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재우고 나서 한숨 돌리는 시간, 밀린 일들을 해치우다 보니 어느덧 열두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갑자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가 많이 안 좋으시다고, 간병인에게 연락이 왔는데 아무래도 살아 계실 때 얼굴이라도 보려면 지금 내려오셔야 할 것 같다고. 아빠는 몇 년 째 요양 병원에 계시다 얼마 전 폐에 이상이 생기고 상태가 나빠져 근처 큰 병원으로 옮기신 상태였다.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 앉았고, 서둘러 가고 싶은 마음에 남편은 거의 공중 곡예 하듯이 차선을 바꾸고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새벽을 향해 가는 시간에도 고속도로에는 차들이 즐비했고, 어두운 도로를 달리며 남편의 운전 속도 때문에 불안해지는 순간, 차라리 이대로 사고라도 나서 한날, 한시에 모두 함께 간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웠고, 그 뒤에 벌어질 많은 절차와 시간들이 두렵기만 했고, 이 모든 게 다 비현실적인 풍경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잠깐 휴게소에 들렀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빠는 결국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이상하게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차에서 내내 주르륵 흐르던 눈물도 멈춰 버렸고, 갑자기 그 모든 비극이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다시 차에 탔고 병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전 톨게이트를 지나는 순간, 갑작스레 병원 냄새가 확 풍겼다. 추운 날씨라 당연히 차 안의 창문은 모두 닫혀진 상태였고, 다들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병원 특유의 냄새와 약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차 안의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걸까. 마치 시간이 멈춰버리고 만 것 같았다. 그것은 오늘 오후까지 내가 살아가던 세계와 동일한 세계가 아니었다. 나는 직감했다. 아빠가 오셨구나. 저 세상으로 떠나시기 전에 우리를 보러 오셨구나. 나는 아빠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나는 먹먹해져 버린 마음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의 아버지는 그냥 여느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존재에게서 미워할 모든 것을 갖추고 사랑할 모든 것을 갖춘 바로 그런 아버지였다. (215)

필립 로스의 <아버지의 유산>을 읽으면서, 나는 이렇게 아빠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아버지와 함께 병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수술 뒤의 회복 과정을 지켜보고, 아버지가 실수로 욕실을 온통 똥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수습했던 그런 시간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이제 다시는 손을 잡을 수도, 안아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생각해보니 나는 아빠의 기억이 점점 사라져 가는 동안 아무 것도 해드린 게 없었던 것이다. 요양 병원에 계신 이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겨우 서너 달에 한번씩 내려가서 잠깐 얼굴을 뵙고 오는 게 다였다. 치매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로 엉뚱한 소리를 하실 때도, 처음에는 상대해드리다가 이내 지쳐버렸고, 나중에는 전화도 거의 받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 모든 시간을 후회하면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아들 필립이 노인이 된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는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고 말았다. 책 속에서 필립이 죽음이란 이십 대의 젊은이에게나 여든여섯의 노인에게나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거라는 걸, 같은 크기의 두려움과 같은 크기의 절망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다. 죽음은 무자비하지만, 그만큼 또 누구에게나 공정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홀로 남겨진 엄마를 생각한다. 살아오면서 한번도 엄마를 챙기거나 존중했던 적이 없었던 아빠를 먼저 떠나 보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언젠가는 겪게 될 죽음의 과정들이 두렵지는 않으셨는지. 엄마와 아빠가 살아오신 삶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부부가 뭔지 모르겠어... 새벽에 잠에서 깨, 그 사람 손을 슬그머니 그러잡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옆에 누워 잠든 그 사람이 이생에서는 만날 수 없는 존재처럼 멀고멀게 느껴져서. (29)

