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연령 60세 사와무라 씨 댁은 이제 개를 키우지 않는다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0세 아버지, 69세 어머니, 40세 딸이 함께 살고 있는, 평균 연령 60세인 3인 가족 사와무라 씨 댁의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마스다 미리는 30대 싱글 여성의 이야기는 ‘수짱 시리즈’를 통해, 딩크족 부부의 이야기는 ‘치에코 씨 부부’를 통해, 40대 싱글 여성과 100세 시대에 돌입한 현대가족의 이야기는 ‘사와무라 씨 댁’을 통해 선보이고 있다. 어떤 시리즈를 만나더라도 매 페이지마다 공감 백 만개의 소소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어, 매번 신작이 나올 때마다 믿고 보게 되는 작가가 되었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이다. 한국인 평균 수명은 남성 78, 여성 85세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노후를 보내야 한다. 반면, 은퇴 연력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한창 일할 나이인 30~40대부터 은퇴 후 삶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 작품은 100세 시대를 사는, 40대 싱글 여성의 일상을 그리고 있어 아마 지금 이 시대의 누구에게나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부분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의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읽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코 끝이 찡해지고 말이다.

 

 

옛날에는 어울렸던 색이 지금은 또 별로더라고. 마네킹이 입은 옷을 보면, 저건 10년 전, 이쪽은 5년 전 하고, 어울렸던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돼.
그러게! 여기저기에 옛날의 '나'가 보여.
언젠가, 그 여기저기있는 '나'가 어딘가에서 말을 걸어주지 않을까? '
그 나이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어' 라고.

 

 

 

40세 싱글로 입사 18년차 베테랑 직장여성인 사와무라 히토미. 그녀는 현재 부모님과 함께 사는 독신이다. 3인조의 친한 친구들과 종종 친목모임을 가지며, 연애도, 결혼도 지금은 생각이 없다. 그녀가 친구들과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며,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크리스마스에 외식을 하며 나누는 대화들은 40대이기에 나눌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 20대는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대목들도 있고, 40대가 가까워오거나 이미 지난 세대라면 맞아, 맞아 하며 공감할 수밖에 없는 대목들도 있고 말이다. 40대 쯤 되면 미팅도 더 이상 들어오지 않고, 연애가 어떤 느낌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고, 쇼핑하려 백화점에 가도 젊을 때 어울리던 옷들만 눈에 들어오고, 미용실에 가도 이제는 패션 잡지가 아니라 요리 관련 잡지를 건네주고 말이다. 너무도 소소한 것들인데, 누구나 겪고 있는 보통의 일상이기에 내 얘기 같고, 당신의 얘기 같을 것이다.

 

 

 

만약 여기서 이 말을 아내한테 한다면 "아유, 당신 또 따진다." 하고 나무랄 게 뻔해서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고 시로 씨는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긴 결혼생활 동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고 삼킨 말이
서로 얼마나 될까, 곰곰이 생각. 그러나 이것도 역시 말하지 않았습니다.

 

 

회사를 퇴직하고 정년 라이프를 즐기는 중인 70세 사와무라 시로씨, 요리를 잘하고 손재주가 좋으며 사교적이어 이웃에 친구도 많은 69세 사와무라 노리에씨 부부의 일상은 정말 매 순간 우리 부모님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마 누구나 그러했겠지만 말이다. 사소한 거라도 신기한 걸 알게 되면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남편과 나누고 싶어하는 노리에씨, 나이를 먹으니 건강하게 지내는 게 그냥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엄마의 모습이다. 그들 부부는 담담하게 자신들이 죽은 뒤의 일들을 건강할 때 정리해놓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장례식은 어떻게 할지, 어떤 음악을 틀고, 어떤 꽃을 꽂을지에 대해서 슬슬 준비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우울하게 그려지지 않아 더욱 뭉클하다. 고령의 나이에도 여전히 스포츠 센터에서 규칙적인 운동을 하며, 이런 저런 상상을 해보기도 하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아내지만 아침 체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일부러 자는 척 누워있으면서 배려해주기도 하는 아빠의 모습이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 허무한 날이 있는가 하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날도 있을 것이다. 마스다 미리는 '보통의 매일이 지금처럼 계속 이어지는 것이 진짜 행복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소박하고, 나름의 모습으로 활기찬 이들의 일상을 엿보면서 마음이 괜시리 따뜻해졌다.

