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고백록 현대지성 클래식 2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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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은 정지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잠잘 수는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한, 그런 것들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내게 삶은 없었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꼭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원하는 어떤 것이 있어도, 내가 그것을 이루든 못 이루든 그 결과는 무의미할 것임을 나는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p.28

톨스토이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안나 카레니나>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정작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쓰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정신적 위기'를 겪게 된다. <안나 카레니나>는 가장 완벽한 작품이자, 근대소설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었지만, 작가에게는 그 한계를 깨닫게 해준 작품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게 톨스토이가 모든 예술을 부정하며, 예술작품으로서의 소설은 더 이상 쓰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 살았다는 통렬한 심정으로 참회록을 쓰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 <톨스토이 고백록>이다. 이 작품을 집필 하고 나서 톨스토이는 위대한 작가에서 전 인류에게 훈계하는 계몽주의적 스승으로 극적인 변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나의 삶은 정지되어 버렸다'라고 말을 할만큼 톨스토이는 사는 게 두려웠고, 삶에서 도피하고자 했다. 자살 충동까지 느껴야 했던 세계적인 대문호의 솔직한 고백이라니.. 어쩐지 엄숙한 기분마저 든다. 톨스토이의 정신적 위기는 51세때 절정에 이르렀고, 자살을 생각해야 했던 그 시점에서 쓴 책이 <고백록>이다. 그리고 이 <고백록>을 계기로 톨스토이의 생애와 작품은 완전히 달라진다. 왜냐하면 <고백록>이 그의 사상과 삶의 전환점이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오류를 범해 왔던 것은 내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삶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눈이 멀어서 진리를 볼 수 없었던 것은 나의 잘못된 생각 때문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할 수 있는 삶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춰 놓고서 나의 욕망을 만족시키며 살아온 나의 삶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p.87

인생은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인간은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누구나 살다보면 그런 순간을 맞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삶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순간 말이다. 누군가는 절망에 빠질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라서 당황할 것이며,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이도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에게는 그것이 어느 한 지점에 계속해서 뚝뚝 떨어진 잉크 방울처럼 마음속에서 크고 시커먼 반점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렇게 삶의 문제는 죽음의 문제가 되어 갔다.

내가 오늘 하고 있는 일이나 하게 될 일의 결국은 무엇인가? 내 인생 전체의 결국은 무엇인가? 왜 나는 살아가는 것인가? 왜 나는 어떤 것을 원하거나 행하는 것인가? 내 인생 속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드시 내게 찾아올 죽음으로도 파괴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가?

 

그렇게 톨스토이는 삶의 목적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과학, 역사, 철학, 문학 등 여러 분야의 책을 탐독하며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학문에서는 별 도움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에 그 답을 찾게 된다. 이 작품은 그 기나긴 여정을 담고 있다. <고백록>이후 톨스토이는 술과 담배를 끊었고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소박한 농부의 옷을 입고 다녔다. 이상적이고도 순수한 절제의 삶을 지향해 아내와의 육체적인 관계도 절제하기 시작했고, 박애주의 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가 원한 절제하고 금욕하는 구도자의 삶은 이후 그의 작품 세계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작품은 <고백록>을 중심으로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반기의 대작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후반기의 대표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부활>, <하지 무라트> 등을 읽었던 독자들이라면, 그의 사상과 삶의 전환점이 되었던 <고백록>도 꼭 읽어 보길 바란다. 그의 자전적인 작품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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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비주얼 클래식 Visual Classic
제인 오스틴 지음, 박희정 그림, 서민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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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인이 잘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 그리고 제인이 내일 당장 그와 결혼하든, 1년 열두 달동안 그의 성격을 파악한 뒤에 결혼하든 똑같이 행복하게 지낼 거라고 믿어. 결혼에서 행복은 순전히 운이거든. 두 사람의 성격을 서로가 아주 잘 알고 있다거나 결혼 전부터 두 사람이 잘 맞는다고 해서 더 행복해지는 건 절대로 아니야. 성격이란 늘 변하게 마련이라서 나중에는 서로에게 질릴 정도로 완전히 달라져 버리기도 하거든. 그래서 인생을 함께한 사람이라면 가능한 한 단점을 적게 아는 편이 좋지."  p.39

