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딩, 턴
서유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월
평점 :
품절


 

잘 지내는 것 같던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가 깨질 때 상대의 불륜이나 변심, 파산, 폭력, 중독은 선명한 파경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로 명명하기 어려운 이유들이 자잘하게 집 여기저기에 곰팡이처럼 번져버린 경우도 있다. 볼 때마다 닦고 주기적으로 꺼내서 말리는데도 은밀하고 깊숙하게 번져나간 곰팡이를 목격할 때면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리며 손을 놓고 싶어진다. 곰팡이가 관계를 삼켜버리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건 뭘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뭘까.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일은 기적과도 같은 거라고. 어쩌면 평생에 단 한번, 서로의 소울 메이트를 힘겹게 찾아 헤매다 마침내 상대방을 알아보는 순간, 우리는 생에 남아 있는 모든 시간을 상대와 함께 하길 바란다. 하지만 서로에게 반해 온 세상에 단 둘만 존재하는 것 같던 마법의 시간이 지나고, 결혼이라는 현실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조금씩 달라지고 만다. 어떤 문제는 같이 살아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아무리 오래 연애를 하고 데이트를 자주 했더라도 말이다. 작가는 말한다. '연애가 멋진 신발을 신은 사람과 같이 걷는 거라면 결혼생활은 양말도 벗은 맨발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런 부분이 편안함과 친밀함을 가져올 수도 있고, 반대로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참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생활을 공유하고, 그러니까 일상의 민낯을 고스란히 만나게 되는 결혼이란 대체 뭘까.

‘홀딩, 은 스윙 댄스 용어로홀딩은 파트너와 만나 손을 잡는 동작, ‘은 돌면서 춤을 도는 동작이라고 한다. 춤을 따로 배워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스윙 댄스의 분위기가 어떤지 짐작이 되진 않는다. 다만, 나도 학창시절에 남학생들과 어색하게 포크댄스를 췄던 기억은 가지고 있어 조금 상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춤을 추는 두 사람, '홀딩, 잠깐 정지하며 서로를 붙잡았다가 턴, 회전하는 동작.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서로를 잡았다가 빙그르 도는 순간, 그저 공중에 사라져 버리는 그 짧은 시간의 틈을 생각해 본다. 이 작품은 소소하게 쌓인 감정들이 결국 폭발해 파국을 앞두고 있는 부부의 이야기이다. 그들 두 사람이 갈등을 극복하고 홀딩,하며 살아갈지, 혹은 차이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턴, 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갈 지의 과정이 소설의 내용 전부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결혼 후 그들이 파국에 이르게 된 과정이나 이혼 후의 삶보다는, 현재는 그런 상태이지만 그들에게도 서로에게 오직 상대만 보이던 반짝이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이별이나 이혼 이야기라기 보다, 연애의 과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지나온 어떤 순간, 인상적인 장면을 꺼내 후후 불어 맛볼 수 있다는 건 인생이 베푼 행운임에 틀림없다. 그런 면에서 인생에는 언제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우려먹을 수 있는 티백이 필요하다. 청춘이라 명명할 수 있는 장면과 따뜻했던 눈 맞춤, 짜릿했던 키스, 온몸과 마음이 살아 있다고 느꼈던 순간이 고스란히 담긴 티백이어야 한다. 몸이 힘들고 마음이 가라앉을 때 그것들로 우려낸 차를 마시며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가 아니고 이 삶이 완전히 실패하지 않았으며 사랑의 한복판에 서 있던 시절도 있었다는 걸 깨달으면 기운을 얻을 수 있다.

