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스트 (표지 : 2종 중 랜덤) - 작고도 빛나는 삶을 위한 111가지 일상탐구서
체로키 지음 / 웨일북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퀘스트는 일종의 열쇠입니다. 사막 위를 헤매는 이에게, 절망의 낭떠러지 끝에 선 이에게, 간절히 행복해지고 싶은 이에게 필요한 열쇠입니다....우리는 각자 앞에 마주 선 문이 있고, 앞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헌데 어떤 문은 좀처럼 열리지가 않아서 우리를 주저앉게 만듭니다. 이 열쇠들이 그 거대한 문을 여는 데 빛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삶을 나아가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소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일상을 만드는데, 정작 그 매일 지나치는 소소함들을 소중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 또한 별다를 게 없다고 여긴다면..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지루할까. 좀 많이 지치고 스트레스 가득한 내 삶을 벗어날 수 있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내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저자는 말한다. '인생은 5개의 거창함과 111개의 사소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는 일상, , 타인, , 세계라는 커다란 테마 아래 111가지의 사소함들을 포함시켰다. 일상 속의 집, 음악, 휴식, 독서, 낮잠 등과 나라는 카테고리 안에 이름, 내면, 직감, 게으름 등과 타인아래 관계, 대화, 약속, 사랑 등, 일이라는 테마 안에 끔, 목표, 아이디어, 도전 등, 그리고 세계아래 죽음, 시간, 우주, 영원 등의 사소함들을. 결코 사소하다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그런 항목들 말이다.

한쪽 페이지에는 문학, 역사, 철학, 경제, 예술을 아우르는 명사들의 명언들이 정리되어 있다. 그들의 반짝이는 말들 속에서 각 테마와 항목에 맞는 인생의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서. 다른 쪽 페이지에는 그들이 건네는 멘트 속의 키에 대한 몇 가지 퀘스트들이 담겨 져 있다. 현실이라는 테마 아래 꿈을 꾸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반복하고 반복해서, 꿈을 현실로 만들라는 명언들을 읽고 나면, 세 가지 퀘스트가 기다리고 있다. 나의 현실 보기, 반복하기, 세상의 현실 보기. 내가 지금 어디쯤에 있고, 나에겐 무엇이 있고, 어딜 갈 예정인지 내가 놓여 있는 현실을 보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반복해야 한다는 퀘스트. 스스로 선택한 지루한 일상을 사랑하며, 세상 곳곳의 현실 또한 함께 직시하라는 퀘스트이다.

 

우리는 어느 날 생이라는 게임 속에 들어왔습니다. 주사위는 던져 졌고, 저마다의 속도로 나아갑니다. 그 앞에 어떠한 사건, 인연,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그때마다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오직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벅찬 사 랑, 꿈을 향한 행진, 소소한 행복일 수도 있고, 깊은 절망, 뼈아픈 시련, 지루한 일상의 반복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 모두는 작은 성취이며 소중한 경험입니다.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111개의 사소함들을 읽고 있노라니, 어쩐지 대단치 않은 내 일상의 조각들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진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는 말을 통해 세상을 정성스럽게 관찰하게 되고, 눈을 감고, 주변의 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여보기도 하고, 매일이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느낌으로, 매 순간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이런 말을 했다. "평생 삶의 결정적 순간을 찍으려 발버둥 쳤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라고. 영원한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천천히 걷기,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근사한 저녁식사 함께 하기, 누구에게나 생은 단 한 번뿐이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그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는 니체의 말처럼 삶을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자는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사라져버린다고, 가슴 깊이 이 순간을 만끽하라고 조언한다. 지루한 일상의 반복도,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시련도, 벽 앞에 서 있는 듯 막막한 절망도 모두 내 삶에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경험이 될 수 있다.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이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 세상이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향한 나의 관점에 대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채플린의 말처럼, 삶을 좀더 멀리, 조금 더 크게 볼 필요도 있다. 이 책은 시간이 날 때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보아도 좋을 것 같고, 뭔가 풀리지 않는 고민들로 휘청일 때 그에 해당되는 항목을 찾아서 도움을 받아도 좋을 것 같다. 가볍지만 결코 모래처럼 흩어지지는 않는, 소소하지만 바로 그 사소한 것들이 삶을 이루는 버팀목이라는 걸 알려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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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의 서
조엘 디케르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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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 년 전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을 읽고는 올해의 발견이라고 마구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미스터리와 소설쓰기라는 매혹적인 소재를 절묘하게 그려낸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며 두 권짜리 책을 앉은 자리에서 네 시간 동안 내리 읽었다. 캐릭터, 플롯, 반전 모두 너무 흥미진진했던 터라, 왜 조엘 디케르의 다음 작품이 나오지 않는 건지 그 동안 궁금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새로운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게다가 이번 작품의 화자가 전작과 마찬가지로 작가 마커스 골드먼이라고 하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읽기로 했다. 당연히 재미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제발! 정신 나간 소리 좀 작작하게. 이제 책의 시대는 갔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죠?”