평생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대부분 결혼을 하는 순간에는 이와 비슷한 맹세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오직 상대만 보이는 시간, 당신만 있다면 세상이 내 것만 같던 시간은 점차 당신이 있기 때문에 참지 못할 것 같던 시간으로 변해간다. 황혼 이혼이란 말이 몇 년 전부터 유행처럼 뉴스에서 들리더니, 이제는 사후 이혼이라는 말까지 일본에서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죽은 배우자와 이혼을 하겠다는 걸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김숨의 <당신의 신>에는 결혼과 이혼에 관한 세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소설집 속 단편들은 결혼제도에 대한 회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혼>에서 민정의 어머니는 평생을 남편의 무시와 폭력에 시달리며,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았다. 아이 셋을 낳고 오십삼 년을 참고 사는 어머니를 보며 울화가 치민 민정은 직접 부모님의 이혼 서류를 준비하고 소송을 청구해서라도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지만 막상 어머니는 망설인다. 자신이 이혼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어머니의 삶이란 사실 현실 속 수많은 우리들의 어머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없이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 속은 곪아가는 부부도 있고, 이혼 후 추문에 휩쓸려 직장에서 해고 당하고 힘겹게 사는 여자도 있었다. 아빠와 엄마의 삶도 그다지 평화롭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40여년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사셨다. 하지만 가끔 생각한다. 내 어머니가 뒤늦게라도 이혼을 하셨더라면, 조금은 더 편한 노후의 삶을 보내실 수 있지 않았을까. 온전히 하나의 존재로 세상 속에서 완벽히 자유롭게 지내실 수 있지 않았을까. 아빠가 먼저 떠나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하는 딸의 모습이 야박하다 싶기도 하지만, 나는 평생 뭐하나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산 엄마의 남은 여생이 더 걱정이 되었다.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182)

오랜 만에 친구들을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가끔 그들과 내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요즘 유행이다 싶은 것들, 혹은 이미 유행도 한참 전에 지나서 이제는 다들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내가 전혀 모르고 있는 건 당연하고, 그들에겐 소소한 일상들이 내겐 너무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 투성이였으니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한 생활이 3년 정도 되었는데, 나와 그들 사이의 거리는 어느 새 3억 광년은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에 등장하는 '유리 볼 속 겨울'처럼,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가 바로 내 이야기였던 것이다. 김애란의 이번 작품집에 등장하는 이들은 계절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그려지고 있다. 살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상실과 결핍의 슬픔을 견디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바깥은 여름인데 여전히 겨울을 살고 있는 삶은 계절을 느낄 수 없다. 너무 이른 아이의 죽음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사는 부부, 타인을 위해 죽은 남편을 이해해야 하는 아내, 가족 같은 개가 편하게 죽을 수 있도록 혼자 힘으로 안락사를 준비하는 소년 등.. 그들 모두에게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과 뜨거운 열기 가득한 여름이라는 계절은 감당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지나가고 인생은 흘러가게 마련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느 한 순간부터 그저 상실된 시간, 멈춰진 삶인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놓쳐버린 수많은 선택들과 내가 잃어버린 결핍들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 것, 혹은 앞으로 손에 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 버린 것, 지금은 손에 없는 것,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아빠가 돌아가셨는데도 일상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네 살짜리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해야 하는 시간 속에서 엄마가 감정이란 사치를 누릴 수는 없었으니까. 나에게 애도의 시간을 가질 여유란 전혀 없었다. 자연스레 서울을 비웠던 그 며칠 이전과 별다를 바 없는 매일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빵집에 들렀는데 이제 막 구운 소보로를 진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다지 좋아하는 종류가 아니었음에도 별 생각 없이 집어 들어 고른 빵들과 함께 계산을 했다. 아이의 유모차를 밀면서 집으로 향하는데, 들고 있는 봉투 속 빵의 온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가슴이 꽉 메어져 왔다. 아빠는 이제 좋아하는 소보로 빵을 드시지 못하는 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거리를 걸어가는 중이었으므로, 눈물을 참고 꾹꾹 삼켜야 했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하루의 대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에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았지만, 시간은 여전히 째깍째깍 흘러가고 우리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상실과 결핍의 순간보다, 나는 그 이후의 시간들이 더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 남아 있는 이들은 부재의 무게를 이겨내고 살아가야만 하니까. 아침은 매일 같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어제와 같은 아침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잃어버린 것은 영원히 되돌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누가 세상에서 사라졌든 말든, 계절은 바뀌고 시간은 흘러갔지만, 아빠에겐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그대로 일 테니까. 가끔은 나만 빼고 지구가 자전하기라도 하는 듯, 혼자 그렇게 제자리에 멈춰 선 듯한 기분이 든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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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12-13 0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필립 로스의 책을 선뜻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랍니다.
저도 3년 전 아버지 돌아가신 후 한동안 허무함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지금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어요. 피오나님이 하시는 그런 주문이 여전히 필요하거든요.
피오나님의 이 글을 읽으니 또 울컥하고 뭐가 저 밑에서 올라오네요.

