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어라, 내 얼굴 슬로북 Slow Book 4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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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 소설이니 수필이니 이름 붙이기가 애매한 잡스러운 얘기들. 하지만 뭔가 있는 듯한. 가슴을 울리거나,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거나, 낄낄대고 싶거나, 통쾌하거나, 애틋하거나, 뭉클하거나.... 그런 소소한 얘기들을 야담이라고 하자.

지금도 타고난 야담가들이 있다. 어느 조직이나 꼭 한두 명은 있다. 한 사람이 없어지면 다른 누가 나타나 좌중의 이목을 붙들고 동료의 이성과 감성을 들었다 놓는 이야기꾼을 자처하기 마련이다.   p.74

작가정신의 새로운 산문집 시리즈인슬로북, 네 번째 책이다. 슬로북은마음의 속도로 읽는 책으로, 자신의 속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능동적인 삶의 방식이자 일상의 혁명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획된 에세이 시리즈이다. 백민석의 쿠바 여행 에세이 <아바나의 시민들>, 박상의 본격 뮤직 에세이 <사랑은 달아서 끈적한 것>, 함정임이 들려주는 치유의 산문집 <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했어도>에 이어, 데뷔 20년차 생계형 소설가 김종광의 에세이 <웃어라, 내 얼굴>이 출간되었다. 속도지상주의 시대에느려질 수 있음의 가능성을 발견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시리즈라 그런지, 출간되는 책들마다 특별한 분위기와 색깔을 지니고 있어 이번 책도 기대가 되었다.

이 책은 올해로 데뷔 20년차를 맞는 소설가 김종광이 그 동안 쓴 1500여 개의 산문 가운데 가려 뽑은 126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페이지 수가 두툼한 편은 아니니, 각각의 글은 두 세 페이지 정도의 아주 짧은 분량이다. 가족이야기부터 소소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개인적인 생활과 삶이 모두 담겨 있는 글이다. 진지한 이야기도 있고, 뭉클한 이야기도 있고, 애처로운 이야기도 있고, 공감되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공통점은 하나같이 유쾌하고, 재미있다는 것이다. 짧지만 임팩트 강한 한 방이 거의 모든 글에 담겨 있어서, 페이지가 아주 쓱쓱 빠르게 넘어가는 책이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가 늘 하는 소리가 있다. "언제쯤 내가 20쪽 이상 재미있게 읽는 소설을 쓸 것이냐?" 그토록 재미없는 소설만 써온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좀 뻔뻔하지만, 어떻게 먹고 살려고, 이토록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으로, 도무지 뭔 스토리인지 종잡을 수 없는 소설을 쓴 것일까? 소설 좀 읽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도 이해 불가능한 소설들이 있다. 소설만 읽고 써왔다는 소설가들끼리도 서로 공유가 안 되는 것이 재미라는 거다. 그러니 모든 독자들을 아우르는 재미라는 건 있을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p.259

나는 어느 날 아내에게 묻는다. "대출 언제부터 가능해? 아내가 대책 없는 얼굴로 대답한다. "기약 없지. 무리해서 대출할 필요 없잖아." 사실 그들은 인근 도서관에서 책을 열심히 빌려보던 중, 바빠서 반납일을 넘기고, 책을 한 권 잃어버려 장기간 연체를 한 대가로 한 달도 넘는 대출 정지를 당한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원래 목적했던 말을 꺼낸다. "그럼 살까?" 도서관에서 대출을 할 수 없으니 책을 사서 보자는 거였다. 그런데 아내의 대답은 "우리 형편에 어떻게 사?" 나는 요새 벌어다 준 돈이 부족해서 그러나 싶어 서운하고, 울컥해서 말한다. 우리가 책 몇 권 살 형편은 되지 않냐고. 갑자기 아내가 깔깔대고 웃기 시작한다. 아내는 대출해서 전세를 가든 집을 사든 하자는 얘기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주공임대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수록작 중에 '대출 세계관'이라는 에피소드의 내용이다. 모든 글들이 다 이런 분위기라고 보면 되다. 소소해 보이지만 누구나 겪어 봤을 법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공감을 그리고 있고, 현실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이야기의 어조는 가볍고 유쾌하다. 그래서 종종 피식 웃게 되고, 어느 순간은 깔깔거리고 배를 잡게 되는 기분 좋은 책이었다.

