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 - 런치의 앗코짱 앗코짱 시리즈 1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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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일주일 동안 내 도시락을 싸주지 않겠어? 이 정도 도시락으로도 괜찮으니까."

"? 제가요?"

무심결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너지. 또 누가 있다고."    p.13

미치코는 초등학생용 교재를 전문으로 하는 조그만 출판사 영업부에서 보조로 근무하는 파견사원이다. 그녀는 친구도 별로 없고, 특별히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미인이라고도 할 수 없다. 'YES'가 유일한 처세술이라 웬만한 사람들의 부탁은 내키지 않더라도 거절하지 못한다. 영업부 정사원들은 보통 출장을 가거나 외근 나간 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오기에, 미치코는 아무도 없는 영업부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곤 했다. 그 날은 별로 식욕이 없어서 가져온 도시락을 먹지 않고 있었는데, 유일한 영업부 여자 정사원인 앗코 여사가 점심을 같이 먹자고 제안을 하게 된다. 앗코 여사는 떡 벌어진 어깨에 큰 키로 잘 빠진 바지 정장을 입고 업무 성과도 뛰어나 혼자만 특별한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앗코 여사는 미치코가 먹지 않은 도시락을 대신 먹어도 되냐고 묻고, 도시락을 먹고 나서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자신의 일주일 점심 코스와 바꾸기 놀이를 하자고. 미치코가 앗코 여사의 점심 도시락을 싸오고, 대신 점심값과 가게 지도와 주문 메뉴를 알려 주겠다는 거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일주일 점심 바꾸기가 시작된다.

평소 함께 외식할 친구도 없고, 돈에 여유가 있던 것도 아니어서 제대로 된 외식을 거의 해본 적 없었던 미치코는 앗코 여사가 남긴 메모와 지폐를 들고 식당을 찾아 간다. 그곳은 카레 한 가지만 단일 메뉴로 파는 곳으로 미치코는 카레를 먹으며 몸이 갑자기 뜨거워진다. 차갑게 굳어버린 무언가가 천천히 녹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어지는 화요일의 메뉴는 크림치즈와 새우, 토마토, 아보카도가 들어 있는 샌드위치였고, 수요일에는 튀김덮밥 등등...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며 먹는 음식들은 미치코의 일상을 조금씩 달라지게 만든다.

 

"알아요? 혼자 식사하는 것보다 누군가와 함께 먹어야 더 오래 산대요."

"그런 얘기 종종 들었는데, 왜 그럴까요?"

"누군가와 같이 먹을 때는 음식 수가 늘고, 따뜻한 국물도 함께 먹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소화가 잘 돼요. 시간 들여 천천히 먹으니, 잘 씹어서 과식하지 않게 되고요. 같이 먹으면 좋은 점이 많아요."   p.102

언제나 수동적으로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던 삶의 태도가 조금씩 적극적으로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은 소소하지만 뭉클하고, 마치 좋은 음식을 직접 먹는 것 같은 따뜻한 기분 마저 들게 한다. 부하 직원에게 자신의 도시락을 싸는 일을 시키다니 뭐 이런 갑질이 다 있나 싶었지만, 앗코 여사의 고압적인 말투 뒤에 숨어 있는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왜 일본 독자들은 고압적인 말투를 가진 갑질 상사 앗코짱에 열광한 것일까. 왜 하필 쪼잔하게도시락 갑질이나 하는 것일까. 궁금하다면 앗코짱 시리즈를 직접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출간 즉시 10만 부를 돌파했고, 출간 다음해 NHK의 드라마로 제작되는 등 앗코짱 신드롬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만큼 앗코짱 캐릭터는 독특하고 색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유즈키 아사코의 작품은 <서점의 다이아나> <나일 퍼치의 여자들>이라는 작품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여성 특유의 내면을 세밀하게 그려내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유즈키 아사코가 그려내는 여자들의 삶에 관해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이야기들을 좋아하기에, 앞으로 이어질 앗코짱 시리즈가 더욱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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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더 포스 1~2 세트 - 전2권
돈 윈슬로 지음, 박산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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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폭력 범죄가 줄었다고 하면 돼.