“요즘 20대들은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해. 출판산업은 이제 끝났어. 아마도 자네의 손자들은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라오의 상형문자를 바라보듯 책을 바라보게 될 거야. 자네 손자들이할아버지, 책은 어디에 쓰는 물건이에요?’ 하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 줄 텐가? 그때가 되면 책은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 있을 거야.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들이라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망하게 되지. 그때 가서 깨닫고 후회해봐야 소용없어.”

 

전작에서 마커스 골드먼은 스물여덟의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로 단 몇 주 만에 유명인사가 된 소설가이다. 첫 작품의 어마어마한 성공은 그를 백만장자로 만들어주지만, 이후 단 한 줄도 써내지 못하는 슬럼프에 빠졌을 때, 그는 대학 시절 스승이었던 해리 쿼버트를 찾아 간다. 그리고 서른이 된 마커스는 해리 쿼버트에게 벌어진 사건을 소설로 써서, 겨우 두 번째 책으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된다. 그렇게 해리 쿼버트 사건이 보도된 2008년부터 사건이 발생한 1975년까지의 시간이 교차되면서 이야기는 퍼즐 같은 미로를 시작해, 마커스 골드만의 신작이 되는 한 편의 소설이 쓰여지는 과정이 작품의 전체 스토리가 되었었다. 그리고 33년 전에 있었던 그 살인사건의 수사 과정에 긴박감과 미스터리를 더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번 작품 <볼티모어의 서>에서 주인공은 마커스 골드먼이지만, 같은 인물을 등장시킨 이유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기에, 전작과의 연계성은 거의 없다. 그저 유명 소설가인 주인공이 필요했기에, 전작의 마커스 골드먼이 다시 등장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번 작품은 전혀 다른 드라마가 펼쳐진다. 전작이 미스터리의 비중이 높았다면, 이번 작품은 가족 드라마의 성격이 더 강한 느낌이다.

이야기는볼티모어 골드먼가족과몬트클레어 골드먼가족에서 시작한다. 마커스 골드먼의 큰아버지 사울이 사는 곳이볼티모어이고, 아버지 네이튼이 사는 곳이 뉴저지 주몬트클레어이다. 큰아버지는 볼티모어에서 가장 신망이 두터운 로펌을 이끄는 변호사였고, 화려한 경력을 기반으로 중요한 소성을 도맡았다. 큰어머니는 굉장히 아름다웠고, 존스홉킨스 병원 암센터에서 일하는 베테랑 의사였다. 아들 힐렐은 마커스와 동갑내기였고, 사촌간인 그들은 친형제보다도 더 가깝게 지냈다. 마커스는 어린 시절 내내 큰아버지 가족에게 동경과 부러움을 느끼면서 자라왔다. 그들은 대저택, 고급 자동차, 여름 별장, 타워 아파트, 스키휴가까지 풍족한 경제력으로 늘 자신만만했고, 누구에게나 존경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 내내 자신의 부모들을 존경하고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큰아버지가 자신의 부모였으면, 우리도 그들 가족처럼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힐렐의 친구 우디까지 셋은 골드먼 갱단을 결성하고 영원한 우애를 맹세한다. 모든 것을 함께 하고, 모든 것을 나누었던 이들의 시대는 매력적인 여자 알렉산드라 네빌이 등장하면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지만, 완벽한 비극의 시작은 비단 그것에서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왜 글을 쓰냐고 묻는다면?