 

어느 날, 노리에씨가 텔레비전 위에 꽂아둔 한 송이 작약이 진 것을 발견하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런 식으로 인생을 끝내도 괜찮지 않을까." 그녀는 주위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고, 마음 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내 부모님도 툭하면 이런 얘기를 하셨다. 자식들을 힘들게 하면서까지 오래오래 살고 싶지는 않다고.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만큼, 건강하게 살고 싶다고 말이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식들은 부모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사시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봄은 설레기도 하지만 좀 안타깝기도 하지. '벚꽃을 볼 수 있는 날도 한계가 있다'는 말에, 인생이 짧다는 걸 느껴."

히토미는 직장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다 평균 수명이 160년 정도 되면 좋겠다는 말을 듣는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은 30대가 100년, 다음은 고르게 배분하겠다며, 30대의 최초 20년 동안 애를 다 키워놓고, 남은 30대의 80년 동안은 멋대로 살아 보고 싶다고. 일도 열심히 하고, 새로운 연애도 많이 하고, 여기저기 여행도 하고. 하지만 그렇게 30대가 100년이 있어도 마지막 1년은 쓸쓸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인간의 유한한 삶이라는 것이 참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누구나 영원히 살 수는 없으니까. 누구나 영원히 젊음을 누릴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두 번째 시리즈의 제목인 '사와무라 씨 댁은 이제 개를 키우지 않는다'에 해당되는 에피소드는 이야기 제일 마지막에 실려 있다. 그들이 4인 가족이었던 시절에 대한 뭉클한 이야기는 그들이 앞으로도 개를 키우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어 주면서 다음 시리즈를 또 기대하게 만들어 준다. '사와무라 씨 댁의 오랜만의 여행'이 조만간 출간예정이라고 하니, 홋카이도로 떠난 부부여행과 히토미의 나홀로 여행이 어떤 풍경일지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사와무라 씨 댁의 일상과 그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 집의 이야기 같고, 옆 집의 이야기 같고 그렇다. 마스다 미리는 이 만화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모델이 따로 있지는 않다고, 그저 자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만난 사람들의 파편들이 모여 있는 가족이라고 말한다. '아, 이건 사와무라 씨 댁 가족 같아.' 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수첩에 메모해둔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그 일상들 속에 따뜻함도, 뭉클함도, 서글픔도, 쓸쓸함도 다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러니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시대에 결혼은 아이를 갖고 싶거나 경제적 동반자가 필요하다거나 일에 집중하고 싶으니 집안일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거나 하는 합리적인 이유로 결정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물론 단순히 반려자가 필요해서 결혼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럴 바에야 차라리 친구와 동거하는 편이 낫다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시스템이 살아가는 데 편리하다면 이용하고 필요 없다면 이용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가족과 결혼은 그런 제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주변만 봐도 혼인 비율이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얼마 전에는 30대에 결혼하는 인구가 35퍼센트에 불과하다는 뉴스도 본 적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남성이 전쟁터로 징용되면서 태어나는 아이의 수가 극단적으로 줄어들었고, 기 위기 상황을 계기로 인공수정 연구가 비약적으로 진화했다. 남성이 전쟁터에 나가도 정자를 보관해두면 임신이 가능해졌으며, 남겨진 많은 여성들이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인공수정 연구는 계속 발전했고, 수정 확률이 교미보다 압도적으로 높아졌으며 안전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더 이상 성관계를 통해 아이를 낳지 않게 된다. 사춘기가 되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속 가상 캐릭터를 통해 스스로 성욕을 해소했고, 인간과 연인 상태가 되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그들은 섹스를 하지 않았다. 부부가 성관계를 가지면 근친상간이라고 비난 받으며, 이혼의 사유가 되기도 했다. 이야기는 바로 그런 가상 세계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아마네는 초등학교 시절, 자신이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인공수정이 아니라 교미를 통해서 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빠랑 엄마는 정말 사랑해서 결혼했고 그 결실로 아마네를 낳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던 엄마는 딸에게 끊임없이 원시적인 교미에 대해서 설명해주었지만, 대체 왜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을 낳은 것인지 아마네는 이해할 수 없다. 그녀는 인공수정이 발달한 세계와 교미로 번식하던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며, 점점 인간과의 섹스에 몰두하게 된다. 인간과 연애하고 번식할 필요가 없어진 세상, 머지않아 섹스도, 연애도 사라져 버릴 그 세상에서 오로지 그녀만이 끊임없이 인간을 사랑하고 육체를 탐닉한다. 허구의 인물과 연애하는 것은 정상이고, 인간과 살을 맞대고 연애하는 것은 비정상인 세계에서 말이다.

