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 떠나보내며 - 상자에 갇힌 책들에게 바치는 비가
알베르토 망겔 지음, 이종인 옮김 / 더난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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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은 그걸 읽는 순간 속에 존재하고, 그 후에는 읽은 페이지들에 대한 기억으로서 존재하며, 책이라는 구체적 형태는 얼마든지 처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다. 가령 보르헤스가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보르헤스의 수수한 집을 방문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의 개인 도서관이 바벨탑처럼 어마어마할 것으로 상상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실제로는 수백 권의 책들만 보관했고 그것들조차 방문객들에게 선물로 줘버리곤 했다. 가끔 어떤 책들은 그에게 감상적인 혹은 미신적인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가 기억하는 몇 줄의 문장이었지, 그 문장이 수록되어 있는 책이라는 구체적 형태는 아니었다.  p.87

 

이 책은 현재 아르헨티나 국립 도서관장으로 재직 중이며, 작가이자 번역가, 편집자, 국제펜클럽 회원이자 '책의 수호자' '도서관의 돈 후안' 등으로 불리며 명실공히 세계 최고 수준의 독서가이자 장서가로 평가 받는 알레르토 망겔이 70여 개의 상자에 3 5천여 권의 책을 포장하며 느낀 소회와 단상을 담은 에세이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누구도 모든 책을 읽을 수 없고 그걸 바랄 수도 없기에, 우리는 어떤 사람의 애독서 목록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그래서 모든 서재는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말이다. 어떤 책을 읽느냐, 또는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느냐는 독서 목록에 따라 누가 우리의 친구이고 또 누가 우리의 친구가 아닌지를 말해준다는 그의 말에 괜시리 뭉클해졌다. 책이야말로 내가 살아온 역사이고, 내가 생각하는 세계의 바탕이며,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 역시 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어 왔기 때문이다.

알베르토 망겔은 십대 후반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났고, 시력을 잃어가던 그에게 4년 동안 책을 읽어주면서 큰 영향을 받은 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와 보르헤스가 책을 소유하는 방식은 완전히 정반대이다. 보르헤스는 책을 읽고 난 뒤 그것은 기억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책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는 처분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반면, 망겔은 언어의 구체적 물질성, 책의 단단한 현존, 그 형체, 크기, 질감을 원했다. 그랬기에 망겔에게 책을 상자에 넣어 창고에 처박아두는 일은 생매장처럼 느껴졌고, 서재의 해체 후 긴 애도의 기간을 견뎌야 했던 것이다. 그러했으니 서재를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마침내 모든 책을 포장한 후 텅 빈 서재의 한가운데서 그가 느꼈을 부재의 무게란 어땠을 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나는 그 책을 집어 들고 페이지를 넘기며 여기저기 한 줄씩 읽어본다. 이 책은 내가 오래 전 손에 들고 펴 보았던 바로 그 책인가? 이 책은 내가 처음으로 헤세의 싯다르타 왕자 이야기와 마거릿 미드의 사모아인 이야기를 읽었던 때 갖고 있었던 책과 동일한가? 분신의 전설에 따르면 우리의 분신은 그림자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곧바로 그를 알아본다고 한다. 여기 브로드웨이에서도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의 도플갱어는 그림자가 없고 과거도 없다. 각각의 독서 체험은 독특한 장소와 시간을 갖고 있기에 복제될 수 없다. 나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도서관도 완벽하게 부활할 수는 없는 것이다.  p.132

 

현재 내 서재에는 이천 권 정도의 책이 있는데.. 워낙 좁은 방이라 책이 늘어날 때마다 책장에 이중으로 넣다 보니.. 나중에는 필요한 책을 찾느라 애를 먹기도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기적으로 책들을 정리하게 된다. 보관할 책인지 다시 읽지 않을 책인지 구분해서, 필요 없는 책은 선물을 하거나 중고서점에 판매를 하는 식으로 정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책을 정리할 때마다 나 역시 망겔 처럼 추억과 명상에 잠기곤 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책 속에는 책을 읽었을 당시의 내 시간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고, 그리고 그때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으며, 날씨며 풍경들이 고스란히 함께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춰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망겔의 말처럼, 모든 서재는 일종의 자서전일 수밖에 없다. 나는 한 번이라도 더 읽을 만한, 분명 언젠가 다시 페이지를 들추게 될 책들 위주로 서재에 보관을 하는데, 그렇게 책장을 채우고 있는 목록들이야말로 나라는 인간의 이루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이니 말이다.

