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쓰여 있었다 - 어렸을 적이라는 말은 아직 쓰고 싶지 않아, 일기에는…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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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역으로 향하는 인파에 섞여 홀로 터벅터벅 걷는다. 사실 '터벅터벅' 보다는 '터덜터덜.' 서글픈 영화에 전염되어 나도 서글픈 기분이 넘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인생을 보내게 될까.

인생이란 뭘까.

10대 무렵의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아, 이런 밤에는 어쩐지 불안하다.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는 오랜 만이다. 이 책은 마흔과 오십 사이에 서 있는 작가 자신의 일상에서 포착한 어린 아이 같은 순간을 담고 있다. 누구나 내면에 그런 아이 같은 모습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공감 백퍼센트를 불러 오는 마스다 미리의 이번 작품 역시 기대가 되었다. 마스다 미리는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의'란 존재들은 모두 그 모습 그대로 그 시간대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어린 시절 빵집으로 달려가던 길의 작은 웅덩이가 무서워 걷던 모습, 중학교 입학식 날 교복을 입고는 어색해 했던 모습.. 그 아이들 각자가 자신과 닮은 얼굴로 어른인 내 안에서 그대로 살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이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의 나, 대학 시절의 나, 첫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하던 시절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남편과 만나 사랑에 빠졌던 내 모습을 거쳐, 한 아이의 엄마가 된 현재의 나에 이르기까지... 가만히 떠올려 보면 비슷하면서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나에 비해 지금의 내가 가장 어른의 생각과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속의 내가 가지고 있던 모습들은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글을 읽다 보면, 내 안의 그 '아이들'에게 자꾸만 말을 건네고 싶어 진다. 그렇게 그녀는 우리 어른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녀는 마흔의 한가운데에서 어른의 전성기를 보내며 '어른들의 일상'을 이야기한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페루 요리를 먹고, 친구들과 함께한 어른들의 소풍에 대해서도, 애프터눈 세트를 처음 먹으러 간 날 홍차를 무려 다섯 잔씩이나 마셨던 일과 아버지와 영화를 보러 간 일 등등... 정말로 소소하고, 평범하고, 우리 주위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그런 글들이다.

 

 

"일 년이 눈 깜짝할 새 사라졌어."

연말이면 어른들이 그 말을 하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무척이나 이상했다. 어린 나는 일 년이 엄청나게 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리고 나도 "세월이 너무 빨라."라는 말로 서로의 쓸쓸한 기분을 조용히 공유하게 되었다.

 

이제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 라고 가장 처음 느꼈던 순간은 바로 커피를 좋아하기 시작하던 즈음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꼭 한약처럼 시커멓고, 쓴 냄새가 나는 그걸 엄마가 매일 같이 마시는 게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너도 어른이 되면 이 맛을 알게 될 거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쓴 커피가 더 이상 쓰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순간,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이제 내가 어른이구나 싶어 기분이 묘했다. 마스다 미리는 어릴 때 어른들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열심히 할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무슨 얘기냐고 끼어들면 "애들은 몰라도 돼."라며 절대 알려주지 않았던 그 비밀들이, 사실은 별로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고. 그래서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어렸을 대의 자신을 만나러 간다면 가르쳐주고 싶다고.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던 터라 큭큭 대며 웃고 말았다. 마스다 미리의 글들은, 그녀의 생각들은 어쩜 이리 공감되는 대목들이 많을까 신기해하면서 말이다.

 

아이 없는 싱글 여성의 삶을 멋지게 살고 있는 그녀라 그런지, 나이에 비해 일상의 모습과 생각들이 나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어 놀랄 때가 종종 있다. 그녀의 소녀 같은 마음과 행동들이 참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느낌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재에 대한 걱정들이 책을 읽는 동안 조금씩 옅어진다고나 할까. 그녀의 긍정 마인드가 내게도 전염되는 기분도 들고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스다 미리의 작품을 읽는 것일테고 말이다. 나도 언젠가 마흔이 되고, 오십이 가까운 나이가 될 텐데.. 그 시기가 되었을 때 그녀처럼 즐겁고 씩씩하게, 긍정적으로 일상을 보내고 생각하며 살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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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요일 스페셜 (시요일 APP 1년 이용권 + 특별 한정판 시집 5종) 시요일
고은.신경림.백석.김수영.신동엽 외 지음, 시요일 엮음 / 미디어창비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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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매일 아침을 시와 함께 시작하고 있다. 시요일 애플리케이션 덕분이다. 사실 매달 수십 권의 책들을 읽어대면서도 ''라는 장르는 어쩐지 어렵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하루에 한 편씩 앱으로 시를 받아 보다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시라는 것이 공감하기도 쉽고, 마음을 어루만져주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 한편씩 그날에 어울리는 시를 손안에 배달해준다니,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 아닌가.

