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7
정용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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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죽여본 적 있습니까?

불현듯 떠오른 장면. 서서히 꺼져가는 강아지의 까만 눈동자와, 아스팔트와 흙에 스며드는 검붉은 피. 죽인 것과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둔 것은 질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나는 걸까? 윤은 잠시 생각했다. 윤은 잠자코 그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그는 푸석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p.116

정부의 고위급 인사들과 현직 국회의원들 열두 명이 죽었다. 그날은 전당대회가 있었고 식사를 마친 의원들은 온천에 갔다. 경찰이 도착했을 땐 타일 바닥 곳곳에 피가 실개천처럼 흐르고 있었고, 붉게 변한 탕 속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고 있는 고요한 표정의 남자, 그는 저항하지 않고 체포되었다. 수사관들은 의도와 배후 세력을 물었고, 의사들은 그의 정신 상태를 감정하려고 했지만, 그의 답은 간결했다.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개인적인 원한이나 정치적 의도는 없다고. 게다가 그의 지문은 등록되어 있지 않았고 주민번호도 없었으니, 당연히 그는 존재하지 않는 자였다. 그는 사이코가 아니었고,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지도 않았다. 수사는 난항이었고, 방송에서는 연일 미스터리한 그의 존재에 대해 방영했고, 사건을 다각도로 분석해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그는 항소하지 않았으며 대법원까지 가지 않고 1심에서 판결을 받아들였다. 형은 확정되었고 교도소로 이송되어 사형수를 지칭하는 붉은색 명찰을 붙였고, 474번을 부여 받았다.

그렇게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수감번호 474번과 그의 담당 교도관 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474번이라는 캐릭터는 범행 동기는 전혀 알 수 없고, 죄를 받아들이고 모두 인정하지만, 뉘우치고 반성하는 태도는 아닌, 지나치게 여유롭고, 너무도 깔끔한, 기묘한 인물이었다. 교도관들은 그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찜찜하고, 불안했고, 언론에서도 그와 관련되어 색다른 사실 하나라도 잡아 보려고 주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윤은 474번의 담당 교도관으로서 그를 매일 만났다. 가까이에서 느낀 건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성실하고 착실한 수형자라는 거였다. 그럼에도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속이 전혀 보이지 않는 그에게서 뭐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그의 작은 행동과 표정 속에서 작은 기미라도 찾으려 애를 썼지만, 겉으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많습니다. 그는 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지만 사람을 죽입니다. 어떤 이는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지만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못합니다. 그는 그런 이들을 대신해 손이 되고 칼이 되었습니다. 원하지 않고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했지요. 그는 지금도 스스로를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법은 일어난 일의 결과로 죄를 판단합니다만 사실 인간은 결과로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의도가 죄죠.   p.127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일곱 번째 책이다. 정용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악은 타고나는 것이며악에는 이유가 없다고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절대 악과 절대선은 무엇이며 과연 그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극중 474번은 사수의 운명을 갖고 태어나 어려서부터 사냥을 잘했다고 한다. 그는 살면서 많은 것들을 죽였는데, 생명을 빼앗는 일을 좋아하거나 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누구보다 그걸 잘했기 때문에 일로서 하게 되었다는 거다. 그는 뛰어난 사냥꾼이었기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맡은 일을 실패한 적도 없었다. 문제는 그에게 죄의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사람을 죽였는데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 남자는 괴물인 걸까? 애초에 사람을 죽이는 데 이유 같은 게 없다면, 의도도, 목적도, 욕망이나 쾌감도 아니었다면.. 그리하여 그것이 그저 본성이었다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일까.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무통각증 환자이자 죄책감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청부살인업자,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도 없이 존재 없는 비존재인 유령으로 살았던 그를 접견하겠다고 찾아온 한 여자. 자신을 고아라고 말했던 그의 실재하는 가족인 누나가 나타나면서 그에게 존재성이 부여된다. 그리고 474, 신해준은 자신의 사형을 집행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도관들과 수형자들을 죽이겠다고. 사형의 딜레마는 혹시 있을 오판과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길 원하는 인간의 인권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니 형 집행을 미룰 근거가 없다. 문제는 그를 사형시킨다면 사형 폐지 국가라는 잠재적 위상을 무너뜨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므로 다른 사형수들에게도 당연히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살인을 저지른 죄인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마치 공범처럼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괴물처럼 등장했던 474번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고, 그의 존재성이 구체화되면서 악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낯설고 혐오스럽지만, 어떤 부분에선 익숙하고 이해할 만한 지점의 끝에 ''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악에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악에는 너무도 많은 이유가 있다'라는 생각도 든다. 악과 악인,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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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호기심 공룡 대백과 생생 과학 1
히라야마 렌 감수 / 글송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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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은 아득한 옛날인 '중생대'에 살았어요. 2 4800만 년 전부터 약 6500만 년 전까지 이어진 중생대는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로 나눌 수 있어요. 공룡들은 이 시대에 맞춰 여러 가지 모습으로 진화했지요.   p.10

