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를 건너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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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존재는 불가사의해서 전혀 흥미도 없었고 나중에 후회한 적 조차 없는데도 문득문득 그때 일을 떠올릴 때가 있다.

아키라는 공상 속에서 이 가게를 이어받는다. 아유미가 아닌 다른 여자랑 결혼해서 지역 상점가의 임원 같은 것을 맡고 있다. 속 썩이는 아들이 있을 때도 있다. 입은 험하지만, 주변에서 미인이라고 평판이 자자한 딸이 있을 때도 있다.

이런 바보 같은 공상을, 예를 들면, 출퇴근 시간 중에 전철 같은 데서 한다. 딱히 현실 생활에서 안 좋은 일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좋은 일도 없는, 정말로 평상시와 똑같은 날에 왜 그런지 또 하나의 자기를 공상한다.

맥주 회사 영업 과장 아키라는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는 아내 아유미와 조카 고타로와 함께 살고 있다. 고타로의 아빠가 싱가포르로 전근이 결정 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키라네 집에서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아유미는 도쿄의 주요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화가 지망생 때문에 스트레스이고, 아키라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집 앞에 보낸 이를 알 수 없는 물건이 배달되기 시작하는 게 신경 쓰인다. 꼼꼼하게 포장된 상자에 들어 있던 건 선물용 술과 쌀. 물건 자체는 딱히 수상쩍다고 할 게 없었지만, 누가 무슨 목적으로 배달을 시킨 건지 알 수 없어 찜찜하기만 하다.

한편 뉴스에서는 도쿄 도의회에서 여성 비하, 성희롱 발언을 한 의원을 조사하는 것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야유는 확인되지 않았고, 자신이 발언했다고 나서는 의원도 없어 답보상태 였다. 그런데 독신인 여성 도의원에게 "당신부터 빨리 결혼해" "아이를 못 낳나"라는 성희롱 같은 야유를 한 당사자가 아무래도 남편인 히로키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아쓰코다. 집안 살림을 하고, 아들을 키우며 평범하게, 만족스런 삶을 살던 그녀였는데, 그 야유 문제가 계속 보도되고, 남편의 몇몇 행동으로 유추해 그가 의심되기 시작하자 이런 저런 일들이 계속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모두 남편의 얘기를 하는 것 같고 말이다. 그러다 슈퍼에서 장을 보다 분명 자신이 고르지 않은 물건이 함께 계산되는 걸 두 번이나 발견하자, 분명 누군가 자신의 가족들에게 악의로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런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넌 옳다는 거야. 올바른 녀석은 설령 자기가 잘못된 일을 해도 그게 옳다고 굳게 믿어버린다고."

다큐멘터리 감독 겐이치로는 가부키초에 사는 아이들을 취재하며 가난 속에서 꿈을 키우는 그들의 모습을 응원하고, 홍콩 우산혁명을 취재하며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혈액세포에서 만들어낸 특정 세포를 정자와 난자로 만들어내는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는 사야마 교수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취재를 타진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두 달 뒤에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상대는 취미 생활을 하던 북 동아리에서 만났던 가오루코였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동아리 리더였던 유부남 유키 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동료들은 그녀가 겐이치로와 결혼한다는 소식에 놀라워한다. 가오루코는 요즘 일을 핑계로 약속을 취소하거나, 미심쩍은 행동을 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 설마 하는 생각에 유키가 일하는 회사 근처 카페로 갔는데, 그곳에서 겐이치로는 그녀가 유키와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항상 옳은 것의 가치를 믿고, 자신이 하는 행동 또한 그게 정답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던 그였기에 불륜이라는 행위는 너무도 옳지 않은 것이었다. 과연 그는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결혼이란 게 어디서나 이런 모양이야" 라며 히비키가 웃어 보였다. 린의 긴장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고 싶었다.