망겔은 스스로를 위로할 목적으로 침대 맡에 놔둔 물건이 언제나 책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의 서재는 그 자체로 위로와 조용한 안식의 장소였을 것이다. 망겔 처럼 모든 문제의 해답이 책 안에 있다고 믿는 사람, 삶을 견디게 해주고 돌파하게 해주는 것이 책의 힘이라고 믿는 사람, 서재야말로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며 자신의 일부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야만 한다. 단테, 보르헤스, 카프카, 셰익스피어, 플라톤, 장자 등 동서고금의 책들을 종횡무진 아우르는 망겔의 해박함과 통찰, 그리고 책에 관한 절절한 애정 고백이 당신의 마음을 단 번에 사로잡을 테니 말이다. 책과 도서관, 그리고 문장들과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로 가득한 마법 같은 작품이다. 알베르토 망겔의 책들이 전부 좋았지만, 이 책은 그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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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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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많은 경우에 감정 이입은 슬픔을 견딜 수 있는 위안을 주고 기쁨을 배가해주는 대단히 훌륭한 성품이다. 이상적으로 볼 때 감정 이입은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외로움을 덜 느끼게 도와주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소통이 잘 된다고 느끼게 해주는 전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감정 이입은 간혹 덫이 될 수 있다.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바로 그 자질 때문에 가스라이팅에 쉽게 노출되기도 한다.  p.88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면서 타인에 대한 지배를 하는 것을 가스라이팅이라고 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심리스릴러 장르에서 특히나 자주 만날 수 있는데, 얼마 전에 읽었던 B. A. 패리스의 <브레이크 다운> 역시 가스라이팅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그 작품에서 여주인공은 최근에 자꾸 사소한 일들을 잊어 버리기 시작했는데, 돌아가신 엄마가 마지막에 치매로 고생하셨기에 자신도 혹시 그런 건 아닐까 걱정한다. 게다가 그녀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상황들은 남편을 비롯해 주변 지인들이 점차 그녀의 기억력을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는 <가스등>이라는 연극에서 비롯된 정신적 학대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이다. 이 연극에서도 남편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황에 대해 아내를 탓하고, 아내는 점자 자신의 현실인지능력을 의심하면서 판단력이 흐려지고, 남편에게 의존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학대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가스라이팅에는 항상 두 사람이 존재한다. 가해자는 배우자 또는 연인, 상사 또는 동료, 부모 또는 형제자매처럼 가까운 관계가 대부분이다. 피해자는 자신의 행동과 외부의 자극을 사실과 다르게 기억하거나 자신이 오해 또는 오인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믿지 못해 혼란스러운 상태가 된다. 이 책의 저자는 가스라이팅이 단순한 정서 학대가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관계'라고 말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가스라이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낭만적인 관계를 끝낸다는 것을 세상의 종말처럼 여긴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가해자와의 관계가 얼마나 불쾌하고 불만족스러운가를 직시하기보다, 가해자를 이상화하고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p.232