오래 전에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이라는 소설을 너무 재미있게 읽고는 한동안 공룡에 푹 빠져 있던 시기가 있었다. 이 책은 영화화 되어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았는데, 덕분에 공룡에 관련된 여러 책이나 캐릭터 상품들도 인기였었고 말이다. 특히나 원작 소설은 유전자공학 등 전문적인 과학지식들로 공룡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를 설득력 있게 느껴지도록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에야 공룡 정보를 담은 DNA가 그렇게 오랜 시간 보존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야기의 시작부터 완전한 '허구'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지만 말이다.

<쥬라기 공원> 이후로는 사실 공룡이라는 것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는데, 아이가 생기면서부터 자연스레 다시 공룡과 함께 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섯 살 아이가 그 복잡하고도, 긴 이름들을 어떻게 다 외우는지 신기할 정도로... 시대별, 종류별 공룡 이름들을 다 꿰고 있는 탓에... 매번 감탄하면서 말이다. 사실 공룡이 살았던 시기가 꽤 길어서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 전기, 백악기 후기 등으로 시대를 나눠서 있었던 공룡의 종류가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공룡이라는 캐릭터를 소비하는 주 연령층이 아이들이다 보니, 시대가 전혀 다른 공룡들이 함께 등장하기도 하고, 재미를 위해서 공존하는 것처럼 연출되기도 한다.

이 책은 '공룡 대백과'라는 제목처럼 시대별로 대표하는 공룡 117종이 소개되어 있는 상세한 공룡 대백과 사전이다. 판형이 작고, 종이도 잘 찢어지지 않는 두툼한 두께라 아이들이 자주 읽기에도 딱 좋을 것 같다. 생생한 공룡 그림과 함께 각각의 특징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 공격, 빠르기, 지능, 방어, 체격의 항목으로 된 능력치라는 항목이 특히 흥미롭다. 마치 공룡들이 게임 캐릭터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공룡 피규어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의 특성 상 각 공룡의 성격을 한 눈에 파악하기 쉽기 때문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 시리즈를 본 적이 있나요? 이 영화에는 사라진 공룡들을 살리려는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 나와요. 그들은 되살린 공룡들로 테마파크를 만들려고도 하지요...영화에서는 공룡 시대에 피를 빨아먹었던 모기에게서 공룡 정보를 담은 DNA를 뽑아 공룡을 되살리려고 해요. 사실 DNA에 있는 정보는 약 500년이 지날 때마다 반이 망가지거든요. 이 때문에 영화와 같은 방법으로 공룡을 되살리기는 어렵답니다.   p.268

이 책에는 흥미로운 공룡에 관한 정보들도 많이 담겨 있다. 공룡과 파충류는 어떻게 다른지 파충류의 계통도도 소개되어 있고, 언제부터 공룡을 연구했는지, 공룡의 이름은 어떻게 지었는지에 대한 정보도 담겨 있다. 공룡 시대는 왜 끝이 난 건지, 만약 공룡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리고 오늘날 공룡이 되살아난다면 또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상상도 해볼 수 있어 재미있다.