세계 명작 고전을 감각적인 일러스트로 재해석하여 보다 젊고 새로운 감성으로 표현한 위즈덤하우스의 비주얼 클래식 시리즈 신간이다. 이번에는 19세기 여성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오만과 편견>호텔 아프리카로 유명한 박희정 만화가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만나볼 수 있다. 이미 오래 전에 읽었고, 여러 판본으로 가지고 있는 책이지만.. 이렇게 매혹적인 표지와 일러스트로 새로워진 작품이라 설레이는 마음으로 다시 읽게 된다.

재산이 많은 미혼 남자가 어떤 마을이든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되면, 마을 사람들은 마땅히 자기 딸이 이 남자를 차지하게 될 거라고 믿는, 그런 시절이었다.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신사 다아시와 빙리가 조용한 시골 마을에 머물게 되면서 베넷 부인 역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의 최대 관심사는 딸들을 시집보내는 것이었고, 기왕이면 딸들이 결혼으로 신분 상승하기를 꿈꿔왔기 때문이다. 베넷가의 둘째 딸 엘리자베스는 대저택 네더필드의 무도회장에서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의 신사 다아시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무뚝뚝한 태도에오만하고 무례한 남자라는 인상을 받는다. 다아시는 그녀를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자유분방한 여자'라고 판단한다. 그렇게 첫 만남에서 서로가 가진 편견으로 인해 그들의 만남은 시작부터 삐걱대기 시작하는데, 결코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아마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현명하기란 불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제 경우는 종종 우수한 이해력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런 약점을 피하는 것이 제 평생의 과제입니다."

"허영심과 오만함 같은 것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허영심은 정말 큰 약점입니다. 하지만 오만함은..... 정말 지적으로 우수하다면 오만함은 언제나 충분히 통제될 수 있을 겁니다."    p.92

<오만과 편견>은 출간된 지 무려 2백 년이 지난 작품이지만, 2018년 현재 읽어도 시간적 거리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그 사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이 작품이 여러 가지 장르를 통해 수업이 변주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영화도 텔레비전 시리즈로도 수 차례 제작되었고, 속편 형식이나 관점을 바꾸는 등의 각색으로 재탄생하기도 하고, 완전히 장르를 바꾸어져 색다르게 다시 쓰이기도 했다. 게다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처럼 현대판 개작으로 탄생하기도 했고, 웬만한 로맨틴 코미디물들이 대부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고전이지만 놀라울 정도의 현대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첫인상'이었다고 한다. 다아시의 오만과 엘리자베스의 편견이 두 사람의 잘못된 '첫인상'을 만들었고, 그것이 서로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 역할을 했다. 서로에 대한 오해로 티격태격하던 남녀가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되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물에서 기본적으로 전개되는 플롯일 것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 플롯을 가장 고전적이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박희정 작가의 감각적인 일러스트를 통해서 페이지 바깥으로 걸어 나온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모습은 너무도 매혹적이다. 덕분에 <오만과 편견>을 이미 다른 판본으로 가지고 있더라도, 이 작품은 소장용으로 가치가 있을 것 같다. 혹시 아직까지 두툼한 고전의 두께 때문에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면, 이번 기회에 아름다운 표지와 일러스트로 무장한 이 작품으로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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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왜 안 와 웅진 모두의 그림책 13
고정순 지음 / 웅진주니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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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언제 와? 엄마, 빨리 와. 엄마, 왜 안 와?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수 천 번도 넘게 아이에게 들었을 이 한 마디. 책을 펼치기도 전에 이 짧은 제목을 보면서부터 울컥해지는 건 나도 모르게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 때문일 것이다. 잠깐 외출이라도 하려면 엄마, 빨리 와. 밖에서 일이라고 보려고 하면 엄마, 언제 와? 아이에겐 세상의 전부가 엄마라는 존재이기에 당연한 질문인데도 불구하고, 가끔 너무 바쁘고 지치는 순간에는 아이의 그런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아이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과 이 일을 마저 끝내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매 순간 갈등하지만 말이다.

