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팩스 부인과 꼬마 스파이 스토리콜렉터 61
도로시 길먼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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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이 저희에게 꼭 필요하긴 하지만 이 임무는 이전 임무들하고는 다르다고 미리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이건 택배 일이 아닙니다.”

폴리팩스 부인이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승진된 거로군!”

카스테어스가 껄껄 웃었다. “그런데 연봉은 안 오르고 위험도만 오를 것 같습니다. 폴리팩스 부인, 이 위험천만한 러시안룰렛에 아직도 거부감이 없으신지, 아니면 생각이 바뀌셨는지 궁금하군요."

최고령 CIA 비밀 요원 폴리팩스 부인의 활약상을 그린 이 시리즈가 벌써 네 번째 이야기 모험을 떠난다. 멕스코, 터키, 불가리아에 이어 이번에는 스위스이다. 폴리팩스 부인은 거실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고난도 요가 자세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이웃인 하츠혼 여사가 속달 우편물이 왔다며 전달해준다. 이름도 모르는 사위가 그녀를 위해 특별한 병원에서의 요양을 준비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카스테어스 부장과 보좌관 비숍의 연락으로 그녀의 이번 임무에 대해 전달받고, 그녀는 스위스로 떠나게 된다. 몽브리종은 의료 시설이면서 전 세계 부자들이 휴식과 요양 목적으로 모여드는 호텔 같은 곳이었다. 특별하고도 위험한 물건을 도둑맞았고, 그것이 몽브리종에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곳에 미리 잠복해 있던 요원은 죽은 상태, 어쩌면 이번 임무는 생각보다 위험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폴리팩스 부인은 망설임 없이 새로운 임무에 도전한다.

 

자연에 둘러싸인 조용한 호텔식 병원에서 휴양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고 있지만, 부인의 진짜 목적은 위험한 물건을 찾아내고, 그것을 빼돌린 도둑이 누구인지 파악해야 하는 것이었다. 폴리팩스 부인은 특유의 친화력과 관찰력으로 그곳에 투숙하고 있는 사람들과 조금씩 친분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한 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남자아이를 만나게 된다. 깡말랐지만 강단 있어 보이고, 검은 얼굴에서 눈만 엄청나게 커 보이는 소년은 다짜고짜 그녀에게 자신과 친구하지 않겠느냐며 나타난다. 그런데 점점 소년의 행동에서 뭔가 수상쩍은 기색과 이상함을 감지한 폴리팩스 부인은 아이가 겁에 질려 있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과연 그녀는 소년을 둘러싼 이상한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한 것일까. 베테랑 요원조차 찾아내지 못한 도둑의 실체는 알아낼 수 있을까. 충격적인 죽음의 현장을 목격하고, 냉혈한 살인범에게 쫓기고, 긴박한 납치극과 총격전에 이르기까지 버라이어티한 첩보 드라마 속에서 이번엔 폴리팩스 할머니가 어떤 활약을 보여줄까.

 

 

"바로 그거야, 그래.... 통제 없이."

"그렇지만.... 그건 무서운걸요!" 코트가 외쳤다.

폴리팩스 부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싸우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덜 고통스러워. 그리고 삶을 마치 상차림처럼 딱딱 맞게 배치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즐겁고. 애초에 그건 어차피 가능한 일도 아니잖아.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두고 본다는 건 정말이지 퍽 짜릿한 일이야."

처음 우리의 폴리팩스 부인을 만났던 날로 잠깐 돌아가보자. 60대 중반이 된 평범한 할머니, 남편이 먼저 죽은 뒤로 혼자 몸으로 아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살아온 어느 날,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 누구에게나 푹.하고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는 허황되어 보이는 꿈을 직접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이 되자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가 지역구 의원을 만나고, 이후 버스에 올라 CIA 신청사가 있는 곳으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혹시 스파이 필요없냐고. 당연히 담당자는 황당함에 입을 쩍 벌리고, 설마 진심이냐고 멍하니 중얼거린다. 독자인 나 역시 마찬가지 기분이었다. 스파이라는 게 그렇게 무작정 찾아가서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할머니. 라고 말하고 싶었던 그런 기분이랄까. 그런데, 조그만 우연들이 겹치고 마침 그녀가 딱 필요한 임무가 생기고, 폴리팩스 부인은 그녀의 오랜 소원대로 스파이가 되어 멕시코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후 벌어지는 이야기는 황당무계하다고 느껴질 만큼 유쾌 발랄했다.

