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민 코믹 스트립 완전판 1 : 1954~1956
토베 얀손 지음, 김민소 옮김 / 작가정신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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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후쿠오카에 여행을 갔다가 무민 카페에 들렀던 기억이 난다. 후쿠오카에 갈 때마다 시선을 사로 잡았던 카페였는데, 워낙 인기있는 곳이라 오히려 가지 못했던 것 같다. 이번에는 마음 먹고 방문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물론 카페의 음료나 음식 자체는 특별한 것이 없었지만, 무민 캐릭터가 그려진 예쁜 라떼 아트도 깜찍했고, 테이블 곳곳에 무민과 그의 친구들 캐릭터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고 있어 마치 만화 속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민은 나온 지 70년이나 지난 캐릭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세련되고 핫한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캐릭터 상품들을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 나에게도, 무민은 오래 전부터 완소하던 캐릭터였으니 말이다. 집안을 둘러 보면 어디라도 하나씩은 꼭 있을 수밖에 없는 국민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이번에 출간된 <무민 코믹 스트립 완전판>은 핀란드의 작가이자 화가였으며, ‘무민’ 캐릭터를 만든 토베 얀손이 1954년부터 런던의 [이브닝 뉴스]에 연재한 무민 만화를 국내 최초 완역본으로 선보이는 작품이다. 토베와 라스 얀손의 ‘무민 코믹 스트립’을 모두 엮어 여섯 권으로 구성했다. 그중 『무민 코믹 스트립 완전판 1』은 1954년부터 1956년 4월까지 발표한 토베의 초기작 일곱 편이 담겨 있다.

순백의 얼굴과 동글동글한 귀여운 몸매의 무민. 사실 처음에는 무민이 하마인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무민은 트롤(초자연적 괴물 또는 거인)이라는 존재로 색깔은 희고 포동포동하며 주둥이가 커서 전반적으로 하마를 닮은 캐릭터이다. 이들은 핀란드의 숲 속에 있다는 무민의 골짜기에서 사는데, 동화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다양한 모험을 한다. 

 

완전판 첫번째 시리즈에 실린 일곱 편의 에피소드들에서 무민 가족은 그들만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너무 착해서 다른 이들에게 싫은 내색을 할 줄 모르는 무민은, 집에 손님들이 열다섯 명이나 와 있어서 머리가 너무 아프지만 말을 못하겠다고 스니프에게 하소연한다. 스니프의 도움으로 손님들을 집에서 내쫓으려고 갖은 궁리를 하지만, 결국 그들에게 집을 빼앗겨 거리로 내몰리고 만다. 하지만 덕분에 팜므파탈 스노크메이든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잃어 버렸던 가족을 찾게 되고, 그들 가족이 화려한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고, 무인도에 가서 모험을 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실 무민 캐릭터는 오래 전부터 만나 왔지만 무민 만화는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유쾌하고,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서 무민의 매력에 더 흠뻑 빠져들게 된 것 같다. 이들 가족은 굉장히 무모하고, 이상하고, 매사에 엉망진창이지만, 끊임없이 모든 걸 즐겁게 바라보며 살아간다. 이들 앞에는 항상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이렇게 착해 빠진 무민 가족들은 그 소동 속에서도 나름의 기지를 발휘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선한 시선으로 매번 삶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 토베 얀손은 무민 가족과 대홍수라는 동화를 만들어서 인기 캐릭터 무민을 탄생시켰다. 인기를 얻은 무민은 동화 시리즈로 사랑을 받았고, 그 동화 이야기를 각색한 만화가 핀란드 신문에 실린 후 세계 최대의 영국 일간지에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전세계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캐릭터가 된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무민 애니메이션, 인형극 쇼, 티비 시리즈가 제작되고,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무민 미술관, 무민 테마파크 등 다양한 모습으로 무민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달 초부터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무민 원화전이 진행되고 있는데, 엄청난 관람객이 방문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니 언제 시간 내서 가보고 싶어 졌다.