가스라이팅의 창시자이자 30년 넘게 정신분석가, 심리치료사로 활동한 심리전문가 로빈 스턴 박사는 이 책에서 가스라이팅을 세계 최초로 정립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던 10년 전만 하더라도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일상에서, 뉴스에서 쉽게 사용되는 시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성범죄, 데이트 폭력의 일환으로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되기도 하고, 가정폭력의 새로운 유형으로도 조명받고 있는 현실이다. 이번에 개정판으로 이 책이 다시 출간되면서 딱딱한 느낌의 표지에서 마치 에세이처럼 느껴지는 듯한 부드러운 분위기의 표지로 바뀐 이유도 그 이유일 것이다. 이제 가스라이팅은 심리학 용어로 딱딱한 이론으로만 설명되는 단어가 아니라, 흔한 연인 관계부터 부부 관계나 가족 관계에서 등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한 번씩은 해봤을 법한 일상적인 현상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니 요즘이야말로 이런 책이 꼭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왜 가스라이팅이 만연해 있을까? 왜 그토록 똑똑하고 강한 수많은 여성들이 1950년대 코미디를 보는 것과 같은 병적인 관계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왜 이러한 현상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일까? 이 책은 가스라이팅이란 대체 무엇이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단계별로,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매일 다투지만 헤어지지 못하는 연인,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가족, 나를 무능한 사람으로 만드는 직장상사 등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자존감을 훔쳐가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법에 대해서 수많은 실제 사례들을 바탕으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현실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들의 사연들을 하나씩 떼어 보면 모두 웬만한 심리스릴러 한 편은 쓸 수 있을 만한 에피소드들이다. 그만큼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이해되고, 공감이 되는 사연들이라 더 오싹하다. 왜냐하면 내가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도 예외일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옭아매는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 책이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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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 하이스트
요나스 본니에르 지음, 이지혜 옮김 / 생각의날개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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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계획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헬리콥터가 필요했다. 지붕에 올라갈 방법은 수만 가지가 있겠지만, 내려올 방법은 현실적으로 단 한 가지뿐이었다. 소란과 이야기한 이후, 미셸은 크레인이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을지 알아봤다. 그러나 그 계획은 곧 포기해야 했다. 못이나 밧줄, 회반죽을 써서 등산하듯 올라가는 방법도 고민해봤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우아하게 열기구나 행글라이더를 타고 가는 방법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 뿐 현실적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작가와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온 스웨덴 작가 요나스 본니에르의 첫 장편소설이다. 타임즈 선정 세계 10대 강도 사건으로 꼽히는 스웨덴에서 실제 발생했던 사건을 토대로 쓰인 이 작품은 출간 직후 넷플릭스와 전격적으로 영화 판권을 계약했고, '제이크 질렌할'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되고 있다. 작가는 실존 인물과의 수많은 인터뷰와 면밀한 조사를 통해 6개월간의 사건 공모에서 탈주까지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했다. 이 전대미문의 '헬리콥터 강도 사건'은 추후 도망친 범인들이 잡히긴 했지만 돈의 행방은 결국 미궁에 빠지고 만다.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 작가적 상상력을 입혀 새롭게 탄생한 이 범죄 스릴러는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미셸은 세계적인 보안 회사인 G4S와의 미팅을 앞두고 있다. 소란과 함께 자신들이 개발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안 가방을 판매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반응은 성공적이었고, 곧 거래할 하기 직전까지 상황이 진행되지만, G4S에서는 현재 사용 중인 보안 가방의 계약이 무려 15년이나 남았기 때문에 그 이후에나 계약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미셸은 낙담한 심정이 되고 만다. 열다섯에 첫사랑과 결혼해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사미는 이제 그만 범죄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 새로운 삶을 위해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빌린 돈을 모두 모아 냉동 새우 사업에 투자를 하지만, 그만 사기를 당해 돈을 모두 잃고 만다. 어쩔 수 없이 미셸과 사미는 마지막으로 크게 한 방을 위해 함께 일을 꾸미게 된다. 바로 세계 최대 보안업체인 G4S에 근무하는 알렉산드라 스벤손에게 접근해 정보를 얻은 뒤, 그곳에 있는 어마어마한 현금을 털기로 한다.

 

“이 계획이 말도 안 된다는 건 나도 동의해. 헬기를 훔쳐서 코앞에 경찰서가 있는 보안 업체까지 날아가겠다니. 더구나 지붕 아래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문을 폭파하고 스웨덴 역사상 가장 어마어마한 강도짓을 벌이겠다는 거잖아. 우리가 세세한 계획을 세우는 동안 경찰이 소란을 면밀하게 감시했다는 걸 아는 상황에서 말이야.”

