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헤어지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F 지음, 송아람 그림, 이홍이 옮김 / 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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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는 "어른이란, 배신당한 청년의 모습이다"란 말을 남겼지만,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른이란, 목숨을 걸었던 첫사랑에 마음을 찢긴 소년 소녀라고. 길에 널린 행복한 커플들에게 배신당한 첫사랑의 복수를 대신해줄 악의로 똘똘 뭉친 운석과도 같은 악녀는 더없이 상쾌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배신당한 우리를 대표해 세상을 속이고 남자에게 맞선다. 버림받은 입장에선 기립 박수를 쳐주고 싶은 존재다.    p.71~72

출간 직후 아마존 재팬 에세이 분야 1위에 오르며 전국 서점에 품귀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일본에서 화제가 된 책이다. 저자 F는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익명의 작가로, 10~20대 독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팬덤이 형성되었다. 사랑, 연애, 섹스, 인간관계, 외로움 등의 주제를 독특한 시선과 문장으로 풀어낸 65편의 에세이와 송아람 작가의 일러스트 만화가 함께 실려 있는데, 짧은 에피소드 속에 날카로운 진심이 담겨 있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저자인 F '외롭다'라는 말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라고, 그런 말을 쉽게 뱉을 수 없어진, 모든 사람들의 밤에 이 책을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게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종종 내 마음 같지가 않아서 외롭고, 가족들과 함께 있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하고, 회사에서도 동료들과도, 학교에서 친구들과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잠 못 들고 뒤척거리는 밤이 생기고,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진 것 같은 기분에 쓸쓸해지는 그런 날에,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른스럽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우리에겐 위로가 필요하다. 비슷한 감정을 함께 풀어내고, 공감해 주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아마도 그래서 F는 이 책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깊은 밤에 딱 하나 바라는 게 있다. 꿈을 포기했을 때나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딱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한다. 의논을 하지도 않고, 상담을 받는 것도 아니고.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깎아 내리지도 않고. 그냥 조용히 둘 중 하나가 부서질 때까지 얘기만 하는, 들어주기만 하는 밤이, 앞으로 살면서 몇 번 찾아올까? 그날 밤만을 위해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p.156