 

무민 코믹 스트립은 고전적인 형식의 흑백 스트립으로 짜여 있다. 일간지에 연재가 되던 방식이라 그런지 굉장히 빽빽한 구성에 이미지도 가득, 작은 글자들도 꽉꽉 채워져 있어서 처음 읽기 전에는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다. 만화라고 하면 여백의 미가 어느 정도 있고, 술술 페이지가 넘어가는 맛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넘기면서 지루하거나 루즈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단 한 페이지도 없었다. 읽다 보면 그 독특한 전개 방식과 굉장히 엉뚱하면서도 이상하게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 삶을 통찰하는 예리한 시선이 엿보여서 감동적인 대목도 있었다.

 

 

무민은 “그저 감자를 키우고, 꿈을 꾸면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하는 매사 만사태평인 캐릭터이다. 사랑과 행복, 모험과 평화를 추구하고, 그 가치관을 일상의 매순간순간으로 고스란히 보여주는 캐릭터라고나 할까. 무슨 불행이 있어도, 어떤 골치 아픈 일이 생겨도, 누군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더라도, 그저 무민은 너그럽게 이해하며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심하고 겁 많은 순둥이 무민, 뭐 신나는 일 없을지만 고민하는 무민파파, 정리정돈 집안일에는 관심없는 무민마마, 질투심 많은 무민의 여자친구 스노크메이든... 그 외에도 각자 독특한 개성과 성격을 자랑하는 그들의 친구들까지 모두 하나같이 사랑스럽기 그지 없다.

토베 얀손은 생전 인터뷰 속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싫증 내지 말라. 흥미를 잃지 말라. 무감각이 자라게 하지 말라. 귀중한 호기심을 잃지 말라. 그리고 미련없이 죽어라. 이 얼마나 단순한가.”

재미있게 살고, 미련없이 죽으라는 단순 명쾌한 그 말은 무민과 그의 가족들에게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삶의 가치관이 아닌가 싶다.

 

무민 코믹 스트립 1∼3권은 토베 얀손이 1954년부터 1959년까지 발표한 작품이며, 4∼6권은 라스 얀손이 1960년부터 1975년까지 발표한 작품이다. 1,2권을 시작으로 총 6권으로 마무리 될 이 시리즈는 무민이라는 캐릭터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소장용으로도 너무 좋을 것 같다. 하드 커버 표지도 예쁘고, 표지를 열면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노란색 내지에도 다양한 모습의 무민 캐릭터들이 자리잡고 있어 정말 귀엽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찌보면 너무도 단순하고, 또 어떻게 보면 황당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지지만, 그것들 모두 우리의 일상과 닮아 있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삶에 대한 토베 얀손의 철학이 담겨 있어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여운이 길게 남는다. 유쾌한 만화를 읽고 나서 깊은 여운이 남는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내가 그동안 만화를 많이 보아 왔다고는 할 수 없지만, 무민 코믹 스트립은 내가 봤던 만화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솔직하고, 귀엽고, 독특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일상적이면서도 환상적이고, 유쾌하고 익살맞으면서도, 인간적이고 감동적이다. 게다가 무민이라는 사랑스러운 캐릭터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느낌도 든다. 이제 휴가철도 다 지나고 일상이 재미없고, 선선한 가을 날씨에 옆구리 허전하고 외로운 분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읽는 동안 내내 가슴이 따뜻해지고, 행복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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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체보 씨네 식료품 가게
브리타 뢰스트룬트 지음, 박지선 옮김 / 레드스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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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체보는 지루했다. 28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싫증 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일을 맡게 된 뒤로 하루가 길어졌다. 아이들 몇이 가게에 와서 비스킷을 사고 공짜 수첩을 받아간 것 말고는 조용했다.

만체보는 평소처럼 의자에 앉아 대로를 유심히 살폈다. 캣에게 의뢰받은 일을 하기 전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나지 않았다.