"......상대가 나 같은 사인이 아니라도 오랜 세월 같이 살다 보면, 아내란 존재는 남편이 짜증스러워지는 모양이야. 집에서 재채기만 크게 해도 살기가 느껴진다나......... 결국 결혼 생활이란 어느 쪽인가가 인내해야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현대 인간에게는 인내가 가장 서투르니 가능할 리가 없을 테고, 결과적으로 현재 상황에서는 인내할 수 있는 사인이 상대로 선택되지만, 앞으로 로봇의 성능이 좀 더 좋아지면 그 역할도 로봇이 맡게 될지 모르지."

이야기는 사계절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수상쩍은 물건이 배달되어 무료한 삶이 흔들리는 아키라의 봄, 도의회 의원이 성회롱 발언의 주인공일까봐 조바심 내며 전전긍긍하는 아쓰코의 여름, 곧 결혼 예정인 연인이 유부남과 불륜을 저지르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겐이치로의 가을, 그리고 겨울. 평범한 일상들이 별다른 클라이막스 없이 소소하게 펼쳐진다. 도쿄라는 같은 시공간에 살지만, 전혀 교집합이 없어 보이는 이들 세 인물의 이야기는 마지막 겨울이라는 계절에서야 비로소 복선들이 서로 선을 그으면서 퍼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한 건, , 여름, 가을은 2015년이고, 겨울은 그로부터 70년 후의 시점이라는 거다. 갑작스럽게 이야기는 '미래'로 시공간을 이동해버린다. 현실의 소소한 드라마가 이어지다 갑작스레 미래사회가 등장하는 판타지가 펼쳐지자 처음에는 대체 이게 뭔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전혀 다른 시대에서, 완전히 상관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서로 이어져 있었다. 우리가 매일 같이 보내는 일상의 시간들, 그리고 그 속에서 사소한 선택과 결정들이 미래의 우리 삶을 어떻게 달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 삶은 누구에게나 불확실하지만 그것 조차 우리가 그때그때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깨달음은 작품의 후반부에 가서야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온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던, 그러나 각자의 평온한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들을 계기로, 자신이 옳다고 믿어왔던 가치관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세 인물들이 겪는 드라마는 소소하면서도 사실은 세상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던 셈이다. “그때 바꿨으면 좋았을 거라고 누구나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바꾸려 하지는 않는다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극중 인물의 말처럼,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던, 하지 않았던 그것, 하려다 말았던 것, 말하려다 만 것, 보고도 못 본 척 했던 것, 하고 싶었지만 미루었던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당신의 미래를 만들고, 삶을 구성하고, 세계를 변화시킨다. 살면서 그때 그랬으면 하면서 후회하는 일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요시다 슈이치는 지금 이 순간이 만들어 내는 미래를 보여주며, 오늘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아름답게 포착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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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세계
리즈 무어 지음, 공경희 옮김 / 소소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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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하면서 스트레스가 많을 때,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몰입 가상현실 속에서 휴식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일상을 대체할 수 있는 진짜보다 더 짜릿한 가상현실이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보고 느끼고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이 모두 가상현실이라면 말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데이비드와 책상 앞에 앉은 광경을 그렸다. 벤다이어그램 처럼 머리를 맞댄 두 사람 - 에이더의 머리는 어릴 적 소소한 일로, 데이비드의 머리는 우주의 신비가 꽉 차 있고, 둘 사이는 겹치는 부분이 점점 커졌다. 이런 순간이면 딸에게 아버지는 제우스였고, 자신은 그의 머리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튀어나온 아테나였다. 품위와 지혜를 겸비한 여신. 상상 속에서 그들은 연구소나 집에 있었고, 둘뿐이었다. 언제나 둘이었다. 거기서 두 사람은 뭐든 에이더 앞에 놓인 문제를 풀고 있었다.