이 책에는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들이 솔직하고 담백하게 담겨 있다. 사람은 이유를 좋아하는 생물이라, 무엇이 됐든 누가 됐든 이유를 원하게 마련이지만, 누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이유가 필요 없다. 그래서 좋아진 것이 아니라, 그저 문득 좋아진 것이니까.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잘 몰라도 된다. 그 어느 누구와도 서로 잘 모르는 채로, 입 다물고 그냥 사랑하고 싶다, 라고 말하는 저자의 글을 보며 나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떠했나 돌아보게 되었다. 언제나 모든 일에 이유를 대고, 스스로에게 합리화를 시키곤 했던 나였기에, 왠지 모르게 뜨끔해져서 말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좋아진 것이 바로 사랑인데 말이다. 사랑과 연애뿐만 아니라 우정, 인간관계, 이별, 취업, 사회 생활 등에 대해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솔직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청춘은 어마어마하게 잘못된 선택의 연속이라고, 외로울 때는 실컷 외로워하고, 누군가를 만나서 투정을 부렸어야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추억이란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며, 그때 더 부끄러운 짓을 했었더라면 지금보다 덜 후회하고 살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고, 나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했던 그런 책이었다. 이유 따위는 묻지 않고, 남들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무엇보다도 나의 감정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익명의 작가로 책을 출간해야 할 필요가 있었나 싶을 만큼 문장력도 탄탄하고, 감성적이지만 현실에 발을 단단히 딛고 서있는 글들이라 더 좋았던 것 같다. 거기다 그래픽 노블 <자꾸 생각나>로 청춘들의 삶과 연애를 적나라하게 담아내 공감을 불러일으킨 송아람 작가가 원고를 읽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하여 그린 에피소드들 또한 원래 이 책에 포함되었던 만화들이라고 느껴질 만큼 착착 달라붙어 있어 더욱 흥미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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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되었지만 잘 살아보겠습니다
니시다 데루오 지음, 최윤영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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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을 넘기면서 체력적으로도 상당히 약해졌습니다. 특히 아내를 잃고부터 일종의 의욕이란 것이 사라진 모양인지 움직임이 크게 둔해졌지요. 스스로 몸을 일으키는 일이 참으로 어려워졌습니다. 머리로는 '이래서는 안 된다. 당장 움직여야 하는데' 생각하지만 몸이 무거워 마음속의 악마가 '내일 해도 되잖나' 하고 속삭입니다. 늙은이를 움직이게 하려면 '당신이 필요해요' 하는 외부의 큐 사인을 받아야 함을 느꼈습니다.    p.74~75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후 일흔의 나이에 슬픔을 치유할 새도 없이 혼자 살아가게 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책이다. 평생을 안과의이자 교수로 승승장구하며 살아온 '니시다 데루오'는 헌신적인 아내의 지지 덕분에 불편함 없이 살아가던 철부지 남편이었다. 어느 날 아내가 자궁경부암 판정을 받았고, 아홉 달에 걸쳐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폐와 간으로 전이가 되어 반년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다. 그리고 암 진단으로부터 약 1년 반 후,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아내는 인생의 마지막 몇 달간 남편에게 세탁과 요리 특훈을 해주었다. 덕분에 아내가 없는 지금, 남편은 서툰 집안일 앞에서 악전고투를 벌이지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부단히 노력한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세요"라는 말을 지키기 위해. 물론 아내가 떠나고 1년 이상이 흐른 지금, 아내의 손길로 늘 청결하고 쾌적했던 예전의 집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사람이란 참 어리석은 존재라, 소중한 모든 것은 그것이 사라져 버린 후에야 깨닫곤 한다. 곁에 있을 땐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느껴져 그 가치를 모르고 있다가, 그러한 존재가 떠나고 홀로 남겨지고 나면 그제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저자인 니시다 데루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과의로 진료에 종사했고 안과 연구자로서 몇 가지 새로운 지견을 발견했으며, 또한 교육자로서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생활했으니 소위 집안일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매일의 식사 준비, 세탁 그리고 가끔 하는 청소.. 따로 놓고 보면 집안일은 크게 시간을 잡아먹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전체로 보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혼자서 직접 해보니 집안일이라는 게 엄청난 작업임을 알게 됐던 것이다. 오죽하면 '집안일에 치여 죽겠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쳐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인생이라는 것은 버릴 게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나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뭘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도, 나이를 먹고 세상 보는 눈이 변하고 입장이 바뀌면 그게 다 도움이 되는구나 하고 무의식 중에 생각합니다.   p.152~153

이 책은 아내가 떠나고, 홀로 남겨진 노년의 남자가 생활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슬픔과 상실감보다는 그것을 극복하는 일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매우 담백하게 읽힌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살아 있는 건 다 죽게 마련인 것이 당연하다면, 그러한 이치를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삶의 태도 또한 순리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 가야만 한다. 문제는 평생 아내에게 의지하며 살아 왔던, 일흔이 넘은 나이가 된 노년의 남자라면 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아닐까 싶다. 저자는 아내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면서, 혼자서 집안 일을 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깨달은 것들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잃어버린 것을 세지 말고 가진 것에 감사하라. 내가 만난 사람들이 곧 나의 인생임을 기억하라. 죽을 때까지 계속 배우면서 재미있게 살아라. 은퇴 후 시작되는 인생의 황금기를 누려라. 멋지게 나이 들고 싶다면 설렘을 포기하지 마라. 언제 닥칠지 모를 긴급 상황에 대비하라. 남은 인생은 덤이라 여기고 마음껏 즐겨라.