 

"난 어릴 때부터 가족을 소중히 여겼고, 지금도 가족이 가장 소중해. 항상 가족이 필요하다고, 또 가족이 소중하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일이나 연애와 달리 인간의 본능 아냐? 가족이 생기길 바라는 건?"

"그런가. 그럼 실험도시는 실패하겠네."

"그딴 게 잘되겠어? 가족이 없는 상태에서 아이만 태어나는 세상이 잘 돌아가겠느냐고. 그리고 아이가 있든 없든, '나와 인생이 얽혀 있는 사람'이 인간에게는 필요해. 우리 몸과 마음은 그런 걸 필요로 하게끔 만들어져 있어. 그러니까 다들 그런 세상에선 도망쳐 나올 거야. 가족이 필요해, 외로워서 죽을 것 같아 하면서."

사실 기본적인 설정만 보고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떠올렸는데, 직접 읽어 보고 나니 무라타 사야카가 그려낸 세계는 조금 다른 모습인 것 같다. 이 작품의 여러 가지가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그 중에서도 충격적인 설정은 가족 시스템을 아예 없애버린 '실험도시'였다. 컴퓨터로 선정된 주민이 매년 1224일에 일제히 인공수정을 하고 출산을 해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가 아니라 센터에 맡겨져 도시의 모든 어른들이 '부모 역할'을 하며 함께 양육한다. 아이들은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센터에서 지내며, 이후 수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성인으로 간주되어 사회로 나가게 된다. 그들의 세상에서는 모든 어른이 모든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모든 아이가 모든 어른에게 사랑 받으며 자라는, 에덴과 같다는 뜻에서 이를 에덴 시스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머지 않은 미래에 인류는 '가족 시스템'이 아니라 이곳의 새로운 '에덴 시스템'으로 번식할 거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가족이라는 개념이 사라져버리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마치 도시 전체가 합심하여 인간의 아이라는 애완동물을 키우는 듯한 광경은 낯설기도 하고, 어쩐지 서글프기도 했다.