열두 살 에이더에게 가족은 아빠 데이비드 한 명뿐이었다.  컴퓨터공학 연구소 소장인 데이비드는 대리모를 고용해 자식을 갖기로 했고, 딸이 태어난 후 단 한 번도 여자를 사귀지 않았다. 그는 에이더에게 홈스쿨링을 통해 교육을 시켰고, 매일같이 딸과 함께 연구소에 가서 학습을 시켰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에이더에게 또래의 친구는 한 명도 없었지만, 아버지의 연구소 동료들이 그녀에겐 친구이자 제2의 부모와도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쾌활하고 호기심 많은 아버지가 수심에 차서 시무룩해진 걸 에이더가 눈치챈다. 한눈을 팔거나 정신이 멍한 듯 보이는 순간도 많았고, 이따금 말도 없이 산책하러 나가 몇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오곤 했다. 데이비드가 신입 대학원생들을 환영하는 파티를 주최해 해마다 문제를 냈던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잊어 버린 순간, 방안 전체에 스멀스멀 공포감이 번지기 시작한다. 그의 오랜 동료 리스턴이 좌중을 둘러보며 적당히 무마했지만, 그 순간은 에이더의 기억 속에 영원히 봉인된다. 1년 이상 억눌렀던 의심이 고스란히 드러난 순간이었으니까. 아버지는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데이비드는 에이더에게 플로피 디스크 한 장을 건넨다. '에이더' 디스크에 담긴 퍼즐에 대해서 그는 그 어떤 단서도 주지 않았다. 한참 걸릴 테니 천천히 풀어보라고, 단 이것 때문에 다른 공부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고. 이것은 이 작품 속에서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 가는 동안, 에이더에게 커다란 숙제가 된다. 하나뿐인 가족인 딸에게조차 밝힐 수 없었던 아버지의 비밀, 알츠하이머로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그것은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커다란 퍼즐을 하나씩 완성시켜간다. 또래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기에, 어른들과 어울리는 게 훨씬 익숙한, 영리하고 조숙한 열두 살 소녀가 알츠하이머를 앓는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시간들, 그들 만의 유대와 소통의 기억들이 조금씩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과정은 안쓰럽고, 먹먹하다. 결국 데이비드가 요양원에 들어가고, 법정 후견인으로 그의 오랜 동료인 리스턴이 정해져 그녀의 집에서 리스턴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된 에이더. 그리고 처음으로 학교에 가게 되어 또래의 친구들 사이에서 외롭고, 소외된 느낌을 이겨내며 에이더는 조금씩 성장해나간다.

"네가 화난 걸 알 수 있어. 내 정신머리가 붙어 있을 때, 아직 정신이 상당히 온전할 때 말해두고 싶구나. 너를 딸로 갖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말이다, 에이더. 넌 상상도 못할 거야. 현재......"

딸이 대꾸하려 하자 그가 손을 들어 막으면서 말을 이었다.

"현재 말이지, 사실 의학 연구와 기술 분야에서 엄청난 혁신들이 일어나고 있고........."