지원과 영진은 다투게 되면 일주일 동안 말을 섞지 않은 채 지내곤 했다. 그들 사이엔 아이도 없었고, 각자 거실과 서재에서 낯선 타인처럼 각방을 쓰며 지내는 것이 이제는 그들 사이의 관례처럼 굳어져 버린 것이다. 지난번 싸움에선 냉전 상태가 열흘 넘게 이어졌고, 이번에는 아직 일주일째지만 보름을 가뿐히 넘기며 장기전에 돌입할 것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지원은 결정을 내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다고. 그들은 스윙댄스 동호회에서 처음 만났다. 영진은 공무원이었고, 닉네임조차 자기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지식하고 눈에 띄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사람이 호감으로 다가오게 되는 순간을 거쳐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둘만의 춤을 추며 사랑의 마지막 단계라고 불리는 결혼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현실이란 언제나 동화 속 해피엔딩처럼 진행되지 만은 않는 법, 애써 고른 테이블에 생활의 얼룩이 지듯 사랑은 쉽게 변형되고 천생연분이라고 믿었던 관계에 대한 회의가 점차 얼룩처럼 커진다.

결혼생활은 사랑 위에 세워지지만 어떤 문제로 감정이 상해서 대립할 때 사랑은 저 너머로 날아가버리거나 훼손 방지를 위해 다른 곳으로 피신한다.

나도 이제 결혼 3년차인데 남편과 연애를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했던 부분들과 다른 점들이 어쩔 수 없이 생기기 시작했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극복할 수 있는 것과 넘어가기 어려운 것을 헤아리는 것을 경험해봤기에, 더욱 서유미 작가가 그려내는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극중 지원은 결혼생활 내내 누군가를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가, 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은 수천 개의 갈래로 나뉘고 수많은 변수로 이루어지는데, 바로 상대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그것 때문에 오히려 관계 속에서 자주 길을 잃고 좌절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래서 언제나 자신과 맞지 않은 그 부분을 고치고 싶어 하고, 자신이 달라지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단언컨대 착각이다.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물며 수십 년의 시간을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지 않나. 상대에게 맞춰주고, 포기할 수 있는 건 포기하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어야 비로소 낯선 타인이 부부라는 테두리 아래 가족 관계를 유지해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은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어 버린 시대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결혼을 하는 이들이 더 많다. 결혼을 인생의 완성이나 삶의 해피엔딩으로 생각하지 않는, 요즘 젊은 부부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 더 와 닿는 부분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이라는 삶의 서사 속 결혼생활을 그리고 있어, 결혼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거나, 결혼 생활의 위기를 맞았거나, 이혼을 고민하고 있는 여성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팬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9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레그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범인들이 그러듯이. 그들의 특권이자 유일하게 합리적인 전략이라는 듯이. 그럼 이제 어디로 가지? 어떻게 이미 해결된 사건을 수사해서 이미 답이 나온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지? 뭘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진실을 거부하면서 진실과 싸운다? 강력반 형사로 일하면서 보았던 여느 범인들의 가족처럼 애처롭게 부정하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내 아들이? 그럴 리가 없어!" 해리는 자신이 왜 수사를 하고 싶은지 알았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였다. 그가 해줄 게 그것뿐이라서. 아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밥을 챙겨줘야 한다고 고집하는 주부처럼, 친구 장례식에 악기를 가져가는 연주자처럼. 생각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든 위로를 얻기 위해서든, 뭐든 해야 하니까.

해리 홀레 시리즈 그 아홉 번째 작품이다. <스노우맨>, <레오파드> 바로 다음 이야기이다. 《스노우맨》에서 손가락을 잃고, 《레오파드》에서 얼굴 절반이 찢어진 해리.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운명의 연인 라켈 역시 도망치듯 그와 헤어졌다. 소설 《팬텀》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홍콩으로 떠난 해리가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번에 그를 오슬로로 이끈 것은올레그였다. 라켈의 아들이자 그에게만 속마음을 털어놓던, 아들보다 더 가깝던 그 소년이 다른 소년을 죽인 혐의로 체포된 것. 그러나 해리는 이제 경찰이 아니다. 더군다나 올레그의 아버지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어느 때보다 경찰이자 아버지의 입장에 선 해리. 진정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해리는 가장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레오파드> 이후 3, 마침내 돌아온 오슬로에서 그는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켜야 한다. 그가 평생 사랑한 여인 라켈의 아들 올레그, 이제는 열여덟 살의 다 큰 소년이 되어버린 올레그가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런데, 해리는 더 이상 강력반 형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해리는 자신에게 가족만큼이나 소중한 올레그를 지켜야 한다.

