난 사랑 때문에 마음까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뭔가를 잃어 버리고 세상의 끝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극중 모두의 '언니'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폐기하지 말라고.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 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슬프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한 작품이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어 어느 방향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시각에서 읽어낼 수 있는 다채로움도 가지고 있어 더욱 특별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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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물리학
림태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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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생겨난 모든 사이를 관계의 우주라고 부른다. 우주는서로가 있음으로 성립한다. 서로라는 말은 당신과 내가 고유하고 독립적인 하나의 행성이라는 의미다. 동등과 존중의 거리를 품고 있는 존재들이 서로 사이를 가질 때 그것을 우주라고 한다. 사이와 서로는우리라는 말처럼, 인류가 발명해낸 아름답고 황홀한 천체물리학 개념어다.

수많은 심리학 서적들과 에세이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이유는 대부분 위로나 공감을 얻기 위함이다. 그것은 아마도 삭막한 인간 관계, 팍팍한 일상의 고단함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길이 딱히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매일 같이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당신 때문에 내가, 나 때문에 당신이, 우리는 더불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말이다. 인간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은 구성원들과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장점이지만, 바로 그것이 누군가는 지옥을 경험하고, 삶의 벼랑 끝으로 몰게 하는 무서운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람 사이에 필요한 최적의 거리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내 생각과 당신의 이해 사이에서, 불필요한 오해 없이 우리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림태주 시인은 말한다. 살아보니 삶의 전부가 관계였다고. 어쩌면 지구는, 관계의 힘으로 돌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관계의 비밀스러운 원리와 은유법을 알고 싶어 별과 사막과 날씨와 천체물리학을 참고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나와 당신의 사이를 관계의 우주, 관계의 물리학에 빗대어 풀어내는 은유는 표현 자체도 참신했지만, 무엇보다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공감하고 위로 받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는 수많은 책들을 읽어 왔지만, 이 책에서 표현하는 색다른 접근 방식은 굉장히 신선했고,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새로운 시각도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는 자주 잊는다. 나에게 나의 입장이 있듯이 당신에게는 당신의 입장이 있다는 사실을. 삶은 관계의 총합이고, 관계는 입장들의 교집합이다. 상대방이 없는 관계란 성립 불가능하고, 모든 상대방은 각자의 입장으로 존립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행성이라면, 저 별빛 하나하나가 다 입장들이다. 별빛이 반짝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 어둠 속에 별이 있는 줄 알아보겠는가.

'당신과 나의 만남이 우연처럼 쉽고 사소해 보이지만, 사실은 지난하고 지극한 운동의 결과'라는 말은 굉장히 로맨틱하게 들리기도 한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당신을 만나기 위해 부단히 애쓴 필연과 두려움을 이겨낸 행운의 결과였다'고 생각한다면, 사실 관계가 조금 삐걱거리거나 위기에 처하게 되더라도 가뿐하게 이겨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렇게나 어렵게 이어진 관계였는데, 내가 지금 이 사소한 걸로 흔들리면 안 되겠다고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지구별에는 수많은 관계가 있고, 그 관계의 힘으로 지구는 자전하고, 태양의 둘레를 공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계의 우주에서 알게 된다. 세상에 생겨난 모든 관계는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를 증명한다고. 어떤 물리적 관계는 우아하게 도약해서 관계의 화학으로 나아간다고.

여타의 심리학서나 에세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바로 저자가 시인이라는 점에서 오는 특별한 감성이 아닐까 싶다. 절절한 감정을 자아내려는 문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뭉클해지거나, 담백하게 관계에 대한 철학을 풀어내는 글에서도 설레임이 느껴지곤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쉽게 술술 읽히지만, 자꾸 페이지를 들춰서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기도 했다. 세상에 생겨난 모든 사이들을 우주에 비유하고, 사람을 얻고 또 잃는 말과 태도의 얄궂음을 이야기하고, 세상과의 관계에서 취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사유하고, 스스로에 대한 오해와 마주하며 외로움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이 책은 그 동안 만나왔던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다룬 책들 중에서도 단연코 최고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 이런 류의 책들이야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지만 놓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기에 대부분 한 번 읽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이 책은 곁에 두고 자꾸 펼쳐서 읽고 싶은 책이다. 문장도 좋고, 은유도 색다르고, 사유도 깊이가 있어 에세이지만 마치 시처럼 읽히는 책이기도 하다. 맺고 끊고 적당한 거리를 주는, 사이의 균형에 서툰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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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야 하는 밤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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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나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독일 국민 8,000만 명이 8N8 사냥감의 적이다. 어린이, 노인, 환자, 교도소 수감자를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수천만 명이 대대손손 편하게 먹고 살 거액의 상금을 타기 위해 8N8 사냥감을 죽이려 들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이 이런 황당한 얘기를 진지하게 믿는다면 그렇겠지.