 

그렇게 시리즈를 거듭할 수록 그녀의 뛰어난 임기웅변과 호기심 많고 오지랖 넘치는 성격에 나도 모르게 동조해서 응원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무대포로 천진난만하게 이 일에 뛰어 들 때부터 알아봤지만, 공포에 굴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 그 특별함이야말로 세월의 무게만큼 나이를 먹은 '할머니'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순진해서 어수룩해 보이다가도,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어른이 젊은 사람 앞에서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지'라고 세월만큼의 현명함과 노련함을 보이는 이 특별한 캐릭터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무도 명랑 발랄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가의 엉뚱한 그녀라서 전형적인 모습의 스파이와는 한참 동떨어져있지만, 바로 그 부분이 이 시리즈만이 줄 수 있는 기발한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어떤 순간에서도 명랑 발랄하고, 무한 긍정의 마음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어제까지 내 곁에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시체가 되어 버리고, 자신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쫓기고,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타국에서 어떤 행동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폴리팩스 부인은 말한다. '어떤 일은 즐겁고 어떤 일은 전혀 즐겁지 않지만, 당연히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도 없다'고 말이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나도 그녀처럼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멋진 할머니로 나이를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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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3. 화폐 - 세상 모든 것의 기원 오리진 시리즈 3
윤태호 지음, 홍기빈 교양 글, 조승연 교양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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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값을 해야지, 몸값을 해야지, 쉽게 말은 하지만, 그게 얼마여야 하는지 아무도 몰라. 하지만 누구나 자기의 몫을 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 앞으로 부여될 몫을 위해 준비하기도 하고 아직 혼란스러워 하며 제 몫을 찾아 나서기도 해. 그런데너는 어떤 몫을 하고 있니?

 

전체 100권으로 기획된 '오리진' 시리즈는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을 탐구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1권 보온에 이어 2권은 에티켓 편에 이어 3권은 화폐 편이다. 보온과 에티켓 모두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특히나 이번 시리즈가 기다려졌던 것은 바로 '화폐'에 관련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비트코인과 가상통화에 관한 뉴스 보도가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슨 주제든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는 오리진 시리즈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화폐'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면 좋을 것 같다. 뭐든 그 기원을 알게 되면 사실 매우 간단할 수도 있는데, 사실 본질을 찾아서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봉황은 그가 맡고 있는 매장의 매출이 현격히 떨어져졌다고 상사로 부터 한 소리 듣는다. 당신이 받아가는 월급은 전부 남이 뛰어서 벌어온 돈이라고. 자기 몫을 하라고. 그러면서 오늘은 밥값, 몸값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내근을 하며 짐을 나르라고 지시한다. 나선녀는 봉투 때문에 아래층 가게에 돈을 물어주고 돌아와서 생각한다. 아무래도 저 기계를 팔아야겠다고. 때로는 기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지만, 봉투가 이 집에서 자신의 몫을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봉투가 온 뒤로 전기 요금이 보름 만에 무려 백사십오만원이나 나오고 만 것이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감당이 안 되겠다고 당장 데리고 나가서 팔아 버리라고 소리치는 아내의 기세에 밀려 봉황은 봉원을 데리고 전자 상가로 간다. 봉투를 가족처럼 대할 때는 언제고 이제 돈이 많이 들어서 내다 팔겠다고 하니 봉원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난 돈 많이 안 들어서 키우는 거야?"

"아니야! 그런 말이 어딨어."