데이비드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메모가 있으면 좋겠다는 듯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야기는 1980년대와 2000년대가 교차되어 진행되는데,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과거의 시대적 배경이 매우 흥미진진하다. 벽걸이형 전화, 128K 매킨토시가 존재하던, 인터넷도, 인공지능도 없던 시대에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는 인공지능의 초기 단계, 출발점을 낱낱이 보게 된다. 데이비드가 주관하고 있었던 연구소의 주된 관심사는 자연언어처리였는데, 그들은 기계가 인간의 언어를 해석하고 생산하게 되는 프로그램으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초기에 개발했던 엘릭서라는 프로그램은 인간의 대화를 모방해, 지속적으로 독학하고, 대화를 할 때마다 더 많은 지식을 얻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에이더 역시 컴퓨터를 받자마자 엘릭서와 길고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엘릭서가 친구이자,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결국 수십 년에 걸쳐 아버지의 숨겨진 과거와 비밀에 다가갈 수 있는 순간까지 엘릭서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인간과 컴퓨터가 공존하는 시대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에서 리즈 무어는 과학과 암호학, 인공지능의 역사에 이르는 방대한 정보들을 배경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작인 <무게>에서 자기 안에만 갇혀 있는 캐릭터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이라는 삭막한 세계를 다루면서 그 속의 인간에 대해, 그 마음속 심리에 대해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눈으로 보이는 세계와 가상 현실 속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경계선에 서 있던 아버지가, 딸에게 보여지는 현재의 모습과 보여줄 수 없었던 과거의 그것을 떠 안고 살아간다. 그러다 기억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고, 딸을 위해 그 비밀을 퍼즐로 만들게 된다. 딸은 아버지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어서, 아버지가 감추어둔 비밀을 찾아 그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려고 애쓴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하게 된 진실은, 놀라운 충격과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이 작품은 과학 소설로 시작해 가족 드라마로 연결되다, 미스터리로 달려가더니, 엄청난 반전을 안겨주고, 가슴 뭉클한 눈물과 먹먹한 여운을 남기는 드라마로 마무리되는 독특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게다가 인공지능의 시작부터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미래 소설이기도 하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성의 내면을 그려내는 심리 소설이기도 하며, 아버지와 딸로 상징되는 가족 관계를 그려내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진리를 이렇게나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그려내는 작품이 또 있을까. 감정들을 차곡차곡 쌓아 댐을 만들고, 어느 순간 수문을 열어 와르르 무너지게 한 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나서 잔잔해진 수면 위를 가만히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대단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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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웬디 워커 지음, 김선형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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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측할 수도 없고, 예상할 수도 없는 결말, 시종일관 서스펜스와 긴장감을 만들어내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들어주는 구성, 기억의 조작과 존재 가치에 대한 예리하고 가차없는 작가의 시선까지.. 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훌륭한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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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녀 -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김용언 지음 / 반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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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해지자 전혜린의 '드라마 퀸'으로서의 기질, 문학과 예술에 현혹되어 자신이 그 일부인 것처럼 착각하는 '문학소녀'로서의 기질 앞에서 얼굴이 달아오르지 않을 사람은 없다. 스스로를 '공부 안 해도 성적 잘 나오는 천재 소녀'로 포장하는 기술이라든가, 공부도 뛰어나게 잘했지만 그 이외의 것, 즉 다른 모범생들은 꿈도 꾸지 못할 것들을 서슴없이 해치울 수 있는 '비범한 천재 소녀'로 포장하는 기술. '비범해야 한다'라는 열망은 타인의 시선을 전제한 포즈로 가능해진다는 진리를 그녀는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좋아했던 문학소녀였다. 학창시절 교실 한구석에 펼쳐 세운 교과서 안에 책을 숨겨놓고 읽었던 기억이 있는 당신이라면, 이 책을 만날 수밖에 없으리라. 전혜린을 경유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읽기와 쓰기가 폄훼되어 온 기나긴 역사를 파헤치는 책이라니, 읽기도 전부터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다.

'책 읽는 여자의 흑역사' 의 대명사쯤으로 여겨지는 전혜린에 대해, 그리고 그 전혜린에 열광했던 세대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얼핏 전혜린 평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전혜린으로 시작해 전혜린으로 마무리가 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넘어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를 재구성하며 '전혜린'으로 상징되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열다섯 살의 나는 그녀를 동경했고, 전혜린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은 지금의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 적어도 동감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은 있었다. 이기에 밝은 세속적 약삭빠름을 경멸하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남들과 다른 인간임을 보여주겠노라 결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않고 있었음에도 그녀가 보낸 설명 없는 그림이나 단 한 줄의 시구만으로도 나는 그녀의 심경, 그녀가 처한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고 그녀가 내게 보낸 의미를 알았을 뿐 아니라, 또한 그녀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느낄 수 있는 영혼의 벗을 갈망한 시절.