저자는 극중 에피소드에서 '시니 소설이니 수필이니 이름 붙이기가 애매한 잡스러운 얘기들. 하지만 뭔가 있는 듯한' 소소한 얘기들을 야담이라고 할 때, 세상 모든 어머니들은 이야기꾼에 야담가라고 말한다. 그런데 독자 입장에서 김종광의 산문이 딱 그런 느낌이다. 소소하지만 의미 심장하고, 애틋하지만 유머스럽고, 뭔가 가벼워 보이지만 결국 뭉클한 잔상을 남기는 그런 글들이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이야기꾼'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맛깔 나는 책이다. '왜 우스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웃기는, 겉으로 웃지 않아도 속으로 웃게 만드는, 꼭 웃음으로 표현되지 않아도 뭔가 즐거움이 느껴지는, 이 모든 것이 재미'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재미들을 독자들이 오롯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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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나라의 앨리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8
루이스 캐럴 지음, 김민지 그림, 정윤희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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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왕의 꿈에 나오는 여러 가지 중 하나에 불과하니까. 너도 네가 진짜가 아니란 걸 알잖아."

"난 진짜라고요!" 앨리스는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을 쥐어 짠다고 해서 네가 진짜가 되는 것은 아니야." 트위들디가 말했다.    p.100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여덟 번째 책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작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호기심 강하고 똑똑한 꼬마 숙녀 앨리스를 통해 신나고 독창적인 모험의 세계를 거침없이 보여 준다. 거울 속 반대편 세상을 탐험한다는 기발한 관점에서 상상력과 극도의 환상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너무 좋아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루이스 캐럴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전편이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배경과 주제와는 상반되는 거울 이미지를 보여준다. 전편은 따뜻한 5, 야외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카드놀이의 이미지가 주로 사용되었다면, 이 작품은 추운 11월에 실내에서 시작되며 시·공간이 자주 바뀌고 체스의 이미지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두 작품을 비교해 가면서 읽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앨리스는 전편에도 등장했던 고양이 다이나와 아기 고양이들과 흉내 내기 놀이를 하며, 거울 속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이 전부 반대 방향에 있다는 것만 빼면 우리 거실이랑 똑같이 생긴, 거울 속에 있는 방. 거울 속의 집에서 살면 어떨까? 그렇게 거울 속의 집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상상해 본다. 거울이 거즈처럼 부드러워서 우리가 거울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갈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다 정말 거울이 반짝거리는 은색 안개처럼 뿌옇게 변하고, 앨리스는 거울을 통과해 거울 속의 방으로 사뿐히 뛰어 내린다. 그렇게, 앨리스는 거울을 통해 반대편 세상으로 들어가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앨리스는 그저 사자와 유니콘, 그리고 앵글로 색슨 전령들이 나오는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두 케이크를 자르던 그 커다란 접시가 앨리스의 발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꿈을 꾼 게 아니라는 건데." 앨리스는 혼잣말을 했다.

"우리가 같은 꿈의 일부분이 아니라면 말이야. 그렇다면 붉은 왕의 꿈이 아니라 바로 나의 꿈이면 좋겠어!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으니까."   p.175

하얀 여왕과 붉은 여왕, 사자와 유니콘, 트위들덤과 트위들디, 험프티와 덤프티 등 사랑스러운 캐릭터들과 함께 하는 거울 속 세상이야기는 아이와 함께 읽어도, 어른이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만큼이나 잊을 수 없는, 인상적인 캐릭터들이 정신 없게 등장한다. 거울 속 세상이라서, 뭐든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하얀 여왕은 손가락이 뭔가에 찔리기도 전부터 아프다고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 브로치가 풀리면서 손가락을 찔리고, 정작 피가 나는 그 순간에는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벌써 아프다고 소리를 쳤고, 이제 와서 다시 비명을 지른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것이다. 회상은 항상뒤돌아보지만은 않는다. 하얀 여왕은다다음 주에 일어날 일을 기억한다. 이렇게 이야기는 뒤죽박죽, 정신 없이 흘러 가지만 루이스 캐럴의 놀라운 상상력과 김민지 작가의 아름다운 일러스트가 만나면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고전 명작을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함께 다시 읽는 즐거움을 주는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리커버북은 기존 시리즈보다 판형이 커져 가독성을 높였고, 클래식한 패턴과 고급스러운 골드 프레임으로 표지가 더 고급스러워져서 소장용으로도 가치가 있다.