해리가 평생 가장 사랑한 여인 라켈, 그녀가 아들인 올레그를 데리고 오슬로로 왔을 때 소년은 겨우 서너 살이었다. 그리고 그때 라켈과 해리가 만났고, 올레그는 해리를 아빠라고 부르며 따랐었다. 하지만 스노우맨이라는 소름끼치는 기억에서, 폭력과 살인으로 점철된 해리의 세계에서 라켈은 아들을 데리고 도망치듯 오슬로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 열여덟 살의 다 큰 소년이 된 올레그가 교도소에 있다. 올레그가 죽인 소년 구스토는 레그를 마약의 길로 인도한, 올레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이번 작품에서 해리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바로 죽은 구스토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일 것이다. 자신을 입양해준 한 가정을 무참히 박살낸,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마약 중독자 소년. 팬텀. 유령의 목소리. 올레그는 자신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해리는 확실해지기 전에는 누구도 유죄일 수 없다며 나름의 수사를 시작하지만, 이내 모든 증거들이 올레그가 살인을 했음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는다. 과연 올레그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없이 유죄일까? 요 네스뵈는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은 폭력과 마약에 찌든어두운오슬로라고 말했다. 이런 배경 덕분인지 이 작품은 점점 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해리 홀레의 모습을 보여주며, 마치 이 작품이 해리 홀레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끝을 낸다. <팬텀> 뒤에 두 작품이 더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미처 몰랐다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시리즈의 마지막을 슬퍼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해리는 벙커 문을 밀었다. 잠겨 있었다. 터널은 벽에 끼어 있는 철판 앞에서 끝났다. 루돌프 아사예프는 말하자면 나가는 길만 만들어놓은 것이다. 터널. 그리고 해리는 왜 다른 출구를 먼저 다 열어봤는지 알았다. 그 꿈 때문이었다.

그는 좁은 터널을 응시했다. 폐소공포는 비생산적이고 위험에 대한 거짓 신호이며 극복해야 할 증상이었다. 해리는 탄창이 MP5에 제대로 장착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유령들은 우리가 허락할 때만 존재한다.

요 네스뵈의 작품들 중에 해리 홀레 시리즈만 모아 보았다. 아마 대부분 국내에 출간된 순서 그대로 해리 홀레를 만나왔을 것이다. 마흔 살의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 반장이었던 <스노우맨> <레오파드>를 거쳐서 삼십 대 중반의 이제 막 경위로 승진한 <레드브레스트>에서 <네메시스>, <데빌스스타>를 거쳐오면서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외톨이에 술고래인 그를 보아 왔고, 다시 삼십대 초반의 젊고 열정적인 <박쥐> <바퀴벌레>를 통해 해외에서 활약하는 그를 만났다. 내가 해리 홀레와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 그는 전대 미문의 연쇄 살인범을 만나 손가락을 하나 잃어 버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그녀의 아들이 연쇄 살인범 손아귀에 들어가기도 하는 등 최악의 상황만 골라가며 겪었던 지치고 엉망으로 피폐했던 모습이었다. 눈동자는 충혈됐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 빡빡 깍은 금발 머리에 192센티의 거대한 몸은 비쩍 마른 북극곰처럼 살이 빠져 근육질 몸에 지방만 쏙 빠진 상태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알콜 중독 상태의 남자, 그리고 사건 수사에 있어서 만큼은 융통성 제로, 고집 불통이지만 진실을 향한 무조건 적인 열정으로 뛰어난 수사 능력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남자!