선거 자금이 더 필요해? 범죄율이 올라갔다고 하면 돼.

체포율을 올리고 싶어? 부하들을 거리로 보내서 절대 유죄판결이 안 날 죄목으로 아무나 막 잡아들이면 돼. 어차피 상관없잖아.

...그건 이들이 치는 사기의 반밖에 안 된다. 숫자를 조작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피의자들의 혐의를 흉악 범죄에서 경범죄로 낮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명명백백한 강도는경절도죄’, 도둑질은분실 사고’, 강간은여성에 대한 폭행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한 방에 범죄율이 내려가는 거지. 이런 식으로 자기들끼리 다 해먹는다는 말씀.   1 p.61

최고이자 최악의 경찰, 데니 멀론. 그는 역사상 가장 큰 마약 급습 작전을 성공시킨 뉴욕시의 스타 경찰이다. 뉴욕시 경찰청 최고 엘리트팀 소속 베테랑 경사이자 맨해튼 북부 특수 수사팀의 책임자. 무엇보다 숨겨진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사나이이자 그중 절반을 직접 처리한 장본인이다. 멀론과 경찰들은 뉴욕 거리를 자신들의 거리로 만들어 왕처럼 지배했다. 그리고 멀론이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맨해튼 북부 지역의 왕이었다. 멀론과 특별수사대는 1퍼센트의 1퍼센트의 1퍼센트, 가장 머리 좋고 가장 터프하고 가장 빠르고 가장 용감하고 가장 끝내주는 최고 중의 최고였다. 일명 '다 포스(Da Force)'는 차갑고, 거칠고, 빠르게 도시에 휘몰아쳐서 모든 쓰레기와 오물을 쓸어버리고, 약자들을 이용해먹는 약탈자들을 날려버리는 무시무시한 돌풍이었다. 뉴욕시민들이 절대 감옥에 가지 않을 사람으로 시장, 미국 대통령, 교황에 이어 마지막으로 꼽을 만한 사람이 바로 뉴욕 형사 데니 멀론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는 바로 그 데니 멀론이 교도소에 갇힌 상태에서 시작한다. 이 도시에선 아무도 그를 건드릴 자가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이 작품은 우리의 영웅 경찰이 부패 혐의로 교도소에 갇힌 시점에서 시작해서, 그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를 회상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뉴욕에는 두 개의 동네, 두 개의 문화가 있었다. 성처럼 반짝이는 고층 아파트들과 낡고 오래된 저소득층 주택단지들. 할렘은 그저 할렘이었고, 돈 많은 백인들은 호기심이 동하거나 값싼 스릴을 맛보려 하지 않는 한 이 빈민가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살인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노상강도와 무장 강도 그리고 마약 관련 폭력 사건도 발생률도 높은 그곳에서 멀론을 선두로 '다 포스'가 마약과 폭력 사건들을 해결해 왔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우린 전에는 좋은 경찰이었어. 그러다.....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리 거리에 헤로인 50킬로그램을 풀어놨어. 우린 이러려고 경찰이 되진 않았잖아.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을 잡으려고 경찰이 됐지. 이건 마치 성냥에 불을 붙일 때 그게 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과 똑같아. 그러다 방향을 바꾼 바람이 휙 불어오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걸 불태워버리는 거지."    2 p.248