피오나 2017-12-13 18:46   좋아요 0 | URL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렇군요.. 평생을 함께한 부모이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게 당연하겠죠..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괜찮아 질 그 날까지.. 오래오래 부모님의 모습을 기억해요.
 
골목길 자본론 - 사람과 돈이 모이는 도시는 어떻게 디자인되는가
모종린 지음 / 다산3.0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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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가요에서도 가사로 골목의 쓸쓸함을 노래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골목길' 하면 핫한 카페 골목, 잘 나가는 상권들이 먼저 떠오르는 시대가 되었다. 가로수길, 망리단길, 샤로수길, 방배동 카페 골목, 성수동 카페골목 최근에는 서촌, 연남동 경의선 숲길 등등... 전부 나열하기도 어려울 만큼 말이다.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는 예쁜 가게들, 웅성거리며 유행을 쫓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 골목들을 가득 채운다. 밥을 짓고 세탁기를 돌리는 수수한 생활의 소리가 들리는 진짜 골목이 아니라, 주말마다 북적이는 상점들의 골목에서 생활은 자꾸만 사라지고 상업화는 계속 영역을 넓히고 있다.

골목길 경제학자 모종린 교수는 "왜 다시 골목길에 사람이 모이는가?"에 대해서 주목한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공간엔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사람과 돈이 모이는 도시는 어떻게 디자인되는지 , 다양한 도시문화를 제공한다는 점에 있어서 골목길을 하나의 자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1990년대 중반 무렵 홍대에서 시작된 골목길 상권은 2000년대 중반 급성장해 연남동, 연희동, 부암동, 성수동 등 서울시 내에서만 20~30개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최근에는 전주 한옥마을, 부산 감천동 문화마을, 해운대 달맞이고개, 대구 김광석거리 등 지방 도시의 골목도 떠오르는 골목상권으로 주목받고 있다.

 

골목길 경제학은 골목길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단순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정부 지원과 보호, 골목을 바라보고 즐기는 감상적인 접근만으로는 우리의 소중한 골목문화를 지켜내고 발전시킬 수 없으니 말이다. 골목 상품에 대한 수요, 소비자가 원하는 수준의 상품을 공급할 수 있는 생산자, 그리고 상권 공공재에 대한 생산자와 소비자의 투자를 창출할 수 있는 상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도심의 골목이 더럽고 안전하지 못한 곳으로 인식되던 시절을 알지 못한다. 도심의 골목길이 막 부활하던 시기에, 가로수길, 삼청동, 이태원 등에서 그 문화를 함께 즐겼던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골목길이 중요한 관광과 문화자원으로 주목받는 현상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대구의 근대문화거리, 전주의 한옥마을 등은 지역 정부가 주도적으로 조성한 골목상권으로 지역의 특수성도 살리고, 관광산업으로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홍대 지역이 연남동, 연희동, 상수동, 합정동으로 점점 확정되어 핫한 플레이스들이 늘어나는 것도 좋다. 놀 거리, 먹 거리, 살 거리, 그리고 풍성한 볼거리들이 가득한 골목들이 많아지는 것이니 말이다.

 

 

골목상권이 뜨면서 골목경제와 골목문화 발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골목상권 정책이 일반 시민들에게도 중요한 정책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은 그것도 꾸준히 성장해 젠트리피케이션이 주요 사회적 논쟁거리가 될 만큼 일상의 일부가 되었고 말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낙후됐던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을 말한다. 저자는 말한다. '장인 공동체' 만이 젠트리피케이션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상인이든 건물주든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파트너로서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같은 배를 탔다는 공동체 정신을 발휘할 때에만 골목상권의 경쟁력은 지속 가능해진다.

이 책에서는 서울 시내 주요 상권의 분석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을 함께 다루고 있다. 골목문화는 단순히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소비문화가 아니라, 젊은이들이 도심에서 일하고 즐기는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자동차를 포기한 일본 소도시의 사례, 젠트리피케이션 없는 완벽한 골목상권을 보여주고 있는 도쿄, 전통문화를 위해 골목길을 복원하고 있는 상하이, 역사가 작품이 되는 도시 에든버러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례들은 너무도 흥미진진했다.