 

 

시리즈 아홉 번째 작품인 <팬텀>을 만나면서, 그 동안의 작품들을 돌아보니 이렇게 모아놓고 책등만 보아도 지나간 시간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박쥐>에서 32살의 풋풋하고 열정 넘치는 해리 홀레는 호주라는 이국적인 공간에서 특유의 젊음을 보여주었고, <바퀴벌레>에서 33살의 그는 찌는 듯한 더위의 방콕에서 사건을 은폐하려는 철벽방어를 뚫고 노르웨이 대사의 살인 사건을 수사했다. <레드브레스트>에서 35살의 그는 미국 비밀경호원 총격사건으로 경위로 승진해서 국가정보국으로 발령을 받았고, <네메시스>에서는 은행 강도 사건과 전 여자친구의 자살 사건에 전작에서 죽은 동료에 대한 의혹을 수사하다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기도 했다. <데빌스스타>에서 36살의 해리 홀레는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이단아로, 경찰청의 외톨이이자 심각한 알콜 중독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이미 자기파괴적인 성향 속으로 파고 들어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로, 우리는 더 이상 경찰이 아닌 해리 홀레의 모습까지 상상해봐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렇게 '오슬로 삼부작'까지가 해리의 30대를 담은 시리즈 전반부였다.

 

2월에는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인 <리디머>가 출간될 예정이다. 곧 우리가 만나게 될 <리디머>에서는 점점 더 어둠에 가까워지는 해리 홀레의 모습이 심도 있게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요 네스뵈는 시리즈를 거듭할 때마다 해리 홀레를 지독하게 고생시키고 있는 걸로 유명한데, 이번 작품 <팬텀>에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상처받고, 사상 최악으로 망가지는 해리 홀레를 만날 수 있다. '해리 홀레의 끝, 시리즈의 정점!'이라는 홍보 문구가 전혀 과장이 아닐 만큼 말이다.

 

원래 이 시리즈는 전체 열 권으로 마무리가 되었었다. 마지막 작품 <Police>가 나온 것이 2013년이다. 국내 출간작 외의 작품들은 원서로 구매했지만, 더 이상 해리 홀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참 아쉬웠다. 그런데 다행히도 새로운 해리 홀레 이야기가 <The Thirst>라는 작품으로 2017년 봄 다시 시작되었다!! 앞으로 스무 편, 서른 편.. 해리 홀레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감 2018-01-31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서까지 모으시다니, 엄청난 팬이시군요! ^^ 원서는 생각보다 얇은것 같네요ㅎㅎ

피오나 2018-02-02 01:50   좋아요 1 | URL
ㅎㅎ 요 네스뵈의 작품들은 원서도 두툼하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판본으로 <Police>는 700페이지, <The Thirst>는 630페이지네요. ^^

G 2018-12-24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Police>, <The Thirst>한국어로 출판된 것은 없나요?

피오나 2018-12-24 22:10   좋아요 0 | URL
네. 두 작품 모두 아직 번역본은 출간 전이에요.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사람의 일생을 책 한 권, 문장 하나, 단어 몇 개에 전부 담을 수 있을까. 그렇게 간단한 단어들에. 하지만 이 작품은 기어이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다. 그것도 유려하고 아름다운 최상의 산문 문장으로 말이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 노인이 된 뒤 도리고 에번스는 이것이 어디서 읽은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낸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만들어냈다가, 이것저것 뒤섞었다가, 다시 부숴버렸나? 가차없이? 바위가 자갈이 되고, 자갈이 흙이 되고, 흙이 진흙이 되고, 진흙이 바위가 되는 식으로 세상은 굴러간다. 그가 세상이 왜 이러저러한 모습인지 설명해달라고 다그칠 때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 그대로다. 세상은 그냥 그런 거야. 원래 그래, 아들.