 

 

시요일은 창비에서 만든 시 큐레이션 전문 앱 서비스이다. 3 3천여편의 시를 자유롭게 감상하고, 원하는 시를 검색할 수 있으며, 분위기와 주제에 어울리는 좋은 시를 엄선하여 추천해 주는 기능도 있다. 게다가 시를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면 공유 기능을 통해 누군가와 나눌 수도 있다. 앱 다운로드는 무료이며, 오늘의 시·테마별 추천시·시요일의 선택 등 일부(라고 하기에는 꽤 많은) 콘텐츠가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전체 콘텐츠를 이용하고 싶을 경우 기간별 이용권을 결제하여 기간 동안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데, 이용권 가격도 책값에 비해 그리 비싼 편이 아니라 너무 좋다.

 

 

시요일 홈페이지 https://www.siyoil.com/

시요일 앱 다운로드(구글 플레이 스토어) http://bit.ly/2piIvMf

시요일 앱 다운로드(애플 앱스토어) http://apple.co/2nYtI9f

시요일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siyoil/

 

시요일 서비스 내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시요일 특별판 시집 5종 세트>이다. 신경림 『농무』, 백석 『외롭고 쓸쓸하니』,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고은 『만인보 1』로 구성되어 있다

 

 

신경림 『농무』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백석 『외롭고 쓸쓸하니』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고은 『만인보 1

너와 나 사이

여기에 머나먼 별빛이 온다

부여땅 몇천리

마한 쉰네 고을마다 변한 진한 마을마다

나와 너 사이 만남이 있다

 

시요일 앱은 무엇보다 나처럼 시가 어렵게 느껴졌던 초보자들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굉장히 훌륭하다. 우리는 누구나 스마트폰 중독이라고 할만큼 하루에 꽤 많은 시간을 모바일 화면을 들여다 보면서 보낸다. 그 시간 중에 잠깐, 하루에 오분 정도만 시간을 내어 당신에게 배달되는 시 한편을 읽어본다면 어떨까. 그렇게 하루, 하루가 쌓이면서 당신의 삶이 조금씩 달라지는 건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살면서 누구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믿었던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고, 기대했던 일에 실망하기도 하고, 막막한 절벽 앞에서 주저 앉아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한다. 그렇게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지쳐 있을 때, 곁에 사람이 있어도 문득 외롭다고 느껴질 때, 그럴 때가 바로 당신에게 ''가 필요한 순간이다. 그리고 그런 당신에게 매일 무료로 ''를 배달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시요일>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없다. 지금 당장 구글 플레이 스토어 또는 애플 앱스토어에서 '시요일' 앱을 다운로드 해보자. 이런 세계가 있었다니 싶을지도 모르겠다. 시 애플리케이션은 아마도 <시요일>이 세계 최초일테니 말이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시를 찾고, 읽고, 선물할 수 있다니 말이다.

 

사람에게 치이고, 세상에 실망할 때마다 시를 읽어보자. 그 무엇으로 마음이 달래지지 않을 때마다, 화가 나고 억울해서 울고 싶을 때마다 시를 한편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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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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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허구의 세계가, 비록 실제가 아니더라도 더 많은 걸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현실과 그것은 구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삶에의 비유가 삶이 남긴 혼란보다 더 근사하게 되는 그것. 나는 제시 버튼의 전작을 읽고 그런 경험을 했었다. <미니어처리스트>는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과 행간 사이에 숨겨진 비밀들이 페이지마다 넘쳐 흐르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우아한 기품과 매혹적인 미스터리들과 함께 어우러져 한 여성의 삶을 단단하게 구축해나가는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이번에 만난 두 번째 작품 <뮤즈>에서는 1960년대 영국과 1930년대 에스파냐를 오가며 여성 예술가가 '뮤즈'라는 허울 아래 연인, 모델, 영감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던 어두운 시대를 그려내고 있다. 차별과 억압 이전, '예술가'로서 여성들이 지녔던 진짜 욕망은 제시 버튼의 글을 통해서 눈부시게 그려진다.