 

시대별 공룡에 대한 소개가 끝나면, 후반부에는 공룡 화석이 발견된 지역별로 지도가 있다.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그리고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등 지역별로 발견된 공룡의 종류가 많이 달라서 매우 흥미진진했다. 아직 공룡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이 책에 나오는 어려운 단어들의 뜻을 풀이해주는 공룡 용어 사전도 있다. 각룡류, 골판, 양치식물, 후두류 등등.. 단어의 뜻이 소개되어 있다.

아이 덕분에 나도 공룡 이름 수십 개쯤은 거뜬히 외우고, 모습을 보면 누구인지 어느 시대에 살았던 공룡인지 대충 아는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이 책도 아이와 함께 읽기 전에 내가 먼저 보았는데, 아는 공룡들이 많아서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아주 도움이 되는,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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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헤어지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F 지음, 송아람 그림, 이홍이 옮김 / 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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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는 "어른이란, 배신당한 청년의 모습이다"란 말을 남겼지만,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른이란, 목숨을 걸었던 첫사랑에 마음을 찢긴 소년 소녀라고. 길에 널린 행복한 커플들에게 배신당한 첫사랑의 복수를 대신해줄 악의로 똘똘 뭉친 운석과도 같은 악녀는 더없이 상쾌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배신당한 우리를 대표해 세상을 속이고 남자에게 맞선다. 버림받은 입장에선 기립 박수를 쳐주고 싶은 존재다.    p.71~72

출간 직후 아마존 재팬 에세이 분야 1위에 오르며 전국 서점에 품귀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일본에서 화제가 된 책이다. 저자 F는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익명의 작가로, 10~20대 독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팬덤이 형성되었다. 사랑, 연애, 섹스, 인간관계, 외로움 등의 주제를 독특한 시선과 문장으로 풀어낸 65편의 에세이와 송아람 작가의 일러스트 만화가 함께 실려 있는데, 짧은 에피소드 속에 날카로운 진심이 담겨 있어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저자인 F '외롭다'라는 말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라고, 그런 말을 쉽게 뱉을 수 없어진, 모든 사람들의 밤에 이 책을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게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종종 내 마음 같지가 않아서 외롭고, 가족들과 함께 있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하고, 회사에서도 동료들과도, 학교에서 친구들과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잠 못 들고 뒤척거리는 밤이 생기고,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진 것 같은 기분에 쓸쓸해지는 그런 날에,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른스럽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우리에겐 위로가 필요하다. 비슷한 감정을 함께 풀어내고, 공감해 주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아마도 그래서 F는 이 책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깊은 밤에 딱 하나 바라는 게 있다. 꿈을 포기했을 때나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딱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한다. 의논을 하지도 않고, 상담을 받는 것도 아니고.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깎아 내리지도 않고. 그냥 조용히 둘 중 하나가 부서질 때까지 얘기만 하는, 들어주기만 하는 밤이, 앞으로 살면서 몇 번 찾아올까? 그날 밤만을 위해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p.156