도리고 에번스는 유명한 외과의였으며 전쟁영웅으로 세월과 비극의 대중적인 상징이었고, 전기와 연극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지난 주에 일흔일곱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무려 오십 년의 세월 동안이나 기억의 망령에 사로잡혀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젊은 시절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일본군의 타이-미얀마 간 죽음의 철도 라인에서 일본군의 포로로 노역하다 살아남았다. 이야기는 도리고가 참전 전 젊은 숙모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던 기억과 전쟁포로로 지내던 시절의 비참한 기억과 현재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가 예고 없이 계속 교차되다 보니 글을 읽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혼란스러운 감정이 들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서사와 형식 그 자체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바섬 고지대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수용된 전쟁포로수용소에서 대령이었던 도리고 에번스는 포로 천 명의 부사령관 역할이었다. 여기 저기 쌓여 있는 시체들, 고성능 폭약의 시큼한 악취, 죽음이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농담을 주고 받던 기억, 폐허와 먼지로 변해버린 마을의 모습, 비처럼 쏟아지던 포탄들, 총알로 벌집이 된 자동차... 전쟁의 풍경들이 그에게 남긴 선연한 기억들은 그렇게 수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평생 그를 지배한다. 끊임없는 굶주림과 영양실조, 말라리아, 이질 등의 질병에 시달리던 동료들의 모습, 오래된 토사물, 배설물에서 풍기는 지독한 악취들... 전쟁을 겪지 않은 이들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부분들을 리처드 플래너건은 고스란히 페이지 속으로 불러 들인다. 그의 아버지는 실제로 일본군 전쟁포로로서 버마 철도 건설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어린 시절 참담하고 끔찍한 전쟁의 참상에 대한 체험을 듣고 자란 그는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12년간 집필에 매달리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다섯 개의 다른 판본을 썼다고 한다. 그 모든 판본을 다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이 작품은 매혹적이다.

 

순간적으로 그는 무서운 세상의 진실을 본 것 같았다. 끔찍한 공포에서 도망칠 길이 없고, 폭력이 영원한 세상. 세상이 창조한 문명보다 폭력이 더 위대하고 유일한 진실이며, 폭력만이 진실한 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숭배하는 어떤 신보다 폭력이 더 위대한 곳. 마치 인간은 폭력의 세력이 영원히 유지되도록 폭력을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폭력은 항상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결코 뿌리 뽑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끝나는 날까지 다른 사람들의 부츠와 주먹과 끔찍한 행동 아래에서 죽어갈 것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폭력의 역사였다.

이 작품은 전쟁 소설인 동시에 한 남자의 평생을 좌우하는 지독한 사랑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도리고 에번스는 부대에 배치되기 전 훈련 중 휴가 때, 오래된 서점에 들렀다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당시 그에게는 당연히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머리에 붉은 꽃을 꽂은 대담한 모습으로, 함께 온 남자들의 선망의 눈길을 뿌리치고 그에게 다가온 그녀에게 도리고가 한 눈에 반하거나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몇 마디 대화를 했고, 그가 그녀에게 책 속 몇 구절을 읽어 주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단 두 줄의 문장으로 설명될 이 만남을 작가는 무려 열 페이지로 묘사를 하고 있다. 그녀의 행동에 그가 한 사소한 행동들과 그 순간 했던 생각들은 마치 그림처럼 그려지고 있다. 이 장면은 서사 문학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독자들에게 안겨준다. 단어 하나하나가 영원히 알 수 없는 무한한 우주와도 같았으니 말이다. 현재의 노인이 된 도리고는 여전히 전쟁포로 막사에서 잠을 자는 꿈을 꾸고, 당시의 여자친구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독한 고독함에 여러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중이었다. 이야기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도리고가 우연히 고모부의 아내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고 가까워지는 과정과 일본군 포로로 지내던 끔찍했던 기억 사이를 오간다.