 

 

누구나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배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거나, 인생의 여정을 바꾸어놓는 여러 순간을 마주하는 것은 순전히 행운에 좌우된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그 누구도 추천서를 써주거나 비밀을 털어놓는 상대로 골라주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가 내게 준 가르침이다. 운이 좋으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패를 제대로 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행운이 찾아왔던 날은 무척이나 더웠다. 나는 구두 매장에서 유니폼 블라우스 겨드랑이가 젖은 채로 일하고 있었다.

1967, 영국 런던. 영국의 식민지였던 트리니나드 토바고 출신 흑인 여성 오델은 절친한 친구 신스와 함께 구두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영국으로 건너온 이후 5년 동안 온갖 회사에 지원했고 아무데서도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기다리던 연락이 오게 되고, 오델은 스켈턴 미술관의 타이피스트로 일하게 된다. 작가 지망생인 오델은 그곳에서 일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상관인 마저리 퀵의 도움으로 소설을 발표하게 되기도 한다. 신스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난 로리와 가까워져 데이트를 하게 되고, 그는 어머니 유품인 그림을 미술관에 가져와 보여준다. 그 그림은 요절한 천재작가 이상 로블레스의 미발표 유작인 걸로 확인되고, 화단은 떠들썩해지지만 오델은 마저리 퀵의 태도에서 어딘지 그 그림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1936,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열여덞 소녀 올리브는 화가를 꿈꾸며 미술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지만, 차마 부모님에게 보여주진 못한다. 당시만 해도 화가는 당연히 남자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시대였기에, 올리브 자신조차 그렇게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림을 거래하는 갤러리를 운영했고, 아름다운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다. 그들은 런던을 떠나 에스파냐 남부 시골로 막 이사를 온 참이었고, 그곳에서 집안 일을 도와주겠다고 찾아온 테레사와 이삭 남매를 만나게 된다. 가정부로 일하게 된 테레사와 친구처럼 가까워진 올리브는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고, 테레사는 그녀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본다. 올리브는 이삭과 사랑에 빠지면서 점점 더 그림에 몰입하게 되고, 그녀의 재능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테레사가 그림을 바꿔치기한 덕분에 올리브의 그림은 이삭이 그린 것처럼 되어 버린다. 하지만 올리브는 어차피 여자인 자신의 이름으로 그림을 발표할 수 없을 거라고, 이삭의 이름으로 그림을 팔게 되는 상황을 스스로 허용한다.

 

"모든 건 무너져요. 조금씩 변하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죠. 그러다 알게 돼요. 발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다리가 부러졌다는 걸. 그런데 그건 내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던 일이에요, 오델. 타인의 마음속에서, 혹은 당신이 만나지 못할 신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거죠. 그러다 어느 날, 돌 하나를 던지면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 돌이 힘 있는 얼간이의 차 창문에 맞아요. 그러면 그가 복수를 하려고 나서거나 자기 여자한테 멋지게 보이려고 들죠.  아니면 보병들이 움직이고, 다음 날 당신의 마을은 불에 타버릴 수도 있어요. 어리석음 때문에, 섹스 때문에, 당신 침대에는 관이 놓여 있어요."

현재와 과거가 하나의 그림으로 연결되어 미스터리를 만들어나가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각 시간대 속의 여성 캐릭터들 자체가 너무도 매혹적인 작품이다.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오델, 그녀는 로리의 사랑 고백이 어색했고, 불편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다. 반면 사랑이라는 감정에 거침이 없는 올리브는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삭에게 드러내어 표현하고, 그를 향한 욕망으로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듯한 기분마저 느낀다. 테레사와 올리브의 관계는 마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의 아가씨와 하녀의 그것처럼 비밀스럽고, 친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전혀 다른 색깔과 분위기로 이야기는 진행되지만 말이다. 화려한 외모로 어디서나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지만 그럼에도 불행하고, 공허한 올리브의 엄마 세라는 사랑의 외로움을 알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제시 버튼은 전작인 <미니어처리스트>에서도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를 구축해 섬세하고, 미묘한 여성 심리를 그려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훨씬 더 다양한 성격의 여성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그들만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아티스트와 뮤즈가 등장하면, 우리는 당연하게 아티스트는 남자, 뮤즈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제시 버튼은 바로 그 편견을 뒤집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작품에는 남성의 도움 없이 여성이 다른 여성의 뮤즈가 되어주고,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예술 작품의 영감이 되어 그림이 탄생하는 모습도 등장한다. '여성이라는 존재를 작품을 통해 대상화하고 소비하며, 여성 예술가를 주변화 해온 미술의 역사에 대한 반격'이라는 옮긴이의 말처럼 미술사를 배경으로 우리가 그 동안 숱하게 보아온 여타의 다른 작품과는 뚜렷하게 다른 점을 보여주어 특별한 이야기가 탄생했다. 여성 화가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시대를 대변하고 있는 미술상 아버지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올리브의 모습은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통쾌하게 멋지다. '여자들은 할 수가 없어요. 여자들에겐 비전이 없어요. 내가 알기론 눈도 있고, 손도 있고, 심장도 있고, 영혼도 있지만. 나는 기회도 얻기 전에 실패했어요.'라는 극중 올리브의 외침이 오래도록 가슴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이야말로 단연 가장 페미니즘적인 소설이 아닐까라는 리뷰가 굉장히 와 닿았으니 말이다. 모든 여자들에게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제시 버튼은 여성의 삶을 그리고, 내면을 그려내는 데 정말 탁월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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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YZ의 비극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서계인 옮김 / 검은숲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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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미스터리'로 칭송받는 <Y의 비극>을 비롯, 황금기 미스터리의 절대 걸작 <X의 비극> <Z의 비극>을 한 권에 담은 유일무이 애장판이다. 특히나 한정 물량 본문용지가 드러나는 부분인 책배를 비롯한 3면에 블랙 컬러를 입힌 '올블랙 에디션'으로 고급스러운 장정이 돋보인다.