이 책에는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들이 솔직하고 담백하게 담겨 있다. 사람은 이유를 좋아하는 생물이라, 무엇이 됐든 누가 됐든 이유를 원하게 마련이지만, 누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이유가 필요 없다. 그래서 좋아진 것이 아니라, 그저 문득 좋아진 것이니까.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잘 몰라도 된다. 그 어느 누구와도 서로 잘 모르는 채로, 입 다물고 그냥 사랑하고 싶다, 라고 말하는 저자의 글을 보며 나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떠했나 돌아보게 되었다. 언제나 모든 일에 이유를 대고, 스스로에게 합리화를 시키곤 했던 나였기에, 왠지 모르게 뜨끔해져서 말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좋아진 것이 바로 사랑인데 말이다. 사랑과 연애뿐만 아니라 우정, 인간관계, 이별, 취업, 사회 생활 등에 대해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솔직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청춘은 어마어마하게 잘못된 선택의 연속이라고, 외로울 때는 실컷 외로워하고, 누군가를 만나서 투정을 부렸어야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추억이란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며, 그때 더 부끄러운 짓을 했었더라면 지금보다 덜 후회하고 살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고, 나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했던 그런 책이었다. 이유 따위는 묻지 않고, 남들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무엇보다도 나의 감정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익명의 작가로 책을 출간해야 할 필요가 있었나 싶을 만큼 문장력도 탄탄하고, 감성적이지만 현실에 발을 단단히 딛고 서있는 글들이라 더 좋았던 것 같다. 거기다 그래픽 노블 <자꾸 생각나>로 청춘들의 삶과 연애를 적나라하게 담아내 공감을 불러일으킨 송아람 작가가 원고를 읽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하여 그린 에피소드들 또한 원래 이 책에 포함되었던 만화들이라고 느껴질 만큼 착착 달라붙어 있어 더욱 흥미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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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되었지만 잘 살아보겠습니다
니시다 데루오 지음, 최윤영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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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을 넘기면서 체력적으로도 상당히 약해졌습니다. 특히 아내를 잃고부터 일종의 의욕이란 것이 사라진 모양인지 움직임이 크게 둔해졌지요. 스스로 몸을 일으키는 일이 참으로 어려워졌습니다. 머리로는 '이래서는 안 된다. 당장 움직여야 하는데' 생각하지만 몸이 무거워 마음속의 악마가 '내일 해도 되잖나' 하고 속삭입니다. 늙은이를 움직이게 하려면 '당신이 필요해요' 하는 외부의 큐 사인을 받아야 함을 느꼈습니다.    p.74~75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후 일흔의 나이에 슬픔을 치유할 새도 없이 혼자 살아가게 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책이다. 평생을 안과의이자 교수로 승승장구하며 살아온 '니시다 데루오'는 헌신적인 아내의 지지 덕분에 불편함 없이 살아가던 철부지 남편이었다. 어느 날 아내가 자궁경부암 판정을 받았고, 아홉 달에 걸쳐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폐와 간으로 전이가 되어 반년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다. 그리고 암 진단으로부터 약 1년 반 후,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아내는 인생의 마지막 몇 달간 남편에게 세탁과 요리 특훈을 해주었다. 덕분에 아내가 없는 지금, 남편은 서툰 집안일 앞에서 악전고투를 벌이지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부단히 노력한다. 아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세요"라는 말을 지키기 위해. 물론 아내가 떠나고 1년 이상이 흐른 지금, 아내의 손길로 늘 청결하고 쾌적했던 예전의 집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사람이란 참 어리석은 존재라, 소중한 모든 것은 그것이 사라져 버린 후에야 깨닫곤 한다. 곁에 있을 땐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느껴져 그 가치를 모르고 있다가, 그러한 존재가 떠나고 홀로 남겨지고 나면 그제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저자인 니시다 데루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과의로 진료에 종사했고 안과 연구자로서 몇 가지 새로운 지견을 발견했으며, 또한 교육자로서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생활했으니 소위 집안일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매일의 식사 준비, 세탁 그리고 가끔 하는 청소.. 따로 놓고 보면 집안일은 크게 시간을 잡아먹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전체로 보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혼자서 직접 해보니 집안일이라는 게 엄청난 작업임을 알게 됐던 것이다. 오죽하면 '집안일에 치여 죽겠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쳐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인생이라는 것은 버릴 게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나 젊은 시절에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뭘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도, 나이를 먹고 세상 보는 눈이 변하고 입장이 바뀌면 그게 다 도움이 되는구나 하고 무의식 중에 생각합니다.   p.152~153

이 책은 아내가 떠나고, 홀로 남겨진 노년의 남자가 생활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슬픔과 상실감보다는 그것을 극복하는 일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매우 담백하게 읽힌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살아 있는 건 다 죽게 마련인 것이 당연하다면, 그러한 이치를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삶의 태도 또한 순리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 가야만 한다. 문제는 평생 아내에게 의지하며 살아 왔던, 일흔이 넘은 나이가 된 노년의 남자라면 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아닐까 싶다. 저자는 아내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면서, 혼자서 집안 일을 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깨달은 것들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잃어버린 것을 세지 말고 가진 것에 감사하라. 내가 만난 사람들이 곧 나의 인생임을 기억하라. 죽을 때까지 계속 배우면서 재미있게 살아라. 은퇴 후 시작되는 인생의 황금기를 누려라. 멋지게 나이 들고 싶다면 설렘을 포기하지 마라. 언제 닥칠지 모를 긴급 상황에 대비하라. 남은 인생은 덤이라 여기고 마음껏 즐겨라.