데니 멀론은 경찰이라는 일 자체를 사랑했고, 뉴욕이라는 도시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도 시작은 열정적인 모범 경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구역에서 마약과 살인은 용납할 수 없다는 정의감으로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니, 어느 새 그가 서 있는 그곳은 부패의 한가운데였다. 게다가 지금 그는 연방요원들이 놓은 덫에 걸려 형제와도 같다고 생각하는 동료들을 배신해야 한다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상태이다. 과연 그의 목숨과 영혼을 지키면서, 그가 사랑하는 가족과 여인과 형제 같은 동료 경찰들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원한 건 오직 좋은 경찰이 되는 것뿐이었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지난 18년간 그는 야망과 부패로 세워진 도시에서 다치고 죽은 사람들, 피해자들, 범죄자들을 지켜보며 시민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낮이고 밤이고 주말이고 상관없이 거리로 나갔다. 동료가 죽어도 장례를 치른 후 바로 업무에 복귀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도움을 기대하고 믿는 눈빛이 좋았고, 이 도시를 사랑했고, 이 일이 좋았으니까. 그런데 왜, 그는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돈 윈슬로의 신작이 너무 오랜만에 출간이 되어 굉장히 반가웠다. 그의 데뷔작이자 닐 캐리 탐정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었던 <지하에 부는 서늘한 바람>과 미국과 멕시코 마약 조직간의 치열한 전쟁사를 그려냈던 놀라운 작품 <개의 힘> 이후 무려 6년 만에 만나는 신작이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더 포스>와 같은 작품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패, 모순되는 두 가지 규칙 사이에서 어느 쪽에 충성해야 하는지를 놓고 일어나는 갈등과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불가능한 선택들이 담긴 뉴욕의 경찰들에 대한 영화를 보고 책을 읽어 왔다고 한다. 돈 윈슬로 역시 이 작품의 주인공 데니 멀론과 같은 동네에서 태어났기에, 뉴욕의 거리와 공원, 골목골목과 건물 옥상에서 굽어보는 도시의 풍경이란 그가 실제로 보고 느껴왔던 일상의 그것과도 같다. 시대의 아이콘 같은 영화와 소설들을 업데이트한 현대판 경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던 그의 바람대로, 이 작품은 매우 놀라운 수준의 대작이다. 스티븐 킹은 이 작품을 가리켜 '갱이 아닌 경찰이 주인공인 <대부>'라고 표현했으며, 리 차일드는 '지금까지 나온 소설 중 최고의 경찰 소설'이라고 했고, 지금까지 뉴욕시를 배경으로 쓴 소설 중 가장 훌륭하다는 언론평을 받기도 했다. 그야말로 '최고 중의 최고' 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작품이니, 무조건 읽어 보길 추천하고 싶다. 몇 페이지 넘기기도 전에 돈 윈슬로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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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가 되기
존 가드너 지음, 임선근 옮김, 레이먼드 카버 서문 / 걷는책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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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잘 쓴 소설을 손에 쥐었을 때 우리는 첫 페이지 다섯 단어만 읽고도 이미 자신이 지면에 인쇄된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시작한다. 장면을 떠올리기 시작하는 것이다-쓰레기통들을 뒤지고 다니는 개들, 알래스카 산악 지대 위를 선회하는 비행기를, 파티에서 슬그머니 자기 냅킨을 핥는 노파를. 내가 지금 어디에 앉아 있는지, 점심때가 되었는지 일할 시간이 되었는지 따위는 잊고 몽상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p.42

레이먼드 카버는 아내와 두 어린아이를 데리고 월세 25달러짜리 낡은 집을 얻는다. 이사 비용조차 마련하지 못해서 배달원으로 일했던 약국의 약사에게 돈을 빌려서 겨우 댔을 정도로 빈털터리였다. 당장 먹고 살 길이 암담했는데, 그러면서도 그의 계획은 치코 주립 단과대학에서 강의를 듣겠다는 거였다. 아주 오래 전부터 작가의 꿈을 키워왔던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그만 때려치우라고, 꿈 깨라고, 조용히 마음 바꿔 먹고 다른 일을 하라고 시시때때로 속삭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 강의에 수강 신청을 한다. 그리고 바로 그 강의를 통해서 그를 가르쳤던 교수가 이 책의 저자인 존 가드너였다. 레이먼드 카버가 비좁은 집에서 애들과 함께 지내느라 글 쓸 공간이 없어 애를 먹고 있을 때, 자신의 사무실 열쇠를 주었던 이도 바로 존 가드너였다. 레이먼드 카버는 이 책에서 자신의 멘토를 추억하는 가슴 저릿한 서문을 썼는데, 그의 꾸지람과 너그러운 추임새를 받았으니 나는 최고로 운 좋은 사람이라고 그를 추억하고 있다.