 

 

이 지역 문학 공동체의 중심지는 독립서점이다. 독립서점들이 지역 장가와 독자를 연결한 새로운 출판문화와 공동체문화를 창조했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토론하고 다양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면 작가의 도시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지역의 유능한 작가를 발굴하고 독자와 직접 소통하도록 연결해주는 독립서점이 가득한 브루클린을, 우리는 문학 중심지로 여긴다.

 

세 집 중에 적어도 한 집은 소설가가 산닫고 할 정도로 소설가들이 많이 산다는 브루클린의 사례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작가의 거리는 사라지는 추세이지만, 뉴욕의 독립서점, 독립출판의 중심지로 부상한 브루클린만큼은 예외다. 뉴욕 언론은 여행자에게 조언한다. 미국 현대 문학의 거장을 거리에서 만나고 싶다면 브루클린 독립서점 여행을 떠나라고. 독립서점들은 지역 작가를 위해 독서회와 저자 사인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브루클린 작가들은 유별나게 출신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고 한다. 독립서점이 지역 독자와 작가가 만나고 대화하는 일종의 사랑방이라는 점이 매혹적이었다. 이 부분은 요즘 국내의 독립 서점들이 부활하고 있는 시점이라 더욱 공감할 만한 부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지난 2016년 젠트리피케이션은 언론과 SNS의 가장 뜨거운 이슈로 주목받았다. 한 유명 연예인 소유 건물에 임차한 음식점의 강제 철거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관심이 급증한 것이다. 골목상권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골목상권의 공급이 원활할 때 새롭게 골목상권으로 형성된 지역에서 주로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한다. 저자는 급격한 젠트리피케이션의 조건이 골목상권에 대한 수요 증가라면 골목상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수요 분석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속 가능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모델로 장인 공동체를 이야기한다.

그렇게 도시재생부터 젠트리피케이션 대책까지, 사람 중심의 골목길을 제안하는 저자의 프로젝트는 경제학의 눈으로 경쟁력이 있는 도시와 골목길의 비밀을 알려준다. 우리가 어떤 태도로 골목길을 즐겨야 하는지를 제안하는 것을 시작으로, 골목길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필요한 물리적 조건과 문화적 조건을 모두 검토하고 있는 이 책은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경제 이야기이면서 우리가 익히 접하고, 이용하는 골목길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경제학에는 전혀 문외한인 나같은 독자도 이제는 골목길에 왜 경제학이 필요한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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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픽 미스터리
다비드 포앙키노스 지음, 이재익 옮김 / 달콤한책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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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온전히 자기중심적인 흥분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이 바로 독서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책이 건네는 말을 찾는다. 작가들이 아무리 엉뚱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쓴다고 해도 '세상에!' 이건 내 이야기잖아!'라고 말하는 독자는 언제나 존재한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임신중절>이라는 작품에는 책으로 출간되지 못한 모든 원고와 문서를 기증받아 보관하는 캘리포니아의 도서관에서 일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이 도서관은 조금 특별한데, 출판 여부와 상관없이 어떤 저술이든 보관해주는 공간으로, 누구든 직접 방문해서 저술에 대한 간단한 변을 밝힌 다음, 원하는 서고에 꽂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브라우티건이 창조한 도서관을 기념해 브라우티건 도서관이 세워졌고, 거기서는 실제로 출판되지 않은 책 원고들만 받아서 보관하고 있다. 다비드 포앙키노스의 <앙리픽 미스터리>는 바로 그 브라우티건 도서관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허구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현실을 바탕으로, 또 다른 허구의 이야기가 탄생한 것이다.