개인적으로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에서 <어린 왕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 등을 그린 김민지 작가의 일러스트를 좋아한다. 이번 작품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도 김민지 작가의 사랑스럽고 환상적인 컬러 일러스트를 가득 만날 수 있다. 따스하고 포근한 색감과 터치로 그려낸 세밀한 이미지들은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쳐도 바로 현실을 잊고 추억에 빠져 들도록 만들어 준다. 기존 시리즈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리커버북은 소장용으로도 좋을 것 같고,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맞아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용으로 구입해도 좋을 것 같다. 150여 년 전에 출간되어 누구나 아는 작품이지만, 환상적인 일러스트와 함께 만나면서 더욱 매혹적인 작품으로 변신해, 지금 다시 읽어도 새로운 감동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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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기자의 글쓰기 수업 - <씨네21> 주성철 기자의 영화 글쓰기 특강
주성철 지음 / 메이트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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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게 진심을 숨기고 직업적 글쓰기에 매진하는 순간에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어떤 영화에 대해 쓰는 행위 자체도 결국 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항해여야 한다. 이 영화를 통해, 이 주인공을 통해 결국 나를 들여다봐야 하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도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끔 글을 통해 영화와 관객 사이의 매개자가 되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우리의 근본적인 목표다.   p.35

<씨네21> 주성철 기자의 '영화 글쓰기'에 관한 책이다. 주성철 기자는 2000 4 1부터 35권의 <키노>, 155권의 <필름 2.0>, 571권의 <씨네21>을 만들고 있는, 그야말로 영화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거의 모든 영화 잡지를 거쳐온 인물이다. 20년 가까이 영화기자 생활을 해왔고,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영화 종이잡지' <씨네 21>의 편집장이 들려주는 '영화 글쓰기'란 어떤지 너무 기대가 되었다. 나도 한때 일주일에 영화를 6~7편씩 볼 정도로 영화광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잡지 <스크린> <로드쇼>, <키노> <프리미어> 그리고 <무비위크> <필름 2.0>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잡지를 매주, 매월 구독했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 책은 여타의 글쓰기, 작법에 관한 책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움직이는 영화를 굳이 멈춰선 활자로 풀어 쓴다는 행위'는 문학적인 글쓰기와 태생부터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영화에 대해 쓴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결핍을 안고 시작될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이 책에서 다루는 글쓰기의 글이란 그냥 블로그에 쓰는 에세이가 아니라, 특정 매체의 게재를 목적으로 한 청탁 받아 쓰는 '광의의 모든 영화글'이다. 영화기자나 영화평론가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그야말로 최고의 가이드가 되어 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혹은 대체 영화기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던 사람들, 현재 유일하게 남은 23년 전통의 오프라인 영화잡지 <씨네21>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궁금했던 사람들에게서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책이 될 것 이다.

 

영화와 다른 예술과의 가장 큰 차이점에 대해 '영화는 책갈피를 꽂아둘 수 없는 예술'이라고 말하곤 한다. 영화는 강물처럼 1초에 24프레임이 흘러가버리는 예술이기에 써야 할 장면이 기억나지 않으면 사실상 거기서 끝이다. '아는 만큼 쓸 수 있다'는 말을 바꿔서 영화글은 자기가 '기억하는 만큼' 쓸 수 있다.    p.215