"나 키우다 돈 많이 들면.... 버려?"

 

봉황은 어린 아들의 말에 할 말을 잃는다. 돈... 돈이 뭐길래... 겨우 전자 상가에서 가게 한 집을 찾아갔지만, 봉투를 녹여서 고철로 팔겠다는 주인의 말에 화가 난 봉황은 봉투를 절대 팔지 않겠다며 문을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하숙집의 과학자들과 봉투의 충전과 관련한 전기 요금 문제에 대해 의논한다. 과학자들은 태양광 발전기를 알아보고 있다며, 봉투는 절대 팔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오늘날에는 돈이 동전과 지폐에서 신용카드, 가상화폐 등의 보이지 않는 형태로진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숫자로 세상 만물을 표현하는 하나의사고방식이며, 공동체가 합의한약속이고, 하나의사회적 기술로서 기능한다는 돈의 근본은 최초의 기원에서 달라지지 않았다. 돈은 기원에서부터 사물 이상의 의미를 지녔으며, 새로운 형태의 등장보다는 그 기원이 더 강력해지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돌아온 집에서 봉투는 집안 일을 하나씩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몫을 해내려고 노력하고, 봉원의 성적으로 고민하는 걸 본 이수재는 학원보다 훨씬 저렴한 금액으로 봉원의 과외를 해주기로 한다. 자신들의 월세를 세 과목 학원비로 대체하기로 한 것이다. 주인집 할머니는 분식집에서 김밥으로 식사를 하는 조건으로 관리비를 대체해주기로 하고, 주인집 딸은 유치원 수업을 추가로 해주는 걸로 과학 교사 계약을 연장하기로 한다.

 

 

 

 

 

 

2부 오리진 교양 편이 되면 '돈'이라는 사회적 기술에 대한 기원부터 만물을 측정하는 가치척도로서의 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돈이란 개념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고, 물물교환의 시작에서부터 화폐의 기원이 된 역사적 사실까지 알려주고 있다. 무엇보다 고대의 법전에서 돈을 교환 과정에서 선택된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이나 '약속'으로 보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오늘날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사회적 기술이 바로 '돈'이다. 이러한 돈에 대한 이해를 역사학, 인류학, 고고학의 지식을 통해서 살펴보면서 돈의 기원과 발전과 본질이라는 수수께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점점 더 돈이면 다 되는 각박한 세상이 되어 가고 있지만, 이 책을 통해 돈이 우리의 모든 삶을 장악하지 않도록, 돈을 넘어 더 좋은 삶을 향해 한 걸음 내딛게 되는 계기가 되면 좋을 것 같다.

 

 

 

 

그 동안 세 편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미래에서 온 AI 로봇봉투 21세기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열의 의미와 보온의 중요성을 깨닫고, 비활성화된 하나의 '생각' 중에 '연민'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고, 사회에서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습득해야 하는 생존 기술이자 본능이라는 에티켓에 대해서도 배웠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는 누구나 자기가 쓰고 있는 하루의 가치만큼, 혹은 밥을 먹는 밥값, 몸값 등 자신의 몫을 해내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배우고, 인생에서 치러야 하는 비용과 대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다음 편인 '상대성 이론' 에서는 또 어떤 새로운 정보를 배우게 될 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윤태호 작가의 '오리진' 시리즈에서는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을, 누구나 살면서 생각해보거나 고민해봤을 만한 부분들을 그저 일상 속 스케치로 쓱쓱 그려 보여준다. 5~6세 정도의 지능을 가진 AI 로봇 '봉투'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게 되고, 이해하고, 배우게 되는 그 과정들이 우리의 가슴 속에 있는 뭔가를 건드리기도 한다. 수많은 정보와 지식으로 목표한 백 권에 다다랐을 때 그려내고 싶은 마지막 이야기는 결국 '사람'에 대한 것이라고 했던 윤태호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앞으로 계속 이어질 시리즈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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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마음
톤 텔레헨 지음, 김소라 그림, 정유정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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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공평한지도 모른다. 어쩌면 너무 공평해서 코끼리만 넘어지고 다른 이들은 아무도 넘어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이 세상 모든 것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공평한 일인지도 모른다.