나이를 먹을수록 몸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마음가짐도 약해지고 서서히 모든 일에 무뎌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홀로 생활하면 마음을 서로 터놓을 수 있는 사람과 감동을 나눌 수도 없다. 그렇게 점점 마음이 말라가게 되면, 곧바로 몸을 움직이기도 귀찮아져 행동도 무뎌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몸과 마음, 그리고 감정의 균형을 얼마나 잘 잡느냐가 근본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상의 모든 남편들에게 한 권씩 선물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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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 하버드 법대, 젊은 법조인이 그린 법정 실화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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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루이지애나, 싱글맘의 외동아들이었던 여섯 살 제러미 길로리는 유치원에서 돌아와 비비총을 들고는 친구들 집으로 간다. 친구인 조이와 준은 아빠와 낚시를 하러 호수로 간 상태였고, 그 집에 세 들어 살던 스물여섯 살 리키 조지프 랭글리가 문을 열어 준다. 그리고.. 소아 성애자였던 리키에 의해 제러미는 살해 당한다.

 

나는 그 남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지금까지 10년도 넘는 세월을 끌고 있다. 내가 전혀 몰랐을 수도 있는 그 이야기에는 조금씩 다르게 진술된 사실들이 산재해 있었다. 나는 저 자백 테이프에 해당하는 녹취록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다. 그의 또 다른 자백 녹취록도 읽었다. 내가 쓴 글보다 그가 한 말을 더 잘 알 정도였다....이 테이프 때문에 나는 내가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반추해보게 되었다. 법뿐만 아니라 내 가족과 내 과거에 대해서도 재고해야 했다. 차라리 그 테이프를 보지 않았더라면. 내 삶이 보다 단순하던 그 이전 시절에 머물렀더라면.   p.23

 

저자인 알렉산드리아는 하버드 법대 재학 당시 여름방학 동안 루이지애나의 한 로펌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막 재심을 끝낸 남자의 자백 동영상을 보게 된다. 9년 전에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이번에는 배심원들이 그에게 종신형을 주었다. 그때 그녀가 그 테이프에 등장한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설명하는 그 남자 목소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이 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로펌에서 테이프를 본 그날 이후로 12년이 흘렀다. 그가 살해한 아이는 이미 죽었고, 그 남자는 이미 살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뒤처리는 벌써 전부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테이프 때문에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반추해보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20여 년에 걸쳐 진행된 리키 랭클리의 재판 과정을 10여 년 동안 추적하고 정리했다. 이 책은 90년대 미국에서 실제 벌어졌던 아동 성범죄와 법정 공방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은 리키의 이야기와 저자인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로 교차 진행되고 있다. 저자의 과거 이야기는 리키 랭글리가 제러미 길로리를 죽이기 9년 전, 그가 아직 열여덟 살이고 그녀가 다섯 살일 때부터 시작된다. 평범한 어린 시절의 추억들처럼 보였던 이야기를 따라 가다 보면 우리는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녀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로부터 지속적으로 성적 학대를 당했던 것이다. 그 끔찍한 일은 그녀와 그녀의 어린 동생들에게 몇 년간 지속되었고, 이후 부모님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녀의 부모는 모든 걸 알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렇게 하는 게 과연 옳았을까?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들은 말을 할아버지에게 절대로 발설하지 않았고, 어떤 식으로도, 뭔가 잘못됐다는 표시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대신 더 이상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집에서 주무시고 가라고 청하지 않았다. 그렇게 학대는 어느 누구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끝나버렸다. 그녀의 부모님은 기억을 마치 법률 사본처럼 조심스럽게 정리해 버렸다. 

 

 

그 말뜻을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나는 사형제도에 반감이 생겼다. 나는 죽음이 두려웠다. 죽음이 언니를 앗아 갔으니까. 오빠가 죽을까 봐 어른들이 두려워했으니까. 나는 죽음에 관한 악몽을 꾸니까. 어머니의 책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헌법이 희망의 문서라고 나는 그때 벌써 알고 있었다.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법이 죽음을 언도할 수 있단 말인가? 법률 서적에 나오는 이유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 모든 것이 시작된 지점은 두려움이었다. 그때 그 순간부터 나는 언제나 사형제를 반대해왔다.   p.161~162