이 책은 뛰어난 미국 현대 소설가로 손꼽히는 존 가드너가 20여 년 동안 대학 안팎에서 창작 교사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 창작 입문서이다. 장편소설가가 되기를 열망하는 진지한 새내기 작가들을 위해 쓰인 이 책은 1983년 가드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주 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소설가의 삶이 어떠한지, 소설가가 안팎으로 경계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대체로 기대치를 어느 수준에 두는 게 적정한지, 대략 어떤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밝혀줌으로써 그들에게 합당한 안도감을 안겨주려고 노력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창작 입문서가 아니라 저자가 작자로서 또 창작 교사로서 겪은 지난한 과정과 그가 지켜온 단호한 도덕성을 보여주는 진솔한 고백이기도 하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적확한 몸짓, 숨 막히도록 적합한 비유, 벽지 또는 고양이의 움직임에 대한 간결한 묘사, 문장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빛나거나 감동적인 문장, 허구지만 '생생하게 다가오는' 순간 등 진짜배기 대목들이 나와야 한다. 인물이나 장면이 그것들 자체의 기이한 힘으로 현실로 쳐들어와서, 자기가 쓴 글이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는 경험, 그리하여 작가가 자신이 창작자가 아니라 한갓 도구적 존재, 마법사나 주술에 걸린 사제라고 여기게 되는 경험-마법을 구동해보는 이런 경험이야말로 작가를 창작을 위해 거의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중독자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p.227

글쓰기, 창작, 작법에 관한 책은 꽤 많이 읽었던 편인데, 여타의 책들에 비해 이 책은 분량이 그리 많지 않아서 사실 좀 의아했다. 어떻게 소설가가 되어야 하는지, 글쓰기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면 결코 이 정도 분량일 수가 없을 텐데 싶었던 거다. 게다가 '장편소설' 이라 하면 그 과정이란 더욱 복잡하고, 지난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가드너는 이 책에서 작가가 되고 작가다움을 유지한다는 게 어떤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돌아보게 하는 지혜롭고 정직한 잣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장편소설 쓰기에 관심이 있고, 진지하게 소설가가 될 마음을 먹은 이들이 아니더라도, 소설과 작가에 대해 관심이 많은 독자들을 위해서도 매우 훌륭하고 흥미로운 책이다.

그렇다고 작법과 관련된 이론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가드너는 자신의 작품과 경험담, 혹은 다른 작가의 작품이나 가상의 작품 등을 사례로 들어가면서철두철미하고 유용한이론과 실제를 들려 준다. 뿐만 아니라 작가 워크숍이나 창작 프로그램, 대학의 문학 혹은 비문학 교육, 책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알아야 할 점, 편집자와 에이전시의 역할, 작가로 살면서 생계를 꾸리는 방법 등에 대한 조언도 구체적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이 쓰인 지 30여년이 지났지만, 왜 이 책을 '불후의 고전'이라고 하는 지 알 것도 같다. 작가들이 왜 이 책에 밑줄을 긋고 주석을 달면서 거의 외울 만큼 읽었다고 하는지 이해가 될 만큼, 작가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만 임팩트있게 담고 있는 책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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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느긋하게 지내볼까 합니다 - 몸의 감각을 되찾고 천천히 움직이고 필요 없는 것은 내려놓고
히로세 유코 지음, 박정임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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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매일 먹는 음식과 사용하는 근육으로 만들어져 갑니다. 무엇을 먹는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에 따라 몸은 변합니다. 몸을 보면 그 사람의 생활이 들여다보이는 것이지요.