 

코끼리는 매일 아침 생각한다. 앞으로 다시는 나무에 오르지 말아야지, 결국 또 오르긴 하겠지만, 다시는 나무에서 떨어지지 말아야지. 그런데 다시 나무에 오르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그럼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도 없고, 그래서 아플 일도 후회할 일도 없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끼리는 또 나무에 오른다. 그리고는 곧 균형을 잃고 넘어져 쿵 하고 세게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 대체 코끼리는 왜 나무에 올라 가려는 걸까.

 

어른을 위한 동화 소설 <고슴도치의 소원>에 이은 두 번째 이야기 <코끼리의 마음> 역시 작은 숲 속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전작에서는 혼자 사는 외로운 고슴도치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기 위해 편지를 써놓고는 계속 고민을 했었다. 스스로에게 자신은 정말 외롭지 않다고 거울을 보며 말을 건네보기도 하고, 보고 싶은 동물 친구들을 생각하며 편지를 쓰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한 발 다가가기가 너무도 두렵고, 어렵기만 했다. 소심한 고슴도치에 이어 이번에 등장한 건 대책 없이 무모한 코끼리이다. 세상에, 코끼리가 나무에 올라간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받고 놀림 당하고 결국엔 후회하더라도, 그저 나무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말한다.

 

 

"코끼리야, 설명 좀 해줘, 왜 자꾸 나무에 올라가는 거니?"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어느 날, 코끼리는 다람쥐 집에서 차를 마시며 묻는다. 다람쥐야, 네가 만약 나라면.... 그래도 올라가고 싶을 것 같니? 사실은 나무에 잘 오르지도 못하고, 결국 떨어져 아플 걸 알면서도 말이야. 코끼리는 사실 다람쥐의 대답이 궁금했던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니까,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까.. 어쩌면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코끼리는 나무의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런 먼 곳이 보인다면 너무 기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나뭇가지들 사이로 쿵 하며 떨어지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온몸이 쑤시고 여기저기가 죄다 부러지고, 결국 자신의 소원대로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는 건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혹시 나만 떨어지는 게 아닐까. 나 말고는 다들 기어서 내려가거나, 날아가거나, 굴러서 내려가거나, 둥둥 떠내려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동안 올랐던 나무들은 모두 공평했을까. 그런데 과연 공평하다는 건 어떤 걸까. 코끼리는 점점 생각이 많아 진다.

 

 

 

코끼리는 그렇게 친구들에게 "네가 나라면, 너는 어떻게 하겠니?" 라는 질문을 한다. 그리고 모두들 각자의 입장에서 "내가 코끼리라면...." 어떨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이 작품의 전체 스토리가 된다.

 

참새는 생각한다. 내가 코끼리라면, 나는 우선 나무에 오르고 떨어지는 법을 배울 거야. 곰은 케이크를 배불리 먹어서 오르기도 전에 이미 땅에서 넘어질 테니 나무에서 떨어질 일도 없다고 말한다. 나무좀은 생각한다. 나라면 나무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으로 올라갈 텐데.. 그래서 떨어지는 대신 미끄럼을 타고 내려올 텐데. 바닷가재는 생각한다. 내가 코끼리라면, 나를 떨어지게 한 나무들에게 복수할 거라고. 그렇게 동물 친구들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 코끼리는 잠 못 이룬 밤에 일기장에 뭔가 끄적거린다. 나는 깨닫고 싶지 않고, 맞서고 싶지 않고, 무언가를 알고 싶지 않고, 계산하고 싶지도 않다고. 나무에 오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떨어지는 건 나만 할 수 있는 예술 작품같은 거라고. 어쩌면 내가 떨어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그냥 코끼리이고, 그냥 나무에 오를 뿐이라고 말이다.

