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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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라 페인이 우리에게 평가 없이 빈 종이와 마주하라고 말했던 그날, 그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절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절대 알 수 없을 것임을. 단순한 생각 같지만,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녀가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생각한다. 늘 생각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얕보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 자신을 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를.

 

오래 전에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소설을 읽으며 퉁명스럽고 무뚝뚝하지만,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여인 올리브에게 한 눈에 반했던 기억이 난다. 삶이란 수많은 순간들과 더 많은 관계들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삶은 선물이라는 걸, 그리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을 아는 거라고 말해주는 뭉클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첫번째 장편이었던 <에이미와 이저벨>을 거쳐, 이번에 만나게 되는 작품 <내이름은 루시 바턴>은 그 동안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우선 전작들에 비해 분량이 굉장히 얇은 편이고, 삼인칭이 아니라 일인칭 시점의 글이다. 게다가 마치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작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극중 화자는 오래 전에 자신이 구 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었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어지는 며칠 동안 어머니의 딸의 대화들은, 현재의 생각들과 과거의 기억들을 오가며 이어지는데,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기억의 조각들이 툭툭 던져 있는 듯한 구성이라 일반적인 소설의 서사를 기대했다면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의 구성 방식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글을 쓰는 방식과 같다는 점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형적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떠오른 장면들을수집해짤막하게 글로 옮긴 뒤 커다란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각 장면들의 연결성을 떠올리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그러니 사실은 조금 낯선 그녀의 이 작품이야말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라는 작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셈이다. 루시 바턴이라는 허구의 인물이 내는 목소리를 통해서 실제 작가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굉장히 매혹적이다.

 

시간은 늘 충분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내가 결혼생활에 안주하면 또다른 책,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책은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일리노이 주 앰개시-에는 가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 라고. 이것이 그 냉혹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루시 바턴이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건 맹장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는데, 갑작스럽게 열이 나기 시작했고, 음식을 넘길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난다. 병원의 어느 누구도 원인을 알 수 없었고, 그렇게 그녀는 오랜 시간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남편은 집안일로, 직장일로 바빠서 병원에 올 시간을 잘 내지 못했지만, 사실 병실의 풍경들을 견딜 수 없어 하기도 했다. 어린 아이들과 남편을 그리워하며 외롭게 지내던 어느 날, 그녀가 입원한 지 삼 주쯤 지났을 무렵 오래 연락을 끊고 지냈던 엄마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오랜 만에 듣는 애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그녀는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그렇게 엄마가 자신을 간병해줬던 닷새를 회상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엄마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고향 사람들의 사연 속에 루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그 시절의 추위와 배고픔과 외로움, 고향을 떠나고 싶어했던 마음과 동경했던 뉴욕에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자신의 인생들에 대해 돌아본다. 극중 화자인 ''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기억하고 돌아보면서 자신이 소설을 쓰게 된 이유와 경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것은 루시 바턴의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는 자신의 것이라고 말이다. 그녀는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한 고찰과 소설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그리고 소설을 쓰는 일 자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러니 이 작품은 허구의 인물인 루시 바턴의 이야기인 동시에 작가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이야기인 셈이다. 책이 그녀의 외로움을 덜어 주었고,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자신도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던 순간부터, 그녀가 글을 써나가고 작가가 되어 가는 과정의 편린들이 담백하게 그려진다.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 만들어지는 이 작품은 전작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모든 생은 선물과도 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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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우울 법의학 교실 시리즈 2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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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와 법의학자가 친해지는 건 상관없지만 상대를 잘 고르라고."

그 말은 역시 흘려 들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콤비란 건 말이지, 한쪽이 액셀러레이터라면 다른 한쪽은 브레이크 역할을 해야 해. 만약 둘이 동시에 액셀을 밟으면 어떻게 될까? 그야말로 폭주가 펼쳐지는 거지. 정확히 지금 너랑 그 선생이 딱 그 꼴이고."