글이 삶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우리가 부조리한 삶에 맞서는 복수전을 펼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준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 성벽처럼 강한 정신,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 기억의 힘을 증명할 수 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소설가인 마커스 골드먼이 완벽하게 행복해 보여서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였던 볼티모어 골드먼 가족들에게 닥친 비극의 원인을 파헤치는 과정이 그려진다. 그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들의 행복이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었던 건지, 그들에게 닥친 비극의 실체를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의 후반부에 볼티모어 골드먼 가족의 삶을 소설로 재구성해서 글로 써내면서 끔찍한 비극을 지울 수 있었고, 잊을 수 있었고, 누군가의 과오를 용서할 수 있었고, 자신이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볼티모어 골드먼들이 과거에 누린 영광은 이미 다 사라져버렸고, 이제는 작은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 상황에서, 자신에게 남은 건 지금 써 나가는 소설밖에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 보낸 오늘 하루가 우리의 생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지금은 전혀 알 수 없다. 누군가의 생을 완전히 바꿔버릴 수 있는 비극 또한 단 하나의 원인 때문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갖가지 우여곡절이 쌓여 누구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형성된 결과일 수도 있다. 산다는 것은 매 순간 뭔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과정이고, 수많은 사람들과 맺어가는 관계에서 우리가 매번 솔직할 수는 없다. 오해와 편견이 만들어낸 허상이 시간이 흘러 정말 실체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고, 좋은 의도로 한 착한 거짓말이었지만 상대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되고 그로 인해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완벽해 보이던 삶이라도 단 한 번의 실수로 완전히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릴 수도 있으니 세상에 영원한 거란 아무것도 없는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불확실한 삶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끔찍한 비극이 닥치더라도, 불행이 피할 새도 없이 밀어닥치더라도, 어쨌거나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만 하니까. 그러니 사실 그 일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정작 중요한 건 우리가 그 일들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극중 마커스는 글을 통해 골드먼들의 삶이 치유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었다.

조엘 디케르는 전작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스타일로 이 두툼한 책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주었다. 작가라는 직업과 살인 사건 뒤에 숨겨진 미스터리에 치중했던 전작에 비해, 이번 작품에서는 가족 드라마에만 집중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술술 읽히지만 페이지가 점점 쌓일 수록 이야기가 묵직해지는 느낌이다. 정말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할까. 조엘 디케르는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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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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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이군요? 음식의 맛을 느끼지 못하고 단순히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위장에 강제로 집어넣는 행위라니. 음식을 먹는다는 건 배를 채우려는 목적도 있지만 요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풍미를 느끼는 시간이기도 한데, 혀가 안내하는 그 깊고 오묘한 세계를 광둥인들은 잠자리에서까지 찬양합니다."

"굶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린 한 식욕에 아름다움 따위가 끼어들 수 없다."

광둥 제일의 요리사였던 아버지에게 어릴 때부터 요리를 배운 천재 요리사 첸, 전쟁의 중심에 있지만 그것보다는 궁극의 맛에 집착하는 일본 관동군 사령관 모리, 전쟁 통에 일본군 위안부로 떠돌다 첸의 집에 숨어들어 목숨을 구한 조선인 여인 길순. 이들 세 명이 1945년 일제 패망 직전의 붉은 땅 만주를 배경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첸은 요리사이자 비밀 자경단원으로 자신의 주무기인 요리로 일본군들을 독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그는 모리의 테스트를 목숨을 걸고 통과해 그를 위해 요리를 만들게 된다. 장교식당 취사병이 된 첸은 만주족 전통 축제인 반진제의 음식을 준비하면서 남몰래 독을 넣지만, 여러 음식들의 재료가 어우러져 해독 작용을 해서 아무도 죽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가족들을 취조하기 위해 데려오지만 노모는 도중 자살해버리고, 조선인 아내 길순은 끌려와 갖은 고문을 당한다. 모리는 첸을 죽이지 않고 혀를 일부 자른 뒤 장교식당 주방에 쇠사슬로 묶어두고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하도록 한다.

애써 독을 쓰지 않아도 되는, 누구도 만들 수 없는 가장 완벽한 맛, 그것이 녀석의 복수가 되어야 한다. 내가 녀석의 요리에 취하여 접시 아래 무릎을 꿇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혀를 전부 빼앗지 않은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완전히 맛보지 않아도 맛을 가늠할 수 있는 능력, 녀석의 혀는 새롭게 진화할 것이다.