이 책은 과거에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책이다. 동시에 과거의 일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그 끔찍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알렉산드리아는 어른이 되어 법을 공부하게 된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사형제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는 일을 어째서 잔인하다고,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지, 그걸 알고 싶어서 법대에 진학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사형 반대 로펌에 지원했고, 사형수 변호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서 방학 동안 인턴으로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한 남자의 자백 영상을 보게 된다. 아이들을 추행하던 이야기를 하는 그를 보며 그녀는 생각한다. 나는 화면 속 저 남자를 구제하는 일을 돕겠다고 이곳으로 왔다. 저런 남자를 돕겠다고. 그녀는 스크린 속 남자를 보며,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자신을 만지던 손길을 다시 느낀다. 과연 과거에 그녀에게 일어난 일로부터 그녀의 이상과 실제가 별개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녀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곳에 일하러 온 명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크린 속 그 남자, 리키가 죽기를 바랐다.

알렉산드리아는 리키의 모습에게서 할아버지를 보았다. 그녀는 이해하고 싶었다. 그녀는 제러미의 엄마 로렐라이의 행적을 추적하고, 제러미의 묘소와 리키 부모의 묘소를 찾아가고, 리키를 면회하고, 그의 재판을 직접 취재한다. 리키의 첫 재판 후 10년 뒤, 그가 받은 사형 선고가 뒤집힌다. 게다가 증인으로 등장한 죽은 제러미의 엄마는 리키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과연 리키는 나쁜 사람, 즉 죄 없는 아이를 잔인하게 살해한 악당인가? 아니면 평생 악마와 싸워온, 자기 자신과 싸워온, 결국 그 싸움 때문에 정신병자가 되어 한 아이를 비극적으로 죽게 만든 사람인가? 알렉산드리아는 이해하고 싶었다. 이해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을 취재하고, 이 책을 쓰게 되었고, 이제는 당시 배심원의 평결이 달리 보인다고 말한다. 그 평결은 법리적으로는 진실이 아니지만, 삶에서는 진실일 수 있는 어떤 것을 알려준다고. 리키는 책임이 있지만 또 동시에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배심원들에게 주어진 법에는 이런 중간 지점이 자리할 틈이 없지만, 그들이 그 틈을 만들었다고. 법 안에 새 공간을 열어서 그때까지 없던 범주를 만들어냈다고.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기록의 힘이 너무나 생생한 대목들이 있다. 실제 일어난 일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사실이 상상을 초월하는 대목들이 있다.

 

이 책은 이 시대의 가장 참혹한 사실을,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그럼에도 우아하고 인간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실제 있었던 기록을 바탕으로 그려진 범죄 논픽션이지만, 법의 세계에 속해 있는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이야기'라는 방식이다. 딱딱한 법률이 아니라, 마치 소설처럼,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과거에 등 돌리는 대신, 과거에서 도망가는 대신, 오히려 손을 내밀고 과거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여타의 범죄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들과는 차원이 다른 서사를 보여주고 있는, 정말 뛰어나고 완성도 높은 책이다. 논픽션으로서 감동적이고, 문학적으로도 아름답고 비범한 작품이다. 사실이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 우리는 이런 책을 읽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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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왕이 온다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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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참아도 되는 일은 없단다."

무슨 뜻인지 몰라서 가만히 있자 할머니가 입술을 떨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계속 참기만 하면 마음속에 나쁜 게 쌓이는 법이지. 오랜 세월이 지나면 그 대가가 온단다. 계속 참는 게 좋은 일은 아니야. 나는 참았어, 그러니까 용서해줄 거야.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란다. 세상은..... 이 세상은."   p.31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제22회 일본 호러소설대상 대상 수상작으로, 미야베 미유키, 기시 유스케가 극찬한 작품이다. 사와무라 이치의 충격적인 데뷔작은 평범한 현실 속 뒤틀린 인간 심리를 건드리며 극한의 공포를 끌어내고 있다. 평범한 일상을 파괴해가는 정체불명의 괴물보기왕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딩동. 초인종이 울린다. 그러나 대답하면 안 된다. 문을 열어줘도 안 된다. 절대 그것이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그것이 온다.

