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겠어요, 이렇게 좋은데 - 시시한 행복이 체질이다 보니
김유래 지음 / 레드박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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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환상을 사랑한다. 확실히 나는 발리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 줄 것 같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내가 되게 해줄 것 같은 환상. 동화 속 어린 아이처럼 유치함도 부끄러움도 모른 채 분홍빛 풍선껌 처럼 퓨우우웅 부풀어가는 환상이 이루어지길 전심을 다해 바란다.  p.110

풀빌라, 수영장, 울창한 숲이 있는 작은 마을, 힐링과 휴식 떠올리면 아마도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려지는 여행지가 바로 이곳이 아닐까 싶다. 온갖 숲의 정령이 살고 있는 마법의 섬 발리의 우붓. 저자는 너무도 지쳐 있었던 어느 날 출근길에 길바닥에 주저앉고 나서야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갑상생 호르몬 수치가 일반인에 비해 여덟 배나 높다는 진단을 받고는 회사에 사표를 낸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 있는 우붓으로 떠난다. 뭘 하든 걱정이 앞서고 긴장하는 소심한 성격에 서른 살 넘도록 혼자서는 잠을 못 자는 겁 많은 여자가 혼자 우붓으로 떠나 한 달을 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그녀가 우붓에서 어떻게 몸과 마음의 치유를 얻게 되는지, 그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요가하고 명상하는 하루가 당연한 곳, 명품 가방에 높은 구두를 신으면 오히려 부끄러워질 수 있는 곳, 휴대전화보다는 노트와 펜, 요가매트가 더 어울리는 곳, 그렇게 그 동안 소유하고 집착해왔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하는 곳.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그곳. 우붓은 울창한 숲과 야성미가 흐르는 강을 끼고 있어 야생동물의 낙원으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다. 명상과 요가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사랑 받는 곳이며 발리 예술의 중심지이기도 하다고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정말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뭔가 치유가 될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라는 단어는 나를 묘하게 설레게 한다. ''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두 단어가 합쳐진 '여름밤'은 그 합만큼 더 설렌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여름날의 밤이면 뭔가 신나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p.233

사실 낯가리고, 겁 많고, 길눈 어두운 사람이 '혼자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언젠가 나도 그녀처럼 혼자 한번 떠나보고 싶다는,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 같은 것이 생겼다. 그녀의 말처럼 '다녀온다고 인생이 바뀌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그 소소하고, 누군가에는 시시해 보이는 행복이라도, 그 작은 것으로 하루를 또 버티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는 해외 여행을 주로 도심으로만 다닌 편이었는데, 이런 곳이라면 그 동안의 여행과는 또 다른 에너지를 내게 줄 수 있을 것 같아 발리라는 나라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무슨 일이든 그럴 것이다. 시작이 어렵지, 한번 시작하면 대체 이토록 쉬운 거였는데 왜 그리 어려웠을까 싶으니 말이다. 저자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왔던 일들을 하면서, 그 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나쁜 것과 아픈 것들을 날려버린다. 자유라는 것이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토록 쉬운 거였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소풍 가는 것처럼, 혹은 여행처럼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 인생은 원치 않은 방향으로 우리를 내몰고는 한다. 원하지 않아도, 생계를 위해,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삶이다. 그렇게 수많은 현실적 제약과, 반복되는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가끔은 머리보다 마음의 편을 들어보는 건 어떨까. 바로 이 책 속 그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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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엔 조그만 사랑이 반짝이누나
나태주 엮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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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라는 시, '풀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시를 잘 모르는 이들도 모두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그 시를 쓴 시인 나태주. 그가 '사랑하고 있기에 사랑 받았던' 106편을 가려 뽑아 만든 시집이다.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을 즐겨 보는 이들이 많을 텐데.. 극중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마음이 더욱 깊어짐을 확인하는 장면에 등장했던 시가 있었다. 허난설헌의 <연밥 따기 노래>라는 시로 연모하는 이에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연밥을 던지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그려진 시로 이번 시집에서도 만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은 이 책에 대해 '가슴속에 숨어 있던 작은 사랑이 반짝일 수 있도록 빛나는 순간들을 골라 담았다'라고 했다. 기존에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시들과 공개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 10편이 더해져 수록되었다. 뿐만 아니라 구전시가, 허난설헌의 한시에서 김영랑과 나희덕의 시, 그리고 한용운, 피천득, 황지우, 안도현, 김소월, 신경림, 윤동주, 백석 등 시대를 넘나드는 시인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어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도 든다.