프랑스 파리, 바티뇰 대로 73번지에는 작은 식료품 가게가 있다. 관광객들은 대개 이곳을 '아랍인 가게'라고 부른다. 주인인 만체보가 아랍계인 까닭이다. 그는 이 별칭을 좋아하지 않지만 입을 꾹 다물고 만다. 관광객들은 주로 샹젤리제,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개선문으로 가기에, 어차피 그곳을 찾는 관광객은 그리 많지 않다. 만체보는 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성실하게 일을 하고, 그 규칙적인 생활에 전혀 불만이 없다. 그가 일주일 내내 일을 하는 동안 항상 집에 있는 아내가 요리 말고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잘 모르고, 묻지도 않는다. 사촌인 타리크는 바로 길 건너에 있는 구두수선 가게에서 일을 하고, 그들 가족은 사는 곳도 같은 건물이다. 매일 새벽에 파리 남족으로 가서 싱싱한 과일과 채소를 사고 8시까지 돌아온 다음 커피를 마신 뒤, 아침 9시 정각에 셔터를 올리고, 9시가 되면 셔터가 마지막으로 내려간다. 그렇게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하루가 또 끝나고 그는 가족들과 식사 중이었다. 그런데 셔터가 내려진 가게 문을 절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을 캣이라 소개한 그녀는 만체보에게 이상한 일을 제안한다.

"부탁이 있어요. 아니, 그보다 일을 제안하고 싶어요....제 남편을 감시해주세요."

뜬금없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그 일을 만체보만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녀는 길 건너편, 타리크의 구두수선집이 있는 건물 맨 위층에 살고 있었던 거다. 얼마 전부터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는데, 자신은 승무원이라 출장이 잦고 남편은 작가라 집에서 일을 한단다. 아침부터 밤까지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있어도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을 만하기에, 만체보에게 남편이 언제 나가고 들어오는지 등을 관찰해달라는 거였다. 그리고 상당한 금액의 비용을 주겠다고 말한다. 이 작품 속 또 다른 화자인 ''의 이야기 역시 뜬금없이 진행된다.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는 나는 자금 은닉 사건을 취재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카페에서 누군가를 찾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자신이 그가 찾던 여자라고 말해 버린다. 그리고 얼결에 프랑스 굴지의 에너지 기업에서 독특한 업무를 진행하게 되고, 그 일은 고용인에게 그저 이메일을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퇴근하면서 안내데스크에서 매일 예쁜 꽃다발을 받게 된다. 그녀는 그 난감한 꽃다발을 매일같이 처리하기 위해 이름 모를 누군가의 무덤 앞에 놓아주기도 하고, 지나가던 누군가에게 전해주기도 한다.

"체스에서는 흑과 백이 중요하거든. 인생에서처럼 말이다. 승자는 한 사람뿐이야. 흑이나 백 중 하나지. 인생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체스에서는 몇 번을 움직였는지, 그 작은 움직임의 총량에 따라 승자가 결정돼. 인생에서처럼. 기회도 많이 주어지고 실수하는 건 당연해. 한두 번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인간적이지만....거듭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패배하고 말지."

작품 속의 ''와 만체보의 이야기는 전혀 교집합 없이 각자 별도로 진행된다. 그리고 후반부에 가서야 겹쳐지면서 두 사람의 일상에 드리운 미스터리의 정체가 그제야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28년 동안 평범하고 규칙적인 자신의 일상에 만족하며 지내던 만체보는 갑작스런 스파이 미션을 맡게 되자, 오히려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는 시간이 지루해지기도 하고, 이 일을 의뢰 받기 전에는 자신이 어떻게 무료한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 그의 사설탐정 활동은 그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향에서 놀라운 비밀들을 알게 해주고, 그의 평화로운 일상을 위협하는 낯선 남자들도 등장하게 된다. 남편과 이혼 후 아들을 홀로 키우며 외롭게 살아가던 ''는 비밀스러운 업무를 하는 회사의 출입증에는 익숙해지지만 꽃다발에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꽃다발의 정체와 자신을 고용한 인물에 대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의 조사를 하지만, 수수께끼의 인물에 대해선 알 수가 없다. 환갑이 다 되도록 평생 꺼림칙한 일을 해본 적이 없었던 만체보는 스파이 활동의 대가로 받게 된 금액이 너무 커서 당황스럽고, 점점 더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일에 빠져 든다.

