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감각 - 삶의 감각을 깨우는 글쓰기 수업
앤 라모트 지음, 최재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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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창작, 작법에 관한 책은 꽤 많이 읽었던 편이기에, 당연이 이 책도 읽었다고 생각했다. 앤 라모트의 <쓰기의 감각>이 오래 전에 출간되었던 <글쓰기 수업>의 개정판이라고 해서 책장을 살펴봤는데, 글쓰기에 관련된 책들의 종류만 수십 권이 넘게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없었다. 그렇게 수많은 책들을 읽어놓고서 하필 이 책을 놓치고 안 읽었다는 걸 알고는, 부랴부랴 개정판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대체 이런 책을 왜 이제야 만나게 되었는지, 감탄하면서 읽었다. 수십 권의 관련 책들 중에 단연코 베스트 5로 손꼽을 만큼 뛰어난 작품이었던 것이다. 왜 이 책을 미국의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인생 책으로 손꼽는지, 왜 글쓰기의 고전으로 지난 25년간 한결같이 사랑 받아온 건지 저절로 납득이 되는 그런 책이었다.

 

 

그냥 그 모든 것을 종이에 적기만 하라. 당신이 보다 이성적이고 성숙한 상태에서라면 절대 쓰지 않았을 그 미친 여섯 페이지에 어쩌면 정말 대단한 어던 것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6페이지 맨 마지막 문단의 맥 마지막 줄에 당신 맘에 꼭 드는 내용이 있는데, 그게 너무나 아름답거나 멋져서 그제야 무엇을 써야 할지 또는 어떤 방향으로 써야 할지 감을 잡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것은 앞의 다섯 페이지 반을 쓰지 않고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이다.   p.68

대부분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직접 글을 써보기 전에 뭔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각종 글쓰기, 작법에 관한 실용서들, 유명 소설가의 작법서는 항상 스테디셀러가 된다. 하지만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생각은 아무 의미가 없다. 머리로만 글을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몸이 움직이면 머리는 자연스레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글쓰기가 육체적인 노동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글쓰기란 너무도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글쓰기란 생각하는 행위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손을 계속 움직여 써 내려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만으로는 아무런 결과물도 생산할 수 없다. 그래서 글쓰기 훈련이 필요한 것이고 말이다. 폴 오스터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글쓰기는 자신에게 육체적인 일이라고, 자신은 단어들이 늘 정신이 아니라 육체에서 나온다고 느낀다고 말이다. 물론 그가 초보 작가이던 시절 글쓰기가 그에게 생존의 문제였던 탓도 있겠지만, 실제로 글쓰기가 시간과 체력의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일단 엉덩이를 붙이고, 정해놓은 시간에 적합한 장소에 앉아서, 정해진 분량을 써야 하는 인내가 기본이니까 말이다.

,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렇게 글을 쓰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너무도 바쁜 일상 속에서 애당초 글 쓸 시간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가. 매일같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해야 할 일들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떤 방법으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앤 라모트의 이 책은 그에 대한 거의 완벽한 해답을 들려 준다.

 

 

이것은 '작가라면 진정 어떤 식으로 진실을 말해야 옳은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역설적으로 말해, 작가는 궁극적인 진실을 찾아가는 사람이지만 그 길의 모든 단계에서 거짓말을 한다. 당신이 어떤 것을 꾸며 낸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진실의 이름으로 꾸며 낸다면, 그때는 진심을 다해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면 된다. 당신은 일부는 경험으로부터, 일부는 약간의 무의식으로부터 당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당신은 그들에 관해 정확한 진실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 비록 그들이 당신이 만들어 낸 허구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p.108

이 책은 미국에서 창작 워크숍이나 학교 수업에서 교재로 널리 활용되는 글쓰기 고전이자, 1994년 출간된 이래 25년째 변함없이 아마존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전 세계 16개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앤 라모트는 오랫동안 글쓰기 수업을 진행해왔고, 이 책 속에서 수업 당시 학생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와 그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러니까 글쓰기에 관해 경험으로 터득한 모든 노하우와 함께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의 실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글 쓰는 삶' 자체를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잘 쓰지 못할까 봐 두렵다는 이유로 글을 쓰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자신감이야말로 글쓰기의 원천이라고, 빈 문서를 앞에 두고 좌절과 외로움에 세차게 고개 저을 때에도, 앤 라모트는 아직은 책상을 떠나지 말라고 외친다. 그리하여 매일 일정 시간 책상 앞에 버티고 앉으면 뭐라도 쓰게 마련이고, 쓰다 보면 우리는 언젠가 나아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하루 종일 쓴 것이 읽고 보니 엉망진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좀 그러면 어떤가. 그냥 하던 대로 계속 밀어붙이고, 커다란 실수와 시행착오를 범하고, 많은 종이를 다 써버리라는 거다.