 

전편에서 독단적이고 괴팍하기로 소문난 법의학계의 권위자 미쓰자키 교수와 자신은 시신을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는 미국인 조교수 캐시와 함께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에 합류한 마코토는 법의학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동안은 법의학을 죽은 자를 위한 학문, 범죄 수사에 이바지하는 학문이라고만 생각해왔었는데, 법의학이 살아 있는 이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죽은 자보다는 산 자, 부검보다는 치료라고 생각했던 사고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 이후로는 사법해부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출간된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 시리즈' 그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 정식 조교로 발령을 받게 된 마코토가 어엿한 법의학자로 성장해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모든 죽음에 부검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건 나에게 잘된 일이다. 사이타마 현경은 앞으로 현에서 발생한 자연사, 사고사에 모종의 음모가 있는지 의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내 이름은 '커렉터', 즉 교정자다.

마코토가 새로운 첫걸음을 내딛는 날, 법의학 교실을 찾아온 건 현경 형사부 고테가와 가즈야 형사. 그는 무뚝뚝한 말투에 투박한 매력을 발산하며 전편에서도 변사체 사법해부를 의뢰하느라 법의학 교실을 자주 드나들었던 인물이다. 마코토와 고테가와 티격태격하면서 사건을 해결하게 될 스토리가 시작부터 기대되었다. 그는 현경 홈페이지 게시판에 커렉터라는 이름으로 올라온 글에 대해 자문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그들은 그 글에 대해 경찰이나 법의학계 관계자가 벌인 장난 혹은 내부 고발쯤으로 치부하려 했지만, 차례로 올라오는 커렉터의 글은 모두 사인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들이라 마냥 무시할 수가 없다. 변사체, 자연사, 병사한 시신 등 다양한 사건, 사고에 대한 커렉터의 문제 제기는 의도를 종잡을 수 없고, 경찰서와 법의학 교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죽은 자의 마음을 헤아려 원통함을 풀어 주고 싶은 고테가와의 심정에는 백 퍼센트 동감한다. 또 경제적인 이유로 의사의 도움을 받는 환자와 받지 못하는 환자로 나뉘는 상황에도 강한 반발심이 들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 오로지 환자의 이익만 생각하며 어떤 의도적인 비행이나 해악은 범하지 않겠습니다."

지금은 보지 않아도 줄줄 읊게 된 <히포크라테스 선서> 속 구절을 다시 떠올렸다. 죽은 자든 산 자든 똑같은 환자다. 그리고 환자인 이상, 경제적 이유 따위 상관없이 공평하게 대처해야 한다.

 

혹시 커렉터의 목적이 우리의 과로사가 아닐까라고 생각할 만큼 마코토는 불만을 토로한다. 커렉터의 의미심장한 글들 덕분에 법의학 교실의 부검 횟수가 나날이 늘어갔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분명 사법해부가 필요한 건도 있었지만, 자연사와 사고사 등 검시만으로도 충분한 건까지 포함돼 부검 요청은 갑절이 되었지만, 법의학 교실 인원은 단 세 사람뿐이었으니 말이다. 커렉터와의 대결 속에서 경찰과 법의학자들이 기댈 수 있는 아이러니하게도 유일한 단서는 '죽은 자의 목소리'뿐이었다. 전편에서 미쓰자키 교수는 살아 있는 인간은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지키기 위해, 조직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기도 하지만, 시신은 오로지 진실만을 말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부검을 통해서 진실을 이야기하고, 각각의 사연들이 마지막에 하나의 진실로 이어지는 구성은 커렉터라는 존재로 인해 전편보다 더욱 흥미롭게 진행된다.