 

“사랑 가운데서도 사랑의 시로 만나요. 여기에 드리는 시가 바로 그런 시들이에요.”

두근거리는 설레임을 가득 담은 연서 같은 시,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난 뒤 느끼는 쓸쓸함과 애절함을 노래하는 시, 이별의 아픔을 보여주는 시 등등... 사랑과 관련되어 있는 거의 모든 시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현대 시뿐만이 아니라 오래 전 고전 시들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았던 점이 아닐까 싶다.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은 감정을 노래하고 있어 여전히 공감대가 형성이 되고, 그 시대 특유의 정취와 깊이가 묻어나서 시에서 특별한 향기가 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혼자서도 노래하고 싶은 밤입니다

누군가의 길고 긴 이야기

실연당한 이야기라도

듣고 또 듣고 싶은 밤입니다

당신, 없는 밤입니다

                                  -나태주 '봄밤' 중에서

사실 처음에는 시집인데 두툼한 페이지의 양장본이라 조금 낯설었다. 대부분의 시집들이 작은 판형에 얇고 가벼웠으니 말이다. 이 책은 매 페이지마다 시와 함께 오른쪽 페이지를 비워두고 있다. 읽기에 좋은 시는 쓰기에도 좋을 것이라는 마음에, 손으로 옮겨 적을 페이지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필사에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소설들은 그 분량 때문에 시작하지 못했던 이들이 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하면 좋을 것 같다.

사랑때문에 잠 못드는 순간을 보내고 있다면, 이별로 받은 상처에 위로가 필요하다면, 잊고 있었던 그 풋풋하고 설레는 감정을 다시 한번 찾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예쁜 색감의 빈 페이지에다 시를 옮겨 적다보면 필사를 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뭉클한 감정이 고스란히 반짝거리는 순간으로 찾아올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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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늑대의 피
유즈키 유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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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과의 규칙은 야쿠자 세계의 규칙과 같아. 쉽게 말해서 운동선수들처럼 선후배 관계가 확실하다고 보면 돼. 선배의 터무니없는 설교나 기합도 묵묵히 견뎌야 하는데 거기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야쿠자는 평소에도 불합리한 세계에서 살아. 두목이 희다고 하면 까마귀도 흰 거야. 그런 녀석들을 상대로 싸우는 거라고. 야쿠자를 이해하려면 그들처럼 불합리한 세계에 살아야 하는 거야.”   p.22~23

이야기의 배경은 1988년 폭력단 대책법 시행 전의 암흑천지 히로시마, 현재 구레하라 동부서의 회의실은 70명 가까운 수사관들이 집결해 폭력단 항쟁 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의 중이다. 권총 불법 소지, 대마와 각성제 사용 및 매매, 불법 도박 등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폭력단 간의 항쟁 사건이 빈발하는 등 관내 조직 폭력 범죄가 자주 발생하고 있었다. 때문에 치안이 불안해지고 선량한 시민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었는데, 실제로 얼마 전 일반 시민이 발포 사건에 휘말려 죽는 일도 있었다. 그리하여 구레하라 동부서는 폭력단 관련 사무소의 일제 수색을 계획하고 있었고, 지금 막 최종 협의를 마친 참이었다. 수사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회의실 뒤쪽에 한 남자가 느긋하게 앉아 있다. 바로 오가미 쇼고, 구레하라 동부서의 수사 2과 폭력단계 반장이다. 실력은 뛰어 나지만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악명 높은 독종 형사로, 수사를 위해서라면 불법, 탈법, 위법도 서슴지 않았고, 야쿠자와 유착한다는 검은 소문이 끊이지 않는 인물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주인공은 이번에 동부서로 발령을 받은 히오카 슈이치로 대졸에 파출소에서 1, 기동대에서 2년 근무했고, 이번에 형사로 처음 일을 하게 된 신참이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이 파트너가 되어 폭력단 간의 이권 다툼에서 비롯된 총격전, 폭행, 살인 미수 사건 등을 수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폭력단 계열 금융회사 직원의 실종 사건을 시작으로, 폭력단 간의 피비린내 나는 항쟁이 언제 번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상황이다. 일본의 야쿠자는 이탈리아의 마피아, 중국의 삼합회와 더불어 세계 3대 조직 폭력단으로 불린다. 그들은 광범위한 해외 조직망과 수만 명의 조직원을 거느리며 다층화, 기업화하고 있는 국제적 범죄 조직이기도 하다. 유즈키 유코는사회 뒷면에 자리 한 음지의 정의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고 말하며, 야쿠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의리 없는 전쟁>이라는 영화에서 이 작품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여성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선 굵은 남자들의 이야기를 하드보일드 누아르로 제대로 그려내고 있어 놀라웠다.