<고슴도치의 우아함>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종이약국> 팬들이 열광할 소설! 이라는 문구에 혹해서 이 작품을 읽게 되었는데, 그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색다르고 독특한 작품이었던 것 같다. 굉장히 뜬금없이 전개되는 상황인데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묘하게 몰입되어 파리의 소소한 일상들을 함께 하게 된다. 20년째 파리에 살고 있는 스웨덴 출신 작가의 독특한 시선이 듬뿍 묻어난 작가의 시선 덕분인지, 파리에서의 삶을 그리는 소소한 묘사들과 풍경들이 색다른 분위기의 파리를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라도 내가 모르는 각자의 사정과 상황이 있을 수 있고, 생각지도 못한 비밀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상한 의뢰와 이상한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알 수 없는 만남들과 상황들은 파리라는 매혹적인 도시 아래 숨겨진 이야기들을 페이지 바깥으로 끌어내고 있다. 그러니까 관광객은 알 수 없는 파리의 골목 골목에 깃들어 있는 일상들의 모습이랄까.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두 인물이 겪는 파란만장한 모험 속으로 함께 해보자. 파리라는 도시의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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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시간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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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뇨, 이것만큼은 꼭 받아 주십시오. 이건 저의.......뭐랄까. 오기 같은 것입니다."

"오기?"

". 뭐랄까, 이런 불합리한 일로 한 사람의 생명을 없애고도 태연한 사람들, 그런 세상이랄까, 사법제도랄까. 그런 것에 대한 제 오기입니다."

"가와이 씨는.........진짜 변호사야. 정말 감동적이군."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와타나베 토건의 사장 와타나베 쓰네조의 외동딸이 유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몸값으로 1억 엔을 내놓으면 미카를 보내주겠다는 유괴범의 말에 아내인 미키코가 지시대로 돈을 준비해서 약속 장소로 나간다. 하지만 애초에 경찰은 범인 검거 전에 몸값을 줄 생각이 없었고, 그들의 판단으로 돈은 유괴범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이후 범인에게선 연락이 딱 끊기고, 결국 미카는 시신으로 발견되고 만다. 그런데 만약 경찰의 잘못된 판단으로 몸값을 주지 못해서 딸이 그렇게 된 거라면? 와타나베 쓰네조는 그럴 경우 지시를 한 모리타 본부장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른다. 모리타 역시 그와 뇌물 수수 등으로 연결된 사이였기에, 그가 사실 관계를 폭로하게 되면 모든 것이 끝장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는 범인이 강에 1억 엔을 떨어뜨리라고 지시한 시점에 이미 미카를 살해했었다는 사실을 밝혀야만 한다. 시체 검시와 감정에 따라 밝혀질 미카의 사망 시각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살인 사건에서 '누가 범인인가' 보다 '언제 죽었나'가 더 중요해진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당연히 이야기는 실제 범인이 누구인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가와 상관없이 진행되어 간다. 게다가 작가는 초반부터 체포된 남자가 범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고 시작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전과 3범인데다 현장에서 지문까지 나왔고, 자백까지 한 용의자가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 자백을 강요당한 거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백퍼센트 믿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렇게 사건의 발생부터 시작하여 용의자를 체포, 취조하고, 검찰에 송치, 1심 재판에 이은 항소심 재판까지의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그려놓은 이 작품은 픽션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치밀하다. 일본 사법 체계의 부조리는 비단 그곳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의 그것 또한 다를 바가 없기에 더욱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인생은 화와 복, 즉 재앙도 행복도 서로 뒤섞여 꼬인 새끼줄 같다는 의미인데, 내가 원죄사건을 만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는 이유는 원죄라는 건 결코 한두 사람의 악인이 품은 악의나 누군가 한 사람의 실수만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수십 가닥의 짚이 꼬여서 굵은 밧줄이 되는 것처럼, 수십 명의 인간이 한 일, 즉 악의뿐만이 아니라 일종의 선의, 배신이나 과실에다 일종의 의무에 충실한 행동이나 모범적인 행위도 모두 함께 꼬이고, 다양한 인간 활동이 섞이고 얽히고설켜, 그것이 어떨 땐 원죄가 되기도 한다는 말일세. 그걸 항상 통감해."

