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 알았어야 할 일
진 한프 코렐리츠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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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자신의 부모, 혹은 형제 혹은 자식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가족이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누구나 가끔 자기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의 진짜 모습을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믿음과 의심 사이의 그 조그만 간격은 사실 종이의 양면과도 같다. 사소한 행동, 말투들이 쌓여 오해를 만들고, 견고하게 쌓인 세월을 넘어 믿음을 깨트린다. 그런데 만약,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예정된 거였다면? 애초에 내가 그 혹은 그녀를 잘못 선택한 거였다면 어떨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법에 관한 이런 책들을 읽는 독자들이 그녀의 상담소를 찾아와, 만신창이가 된 자기 인생과 자기 자신의 결함을 고백했다. 제대로 결혼을 하지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도 못한 게 자신들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다른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진 것도 자기 체중이 늘어서라고 생각했다. 아기한테(그리고 친정 식구들과 아내의 친구들과, 우연찮게도 아내 본인에게도) 남자가 차갑게 대하면, 그게 다 자기가 직장에서의 출세 길을 포기했기 때문이며, 둘째 아이가 생길 경우 회사의 중역으로 승진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일이 다 여자 탓이었다. 사실이든 착각이든, 범죄도 다 여자 책임이었다. 더 치열하게 생각지 못해서,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가 낮아서. 여자들이 팔을 더 열심히 퍼덕거리지 않아서 비행기가 떨어졌다는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

 

부부 생활 상담 전문 심리 치료사로 활동하는 그레이스는 이번에 책을 출간하게 되어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중이다. 그녀의 책 <진작 알았어야 할 일>은 절대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을 남자들과 결혼할 뻔한 수많은 여자들을 위한 내용을 그리고 있다. '애초에 일을 망치지 마라, 그러면 나중에 이런 수많은 문제들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라고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이 이 책만의 장점이라고 기자는 말한다. 그레이스는 자신 만만하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누군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면 늘 무슨 수로 알았겠냐고 기겁을 하지만, 사실 우리는 책임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불행한 결혼 생활의 근본적인 원인은 '애초에 잘못된 남자를 선택한 여자'에게도 있다고 말이다. 많은 여성들이 남자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알고 있던 문제들을 외면했기 때문에 지금의 불행한 삶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잘못된 사람을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고, 단호하게 냉철하게 그녀는 조언한다.

 

대학 시절 만난 그레이스의 남편 조너선은 소아 종양학과 의사로 일하고 있으며, 열두 살짜리 아들 헨리는 뉴욕의 명문 사립 학교에 다니는 모범생이다. 그레에시는 자신의 커리어만큼이나 가정에서도 완벽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선택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평화로웠던 어느 날, 아들이 다니던 학교의 학부형이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녀는 모임에서 우연히 한 두 번 봤을 뿐인 학부형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그런데 경찰이 그녀를 찾아와 남편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그리고 학회에 간 줄 알았던 남편은 갑작스레 연락이 되질 않고, 남편의 핸드폰 마저 집에서 발견된다. 대체 조너선은 핸드폰도 놔두고,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지나온 모든 시간 동안, 단 한번도 조너선이 자신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그레이스는 충격에 휩싸인다. 결혼한 지 18년이 됐고, 수많은 환자들의 인생 문제를 상담해 왔으며, 이제 막 결혼 생활에 대한 대범한 책을 발간한 심리 치료사인 그녀의 삶은 모래성처럼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린다.

 

내가 뭘 알고 있지? 그리고 내가 모르는 건 뭐지?

우리 환자만 그런 건 아닐 테고 네 환자들도 다 그렇겠지만 말이야. 가끔 치료받으러 오면서 단 한 번 자기가 <대실수>를 저질렀고 그 실수로 인해 현재의 위기에 봉착했다는 믿음에 철저히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어. 내가 늘 <대실수>라고 분류하는 환자들이지. 대체로는 처음 마신 한 잔의 술, 아니면 첫 번째 마약 경험, 이런 거야. 가끔은 인간관계일 때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의 나쁜 조언을 들은 것일 수도 있고. 그리고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 그 순간이나 그때의 결정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때 딱 한 번 실수하지 않았다면 모든 게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늘 그 앞에 앉아서 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 있잖아요, 그런 건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늘 그렇죠. 실제 삶은 그런 식이 아니란 말이에요. 항상 노란 숲 속에 난 두 개의 갈림길에 봉착하게 되는 건 아니란 말이야, 안 그래? 그리고 많은 경우에, 과거에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했든, 똑같이 지금 이 자리에 와 있게 되곤 해. 그때 그게 실수가 아니었다는 얘기가 아니야. 그보다 좀 복잡하다는 얘기를 하는 거지. 삶에 멋진 일들을 가져다 준 결정을 내렸다면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되는 거야. 예를 들어서 네 아들처럼.