일본군 대령들이 하이쿠 시인 바쇼의 작품을 종종 읊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의 제목 역시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의 <오쿠로 가는 좁은 길>의 영어판 제목과 같다고 한다. 리처드 플래너건은바쇼의 책이 일본 문화의 최고 정점에 있다면, 내 아버지와 전쟁포로들은 그 문화의 최저에 있던 셈이라고 말하며, 작품의 소제목들도 모두 바쇼와 잇사의 시 구절에서 따오고 있다. 하이쿠 시에 대한 일본인들의 자부심과 그들이 철로 건설을 통해서 세계를 정복하며 바쇼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더 넓은 세상에 알리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작품 전체를 통해 어떤 은유로 보여지는 지 또한 굉장히 흥미롭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나는 건데, 소문만큼이나 굉장했다. 장편소설이라기 보다 거대한 호흡의 서사시같다는 느낌이랄까. 기억과 트라우마에 대한 유려한 서사도 훌륭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묘사와 표현들도 멋졌다. 무엇보다 산문이 안겨주는 즐거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여러 번 읽고 싶은 작품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전쟁 소설을 읽으면서 잘 쓰였다고 감탄한 적은 있어도, 공감이라는 걸 경험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평생에 걸쳐도 절대 체험해볼 수 없는 세계였으니 말이다. 작가라는 존재가 인물의 심장과 영혼 사이의 어두운 주름 속으로 다가가, 독자로 하여금 그것을 공유하게 되는 경험을 선사하는 사람이라면, 리처드 플래너건은 바로 그런 마법을 내게 보여주었다. 전쟁의 서사를 가지고도 이렇게 지루하지 않게, 아름다운 단어들로 삶과 사랑을 그려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현대판 오디세우스', '오스트레일리아판 전쟁과 평화'라는 평이 절대 과찬이 아님을, 모두 직접 읽고 느껴 보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소홀했던 것들 - 완전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완전한 위로
흔글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전의 나는 캄캄한 골목도 무섭다고 잘 걷지 못하면서 사람은 잘도 믿었다. 그래서 관계에 자주 걸려 넘어졌으며, 무릎에 까진 상처처럼 마음에도 딱지가 앉기 일쑤였다.

..........후회는 없다. 그렇다고 내게 남은 것이 온통 보람과 환희도 아니다. 하루를 소홀히 살았던 적이 많아서, 앞으로 제대로 살아야 할 이유가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이라서.

나는 내가 소홀했던 것들을 하나씩 정리할 생각이다.

요즘은 굳이 작가가 아니라도 너도 나도 글을 쓰는 시대이다. SNS의 발달로 더욱 가속화된 것도 있고, 워낙 사는 게 마음을 헛헛하게 하는 것이다 보니 글을 통해 위로 받고, 공감하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 탓도 있을 것이다. '흔글'이라는 평범한 듯 보이면서도 독특한 필명을 가지고 있는 저자에 대해 찾아 보면 제일 먼저 알게 되는 것이 바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 채널 등 70만 독자가 뜨겁게 공감한 글'을 쓴 작가라는 정보일 것이다. 게다가 이미 책도 여러 권 낸 작가였는데, 나는 이번에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SNS에서 핫하다는 작가들의 '평범한 글들'을 많이 보아 왔기에, 이번에도 별다른 기대 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머리로만 생각하고 흉내낸 겉멋이 아니라, 가슴에서 비롯되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글들이라 조금씩, 조금씩 나는 편견을 버리고 그의 글에 잔잔히 스며들고 말았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굳이 긴 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단번에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짧은 문장에 빠져, 교과서 대신 시집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 이력이 고스란히 현재 그의 글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짧은 단락들로 이루어진 생각의 편린들과 일상의 풍경들이 이어지는 그의 글들은 읽기에도 참 편하고, 공감할 수 있는 대목도 많았고, 무엇보다 허세가 실린 척이 아니라 진심으로 고민하고 생각한 티가 나타나는 글들이어서 좋았던 것 같다. 이 책은 내가 살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순간들과 오늘이 아니면 내일 하면 된다는 안일함으로 소홀했던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소홀하다'는 의미에 대한 저자의 생각 중에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내가 소홀했다고 느낀 것들 중에는.. 실제로 소홀하지 않았지만 내 역량이 부족해서 해내지 못한, 그래서 그렇게 느끼는 것들'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머뭇거리다 놓쳐버린 사람, 그때 했어야 한다고 끝끝내 후회하게 되는 미련, 과거의 나를 훌훌 털어버리고 이제는 좀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바램, 제대로 들을 줄을 몰라서 흘려버린 소중한 사람들과의 대화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면서 소홀했던 부분들은 참 많기도 하다.

