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왕이 온다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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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참아도 되는 일은 없단다."

무슨 뜻인지 몰라서 가만히 있자 할머니가 입술을 떨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계속 참기만 하면 마음속에 나쁜 게 쌓이는 법이지. 오랜 세월이 지나면 그 대가가 온단다. 계속 참는 게 좋은 일은 아니야. 나는 참았어, 그러니까 용서해줄 거야.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란다. 세상은..... 이 세상은."   p.31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제22회 일본 호러소설대상 대상 수상작으로, 미야베 미유키, 기시 유스케가 극찬한 작품이다. 사와무라 이치의 충격적인 데뷔작은 평범한 현실 속 뒤틀린 인간 심리를 건드리며 극한의 공포를 끌어내고 있다. 평범한 일상을 파괴해가는 정체불명의 괴물보기왕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딩동. 초인종이 울린다. 그러나 대답하면 안 된다. 문을 열어줘도 안 된다. 절대 그것이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그것이 온다.

다하라 히데키는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방학 때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홀로 집을 보다 이상한 경험을 한다. 누군가 벨을 누르고 가족의 이름을 불렀는데,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면 안 된다고 말을 한다. 이후 중학교 3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로부터 할아버지의 고향에서 전해 내려오는 요괴, 보기왕에 대해서 듣게 된다. 그게 오면 절대로 대답하거나 들여보내선 안 된다고. 문을 열면 잡혀서 산으로 끌려간다고. 기이한 전설이야 어디에나 있었으니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린다. 그날 오후에 할머니 집에 찾아왔던 회색 그림자와 그때 느꼈던 공포가 고스란히 다시 기억이 난 것이다. 그리고 서른 두 살, 가나와 결혼을 하고 이듬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회사로 누군가 그를 찾아온다.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아내의 배 속에 있는 아이 치사의 이름을 대면서. 하지만 로비에 그를 기다린다던 손님은 보이지 않았고, 그 방문을 알려준 회사 후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부상으로 입원하게 되고 점점 상태가 나빠진다.

 

"인간은 옛날부터 생각했지. 자신과 똑같이 생긴 건 무섭다고. 봐서는 안 된다, 보면 죽는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왜일까?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어. 적어도 알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자신의 추악함과 교활함, 나약함, 어리석음을 자기 눈으로 보는 건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롭기 때문이지. 선생을 보면 지긋지긋할 만큼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어. 덕분에 지금 내 기분은 최악이야."    p.267

이후에도 히데키의 주변에서 이상한 전화나 메일이 오는 등 괴이한 일이 반복된다. 그는 직감적으로 생각한다. 오래 전 그날 할머니 집을 찾아온 손님이 25년이 넘게 흐른 뒤에 나를 찾아오려고 하고 있다고. 할아버지 고향에서 전해지는 보기왕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말이다. 누가 들으면 망상이라고, 어린애 같은 공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요즘 세상에 괴물이라니 무슨 말이냐고. 하지만 실제로 회사 후배는 뭔가에 물려서 오랫동안 입원한 끝에 회사를 그만두었고, 집에 괴이한 전화가 걸려왔으며, 집 안의 부적이 모두 찢어지는 등 아내와 딸이 끔찍한 일을 겪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히데키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래서 민속학 준교수인 옛 친구의 도움을 받아 초자연 현상에 관한 글을 쓰는 오컬트 작가 노자키를 만난다. 노자키는 히데키에게 필요한 것이 주술과 퇴마라는 사실을 깨닫고 히가 마코토라는 영매사를 소개해준다. 과연 그들은 '보기왕'이라는 알 수 없는 괴물의 정체를 밝히고, 왜 히데키의 주변에 나타나는 것인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인가.