 

성공한 변호사의 외동딸로 심리 치료사라는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하버드 의대 출신의 종합 병원 의사인 남편을 둔 주인공 그레이스는 뉴욕의 전형적인 중산층이다. 그리고 그녀가 뉴욕의 명문 사립 학교에 아들을 보내면서 만나게 되는 학부형들은 부유한 금융 자산가 계층까지 맨해튼 상류층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유복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삶의 이면에 숨어 있는 허위와 어두운 진실의 맨 얼굴은 끔찍한 살인 사건만큼이나 무시무시하다. 아이들의 교육을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돈과 정보의 전쟁, 자산가와 전문직 종사자들 간의 보이지 않는 간극과 미묘한 열패감, 자기 위안과 질시로 얼룩진 욕망의 이면까지. 특히나 시종일관 그레이스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스토리라 끔찍한 일을 겪고 난 뒤, 모든 허세와 위선이 벗겨지고 난 다음 그려지는 그녀의 내면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고 리얼하다. 당연한 듯 여겨 왔던 평화로운 삶이 사실은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마저 허구의 인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한 번쯤 살면서 겪을 수도 있는 시련이기에 더욱 섬뜩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가끔 우리를 완벽하게 배신하곤 한다. 그 사람의 말투, 행동, 평상시 습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들이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거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짓말쟁이라던가 하는 문제는 아니다. 누구나 여러 가지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보여줄 수는 없다는 선택과 다양성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특히나 부부, 부모 자식 관계 등 가족간에 발생할 때 더욱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나 연인 사이라고 하더라도, 가족이 되기 전에는 어쨌거나 남남이기 때문에, 받아야 할 상처가 조금 덜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이에게서, 내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엄청난 충격을 가져올 수 있다. 내가 그 동안 믿고 있던 모든 것이 산산이 깨져버리는 경험은 단순히 '배신'이라는 단어로 치부하기엔 어딘가 부족한, 한 세계가 끝나는 경험일 테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때로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거다. 내가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기대하는 바가 상대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신이 누군가를 만났을 때 거의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직관적으로 본 뭔가를 모른 척 하지 말라. 우리는 늘 자기 일일 때는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봐주곤 한다. 하지만 결단코 자신에게도 같은 기준을 들이대야 한다. 인생이라는 덫에 걸리기 전에, 그 후가 아니라. 당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이 외면했던 그것이 언젠가는 당신의 인생에 가장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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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살카 저주의 기록
에리카 스와일러 지음, 부희령 옮김 / 박하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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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두 개의 내용이 일치하는 것은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네 개의 기록이 일치한다면?