 

"당신, 미쳤어......" 입술이 덜덜 떨렸다.

오가미가 웅크리고 앉으며 요시다의 얼굴을 보았다.

"맞아, 난 미쳤어. 수사를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거야. 네가 불지 않더라도 나중에 가코무라에게 네가 밀고했다고 일러바칠 수도 있어."    p.206

수많은 폭력단 관련 사건을 해결했으며, 표창도 숱하게 받았고, 100회에 달하는 수상 경력 또한 현경에서는 현역 최고라는 오가미 형사. 파트너인 히오카의 눈에는 그가 마치 먹이를 찾아 헤매는 굶주린 늑대처럼 느껴질 정도로 오가미의 수사에 대한 열정은 굉장하다. 당시 공안이나 폭력단 형사라면 폭력 조직 내에 끄나풀이라고 불리는 내통자를 두고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끄나풀을 잘 이용해 범죄 조직과 맞서 싸우고 사건을 해결한다. 하지만 범죄 조직과 경찰 조직의 균형이 깨지면, 언론이나 세상 사람들은 폭력단과 경찰의 유착 문제를 들먹이며 비난을 퍼붓는다. 오가미를 둘러싼 야쿠자와의 유착 관계에 대한 의혹 또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시종일관 이야기가 히오카의 시선에 의해 보여지는 오가미의 행동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들이 오가미의 속을 완벽하게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보여지는 것은 그가 야쿠자 세계의 상도를 지키는 온건한 폭력 조직 오다니구미 편에 서서 암흑세계의 위계질서 확립을 하려는 모습인데, 이 또한 현실은 경찰과 야쿠자의 유착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탄탄한 구성과 정교한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의 설정 자체는 사실 특별하지 않다. 베테랑 형사와 신입 형사의 파트너 구도, 경찰과 야쿠자와의 관계, 그리고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언급하진 않겠지만 후반부에 밝혀지는 그것까지... 느와르 장르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설정이긴 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결말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하드보일드라는 장르의 깊이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정교한 이야기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영화로 제작되어 2018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되었으며 "21세기 야쿠자 영화의 신경지를 보여주는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소설 자체도 장면 장면이 영화처럼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스크린에서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 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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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를 잡다
아르놀트 판 더 라르 지음,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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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 의사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기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지하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의 몸에 칼을 대려고 할까? 수술이 끝나면 환자는 생사의 기로에서 밤새도록 사투를 벌이는데 어떻게 수술한 의사는 잠을 잘 수 있을까? 수술이 아무 실수 없이 끝났더라도 환자가 그 수술로 인해 숨을 거두었다면 의사는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외과 의사는 죄다 정신 나간 사람들일까, 아니면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거나 양심이라곤 없는 자들일까? 그들은 영웅일까, 아니면 그저 과시욕에 찌든 사람들일까?  p.19