콘서트 도중 수많은 관중 앞에서 사고로 죽은 아이돌, 때아닌 무더위로 열중증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에 베란다에서 놀다 죽은 어린 아이, 화재로 불타 죽은 신흥 종교의 교주, 산책하다 갑자기 쓰러져 죽은 노인 등 다양한 죽음이 등장하는 가운데 커렉터라는 미스터리한 존재에 대한 의문도 점차 커져간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좌충우돌 활약하는 마코토와 고테가와 콤비의 활약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들의 관계가 시리즈 세 번째 정도 되면 또 어떻게 달라지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영미권의 법의학 미스터리가 그 완성도나 재미적인 면을 제외하더라도,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과 그 과정들 때문에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인데, 나카야마 시치리의 법의학 미스터리는 너무 술술 읽히고,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 시리즈' 가 앞으로 계속 이어지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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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 하나만 들어줘
다시 벨 지음, 노지양 옮김 / 현암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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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던 걸까?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주 기본적인 것도 전혀 모르는데 그 사람을 과연 안다고 할 수 있을까? ............... 에밀리와 나누었던 모든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우리가 함께 보낸 그 모든 오후를 되감기해 보았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나? 내게 말하려 했지만 내가 듣지 못했던 것은 무엇인가?

교통사고로 남편과 남동생을 한꺼번에 잃고 싱글맘이 된 스테파니는 다섯 살 아들 마일스를 키우고 있다. 그녀는 전업주부이지만 파워블로거이기도 해 육아와 일상을 블로그에 올리며, 전 세계 엄마들과 소통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녀는 아들 마일스와 친구인 니키의 엄마 에밀리와 친하게 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에밀리가 연락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여느 때처럼 아들 니키를 잠깐 맡아 달라고 한 뒤, 그대로 연락 두절이 된 것이다. 에밀리는 유명 패션 디자이너 밑에서 홍보 책임자로 일하고 있어 매우 바쁜 커리어 우먼이었지만, 늦어질 경우에는 언제나 전화나 문자로 아이를 챙기는 엄마였다. 예쁘고 날씬한 몸매에 값비싼 디자이너 의상을 걸치고 다니는 커리어 우먼이었지만, 충분히 아이를 사랑하고 책임감 있는 엄마이기도 했다. 그런데 말도 없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바쁜 업무 탓에 자주 출장으로 집을 비우곤 했던 에밀리의 남편 숀도 그 소식에 돌아오고,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여전히 에밀리의 행방은 알 수가 없다.

이야기는 에밀리가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에 에밀리가 사라지게 된 과정을 써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에밀리가 갑작스레 사라진 뒤 스테파니는 얼결에 그녀의 아들 니키를 맡아 돌보게 되고, 그녀의 남편 숀과 이야기를 나누고 걱정하며 점차 가까워진다. 스테파니는 에밀리가 사라지게 된 과정을 추적해 보기로 하고, 숀과 가까워지면서 그녀의 가정에 깊숙이 들어가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전혀 몰랐던 에밀리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스테파니는 에밀리와 그 동안 나누었던 모든 대화를 곱씹어 본다. 그들이 함께 보낸 그 모든 시간들을 떠올려 본다. 어떻게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이렇게까지 모를 수가 있을까? 그녀가 새롭게 알게 된 에밀리에 대한 모든 것들은 자신이 그 동안 알았던 그 친구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엄마가 된다는 건 충격이라는 말이었다. 아기를 안는 그 순간부터 아기에 대한 징글징글할 정도로 강력한 사랑이 치고 들어왔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나도 안다. 어떤 여자들은 그걸 깨닫는 데 오래 걸리기도 한다....엄마가 된다는 건 전기 충격을 받는 것이다. 결국 스테파니의 한심한 블로그를 하나의 부조리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 문장일 것이다.