어쩐지 매우 불길하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흥미에 이끌려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나와 가족 관계인 여자들이 젊은 나이에 자살하는 병에 가까운 습성이 있을 뿐 아니라 모두 7 24일에 익사했다는 경악스러운 발견 덕분에, 책을 읽으면서 점점 어두운 무엇인가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도서관사서인 사이먼은 롱아일랜드의 해변에 있는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그의 부모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에게 너무 큰 수리비를 감당해야 하는 문제를 유산으로 남겼다. 절벽 위에 있는 허물어져가는 그 집은 폭풍이 올때마다 무너질 뻔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는 서커스와 카니발의 연기자, 점술가, 마술사의 조수였으며, 숨을 멈추고 살아가는 인어였다. 그녀는 아들에게 물고기처럼 수영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그의 나이 일곱 살에 물속으로 걸어가 바다에서 익사했다. 여동생 에놀라는 6년 전 집을 떠나 서커스단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타로 카드 점을 본다. 그러던 어느 날 낡은 책 한 권이 소포로 배달되어 온다. 얼핏 보기에도 최소한 1800년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퀴퀴하고 매캐한 냄새가 나는 가죽 장정의 낡은 책이었다. 보낸 이는 중고서적과 고서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적상이었는데, 우연히 손에 넣었는데 책이 훼손되어 자신에게는 쓸모 없지만, 책 속에 있는 베로나 본이라는 이름으로 추적한 결과, 사이먼의 가족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서 보내게 되었다는 거다. 베로나 본은 사이먼의 어머니처럼 유랑극단의 공연자였던 할머니의 이름이었다. 물에 젖어 훼손되고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그 낡은 책 속에 숨겨진 비밀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그 책은 1700년대 유랑극단 단장의 일지였는데, 그 속에는 야생 소년, 타로 카드 점술사, 인어 등 기이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사이먼은 처음에 일시적인 흥미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불길한 뭔가를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외할머니가 바다에서 익사했으며, 그 날짜가 바로 자신의 어머니가 익사한 날과 같다는 거였다. 그와 가족 관계인 여자들이 젊은 나이에 자살하는 병에 가까운 습성이 있을 뿐 아니라 모두 같은 날에 익사했다니.. 이 얼마나 경악스러운 발견이란 말인가. 마침 사이먼이 그 책을 읽고 있던 때는 7 14일이었고, 이제 7 24일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바로 여동생 에놀라 역시 같은 운명으로 익사하게 될까봐 불안해하며, 사이먼은 책에 관해, 그가 알지 못하는 먼 과거에 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마침 도서관 재정 문제로 사서직도 해고된 참이었고, 에놀라는 오랜 만에 집에 돌아와 있었다. 여동생에 대한 사이먼의 걱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는데, 과연 그는 가족에게 내려진 저주의 비밀을 풀고 에놀라를 구할 수 있을까.

"물론 그 계집애는 아름다워. 하지만 그 아이는 너와 같지 않고, 나와도 달라. 그 아이를 봐. 영혼이 반밖에 없어. 나머지는 굶주림으로 채워져 있어. 그 계집애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결국 그 말을 뱉어냈다. "그 아이 때문에 너는 익사하게 될 거야..........물론 그 아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 아이는 오직 사랑만을 생각하지, 그 값을 치르려고 하지 않아. 자기가 원하는 것만 알아. 루살카는 그래. 물에 빠져 죽는 여자들."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들은 남자를 유혹해서 함께 놀고 함께 춤을 춰. 남자가 죽을 때까지. 남자를 파멸시키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물속으로 끌어들이는 거야. 남자가 죽으면 슬픔에 잠기지. 슬픔 속에서 다시 자신을 위로해줄 누군가를 찾아 떠나고. 그 아이를 다른 사람의 아들에게 보내. 내 아들에게 오게 하면 안 돼."

 

이야기는 사이먼이 낡은 책을 통해 과거의 비밀을 풀어가는 현재와 책 속의 유랑극단이 등장하는 과거가 교차되어 진행된다. 책 속의 책, 액자 소설로 진행되는 과거의 이야기에는 작가가 직접 그린 빈티지한 타로카드 일러스트도 삽입되어 있어 더욱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다이앤 세터필드의 《열세 번째 이야기》와 같은 고딕풍 스토리를 좋아한다면, 이 책 역시 굉장히 만족스럽게 읽을 것이다. 도서관, 사서, 낡은 책, 인어, 유랑극단, 저주... 이런 키워드들로 만들어진 이야기니 재미가 없을 래야 없을 수 없겠지만 말이다. 어느 문화에나 물의 요정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루살카는 물의 정령이다. 반은 어린 아이, 그리고 반은 세계를 받지 않고 죽은 처녀의 영혼을 지닌 정령으로 남자들은 루살카에게 매혹된다. 루살카의 사랑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루살카의 후예들은 모두 7 24일에 익사한다. 바다 깊숙한 곳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어둡고 슬픈, 그러나 매혹적인 루살카 인어의 이야기는 세대를 건너 사이먼의 가족과 주변 인물들과 연결되어 단단한 서사를 구축한다.