평소 자주 다니던 숲길을 지나다가 가방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열어 봤더니 소지품과 지갑이 있었다. 지갑에는 지폐가 몇 장 있었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기에 나도 몰래 돈을 꺼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더 걸어가려는데, 낙엽 위에서 누군가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무심코 다가가 몸을 만졌는데, 너무도 차가웠다. 자는 게 아니라 시체였던 거다. 너무 놀라고 무서워 그 순간을 모면하려 도망쳤을 수도, 혹은 경찰에 신고를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찰은 당연히 최초 발견자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않고 취조를 하게 되고, 겁 많고 당황한 나의 반응에 용의자로 의심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결백한 사람이 그럴듯한 상황 증거만으로 기소되어, 끝내 사형 판결을 받게 되는 일이 과연 말도 안 되는 일일까? 극중 고바야시가 처한 상황은 너무도 리얼해서 읽는 내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느껴졌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자백할 리가 없지 않나 싶다가도, 혹독한 취조와 강압에 의해 정신 못 차리는 그의 처지에 어느 순간 말도 안 되는 판단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현실에서도 무고한 사람이 판결을 받고, 수감되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무죄로 판결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다. 평범한 일반인들에게는 법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돈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배경이 없을 경우에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이런 불합리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에 막막한 기분마저 든다. 작가인 사쿠 다쓰키는 현직 변호사라는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발휘해서 수많은 형사사건을 다루면서 겪어 왔던 과정을 매우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일선형사의 성실한 직무 집행이 오히려 누군가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게 된다는 사실 또한 서글픈 아이러니를 보여주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한다. 악의뿐만이 아니라 일종의 선의, 배신이나 과실에다 일종의 의무에 충실한 행동이나 모범적인 행위도 모두 함께 꼬이고 얽히고설켜 원죄사건이 만들어진다는 극중 대사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쉽사리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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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한 달을 살다 낯선 곳에서 살아보기
전혜인 글.사진 / 알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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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여행객이 아니라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건, 나의 오랜 염원이자 꿈이었다. 파리라는 도시에 대한 환상같은 것이 어릴 적부터 있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여행 계획을 세우다 결국 못가게 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명 관광지만 둘러보는 여행이 아닌, 일상을 겪으면서 그 나라를 느끼는 여행을 꼭 해보고 싶었던 터라, 이 책은 그런 저의 로망을 실형시켜 줄 것 같아서 기대가 되었다.