여기까지가 1장의 내용이다. 히데키가 화자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1장이 끝나면, 2장에선 히데키의 아내 가나, 3장에서는 오컬트 작가 노자키가 화자로 나선다. 사실 1장의 내용만 보자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호러 소설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2장으로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다. 우리가 읽어 왔던 그 모든 무서움의 근원을 파헤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에 생겨나는 틈'에서 비롯된 공포를 그려내고 있어, 단순히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실재하지 않는 괴물이라는 존재로 인한 무서움보다 더한 작품이었다. 괴담이나 호러와 관련된 작품을 꽤 읽어본 편인데,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이 특별했던 이유는 아마도 다 읽고 나서공포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상대에 따라 같은 사실도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입장의 차이를 이용한 반전도 훌륭했고, 화자를 달리한 구성도 탄탄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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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득 2018-11-15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모처럼 호러 대상에 걸맞는 작품을 만난 것 같았어요.^^

피오나 2018-11-16 14:40   좋아요 0 | URL
그죠? 저도 오랜만에 읽은 호러 소설이었는데 만족스럽더라구요. 표지만 빼고요 ㅋㅋ
 
아저씨 고양이는 줄무늬
무레 요코 지음, 스기타 히로미 그림, 김현화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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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서 개나 고양이뿐만 아니라 동물의 재밌고 불가사의한 행동을 촬영한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인간 외 모든 생물의 사고회로가 알고 싶어진다. 한때 화제였던 야구 방망이를 붕붕 휘두르는 곰, 꼿꼿이 서 있는 레서판다, 관객을 향해 수중에서 내도록 직립해 있는 바다표범, 자식이 가리비를 덥석 잡으면 손뼉을 치는 아빠 해달 등, 그런 동물들을 보면 궁금해서 좀이 쑤신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알고 싶다.  p.21~23

이 책의 주요 등장 캐릭터인 시마짱은, 길고양이지만 모습과 하는 행동은 딱 도둑고양이 같다. 몸은 땅딸막하고 짙은 갈색과 검은색의 줄무늬에, 얼굴이 호빵 만한 데 비해서 눈은 단춧구멍만하다. 저자에게 요 몇 년간 불쑥불쑥 찾아오곤 했는데, 모습을 드러낼 때도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안녕들 하쇼?'라는 분위기를 풍긴다고 하니 대충 짐작이 될 것이다. 무뚝뚝하고, 매사에 심드렁하고, 단춧구멍만한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며 '뭐 좀 내놔보쇼.'라는 레이저를 쏘는 시마짱. 배가 고파도 다른 고양이가 먹다 남긴 건 냄새를 맡기만 하다 쌩하니 외면하기도 하고, 입도 고급이라 웬만한 음식은 줘도 쳐다보지도 않는 고양이이다. 이 책은 그렇게 다른 길고양이 처럼 밥을 얻어먹기 위해 애교를 부리는 일 따윈 결코 없는, 무뚝뚝함으로 완벽 무장한 아저씨 고양이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카모메 식당>, <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 등의 작품으로 만나왔던 무레 요코가 이번에는 줄무늬 아저씨 고양이 시마짱을 비롯해 그녀의 삶과 함께 해온 여러 동물 이야기들을 에세이로 펴냈다. 고양이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전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만 담겨 있는 책은 아니다. 길고양이로 시작해, 그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모기가 나오고, 동물원에서 만난 매력 만점의 원숭이도 등장한다. 어느 집에나 있던 목각 곰 이야기는 테디 베어와 동물원의 아기 곰 이야기로 이어지고,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동물들 이야기에, 산책 길에 만나는 여러 유형의 개들, 거기다 설치류인 카피바라까지 등장하며 그야 말로 '동물 에세이'로서의 면모를 한껏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자료관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 설치류 냄새가 난다." 하고 신이 났다.