웅진 모두의 그림책 13권이다. 고정순 작가가 그려낸 <엄마 왜 안 와>는 평범한 상황과 대사들이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동화이다. 늦은 밤, 아이는 홀로 집에서 엄마를 기다린다. 엄마, 언제 와? 아직 업무가 끝나지 않은 엄마는 말한다. 조금만 기다려 줄래?

고장나 버린 복사기는 자꾸만 토하는 코끼리가 되고, 퇴근 후에도 이어지는 회의는 길 잃은 동물 친구들이 되고, 쉬지 않고 울려대는 전화기는 잠 안 자고 울어대는 새들이 되고, 일을 잔뜩 안겨주는 상사는 화가 잔뜩 난 꽥꽥이 오리가 된다. 엄마는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엄마가 처해 있는 상황들을 설명해 준다. 마음이야 어서 빨리 집에 가서 아이와 함께하고 싶지만, 항상 현실은 엄마들의 발걸음을 붙잡는 일들로 가득하다.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일이 바로 '육아'라 가끔은 누구나 하는 걸 과연 힘들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고 어려운 건 어쩔 수가 없다. 돈과 경력을 포기할 수 없어 눈물겨운 워킹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엄마도, 종일 집에서 아이만 돌봐야 하는 전업 주부인 엄마에게도 말이다.

이 책은 일하는 엄마들, 고달픈 워킹맘들을 위한 스토리이긴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냥 이 짧은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그냥 위로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비단 나의 느낌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 모든 엄마들은 이렇게 힘들게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비록 당신이 생각하기에는 부족한 것 투성이라도 사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동화라서 조용하고 따뜻한 위로를 안겨 주고 있다.

저자는 '하루를 부지런히 살아 내고도 미안한 마음을 갖는 지금을 사는 엄마들에게 그리고 기다리는 아이들과 함께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한다. 아마도 세상 모든 엄마들이 같은 마음 아닐까. 이 책 속에서처럼 엄마가 부재한 시간 동안 아이가 나름의 놀이와 만남과 이야기들로 주어진 시간들을 건강하게 채워갈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아이의 이해할 수 있는 표현과 언어로, 어른들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엄마의 목소리가 뭉클했고, 언제나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가 엄마에게 보내는 텔레파시 같은 그 목소리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녹록하지 않은 하루를 꿋꿋하게 살아 내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 응원이 되는 그림책이다. 어린 시절 일하느라 바빠 함께 놀아주지 않는 엄마의 등을 원망스럽게 본 적이 있다면, 혹은 지금 회사와 가정을 오가며 몸이 두 개라도 바쁜 시간을 겨우 버티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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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내 것이었던
앨리스 피니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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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꿈을 분리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현실도, 꿈도 다 무섭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나도, 지금이 언제인지는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아침이 왔다는 구분이 깨지자 오후도, 저녁도 다 깨진다. 내게서 도망간 시간을 되찾고 싶다. 시간에는 고유한 냄새가 있다. 친숙한 방처럼.   P.91

 

앰버는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 병원에서 코마 상태로 깨어 난다. 뭔가 아주 안 좋은 일이 일어났던 모양인데 그게 무슨 일인지, 언제 있었던 일인지 기억할 수가 없다. 그녀는 눈을 뜰 수도,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의식과 감각은 살아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렸지만, 아무도 그걸 알지 못했다.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야기는 사고가 일어나기 일주일 전과 코마 상태로 병원에 있는 현재 시점을 오가며 진행된다. 그리고 이십오 년 전에 쓰인 열살 소녀의 일기장이 교차로 보여지는데, 일기장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알 수 없다.