그 사람을 감싸고 있는 공기는 그 사람 자신으로부터 발산되는 것입니다. 정갈한 공기를 가진 사람도 있고, 따뜻한 공기나 물처럼 투명한 공기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p.15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인생에서 겪는 크고 작은 경험들이 고스란히 얼굴에 그 흔적을 남기기 때문일 것이다. 성격과 행동 또한 모두 차곡차곡 쌓여 노년의 얼굴을 만들어 간다. 저자인 히로세 유코 역시 하루하루의 생활이 쌓여서 그 사람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매일 먹는 음식과 움직이는 방법, 표정과 무언가를 대하는 태도 등에 따라 내면 뿐만 아니라 외면도 조금씩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정갈한 공기를 가진 사람도 있고, 따뜻한 공기나 물처럼 투명한 공기를 가진 사람도 있다. 나이가 어릴 때는 젊음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싱그럽고, 때묻지 않은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발산하지만, 진짜 본 모습은 나이가 들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니 말이다.

몸과 마음이 이어져 있다면, 매일매일 어떤 시간이 쌓이는 지에 따라 사람도 모습을 바꾸어가는 것이라면, 자신만의 아름다움은 스스로의 모습과 행동, 의식의 변화만으로도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히로세 유코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중심에 두고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맞는 좋은 시간을 보내면 좋은 인생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그녀가 택한 삶의 속도는느긋하게이다. 나도 그녀처럼 '이제 좀 느긋하게' 살아보고 싶어졌다. 좋아하는 차 한 잔을 천천히 내려 마시며 좋은 기운을 불어넣고, 마음이 심란해지면 의식적으로 천천히 움직이며 마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려 보고 말이다. 그렇게 일상 속 작은 행복들이 하나씩 모이면 자연스레 삶에도 빛이 날지도 모르겠다.

 

우리 삶에는 없으면 안 되는 것과 없어도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일상을 되돌아봅니다. 이것과 저것은 꼭 있어야 합니다. 정말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되는 것도 몇 가지 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단지 그렇게 생각만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처분해보면 삶과 기분이 산뜻해집니다. 집뿐만이 아니라 삶까지도 통풍이 잘 되는 느낌이 듭니다.  p.177

이 책에서 말하는 '느긋하게' 살기 위한 세 가지는 바로 이것이다. '세심하게' '천천히' '심플하게'. 세심하게 나만의 생활 리듬을 되찾고, 천천히 생각하며 움직이고, 심플하게 필요 없는 것은 내려놓으면 우리의 삶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천천히 걷고, 천천히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마음의 심란함이 조금씩 사라진다고 하는데, 사실 그 말이 맞든 아니든 간에 직접 실천해보기에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니 속는 셈 치고 한번씩 해보면 어떨까. 누구에게나 이유 없이 마음이 심란할 때가 있을 것이다. 평상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든 것들이 신경에 거슬리고, 사소한 한마디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하고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마음과 몸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할 때 몸의 움직임을 천천히 하면 그 리듬에 이끌려 마음도 느긋해진다고 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젊을 때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던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을 돌보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엄마라면 남편과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다 쏟아 붓느라 자신의 몸은 아픈지도 모를 것이고, 아빠라면 가족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온갖 스트레스를 꾹꾹 눌러 참고 발산할 데를 찾지 못해 속 병이 드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챙기는 것도 중요하고, 내가 희생해서 가족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좋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제대로 굴러 가려면 나 자신부터 중심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알 수 있고, 자신의 생활을 정성껏 돌보아야만 주변의 누구에게도 든든한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히로세 유코 특유의 차분하고 따뜻한 문장들이, 일상에 쫓기며 바쁘게 살아온 나를 돌아보게 만들어 주었다. 책을 읽는 시간이 휴식처럼 느껴졌고, ‘자기다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나도 좀 느긋하게 지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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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 24시 - 상
마보융 지음, 양성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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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 세상의 통로를 걷다 보니 마치 동굴 미로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간간히 어디서인가 흐느낌과 비명이 들려와 흡사 지하 감옥 같기도 했다. 요여능은 장안성의 암흑 세상에 발을 디뎠다는 생각에 극도로 긴장했다. 장안성의 암흑 세상은 피비린내와 탐욕이 가득했다. 이곳은 법도, 도덕과 정의도 통하지 않는, 아수라도처럼 잔혹한 세상이다. 여기에서 살아남은 자는 가장 간악한 인간이리라. 이때문에 관부에서도 이곳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p.142~143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였던 당나라의 서울이 바로 '장안'이다. 장안은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 도시였다. 작가인 마보융은 장안을 가리켜 '시공의 한계를 뛰어넘는 매력적인 도시, 고전과 현대적 요소를 두루 갖춘 곳'이라고 말한다. 그는 양한 가능성을 품은 이 도시는 창작자가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매우 이상적인 무대라고 생각했고, ‘천보 3재 원소절, 장안에 큰불이 있었다는 역사서 속 짧은 기록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고대 국제도시를 배경으로 한 대테러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 작품은서양에 로마가 있다면 동양에는 장안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찬란했던 대도시 장안에서 일어난 하루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분량이 만만치 않다. 상권이 600페이지가 넘고, 하권도 500페이지가 넘으니 말이다.