201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최고의 화제작으로, 전 세계 에이전트와 편집자들을 매혹시킨 이 소설은 에리카 스와일러의 무려 데뷔작이다. 도서관 사서, 낡고 수상한 책, 타로 카드를 보는 점성술사, 투명해지는 야생 소년, 신비스러운 인어, 기괴한 유랑극단 등... 판타지와 미스터리가 가미된 이 작품을 이루고 있는 매혹적인 요소들을 그야말로 솜씨 좋게 직조해 아름다운 스토리로 탄생시켰다. 오래된 책의 힘과 대를 이어온 가족의 저주라는 고딕풍 소재 또한 빈티지한 책 표지와 너무도 잘 어울리고 말이다. 그녀의 다음 작품이 기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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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레퀴엠 버티고 시리즈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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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는 12년 간 함께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조 파이크는 동료 살해범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퇴직했는데, 덕분에 LA경찰 전체가 아직도 그에게 적대적이다. 그들은 전부터 조가 알고 지내던 프랭크 가르시아의 딸이 실종된 사건 수사를 의뢰 받지만, 그녀는 다음 날 시신으로 발견된다.

중년 여성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또 다른 미소를 주고받았다. 중년 남성은 아직도 신문에 빠져 있었다. 내가 거기 있는 내내, 두 사람 다 상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에게 해야 할 말을 몇 년 전에 모두 다 한 건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들의 침묵은 별개의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라, 천생연분이라서 그저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랑과 커뮤니케이션을 도출할 수 있는 두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런 것들을 믿고 싶어 한다.

프랭크는 경찰이 자신의 신고에 반응을 보이지 않아 딸이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수사를 신뢰하지 않고, 수사 상황을 감시하고 정보전달을 해달라며 엘비스와 조에게 살인 사건 조사도 곁에서 지켜봐 달라고 부탁한다. 프랭크의 딸인 카렌은 과거 조가 경찰이던 시절 그의 연인이었다. 조와 오랜 기간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엘비스는 이번 사건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말이다. 조가 경찰들과 껄끄러운 관계라 주로 수사는 엘비스에 의해 진행되는데, 평범한 살인 사건처럼 보였던 그녀의 죽음이 사실은 연쇄살인의 다섯 번째 희생자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카렌의 시신을 발견해 용의자로 지목된 남자마저 살해된 채 발견되고, 유일한 목격자는 다름 아닌 조 파이크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경찰들은 안 그래도 눈엣가시였던 그를 구속해서 심문하고, 엘비스 콜은 친구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송 차량에서 탈출해 도망자가 된 조와 함께 그들은 과연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이번 작품에서 이야기는 과거 조 파이크가 정복 경찰이던 시절, 아일랜더 팜스 모텔에서 시작했다. 선배 경찰과 함께 제보를 받고 소아 성애자를 쫓던 그 상황에서 용의자와 선배가 죽는다. 그 선배는 내사과에 의해 뇌물수수 혐의를 받던 중이었고, 당시 수사를 맡았던 크란츠는 몇 년 간 조가 그의 파트너였기에 그도 공범일 거라고 의심한다. 물론 당사자가 죽었기 때문에 내사는 그대로 종료가 되지만, 조는 동료들에 의해 공범 혹은 동료 살해범으로 낙인 찍히고 만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카렌의 살인 사건 수사와 더불어 과거의 이야기가 중간 중간 등장해 밀도를 높여주는데,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그 진상을 알게 된다. 그날 진짜 조가 선배를 죽였는지, 그가 비리와 관련이 있었는지,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에 대해서 말이다. 로버트 크레이스의 작품에서는 사건 수사 외에도 캐릭터들의 사연에 만만치 않은 비중이 있는데, 이번 작품 역시 덕분에 캐릭터들의 매력이 더 빠져들 수 있었다. 엘비스 콜가 여성판 조 파이크라고 말하는 여형사 사만다 돌런과의 공조 수사도 흥미롭고, 변호사로 일하다 지역 방송국의 법률분석가로 일하면서 최근에 엘비스와 함께 하기 위해 LA로 이사를 온 그의 연인 루시와의 관계도 극에 재미와 긴장감을 더해준다. 어쩌다 보니 이들 세 사람 사이에서 삼각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과거 조의 연인 카렌과의 관계와 선배와 관계, 그리고 그가 묻어둬야 했던 사랑이야기까지, 이 작품은 범죄 소설로서의 장점 외에도 매우 뛰어난 드라마를 구성하고 있다. 한마디로 600여 페이지가 지루할 틈 없이 흘러간다.