다하라 히데키는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방학 때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홀로 집을 보다 이상한 경험을 한다. 누군가 벨을 누르고 가족의 이름을 불렀는데,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면 안 된다고 말을 한다. 이후 중학교 3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로부터 할아버지의 고향에서 전해 내려오는 요괴, 보기왕에 대해서 듣게 된다. 그게 오면 절대로 대답하거나 들여보내선 안 된다고. 문을 열면 잡혀서 산으로 끌려간다고. 기이한 전설이야 어디에나 있었으니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린다. 그날 오후에 할머니 집에 찾아왔던 회색 그림자와 그때 느꼈던 공포가 고스란히 다시 기억이 난 것이다. 그리고 서른 두 살, 가나와 결혼을 하고 이듬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회사로 누군가 그를 찾아온다.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아내의 배 속에 있는 아이 치사의 이름을 대면서. 하지만 로비에 그를 기다린다던 손님은 보이지 않았고, 그 방문을 알려준 회사 후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부상으로 입원하게 되고 점점 상태가 나빠진다.

 

"인간은 옛날부터 생각했지. 자신과 똑같이 생긴 건 무섭다고. 봐서는 안 된다, 보면 죽는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왜일까?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어. 적어도 알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자신의 추악함과 교활함, 나약함, 어리석음을 자기 눈으로 보는 건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롭기 때문이지. 선생을 보면 지긋지긋할 만큼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어. 덕분에 지금 내 기분은 최악이야."    p.267

이후에도 히데키의 주변에서 이상한 전화나 메일이 오는 등 괴이한 일이 반복된다. 그는 직감적으로 생각한다. 오래 전 그날 할머니 집을 찾아온 손님이 25년이 넘게 흐른 뒤에 나를 찾아오려고 하고 있다고. 할아버지 고향에서 전해지는 보기왕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말이다. 누가 들으면 망상이라고, 어린애 같은 공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요즘 세상에 괴물이라니 무슨 말이냐고. 하지만 실제로 회사 후배는 뭔가에 물려서 오랫동안 입원한 끝에 회사를 그만두었고, 집에 괴이한 전화가 걸려왔으며, 집 안의 부적이 모두 찢어지는 등 아내와 딸이 끔찍한 일을 겪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히데키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래서 민속학 준교수인 옛 친구의 도움을 받아 초자연 현상에 관한 글을 쓰는 오컬트 작가 노자키를 만난다. 노자키는 히데키에게 필요한 것이 주술과 퇴마라는 사실을 깨닫고 히가 마코토라는 영매사를 소개해준다. 과연 그들은 '보기왕'이라는 알 수 없는 괴물의 정체를 밝히고, 왜 히데키의 주변에 나타나는 것인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인가.

여기까지가 1장의 내용이다. 히데키가 화자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1장이 끝나면, 2장에선 히데키의 아내 가나, 3장에서는 오컬트 작가 노자키가 화자로 나선다. 사실 1장의 내용만 보자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호러 소설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2장으로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펼쳐진다. 우리가 읽어 왔던 그 모든 무서움의 근원을 파헤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에 생겨나는 틈'에서 비롯된 공포를 그려내고 있어, 단순히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실재하지 않는 괴물이라는 존재로 인한 무서움보다 더한 작품이었다. 괴담이나 호러와 관련된 작품을 꽤 읽어본 편인데,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이 특별했던 이유는 아마도 다 읽고 나서공포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상대에 따라 같은 사실도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입장의 차이를 이용한 반전도 훌륭했고, 화자를 달리한 구성도 탄탄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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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득 2018-11-15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모처럼 호러 대상에 걸맞는 작품을 만난 것 같았어요.^^