이렇게 실제로 글을 쓰는 방법과 스킬, 방법과 태도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앤 라모트만이 말해줄 수 있는 삶을 사랑하는 기술도 인상적이었다. "당신의 작품을 출간하는 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주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라는 그녀의 말처럼 앤 라모트에게 글쓰기론이란 인생론이기도 하다. 진짜 잘 쓴 소설을 손에 쥐었을 때 우리는 첫 페이지 다섯 단어만 읽고도 이미 자신이 지면에 인쇄된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시작한다. 내가 지금 어디에 앉아 있는지, 점심때가 되었는지 일할 시간이 되었는지 따위는 잊고 몽상의 세계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앤 라모트의 <쓰기의 감각> 역시 독자들에게 그러한 경험을 안겨준다. 빈 종이를 앞에 두고 단 한 줄도 쓰지 못하던 당신이라도, 이 책을 만난다면 뭐라도 쓰게 될테니 말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우리 감성에 맞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필요한 모든 요소는 이미 우리 내부에 존재한다." 그러니 이 책의 원제(Bird by Bird)처럼, 새 한 마리씩 한 마리씩, 차근차근 시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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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근현대 세계사 - 18세기 산업혁명에서 20세기 민족분쟁까지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오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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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시리즈>는 역사, 철학, 고전, 종교 등 다양한 분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리즈 중에서도 세계사의 방대한 지식을 알기 쉽게 정리한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와 《하룻밤에 읽는 근현대 세계사》는 세계사 분야 최장기 베스트셀러로 20년 가까이 사랑 받아왔다. 이 중 근현대사 부분만을 중점적으로 다룬 《하룻밤에 읽는 근현대 세계사》의 개정판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변화해온 세계의 역사를 새롭게 추가하고 더욱 풍부한 시각 자료들이 추가되어 있다고 하니, 18세기 후반부터 현대로 이어지는 세계사를 파악하고 싶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가이드가 되어줄 것 같다.

이 책은 18세기 산업혁명에서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쳐 20세기 민족분쟁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방대한 근현대사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시대별 핵심 키워드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역사의 큰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장점이다. 18, 19세기의 1부와 20세기의 2부가 전체 10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목차부터 주요 키워드들로 정리가 되어 있어, 눈에 쏙쏙 들어온다.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등장, 빅토리아 시대, 러시아의 남하정책 등의 키워드 만으로도 흐름이 보이는 구성이라 세계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 독자들은 물론,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 독자들에게도 유용한 책이 될 것 같다.

중간 중간 지도와 도표로 정리되어 있어 지루할 틈도 없고, 각 장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칼럼도 흥미롭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어떻게 되는 건지, 싱가포르의 실험은 성공하는 건지, 중국과 대만의 끝없는 전쟁과 남북한의 통일 문제 등 21세기의 중요한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을 다루고 있어 관심 있게 읽었다.

 

저자는 말한다. '현대사'는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고 연속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그러나 현대의 역사는 미로처럼 해독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2,3세대 혹은 여러 세대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보내는 메시지라고 말이다. 그는 현대사를 풀어 가는 키워드를 여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국민국가 시스템, 도시의 팽창, 철도 등의 다양한 인공적 네트워크의 성장, 기술혁신에 의한 기술 체계의 변화, 그것과 상호관계에 있는 사회 시스템의 변모이다. 19,20세기의 역사는 이러한 요인들이 서로 뒤엉켜 여러 가지 마찰을 낳음으로써 많은 사건과 함께 움직여 왔다. 그러니 우리는 잇따라 전개되어 온 각각의 사건을 연결, 평가하고 현재로 이어지는 변화의 방향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미 지나간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통해 현재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된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역사를 통해 과거의 세계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를 공부하는 일이야말로 과거 세계와 현재의 인간이 나눌 수 있는 대화인 셈이다. 특히 현대사는 가까운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내오는 편지이자, 우리가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미지의 시대를 파악하기 위한 지도이기도 하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이다. 그러니 우리는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 현재를 사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고, 문화적으로 더 발전하고, 여러 어려운 과제들을 헤쳐나갈 수 있다.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고, 현재는 다시 미래로 나아가게 마련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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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리커버 에디션)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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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다가오고 있는 모험이 되는 때가 있다. 그런 때 죽음은 운동을 일으키고, 흥미를 자극하고, 긴장감을 깨우고, 행동을 하게 하고, 마비를 일으킨다. 하지만 죽음이 더는 사건이 되지 못하는 그런 날이 온다. 그때 죽음은 그저 일정한 시간의 연장, 딱딱하고, 뻔하고, 특별한 것도 없고, 지루하고,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진정한 슬픔은 그 어떤 내러티브의 변증법보다도 강력하다.    p.60