시청자 절반이 팩션 드라마를 다큐멘터리로 여기는 나라라면 안 될 것도 없다.

누군가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을 바꿔 놓을 아주 중요한 질문이라고.

"자유롭게 딱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누구를 죽이고 싶으세요?

 

당신이라면 누가 떠오르는가. 그리고 만약 정말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실행해 옮길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바로 거기서 출발한다.

한 때 잘나가는 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며 자작곡을 연주했었던 벤은 현재 커버 밴드에도 못 끼는 곳에서 해고 당한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 해고였고, 술이나 마시려고 가려던 차에 어디선가 젊은 여자의 비명이 들린다. 남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해가며 구해줬더니 소녀는 아저씨 때문에 다 망쳤다며 돈이 날아갔다고 소리친다. 그리고 찾아간 딸의 병원에서 전부인인 제니퍼는 딸이 자살을 시도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사실 벤의 딸 율레는 4년 전 자신이 운전하던 차로 교통 사고가 나 두 다리를 잃었고, 일주일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현재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미심쩍은 상황들 때문에 딸이 살인미수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굳어 지려는데, 갑자기 건너편 호텔 옥상의 대형 스크린에 벤의 사진이 뜬다. 아까 자신이 구해줬던 여자의 이마에서 본 것처럼 얼굴에 8자가 그려진 채로 말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정부에서 살인 복권을 발행한다. 단돈 10유로만 내면 누구나 죽이고 싶은 한 사람을 추천할 수 있고, 88일 저녁 88분에 추천된 모든 후보자들 중에서 한 명을 뽑는다. 제비 뽑기로 선정된 8N8 사냥감은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약 12시간 동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 사람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더라도 절대 처벌받지 않는다. 대통령이 살인을 포함한 모든 위법행위를 용서하겠다고 공표하고, 사냥감을 포획하여 죽이는 데 성공한 사냥꾼은 상금 1,000유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독일 국민 전체, 수천만 명이 거액의 상금을 타기 위해 사냥감을 죽이려 들 수 있다는 얘기다. 벤은 생각한다. 이런 쓰레기 같은 상황이 진짜일 리 없어. 장난일 거야. 하지만 올해의 살인 복권이 추첨되고, 그 대상자로 베를린에 사는 심리학과 여대생과 벤이 지목된 것이다. 과연 벤은 온 세상이 참여하고 있는 살인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까. 모두가 그를 죽이려고 들텐데, 그는 누구를 믿고 믿지 말아야 할까.

 

“벤, 만나서 반가워요. 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당신의 삶을 바꿔놓을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준비되셨나요?”

벤은 끄덕였다. 그런 다음 다이아나의 요구를 알아차리고 얼른를 터치했다.

“고마워요, . , 그럼 물을게요. 자유롭게 딱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누구를 죽이고 싶으세요?”

벤은 스마트폰을 내리고 주위를 살폈다.

만약 오늘, 지금, 현재, 하룻밤 동안 범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추방자 한 명을 추천할 수 있다면 나는 누구를 추천할까? 당신이라면 이런 살인 복권에 누군가를 추천하겠는가? 혹은 당신이 사냥감으로 선출된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믿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의 상금을 마다하고 당신을 숨겨줄 그런 사람이 있을까.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이 주는 가장 큰 재미는 무엇보다 '예측할 수 없음'에 있다. 그 동안 만나왔던 전작들에서도 그랬지만, 두툼한 페이지를 숨쉴 틈 없이 달려가 범인이 밝혀지고 난 다음에도 해결과 해소의 안도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그 어떤 예정된 것에 대한 불안감, 그러나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한 기대감까지 차오르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들은 오직 피체크의 작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의 전매특허나 다름 없다. 이번 작품 역시 초반부터 온 세상이 지목한 살인 게임의 사냥꾼이 된 남자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는 과정은 심장이 쫄깃해지도록 긴장감을 부여하고, 숨 막히는 도심 속 추격전은 흡사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제바스티안 피체크는 영화 <더 퍼지>를 보고 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는 미국 정부가 하루 동안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를 허락하는 미래 세계가 등장하는데, '미래에 모두가 모두의 적이 된다'는 비현실적인 아이디어에 매력을 느꼈다고. 거기서 그는 '현재 모두가 한 사람의 적이 된다'는 현실적 아이디어로 이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누가 당신을 해치고 모욕하고 화나게 했나요?