옛날에 기니피그와 생쥐를 기르던 때의 배설물 냄새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입안에 가득 퍼지는 마들렌 냄새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생물들과 함께한 추억의 냄새였다.   p.125

무레 요코가 워낙 고양이를 사랑하는 작가로 익히 알려진 만큼 이 작품에는 길고양이의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주인공 아저씨 고양이 시마짱은 마치 페이지 바깥으로 쓱 튀어 나올 것만 같은 생생한 느낌이 들고, 시마짱의 그 무뚝뚝한 표정이 고스란히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시마짱 덕분에 이제는 길에서 마주하곤 하는 길고양이들의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무레 요코는 길고양이 시마짱의 일생을 이 유쾌한 에세이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동물과 가깝게 살아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뭉클한 기분이 들 것 같다. 인간과 동물의 진정한 교감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고 말이다.

나는 거의 평생을 강아지와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릴 적부터 강아지와 친숙하게 지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개를 보살피고, 개와 함께 생활을 했기에 그들의 언어에도 관심을 가지곤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행동의 의미는 뭔지.. 무레 요코가 인간 외 모든 생물의 사고회로가 알고 싶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더 그녀가 들려주는 동물들의 이야기가 와 닿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 속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일상을 큭큭 거리며 따라가다 보면, 동물도 엄연히 생각이 있는 존재이며, 그들 또한 존중해주어야 하는 가족이라는 점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개나 고양이, 혹은 그 외의 다른 동물을 한번이라도 키워본 이들이라면 다들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데다, 무레 요코 특유의 소소하지만 따뜻한 시선이 참 예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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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이상한 나라 - 꾸준한 행복과 자존감을 찾아가는 심리 여행
송형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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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 순간 자기 약점을 방어하고, 강점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어 한다. 제법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자기를 어필하여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싶어 하고, 어필하기 힘들 때는 조금 뒤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그래서 강점을 내세우기 힘든 자리에 있거나(면접 등) 자기보다 명백히 강한 사람 앞에 있으면, 긴장이 심해진다. 또 자신의 강점이 무엇인지 확신이 없는 사람은 말을 흐리고 자신을 아예 숨기려 든다.   p.81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로 시작하는 <가시나무>라는 곡의 노랫말을 아마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내 속엔 헛된 바람들과, 어쩔 수 없는 어둠과, 이길 수 없는 슬픔들이 가득하다. 그리하여 인간은 외롭고 또 괴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굳이 다중 인격이라는 질환으로까지 확대 해석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는 말이다. 사람의 내면은 여러 가지 인격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특정 상황에 적응한 캐릭터이기도 하고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이기도 하다. 또한 누군가를 따라 하거나 상상해낸 성격일 수도 있다. 집에서는 얌전했던 내 딸이 친구들 사이에선 나서기 좋아하는 리더로 변신하고, 동성 친구들 앞에서는 왈가닥 푼수 같은 성격이, 이성 친구 곁에선 내숭 덩어리가 되기도 한다. 회사에서는 자주 소리 지르는 무서운 상사였지만, 집에 와서는 세상 누구보다 다정한 아빠가 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사람들이 가식이거나 이중 인격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상황에 맞춰, 대상에 따라 얼마든지 대처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어야 사회 생활을 원만히 할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사실, 나 자신을 제대로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생각보다 자기 내면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보이지 않는 만큼 삶의 액셀을 더욱 세차게 밟곤 하는데, 그러다 보니 삶이 마치 브레이크 없는 차를 모는 것같이 불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속 가능한 자기 사랑과 행복, 자존감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한도전>, <톡투유>의 마음주치의로 활약한 정신과 전문의 송형석 박사는먼저 나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책에서나 자신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나에 대한 표면적인 사실들, 즉 나의 취향이나 인간관계, 감정을 풀어내는 방식 등으로 시작해, 종국에는 나에게 숨어 있는 이중적인 모습들,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보는 걸 방해하는 방어기제들,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근원적인 콤플렉스와 무수한 욕망들에 대해 하나하나 짚어본다.