나는 차에 앉았지만 시동을 걸지는 않았다. 사건을 조사하는 건 인생살이와 비슷하다. 머리를 낮추고 있는 힘껏 쟁기를 끌며 나아갈 수 있지만 그러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세상은 더 이상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곳이 아니다. 갑자기, 우리가 만사를 보는 방식이 달라진다. 세상이 전에 거기에 있던 것들을 감추고는 다른 식으로는 보지 못했을 것들을 드러내면서 색깔을 바꾸기나 한 것처럼.

범죄 소설에서 캐릭터는 플롯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니, 사실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로버트 크레이스의 작품은 그야말로 기가 막히게 걸출한 두 명의 캐릭터를 탄생시켰으니, 웬만해서는 재미 없기란 쉽지 않은 시리즈가 되었다. 거기에 더해 탁월한 플롯과 구성, 담백한 문장과 속도감, 리얼한 경찰 수사 과정과 LA라는 도시에 대한 매혹적인 묘사까지 더해졌으니 뭐, 이 시리즈는 어떤 작품을 만나도 최고일 수밖에 없다.

엘비스 콜이라는 인물은 그 이름 때문에 어딜 가나 주목을 받는데, 거의 하루 종일 농담만 해대는 캐릭터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시종일관 농담과 수작으로 일관하는 인물처럼 보이는데, 수사를 할 때는 또 완벽하다. 스스로 팩트 파악 분야에서는 최고 레벨이라고, 자신은 모든 걸 보고 모든 걸 듣는다고 말할 정도이다. 자칭 세계 최고의 탐정이라고 농담처럼 떠벌리지만, 그가 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될 수밖에 없다고나 할까. 게다가 그는 눈에 띄는 여자에게는 항상 작업을 걸 정도로 타고난 바람둥이에다 멋쟁이이기도 하다. 남성적인 매력과 부드러운 매너로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거의 매번 고객과 감정적으로 얽히고 만다. 사랑에 빠지거나, 혹은 사랑을 받거나. 이번 작품에서는 고객이 아니라 수사 동료와 핑크빛 기류가 생기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지조를 지킨다. 바람둥이처럼 보였지만 사실 자신의 여자가 있을 때는 그 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순정남이기도 했던 거다. 그는 뛰어난 입담으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시종일관 툭툭 던지는 재치 있고 천연덕스러운 농담을 던진다. 덕분에 복잡한 플롯과 무거운 스토리 속에서도 마치 잘 빠진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독자들이 긴장을 풀고 다시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조 파이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든 그가 선글라스를 벗으면 그 깊고 파란 눈에 매혹되고 만다. 해병출신의 전직 경찰로 약자를 괴롭히는 놈들을 가장 증오한다. 어린 시절 알콜 중독자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와 함께 하루가 멀다 하고 퍼부어지는 폭력에 시달려야 했고, 덕분에 정의를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부터 지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학대와 폭력으로 그의 유년기가 물들 동안 경찰도, 친구도, 이웃도, 그를 보호해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을 길렀고, 지금도 매일같이 체력을 단련한다. 그는 또한 절대 웃거나 미소를 띄지도 않는다. 어떤 감정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는, 차갑고, 단단하고, 위험하고, 불가사의한 아웃사이더라고나 할까. 오로지 앞으로만 전진하고, 어떤 후회나 망설임도 내비치지 않기에, 악인에게 무자비하고 냉혹하다. 그는 가치 있는 일에는 희생을 아끼지 않는다.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기꺼이 몸을 던지며, 일반적으로 법의 철칙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만의 엄격한 도덕과 윤리 강령이 있으며, 자신의 행동에 완벽하게 책임을 지려고 최선을 다한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침묵과 무뚝뚝함과 거칠어 보이는 외모 덕분에 다가서기 어렵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영혼의 비극적 결함 덕분에 쿨한 섹시가이로 느끼는 여자들이 더 많다.