불필요한 감정들은 걸러낼 줄도 알고, 사랑 받기 위해 욕심부리지도 않으며, 외롭다고 칭얼대지 않고, 행복하다고 해서 나태해지지 않는 것. 괜한 다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며 감정이 요동칠 때는 잠시 마음을 비우고, 눈길 둘 곳 없을 때는 괜히 하늘도 쳐다보면서 약한 마음에 다짐을 채워 넣는 것. 이별을 겪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이 아닌 흠뻑 젖을 정도로 아파하다 미련을 남기지 않는 것. 긴 시간 자리 잡은 적 없던 마음속에 누군가가 자꾸 서성이는 것을 느끼며 웃어도 보는 것.

이 책은 연애와 일상, 사람들간의 관계와 삶의 태도를 돌아보고 그저 웅크리고 버티는 것에서 벗어나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에 개입하고 현재에 충실하게 머무르는 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항상 뭔가 아쉬운 과거, 항상 뭔가 부족한 것 같은 현재, 그리고 영원히 완벽하지 않을 것 같은 미래까지..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그 모든 시간들은 모두 상대적이라 각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어제와 오늘이 주어지고, 내일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아무 생각 없이 흘려 보내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뛰어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간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만 이렇게 힘든 건 아닐까. 세상은 나한테만 이렇게 불공평한 것 아닐까. 아니면 다들 비슷한 마음인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책과 같은 위로가 아닐까 싶다.

특별하지 않은, 누구나 매일 겪는 일상의 고민들과 평범한 하루에 대한 저자의 글들은 바로 그 특별하지 않음으로 인해 위로와 공감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다고 응원해주고, 지나온 과거가 당신의 현재를 만들었다고 격려해주고, 당신만 힘든 거 아니라고 위로해주고, 그래서 당신도 사소한 것들에 웃을 줄 아는 여유와 거대한 슬픔에도 담담히 버틸 줄 아는 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준다. 사랑을 잃어 버려 세상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사람도,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아 힘이 든 사람도, 너무 바빠서 하늘을 올려다 볼 여유조차 없는 사람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추운 겨울,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장의 온도 - 지극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이덕무의 위로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슬픔이 닥쳤을 때는 사방을 돌아봐도 막막할 뿐이다.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만 들어서 한 치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행히 나는 두 눈을 지니고 있어 조금이나마 글자를 알고 있으므로, 손에 한 권의 책을 든 채 마음을 달래고 있노라면 무너진 마음이 약간이라도 안정이 된다. 만약 나의 눈이 비록 오색을 볼 수 있다고 해도, 책을 마주하고서 마치 깜깜한 밤처럼 까막눈이었다면 장차 어떻게 마음을 다스렸을까.

이덕무는 가난한 환경 탓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학문에 비상하고 시문에 능해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던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비록 신분은 서자였지만 오직 책 읽는 일을 천명으로 여겼다고 한다. 가난하여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을 책을 베꼈다. 아마도 그를간서치(책 바보)’라는 별명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꽤 많은 것이다. 나도 이덕문에 대해 알고 있는 점은 그 정도였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 책을 통해서 이덕무가 평범한 일상 속에 숨은 아름다움을 발견해 문장에 녹여내는 데 탁월했던에세이스트였다는 점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 책은이덕무 마니아인 고전연구가 한정주는 그가 남긴 소품문 에세이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의 아름다운 문장들을 꼽아 번역해서 소개하고, 그에 대한 해설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북학파 실학자이자 조선 최고의 에세이스트이자 독서가의 글이지만, 딱딱하거나 어렵지 않고, 소소한 일상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진리를 쉽게 그리고 있어 참 좋았다.