브라우티건 도서관 설립 소식을 뉴스에서 본 시립도서관장 구르벡은 프랑스판 '누구도 원하지 않은 책들의 도서관'을 만든다. 십 년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도서관에는 천 권에 달하는 원고가 쌓였지만, 초창기의 열광적인 반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여서 이제는 누구의 관심도 끌지 않는 상태였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일에 전념했던 구르벡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혼자 도서관 일을 도맡아하는 직원 마갈리는 일에 치여 버려진 원고들을 위해 마련한 서가에는 먼지만 수북이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에 내려온 파리의 대형 출판사 편집자 델핀과 그의 연인인 작가 프레드가 도서관에 들른다. 그들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그 많은 원고를 읽는다는 사실에 매혹되었고, 그곳에서 걸작을 발견한다. 책의 저자는 평생 피자 가게를 운영했던 앙리 픽으로 이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남편이 글을 쓰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다며, 생전에 책을 읽는 걸 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과연 그는 가족도 모르게 비밀스러운 삶을 살았던 천재 작가였을까? 피자가게 주인에게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사람들이 픽의 소설을 좋아하는 건 무엇보다 그의 인생이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픽은 누구도 몰랐던 문학적 감수성을 비밀스럽게 간직한 채 조용히 살아갔다. 그의 이야기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 놀라운 능력을 지녔지만 아무도 못 알아보는 슈퍼히어로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로망에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출판되지 못한 세상의 모든 원고를 위한 비밀의 도서관을 배경으로, 소설가, 편집자, 영업자, 문학평론가, 도서관 사서 등 책과 관련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라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 이야기는 조금 예상 외의 전개로 진행된다. 숨겨진 천재 작가의 삶에 주안점을 두고 펼쳐질 거라 생각했던 이야기는, 오히려 출간된 그 책이 그와 연관된 다른 사람들의 삶과 운명을 변화시키는 부분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한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가는 과정과 책이 누군가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책이 행할 수 있는 마법과도 같은 스토리라고나 할까. 앙리 픽이 남긴 작품은 소설 자체로서의 가치도 훌륭하다고 언급되어 있지만, 사실 그것보다 소설을 둘러싼 이야기들과 사람들의 삶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인 다비드 포앙키노스는 프랑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오드리 토투 주연의 [시작은 키스] 영화 등을 연출한 영화감독이다. 내년 봄에 이 작품 역시 영화화 될 예정이기도 하다. 문학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코미디와 미스터리 형식으로 쓴 이 작품은 가볍게 흘러가면서도 중간중간 뭉클하게 만드는 순간을 가지고 있다. 세상 누구도 원하지 않은 책들에 관한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설레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 작품은 문학이 삶을 바꿀 수도 있고,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세상의 수많은 독자들을 위한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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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7-12-12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카롱!! 따뜻하고 달달한 게 땡기는 날씨에요. 좋은하루 보내세요^^

피오나 2017-12-12 09:52   좋아요 0 | URL
네. 오늘 정말 춥죠? 프레이야님도 기분 좋은 하루 되세요^^
 
속죄의 소나타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권영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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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악당은 끝까지 악당이란 겁니까?"

"그게 아냐. 살인을 실행에 옮기려면 아까 말한 대로 이성이니 윤리니 하는 경계선을 뛰어넘어야 해. 그런데 한 번 뛰어넘고 나면 담이 낮아지거든. 엄청난 일인 줄 알았던 범죄가 실은 그냥 잠깐 힘만 쓰면 되더라 하는 걸 알고 나면 욕망을 이루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돼. 불쾌한 이야기지만 한 번 살인을 한 녀석은 아직 죽여 본 적이 없는 녀석보다 살인 행위에 대한 저항감이 줄어들어. 살인엔 면역성이 있는 거다."

이야기는 미코시바 레이지가 시체를 유기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가 살인을 한 건지, 누구를, 어떤 이유로 죽게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이 장면에서는 그가 시체를 만지는 것이 두 번째 라는 것, 그리고 이전에 체포되었던 적이 있다는 사실만 드러나 있다.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법률사무소에 출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미코시바 레이지는 변호사였던 것이다. 그것도 경찰과 검찰 사이에서는 물론, 크고 작은 죄를 저지른 범법자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변호사. 그는 최고의 실력자인 만큼 엄청난 수임료를 요구하며 고객의 돈을 제일 많이 뜯어내는 변호사로도 악명이 높았다.