 

 

 

주위에서 누가 뭐라든 나만의 길을 계속 걸어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도 어렵고, 그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물론 무작정 나무에 오르기를 시도하며 계속 떨어지는 코끼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떨어짐은 매번 통증을 동반하고, 누군가의 우려 섞인 걱정을 들어야 하고, 스스로에게도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아야 하니 말이다. 물론 누군가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왜 너는 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거지? 왜 굳이 실패를 해가며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거지?

 

 

 

 

 

 

 

 

 

 

 

 

 우리가 뭔가를 하든, 하지 않든 인생은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어도, 반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도, 오늘이 가면 내일은 오게 마련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새로운 길이 두려워 망설이면서 늘 안전한 길로만 가거나, 넘어지고 실패하면서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해 도전해 보거나. 중요한 것은 스스로 정말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에 있다.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고, 흘러가 버린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내 삶의 주인공은 바로 나이니 말이다. <고슴도치의 소원>을 읽고 나서는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랬어. 라고. 토닥토닥 위로해주고 싶은 기분도 들고, 안쓰러워 보듬어 주고 싶은 기분도 들고, 다들 그런거라고 괜찮다고 말해주고도 싶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코끼리의 마음>은 반대로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코끼리에게 내가 용기를 얻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세상 모든 것은 제각각 유일한 존재라고 말하는 코끼리의 마음이 고스란히 와닿아서 어딘가 뭉클하기도 했다. 구제불능, 제멋대로에 대책 없이 무모해 보이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건 확실히 뭔지 알고 있는 코끼리를 통해서 ‘나는 나’라는 당연한 사실이 특별한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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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 공주 살인 사건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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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늘 말하지만 인터넷에 올리면 안 되는 거야.

노리코 씨 사진이 공개된 순간 팬 클럽이 생겼을 정도로 이상한 세상이니까. 사건의 명칭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는 '시구레 계곡 여사원 살해 사건'이라고 하는 걸 '백설 공주 살인 사건'이라고 멋대로 바꾸고 노리코 씨를 '미스 백설' 또는 '백설 공주'라고 부르잖아.

화장품 회사에 근무하던 미모의 여사원이 계곡에서 칼에 수 차례 찔리고 불태워진 참혹한 사체로 발견된다. 이야기는 그녀의 회사 동료들의 목소리로 들려지는데, 그 내용을 바탕으로 주간지 기자가 SNS에 내용을 퍼뜨리고 그로 인해 특정 인물이 용의자로 만들어 진다. 주간지 기자는 용의자의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직장 동료와 동창생, 마을 주민들이 각자 자신이 기억하는 그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살해된 미키 노리코와 용의자로 지목된 시로노 미키는 입사 동기라 회사에서 사사건건 비교되곤 했다. 거기다 수수한 외모의 평범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시로노 미키가 잘생긴 상사와 사내 커플이었는데, 그 남자 마저 미키 노리코에게 빼앗기는 바람에 열등감과 질투에 시달리다 살인을 저지른 게 아닐까 사람들은 생각한다. 용의자로 몰린 시로노 미키는 사건 다음날부터 부모님이 아프다는 이유로 계속 회사에 나오지 않고 있는 상태여서 누구도 진상은 알 수가 없다.

 

한 가지 사건에 대한 다각적인 시점을 볼 수 있는 인터뷰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작품이야 많이 있어 왔기에 특별하진 않다. 미나토 가나에 외에 온다 리쿠나 미야베 미유키도 이런 구성의 작품들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일본 미스터리 작품에서 자주 사용되는 구성이기도 하다. 한 사건에 대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당시의 모습 혹은 한 인물에 대한 그것은 각기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들의 증언들은 같은 상황에 대해 묘하게 엇갈리게 진술이 되고,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점점 진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실은 오리무중이 되어 간다. 모두들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증언하지만, 같은 시간, 공간에 있었던 그들은 저마다 다른 것을 보고, 느끼고 그렇게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석한 것이 '실제 벌어진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억으로 구성된 과거와 타인의 기억으로 구성된 과거가 판이하게 다르다면, 진실은 대체 무엇일까.