혹시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마녀사냥이 먼 이야기가 아닌 요즘, 살인 복권이라는 작품 속 설정이 허구의 그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당신은 과연 누구의 이름을 적을 것인가. 혹시 누가 내 이름을 적지는 않을까. '내가 죽어야 하는 밤'이라니, 상상만해도 오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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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실레스트 잉 지음, 이미영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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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해 부인은 모든 것을 잘해냈고 좋은 삶, 자신이 원하는 삶,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을 꾸렸다. 지금 여기에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여자, 사과 한마디 없이 자기만의 규칙을 만드는 듯한 미아가 있었다. 거미 무용수의 사진처럼 리처드슨 부인은 이런 삶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클리블랜드의 고요하고 우아한 지역사회 셰이커하이츠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규칙이 많은 곳이었다. 도로 구획부터 주택 외벽 색깔 등 셰이커하이츠의 모든 것은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 지역 신문 기자가 된 리처드슨 부인과 그녀의 남편인 변호사 리처드슨은 네 자녀들과 함께 풍요롭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처드슨 부인은 부모가 물려준 작은 집을 세놓고, 그곳에 미혼모인 미아와 그녀의 딸 펄이 이사를 오게 된다. 예술가인 미아는 그들 모녀가 겨우 먹고 살 정도만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제 일자리를 얻어 일을 했고, 그 외의 시간은 매일 자신의 예술 작업을 하면서 보냈다. 그들 모녀는 미아의 프로젝트에 따라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이동해왔고, 이번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정착하기로 한다.

리처드슨 가족의 네 자녀들은 고3인 렉시, 2인 트립, 1인 무디, 그리고 열넷인 막내 이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디는 금방 펄과 친구가 되고, 매일 같이 함께 시간을 보낸다. 펄은 무디와 함께 그의 집에서 리처드슨 가족들과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면서 태생과 배경이 전혀 다른 두 가정의 아이들은 서로의 삶에 이끌리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 펄은 리처드슨가의 아이들이 꾸미지 않은 편안함과 자신감, 리처드슨 부부의 고상함을 동경했고, 반대로 무디는 미아 모녀의 예술적인 떠돌이 생활 방식을 낭만적으로 느낀다. 렉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동생 이지보다 펄과 더 자매처럼 지내게 되고, 펄은 잘생기고 매력적인 트립과 사랑에 빠진다.

 

 

 

"그게 신경쓰이는 거군요, 그렇죠? 당신은 상상할 수 없는 것 같네요. 왜 누군가는 당신과 다른 삶을 선택하는지. 왜 누군가는 넓은 잔디밭이 딸린 큰 집과 멋진 차와 사무직 말고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지, 왜 누군가는 당신이 선택한 것과 다른 것을 선택하는지."

이제 미아가 리처드슨 부인을 살필 차례였다. 부인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얼굴에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듯이.

"당신은 두려운 거예요. 무언가를 놓쳤을 까봐. 자기가 원하는 줄도 몰랐던 무언가를 포기했을 까봐."