 

인간은 이기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믿고 자신과 타인을 기만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정의와 도덕을 주장하는 사람과 대화를 해보면, 그와 어울리지 않는 융통성 없는 엄격함이나 내면의 분노가 명백히 느껴져 언밸런스하게 보일 때가 있다. 타인은 그 불균형을 쉽게 느끼지만, 본인은 왜 자신의 주장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실제로 도덕성의 커다란 부분은 자기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신중함에 있는데 말이다.   p.145

자기 자신을 분석하면 할수록 자신의 '의지' '진짜 욕망' 사이에 수많은 메커니즘과 사고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엇을 조절하고 수정해야만 내가 하는 그 '이상한' 행동을 바꿀 수 있는지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그 행동을 하고 싶다.' 이 두 문장 사이의 간극, 의지와 진짜 욕망이 바로 키포인트가 된다. 이 책은 우선 자신을 분석하기 위해 나를 관찰하는 방법부터 제시하고 있다. 지금 내가 가방에 넣고 다니는 물건은 무엇이며, 책상 위에 둔 물건은 무엇인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아도 좋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음식들을 나열해봐도 좋다. 자신의 일하는 스타일, 게임하는 스타일, 사람을 다루는 스타일 등 외부 세계를 다루는 방식 등은 비교적 같은 패턴을 띠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이런 부분들은 실제 생활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나를 관찰하고, 마음을 측정하는 것만으로도 미처 몰랐던 내 모습들을 하나씩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스스로에 대해 탐색을 하다 보면, 내 능력이나 성향이 어떠한지, 내가 집착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수많은 일상의 갈등이나 고민에 대처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고, 자신의 능력과 장점, 단점을 파악해 그에 맞는 커리어를 만들어가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음을 알아가는 것 자체가 자기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라면 누구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사회가 좋은 것이라고 강제로 만들어준 기준과, 자신의 진정한 취향 및 행복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 줄테니 말이다.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책과 함께라면 어렵지 않게, 당신도 '내 속에 있는 수많은 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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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남긴 증오
앤지 토머스 지음, 공민희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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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을 난 많이 봐왔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누군가 죽게 되면 온갖 지옥이 펼쳐진다. 난 그동안 해시태그로 RIP를 달고, 블로그에서 퍼온 사진을 텀블러에 올리고, 모든 탄원서에 서명했다. 누군가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을 본다면 가장 큰 목소리로 세상이 알게 하리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데 당사자가 되고 나니 말을 하기가 너무 두렵다.    p.41~42

열여섯 흑인 소녀 스타는 총과 마약이 난무하는 가든 하이츠에 산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스타를 백인들이 다니는 사립 학교에 다니게 했다. 덕분에 스타는 부유한 백인 친구들 사이에선 학교에 단 두 명뿐인 흑인으로 살아야 했고, 방과후 동네로 돌아오면 흑인 친구들로부터 잘난 체 한다는 오해를 받아야 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못하는 것처럼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당당했고, 진실했고, 긍정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파티에서 오랜 만에 만난 어린 시절 친구 칼릴을 만나 그와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순찰차가 차를 세웠다. 백인 경찰은 칼릴을 의심해 몸수색을 여러 번 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그가 순찰차로 돌아간 사이 칼릴이 차 문 앞으로 와서 스타에게 괜찮냐고 묻는 순간, 갑작스레 총소리가 들린다. ! ! ! 칼릴의 등에서 피가 튀었고, 그는 그렇게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죽고 만다. 반항도, 무장도 하지 않았던 칼릴은 대체 왜 죽어야만 했을까?