물론 2017년을 살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가족 제도라는 것은 많이 해체되고, 붕괴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노인문제, 청소년 문제,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 문제, 부부간의 불화 등.. 한 두 가지가 아니니 말이다. 게다가 여전히 남녀 간의 불평등한 관계와 임신, 출산에 대한 고정관념 또한 항상 불거지는 문제이다.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 받는 여성들, 섹스를 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이좋은 부부.. 이런 사람들을 위한 유토피아가 바로 극중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다고만 여겨왔던 모든 가치들이 부정되는 그곳에 쉽사리 동화되거나 공감하기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결혼과 출산이라는 신성한 가치에 균열을 내고 가족제도 자체에 반기를 들고 있는 무라타 사야카의 관점은 대단히 통쾌하기도 했다. 가족의 해체를 그리고 있는 작품을 읽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의 가치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스파이어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최민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니, 전부 다야. 남자들 전부가 다 그렇다고. 이건 선전포고 없는 전쟁인 거야. 그들은 우릴 증오해. 남자들은 우니 나이가 몇이건 우리가 대체 어떤 사람이건 간에 싹 다 미워하고 있다고. 근데 아무도 그걸 인정하려 들지 않아. 심지어 우리 조차도." 그녀가 하도 길길이 뛰는 바람에 설득할 방법이 없었고, 그로 인해 우리는 불편해졌다. 왜냐하면 내가 전에 말했듯(그리고 이는 바로 지금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진실이다) 만약 당신이 여성이라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들이 있고, 당신이 어린 소녀이거나 여자라면 당신은 여성이며, 당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 미국 뉴욕 주 북부 소도시의 가난한 동네를 배경으로 비밀 조직 '폭스파이어'를 결성한 소녀들의 이야기이다.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시고, 술 냄새를 풍기고 집에서 싸움이나 하던 아버지 역시 어딘가에서 죽어서 혼자인 렉스와 알콜 중독인 엄마와 사는 매디는 친구들을 모아 비밀 조직을 결성하게 된다. 그들의 상징인 붉은 불꽃을 문식으로 새기며 입회식을 거행했던 이들 조직은 훗날 덩치가 불었고, 인원수가 많아지자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개성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가 특별하기를, 타인보다 우월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어리고 가난하며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들을 억압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맞서기로 한다. 사회의 부조리를 넘어서려는 소녀들의 연대감과 믿음은, 다소 무모해 보일지라도 열정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사회적으로 약자로서의 여성이었지만, 마치 아무도 날 상처 입힐 수는 없어. 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이들은 학생들에게 부적절한 관심을 표현하고 성추행을 일삼는 수학 선생을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어 학교를 그만두게 만들고, 개들을 학대하고 소중히 다루지 않는 가게 주인이 장사를 더 이상 하지 못하게 소문을 내기도 하고, 조카에게 돈을 뜯어내고 이성적인 관심을 보이는 매디의 삼촌을 현장에서 혼쭐을 내주기도 한다. 하지만 폭스파이어의 행동은 더욱 대담해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조직의 리더인 렉스는 징역 5개월 형을 살게 된다. 세상이 그녀를 기소한 혐의는 다음과 같다. 중절도죄. 무면허 운전. 난폭 운전. 속도위반. 생명의 위협. 경찰관의 지시에 불응. 악의적 재물손괴. 치안 문란. 무기를 숨겨서 소지. 불법 무기 소지. 치명적인 무기로 흉악한 공격 시도. 습관적 무단결석. 교육적 문제아. 문란한 미성년자. 폭스파이어가 어떤 행동을 해왔는지 대충 짐작이 될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인 강자의 시선으로 판단한 어른들의 편협한 시선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우리 모두 죽음을 모면했다.

렉스가 에이시 홀먼의 뷰익에 우리를 태우고 거의 가본 적 없던 시골길을 달렸던 그 거칠고 난폭한 드라이브. 앞으로 절대 잊지 못하리라. 우리가 살아 있는 한은.

나는 여전히 가끔 그때 일을 꿈꾼다. 그러다 겁에 질려 잠에서 깨지만, 그러면서도 미소를 짓는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죽음을 속여 넘겼으니까. 그건 아무나 그랬다고 주장할 수가 없는 일이다.