사미가 두 사람을 설득시키려는 듯 말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일이 될 거야. 혹시 알아? 전 세계가 이 이야길 하게 될지.”

그들이 돈을 훔치기로 한 곳은 스웨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금고로, 그야말로 북유럽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였다. 전설적인 보안으로 유명해서, 군대 하나를 끌고 간다면 몰라도 차라리 시도를 안 하는 편이 낫다고 다들 생각했을 만큼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노리는 것은 문이며 자물쇠에 카메라 수백 수천 대가 지키고 있는 금고가 아니라, 알렉산드라 스벤손이 근무하고 있는 회계부였다. 이곳에는 현금만 수억 크로나가 있는데다 근처에는 보안 요원도 없었다. 그러니까 굳이 금고를 털려고 애쓸 필요 없이 지붕에 구멍만 뚫으면 바로 맨 꼭대기 층에 있는 회계부로 들어올 수 있다는 거다. 말로는 엄청 간단해 보인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지붕을 뚫고 현금을 가지고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지붕에 올라갈 방법이야 수만 가지가 있겠지만, 내려올 방법은 시간 제약 상 현실적으로 단 한 가지뿐이었다. 해답은 헬리콥터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황당무계한 강도 사건이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어두운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면서 살아 왔던 네 명의 남자, 그들은 국적도 사는 환경도 다른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그들이 6개월간에 걸쳐 모의한 세계에서 가장 대범하고도 놀라운 희대의 강도 사건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들이 사건을 공모하고, 구체화시키는 과정부터 긴장감 넘치는 사건 당일의 현장 풍경을 놀라우리만치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사건에 대처하는 경찰과 검찰, 국가 고위 관계자들의 대처 과정까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어 더욱 이야기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과연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되는 순간이 있었을 정도로 사건 자체는 황당무계하지만, 이것을 둘러싼 인물 군상들의 드라마는 마치 한 편의 블랙 코미디 같기도 하고, 뛰어난 범죄 스릴러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기도 해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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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그레이스 페일리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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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우연히 전남편을 만났다. 나는 새로 지은 도서관 계단에 앉아 있었다.

잘 지냈어? 내 인생. 내가 말했다. 27년을 부부로 살았으니 그렇게 말해도 무방하다고 느꼈다.

그가 말했다. 뭐라고? 뭔 인생? 내 인생은 전혀 없었다고.

알았어. 내가 말했다. 서로 생각이 정말 다를 때는 내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전남편을 만났다. 그녀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는 길이었다. 무려 18년 동안 밀려 있었던 연체료 32달러를 내고 연체 기록을 지운다. 그리고 방금 전 반납한 이디스 워튼의 책 두 권을 다시 대출한다. 너무 오래 전에 읽은 데다 지금이야말로 그 책들이 딱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27년을 부부로 살았지만 지금은 남이 된 남편은 옆에서 속 좁은 불평들과 상처를 주는 악담을 늘어 놓는다. 남편에게 들은 터무니없는 비난으로 인해, 그녀는 이제 좀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낀다. 이를테면 두 주 만에 책 두 권을 반납하는 여자가 되고 싶다고. 죽을 때까지 한 남자와 부부로 살고 싶다고. 학교 제도를 바꾸고 도심의 여러 문제와 관련한 연설을 하는 유력한 시민이 되고 싶다고. 그래서 그녀는 방금 대출한 두 권의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기로 한다. 그렇게 그녀는 책을 반납하러 오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평생 아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왔지만,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다 일찍 죽었고 아들은 참한 아가씨와 결혼했지만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 대체 그녀가 그토록 전전긍긍했던 모든 것들이 다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삶이란 그렇게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는 다는 걸, 우리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깨닫게 된다. 모든 걸 바쳐서 키운 아들은 비행 청소년이 되어 동네에서 가장 품행이 나쁜 여자와 결혼하겠다 하고, 딸아이는 갑자기 이혼하겠다며 찾아온다.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리를 맞이하는 엄마, 남편이 바람을 피운 아내,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고 불행한 여자들의 모습이 이 소설집에 실린 17편의 중·단편소설 속에 등장한다.