의학의 역사, 그것도 수술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해서 사실 어느 정도는 정보 위주로 딱딱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 용어들이 가득해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 외로 너무 재미있고, 쉽게 읽히는 책이었다. 저자가 현직 의사라고 해서 진료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나 감상을 담고 있는 에세이 같은 종류의 글일 거라고 속단해서도 안 된다. 이 책은 굉장히 복잡하고, 전문적이면서도 유쾌하고 흥미진진하다. 네덜란드의 현직 외과 전문의인 아르놀트 판 더 라르는 세상을 바꾼 수술에 대해, 그 매혹적인 역사를 이 책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사례들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며, 역사 자료와 인터뷰, 언론 보도 내용, 전기 등 그 인물에 관한 기록을 바탕으로 구성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게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모두 외과적인 관점에서 해석한 내용을 담고 있어 더 매혹적이다.

목차만 보자면 마치 의학 전문 서적이라고 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1장 결석 제거술, 2장 질식, 3장 상처 치유, 4장 쇼크...... 16장 대동맥류, 17장 복강경 검사, 18장 거세 등등... 그리고 각 장에 사례로 등장하는 인물은 누구나 알만한 역사 속 유명인들이다. 암살범이 쏜 총에 맞아 머리에 구멍이 나고 피로 뒤덮인 채 의식이 없는 케네디 대통령에게 역사적인 기관 절개술을 시행했던 의사들의 수술 현장부터 특이한 병과 사인으로는 따라올 자 없었던 교황들의 연대기, 출산의 고통을 참지 못해 수술에 마취가 도입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낸 빅토리아 여왕과 대동맥류에 걸리고도 예상보다 7년을 더 살아수술의 상대성을 몸소 보여 준 아인슈타인 등 보통의 역사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순간들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내과 의사와 외과 의사가 일하는 방식은 범죄를 해결하는 형사들의 방식과도 동일하다. 즉 의사가 환자에게 생긴 문제를 찾는 것과 형사가 범인을 찾는 것에는 닮은 부분이 있다. 병의 원인을 가리는 것은 곧 범죄의 동기를 찾는 것과 같고, 병이 어쩌다 생겼는지 찾는 과정은 살인자의 범죄 순서를 추적하고 살인 무기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찾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형사마다 자신만의 수사 방식이 있듯이 의사도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수수께끼를 풀어 간다.   p.183