 

"아무리 그래도.... 유나 사진을 돌린 사람은 물론 모리타겠지만 그렇게 된 건 시로노의 저주 때문이야. 백설 공주를 살해한 것도 시로노는 아니지만 그 역시 시로노의 저주 때문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재밌지 않아? 동화 속 백설 공주에게 독이 든 사과를 먹인 것도 마법사 왕비였잖아."

이 작품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당사자인 시로노 미키의 진술이 이어진다. 살해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용의자로 지목된 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것은, 이 작품이 주목하는 것이 '백설공주'가 아니라 그녀를 죽인 '마녀사냥'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래서 네티즌들의 신상털기, 이슈거리만 찾는 무책임한 언론, 근거 없는 소문과 억측들이 부풀어오르며 마치 그것을 진실처럼 만들어 버리는 SNS의 무시무시함을 새삼 깨닫게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들에서 일관성있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인간의 내면과 그 속에 숨겨진 어둠, 그리고 타인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질투와 욕망으로 인한 관계의 파국이다. 이 작품 역시 인물들의 내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그것을 끄집어내는 예리한 시선이 여전하다. 다만 기존의 거침없고, 파격적인 소재와 어딘가 불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이야기들에 비해서는 술술 읽히고 있어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은 조금 덜하지만, 대중적인 코드의 드라마로서는 무난한 작품이었던 것 같다.

 

독특한 것은 작품의 후반에 부록이라는 형식으로 '시구레 계속 여사원 살해 사건'의 관련 자료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분량이 거의 팔십 여 페이지나 된다. 인물들의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었던 부분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의 이 자료에는 커뮤니티 사이트의 실시간 댓글과 사건이 보도된 기사와 주간지의 특집 기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부록의 내용을 다 읽고 나서야 우리는 살인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있는데, 일단 분량이 너무 많아 긴장감이나 임팩트를 주기엔 좀 아쉬운 구성이지 않나 싶다. 차라리 SNS에서 오간 댓글과 주간지 기사들을 인터뷰 사이사이에 배치하는 것이 더 소설로서의 재미를 주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일부러 작가가 인터뷰 내용만큼이나 긴 부록을 통해 완성되는 결말로 소설을 구성했다면 그것 또한 이 작품의 특징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은 제18회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초청작백설 공주 살인 사건원작 소설이기도 한데, 작품이 발표되던 해에 바로 영화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그만큼 대중적인 코드로 진행되는 작품이라, 그 동안 미나토 가나에의 다소 불편했던 작품들이 어려웠던 이들에게는 조금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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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스맨
루크 라인하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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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머릿속에서 온갖 가능성이 폭발했다.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던 권태는 이제 불필요해진 것 같았다.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하며 점점 넓어지기만 하는 새로운 루비콘 강을 철벅철벅 금욕적으로 건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지금의 삶이 죽은 것처럼 지루한들 무슨 문제겠는가? 새로운 삶이 또 있는데, 만세!

정신과의사 루크 라인하트는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와 자신의 심리 치료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감정들이 쌓여 이해할 수 없는 분노가 솟았고 눈 앞에 보이는 주사위를 보며 생각한다. 만약 저 주사위 윗면이 1이라면 아래층으로 내려가 동료의 부인을 강간하자고. 주사위는 던져진다. 1이었다. 처음엔 주사위의 결정에 충격을 받아 잠시 꼼짝도 못했지만, 이내 침실에 있는 아내에게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선언하고 아래 층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동료의 아내에게 말한다. "당신을 강간하려고 내려왔어요." 대체, 이 남자 제정신인 걸까? 주사위 눈이 1이 나올 확률은 겨우 6분의 1에 불과했다. 게다가 주사위가 그 순간 자신의 눈에 띌 확률은 아마도 100만분의 1쯤 될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강간을 저지른 것은 운명의 지시임이 분명했고, 고로 자신은 무죄라고 생각하는 남자라니.