가족의 예기치 못한 죽음, 그리고 그것이 촉발시킨 부채감과 죄책감은 남겨진 이들의 몫이다. 남겨진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니 말이다. 사실 모든 죽음은 갑작스럽다. 그러니 애초에 마음의 준비 같은 건 불가능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날들에 사실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지만 잊고 싶어 하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그 사건은 늘 불시에 일어나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곁에 있어 왔던 부모님을 막연히 영원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아 온다. 그러다 부모님이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부모님도 언젠가는 죽을 수도 있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게 되고, 막상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유한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애도의 과정은 나 역시 언젠가는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책은 20세기 후반 탁월한 프랑스의 지성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일기이다. 바르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다음 날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노트를 사등분해서 만든 쪽지 위에 주로 잉크로, 때로는 연필로. 그는 이 쪽지들을 세상에 내놓지 않고 책상 위의 작은 상자에 모아두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삼 년이 못된 어느 날, 그는 길을 건너다 트럭에 치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치료를 거부했고, 한 달 뒤인 3 26일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공식적으로는 사고사였지만 어떤 이들은 자살이라 부른다. 그가 어머니를 잃은 이후 2년간 써내려간 지독하고, 집요한 상실의 슬픔이 담겨 있던 쪽지가 세상에 나온 건 이후 30년이 흐른 2009년 이었다. <애도 일기>는 국내에 2012년에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이번에 새로운 디자인을 입은 리커버 에디션으로 출간되었다. 텍스트를 재해석한 판형과 아름답고 처절한 슬픔의 감성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표지로 더욱 인상적인 느낌이 드는 작품이 되었다.

 

 

기록을 하는 건 기억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이렇게) 기록을 하는 건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망각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자기를 이겨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그 고통을. 돌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없는 그런 것.   p.123

롤랑 바르트는 현대 비평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비평가이자 사상가이면서 뛰어난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애도 일기>는 바르트의 책 가운데 독자 입장에서 아마도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일 것이다. 너무도 감정적이고, 솔직하고, 인간적인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입장벽이 높은 바르트의 저작들과 다르게 쉽게 읽히지만, 그의 후기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그는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마망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그 사람 없이도 잘 살아 간다면, 그건 우리가 그 사람을, 자기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까? (p.78)'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게 마련이며, 따라서 우리는 늘 누군가를 잃고, 떠나 보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또 그는 해마다 열리는 상투적인 사교모임들을 보며 쓸쓸하고 울적하다. '찌르고 들어오는 아픔. 나는 또 생각한다: 마망은 이제 없다,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삶은 계속된다. (p.137)' 인간이란 상실을 숙명으로 삼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에, 우리에게 '애도'란 끊임없이 이야기되어야 할 테마이기도 하다.