 

강가에 유기된 시체를 발견하고 수사를 시작한 경찰들은 피해자의 신원이 미코시바가 맡은 보험금 살인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기자가 미코시바의 과거를 조사하던 흔적을 발견한다. 다름아닌 미코시바 레이지가 26년 전 엽기적인 살인으로 시체 배달부라고 불리던 열네 살 소년 살인범이었던 것이다. 의료 소년원에 수감되고 겨우 5년 만에 가퇴소했고, 3년 뒤 스물두 살 때 사법고시를 한 번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었다. 변호사 자격에 인격이란 항목도 없거니와, 소년원 수감 당시 개명을 했으니 그 동안 그의 과거가 알려지지 않은 것도 그럴 만했다. 취재 후 우연히 알게 된 사실로 공갈 협박하려던 기자, 잘 나가는 현재의 명성에 위협을 받을 만한 과거가 밝혀질 위기에 처한 살인 전력이 있는 변호사. 경찰의 수사 방향은 당연히 미코시바를 향하게 된다. 그는 과연 살인의 경험을 잊지 못하고 법을 이용할 줄 알게 된 살인마일까, 개과천선해서 속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변호사일까.

 

"전에도 말한 적 있지. 후회 따위는 하지 마라. 후회해 봤자 과거는 수복되지 않아. 사죄도 하지 마라. 잘못을 아무리 빌어도 잃어버린 생명이 돌아오는 건 아니다. 대신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러. 알겠냐. 이유가 뭐든 사람 하나를 죽였으면 그 녀석은 이미 악마다. 법이 용서해도, 세상 사람들이 잊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악마가 도로 사람이 되려면 계속해서 속죄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죽은 사람 몫까지 열심히 살아라. 절대로 편한 길을 택하지 마라. 상처투성이가 돼서 진흙탕을 기어 다니면서 고민하고, 방황하고, 괴로워해라. 자기 안에 있는 짐승을 외면하지 말고 끊임없이 싸워라."

이 작품은 크게 두 가지 사건이 병행으로 진행되고 있다. 미카시바가 용의자로 지목된 기자 살인 사건과 그가 변호인으로서 맡고 있는 보험금 살인 사건. 그리고 그가 열네 살 소년이었을 때 벌였던 살인 사건과 그가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과거의 이야기도 현재의 사건들과 연결되어 보여진다. 한 번 악인은 영원히 악인인가, 진정한 속죄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좀처럼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질문이 아닌가 싶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최강이지만 최악의 변호사인, 선과 악의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도 아니었고, 동기도 없이 그저 사람이 죽여 보고 싶었다는 소년은 얼핏 사이코패스의 원형처럼 보인다. 과연 선천적인 악인으로 태어난 것 같았던 그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변호사라는 직업으로,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게다가 작가는 이 작품의 첫 장면부터 그가 시체를 유기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헷갈리게 만든다. 그가 변호한 소년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잃어버린 엄마는 끊임없이 미카시바 주위를 맴돌며 그를 위협하고, 와타세와 고테가와 형사 역시 그를 향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누가 봐도 미카시바는 나쁜 인물의 전형처럼 보인다. 한 가지 의문은 현재 그가 맡고 있는 사건이 돈이든 명예든 얻을 것이 없어 보이는 재판이라는 것뿐인데, 작품의 후반부에 가서 알게 되는 이 사건의 진상 또한 만만치가 않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 시리즈 두 권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이번 작품도 굉장히 기대가 되었는데, 전작보다 더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나게 된 것 같다. 시리즈의 주인공 변호사를 과거 온 나라를 경악하게 했던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설정하기란 결코 흔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 시리즈에 나왔던 고테가와 형사와 그의 상사 와타세가 등장해 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있다. 법정 미스터리로서도 훌륭하고,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보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서도 성공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어서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그 다음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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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녹색 바람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
구라치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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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살인이 일어났는데도 하루하루 생활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그것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흔해빠진 일상에는 망각이라는 자정작용이 있는 듯했다. 어느 가정이든 이렇게 일상을 되풀이함으로써 비극을 과거로 쫓아 보내는 것 아닐까.