한정판으로 제작된 올블랙 에디션은 생각보다 실물이 훨씬 아름답고 견고하다. 이런 책이라면 이천 페이지라도 거뜬히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지금의 천 페이지가 넘는 두께도 무거워 가지고 다닐 수는 없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ㅎㅎ

 

.‘비극 시리즈’는 『X의 비극』 『Y의 비극』 『Z의 비극』 『드루리 레인 최후의 사건』 총 4편의 작품을 일컫는다. 하지만 비극 시리즈 애장판인 『XYZ의 비극』에는 앞선 세 편의 작품만이 수록되어 있다. 총 2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네 편의 작품을 한 권에 담기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독자와 평론가 사이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거론되는 세 작품을 한 권에 담아 애장판의 가치를 높이려는 의도라고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네 편이 모두 수록되어 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말이다.

 

 

기존에 출간된 단행본들에 수록된 엘러리 퀸이 직접 쓴 서문과 탐정 드루리 레인의 성장 배경이 동일하게 수록되어 있으며, 애장판에는 전 시리즈를 아우르는 해설이 새로이 추가되어 있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체구, 차분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활기찬 모습, 목덜미까지 덮고 있는 놀랄 만큼 새하얀 머리카락, 녹회색의 날카로운 두 눈, 완벽하게 균형이 잡혀 아주 고전적으로까지 보이는 이목구비, 처음에는 무표정해 보이지만 눈 깜짝할 사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민첩성.. 놀라운 탐정 능력을 지닌 늙은 셰익스피어 극배우인 드루리 레인의 외모는 고전극 배우 그 자체이다. 거기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야생 자두나무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 또한 과거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존재의 느낌을 더해준다.

그는 셰익스피어 연극의 명배우로 명예로운 은퇴 이후 고풍스러운 대저택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청력을 완전히 상실했으나 독순술을 익혀 전화 통화를 제외한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엘러리 퀸의 또 다른 히로인인 탐정 엘러리 퀸과 드루리 레인은 많은 부분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젊고 패기가 넘치는 엘러리 퀸에 비해 첫 등장부터 예순의 나이였던 드루리 레인은 신중하면서도 여유롭다. 그 외에도 많은 부분들이 상반된 두 인물을 비교해가면서 엘러리 퀸의 시리즈 작품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20세기 미스터리를 대표하는 거장 '엘러리 퀸'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만프레드 리와 프레더릭 다네이라는 두 사촌 형제의 필명이다. 그들은 '엘러리 퀸'이라는 공동 필명으로 탐정의 이름을 삼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바너비 로스라는 필명이 하나 더 있다. 그들은 바로 비극 시리즈 네 작품을 바너비 로스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바너비 로스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네 권의 작품들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X의 비극>과 <Y의 비극>은 엘러리 퀸의 전체 작품들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추리소설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첫손에 꼽히는 명작이다. 담백한 트릭과 범행 방법이 기발하고 빼어날 뿐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드라마틱하게 구성되어 있어, 미스터리 초심자는 물론 충분히 익숙한 독자들조차도 거듭 읽으며 거장의 놀라운 솜씨에 끊임없이 감탄하는 그런 작품들이다.