누구나 가끔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의 진짜 모습을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마련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때로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으니까. 이는 내가 상대에게서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기대하는 바가 상대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스릴러 장르에 적용되는 법칙이 있다면 바로 이것 아닐까. 절대 그 누구도 믿지 말라.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을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할 때에는 대부분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 의한 것이니 말이다. 믿음과 의심 사이의 그 조그만 간격은 사실 종이의 앞면뒷면과 같다. 사소한 행동, 말투들이 쌓여 오해를 만들고, 견고하게 쌓인 세월을 넘어 믿음을 깨트린다. 사실 의심이란 씨앗은 단순하지만,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한번 시작된 의심은 절대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 사실을 알았던 순간으로부터 되돌아갈 수가 없다. 연인들의 헤어짐도, 친구들과의 다툼도, 부부 간의 신뢰가 깨어지는 것도 모두 단 한 순간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 쌓아온 신뢰와 구축된 관계들을 차례차례 부식시켜 바닥에 이르게 만드는 것은 각자 가지고 있는 비밀일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는 어떤 사람을 절대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스테파니, 에밀리, 숀 모두 각자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는 세 파트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자의 1인칭 시점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파트가 바뀌면서 계속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서로 다른 시각이란, 그들이 숨기고 있는 비밀 만큼이나 매혹적이니 말이다. <나를 찾아줘> 이후로 심리 스릴러, 그 중에서도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도메스틱 스릴러 작품들이 엄청나게 출간되었다. 유사한 장르의 전개 방식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한 구성으로 진행이 되게 마련인데,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주인공을 파워블로거로 설정한 탓에 조금 더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실제 생활과 블로거를 통해서 글로 보여지는 것과의 차이에서 오는 반전 또한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 만큼이나 재미있고, 홀로 육아를 하며 생활을 꾸려가는 엄마의 소소한 일상들이 보여져 공감할 수 있는 대목들도 많고 말이다.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는 일상 속 사소함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얼마나 엄청난 폭풍으로 삶을 뒤흔들게 되는지, 마지막 페이지까지 손을 놓을 수 없는 긴장감 속에서 지켜본 것 같다. <나를 찾아줘> 만큼이나 재미있었던, 페이지 터너 스릴러가 아니었나 싶다. 출간 즉시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하는데, 스크린에서 펼쳐지게 될 작품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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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히어로즈
기타가와 에미, 추지나 / 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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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저는 세상 모든 사람이 유일무이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의미죠?"

"이를테면 쌍둥이도 DNA는 똑같지만 염색체까지 같지는 않죠. 완벽히 똑같은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인간이란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누구나 누군가의 '대타'이기도 하죠?"

"모든 사람이 누군가의 '대타'가 될 존재임과 동시에 모든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이기도 하다고 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어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게 되는 생각이란 바로 이럴 것이다.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돈을 번다는 것도,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것도, 감정을 숨기고,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도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렇다. 산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작가 기타가와 에미는 이렇게 말한다. 사는 건 아주 쉽다고. 그리고는 의문을 제기하는 상대에게 숨을 한번 들이쉬어보라고 한다. 그 다음에는 숨을 뱉어보라고. 당신은 지금, 살아 있다고. 그러니 사는 건 아주 쉬운 일이라고 말이다. 사실 그의 말도 틀린 건 아니지 않나. 산다는 건 어처구니 없이 쉬운 일이기도, 누군가에게는 죽을 것처럼 괴롭기도 한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라는 재기발랄하고 유쾌한 데뷔작을 선보였던 기타가와 에미의 두 번째 소설은 전작만큼이나 재미있다. 그의 모토가 만화를 글자로 만든 것처럼 뭐든 가능하고 다소 비현실적이지만 왠지 즐거운, '재미'에 특화된 소설을 쓰자는 것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의 작품에는 매번 황당하다고 느껴질 만큼 이상한 설정에, 무모하다고 보일 만큼 독특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마력이 있다.

주인공 다나카 슈지는 20대 중반으로 금융회사에 다니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사내에 귀여운 애인도 있었고, 좋은 동료들과 자신을 믿어주는 듬직한 상사도 있었던, 순탄한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 버스에서 낯선 여고생에게 치한으로 몰리게 되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여자 친구에게는 뺨을 맞고, 직장에서는 해고 통보를 받게 된 것이다. 일주일 뒤 진범이 체포되었지만, 여자 친구도, 그녀의 부모도, 회사도 이미 자신들의 태도를 돌이키지 않는다. 자신은 아무 죄도 없는데, 게다가 진범도 잡혔는데, 어째서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 걸까. 그는 절망했고 그 뒤로는 버스 가까이만 가도 공황발작을 일으킬 정도가 되고 만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도시로 가고 싶어 이사를 하고, 세 평짜리 싸구려 원룸에 살며 근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 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던 동료에게 일주일 간의 단기 알바를 제안 받게 된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된다.