사소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일상을 만드는데, 정작 우리는 그 매일 지나치는 소소함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살면서 기쁘고 행복한 일보다 뜻대로 되지 않고,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날들이 더 많은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바로 그런 순간에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 바로 소소한 일상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이 책을 통해서 이덕무의 따뜻한 문장들을 만나다 보면 사소하고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만나는 것처럼 누군가의 일생을 좌지우지할만한 특별한 사건이란, 어쩌면 평생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루하루 마주하게 되는 작은 순간들, 추위에 얼어붙은 풍경 속에서, 갓 내린 향긋한 커피 향기 속에서, 모처럼 날이 풀려 따스해진 햇살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들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런 순간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지 않고,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섬세하게 그 가치를 발견하는 이덕무의 문장들에는 '위로' 그 이상의 것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생활 속 잡감을 거리낌 없이 글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일상의 미학이다. 일상은 그냥 두면 지나가 버리는 순간에 불과하지만, 글로 옮겨 담으면 색다른 의미와 가치로 영원히 남게 된다. 이덕무는 추운 겨울 날, 늦은 밤에서 이른 새벽까지 불평과 화평 사이를 오간 잡감의 조각들을 이 글에 묘사했다. 이러한 잡감이 하루 이틀의 일이겠는가? 아마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밤 동안 자신의 머릿속과 마음속을 오고 갔으리라. 어디 이덕무만 그러했겠는가? 아마도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비슷한 심정과 감정의 기복을 겪었으리라.

이 책에 소개되는 글들은 크게 여섯 가지 테마로 나뉘어 있다. 우선 첫 번째는 이덕무가 보고 느낀 그대로 진경을 표현하고 묘사하는 글들이고, 두 번째는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소소한 생명체들의 풍경에 대해, 세 번째는 그가 공부하고 생각하는 것들의 가치관이 고스란히 보여지는 글들, 네 번째는 정직하고, 자유로운 그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글들, 다섯 번째는 어른들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어린아이의 솔직함과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지혜에 대해, 여섯 번째는 그가 생각하는 참된 문장과 독서의 가치를 보여주며 그가 온몸으로 글을 쓰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글들이 소개되어 있다. 덕분에 이덕무의 문장들이 지닌 가치가 그저 몇 백 년 된 고전으로서의 그것 만이 아니라는 점이 고스란히 와 닿는다. 이 글들을 통해 한 사람의 생생한 삶과, 온 힘을 다해 살아냈던 일상을 느끼게 되고, 이것은 바로 지금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공감과 위로를 전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매 순간이 너무 바빠 지치고 스트레스 가득한 내 삶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내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는 듯한 느낌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고단했던 청년 시절 자신을 이끈 힘을 이덕무의 글에서 얻었다고 고백하듯 그의 문장이 가지고 있는 울림과 온도에는 특별한 무엇인가 있다. 좋은 문장을 만나면 삶의 온도가 바뀐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서, 이 책의 어느 페이지나 아무렇게 들춰서 이덕무의 문장들을 읽어 보자. 어느 새 당신의 어깨 위에 놓여 있던 묵직한 삶의 무게도, 쫓기듯 달려가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했던 메마른 그것도 조금씩 툭툭 털어낼 수 있을테니까. 그러다 보면 우리의 삶의 온도도 조금씩 바뀔 지도 모르겠다. 머리나 가슴 어느 한 쪽만이 아닌 온몸을 다해 써낸 정직한 문장만이 줄 수 있는 무언의 위로를 오늘도 지친 당신에게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