방송작가 일을 하고 있는 서른 넘은 유부녀인 저자에게, '파리에서 한 달 살기'라는 건 마냥 쉬운 도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야심 찬 파리 한달 프로젝트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지만, 그 너머엔 수많은 현실적인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르고 닳도록 일만 하는 반복되는 일상에 큰마음 먹고 변화구를 던져 보기로 한다. 만약 자신이 파리에 감으로써 어떤 문이 닫힌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문이 닫힐 때 예상치 못했던 다른 문이 열릴 거라는 '무모한' 확신으로 그렇게 그녀는 파리로 가는 항공권을 예약하기로 한다. 그렇게 파리행 티켓은 반복되는 일상에 내미는 소심한 사표였다. 아, 멋지다. 그녀의 용감한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뭔가에 홀린 듯 파리에서 한 달을 살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지만 현실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직장인 유부녀'라 함은, 출근해야 하는 직장이 있고 결혼 생활을 함께하는 남편도 있다는 얘기다.........막상 파리에 도착하고 보니, 이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하루걸러 하루마다 여행을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그토록 싸워야 했나 조금은 허탈한 마음마저 들었다. 인생이 곧잘 여행에 비유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번은 스튜디오 키친에 아침을 먹으러 갔다가 한 마리의 라따뚜이와 눈이 마주치고 만다. 조그맣고 마른 체구를 가진 쥐를 보고는 흠칫 놀라 비명을 지르고는 스튜디오 호스트에게 다급하게 문자를 보낸다. 그리고 그 날 저녁, 호스트 할아버지는 앞으론 관리를 더욱 철저하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흥미로운 질문을 한다. 쥐가 크기가 작았냐고. 아마 새끼 쥐 일 것 같다고 대답하자, 할아버지는 갑자기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향긋한 장미향을 맡으며 입을 오물거리니 생각지도 못한 상큼한 맛이 점 하나로 혀에 닿으며 콕 박힌다. 마치 고양이가 솜방망이 펀치를 한 대 때리고 부드러운 털로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리는 맛이다. 너무 맛있어서 정신이 혼미해진 나머지 근처 벤치를 찾아 털썩 주저 않았다........그동안 마카롱의 맛을 잘 몰랐던 건, 제대로 된 마카롱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잘 만든 마카롱은 실로 위대한 디저트임이 틀림없다.

파리산 마카롱에는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두 시간쯤 잊을 힘이 들어 있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에 부러움이 백만배 생기는 듯한 기분이다.

저자는 그렇게 프랑스의 각종 빵과 디저트를 먹고, 간단하게라도 코스로 나오는 프랑스식 만찬을 즐기고, 센 강 변에 앉아 책을 읽고, 노상 카페에서 와인을 마시고, 작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파티에 초대되어 현지인들과 즐겁게 지내고, 작은 재즈바에서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파리의 일상을 보낸다. 그리고 말한다. 파리만큼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고, 혼자 여행하기에 좋은 도시를 보지 못했다고. 홀로 존재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곳이 파리라고 하니, 파리에 대한 나의 로망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러겠지만, 시간이 여유가 있을 때는 돈이 없고, 돈이 충분할 때는 또 시간이 없어서 떠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그것도 긴 비행 시간을 자랑하면 유럽이나 미주쪽 여행이라면 더욱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나도 힘겹게 쪼개어 낸 시간을 가까운 아시아 쪽 나라를 여행 다녀오는 걸로 잠시 일상을 벗어나곤 했었다. 물론 그 여행들도 너무 소중하고 행복한 추억들을 가득 남겨 주었지만, 언젠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가고 싶었던 그곳 파리에 가보고 싶다. 저자처럼 '혼자 여행'을 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직 해외 여행을 혼자 떠나보지 못한 나에게 그건 말처럼 쉽지 만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라는 책에서 헤밍웨이는 자신의 파리에 대한 사랑을 유감없이 그려냈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

 