"이를테면 이 캔커피 개발에 관여한 사람도. 이게 개발되어 우리 손에 올 때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시간과 품이 들었을까요.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그들도 바로 지금 우리의 인생에 관여하고 있는 겁니다."

나도 캔커피를 바라보았다. 캔커피는 아까부터 줄곧 내 손바닥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었다.

"그 영향이 큰지 작은지는 별개로, 인생이란 언제나 그렇게 얽히고설킨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신도 히어로가 될 수 있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있는 '주식회사 히어로즈'라는 회사는 이름도 이상하지만, 업무 내용도 '히어로 제작을 돕는 간단한 일'이라고 밖에 설명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맡게 된 첫 번째 업무는 바로 고급 호텔의 최상층에서 발광하는 사람을 붙들고 그가 머리를 박지 않도록 진정시키는 일이었다. 일 자체보다도 더 황당했던 것은 바로 그가 유명한 만화가 도조 하야토 선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이상한 회사에서 이상한 업무를 끝내며, 슈지는 도조 선생으로부터 명함 뒷면에 직접 그린 자신의 캐리커쳐를 받는다. 특징 없는 얼굴이라 그리기 어려웠다는 멘트와 함께. 슈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회사의 정사원 제의에 면접을 보게 되고, 덜컥 합격해서 히어로즈 회사의 진짜 업무를 맡아 시작하게 된다. 직원들 각자의 업무 내용은 모두 제각각이다. 각자의 특기 분야를 살려 세상에 히어로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진짜 임무였기 때문이다. 의뢰하는 사람이 누구든, 그들을 다방면으로 지원하고 측근에서 응원해 '누군가를 위한 히어로'로 만들어 준다. 회사에서 내세우는 조건은 딱 한 가지이다. '인간일 것.' 우리는 모두 인간이지만, 참 인간답게 살기 힘든 세상이니 말이다. 그리고 히어로가 되기 위해서는 본인의 의지와 노력 또한 필요하다.

구십 평생을 살아온 자신의 삶을 '아무런 재미도 없는 인생이었어'라고 회고하는 평범한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히어로가 될 수 있다. 누구의 인생이든, 평생에 히어로 한 명쯤은 존재하니 말이다. 한 번 봐서는 절대 기억에 남지 않을 것 같은 특징 없는 얼굴에 몇 번 들어도 기억에 남지 않을 이름을 가진, 극도로 평범한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모난 부분은 없지만, 그만큼 특별한 것도 없는 보통 사람들. 그런 사람들도 과연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히어로가 될 수 있을까. 주식회사 히어로즈에서는 누구든 히어로로 만들어 준다. 전작도 그러했지만, 별 생각 없이 가볍게 읽기 시작했던 이 책은 미스터리한 긴장감과 유쾌한 재미와 따뜻한 감동까지 안겨주었다. 세상 살기 참 힘들지만, 그래도 한번뿐인 내 인생 내 맘대로, 멋지게 한번 살아보자 싶은 의욕까지 불러일으키며 말이다. 평범한 당신도 최고가 될 수 있다. 당신도 누군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히어로가 될 수 있다. 이 작품은 보통의 인생을 살고 있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응원과 힐링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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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막의 게르니카
하라다 마하 지음, 김완 옮김 / 인디페이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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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해! 하고 피카소는 소리를 지르는 거죠.

죽이지 마라. 전쟁을 하지 마라. 어둠의 연쇄를 끊어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그 그림은 그런 반전의 가치입니다. 피카소의 도전이자 공약인 겁니다.

저는 온 세상 사람들이 그 그림을 목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그림 속에서 터져 나오는 피카소의 외침을 들어야 한다고.