'나를 갈가리 찢어지게 만들지만 동시에 다시 정신 차리게 만드는 것. 그건, 돌이킬 수 없다, 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p.100)'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은 얼마나 먹먹한 표현인가. 우리는 지나가 버린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 누군가에게 준 상처도, 지나고 하는 후회도, 한번 내뱉어 버린 말도, 어긋나 버린 시간도, 이미 엎질러진 실수도.. 절대 돌이킬 수 없다. 하물며 이번 생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강을 건너 죽음 너머로 가게 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차츰 나아진다고 말하는 이들은, 어쩌면 진정한 슬픔을 아직 만나지 못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 슬픔 그 자체를 지울 수는 없다. 바르트는 '이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결국 문학이 되고 말까 봐 두렵기 때문에. 혹은 내 말들이 문학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가 쓴 <애도 일기>는 슬픔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그럼에도 통속적이거나 신파적이지 않는, 놀라운 텍스트이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고 나서 매 순간 살아 있을 때 하지 못한 것들이 가슴에 사무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들은 그럴 때 글을 쓴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상황에서 그럴 수 없다면 이 작품을 읽으면 된다. 아마도 이 작품이 당신의 손을 잡아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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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지만 죽고 싶지 않아
오키타 밧카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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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 만화가가 직접 그린 자전적 코믹 에세이'라는 문구 때문에, 게다가 귀여운 캐릭터와 가벼운 분위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할 때 아무런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저자가 아무리 상황을 코믹하게 그려놓고 있어도,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작가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은 그러했지만, 이미 그 모든 시간을 거쳐 지금처럼 만화가로서 책을 내고, 일본 출판계 차트 역주행의 신화가 되었으니 과연 해피 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우울했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내가 그땐 그랬었지. 라는 식의 추억으로 치부하고 웃어 넘길만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었다. 저자는 초등학교 때 학습장애와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중학교 때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발달장애'라는 개념 자체가 익숙지 않은 시절이었기에 부모도, 선생님도, 그 누구도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그래서 전혀 배려 받지 못한 채 성장했다. 이 작품 속 니트로 역시 그렇다.

 

니트로는 잘 먹고, 잘 자고, 큰 병도 앓지 않았기에 모두들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모든 면에서 평범하고 건강한 여자아이로, 뭔가 다른 행동을 하더라도 아직 어린애니까 그렇겠지 라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다. 니트로에게는 타고난,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부모도 선생님도 모른 채 니트로는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별 것도 아닌데 니트로에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인 것들이 많았고, 니트로만의 규칙이 있어 매일 충실히 정해진 순서를 지켜 하교를 해야 했다. '친구'라는 존재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글씨를 쓰거나 뭔가를 배울 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었다. 니트로는 학교를 좋아하면서도 학교 규칙을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니트로는 사람들의 반응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부모와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 역시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반 분위기를 망치는 문제아로 낙인 찍혀 날마다 이어지는 체벌, 집단 따돌림을 당할 뿐 친구 하나 없는 나날, 엄하고 냉정한 태도로 일관하는 가족까지. ‘니트로의 학교생활은 하루도 평온할 수 없었다. 단체생활에 부적합하다,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 일부러 반항한다 등 온갖 몰이해와 오해 속에 억압당하며 괴로워하는 한 발달장애 아이의 아픈 성장기는 재미있게, 코믹하게 그려져 있지만 전혀 웃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특히나 선생님들의 폭력과 구박과 갖은 멸시들은 만화를 보면서 막 화가 날 정도로 어이가 없었는데, 이렇게 처절하게 학교에서의 시간을 견디는 아이의 상태를 부모가 전혀 알지 못했다는 점은 마음이 너무 아프기도 했다.

저자는 말한다. 30년 전 이야기이지만, 나에게는 어제의 일처럼 느껴진다고. 어른들은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을 겪었던 시간이 어느 정도 해결해줄 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상처란 결코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상처 위에 딱지가 생기고, 아물어서 괜찮은 것처럼 보일 뿐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작가가죽고 싶지만 죽고 싶지 않았다라고, 삶의 아이러니를 쿨하게 긍정한다고 해도, 그리하여 이토록 무거운 이야기를 너무도 유쾌하고도 경쾌하게 그려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이 작품은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슬픈 책이었다.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이상한 사람이 아니라이해 받고 싶은 사람일 뿐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이야기에 아주 조금만 신경 써서 귀 기울여주고, 그저 남들과 똑같이평범하게 대해주자. 저자의 바람처럼 언젠가는 발달장애가 이해 받는 세상이 되길 나도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은 자녀가 있는 부모들과 아이들을 대하는 선생님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내가 미처 몰랐지만 나의 아이가, 내가 무심코 지나쳤지만 나의 학생이 니트로가 거쳐온 이런 시간을 겪어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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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이야기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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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곡예사에게 중요한 것은 기술적인 숙련도뿐만이 아니었다. 관객들의 숨을 멎게 만들 정도로 타고난 재주와 성품이 무엇보다 우선이었고, 곡예사의 몸짓 하나에 자신의 목숨이 달린 것처럼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단순히 외모가 아름답고 성품을 갖췄다고 해서 완벽한 것도 아니었다. 제 아무리 외모가 빼어난 여자라고 해도 이를 뒷받침해 줄 순수한 신체적 기품과 민첩성, 강인함 없이는 첫 번째 시즌을 무사히 넘길 수 없었다.   p.146