 

중요한 대화가 아주 간절했던 순간, 남자의 모든 세계를 코로 들이마시며 냄새로 느끼고 싶었던 순간, 나의 다정한 언어를 그의 시들지 않는 육체적 사랑으로 바꾸어 표현할 줄 아는, 적어도 한 명의 똑똑한 동반자가 절실히 필요했던 그 순간, 나는 별 도리 없이 아이들 가득한 동네 공원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

그레이스 페일리는 단 세 권의 단편집으로 미국문학의 전설이 된 작가이다. 수전 손택은 "우습고 슬프고 담백하고 겸손하며 유쾌하고 예리하다. 나를 울리고 웃기고 감탄하게 만든 책." 이라고 했으며, 그녀의 작품들을 직접 번역해 일본에 소개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거칠면서도 유려하고, 무뚝뚝하면서도 친절하고, 전투적이면서도 인정이 넘치고, 즉물적이면서도 탐미적이고, 서민적이면서도 고답적이며, 영문을 모르겠으면서도 알 것 같고, 남자 따윈 알 바 아니라면서도 매우 밝히는, 그래서 어디를 들춰봐도 이율배반적이고 까다로운 그 문체가 오히려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다."라고 말했다. 국내 번역본에는 하루키가 일본에서 이 소설집을 번역했을 때 썼던 에세이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하루키는 페일리의 어조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이 유머 감각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어둡고 심각한 내용에서도 왠지 무심코 웃음이 흘러나오는 부분이 있다고, 역시 뉴요커인 우디 앨런의 어조와도 다소 공통점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페일리는 첫 단편집을 낸 후 사십 년 동안 단 세 권의 단편집밖에 발표하지 않은 작가이다. 그러니 그녀의 작품들을 읽을 때 '질 좋은 오징어를 씹듯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곰곰이 맛을 음미하면서 즐겨야 한다. 하루키의 조언처럼곱씹어보게 되는 중독성 강한 문장'이 굉장히 인상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짧게 갑작스럽게 끝나 버리는 이야기라서 더 임팩트있게 다가오는, 서사보다는 장면에 집중하는 단편이라서 여운과 잔상이 더 길게 남는 그런 작품들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극중 페이스와 같은 순간을 맞이 하게 된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던 평범한 하루였지만, 어느 한 순간의 아주 사소한 일들을 계기로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게 되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레이스 페일리의 작품을 만나는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 오길. 헤어 스타일을 바꾸고, 일자리를 옮기고, 삶의 방식과 말투까지 바꾸게 되진 않더라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책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히 그레이스 페일리를 만나기 전과 후, 달라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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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과 소설가 - 대충 쓴 척했지만 실은 정성껏 한 답
최민석 지음 / 비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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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질문자님의 고민을 접한 뒤, 제가 오히려 고민에 빠져버렸습니다. 그건 바로 ''을 읽으면 졸린게 아니라, ''만 읽으면 졸리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작정하고 노력하면 인생에서 책 따위는 외면하고 지낼 수 있습니다. 졸업하면 책과 담을 쌓아도 되고, 입사 후 선배가 업무에 도움이 된다며 책을 추천해도 "한국 책 잉크에서 나오는 독소에 호흡이 곤란해지는 아나필락틱 쇼크를 앓고 있다"며 둘러댈 수도 있습니다. 이 질병은 심할 경우 의식 저하와 사망까지 유발한다니, 악한이 아니라면 이해해줄 겁니다(책이 이러게 위험할 수 있다니, 왠지 작가로서 반성하게 되네요).