 

치어리더 출신 아내와 귀여운 두 아이를 가진 가장이자 정신과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멀쩡한 남자의 삶이 주사위로 인해 조금씩 달라진다. 처음에는 주사위가 그의 삶에 그리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저 정상적인 자신이 그다지 내켜 하지 않는 대안들을 선택할 때 주사위를 이용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주사위가 그의 환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을 때부터 상황은 조금 더 걷잡을 수 없이 변화되기 시작한다. 그 동안 정신과의사로서 그는 이해심 깊고, 너그럽고,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과 잔인성과 헛소리를 받아주는 성자처럼 굴어왔다. 그런데 주사위를 핑계로 환자들의 초라한 약점이 눈에 띌 때마다 노골적으로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더니, 그 동안 억눌려온 충동을 발산하며 새로운 세계가 열린 듯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는 주사위를 한 번 던질 때마다 자신이 새로 태어나는 것 같다고 느낀다.

 

"이 위대한 망할 놈의 기계 사회는 우리를 모두 햄스터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세계를 보지 못해요. 오로지 한 가지 역할만 할 수 있는 배우라니, 그런 헛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무작위 인간, 주사위족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주사위족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주사위족이 생겨날 겁니다."

루크는 수동적인 태도와 자신만의 공상에 빠져 있는 환자에게 당신은 강간이나 절도나 살인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리고는 진료실 밖에 새로온 접수원이 예쁘지 않냐고. 그 여자를 강간하라고 시킨다. 사실 그 직원은 중년의 콜걸로 루크가 그 환자와 데이트를 시키기 위해 일부러 고용한 사람이었다. 그런 식으로 벌어지는 이해하기 힘든 진료와 그가 여러 사람들과 벌이는 성에 대한 실험들, 스스로를 주사위맨이라 칭하면서 마치 주사위 인생을 종교라도 되는 식으로 환자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믿도록 만드는 이 작품의 스토리를 이해하거나 공감하기는 다소 어렵다. 게다가 개인의 작은 일탈로 시작했던 루크의 '주사위'가 후반부로 갈수록 각지에 주사위 센터가 설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사위족이 되어 가는 식으로 일종의 종교처럼 퍼져나가는 단계에 이르면,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잣대에 대한 기준마저 모호해지게 된다. 과연 이들이 벌이는, 사회적 통념상 허락되지 못할 행위나 비도적적이고 무질서한 행동들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이해해야 할 지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작품이 바로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사소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어떤 선택은 우리 삶의 방향을 완전히 달라지게 만들기도 하니, 일상의 그 수많은 선택들이 쌓여 나라는 한 인간을 만든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더라도 이 작품은 '컬트 소설'임이 분명하다. 바로 그 선택이라는 것의 주체를 인간이 아닌 주사위를 통한 무작위성의 우연에 기대도록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주사위 눈 개수에 맞춰 여섯 가지 선택지를 쓰는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지만, 최종 결정을 해주는 것은 주사위를 통한 랜덤의 우연이고, 그 결과를 행동으로 옮겨 그것을 운명으로 만드는 것은 또 자신의 의지이다. 모든 괴로운 일을 주사위의 손에 맡겨서 주사위가 강간을 지시하면 강간하고, 금욕을 지시하면 금욕하고, 낯선 나라로 날아가라고 하면 그곳으로 간다. 과연 이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

 

이런 작품이 세계 60개국에 번역되어 200만 부 이상 판매되고, 출간 4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20세기 최고의 컬트소설로 추앙 받는 이 현상이야말로 사람들이 주사위족이 되어 간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상하지만 색다르고, 단순하지만 도발적이고,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강렬한 작품이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권태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당신에게 이 작품을 추천한다. 극중 루크 처럼 당신의 삶도 송두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할 수도 있다. 금기를 깨트리는 것이 처음에야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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