전시에 음식에 독을 넣는 것으로 누군가를 암살하려는 시도라는 플롯은 사실 시시하다. 그런데 이 작품이 특별한 것은, 그것을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라 시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첸의 계획은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꺾인 꽃처럼 갑작스럽게 발각되고, 갑작스럽게 끝나 버린다. 그러니까, , .. 그리고 전이 되어야 하는데 그냥 거기서 멈춰 버리고는, 다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느낌으로. 첸은 독이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마땅히 그의 목숨을 거두어야 할 사령관 모리는 그에게 다시 화덕을 맡기겠다고 말한다. 목숨을 걸고 만드는 그의 요리를 매일 기꺼이 먹어주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1부가 끝나고 시작되는 2부에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유사한 시기를 배경으로 다루고 있는 숱한 여타의 작품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완전히 도발적이고도 새로운 이야기가 이어진다.

 

전쟁은 반복된다. 두려움은 간부나 사병이나 민간인이나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받기 싫은 선물처럼 진주해 있다. 그 속에서도 인간은 부지런히 먹고 마신다. 두려움 속에서도 매일 세끼의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인가. 매일 아침저녁 장교식당을 찾는 머릿수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다. 그들은 잘 먹어야 잘 싸울 수 있다고 자위한다. 사령부가 적들에 둘러싸일 때, 과연 저 머저리들 가운데 몇 명이나 착검을 하고 적을 향해 돌격할 수 있을까?

길순은 한달 가까이 고문을 받고 나서 관사로 옮겨지고는 한 사내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된다.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여주는 그는 바로 사령관 모리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그는 그녀의 몸을 끝없이 탐하고, 그와의 시간을 보내며 길순은 첸이 만들어 올리는 음식도 함께 먹는다. 흥미로운 것은 본 관동군 사령관 모리(야마다 오토조)가 실존 인물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실제 야마다 오토조가 백만 관동군을 지휘하지 못하고 소련군에게 모두 항복시켜 칠십만 관동군을 포로로 잡히게 한 역사적 기록이 있다. 적을 앞에 두고 음식에 집착하는 사내라는 설정이 독특하다 생각했는데, 실존 인물의 기록에 상상력을 더해 탄생한 캐릭터라고 하니 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썩어가는 것들일수록 더 깊은 맛을 풍기지. 인생도 그렇다. 너의 무엇이 너를 간절하게 하느냐? 그것이 없다면 요리는 겉치레일 뿐이다.

이들 모두칼과 혀와 밀착된 삶을 살고 있다. 음식을 먹는 시간은 최대한 줄이고, 낭비는 허락되지 않으며, 음식이 곧 목숨이었던 나라와 음식을 먹는다는 건 배를 채우려는 목적도 있지만, 요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풍미를 혀로 느끼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라니. 애초에 너무도 완벽하게 다르지 않은가. 굶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린 상황에서 식욕에 아름다움 따위가 끼어들 수 없는 것이 당연할 텐데, 그 와중에 먹는다는 걸로 잠시나마 전쟁과 자신의 직위를 잊곤 하는 일본군 사령관도 있다. 모리가 음식을 먹으면서 그에 대해 생각하고, 품평하는 대목들은 단순히 음식에 대한 찬양을 넘어서 굉장히 아름다웠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세상에 없는 요리'를 맛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첸과 길순은 물론 허구의 인물이지만, 어쩌면 당시 민족 간 싸우는 광경 속에서 거리 어디서나 실제 했을 법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그렇게 첸과 모리, 길순은 한중일 각 나라를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해, 증오의 역사를 보여줌과 동시에 한중일 민중 사이의 소통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혼불문학상 7년 만의 심사위원 만장일치 수상작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 만큼 신선하고, 독창적이면서도 매우 아름다운 묘사와 흡입력 있는 드라마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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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에 걸린 소녀 밀레니엄 (문학동네) 4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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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그 라르손은 원고만 출판사에 넘긴 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그의 데뷔작이자 유작이 된 밀레니엄 시리즈는 2005년부터 3년에 걸쳐 스웨덴에서 출간된 후, 전 세계에서 출간되어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국내에 출간된 것은 2011년이었으니, 내가 밀레니엄 시리즈를 읽은 지도 어느 덧 6년이나 되었다. 애초에 우리가 이 작품을 만나게 된 것이 작가의 사후였으니, 밀레니엄 시리즈를 처음 읽을 때부터 이 작품은 내게 시리즈 3부작이 완결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니...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아마도 시리즈로 된 작품을 사랑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그들은 고난과 역경을 물리치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나는 항상 그 다음이 궁금했다. 특히나 리스베트 같은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를 만나고 나니, 당연하게도 그녀의 다음 행보가 궁금했다. 나는 리스베트라는 캐릭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녀와 함께 나이 들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던, 그녀의 팬이었으니 말이다.