수사는 당연히 백인 경찰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간다. 그들은 칼릴이 마약 거래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내세우며 그가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경찰이 흑인의 위협에 두려움을 무릅쓰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처럼 여론을 몰아간다. 진실을 알고 있는 건 그날 밤 사건 현장에 있던 스타뿐이다. 이런 류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백인 경찰이 체포되지 않고 흐지부지된 사건이 처음인 것도 아니다. 당연히 가든 하이츠의 사람들은 킬릴의 억울함을 풀어 주자며 폭동을 일으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달라지는 것이 없으니까. 물론 현실은 그런다고 해서 크게 바뀌지는 않고 있지만 말이다. 스타는 고민한다. 현실과 맞서 싸울 것인가, 안전한 침묵을 택할 것인가. 그녀는 이것이 비단 자신과 칼릴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들과 같은 모습의 흑인들, 자신들처럼 느끼는 사회적 약자들 모두에 관한 거였다.

 

 

"맞아, 넌 용감해." 엄마가 포옹을 풀고 얼굴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엄마의 눈 속에 담긴 표정이 뭔지 설명할 수 없지만 엄만 날 잘 알았다. 그 눈빛이 날 감싸고 속에서부터 데워주었다.

"용감하다는 게 두렵지 않다는 뜻은 아니란다, 스타." 엄마가 말했다. "그 말은 두려워하면서도 헤쳐 나간다는 의미야. 그리고 넌 지금 그렇게 하고 있어."    p.337

이 작품의 제목은, 인종차별을 노래한 힙합 씬의 전설 투팍(2pac)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투팍은 말했다. '당신이 아이들에게 심어준 분노가 모두를 망가뜨린다(The Hate U Give Infants Fucks Everybody)'라고. 이 말의 앞 글자만을 따면 터그 라이프(THUG LIFE), 폭력배의 삶이다. 우리가 어릴 때 사회가 심어준 사상이 우리가 통제 불능이 되었을 때 오히려 사회를 공격하게 하는 거라는 이 말이 이 작품의 제목이 되었다. The Hate U Give, 당신이 남긴 증오. 불법적인 일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하층민의 삶, 사회적 편견과 증오가 그들을 폭력배 같은 삶으로 이끈다, 라고.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지만 여전히 사회 주류는 백인 남성이고 수없이 많은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나라이다. 소위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인종·계층에 대한 편견과 혐오는 사회 곳곳에서 차별로써 존재하며, 수많은 범죄와 부작용을 야기한다. 흑인이나 동양인의 감옥 수감율은 백인의 7배이고, 경찰로부터 총격을 당하거나 체포되는 비율도 두 배 이상 높다. 이 작품은 이러한 차별과 혐오에 대해서 그리고 있다. 매우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열여섯 소녀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서사 자체는 어둡지 않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며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굉장한 작품이다.

앤지 토머스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을 토대로 쓰였다고 한다. 그녀는 마약 판매와 총기 사건을 보면서 자랐고, 대학교 졸업반일 때 무장하지 않은 흑인 청년이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총을 맞고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과거를 말하기 시작했고, 그가 과거에 한 잘못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을 거라는 식으로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격노하며 미국 전역에 시위로까지 번졌고, 이 사건은 수많은 시민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고 청소년들의 인권 의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사건에서 비롯되어 탄생한 이 작품은 문학 에이전시에서 60번이나 원고를 거절당했지만, 출간이 되고 나서는 뉴욕 타임스와 아마존 1위에 오르고, 2017.2018 2년 연속 아마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 되었고,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투팍의 묘지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고 한다.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생각에 불을 붙일 수는 있다고 장담한다."

이 작품이 누군가에게 작은 불씨가 될 거라고, 세상이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될 거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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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뇌를 끌어안고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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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소리는 싫어. 들어봐요. 일정한 리듬이잖아요. 그게 싫어. 카운트다운을 하는 것 같아."

"카운트다운이라니?"