나이를 먹을수록 몸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마음가짐도 약해지고 서서히 모든 일에 무뎌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홀로 생활하면 마음을 서로 터놓을 수 있는 사람과 감동을 나눌 수도 없다. 그렇게 점점 마음이 말라가게 되면, 곧바로 몸을 움직이기도 귀찮아져 행동도 무뎌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몸과 마음, 그리고 감정의 균형을 얼마나 잘 잡느냐가 근본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상의 모든 남편들에게 한 권씩 선물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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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 하버드 법대, 젊은 법조인이 그린 법정 실화
알렉산드리아 마르자노 레즈네비치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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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루이지애나, 싱글맘의 외동아들이었던 여섯 살 제러미 길로리는 유치원에서 돌아와 비비총을 들고는 친구들 집으로 간다. 친구인 조이와 준은 아빠와 낚시를 하러 호수로 간 상태였고, 그 집에 세 들어 살던 스물여섯 살 리키 조지프 랭글리가 문을 열어 준다. 그리고.. 소아 성애자였던 리키에 의해 제러미는 살해 당한다.

 

나는 그 남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지금까지 10년도 넘는 세월을 끌고 있다. 내가 전혀 몰랐을 수도 있는 그 이야기에는 조금씩 다르게 진술된 사실들이 산재해 있었다. 나는 저 자백 테이프에 해당하는 녹취록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다. 그의 또 다른 자백 녹취록도 읽었다. 내가 쓴 글보다 그가 한 말을 더 잘 알 정도였다....이 테이프 때문에 나는 내가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반추해보게 되었다. 법뿐만 아니라 내 가족과 내 과거에 대해서도 재고해야 했다. 차라리 그 테이프를 보지 않았더라면. 내 삶이 보다 단순하던 그 이전 시절에 머물렀더라면.   p.23

 

저자인 알렉산드리아는 하버드 법대 재학 당시 여름방학 동안 루이지애나의 한 로펌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막 재심을 끝낸 남자의 자백 동영상을 보게 된다. 9년 전에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이번에는 배심원들이 그에게 종신형을 주었다. 그때 그녀가 그 테이프에 등장한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설명하는 그 남자 목소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이 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로펌에서 테이프를 본 그날 이후로 12년이 흘렀다. 그가 살해한 아이는 이미 죽었고, 그 남자는 이미 살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뒤처리는 벌써 전부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테이프 때문에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반추해보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20여 년에 걸쳐 진행된 리키 랭클리의 재판 과정을 10여 년 동안 추적하고 정리했다. 이 책은 90년대 미국에서 실제 벌어졌던 아동 성범죄와 법정 공방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은 리키의 이야기와 저자인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로 교차 진행되고 있다. 저자의 과거 이야기는 리키 랭글리가 제러미 길로리를 죽이기 9년 전, 그가 아직 열여덟 살이고 그녀가 다섯 살일 때부터 시작된다. 평범한 어린 시절의 추억들처럼 보였던 이야기를 따라 가다 보면 우리는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녀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로부터 지속적으로 성적 학대를 당했던 것이다. 그 끔찍한 일은 그녀와 그녀의 어린 동생들에게 몇 년간 지속되었고, 이후 부모님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녀의 부모는 모든 걸 알고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렇게 하는 게 과연 옳았을까?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들은 말을 할아버지에게 절대로 발설하지 않았고, 어떤 식으로도, 뭔가 잘못됐다는 표시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대신 더 이상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집에서 주무시고 가라고 청하지 않았다. 그렇게 학대는 어느 누구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끝나버렸다. 그녀의 부모님은 기억을 마치 법률 사본처럼 조심스럽게 정리해 버렸다. 