 

"이거 완전히 미친년이잖아?"

"그래, 어쩌면." 그녀가 차갑게 대답했다. "난 남들한테 공감능력도 없고, 폭력 충동이 한번 일면 걷잡을 수 없으니까."

이렇게 말하며 리스베트는 아르비드의 손을 꽉 잡았다. 엄청난 아귀 힘에 그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새로운 시리즈를 만나기 위해 나는 지난 시리즈 세 편을 모두 복습했다. 분권으로 출간되었다 이번에 통합되어 출간이 되었는데,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688,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784, <벌집을 발로 찬 소녀> 856쪽 되겠다. 이 엄청난 분량의 이야기를 왜 다시 꺼내어 읽었을까. 나는 그게 밀레니엄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독자로서의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러 번 다시 읽게 만드는, 되풀이해 거듭 읽고 싶어지는 이야기들을 사랑한다. 물론 한 편으로는 그런 작품들 때문에 또 다른 새로운 작품들을 만날 기회가 줄어든다는 점은 짜증스럽기도 하다. 내가 아무리 부지런히 책을 읽어도, 인간의 평균적인 수명 아래 최대한 읽을 수 있는 한계치란 뻔하니까 말이다. 이 책, 밀레니엄 시리즈는 그 중에서도 아마 상위권에 놓아두고 싶은 작품이다. 매번 읽을 때마다 매혹적인 미스터리로 애태우고, 몰입하게 만들고는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휴가와 추석연휴가 뒤섞여 오히려 정신 없이 바빴던 그 와중에, 나는 무려 2,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밀레니엄 전작을 다시 읽었다. 이미 여러 번 읽었지만, 또 오랜 만에 읽은 것이지만 이 시리즈는 여전히 최고의 만족감을 주는 멋진 작품들이었다. 누구나 알다시피 이 작품은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으므로 당연히 '픽션'이다. 그리고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민을 보살피는 최고의 복지 시스템이 갖춰진 곳이라는 것은 '팩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종종 픽션과 팩트 간의 그 경계를 알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야말로 여성 차별, 약자에 대한 폭력, 기득권 세력들의 탐욕에 대해 고발하고 응징하는 사회파 추리 소설로서의 최고 정점에 있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 엄청난 시리즈의 바톤을 이어 받은 작가는 바로 다비드 라게르크란츠이다. 국내에는 <나는 즐라탄이다> <앨런 튜링 최후의 방정식>이라는 작품으로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도 스티그 라르손처럼 스웨덴의 언론인으로 범죄 사건 전문 기자로 활약했던 이력이 있다. 유족과 출판사에서 공식 작가로 지정했으니 그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할 테고, 나는 그가 리스베트라는 매우 이상하면서도, 흥미롭고, 전에 없이 독특한 개성을 자랑하는 캐릭터를 어떻게 재탄생시킬지가 매우 궁금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리스베트 살란데르에 대해서 잠깐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신장 154, 몸무게 42키로, 거식증 환자처럼 삐쩍 마른 몸매로 코와 눈썹에 피어싱을 하고, 용문신을 한데다 짧게 커트한 머리는 새카맣게 염색하고 다닌다.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어떤 종류의 고등 교육도 받은 적이 없지만, 사진 기억력을 가지고 있고, 컴퓨터에 관한 천재적이며, 전설적인 해커로 통한다. 오토바이와 컴퓨터에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한번 받은 모욕은 절대 잊지 않는다. 불쾌한 짓거리를 당하고 있느니,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싸우는 인물이며, 천성적으로 절대 누군가를 용서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반드시 복수를 한다. 그 작은 체구로 오토바이 갱단 두 명을 맞상대해서 해치우는 무서운 폭력성도 가지고 있으며, 머리에 총알 세례를 받고도 살아남는 끈질긴 생명력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를 가만히 놔두는 사람이나 점잖게 구는 사람에게는 절대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사람들의 오해처럼 미친년은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만약 누군가 그녀를 도발하거나 위협하면 극도의 폭력으로 응수하는 무서운 여자이긴 하지만 말이다. 가녀린 체격과 외모 안에 감춰진 무시무시한 폭력성이라는 상반된 성격을 과연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는 어떻게 그려낼까.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도 만만치 않은 캐릭터이다. 그는 오는 여자 막지 않는 자유 연애주의자로 여자들을 대할 때의 능글맞음과 인간의 기본 윤리에 어긋나는 것을 못 참는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일에 몰입할 때의 집요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물이니 말이다. 그는 권력의 압박에 굴복한 적도, 이상을 포기하고 타협한 적도 없는 기자였다. 과연 그의 고집스러움은 계속 밀어붙일 수 상황이 될까.