우리는 여성 혐오가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여성 혐오와 관련된 사회적 담론이 증가하고, 젠더 폭력 사건들이 이슈화 되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폭증하고 있다. 하지만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이 흘렀는데도 여성을 바라보는 일부의 시각은 여전히 수준 이하인 것이 사실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가 하면 페미니스트 여성에게 살인 예고를 하는 등 여성을 향한 폭력적 언행을 끊임없이 자행하고 있다. 이럴 때, 바로 지금, 폭스파이어가 현실에 존재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거침없이, 두려움 없이, 당당히 분노하고, 남성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맞서고, 잘못된 사회적 규율에 반격을 세울 수 있는 여성들만의 비밀 조직이 있다면 어떨까. 극중 부조리와 폭력으로 가득한 20세기 후반 미국의 실상이 현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약자로 하여금 사적 제제를 집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라는 것이 이렇게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 속 이야기는 현재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영화나 소설을 통해 접하는 이야기들이 일종의 간접적인 대리체험이라고 했을 때, 내용이 궁금해서 보기는 하지만 두 번 다시는 체험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작품이 가끔 있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작품들도 나한테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작가였다. 사이코 패스의 매우 폭력적인 시선으로 보는 세상은 굉장히 불편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불편하지만 인간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이렇게나 소름 끼치게 잘 그려내는 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혹은 끔찍한 묘사나 고통스러운 대목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작품에서도, 참 아프고, 두려운 감정이 들게 하곤 했다. <좀비>, <대디 러브> 등 많은 작품들이 그러했는데, 이번 <폭스파이어>는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만큼 불편한 부분 없이 술술 읽혔다. 물론 여전히 폭력과 복수가 난무하는 강렬한 이야기이지만, 그럼에도 기존 작품에서 느꼈던 끔찍하거나 불편한 부분이 없어서 읽기에는 참 좋았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이미 두 차례나 영화화된 작품이기도 하다. 첫 번째 작품에선 스타가 되기 전 안젤리나 졸리가 렉스 역을 맡았었고, 두 번째 작품에서는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건조한 톤으로 원작을 고스란히 살리고 있다고 하니 영화와 비교해서 읽는다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8-16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성 폭력을 방지하고 맞서는 여성들의 모임이나 조직이 생긴다면 찬성합니다.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런 모임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성 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널리 알릴 수 있고, 근절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연대감 형성입니다.

피오나 2017-08-16 17:22   좋아요 0 | URL
그죠? 약자들의 연대감 형성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이 시사하는 바가 많더라구요^^
 
모럴센스 4 - 남들과는 '아주 조금' 다른 그와 그녀의 로맨스!
겨울 지음 / 북폴리오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M을 소재로 한 로맨스 만화라고 하니 사실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뭔가 변태스러운 취향의 다소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SM과 달콤한 핑크빛 로맨스물이 대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웬 걸, 편견과 오해라는 것이 이래서 무섭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분명 SM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내용은 거북하지 않았고, 선정적이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이들의 로맨스가 불편하지 않았다. 여느 순정 만화의 로맨스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우리가 익히 상상할 수 있는 오피스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연애물과 크게 다르지 않는 정상적인 수위의 만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의 취향이 남들과는 아주 조금달랐기에, 그와 그녀의 로맨스 역시 평범할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재미는 그런 부분에서 아주 빵빵 터지게 웃겼고, 의외의 상황에서 전개되는 유머 또한 공감하거나 이해할 만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유능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해 인기가 많은 정지후 대리.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에게 명령 받거나 지배 받는 것을 좋아하는 M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큰맘 먹고 처음으로 SM도구를 주문하지만, 택배상자가 이름이 비슷한 회사 동료 정지우의 손에 들어가 버리면서 자신의 은밀한 취향을 들켜버리고 만다. 평소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여사원 정지우는 사실 정지후 대리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러다 택배 사건으로 인해 오해가 쌓이고, 정지후 대리에게서 고백을 받게 된다.

 

 

저의 주인님이 되어 주시겠어요?

평소 관심있던 이성에게 고백을 받았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아야 할텐데, 어째 좀 묘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지후 대리는 고백을 하면서 너무 부담갖지 않아도 된다. 혹시 자신의 고백을 받아들여 준다고 해도 절대 집적대거나 사귀자거나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던 것이다. 자신은 그냥 주인님으로만 모시고 싶은 거라며. 자신을 전혀 이성으로 바라보지 않는 그의 멘트에, 잠시라도 두근거린 게 서글퍼지고 마는 정지우. 과연 이들의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까.