 

 

그 말뜻을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나는 사형제도에 반감이 생겼다. 나는 죽음이 두려웠다. 죽음이 언니를 앗아 갔으니까. 오빠가 죽을까 봐 어른들이 두려워했으니까. 나는 죽음에 관한 악몽을 꾸니까. 어머니의 책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헌법이 희망의 문서라고 나는 그때 벌써 알고 있었다.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법이 죽음을 언도할 수 있단 말인가? 법률 서적에 나오는 이유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 모든 것이 시작된 지점은 두려움이었다. 그때 그 순간부터 나는 언제나 사형제를 반대해왔다.   p.161~162

이 책은 과거에 실제 일어난 일에 대한 책이다. 동시에 과거의 일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그 끔찍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알렉산드리아는 어른이 되어 법을 공부하게 된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사형제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는 일을 어째서 잔인하다고,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지, 그걸 알고 싶어서 법대에 진학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사형 반대 로펌에 지원했고, 사형수 변호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서 방학 동안 인턴으로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한 남자의 자백 영상을 보게 된다. 아이들을 추행하던 이야기를 하는 그를 보며 그녀는 생각한다. 나는 화면 속 저 남자를 구제하는 일을 돕겠다고 이곳으로 왔다. 저런 남자를 돕겠다고. 그녀는 스크린 속 남자를 보며,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자신을 만지던 손길을 다시 느낀다. 과연 과거에 그녀에게 일어난 일로부터 그녀의 이상과 실제가 별개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녀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곳에 일하러 온 명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크린 속 그 남자, 리키가 죽기를 바랐다.

알렉산드리아는 리키의 모습에게서 할아버지를 보았다. 그녀는 이해하고 싶었다. 그녀는 제러미의 엄마 로렐라이의 행적을 추적하고, 제러미의 묘소와 리키 부모의 묘소를 찾아가고, 리키를 면회하고, 그의 재판을 직접 취재한다. 리키의 첫 재판 후 10년 뒤, 그가 받은 사형 선고가 뒤집힌다. 게다가 증인으로 등장한 죽은 제러미의 엄마는 리키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과연 리키는 나쁜 사람, 즉 죄 없는 아이를 잔인하게 살해한 악당인가? 아니면 평생 악마와 싸워온, 자기 자신과 싸워온, 결국 그 싸움 때문에 정신병자가 되어 한 아이를 비극적으로 죽게 만든 사람인가? 알렉산드리아는 이해하고 싶었다. 이해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을 취재하고, 이 책을 쓰게 되었고, 이제는 당시 배심원의 평결이 달리 보인다고 말한다. 그 평결은 법리적으로는 진실이 아니지만, 삶에서는 진실일 수 있는 어떤 것을 알려준다고. 리키는 책임이 있지만 또 동시에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배심원들에게 주어진 법에는 이런 중간 지점이 자리할 틈이 없지만, 그들이 그 틈을 만들었다고. 법 안에 새 공간을 열어서 그때까지 없던 범주를 만들어냈다고.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기록의 힘이 너무나 생생한 대목들이 있다. 실제 일어난 일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사실이 상상을 초월하는 대목들이 있다.

 

이 책은 이 시대의 가장 참혹한 사실을,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그럼에도 우아하고 인간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실제 있었던 기록을 바탕으로 그려진 범죄 논픽션이지만, 법의 세계에 속해 있는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이야기'라는 방식이다. 딱딱한 법률이 아니라, 마치 소설처럼,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과거에 등 돌리는 대신, 과거에서 도망가는 대신, 오히려 손을 내밀고 과거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여타의 범죄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들과는 차원이 다른 서사를 보여주고 있는, 정말 뛰어나고 완성도 높은 책이다. 논픽션으로서 감동적이고, 문학적으로도 아름답고 비범한 작품이다. 사실이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 우리는 이런 책을 읽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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