사실 밀레니엄 시리즈는 3부작으로 사회문제를 제기하는 미스터리 측면은 거의 모두 다루었고, 이미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재벌총수 문제부터 거대 자본 세력에 대한 비판과 비밀 경찰 조직을 통한 국가의 비리와 거대 신문사에 대한 비판까지 말이다. 남은 것은 여전히 미스터리한 리스베트라는 인물의 과거와 주변 인물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그녀가 어린 시절 겪어야 했던 모든 악에 대한 트라우마는 아버지인 살라첸코와, 이복오빠인 로날드 니더만의 죽음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직 알 수 없는 것이고, 그녀의 쌍둥이 여동생 카밀라에 대한 부분은 스티그 라르손이 아직 많이 언급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시리즈 네 번째 작품에서 서로를 증오하는 쌍둥이 자매, 카밀라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낼 거라고 해서 매우 기대가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는 더 강해졌다고 생각해요. 지옥에서 부활해 더 커졌죠. 이제 그녀는 치명적으로 강력한 존재가 됐어요. 그리고 분명 자기가 당한 일을 하나도 잊지 않았을 거예요. 모든 게 그녀 안에 새겨졌을 거라고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리고 그녀의 어린 시절을 휩쓴 광기가 지금 이 모든 엿 같은 일들의 근원이 됐고요."