L.A.레퀴엠은 엘비스 콜 시리즈 여덟 번째 작품으로, 로버트 크레이스 최고의 걸작으로 불린다. 국내에서는 무려 6년여 만에 만나게 되는 로버트 크레이스의 신작이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엘비스 콜이다. 그리고 그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최고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조 파이크는 이 작품 L.A.레퀴엠에서 거의 투톱의 주인공으로 활약하다 마침내 워치맨이라는 작품에서 단독 주인공으로 나서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후 퍼스트 룰과 센트리 등 조 파이크가 활약하는 작품들이 시리즈를 통해서 계속 선보이고 있다. 물론 모든 시리즈에서 두 캐릭터가 거의 항상 같이 등장하지만 말이다. 시종일관 농담을 툭툭 던지는 엘비스 콜과 항상 냉철하고 무뚝둑한 조 파이크는 동전의 양면처럼 외모도 성격도 너무도 다른 상반된 캐릭터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에 대해 통일된 내면을 가진 일종의 이란성 쌍둥이라고 말한다. 다만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하나는 농담을, 하나는 쿨함을 선택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잔인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엘비스 콜과 조 파이크라는 인물은 그 어떤 작품 속 캐릭터들보다도 더 현실적이고 개성 있으며, 인간미가 넘친다. 엘비스 콜의 농담 덕분에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데도 유머스럽고 경쾌하고, 거칠고 퉁명스럽지만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조 파이크 덕분에 스토리는 더욱 진지하고 깊어 진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문체도 속도감을 더해주어 장르의 재미를 살려주고, 그 와중에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져 순간순간 뭉클해지기도 한다. 현재 이 시리즈는 올해 여름에 출간될 작품까지 모두 17편이다. 그 중 국내 출간작은 이번 작품까지 단 세 편. 물론 시리즈 외에 스탠드 얼론 두 작품이 있긴 하지만. 부디 버티고에서 이 시리즈는 계속 출간해주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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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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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가 맞는 설명이 된다고 하여 진실은 아니다. '우리 딸이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유족의 비논리적인 감이 경찰이 모아온 차가운 사실의 조합보다 더 많은 진실을 내포할 때도 있다. 살인이든 자살이든 물리법칙에 맞는 설명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바로 '동기'. 동기라는 인과를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동기 없이는 사건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사실을 구성하는 블록이 차례차례 맞아 들어가 물리법칙에 근거한 모든 의심을 잠재운다 하더라도 동기가 제대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해령의 모친인 타분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해령의 자살은 선뜻 동기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선택' 중에서

식당주인 50대 여성이 귀갓길 식당 앞에서 피살된다. 피의자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해 범행을 마음먹었고, 살인은 우발적으로 저질렀으며, 순순히 자신의 범행 사실을 자백했다. 게다가 CCTV라는 완벽한 증거도 있었기 때문에 법정에는 살인사건에 걸맞은 긴장감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피의자는 모든 범행 사실을 부인한다. 수사기관에서 자백은 했지만 본의 아니게 거짓말한 거라며, 자신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피고인이 법정에서 부인을 하면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은 증거로서 가치가 없어지고, 자백조서가 모두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만다. 하지만 다른 증거들이 워낙 명백하기 때문에 검사 입장에서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대체 피의자는 무슨 속셈인 걸까. 피고인 측은 피고인의 형을 증인으로 신청하는데, 그가 법정에 등장하자 방청객이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일란성 쌍둥이였던 것이다. 피고인과 피고인의 형 모두 사건 당일 알리바이가 없고, CCTV에 찍힌 사람이 형인지 동생인지 구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둘 중 누구란 말인가. 그들 두 형제에게 놓인 혐의의 양과 질은 똑같으며, 따라서 피고인이 유죄일 확률은 50퍼센트, 무죄일 확률 또한 50퍼센트라는 것이 피고측의 주장이었다. 형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이 나려면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이 필요하고, 무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고, 그 의심에 합리성이 있다면 유죄로 할 수 없다. , 검찰 측에서는 과연 어떻게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변호사 사무실에 일흔을 넘었을 성싶은 할머니가 찾아온다. 사위는 3년 전에 죽었고, 딸에게 아이가 둘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가 딸과 함께 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딸과 막내 손녀를 한꺼번에 잃고, 남은 건 첫째 손녀딸 한 명 인데 앞으로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하다고. 마침 딸의 생명보험금이 있는데, 보험사에서는 딸이 자살을 했기 때문에 지급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있다고 했다. 교통사고로 죽은 건 맞는데 경찰조사에서는 자살로 결론이 나왔다고. 이유인즉 딸이 운전 중에 외과용 메스로 자기 손목을 그었다는 것이다. 운전 중에 손목을 긋다니, 게다가 뒤에는 아기를 태운 채로? 전대미문의 이상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경찰 얘기로는 아기하고 동반자살하려고 운전 중에 손목을 그었다는데,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좀 이상한 결론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 사건은 사고인가, 타살인가, 자살인가? 검사 생활을 접고 변호사를 개업한 연정은 의혹을 안고 사건을 맡기로 한다.