"........폭탄." 유카리 씨는 자조적으로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이 안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어요. 언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반드시 폭발하는 시한폭탄이."   p.16

해안가에 지어진, 모든 병실이 1인실인 부유층을 위한 요양 병원 '하야마곶 병원'. 이곳은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편안하게 마지막을 맞을 수 있도록 하는 호스피스도 겸하고 있다. 우스이 소마는 한적한 이곳으로 실습을 오게 된 신참 수련의이다. 그는 최근 몇 개월 동안 외과와 응급센터 등 힘든 과에서 연수를 받은 데다 짧은 수면시간을 줄여 공부하느라 몸이 좋지 않았다. 평온한 자연에 둘러싸인 이 병원에서 심신을 치료하라는 내과 과장 나름의 배려로 반 강제로 이 병원으로 실습을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우스이는 특별한 환자를 만나게 된다. 그보다 두 살 위인 스물 여덟의 나이로 최악의 뇌종양을 앓고 있는 환자, 유가리 타마키. 자신의 머릿속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있다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뇌가 속에서 조금씩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는 그녀. 유가리의 제안으로 대기 시간에 그녀의 병실 책상에서 공부를 하게 된 우스이는 점점 그녀와 친해지게 된다.

우스이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엄청난 빚을 지고는 애인과 도망갔다는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돈을 잔뜩 벌고 싶어서 의사가 되었고, 지금도 열심히 공부해서 미국에서 일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아직도 집안에 빚이 있었고, 돈이 없는 탓에 가족의 인생이 비참해진 거라고 생각했기에 오로지 돈과 출세에만 집착하며 살아왔다. 반면 유가리는 어린 시절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잃고 조부모님 손에 자랐는데, 3년 전에 조부모님들 마저 돌아가시고 나서 천애고아의 신세가 되었다. 조부모님이 대부호였고, 유언에 따라 엄청난 유산을 모두 물려받게 되었는데, 작년 초에 뇌종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만큼은 조금 사치를 부리기로 해서, 이 병원에 왔지만, 자신이 죽으면 유산을 상속받게 되는 상당히 먼 친척 때문에 외출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산을 상속받을 예정인 사람은 큰 빚이 있었고, 그녀가 한시라도 빨리 죽어서 돈을 받고 싶어 그녀에게 무언의 압박을 그 동안 가해왔던 것이다.

 

"......폭탄이라면 저도 가지고 있습니다."

"?" 유카리 씨가 미간을 찌푸린다.

"이제까지 연수를 통해 젊은 나이에 사고나 병으로 세상을 뜨는 환자를 여러 명 봤습니다. 그 중에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아주 평범하게 생활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보이지 않는 폭탄'을 안고 살아간다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p.114~115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로 평생을 돈과 출세에만 집착하며 살아온 남자, 우스이 소마, 상속받은 유산으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 머릿속에 뇌종양이라는폭탄을 안고 하루하루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유가리 타마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본다. 유가리 덕분에 오랜 상처를 극복하게 된 우스이는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실습 마지막 날 그녀의 만류로 결국 고백을 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렇게 다시 히로시마로 돌아와 일상을 보내던 우스이는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는데, 그녀의 죽음에는 어쩐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사실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다시 하야마곶 병원으로 향한 그에게 원장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한다.

 

"자네는 한 번도 유가리 타마키 씨를 진찰하지 않았네. 전부, 자네의 망상이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정말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환상이었던 것일까.  호스피스 병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드라마틱한 로맨스는 후반부에 가서 놀라운 반전과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을 보여 준다. 작가인 치넨 미키토가 실제로 의사로 활동했다는 이색적인 경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 동안 병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작품들이 많았다. 역시 이 작품에서도 자신만의 장점을 잘 살려 생사의 생사의 갈림길을 매일 마주하는 의사로서의 고뇌와 호스피스 병원에서 지내는 환자들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휴먼 드라마로도, 색다른 미스터리로서도 매우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후반부의 충격적인 반전으로 이어지는 결말은 뭉클하기도 했고 말이다. 누구라도 내일까지 산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누구나 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셈이다. 하지만 그 폭탄에 겁을 먹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오직 하루하루를 필사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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