 

<X의 비극> <Y의 비극>은 1932년에 발표되었고, 그 다음 해인 1933년에 <Z의 비극>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Z의 비극>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후의 이야기이다. 드루리 레인은 어느덧 일흔 살이 되었고, 지방 검사였던 브루노는 주지사가 되었고,  섬 경감은 경찰에서 은퇴한 사설탐정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섬의 외동딸 페이션스가 그의 조수로 활약한다. <Z의 비극>은 <X의 비극> <Y의 비극>이 삼인칭인데 반해, 페이션스의 수기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추리소설에 가까운 현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도 두 작품과 확연히 구별된다.

개별 작품으로 보면 작품의 완성도라는 면에서는 <Y의 비극>이 단연 압도적이고, 후반의 두 작품은 상대적으로 그에 못 미치는 평가를 받으며 심지어는 앞의 두 작품과는 상당히 이질적이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네 작품을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한다면 개별 작품의 평가와 상관없이 모든 작품이 적절한 서사구조의 각 단계가 된다. 그리고 ‘비극 시리즈’에서 작가는 또 다른 대표작 ‘국명 시리즈’와 달리 중심 사건 외의 ‘곁가지’ 같은 이야기에 상당한 지면과 노력을 할애했다. ‘국명 시리즈’에서는 피해자의 유족이나 피해자 자신에 대한 묘사가 다소 피상적인 데 반해 ‘비극 시리즈’에서는 이들의 슬픔과 좌절, 고통을 매우 인상적으로 그렸다.

 

 

사실 엘러리 퀸의 작품은 너무 많이 출간되어 있어 어느 작품부터 시작해야 될지 잘 모르겠고, 게다가 현대의 추리, 스릴러 장르의 기법과는 조금 다른 고전적인 추리 소설은 뻔하거나 지루할 거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비극 시리즈부터 시작해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허지웅 작가는 이번 애장판 시리즈가 출간되며 이런 추천평을 했다.

“드루리 레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탐정 가운데 하나다. 탐정은 논리적 정합성과 사유에 근거해 사건을 해결한다. 반면 이 멋진 노인은 탁월한 연역추리로 이미 사건을 다 해결해놓고도 법과 윤리, 사회적 역할과 어른의 책무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무게감을 이기지 못해 조금씩 풍화되어가는 것이다. 드루리 레인의 모험은 ‘누가 범인인가’로부터 ‘무엇이 옳은 것인가’로의 여정이다. 나는 부디 이 연작이 ‘앨러리 퀸의 비극 시리즈’라기보다 ‘바너비 로스의 드루리 레인 4부작’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자, 당신이 엘러리 퀸의 작품을 어떤 것부터 읽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왜 비극 시리즈부터 시작하길 추천하는지 이제 대충 감이 올 것이다. 게다가 한정판 올블랙 에디션은 그저 책의 외형으로만 따지더라도 굉장히 아름다워 소장용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비극 시리즈는 왜 여전히 우리가 고전 미스터리를 읽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완벽한 답을 구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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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과학, 그날의 진실을 밝혀라 - 셜록보다 똑똑하고 CSI보다 짜릿한 과학수사 이야기
브리짓 허스 지음, 조윤경 옮김 / 동아엠앤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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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사관은 실제 런던 경시청의 수사관을 모델로 하지 않고 아서 코넌 도일 경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인물이다. 도일 경은 1887, 셜록 홈스 시리즈의 첫 작품인 『주홍색의 연구』를 출간했다. ... 도일 경은 셜록 홈스 이야기에서 당시 실제 수사관들의 활동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이 미래에 어떤 일을 할지 예견했다. 1세대 법과학자 가운데는 자신들의 일은 셜록 홈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세계 최초로 범죄 실험실을 개설한 인물이자 프랑스 판 셜록 홈스로 알려진 에드몽 로카르다. 그가 중점을 둔 것은 범죄 현장의 증거였다.