 

"내가 결론 갖고 뭐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김옥선은 빙그레 웃었다. 백제의 마애불 같은 미소였다.

"어떤 아쉬운 생각이요?"

"그냥, 사람을 모르니 저런 판결이 나는 구나, 하는. 아이구 아니, 아무튼 그걸로 됐어요."

"사람을 몰라 내린 판결이라.........무슨 말씀이신지?"

                                                                              -'구석의 노인' 중에서

도진기 작가하면 '백수 탐정 진구'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가 대표적인 그의 캐릭터이지만, 이번 소설집에서는 그에 못지 않게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도 만나 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로웠다.  그가 쓴 첫 번째 단편인 <악마의 증명>과 그를 작가로 데뷔하게 해준 한국추리잡가협회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한 <선택>이라는 두 작품에서 등장하는 호연정 검사이다. <악마의 증명>에서는 검사로 등장해 쌍둥이 용의자 앞에선 딜레마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선택>에서는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일을 시작하며 모두가 자살이라 말하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조사한다. 그녀가 그 사건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정말 가슴이 먹먹해지는 여운을 남겨 주었는데, 모성이라는 감정이 뭔지, 엄마라는 존재가 자식을 위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도진기 작가는 만약 자신의 딸이 법조인이 된다면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이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언젠가는 호연정 검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리즈도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본다. 물론 진구와 고진이라는 걸출한 캐릭터들이 버티고 있어서 새로운 시리즈의 히어로를 세우기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도진기 작가의 작품은 그 동안 장편으로만 만나왔는데,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느낀 건 추리 소설의 묘미가 단편에서 정말 잘 살아난다는 거였다. 짧은 이야기라 복잡한 플롯을 구성하지는 못할 테고, 캐릭터의 매력도 보여주기 어렵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단편 소설에 대한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린다고나 할까. 여기 실린 단편들은 기존에 다른 출판사를 통해 발표되었던 작품 7편과 미발표 원고 1편이다. 그가 추리소설을 써보려고 마음 먹은 후 쓴 첫 번째 단편 소설도 있고, 미스터리 신인상을 받게 해준 작품, 그의 오컬트 취향이 드러난 독특한 작품, 미스테리아 창간호에 실렸던 작품, 나혁진 작가가 원고를 읽고 최고의 단편이라고 극찬을 퍼부었던 작품도 있다. 굉장히 다양한 소재를 색다른 방법으로 접근한 이야기들이라 정말 흥미진진했다. 앞으로 국내 추리 소설가들의 단편도 이렇게 소설집의 형태로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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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빛의 일기 - 하
박은령 원작, 손현경 각색 / 비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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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도>를 보겠다며 담을 넘어 들어왔던 당찬 소녀.....당신이 그려내는 그림들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나는 무슨 짓이든 할 것이오."

그 말을 끝으로 이겸은 까무룩 잠이 든다. 사임당은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가슴이 저릿하다. 자신의 전부를 내걸고 달려오는 이 남자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갚을 길 없고, 마주 볼 수 없는 마음이 아닌가. 하늘이 제아무리 높고, 땅이 제아무리 넓다 한들, 목숨을 내건 사랑만큼 높고 넓을 것인가.

<사임당 빛의 일기> 그 두 번째 이야기는 이겸이 사임당을 위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희생했는지, 그 전모를 알게 되면서 시작한다. 그는 왜 갑작스레 사임당이 자신과의 혼인을 파기하고 다른 남자와의 삶을 선택했는지 알 수 없어 괴로웠는데, 비로소 전모를 알게 된다. 그 모든 일들의 배후에 전하께서 내린 시가 있었다는 것. 그 시를 본 사람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가 바로 사임당이라는 것도. 예정대로 두 사람이 혼인을 했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는 것도 말이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당신의 희생으로 내가 살아왔소! 이제부턴 내가 당신을 위해 살 차례요. 조선에서 제일 힘 센 사내가 될 것이오. 당신을 위해..... 아무 걱정 없이 오롯이 화가 사임당으로만 살아갈 수 있도록!