아무나 쉽게 해외여행을 다닐 수 없던 시절, 독일로 유학 간 '천재' 전혜린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아버지의 보호막에서 벗어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삶을 너무 빨리 맞닥뜨린 전혜린의 초조와 불안에 대해서는 왜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던 걸까. 저자는 전혜린에 대해 그녀를 비판적으로 조롱하는 시각, '부잣집 딸내미의 교양 있는-공주-코스프레'라는 시각이 교정되어야만 하는 시대적, 공간적 배경에 대해 낱낱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녀의 '사춘기 소녀스러움'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도, 전혜린의 수많은 자전적 글쓰기가 수필이라는 형식때문에 폄하되고 천대받는 것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리고 전혜린의 수필에 담긴 과도한 여성성과 소녀적 감성, 그 글들이 문학소녀의 유치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성인 여성 작가에게 '소녀적' 혹은 '문학소녀'라는 말이 붙을 때의 함의에 대해서도 말한다. 글을 읽는 내내 뭔가 속 시원한 느낌, 내가 그 동안 하고 싶었던 마음들을 고스란히 글로 표현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전혜린의 삶과 평가에 대한 이야기가 여류 작가 수난사에까지 이르게 되면, 그야말로 전혜린이라는 대상을 넘어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라는 책의 부제로 완벽하게 도달한다. 당시 소녀들의 독서와 글쓰기가 많은 경우 남성들의 시선을 만족시킬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기에 겪어야 했던 그것들과 문학소녀를 얕잡아 보는 시선이 결국 여성-독자-작가를 업신여기는 시선으로 이어져야 했던 그 당시의 모순을 짚어내는 동안,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 조차도 분노가 마구 일었다. 대체 왜, 여성들은, 단지 책을 읽고 쓰는 걸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긴 세월 동안 그런 수난을 겪어야 했단 말인가. 나도 저자처럼 전혜린을 어린 시절에 만났었기 때문에, 당시에 그녀를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처럼 나도 전혜린의 삶을, 글을 동경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전혜린을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러했기에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내 심금을 울린다.

문학소녀. 나도, 당신도 전혜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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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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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친구들을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가끔 그들과 내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요즘 유행이다 싶은 것들, 혹은 이미 유행도 한참 전에 지나서 이제는 다들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내가 전혀 모르고 있는 건 당연하고, 그들에겐 소소한 일상들이 내겐 너무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 투성이였으니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는 생활이 3년 정도 되었는데, 나와 그들 사이의 거리는 어느 새 3억 광년은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유리 볼 속 겨울' 처럼,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가 바로 내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욕실 유리컵에 꽂힌 세 개의 칫솔과 빨래 건조대에 널린 각기 다른 크기의 양말, 앙증맞은 유아용 변기 커버를 보며 그렇게 평범한 사물과 풍경이 기적이고 사건임을 알았다.

                                                                                               -'입동' 중에서

 

 <입동>에는 아이를 잃어 버린 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지난 봄, 오십 이 개월이 된 아이를 잃어 버린다. 아이는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하고, 막을 수 있었다고 자책하기에는 너무도 사소한 사고로 말이다. '가끔은 열 불이 날 만큼 말을 안 듣고 말썽을 피웠지만 딱 그 또래만큼 그랬던, 그런 건 어디서 배웠는지 제 부모를 안을 때 고사리 같은 손으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던, 이제 다시는 안아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는 아이'였다. '무슨 수를 쓴들 두 번 다시 야단칠 수도, 먹일 수도, 재울 수도, 달랠 수도, 입맞출 수도 없는 아이'였다. 그리고 남겨진 그들 부부에게 시간은 그렇게 멈춰 버린다. 누가 세상에서 사라졌든 말든, 계절은 바뀌고 시간은 흘러갔지만, 그들에겐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그대로 였다. 그들만 빼고 지구가 자전하기라도 하는 듯, 그렇게 제자리에 멈춰 선 그들이 바라보는 바깥은 어땠을까. 이제 삼십이 개월이 된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서 그런지,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그냥 후루룩 읽어 버릴 수가 없는 작품이었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매일 같이 생각한다. 왜 하필 그날 그 순간에 그곳에 있던 나의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때 그 장소에 있지만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어떻게든 그 순간을 모면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한시도 잊을 수가 없는 그 생각과 감정들이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생각이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이들은 부재의 무게를 이겨내고 살아가야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그 순간에 세상이 끝난 것만 같겠지만, 시간은 여전히 째깍째깍 흘러가고 우리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으니 말이다. 상실과 결핍의 순간보다, 나는 그 이후의 시간들이 더 마음이 아팠다. 아침은 매일 같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어제와 같은 아침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잃어버린 것은 영원히 되돌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죽음마저 초월한 그 무엇 같은 건,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 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풍경의 쓸모' 중에서