이 작품에는 이런 독특한 취향을 가진 이들이 꽤 다양하게 등장하는데, 대부분은 신체적, 감각적 유희를 즐기는 SM이라기 보다, 관계 설정에서 오는 정신적인 유희를 즐기는 DS에 가깝다. 우리가 흔히들 변태스럽다고 생각하는 SM은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해 묶거나 체벌을 가하는 등의 신체적 고통을 동반하는 것인데 비해, DS는 두 사람이 지배하는 주인과 복종하는 노예 역할을 나눠 맡고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평범한 취향의 사람들에게도 거부감 없이 읽힐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성격이 다른 남녀의 로맨스야 숱하게 보아 왔지만, 이렇게 성적 취향이 전혀 다른 남녀의 로맨스는 처음이라 굉장히 색다른 느낌이었다. 사실 연애를 할 때 성격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성적 취향일텐데 말이다. 물론 이들의 관계는 처음에 연애로 시작하는 게 아니라, 돔(지배자)와 섭(피지배자)의 관계로 진행되기에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유능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보이지만 남의 명령을 받고 싶어 하는 M성향의 정지후와 차가운 도시 여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 약한 정지우.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기에 누구나 평소 보여지는 이미지와 다른 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부분에 주목해서, 남들이 쉽게 인정할 수 없는 취향의 문제까지 이야기를 확장시키고 있다.

 

"당신한텐 별로여도 나한텐 좋아할 가치가 있는 건, 그 외에도 많이 있을 거라구요!"

실제로 그런 걸 좋아하면 좀 문제 있는 거 아닌가. 그런 변태 같은 취향의 사람은 위험한 사람일 것 같고. 뭐 다 존중해서 그런 취향이 있는 건 상관없지만, 내 주변에는 없었으면 좋겠어. 라고 생각하는 게 아마 대부분 보통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변태라고 해도, 남한테 피해를 안 주면 문제없는 거 아닐까요? 누구나 조금씩 변태 같은 구석이 있다고 들어서요."

 

지후와 지우는 그렇게 3개월이라는 유예 기간을 두고 지배자와 피지배자 관계를 유지해 간다. 사내에선 지후가 상사이지만, 그 나머지 시간에는 지우가 주인이 되어 그에게 이것 저것 명령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지후가 한 달 동안 부산으로 출장을 가게 되고, 약속된 3개월의 기한은 점점 다가온다. 이들은 과연 연애를 시작하게 될까? 지우는 지후의 취향을 존중하는 것을 넘어서 이해하게 될까.

 

 

이 작품은 웹툰으로도 인기가 많았지만, 단행본으로 꼭 만나봐야 하는 이유가 더 있다. 바로 미공개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다는 건데, 현재 출간된 4권까지 뒷 부분에 웹툽에서는 공개되지 않은 그들의 에피소드가 담겨져 있으니 놓치지 마시길! 게다가 현재 CJ영화사 투자 배급이 확정되어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고 하니, 남녀 주인공을 어떤 배우들이 맡게 될지 상상해 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까다로운 취향이든, 평범한 취향이든, 변태스러운 취향이든 모두 각자의 마음이다. 그러니 존중해주어야 한다. 나의 취향만큼이나 당신의 취향 또한 소중하니까.

 

평범한 로맨스에 지친 분들에게, 독특하고 매력넘치는 이들의 로맨스를 추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라이 - 죽음을 질투한 사람들
제인 하퍼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해들러 가족의 죽음에 대해 뭔가 명확한 게 나오면 그때 떠날 겁니다." 포크가 말했다. "그전에는 안 떠나요."

"이건 너랑 아무런 관련이 없어."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가족이 총에 맞아 죽었는데요? 내 생각에 이런 일에는 관련 없는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뭔가 이 문제에 대해서 강한 주장을 갖고 있는 모양이니까 당신부터 시작해야 할 수도 있겠군요. 공식적으로 해보자고요. 어떻게 생각해요?"