마보융은 역사서에서 기록된 사건을 입체적으로 재현하고, 허구의 인물과 실재했던 역사 속 인물들을 함께 등장시켜 개연성 뛰어난 팩션을 만들어냈다. 수많은 인종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그곳에 있었던 다채로운 문화와 여러 모습의 가지각색 인생들을 그려내고 있어서인지, 이렇게나 두툼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 없는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중국의 히가시노 게이고라 불린다고 하던데, 그야말로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훌륭한 작품이다. 화제의 드라마 <장안십이시진> 원작 소설이기도 하다는데, 책을 읽는 내내 바로 눈 앞에서 장면들이 보여지는 것처럼 생생한 작품이라 영상화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당황스러운 질문을 받은 요여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갈등했다.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이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당연히 도리에 어긋난 일이지만 가만히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된다. 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프고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 명을 죽이면 백 명을 살릴 수 있어. 한 명을 죽이겠는가, 백 명을 죽게 내버려둘 텐가?  p.202~203

서역의 위협에 대비해 조직된 특수기관 정안사는 장안을 불바다로 만들려는 돌궐의 테러 계획 정보를 입수한다. 하지만 작은 실수로 늑대 전사들의 적장인 조파연을 놓치게 되고, 정안사의 젊은 수장 이필에게 문서관리를 맡고 있는 서빈이 적임자를 추천한다. 만년현 불량수로 9, 무소불위의 전직 수사관이자 현재는 상관을 살해해 사형수 신세인 장소경이었다. 그가 수색과 체포에 관한 한 장안 최고라는 말에 이필은 장소경을 석방해 파격적으로 그를 기용한다. 천재 관료 이필의 지략과 장안 108방을 훤히 꿰뚫고 있는 장소경의 활약으로 돌궐의 테러를 막고 그 배후 세력을 파헤치는 스토리는 대체 어느 부분이 클라이막스인지 모를 정도로 끊임없는 긴장의 연속이다. 모종의 암살 집단, 장안사 내부의 첩자, 조정의 반대파와 장안 뒷골목의 세력까지 더해지면서 곧 장안성에 닥칠 재앙에 대한 무시무시한 폭풍이 시작된다. 특히나 대화재를 막을 시간이 앞으로 몇 시간 남지 않았다는 제한 조건이 주는 압박감이 매 페이지마다 더욱 긴박감 넘치는 스릴을 만들어 내고 있다.

특히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해서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있는데, 목적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나 의무도 필요 없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장소경과 곁에서 그를 감시하면서 점차 그에게 설득되어 가는 요여능, 그리고 당 조정 최고의 인재인 이필 등 저마다의 대의와 신념, 야망이 혼란의 도시 장안에서 한데 뒤섞이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호색한, 사형수, 오존염라, 여자를 사지에 몰아넣지 않는 군자, 혹독하고 무자비한 관리, 능력자, 정의로운 협객.. 이 모두가 겨우 몇 시간 동안 장소경이 보여준 모습들이다. 그와 함께 행동하는 이들은 여전히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나 한 작품에서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던 캐릭터가 있었나 싶게 장소경은 독특한 인물이다. 과연 이들은 24시간 내에 위기의 장안성을 구할 수 있을 것인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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