앰버는 청취율 1위 프로그램인 <커피 모닝>의 보조 진행자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인 진행자인 매들린과 사이가 불편했는데, 급기야 크리스마스 며칠 전 매들린이 더 이상 그녀와 일하지 않겠다고 피디에게 통보를 한다. 게다가 그녀는 남편인 폴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였다. 동생인 클레어와 폴과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었고, 그들은 최근 들어 다투기만 했다. TV리포터였던 앰버는 첫 작품으로 엄청난 성공을 한 소설가 폴과 결혼했는데, 이후 폴은 더 이상 소설을 써내지 못했고, 그녀는 함께 일하던 편집자의 추근거림에 방송 일을 그만뒀다. 폴은 아이를 원했지만 그들은 계속 실패했고, 더 이상 앰버와 폴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의문의 사고, 게다가 앰버는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실수를 하지. 중요한 건 그런 실수를 통해 배우는 거야. 이제 당신을 돌보는 일을 훨씬 잘할 수 있어."

이건 꿈이 아니야.

"돌아와서 다행이야. 당신도 나한테 고마워하고 있을 거란 걸 알아."

난 이 남자를 알아.   P.181

 

저자인 앨리스 피니는 BBC에서 15년간 리포터, 뉴스 에디터, 프로듀서로 일했고, 이 작품으로 작가로 데뷔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놀라운 데뷔작이 아닐 수 없는 작품이었다. 초반부터 몰입감이 대단한 작품이었고, 탄탄한 구성과 독창성 있는 전개가 그야말로 탁월했다. 읽는 내내 이 이야기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너무도 기대가 되어 두근두근 설레어 하며 푹 빠져들었다. 과거의 시간이 흘러 가면서 대체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추측하게 만드는 스토리도 흥미진진했고, 코마 상태인 녀가 주변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하나씩 받아들이는 상황도 너무도 긴장감 넘쳤다. 앰버가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과속을 하다 사고가 났다고 하는데, 그녀는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운전을 한 적이 전혀 없다. 게다가 남편 손에 심각한 상처가 생겼다고 하는데, 크리스마스 전까지 남편이 손을 크게 다친 적은 없다. 코마 상태인 앰버는 마치 타인처럼 느껴지는 남편의 진술을 그저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왜 그녀에게 사고가 생긴 걸까. 그녀가 기억을 되짚어 가는 과정은 정말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서스펜스와 탁월한 심리 묘사로 인해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이 책의 원제는 'Sometimes I Lie'이다. '원래 내 것이었던'이라는 제목은 의역이라고 볼 수도 없을 만큼 완전히 다른 의미로 번역되어, 책을 읽기 전부터 궁금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제목을 이렇게 했는데 저절로 이해가 된다. 탁월한 제목이고,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목덜미가 서늘해지게 만드는 제목이기도 하다. 사실 유사한 장르의 작품들을 많이 읽다 보면, 초반 어느 정도만 이야기가 전개되어도 이후에 펼쳐질 스토리의 방향이 대충 짐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간단해 보이는 스토리는 알고 보면 굉장히 복잡하게 얽히고 뒤틀린 플롯으로 만들어 졌고, 후반부에 몰아치는 반전 또한 그야말로 묵직한 충격을 선사한다. 더 이상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건지, 누구의 기억을 믿어야 하는 건지, 뭐가 현실이고 아닌 건지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 되어서야 이야기 끝이 난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완전한 끝이 아니기도 하다. 정말 영리하게 잘 쓰인 작품이고, 올해 읽은 심리 스릴러 중에 단연코 최고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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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탐정 -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집장의 37년 단어 추적기
존 심프슨 지음, 정지현 옮김 / 지식너머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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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전이 누군가가 쓴 책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다. 책상과 부모님의 책장, 컴퓨터 안에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전은 그저 어떤 단어의 뜻에 대해 조금만 모르는 것 같으면 거쳐야 하는 성가신 단계쯤인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사전을 썼다. 매일 출근해서 알파벳의 다음 단어를 정의하는 계획을 세우는 직업이 세상에 있다면 믿겠는가?    p.21