죽은 후에 저 세상에서 아내와 만날 일이 두려운 노인은 아내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무서워서 죽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젊었을 적에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일에만 매달렸으며, 아내는 부리기 편한 무급 하녀로밖에 보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급기야는 아내의 영혼을 불러내겠다고 영능력자를 집으로 불러와 초심리학에 심취한다. 그런 노인을 말리려고 가족들은 그런 방면에 능통한 대학교 연구자에게 부탁해서 영능력자가 사기꾼이라는 걸 밝혀내겠다고 하는 와중에, 10년 전 진로 문제로 노인과 다투고 집을 나갔던 손자가 집에 돌아온다. 그렇게 온 가족과 초심리학 연구원과 영매까지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느닷없이 살인이 벌어진다. 노인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입구는 열려 있었고 아무도 별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함께 있었던 가족들과 연구원, 영매에게는 모두 알리바이가 있었고, 그야말로 밀실에서 일어난 불가능한 범죄로 영매는 귀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가족들은 노인이 생전에 원했던 죽은 부인의 영혼을 부르는 강령회를 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강령회를 열기도 전부터, 어릴 적 사고로 몸이 불편한 사에코의 신변을 위협하는 징조가 발견되고, 세이치는 대학 선배인 네코마루에게 도움을 청한다. 독설과 괴상한 언동으로 교내에서 유명한 그는 행동력과 호기심, 자신감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입과 은근슬쩍 내비치는 다정함까지.. 사람을 별로 가까이 하지 않는 세이치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독특한 상대였다. 호기심이 강해서 흥미가 동하는 일에는 일단 끼어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네코마루에게 수상한 강령회와 밀실 살인이야말로 딱 맞는 건수였지만, 하필 지금 다른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라며 세이치에게 이것 저것 조사할 것들을 지시한다. 제일 먼저 용의선상에 가족들을 하나씩 올려두고, 금전적인 문제가 있는 지 조사하고, 외부인인 영매와 연구원들의 알리바이에 문제가 없는지 알아 보지만, 경찰도 찾아 내지 못한 것을 일반인인 세이치가 발견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범인은 잡히지 않은 채 의혹만 깊어져 가는 와중에, 드디어 문제의 강령회 날이 다가온다.

 

살아 있는 사람이 돌아가신 분을 불러내다니 어쩐지 불손한 느낌이 들었다. 돌아가신 분은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의 마음에서만 조용히 살아 숨 쉬는 법이다. 추억만이 사람이 살아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추억은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차게 생명의 기척을 전달한다. 소중한 것을 살그머니 감싸 안듯이.

이 작품은 전형적인 본격 미스터리인 구라치 준의 전작과 달리,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 풍경에서 의표를 찌르는 진상을 밝혀내는 일상 미스터리이다. 특히나 이 작품은 출간 후 20년간 선배 열풍을 불게 한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 그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서 더 의미가 있다. 네코마루는 구라치 준의 첫 단편집에 등장한 이래로 이후 시리즈 캐릭터로 자리 잡아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 오고 있다. 세상 모든 일에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수학과 전기에는 유난히 취약한 이 남자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면 득달같이 달려와 참견하는 오지랖 넓은 한량이다. 서른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고등학생으로 오해 받을 만큼 몸집이 작고 동안이다. 한창 일할 나이인데도 일정한 직업 없이 빈둥빈둥 놀며 지내는지라 어떻게 생계를 잇는지 아무도 모른다. 학생 시절부터 기이한 행동으로 유명했고, 흥미가 없는 분야에는 초등학생 수준의 지식밖에 없는 독특한 인물이다. 네코마루는 구라치 준의 여러 작품에서 탐정으로 사건을 해결하며, 본격 미스터리를 너무 난해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본격 미스터리와 일상 미스터리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구라치 준과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괴짜 네코마루 선배의 조합이 너무도 매력적이다.

 

본격 미스터리물이지만 사건 해결의 단서들을 독자들에게 모두 제공하지 않고 있어서, 살인 사건의 트릭을 짐작하기란 매우 어려운 작품이다. 밀실에서 살해당한 노인의 사건부터 연이어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 동안 숱한 미스터리, 추리 소설들을 읽어온 나이지만 사건의 진상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물론 트릭과 미스터리 자체에만 치중을 주고 있는 작품은 아니다. 과학과 영능력자의 논쟁이라는 흥미로운 테마에 따른 여러 인물들의 해석과 의견에도 꽤나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어 재미있었고, 그 와중에 거의 바깥 세상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순진한 사에코는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신경을 긁는 신랄한 말과 신기한 다정함을 가지고 있는 예측 불가의 네코마루 선배 캐릭터도 매력적이지만, 예지몽으로 꾸고 걸핏하면 자신만의 테두리에 틀어박히려는 세이치 역시 독특한 캐릭터라서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 동안 만나왔던 '일상 미스터리'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결국일상의 불안정함과 예측 불가능이 사건의 전체적인 트릭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구라치 준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이 작품을 계기로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가 더 출간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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