친구 루크의 비극적인 사건 소식을 접한, 에런 포크는 2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루크는 아내와 여섯 살짜리 아들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데, 갓난아기인 딸은 그 비극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 포크를 친구의 장례식에 초대한 것은 그의 아버지 제리였다. 현재 벌어진 일가족 살인 사건은 20여 년 전 과거에 있었던 한 소녀의 죽음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당시 강에 빠져서 익사한 엘리라는 소녀의 죽음에 대한 용의자로 그녀와 가까웠던 포크가 의심되었지만, 그 시간에 포크와 함께 있었다고 증언한 루크의 덕분에 알리바이가 만들어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사람은 그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크의 아버지와 포크의 아버지는 그들 중 한 명이었고 말이다.

루크는 거짓말을 했어. 너도 거짓말을 했지. 장례식에 와라.

그 사건으로 인해 포크와 아버지는 마을을 떠나야 했지만,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아들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금, 루크의 아버지가 묻는다. 루크가 전에도 사람을 죽였던 적이 있느냐고. 자신은 루크가 가족을 죽이고 자살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금융범죄 전문 수사관인 포크는 제리의 부탁으로 마을의 라코 경관과 함께 사건의 진상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미제로 남은 과거의 그 사건을 잊은 적 없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들에게 냉담하게 협조하지 않고, 급기야 포크에게 협박을 하기 시작한다. 과연 루크는 스스로 이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일까? 이 사건은 과거의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 대체 20년 전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며, 루크와 포크의 거짓말은 어떻게 된 걸까. 작은 마을에 안개처럼 퍼져가는 비밀들은 점점 무게를 더해가고, 백 년 만에 찾아온 사상 최악의 이상기온으로 바싹 말라가는 풍경 속에서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그것은 점점 더 견고하게 벽을 쌓기 시작한다.

"그 여자애가 죽은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없어요. 아버지, 없다고요. 당연히 내가 한 짓이 아니에요."

에런은 자신의 심장이 아버지가 움켜쥔 손아귀에 닿아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그는 트럭의 짐칸에서 덜커덕거리고 삐걱거리는 그들의 가장 소중한 물건들을 생각하고 루크 그리고 그레천과 서둘러 나눈 작별을 생각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엘리와 다시 나타날까 봐 그가 지금도 뒷유리를 통해 살피고 있는 디컨을 생각했다. 그는 분노의 전율을 느꼈고 아버지의 손을 확 비틀어 떼어내려고 시도했다.

"안 그랬어요. 맙소사, 어떻게 그런 걸 저한테 물어보실 수가 있어요?"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때로 사실이 아닌 경우가 있다. 내가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기대하는 바가 상대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가끔 우리를 완벽하게 배신하곤 하니 말이다. 그 사람의 말투, 행동, 평상시 습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들이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포크는 루크의 거짓말이 자신을 위해서라고 믿었다. 어쩌면 그때, 아직 기회가 있었을 때 그에게 한번쯤 제대로 물었어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엘리가 죽던 날 오후 루크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지만 이미 후회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루크는 영원히 그에게 답을 들려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 그것은 가끔 감당하지 못할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저 잠시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 그저 다른 데 신경을 조금 더 썼을 뿐인데, 그저 내 가족을 지키고 싶었던 것 뿐인데.... 작은 순간의 이기심이 엄청난 댓가를 치뤄야만 하는 사건으로 연결되기도 하고 말이다. 이 작품은 아마존에서 엄청난 화제였던 작품으로, 출간 전 원고상태에서 영화화가 이미 확정된 제인 하퍼의 데뷔작이다. 작은 마을의 소문이 가져온 참혹한 피해를 섬세하고 날카롭게 그려나가면서 그 속에서 인간이 지닌 죄의식과 후회의 본질을 매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20년 전의 살인사건과 현재의 살인사건이 교차 서술되며 긴장감을 부여하고, 마을 사람들 제각각이 가지고 있는 비밀들의 무게가 점점 의심을 증폭시켜나가면서 페이지 끝까지 손을 놓을 수 없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