몇 년 전에 미우라 시온의 <배를 엮다>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대형출판사의 사전편집부를 중심으로 팀원들이 각자의 개성과 성격을 드러내며, 모두가 한 권의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상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었다. 묵묵히, 성실하게 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시종일관 따뜻하고 유쾌한 필치로 그려진 그 작품을 잃으면서, '성실'이라는 단어가 좀 멋없고,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런 성실함이 쌓여야 비로소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사전' 편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요즘이야 워낙 전자 사전이나, 스마트폰 등을 통해서 사전 검색 기능을 활용할 수가 있어서, 종이 사전은 보기가 힘들어 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빽빽한 종이 사전을 뒤져가면서 단어의 뜻풀이를 하던 시기를 떠올려 오면 그 얇은 종이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디를 넘겨도 빽빽하게 인쇄된 문자의 행렬들이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전부 담고 있을 거라는 기대감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고 말이다. 이번에 만난 <단어 탐정>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사전인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는 대단히 놀라운 작품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존 심프슨은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사 사전부에서 37년 동안 사전을 만드는 일을 해왔다. 그가 사전 편찬자로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어의 탄생과 생존, 소멸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엄청난 기록이기도 하다.

 

사전 편찬자들이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무엇인가?"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질문이지만 우리는 괴롭다. 나는 항상 없다고 대답한다. 역사 사전 편찬자는 편애하면 안 되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모든 단어는 저마다 다른 의미에서 중요하다. 사전 편찬자의 전형에 인간적인 요소를 넣고 싶어 하는 저널리스트들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운 대답이다.   p.120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 1884년에 초판 1권이 출간되었고, 1928년 초판 12권이 완간되었으며, 이후 개정판 2판으로 20권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온라인 사전도 출범되었으며, 2037년에는 개정판 3판이 출간될 예정인 방대한 분량의 사전으로 전체 21,728페이지에 60여만 어휘를 담고 있는 사전이다. 게다가 이 사전은 단순한 단어의 의미뿐만 아니라 단어의 역사적인 발달 순서와 용법을 참고할 수 있는 문헌 자료도 제공하고 있어, 그야말로 단어의 역사를 기록한 사전이기도 하다. 저자는 독자들이 직접 적어 보낸 단어 카드로 문헌 조사를 하던 종이책 시대의 OED부터 방대하고 체계적인 구조를 갖춘 온라인 OED로 변화하기까지, 한 사전의 의미 있는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역사 사전을 만드는 작업의 재미와 흥분감은 수백 년 동안 잊힌 단어를 되찾고 문화와 사회 속에서 단어가 발생하는 모습을 살펴보는, 마치 탐정 같은 사전 편찬자의 일에서 나온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 이 책을 읽다 보면 왜 '탐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 저절로 수긍이 갔다.

특히나 재미있었던 부분은 펜과 색인 카드, , 사람들에 둘러싸여 손으로 써내려 가던 시절이었다. 엄청난 독서를 통해서 사전에 수록된 것들보다 훨씬 앞서는 단어와 의미의 용례를 수없이 찾고, 카드철에 넣으며 자료를 만드는 과정도, 현대 OED에 가장 많은 인용문 자료를 제공한 독자였던 나이 지긋한 노부인에 관한 일화도 흥미로웠다. 책을 읽다 발견한 단어 정보를 보내는 걸로 시작해, 이후 그녀가 제공한 정보의 분량이 색인 카드 약 25만 개에 이르렀다고 하니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전을 만드는 일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 보다 '사전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를 다루는 데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어 더 의미가 있었고, 그 중 몇몇 단어를 추려내어 그 역사와 용법을 제시해주고 있어 영어의 어원과 활용에 대한 팁도 얻을 수 있는 두 배의 즐거움을 준다. 사전 편찬이라는 엄격하고 강직한 직업에 관한 너무도 흥미진진한 이 책은 언어와 언어의 기원, 그리고 그것의 의미와 사용 방식 등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매혹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이 보여 주는 것은 위대한 사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를 넘어서 그 이상의 모든 배경과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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