"아직도 파리에 다녀오지 않은 분이 있다면 이렇게 조언하고 싶군요. 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 주어서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 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거라고.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가 파리에 체류하던 5년, 그때 그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으니 문학의 거장이 아니라 풋내기 작가 지망생이었다. 책 속에서 그는 셰익스피어앤컴퍼니 서점에서 외상으로 책을 빌려 읽고 오늘 하루 먹을 음식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가난한 문학청년이었다. 그 가난한 젊은이가 훗날 노벨문학상, 퓰리처상을 받는 대작가라 되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아마 본인도 몰랐을 거다. 그렇게 예나 지금이나 파리는 머무는 자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곳이다. 나도 언젠가는 일상에 소심한 사표를 던지고, 파리에서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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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 다녀왔습니다
임경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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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갔던 곳이 오사카와 교토였다. 꽤 오래 전이어서 세세한 부분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오사카하면 북적거리는 맛집들, 교토하면 정적인 시골 풍경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오사카에선 지하철을 이용해 편리하게 이동하다가, 교토로 향하면서 낯선 버스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정류장 안내 방송이 일본어로만 진행되었고, 하차 정류장 표시도 모두 한자여서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구글 맵을 켜서 지도로 위치를 확인하는 진풍경을 벌이기도 했는데, 어렵사리 도착한 그곳의 정취가 그 모든 어수선함을 한 번에 씻겨 주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사카의 번화한 거리에서 벗어나 도착한 교토는 너무도 한적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도시라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 후로도 일본의 여러 곳을 다녀왔지만, 교토에서만큼 진짜 일본을 만난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교토야말로 가장 일본스러운, 그들의 역사와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임경선 작가가 교토에서 한 계절을 겪으면서,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의 정서와 그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도시의 기억을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일부러 멋을 부리지 않는 도시, 돈보다는 살아가는 자세가 중요한 도시, 전통을 지키면서 미래의 모습을 모색하는 도시, 교토는 그렇게 변하지 않을 아름다움을 지켜나가는 매혹적인 곳이다.

 

천 년 역사의 도시 교토에서는 창업한 지 100년이 넘은 가게도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인걸요' 라며 겸손해한다. 에도 시대나 메이지 시대에 창업한 가게도 '최근에 창업한' 범주에 들어간다. 10, 20년 된 가게는 아예 명함도 못 내민다. 최소한 3대에 걸쳐 지켜온 가게라야 교토에선 '노포' (일본어로는 '시니세'라고 한다)라는 영예로운 호칭이 주어진다.

 

'세월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이란 아무리 현대적이고, 세련되고, 화려한 외관을 구축하더라도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반짝거리는 새것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낡고 약간 녹슨 듯한 세월의 흔적, 그리고 거기서 비롯하는 향수 어린 감성'이 가득한 도시 교토에는 노포들이 많다. 그들은 대대손손 가업을 이어가고, 오랜 경영으로 얻은 고객의 신용 등 무형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가게만의 독창적이거나 개성적인 제품을 가지고 있고, 생산과 판매를 겸한 장인이자 상인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교토의 노포에서는 무조건 손님을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파는 쪽과 사는 쪽을 대등하게 여긴다는 건 그만큼 자기가 만들고 파는 제품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새건이 좋다거나 오래된 것이 좋다거나 그런 건 없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겁니다. 그리고 좋은 것은 항상 더 좋아질 여지가 있습니다."

번거롭게 수고를 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는 인기 제품보다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수제품을 더 가치 있게 여겨 선택하는 것이 바로 교토 사람들이고, 그것이 바로 그들이 오랜 시간들을 도시에 품고 살 수 잇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교토의 곳곳에서는 '시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전통 거리의 은은하고 서정적인 풍경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업의 간판 색깔은 얼마든지 바꾸겠다는 암묵적인 다짐. 들쑥날쑥 제멋대로 지어진 잿빛 빌딩들이 경관을 훼손하게 둘 수는 없다는 결심. 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화류가에서는 아름답지 못한 전봇대를 땅 밑으로 집어넣어 전선 없는 거리로 만들어놓고야 마는 의지.

 