, 이제 새로운 작가의, 새로운 밀레니엄 시리즈를 만나볼 차례이다. 인공지능 연구에서 전설적인 존재인 컴퓨터 공학자 프란스 발데르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기술을 도둑맞고 보안 문제에 관해 편집광처럼 변해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그와 함께 개발 과정에 참여했던 조수가 그런 상황을 걱정해 미카엘을 찾아 온다. 그를 둘러싼 해커 조직과 대기업과의 관계에서 뭔가 있는 것 같다고 프란스를 만나 보기를 권하지만, 미카엘은 자신이 IT분야 기자가 아니라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야기 도중 프란스가 만났다는 여자 해커가 등장하고, 그녀가 리스베트가 아닐까 생각한 미카엘은 프란스를 만나보기로 한다. 하지만 그와 만나기로 약속한 새벽, 프란스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고 현장에는 그의 아들 아우구스트만 남아 있다. 살인범이 아들을 살려준 이유는 아우구스트가 자폐아라서 목격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트는 서번트로 수학과 그림에 천재성을 지닌 아이였다. , 아이가 살인이 일어나던 그 상황과 범인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낼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이런 이야기가 펼쳐질 당시,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상황은 어땠는지 살펴보자. 이 작품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의 시대는 끝났다'는 신문의 헤드라인으로 시작했다. <밀레니엄>은 살라첸코 사건 이후로 특종이 거의 없었고, 재정적 위기도 겪고 있는 상태에서 그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기업에게 지분을 30퍼센트나 매각한다. 세르네르 기업은 점차 편집에 관여하며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미카엘을 런던 특파원으로 내보내겠다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니 그가 <밀레니엄>에 남아 자신의 뜻대로 기사를 쓸려면, 다시 한번 스웨덴 언론을 뒤흔들 뭔가를 찾아야 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리스베트는 자신의 아버지, 살라첸코가 모종의 방식으로 계속 살아남아 있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단순히 살라첸코가 리스베트의 어머니를 죽이고 그녀의 어린 시절을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보다 더한 사회적 악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범죄조직을 이끌었고, 마약과 무기를 팔았으며, 여자들을 착취하고 능욕하며 평생을 보낸 인물이다. 리스베트는 살라첸코가 남긴 유산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개인적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살라의 젊은 부하였던 시그프리드가 속한 조직이 프란스의 인공지능 기술을 훔쳐 다국적 회사에 팔았다는 루머를 접했고, 결국 프란스를 찾아가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스웨덴 최고의 과학자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그들이 나눈 베일 속의 대화에 대해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미카엘은 의도와는 상관없이 또 한번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다. 프란스의 아들 아우구스트를 보호하기 위해 미카엘과 에리카, 그리고 리스베트가 동분서주하고, 그 과정에서 부블란스키를 필두로 한 경찰청과 스웨덴 국가안보기관 세포, 미 국가 안보국 NSA, 그리고 해커 조직 스파이더 소사이어티까지 연결되어 이야기는 복잡하면서도 탄탄하게 흘러 간다. 사실 리스베트에 대한 갈망이 컸기에, 그녀가 처음 등장하기 전까지 백 여페이지 정도는 사실 조금 지루했다. 하지만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로서는 미카엘과 리스베트를 비롯한 밀레니엄의 주연들 외에 이 작품을 통해 처음 등장하게 되는 인물들에 대한 상황 설계가 필요했을 것이므로, 그 부분은 감안할 만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나게 된 리스베트의 등장! 이상한 건 행동은 기존 시리즈에서와 유사했지만 어딘지 그녀가 조금 어른스러워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통제불능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이미지가 조금 수그러들고, 조금 참고 계획적으로 분노를 폭발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나는 그녀가 시리즈 첫 편에 등장했을 때가 스물넷이었고, 시리즈 세 번째 작품에서 스물일곱이었으니 그 엄청난 사건을 겪으면서 삼 년이나 흘렀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이 작품은 거기서 다시 일년 뒤에 시작하는 이야기이니, 리스베트가 어떤 면에서든 성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나는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라는 작가의 놀라운 면모를 발견하고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새로운 밀레니엄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놀랍게도 같은 인물들을 전혀 다르게 구축한 세계에 데려다 놓으면서, 시간이 흐른 만큼 그들을 성장시켰다. 물론 굉장히 기대했던 그녀의 쌍둥이 동생 카밀라 살란데르는 너무 잠깐 등장해서 그 존재감을 보여주기엔 조금 미비했지만, 이어지는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거라고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래본다. 뭐 사실 나는 리스베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해서 몇 날 며칠 밤잠을 설쳤을 정도이니, 다시 돌아온 리스베트와 미카엘을 향해 축배를 건네고 싶다. 다비드 라게르크란츠의 밀레니엄 시리즈는 총6권까지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원래 스티그 라르손이 기획했던 대로 10부작이 완성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지만, 우선 지금은 다음 이야기인 밀레니엄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을 손꼽아 기다려야겠다.

혹시 당신이 아직까지 밀레니엄 시리즈를 읽지 않았다면,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말아야 할만한 그런 작품이라고 알려주고 싶다. 나는 이렇게 뛰어나고 완성도 있으면서도, 재미있고, 스릴 넘치고, 도전적이고, 매혹적인 작품을 만나본 적이 없다. 잘만 쓰인다면 범죄소설이 사회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리스베트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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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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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젠 편안해지고 싶은 것뿐이에요. 꿈 같은 거, 하고 싶은 거 따위 생각할 필요 없이 남한테 치이지나 말고 하루하루 편안하게 살아보고 싶어요. 내가 제일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는 말이 뭔 줄 알아요? 치열하다는 말. 치열하게 살라는 말. 치열한 거 지겨워요. 치열하게 살았어요, 나름. 그런데도 이렇다구요. 치열했는데도 이 나이가 되도록 이래요. 그러면 이제 좀 그만 치열해도 되잖아요."