지금은 사라져버린 한국 영화잡지의 역사들을 정리해둔 챕터에서는 오래 전 그 시절이 떠올라 추억에 젖어 보기도 하고, 영화기자의 치열한 일상에 대한 챕터를 읽으면서는 새삼스레 감탄하기도 했다. 특히나 흥미로웠던 챕터는 <씨네21> 기자의 일주일, 그리고 1 365일이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부분이었는데, 이 대목은 영화기자를 꿈꾸는 이들에게도, 그저 취미로 영화를 즐겨 보고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기자로서 써왔던 영화에 대한 글이나, 한국 영화에 대한 단상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새삼스레 저자의 20년 내공이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 리뷰를 쓰는 방법, 감독과 인터뷰하는 노하우 등도 매우 흥미진진했고, 그가 써온 글들과 취재의 배경과 뒷이야기 등도 담겨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관련된 챕터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문학적인 글쓰기와 차별화된 영화 글쓰기에 대한 팁과 노하우들이 굉장히 많이 담겨 있다. 영화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기억하는 만큼 쓸 수 있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일단 시작하면 자기 마음대로 감상을 중단할 수 없다. 내가 졸더라도 영화는 계속 흘러간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문학 비평이라 하면 써야 할 대목과 장면이 떠오르지 않으면, 책을 다시 보면 된다. 음악이나 미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반복해서, 혹은 찾아볼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영화관에서 최긴 개봉영화를 볼 때는 그럴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방법은 영화를 보면서 메모를 하거나, 영화를 한 번 더 보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글은 기억력과의 싸움이니 말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특성과 그러한 영화에 대한 글쓰기를 할 때 중요한 점에 대해서는 그 어떤 글쓰기 관련 책에서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 영화계에 있었고,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여전히 현장에서 뛰고 있는 저자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노하우가 담겨 있기에 이 책이 더욱 특별한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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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잡학사전 -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우리말 속뜻 사전 잘난 척 인문학
이재운 지음 / 노마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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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스건/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영웅 아킬레스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서 발뒤꿈치 위에 있는 힘줄을 가리킨다. 유일한 약점인 발뒤꿈치를 빼고는 불사신이었던 아킬레스가 트로이 전쟁 중에 적장 파리스의 화살을 발뒤꿈치에 맞고 죽은 데서 그곳을 아킬레스건이라 부른다. 오늘날 이 말은 반드시 발뒤꿈치 힘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가지고 있는 어떤 '치명적인' 약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p.43

중국 삼국시대, 진나라의 장군 두예는 오나라 공격에 나서 싸울 때마다 승리해 오나라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큰 홍수가 나서 강물이 크게 불어났고, 부하들은 일단 후퇴하여 겨울에 다시 진격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때 두예 장군은 우리는 지금 승세를 타고 있으며, 마치 대나무를 쪼갤 때 칼을 대기만 해도 대나무가 쭉쭉 쪼개지는 그러한 상태이니, 지금의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공격에 나섰고, 연전연승으로 오나라를 완전히 정복해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바로 '파죽지세'라는 단어의 유래이다. 이 책은 우리가 무심코 써왔던 말의 '기원'을 따져 그 의미를 헤아려보는 '우리말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고조선시대, 부족국가를 시작으로 고려, 조선, 개화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구분되어 있어 당새의 사회의 문화, 정치, 생활풍속 등을 만나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갑오개혁 이후의 개화기에 외국 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각국의 도박도 여러 가지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중 일본에서 들어온 화투와 중국에서 들어온 마작, 십인계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십인계는 1에서 10까지의 숫자가 적힌 바가지를 이리저리 섞어서 엎어놓고 각각 자기가 대고 싶은 바가지에 돈을 대면서 시작하는 노름이다. 바가지의 숫자를 확인하고 돈을 갖게 되는데, 손님 중에 아무도 맞히지 못했을 때에는 물주가 모두 갖게 된다. 이렇게 바가지에 적힌 숫자를 맞히지 못할 때 돈을 잃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을 '바가지 썼다'고 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가지 쓰다라는 말이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다는 것도, 그리고 도박의 한 종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재미있었다. 이렇게 이 책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단어들의 어원과 그 배경을 알려주어, 역사와 문화 상식도 넓혀주며 우리말 교양서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시치미 떼다/몽골의 지배를 받던 고려시대에 매사냥이 성행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사냥매를 사육하는 응방이란 직소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당시 궁궐에서부터 시작된 매사냥은 귀족사회로까지 번져나가 많은 이들이 매사냥을 즐겼다. 이렇게 매사냥 인구가 늘어나다 보니 길들인 사냥매를 도둑맞는 일이 잦아졌다. 이 때문에 서로 자기 매에게 특별한 꼬리표를 달아 표시했는데 그것을 '시치미'라고 했다. 이처럼 누구의 소유임을 알려주는 시치미를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데서 '시치미를 뗀다'는 말이 나왔다.   p.139