교토에는 경관 조례법이 있어 지나치게 화려한 간판 색깔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마치 우리 나라의 인사동 스타벅스가 전통 거리의 정체성에 맞춰 영문이 아닌 한글로 간판을 달고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교토의 맥도날드 로고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새빨간색 바탕에 진노랑색 로고가 아니라, 갈색 바탕에 채도가 낮은 노란색 로고로 되어 있고, 편의점 로손의 간판도, 의류점 유니클로의 간판도 마찬가지이다. 교토라는 도시의 아름다움을 위해 주민들과 기업들이 기꺼이 협조하는 풍경, 주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각자가 조금씩 양보하는 그런 마음들이 모여 이 도시의 풍경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임경선 작가가 경험한 교토에서는, 동네 서점은 주민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자기네 서점을 찾지 못하면 매장으로 전화해 문의해달라고 당부하고, 카페는 아이들과 시간을 좀 더 보내기 위해 일주일에 나흘만 영업하고, 잡화 가게는 미리 알고 찾은 손님이 불편하지 않도록 오가는 사람들이 불쑥 찾지 않게 하기 위해 간판을 달지 않는다. 2017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신기한 태도와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언제나 빠르게 변화하고, 눈코뜰새없이 바쁘게만 생활하는 서울의 일상을 생각해본다면 더욱, 교토의 가게들이 부러워진다. 그곳에서는 그저 그런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쉼표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교토 사람에게 뭔가를 제안했을 때 “고맙습니다. 그것 참 좋군요”라는 답을 듣게 된다면 그것은 50퍼센트 이상의 확률로 퇴짜맞은 거라고 보면 된다. 만약 “생각 좀 해볼게요”라고 하면 그것은 100퍼센트 거절을 뜻하니 그것을 오해하고 ‘그럼 희망이 있다는 거잖아’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대놓고 싫다고 거절하면 상대에게 상처를 입힌다고 생각하니까 완곡하게 거절하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많은 일화들이 흥미로웠지만, 특히 교토식 소통법이 굉장히 재미있었다. 오사카 사람이 말을 직설적으로 하고 대놓고 들이대는 스타일이라면 교토 사람은 말을 모호하게 하고 알아듣기 어렵게 우회적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상대가 무안하지 않게 신경 쓰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어떻게든 전달하려는 것, 이것이 교토식 소통 방식이다. 그래서 그들은 뭔가를 부탁할 때도 해달라고 직설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해주시진 않으시겠지요. 식으로 자신을 낮추고 말꼬리를 흘리듯이 말한다고. 상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에도 마치 이해한다는 듯이 부드러운 추임새를 넣는 식이다.

외지인들로부터 자신들의 고유 영역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속을 드러내지 않는 간접 화법을 채택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이 어떻든 교토식 언어를 알게 되고 나니, 어쩐지 그들의 삶을 반 정도는 이해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돈이나 물질적인 것보다도 가치관이나 살아가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도 말이다. 이런 건 며칠 관광을 다녀오는 걸로는 절대 알아차릴 수 없는 부분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두고 그들과 일상을 함께 보내고 나서야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이 이 책 곳곳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니 교토에 다녀왔거나, 교토를 가볼 예정이라면 이 책은 정말 특별한 여행 가이드가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한다.

 

임경선 작가는 '도교가 감각의 도시라면 교토는 정서의 도시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교토에서는 느릿느릿 걷다 보면 구석구석 빈틈으로 사유가 비집고 들어온다고 말이다. 사실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된 것도 바로 이 대목 때문이었다. 장소가 '정서'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니 이 얼마나 매혹적인 비유인가 말이다. 그녀는 살아가면서 생각의 중심을 놓칠 때, 내가 나답지 않다고 느낄 때,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마음을 비워낼 필요가 있을 때, 이곳 교토가 무척 그리워질 것 같다고 말한다. 여행이 뭔가를 채우기 위한 목적도 될 수 있겠지만, 교토에서처럼 뭔가를 비우기 위한 시간도 된다면 얼마나 멋질까.

매일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있는 우리들에게 여행이란 잠시 일상을 벗어나 쉴 수 있는 선물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유명 관광지를 찾아 다니고, 맛집을 투어하고, 기념품과 면세품을 잔뜩 사느라 에너지를 다 소비하지 말고, 정서의 도시 교토에서 비우고, 내려놓고, 여유를 가득 채워보는 건 어떨까. 여름이 어느새 훌쩍 지나가버리고, 여행 시즌도 다 지나버렸지만, 훌쩍 떠나고 싶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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