피오나 2018-11-16 14:40   좋아요 0 | URL
그죠? 저도 오랜만에 읽은 호러 소설이었는데 만족스럽더라구요. 표지만 빼고요 ㅋㅋ
 
아저씨 고양이는 줄무늬
무레 요코 지음, 스기타 히로미 그림, 김현화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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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서 개나 고양이뿐만 아니라 동물의 재밌고 불가사의한 행동을 촬영한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인간 외 모든 생물의 사고회로가 알고 싶어진다. 한때 화제였던 야구 방망이를 붕붕 휘두르는 곰, 꼿꼿이 서 있는 레서판다, 관객을 향해 수중에서 내도록 직립해 있는 바다표범, 자식이 가리비를 덥석 잡으면 손뼉을 치는 아빠 해달 등, 그런 동물들을 보면 궁금해서 좀이 쑤신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알고 싶다.  p.21~23

이 책의 주요 등장 캐릭터인 시마짱은, 길고양이지만 모습과 하는 행동은 딱 도둑고양이 같다. 몸은 땅딸막하고 짙은 갈색과 검은색의 줄무늬에, 얼굴이 호빵 만한 데 비해서 눈은 단춧구멍만하다. 저자에게 요 몇 년간 불쑥불쑥 찾아오곤 했는데, 모습을 드러낼 때도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안녕들 하쇼?'라는 분위기를 풍긴다고 하니 대충 짐작이 될 것이다. 무뚝뚝하고, 매사에 심드렁하고, 단춧구멍만한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며 '뭐 좀 내놔보쇼.'라는 레이저를 쏘는 시마짱. 배가 고파도 다른 고양이가 먹다 남긴 건 냄새를 맡기만 하다 쌩하니 외면하기도 하고, 입도 고급이라 웬만한 음식은 줘도 쳐다보지도 않는 고양이이다. 이 책은 그렇게 다른 길고양이 처럼 밥을 얻어먹기 위해 애교를 부리는 일 따윈 결코 없는, 무뚝뚝함으로 완벽 무장한 아저씨 고양이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카모메 식당>, <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 등의 작품으로 만나왔던 무레 요코가 이번에는 줄무늬 아저씨 고양이 시마짱을 비롯해 그녀의 삶과 함께 해온 여러 동물 이야기들을 에세이로 펴냈다. 고양이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전부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만 담겨 있는 책은 아니다. 길고양이로 시작해, 그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모기가 나오고, 동물원에서 만난 매력 만점의 원숭이도 등장한다. 어느 집에나 있던 목각 곰 이야기는 테디 베어와 동물원의 아기 곰 이야기로 이어지고,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동물들 이야기에, 산책 길에 만나는 여러 유형의 개들, 거기다 설치류인 카피바라까지 등장하며 그야 말로 '동물 에세이'로서의 면모를 한껏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자료관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 설치류 냄새가 난다." 하고 신이 났다.

옛날에 기니피그와 생쥐를 기르던 때의 배설물 냄새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입안에 가득 퍼지는 마들렌 냄새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생물들과 함께한 추억의 냄새였다.   p.125

무레 요코가 워낙 고양이를 사랑하는 작가로 익히 알려진 만큼 이 작품에는 길고양이의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주인공 아저씨 고양이 시마짱은 마치 페이지 바깥으로 쓱 튀어 나올 것만 같은 생생한 느낌이 들고, 시마짱의 그 무뚝뚝한 표정이 고스란히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시마짱 덕분에 이제는 길에서 마주하곤 하는 길고양이들의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무레 요코는 길고양이 시마짱의 일생을 이 유쾌한 에세이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동물과 가깝게 살아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뭉클한 기분이 들 것 같다. 인간과 동물의 진정한 교감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고 말이다.

나는 거의 평생을 강아지와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릴 적부터 강아지와 친숙하게 지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개를 보살피고, 개와 함께 생활을 했기에 그들의 언어에도 관심을 가지곤 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행동의 의미는 뭔지.. 무레 요코가 인간 외 모든 생물의 사고회로가 알고 싶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더 그녀가 들려주는 동물들의 이야기가 와 닿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책 속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일상을 큭큭 거리며 따라가다 보면, 동물도 엄연히 생각이 있는 존재이며, 그들 또한 존중해주어야 하는 가족이라는 점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개나 고양이, 혹은 그 외의 다른 동물을 한번이라도 키워본 이들이라면 다들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데다, 무레 요코 특유의 소소하지만 따뜻한 시선이 참 예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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