우리말은 원래 알타이어 계통으로 시작하여 만주어, 몽골어, 퉁구스어, 일본어, 터키어 등과 같은 갈래이지만, 불교와 도교 등의 수입으로 문자가 절실하던 삼국시대에 한자 한문을 문자로 도입해 쓰면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순우리말도 발음이 비슷한 한자로 표기하거나 아예 말 자체를 바꾸는 일이 많았고, 조선 말기에는 유럽의 어휘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어가 홍수처럼 밀려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니 오늘날의 한국어에는 어원이 또렷하지 않은 어휘가 생각보다 많고, 뜻을 알 수 없는 말도 마구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우리말의 어원을 알아 가는 과정은 재미도 있었지만, 공부도 되었고,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되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저자는 세월이 흘러도 우리말이 언제 어디서 생겼는지, 어떻게 쓰였는지 우리 후손들에게 제대로 전하려는 욕심에서 우리말 어원을 정확히 기록하려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인문학적 교양을 필요로 하는 청소년과 일반인들에게사전답지 않은 사전, 사전 이상의 사전'으로서 역할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국내외의 다양한 문헌을 근거자료로 하여 백과사전에서 제공하지 않는 풍부한 상식과 정보를 담고 있어 전혀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는 점도 장점이다. 두툼한 부록도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한자에서 태어난 우리말 240가지, 불교에서 들어온 우리말 171가지와 우리말의 탄생과 진화에 관련된 다채로운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노마드에서 나오고 있는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영어잡학사전에 이어 우리말 어원사전 역시 시대와 교감할 수 있는 온갖 지식들이 펼쳐지는 책이라 두고 두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서 읽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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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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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아마 망자들도 살아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일 것 같아. 철도와 기적 소리 때문에 점점 좁아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찾은 망자도 있을 테고, 못 찾은 경우도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 살아남아서 잘 사는 경우도 있을까?"

나를 놀라게 하는 염의 재주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넌 지금 행복해? 너 스스로도 톱니바퀴가 된 것처럼 온종일 증기기관을 돌리면서 사는 삶이 행복하냐고. 넌 꿈이 뭐야?"    -'즐거운 사냥을 하길' 중에서, p.99~100

어린 시절, 엄마는 특별한 장난감을 만들어 주곤 했다. 엄마가 포장지를 식탁에 펼쳐 놓고, 이리 저리 접기 시작하면, 아무리 달래도 그치지 않던 울음을 그치고 나도 모르게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가만히 지켜보게 되었다. 잠시 후 엄마는 꼬깃꼬깃 접은 종이 덩어리를 입에 대고 풍선처럼 숨을 불어넣었다. 식탁 위에는 주먹 두 개를 합친 크기의 조그마한 종이 호랑이가 서 있었다. 내가 손을 뻗으면, 그것은 꼬리를 움찍거리다가 내 손가락을 향해 신나게 덤벼들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엄마의 종이 접기는 특별했다. 엄마가 숨을 불어넣으면 종이는 엄마의 숨을 나누어 받았고, 엄마의 생명을 얻어서 움직였다. 그건 엄마의 마법이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짧은 소설 <종이 동물원>은 그야말로 놀라운 이야기였다. 표제작인 이 작품은 휴고 상, 네뷸러 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모조리 석권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세 가지 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건 40년 동안 최초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오래된 신예였던 켄 리우는 세계 SF 판타지 문학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작가가 된다.

전체 열네 편의 중단편 소설로 구성된 이 책에는 판타지, 하드보일드, 대체 역사, 스팀 펑크, 중국 전기 소설 등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넘나드는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보통 단편집의 경우,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고 하더라도 각각의 완성도가 모두 훌륭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독자 입장에서도 읽을 때, 대충 읽게 되는 이야기가 있고, 공감하고 감탄하면서 읽게 되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말이다. 사실 열 몇 편 중에 한 두 편만 마음에 남아도, 그 책은 좋은 작품이었다고 인상에 남기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켄 리우의 이 책은 한 편, 한 편 모두다 너무도 뛰어나고, 놀랍고, 대단했다. 각기 다른 장르만큼이나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상상력도 기발했고, 그 속에 담고 있는 정서도 감동적이었고, 탄탄한 문장과 적확한 표현들로 완성도도 뛰어 났으며,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만드는 장르적 재미 또한 기가 막혔다. 특히나 장르 문학에 대한 편견이 있는 독자들에게 SF 환상문학에서도 순문학 만큼의 완성도와 감동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일상과 환상이 만나는 지점을 황홀하게 드러내는 놀라운 이야기들이라는 워싱턴 포스트의 평이 절대 과장이 아님을 열 네 편의 작품으로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삼라만상을 집어삼킨다.