장강명 작가가 <댓글부대>로 수상했던 '제주 4.3 평화문학상'을 이번에는 <아몬드>의 손원평 작가가 수상했다. 대기업 계열사에서 '만년 인턴'을 하고 있는 1988년생, 서른 살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8090세대 젋은이들의 아픈 현실을 너무나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2 <82년생 김지영>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감사하게도 가제본으로 미리 만나볼 수 있었는데, 표지가 얼마나 예쁜지 요즘은 가제본도 퀄리티가 굉장한 것 같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1988년생, 서른 살 여성으로 당시 88올림픽을 즈음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들 중 가장 흔한 이름인 김지혜이다. 학창시절 언제나 주변에 지혜가 산적해 있었기에, 큰 지혜, 작은 지혜, 하얀 지혜 등등으로 구분되어 불린 시절을 거쳐, 현재는 수많은 입사시험에 떨어지고 대기업 계열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생각한다. 자랑할 것이 많지 않은 자신의 삶에는, 무수한 익명 속에 숨을 수 있는 그 평범한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그녀가 일하는 곳은 문화센터와는 달리 '수준 높은 교양'을 차별점으로 두고 있는 아카데미이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각종 복사와 강의실 의자 정리, 강사들의 잡다한 심부름 등등 정직원이 아닌 인턴이기에, 거의 아르바이트 수준의 일들뿐이다. 반지하 방에 월세로 살면서 아카데미에 인턴으로 온 지도 아홉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무언가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 자신의 인생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매일같이 하면서, 그러나 그것을 위해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없는 사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없는 사람이다. 늘 소리치고 있는데도 없는 사람이다. 수면 위에 올라있지 않으면 없는 사람이다. 반지하방에 살면 없는 사람이고, 문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없는 사람이고, 인생과의 게임에서 지면 없는 사람이다. 가슴이 아팠다. 나는 그 동안 대체 무얼 한 걸까. 이들과 어울리는 내내 나는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만 발버둥쳤다.

그런 그녀의 일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건, 아카데미의 새로운 인턴으로 들어온 규옥의 등장부터였다. 그는 아카데미의 인기 강사였던 교수에게 대학원을 다니던 당시 책을 다 써주고 나서 원고만 뺐기고 알바비도 못 받았던 남자였다. 그가 커피숍에서 그 교수에게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면 언젠가 인생 전체가 창피해질 날이 온다'고 사람들 앞에 그를 창피 주던 순간, 하필 같은 장소에 있던 지혜가 그 순간을 목격하게 되었던 과거가 있다. 지혜는 규옥과 함께 아카데미 직원에게 제공되는 공짜 강의로 우쿨렐레 강좌를 함께 듣게 되면서 조금씩 가까워지고, 수업이 끝나고 뒤풀이에 남은 사람들과 뜻밖에 모임을 하게 된다. 그곳에는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지만 공모전에서 대기업에 의해 작품만 뺏긴 문화 백수에, 식당 일을 하다 모종의 억울한 이유로 인해 문을 닫아야 했던 아저씨 등등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규옥은 말한다. 억울함에 대해 뒷얘기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한다고.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을 수는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전복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경범죄로 보기엔 약하고 명예훼손이라 칭하기엔 너무 짧고 애매한 장난스러운 반격들을 시작한다. 부당한 권위를 이용해 세상을 경직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곤란하게 하고 면박을 주고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서. 지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세상을 바꿀 용기도 꿈도 없었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통쾌했고,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그들과 한 부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과의 만남에서 언제나 동질감과 위로를 느끼지만, 사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과는 달리 위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고학력 백수, 편의점 알바생, 한국이 너무 싫은 회사원까지. 이 시대 청춘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은 그 동안에도 있어 왔지만,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이들이 세상을 향해 '반격'을 시도한다는 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세상 전체를 바꾸거나 누군가의 삶을 뒤흔들만한 반격은 아닐지라도, 통쾌하고 짜릿했다. 아마도 살면서 억울하고 화나도 참고 삼켜야만 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겪었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같은 심정이 들 것이다. 이들의 반격이 비장하거나 영웅적이거나, 거창하고 원론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마치 가벼운 놀이처럼, 마치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싱그럽고 유쾌하게 이들이 벌이는 반격의 한방들이 너무도 시원했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그들의 고민도 너무 공감이 되었고, 그들이 벌이는 저항의 몸짓들도 충분히 이해할 만했으니 말이다. 우리, 약자일지언정 세상에 '없는 사람'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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