각각의 유명 인물들에게 실제 벌어졌던 일화들은 그 내용 또한 매우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상황을 모두 포함해서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이탈리아인 아나키스트에 의해 살해 당한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는 칼에 찔리고도 다시 일어나서 모자를 쓰고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갔다. 그리고 원래 일정대로 배에 오르기도 했다. 사후 부검 결과 칼은 폐를 지나 심장을 거의 전부 관통했고 그 결과 내출혈이 발생한 상황이었음이 밝혀졌는데, 대체 심장이 이 정도로 심하게 다친 사람이 어떻게 걸어가 배에 오를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학적인 분석을 볼 수 있다. 특히 재미있었던 대목은 12 '진단' 편이었는데 내과 의사와 외과 의사의 역할과 그들이 진단하는 방식을 애거사 크리스티의 에르퀼 푸아로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를 비교하며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현대 의학의 진단법을 매우 구체적이고 단계적으로 설명을 해주면서, 에르퀼 푸아로의 귀납법과 셜록 홈즈의 연역법을 그 사례로 보여주는 것이다. 외과 의사와 내과 의사가 다른 방식으로 잠정 진단을 도출하는 것처럼 푸아로와 홈즈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가장 재미있는 역사서였고, 가장 쉬운 의학서였으며, 가장 매혹적인 과학서이기도 했다. 수술의 역사와 그에 따른 여러 사례들을 읽으면서, 의사라는 존재와 그들이 하는 의술의 역할에 대해서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일반인도 의학의 세계에 대해 이 정도만 알고 있다면 우리의 몸과 질병에 대해서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에필로그에는 저자가 '미래의 외과 의사 톱 10'이라는 리스트를 작성했는데, 그 대상들이 고전 SF 작품에 등장했던 외과 의사들이라는 점이 또한 흥미로웠다. 미레 셸리의 빅터 프랑켄슈타인부터 영화 스타트렉의 레너드 맥코이 등이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는데, 에필로그를 읽다 보면 미래의 외과 의사가 앞으로 얼마나 더 기이하고 멋진 일들을 해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될 정도였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이 책은 의학과 역사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기존에 읽어 왔던 의학 관련 에세이나 전문서, 온갖 종류의 역사서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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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할 말은 좀 하겠습니다 - 예의 바르게 한 방 먹이는 법
유우키 유우 지음, 오민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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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어떤 공격을 해도 흔들리지 않게 내 마음을 단단히 지켜야 합니다. 그러려면 상대와 나 사이에 마음의 거리를 두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부당하게 공격하는 말을 순순히 들어줘서는 안 됩니다.    p.54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좋은 사람도 있지만 생각보다 무례한 사람들도 참 많다. 마음에 상처가 되는 악담과 비아냥거림 혹은 질책들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대부분 그런 감정을 고스란히 발산하지는 못한다.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지나가고 나면 '왜 그때 아무 말도 못했을까' 자책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다. 이 책은 '내가 정말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로 보이냐?' 싶은 순간, '가만히 있으면 진짜 가마니로 봅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니 우아하고 예의 바르게, 그러나 단호하게 선을 긋고, 가마니 같은 삶에서 탈피해 인격적으로 대우받고 싶다면 반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일본 최고의 정신과의사로서 친절하고 재미있는 심리학 기반 메시지로 대중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작가 유키 유가, 무례한 상대를 입 다물게 만드는 통쾌한 반격의 기술을 소개한다. 세계의 유명한 심리 실험과 임상 사례를 추적한 그는 반사, 분산, 질문, 연기, 피드백 전술 등 상대의 공격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29가지 대화의 기술을 담고 있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래처, 자기 뜻대로 안 되면 화부터 내는 상사, 불평을 입에 달고 살면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후배들 때문에 욱한 적 많은 사람들, 정말 한숨 나오는 인간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어 끔찍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무례한 상대를 입 다물게 만드는 통쾌한 반격의 기술이 굉장히 흥미진진했다.

 

 

밀면 당기고 싶고, 멀어지면 좇아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일부러 내 약점을 전면에 내세워서 상대가 호감을 갖도록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이 방식은 자석처럼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게임입니다.   p.142

 

사실 강한 적수와 갑자기 대등하게 맞서기란 불가능하다. 싸움에 익숙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부딪히기엔 누가 봐도 지극히 전세가 불리하니 말이다. 그럴 때는 상대의 약점을 노려서 교란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슬그머니 재빠르게 살짝, 빈틈을 파고드는 소소한 반격과 살살 구슬려서 작은 타격을 입히는 심리전, 그리고 나의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상대의 공격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게릴라 전술. 이것이야말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현명한 방법이라고. 이 책에서 저자가 알려주는 반격술이라는 것이 사실 사이다처럼 통쾌하기도 하고, 애들 장난처럼 느껴져서 낄낄댈 수있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이 정도면 나도 해볼 수 있겠다 싶은 대화의 기술도 있었다.

무엇보다 심리학이 알려주는 반격법과 관계 역전의 기술을 딱딱하지 않게 접근하기 쉽도록 설명하고 있어 좋았다. 게다가 공감할 수 있는 수많은 사례들과 연구 결과를 토대로 알려주는 스킬들은 누구나 실전에 바로 활용할 수 있는 팁들이라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반격의 기술'이 결코 누군가를 쓰러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속시원한 반격을 통해 인격적으로 대우받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스킬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례한 상대로부터 내 마음을 지키는 법, 험난한 공격도 절묘하게 피하는 기술, 정면 공격보다 강력한 게릴라 작전, 눈 깜짝할 새 형세를 뒤집는 대화법 등을 통해서 할 말은 하면서도 좋은 사람으로 남는 법을 배워보자. 무례한 상대도 당신에게 예의를 갖출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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