한편, 사임당은 종이공방에서 아주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유민들을 위한 제사를 이십 년째 지내고 있다. 그 동안 겪어온 양반들과는 전혀 다른 사임당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던 종이 공방의 대장은 그들을 귀한 사람들이라 지칭하는 그녀의 말에 당황한다. 그러다 팔봉의 고백에 의해 운평사 유민들이 몰살당한 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의 그림과는 상관없이 애초에 놈들은 고려지 비법만 챙기면 죄다 쓸어버릴 심산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죄책감과 울분이 숨통을 조이던 이십 년 세월 앞에 사임당은 무릎에 힘이 풀리고 만다. 그 와중에 종이공방의 유민들이 포교에 의해 줄줄이 잡혀 들어간다. 그 동안 어마어마하게 밀린 조세 때문에 구속이 되고 만 것이다. 사임당은 남편 이원수에게 그들을 구하기 위해 땅문서와 집문서를 담보로 속전을 구해야겠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나머지 금액을 구해오겠으니 사람들을 풀어달라고. 부서질 듯 여리고 작은 모습 어디에 대장부보다 더 큰 배포가 숨어 있는지, 유민들은 감격한다.

"그 소녀는 이제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금 공 앞에 있는 저는 보잘것없는 아낙일 뿐입니다. 단 한 번뿐인 인생, 지나간 인연을 위해 공의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현명한 사랑이란 게 있소? 사랑은......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것이오."

"............"

"그저.......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사임당과 유민들은 나머지 돈을 구하기 위해 운평사 고려지를 만들어내기로 하지만 수월치 않다.  그 과정에서 민치형과 휘음당은 더욱 악독한 방법들로 그것을 방해하고, 이겸은 묵묵히 뒤에 서서 그녀를 보호하고 도와주기 위해 애쓴다. 휘음당의 계책에 의해 결국 사임당의 아들 현룡은 자진 출재하는 걸로 중부학당을 나오게 된다. 그 와중에도 '아이보단 그 아비의 권세와 재물을 더 중시하고, 나라의 근간이 되는 백성들마저 우습게 여기면서까지, 오로지 과거공부만을 강요하는 이곳에선 더는 배울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중부학당 자모회 수장 자리가 다른 이를 짓밟으면서까지 그토록 지켜내야 하는 것이라면, 댁은 계속 그리 사시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온몸이 타 들어갈 것만 같은 휘음당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렇듯 선과 악의 대비, 쫓기는 자와 괴롭히는 자, 음모를 꾸미는 자와 그것을 빠져 나오는 자의 대비로 이야기는 시종일관 흘러간다. 어찌 보면 우리 나라 사극의 거의 모든 드라마가 이런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지루하거나 뻔하지 않다. 아마도 사임당과 이겸이라는 독보적인 캐릭터 때문이 아닐 까 싶다. 그들이 실존 인물이고 우리 역사 속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마음이 그대로 독자들에게도 전달이 되어서 일 것이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횃불처럼 뜨거운 남자 이겸, 그리고 삶이 어떤 고통과 역경을 주더라도 넘어질지언정 무너지지는 않는 여자 사임당. 다만 아쉬운 점은 타임슬립이라는 장치가 아닐까 싶다. 한국미술사를 전공하는 강사 지윤이 미술사학계의 실세인 민정학 교수에 의해 위기를 겪고, 그녀가 우연히 발견한 고서를 복원해서 과거 사임당의 일상을 담은 일기로 교차 진행되는 스토리는 상권보다 하권에서 더 몰입을 방해한다. 사임당과 이겸의 스토리에 푹 빠져들려고 하면 갑작스레 등장한 현재의 이야기가 그 흐름을 끊어낸다고 할까. 타임슬립이라는 장치를 빼고 그냥 정통 사극으로 풀어냈다면 드라마도 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삶이라는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무너지고야 말 때가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와도 삶에 휘둘리지 않고, 넘어질지언정 무너지지 않았던 사임당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삶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고, 어떤 순간에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그 모습이 아마도 당신에게도 다시 일어설 힘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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