그러나 모든 생물종은 대를 이어의 지혜를 전수하는 나름의 독특한 방법이 있다. 사유를 눈에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거스르지 못할 시간의 파도에 맞서는 방파제처럼 잠시나마 동결된 것으로 만드는 방법 말이다.

모두가 책을 만든다.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 중에서, p.195

사실글쓰기가 보람 있는 노고인 것은 오로지 우리 정신이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는 가능성 덕분이라는 저자의 머리말을 읽을 때부터 예감했다. 이 책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 같다는 것을. 그리고 표제작이자 첫 번째 수록 작품인 <종이 동물원> 을 읽고 나서는, 우선 책을 덮고 인터넷 서점으로 가서 켄 리우라는 작가에 대한 신간 알림을 신청했다. 단편 소설 한 편을 읽었을 뿐인데, 앞으로 무조건 챙겨보고 싶은 작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대체 왜 이런 작가의 작품이 이제야 국내에 출간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나는 켄 리우라는 작가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한 작품, 한 작품 정말 천천히 아껴서 읽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하는 주옥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개인의 모든 결정을 인공지능이 대신해주는 디스토피아, 인격을 가상현실로 복제해서 체험하는 기계가 등장하는 이야기, 그리고 문화 대혁명, 대만 2.28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일본군 731부대의 잔학성을 다큐 형식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 등 SF 환상문학의 카테고리로 포함되어 있지만, 판타지가 줄 수 있는 허구보다는 현실이라는 드라마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다.

SF 환상문학이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독특한 세계관이나 어려운 용어들로 인해 접근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쉽게 말해 이들 장르소설들은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 지루한 초반의 진입 장벽을 깨야 하고, 딱딱하고 어렵다는 통념이 있다. 그런데 켄 리우의 작품은 그 모든 통념과 편견을 모두 깨고 있다. 물론 다루고 있는 소재들과 이야기의 장치들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법한 독특한 소재도 있고, 누구나 실생활에서 쉽게 생각해 볼 만한 소재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독특한 소재도 어렵지 않게, 평범한 소재도 진부하지 않게 그려내고 있으며,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깊이 있는 사유와 자신만의 철학을 그 속에 녹여내고 있다. 무엇보다 이야기들이 모두 감동적이고, 우아하고, 아름답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하는 것은 타인들의 삶으로 이루어진 그물 속에서 차지하는 자리이다.

 

왜 우리는 소설을 읽는 것일까. 왜 바쁜 일상 속에서 굳이 시간을 내고 돈을 들여 머리를 써가며 허구의 이야기를 읽는 것일까. 그에 대한 완벽한 답이 바로 이 책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만나고 싶어서 소설을 읽는다. 이 책은 내가 왜 소설을 사랑하는지, 왜 이야기에 매혹되는지에 대한 탁월한 사례이기도 하다. 내 책장에는 매주 신간들이 엄청난 속도로 쌓여간다. 어떤 작품들은 이미 완벽한 망각 속에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고, 그나마 관심 있는 책들만 읽는다 해도 책들이 출간되는 속도를 따라잡기 버거운 상황이지만, 나는 켄 리우의 책을 한 번 더 읽고 싶어 졌다. 나는 되풀이해 거듭 읽고 싶어지는 소설들을 사랑한다. 물론 내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으로는 훌륭한 문학작품들을 모두 읽어볼 만한 기회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평균적인 수명으로 우리가 매일 같이 책을 읽어도 죽을 때까지 세상의 모든 책들을 읽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 리우의 작품은 또 읽고 싶다. 더 이상 무슨 찬사가 필요하겠는가. 그저 읽고, 읽고, 또 읽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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