 

아이와 공원에 산책을 나가면, 매 순간 셔터를 누르게 된다. 자주 어딘가 서보라고, 여기를 보라고, 웃으라고 말하며 순간을 붙잡아두곤 한다.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바뀐다고 할 정도로 아이가 금방 자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좋은 순간, 행복한 상황은 금방 지나가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순간을 남겨 두지 않으면 시간과 함께 언젠가는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아는 어른이라는 사실이 가끔은 슬프다. 그냥 그 순간을 오롯하게 느끼고, 호흡하고, 눈에 담으며 즐겨도 좋을 텐데.. 나는 언제나 풍경은 보지 못하고 그 속에 서 있는 아이만 바라보고 만다. 그렇게 찰칵하는 동작과 함께 순간은 과거가 되어 버린다.

 

 

<풍경의 쓸모>에는 가족에게도, 사회적으로도 더블폴트의 삶을 살게 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강사인 정우는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중 교통사고를 낸 대학교수 대신 가해 운전자가 된다. 그런데 그는 정우의 교수 임용에 좋은 말을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임용을 강하게 반대한다. 가족들을 남겨두고 집을 나가 재혼을 한 아버지는 돈이 필요하다고 그에게 연락을 해온다.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사진이라는 모습으로 행복한 순간을 연출하는 것이, 어차피 매순간 뭔가를 잃어버리게 마련인 삶 속에서 그나마 기대와 긍지를 담고 있는 거라는 걸 안다는 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그런데 무슨 말을 하다 여기까지 왔지? 그래, 엄마랑 아빠는....지쳐 있었어.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 던지게 돼 있거든.

                                                                                       -'가리는 손' 중에서

 

김애란의 이번 작품집에 등장하는 이들은 계절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그려지고 있다. 살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상실과 결핍의 슬픔을 견디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바깥은 여름인데 여전히 겨울을 살고 있는 삶은 계절을 느낄 수 없다. 너무 이른 아이의 죽음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사는 부부, 타인을 위해 죽은 남편을 이해해야 하는 아내, 가족 같은 개가 편하게 죽을 수 있도록 혼자 힘으로 안락사를 준비하는 소년 등.. 그들 모두에게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과 뜨거운 열기 가득한 여름이라는 계절은 감당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지나가고 인생은 흘러가게 마련이지만, 누군 가에게는 어느 한 순간부터 그저 상실된 시간, 멈춰진 삶인 것이다. 

 

인생이 어디로 어떻게 나아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그를 닮은 아이를 낳아, 알콩 달콩 가족을 이루는 꿈을 꾼 적이 없다. 연애를 할 때도 당시에는 죽고 못 살만큼 좋았던 그와 미래를 꿈꾸지 않았다. 그저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현재에 충실했을 뿐. 그랬던 내가 어쩌다 보니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일상에 닳고, 육아에 지쳐서 이렇게 평범한 생활을 그리워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나는 김애란의 신작을 읽으면서 내가 놓쳐버린 수많은 선택들과 내가 잃어버린 결핍들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 것, 혹은 앞으로 손에 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 버린 것, 지금은 손에 없는 것,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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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7-20 15: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나이 먹으면서 예전에 행복했던 기억들이 조금씩 잊혀져가는 걸 느껴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주위에 있는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을 소중하게 여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피오나 2017-07-20 19:52   좋아요 0 | URL
그 소소한 것들에 감사해야 한다는 걸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슬픈 현실.. 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