 

1944, 독일, 열여섯 노아는 독일 군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다. 그녀의 아빠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다리를 절게 된 것을 자부심으로 여길 만큼 네덜란드인으로서 애국심이 대단한 사람이었기에, 딸아이가 독일 군인과 저지른 만행에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노아는 기차역에서 청소를 하며 생계를 꾸리다 출산을 하지만, 아이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어디론가로 입양된다. 그렇게 자신이 낳은 아이를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빼앗기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날 갓난아이를 가득 실은 유개화차를 발견하고, 빼앗긴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 중 하나를 안고 눈 덮인 숲으로 도망친다. 그렇게 유대인 아이를 키우게 된 노아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겨우 독일 서커스단에 거처를 마련하게 된다.

1942, 독일, 수 세대 동안 이어져 내려온 유명한 서커스 가문에서 태어나 자란 아스트리드는 독일군 장교와 결혼하기 위해 가족들 곁을 떠났었다. 그와 결혼해 베를린에서 생활한지 5년이 접어들 무렵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남편은 군수품을 관리하는 자리로 승진한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탄압은 계속 되는 상황이었고, 결국 상부에서 유대인과 결혼한 장교들에게 이혼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게 된다. 남편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며 그녀에게 이혼을 해야겠다고 말한다. 당장 독일 밖으로 떠나야 했지만, 가족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그때 그녀의 가문과 소문난 라이벌 관계였던 노이호프의 서커스단에서 그녀에게 함께 일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한다. 마침 서커스단의 공중곡예사가 부상을 당해 연기자가 필요하다면서. 그렇게 아스트리드는 서커스단에서 주연 곡예사로서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최근까지만 해도 서커스는 포탄이 오가는 전쟁에서 유일한 안식처였다. 마치 외부에서 벌어지는 세상사와 동떨어진 하얀 눈이 날리는 스노볼 세상처럼. 하지만 그 벽마저 금이 가서 부서지기 직전이 되어 버렸다. 다름슈타트에서 프랑스에 도착하면 안전해질 거라고 말했을 때 아스트리드가 보인 반응이 떠올랐다. "때부터 그녀는 진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그 어느 곳도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p.266

 

두 사람 모두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았다. 노아는 부모님에게, 아스트리드는 남편에게 버림받았고, 두 사람 모두 가족을 잃어 버렸다. 어떤 면에서는 처지가 닮은 두 사람이지만, 나이도, 성격도, 배경도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커스단에서 서른아홉의 아스트리드와 열일곱의 노아가 만난다. 서커스 단장인 노히호프 씨는 노아를 이곳에 머물게 하는 대신 공중 곡예를 시키겠다고 선언한다. 순회공연 때까지 6주가 남았지만, 그렇게 단기간에 아무 가능성도 없는 애를 훈련시킨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렸다. 갓난아기를 자신의 동생이라고 속인 노아가 탐탁치 않은 아스트리드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훈련시키기로 한다. 유대인인 자신을 숨겨 주기 위해 서커스 전체가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훈련은 맡았지만, 아스트드리드는 노아가 며칠 도 못 버티고 그만두겠다고 하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비밀과 반감으로 인해 라이벌처럼 시작해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끈끈한 연대감을 쌓아 특별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위험한 시대였고,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있었던 이들에게 거짓말과 상처와 비밀이란 너무도 익숙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기도 했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목숨을 끊기도 하는 그런 시대였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암울하고, 무섭고, 외로운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서커스단이라는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상적이지 않은 소재 때문에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저자는 객차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아기가 가족 품에서 떨어져 집단수용소로 이송되었다는 '이름 없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와,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무렵 유대인들에게 거처를 제공해 준 독일 서커스단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고,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전쟁 중에도 계속된 서커스 곡예처럼, 2차 세계대전 당시 불의에 맞서 싸운 용감한 이들을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이 뭉클하게 와 닿았다. 서커스의 마법처럼 놀랍고, 아름다운 작품이고, 슬프고, 감동적인 역사 로맨스 소설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저자인 팜 제노프는 이 작품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을 여러 편 발표했다고 하는데, 그녀의 다른 작품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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