이 작품의 제목이자 표지 이미지로도 사용되고 있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1937년 스페인 내전이 한창 벌어지던 당시, 나치가 게르니카를 폭격한 사건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특이한 것은 이 그림 속에서 나치의 폭격이나 내전의 구체적인 참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거다. 흑백 톤의 컬러만을 사용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미지는, 울부짖는 여인, 죽은 어린이, 소리 높여 우는 말, 돌아보는 황소, 힘이 다해 쓰러진 병사의 모습이다. 전쟁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이제는 전쟁을 해선 안 된다고 피카소가 그림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1937년 당시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던 그 시기와 2000년대 현재 그 작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가 교차 진행되고 있다.

뉴욕현대미술관, 일본 모리미술관 큐레이터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의 작가 하라다 마하는 전작 <낙원의 캔버스>에 이어 이번에도 '아트 미스터리 서스펜스'라는 독특한 장르의 작품을 만들었다. 2003년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9.11테러 보복을 명목으로 이라크 공습을 개시하며 기자회견을 했을 당시, 반전의 심벌인 [게르니카]의 태피스트리가 UN본부에서 암막에 가려지는 사건이 있었다. 하라다 마하는 피카소의 반전 메시지 자체를 은폐하려고 했던 그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드는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작품은 20세기의 파리와 21세기의 뉴욕을 넘나 들며, 피카소라는 거장의 삶과 예술 세계, 그리고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만들어 준다.

 

1937, 나치 독일이 게르니카에서 저지른 인류 최초의 무차별 폭격.

그 폭거에 분노의 불꽃을 태우며 피카소가 그려낸 거대한 한 장의 그림.

수천만 자루의 총보다도 한 자루의 붓이 훨씬 강함을 증명했던 기념비적인 작품.

폭격은 도시를, 사람을, 모든 것을 파괴했다.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하지만 피카소 작품은 사람들에게 반전의 마음을 싹트게 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큐레이터인 야가미 요코는 아트 컨설턴트인 남편 이든을 9.11 테러로 인해 잃게 된다. 어린 시절 보았던 피카소의 <게르니카> 덕분에 미술계로 오게 된 그녀에게, 이든은 결혼반지 대신 피카소의 비둘기 드로잉을 주었었다. 평화에 대한 마음을 담고 있는 순백의 비둘기 드로잉은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가 된다. 그리고 남편을 잃고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그녀가 다시 일어서게 해 준 것도 미술을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과 피카소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술의 힘으로 상처 입은 뉴욕 시민을, 전 세계 사람들을 격려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미술의 힘으로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다고 말이다. 그녀는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피카소 전」에 스페인으로 반환한 <게르니카>를 전시하려고 하지만, 세기의 문제작을 다시 뉴욕으로 불러들이는 일이 만만치가 않다. 이야기는 <게르니카>를 두고 벌어지는 음모와 권력 다툼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애쓰는 요코의 고군분투와 거의 같은 비중으로 2차 세계대전 전 파리에서 피카소와 그의 연인인 도라가 <게르니카>를 작업하던 당시의 시간가 스릴 넘치게 교차 진행된다.

예술은 결코 장식이 아니며, 전쟁이나 테러리즘이나 폭력과 싸울 무기라고 했던 피카소의 진심이 작품 전반에 걸쳐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서스펜스 미스터리이지만 뭉클한 감정마저 들게 한다. 인류는 유사 이래 서로 증오하며 싸워왔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어제도, 오늘도 여전히. 어느 시대에도 전쟁이 있었다. 전쟁을 벌이는 것은 늘 위정자였으며, 시정 사람들은 그저 거기에 말려들어 당혹스러워하고 슬퍼하고 상처 입을 뿐이었다. 말이 아니라 붓으로 호소한 피카소의 메시지는 수천만 자루의 총보다도 한 자루의 붓이 훨씬 강함을 증명했던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미스터리라는 장르 자체로도 매우 흥미로웠지만, 미술사에 정통한 작가가 그려내는 피카소와 그의 그림에 대한 아트 드라마로서도 굉장히 놀라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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