세상에 고민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왜냐하면 다들 나이 드는 건 처음이니까. 다들 사는 게 처음이니까, 세상에는 처음인 것 투성이니 말이다. 누군가는 연애를 하는 게 처음이고, 누군가는 대학생이 되는 것이 처음이고, 또 누군가는 엄마가 되는 게 처음이다. 그러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나는 왜 늘 이 모양인 건지, 혹은 제대로 연애는 할 수 있을지, 취직은 잘 될지 불안한 것이 당연한 거라는 얘기다. 어릴 때는 어려서 서툴다,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실수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사실 우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부족하고,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고민한다. 내가 이상한 건지, 연애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살아야 할지 말이다.

이 책은 소설가 최민석이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주간지 「대학내일」에 연재한 대학생들의 고민을 상담하는 칼럼의 내용과 못다한 질문을 추가로 더해 엮어내었다. 세상의 모든 '프로 고민러'들에게 전하는 최민석 작가만의 색다른 고민 해결 방법들은 매우 진지한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유쾌하다. 소설가 특유의 말빨이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일반적인 고민에 대한 해답을 넘어서 기발하고, 깊이 있고, 논리적이고, 신선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 '사랑' '관계' '미래' 등으로 2030이 가장 궁금해하는 주제로 카테고리를 나누어 질문과 답을 구성했기에 읽기도 쉽고, 필요한 대목들을 찾아서 보기에도 편하다.

 

 

, 듣기만 해도 마음이 아프네요. 가슴이 사막처럼 갈라지고, 키보드가 눈물로 침수될 지경입니다. 이런 상황에도 답변을 거짓말로 할 수 없는 제 입장이 한스럽네요.

갑자기 이별 통보를 하고 연락이 두절됐다고 했지요. 그런 채로 7년 넘게 지내다가 이번에 재회를 했는데, 헤어지기 직전에 말했죠. "연애를 굳이 할 필요를 못 느끼겠어. 연애에 지쳤어."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지만, 전 여친은 질문자님에게 이성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아요(어떡하죠. 주소라도 알려주신다면, 위로의 선물로 제 책이라도 보내드릴까요?).

대학생들의 고민이라 그런지 질문의 내용이 정말 다양하고, 기상천외했다. 저는 왜 글만 읽으면 졸음이 몰려올까요. <검은 사제들> 영화를 보고 나서 너무 무서워서 잠이 안 오는데, 무서움을 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머리가 너무 커서 고민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자친구가 가난한데, 돈 걱정 없는 연애도 해보고 싶어요. 남자친구 SNS에 제 사진이 없어요. 사랑에 대한 기대가 없는데 결혼해도 될까요? 친구가 자꾸 약속에 늦는데, 이 지각하는 버릇 어떻게 하면 고쳐줄 수 있을까요. 등등.. 현실적인 고민부터 소소한 고민, 진중한 고민 등 각자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삶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질문들이다. 그에 대한 최민석 작가의 답변은 더욱 흥미롭다. 무조건적인 위로나 천편일률적인 모범 답안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담에 빗대어 건네는 현실적이지만, 긍정적인 답변들은 때로는 공감되고, 때로는 그 유머에 감탄하고, 따뜻함에 위로도 받으면서 읽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하면 바로 떠오르는 분이 한 분 계신다. 이유는 매일 숙제로 검사를 했던 일기장에 항상 코멘트를 달아주셨기 때문이다. 의례적인 문구가 아니라 고민에 대한 답변 혹은 내가 겪었던 상황에 대한 이해의 문구들을 달아주셨기에, 어린 나이에도 그게 굉장히 설레었던 기억이 난다. 난 이것도 잘하고 싶고 저것도 잘하고 싶은데, 왜 이렇게 욕심이 많은 걸까요. 라고 쓰면 욕심이 많은 건 나쁜 게 아니라고 서두를 열고는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식이었다. 사실 일기 검사는 단순한 숙제의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최민석 작가의 이 책을 읽는 동안 초등학교 시절 그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렇게 질문자 한 명 한 명에게 애착을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가이드해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수많은 '호모 고미니우스(고민하는 존재)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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