평생 질서 있고 엄격한 삶을 살았던 리처드슨 부인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여자, 사과 한마디 없이 자기만의 규칙을 만드는 듯한 미아가 묘하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리처드슨 부인의 오랜 친구인 린다가 버려진 아기를 입양하게 되면서 그들의 미묘한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친모가 나타나 양육권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미아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리처드슨 부인이 분노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기자라는 것을 이용해 미아의 뒷조사를 하게 되는데, 상상치도 못했던 숨겨진 과거의 비밀들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대단히 영리하고, 굉장히 놀라운 작품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예리한 문장, 탄탄하게 짜임새 있는 구조, 페이지를 바삐 넘기게 만드는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삶에 대한 질문들. 이 정도로 묵직한 울림을 남겨주는 작품들은 대부분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내는 과정이 지난하게 마련인데, 이 작품은 너무도 술술 읽힌다. 마치 티비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이 전개되는데, 인물 한 명 한 명의 사연들이 모두 공감되고, 이해되는, 그래서 나의 이야기이기도, 혹은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영리한 소설이다. 이 작품에는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특한 모녀 관계가 등장한다. 리처드슨 부인과 막내 이지의 관계, 그리고 미아와 펄의 관계. 자세한 이들의 사정은 언급하지 않겠지만, 절대 평범하다고는 볼 수 없는 관계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각이 처해 있는 독특한 상황을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이해의 눈으로 보고 싶게 만드는 힘 또한 작가의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인물들의 대사, 사소한 행동,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 그들이 품고 있던 생각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서 뒤에 이어질 사건의 단서가 되고, 복선이 된다. 누구나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불씨처럼 지니고 있는 삶에 대한 의문과 억눌렀던 욕망들이 있게 마련이니까. 이 작품은 바로 그 불씨를 피어 오르게 만드는 발화점과도 같다. 때로는 이렇게 모든 걸 완전히 태워버리고 나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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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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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는 서른 한 살 때 자신의 첫 작품이었던 <유럽의 교육>에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폴란드를 배경으로 숲 속에 숨어 살며 독일 점령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 속에서 부모를 잃은 열네 살 소년 야네크는 추위와 배고픔, 희망이 사라진 전쟁의 한 가운데서 쇼팽의 폴로네즈를 듣고 감동한다. 독일 군인들에게 정보를 캐내기 위해 몸을 파는 열 여섯 살 소녀 조시아가 원하는 건 오직 사랑하고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뿐이었는데, 그 소박한 바램조차 어렵기만 하다. 그럼에도 로맹 가리는 극중 인물 중에서 가장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인물인 도브란스키를 통해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후 예순 한 살 때 그는 에밀 아자라는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한다. 이 작품의 화자는 열네 살 소년 모모이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와 그녀가 맡아 기르는 여러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로자 아줌마는 성매매를 하는 엄마들이 아이들을 맡기거나, 부모가 버린 아이들을 맡아 키우고 있었다. 모모 역시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로자 아줌마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강제로 수용되었던 끔찍한 기억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고, 늙고 뚱뚱해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의 칠층을 오르내리는 것을 힘들어 한다.

 

모모는 엄마가 자신을 보러 오게 하기 위해 복통과 발작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도둑질을 하고, 위험한 무단 횡단을 하며, 마약 하는 친구들을 사귀는 등 문제 행동만 골라서 한다. 하지만 모모는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로자 아줌마가 병을 앓고 죽어갈 때 곁에서 그녀를 보살핀다.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상처받고, 가진 것도 없는 두 사람이 좁고 냄새 나는 아파트에서 서로 손을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은 뭉클하고, 아름다웠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는 박하차를 가져다 주는 드리스 씨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 한 번만 읽어도 충분한 소설은 읽고 나서 가급적 책꽂이 멀리, 한 구석에 놔둔다. 한번 더 읽고 싶은 소설은 서재에서 내 손이 가장 잘 닿는 위치 혹은 잘 보이는 곳에 놓아 둔다. 그래서 언제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으면서 단어와 문장과 행간과 이야기 속을 들여다보곤 한다. <자기 앞의 생>은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뒤로 십여 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몇몇 문장들과 몇몇 장면들을 나는 바로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만나게 된 버전은 무려 일러스트 버전이다. 사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세계 문학들에는 대부분 삽화가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글자가 빽빽하고, 페이지가 두꺼운 책을 선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자에서는 미처 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이미지만이 보여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열네 살 소년 모모와 그 눈에 비친 세상이 세피아톤의 일러스트 약 80컷으로 보여지고 있는 이 작품은 원래의 이야기와 일러스트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느껴진다.

극 초반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을 겪고 난 뒤 모모는 생각한다. 사랑해야 한다고.

열네 살 소년 모모가 깨우치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생의 비밀을 이렇게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함께 만날 수 있다니 너무 감동적이었다. 아름답고, 뭉클하고, 눈부신 작품이었다. 아직까지 이 작품을 만나보지 않은 분들은 꼭 일러스트 버전으로 읽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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