숱하게 영화, 뮤지컬 등으로 만들어지면서, 아마도 역대 가장 유명한 연쇄 살인범 중의 하나가 된 잭 더 리퍼. 그가 살인을 하던 시기는 과학 수사가 매우 뒤떨어진 시대였다. 지문확보는커녕 단서 조차 거의 없었고, 그에 비해 살해 방법은 매우 잔인해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었다. 이렇게 범죄 과학이 초기 단계에 있었던 때만 하더라도 살인자가 피해자들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경우 사건은 매우 해결하기 어려웠다. 만약 당시 런던의 형사들에게 현대 범죄 과학의 도구가 주어졌다면 잭 더 리퍼를 검거할 수 있었을까? 그의 희생자 가운데 목숨을 잃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브리짓 허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오늘날의 범죄 과학은 과거 방식의 혁신을 바탕으로 쌓아 올린 것이라고. 잭 더 리퍼가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던 당시에도 나름대로의 첨단 기술이 있었다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과학수사, 범죄과학 쪽에 관심이 많아 관련 책들을 많이 읽어본 편이다. 그런데도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 사례나열이나 이론적인 부분에만 치중한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수사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그 역사를 실제 사건을 통해서 짚어 나가는데, 그 형식이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쉽고 재미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사실 법의학, 범죄과학 같은 것들은 전문적인 원리나 기술을 따지기 시작하면, 일반 대중들에게는 그저 학문처럼 어렵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원리나 이론이 아니라 수사 기법의 발전이 이루어진 과정과 현장의 단서를 해석하는 방식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실제로 벌어진 사건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어 굉장히 술술 읽힌다.

범죄 과학이란 간단히 말해서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을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범죄 과학은 희생자를 위해 정의를 구현하고 사회에 평안을 가져오며, 죄가 있는 사람은 정의의 심판을 받게 하고 죄가 없는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미세 증거물 수집, 독극물 검사, 사체 부검, 부패 사체 연구, 혈액 증거 검사, 범죄자 프로파일링, DNA 증거 검사, , 지문, 탄흔 분석 등이 수사에 활용되고 있는 범죄 과학의 항목들이다.

 

DNA는 발견된 지 몇 십 년이 지나서야 범죄 과학에서 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80년대, 레스터대학교의 알렉 제프리스는 개인의 DNA 프로파일을 밝힐 수 있는 혈액 검사를 개발한 뒤 이를 범죄 수사에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모든 인간 게놈의 99.9퍼센트가 동일하고, 바로 이 때문에 모든 인간은 서로 놀랍도록 비슷한 모습을 지닌다. 하지만 두 명의 사람이 정확하게 똑같지는 않다. 정확하게 똑같은 게놈은 없기 때문이다.... 수사관들은 DNA 샘플과 단 한 명의 용의자를 연결할 수 있다. 물론 100퍼센트 정확한 검사는 없다. 하지만 DNA 검사는 전체 인구 가운데 45퍼센트로 용의자 대상을 좁히는 데 그치는 혈액형 검사보다 놀랍도록 정확하고 훨씬 특정적이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자연사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어 살인자들이 애용한 무기는 독극물인 비소였다.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공신력 있는 독극물 검사가 개발되었고, 사인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반드시 법의관이 조사를 하게 된다. 처음에는 검시관으로 의사가 고용되지 않았지만, 점차 의사가 검시관이 되면서 제대로 된 수사와 의사들이 부검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갖추게 된다. 알렉상드르 라까사뉴는 사체 연구와 부검 분야를 발전시켰고 에드몽 로카르는 세계 최초의 범죄 실험실을 개설하였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는 독물학자 알렉산더 게틀러와 법의탄도학자 캘빈 고다드가 수많은 사건 해결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1970년대에 이르면 FBI가 행동과학부를 신설하고, 그로부터 약 20년 뒤에는 DNA를 범죄 해결에 활용한 최초의 사례가 등장하게 된다

형사가 아닌 의사를 모델로 하여 탄생한 셜록 홈즈 이야기부터, 세계 최초의 범죄 실험을 개설한 에드몽 로카르, 뉴욕 최초의 법의관, 그리고 알 카포네의 성 밸런타인데이 대학살, 영화처럼 벌어졌던 대열차강도 사건 등등...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과학 수사의 역사와 범죄 과학 이야기는 그 어떤 수사물보다 흥미진진하다. 현대의 최첨단 범죄 수사 기술이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시행 착오와 노력으로 인해 조금씩 쌓이고 쌓여 오늘날의 그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CSI 같은 인기 드라마나 숱한 스릴러 영화 작품들을 통해 우리에게도 과학수사라는 것은 이제 친숙한 부분들이 많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최초의 수사관이라던가 초기 지문 증거, 총기 분석이 탄생하게 된 배경, 법의인류학의 시초와 프로파일링이 시작되는 계기와 발전 과정, DNA증거가 탄생해 살인사건 해결에 사용되는 이야기들은 더욱 색다르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이 과학수사의 역사가 현대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불완전했던 과거의 범죄 과학들이 현대의 향상된 기술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굉장히 흥미로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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