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론도 스토리콜렉터 70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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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시 우리 중에 도를 넘은 사람들이 있었어.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되는 법이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야.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날 거라고."

"꼭 그렇진 않아. 우리 모두가 계속 입다물고 맞서 싸우면 돼.

슈나이더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맞서 싸운다고? 미안하지만 승산이 없을 텐데."

"있잖아.... 어제저녁부터 쭉 생각해봤는데, 우리에게 승산이 있을까? 어느 정도 희생을 치러야 이길 수 있을까?"    p.78

안드레아스 그루버의 마르틴 슈나이더와 자비네 시리즈 그 네 번째 작품이다. 전작이었던 <죽음을 사랑한 소년>이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 슈나이더의 충격적인 선택으로 끝이 났었기 때문에, 더욱 그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했었다. 원래 이 시리즈는 삼부작으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하니,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을 파격적인 결말로 마무리했던 것도 이해가 되긴 하지만, 그래서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다행히도 후속작 출간을 요청하는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시리즈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 그렇다면 과연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사람을 총으로 쐈던 슈나이더는 어떻게 됐을까.

이 작품은 슈나이더가 체포되어 정직 처분을 당하고 9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된다. 슈나이더가 아카데미 교단에 서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대신 수업을 맡았던 동료가 출장을 가게 되면서 자비네가 여름방학까지 남은 한 달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자비네는 슈나이더의 공판에 주요 증인으로 참석했었고, 이후에는 그와 전혀 만나지 못했다. 만나기는커녕 조언을 구한 적도 없었으며 모든 사건을 혼자서 해결해왔다. 실제로 이 작품의 초반부에는 슈나이더가 사건에 거의 개입하지 않고, 그의 두 제자인 젊은 수사관 자비네와 티나가 주도적으로 수사에 나서는 모습이 그려진다. 거의 300여페이지가 지나서야 슈나이더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으니 말이다. 무모하리만큼 호기심 많고 고집스러운 자비네가 아무리 사건을 재구성하는 능력이 뛰어 나고, 이해할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시리즈의 진짜 주인공은 사실 슈나이더이다. 그는 범죄 분석에만 25년 경력을 가진 전문가로, 법의학과 범죄심리학 공부도 했으며 유럽공동경찰기구의 멤버이기도 하지만, 마리화나를 피우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기를 죽이고 스트레스를 주는 독특한 캐릭터이다. 그는 현장에 가서 사건을 다시 분석하고, 사건을 가능한 세분화하면서 마리화나를 피우고 살인범의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수사를 해왔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만큼 능력 또한 독보적이니 말이다.

 

 

당신, 왜 그랬지?

불현듯 그는 이레네와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떠나기 전에 할 말이 있었다. 이레네의 영혼이 아직 방에 있음을 알았다. 게다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따뜻한 말 몇 마디 해주기를 바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차갑고 생명이 없는 몸을 이 방에서, 이 집에서, 그리고 이 지역에서 떠나기 전에.    p.409

한 남자가 고속도로 위를 전속력으로 역주행해서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단순 실수라고 보기엔 정황상 운전자는 아예 죽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사망자는 연방 범죄수사국 경정으로 다섯 살 된 아들을 혼자 키워왔다. 대체 그는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자택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목이 목이 부러져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여자가 슈나이더 대신 수업을 맡았던 안나 하게나의 친언니로 밝혀진다. 그리고 얼마 뒤 안나 하게나는 철로 위에 차를 세워둔 채 자살한다. 이어 만찬석상에서 나와 다리 밑 철로로 뛰어내린 여자, 그리고 욕실에서 자신의 턱을 총으로 쏜 남자 등 자살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는데, 모두 연방 범죄수사국 수사관과 그 가족들이었다. 자비네는 동료들이 연이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사건의 발단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슈나이더에게 수년간 지겹게 들어왔던 말처럼, 우연이란 절대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무엇이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사건을 추적할수록 모든 단서와 연결고리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이들 모두 20년 전 마약전담반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비네는 슈나이더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지만, 그는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즉각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순순히 사건을 포기할만한 자비네가 아니었다. 극중 슈나이더가 자비네에게 "당신은 과거의 작은 다람쥐가 아니야. 야생 고양이가 됐소."라고 말할 정도로 기존 시리즈에 비해 자비네는 이번 작품에서 독립적으로 수사를 펼치기 시작한다. 과연 20년 전 과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이유라면 대체 왜 이제야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리고 죽은 수사관들과 슈나이더와의 관계는 무엇이며, 슈나이더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이야기를 읽는 내내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페이지 끝까지 달려가는 작품이었다. 특히나 이번 작품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존 시리즈에서 거만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며 결코 속마음이라고는 보여주지 않았던 슈나이더가 처음으로 조금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태도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면, 이번 작품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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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 - 14년 차 번역가 노지양의 마음 번역 에세이
노지양 지음 / 북라이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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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래도 가끔은 나의 수많은 하루 중 어떤 하루나 어떤 순간을 일부러 기억하기 위해서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번역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내 안에 영원히 남는다. 오래도록 나를 떠나지 않고 나만의 이미지가 되고 문장이 되고 내 인생의 일부가 된다. "그날 기억해?"라고 묻는 친구가 되고 과거의 한 시절을 함께 겪은 동지가 된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박제한 사진이 되고 영상이 된다.    p.75

문학소녀였다가 영문학을 전공하고 방송 작가가 되었다가 현재는 번역가로 14년 넘게 일하며 80여 권의 책을 번역한 노지양 번역가의 첫 번째 에세이이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헝거>를 비롯해 누구나 알만한 작품들을 꽤 많이 번역한 그녀는 이제 중견 번역가이다. 대표작이라 할 만한 번역서도 있고, 먹고 사는 데 별문제 없다고 봐도 무방할 만한, 그녀는 오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방송 작가 시절에는 원고를 쓰고 청취자 사연을 정리하느라 내 글을 쓸 시간과 여유가 없었고, 번역을 할 때는 종일 모니터 앞에서 문장을 다듬느라 지쳐서 일하는 시간 외에는 절대 노트북 문서창을 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매일 일정 시간 가사 노동을 하고 7시 반이면 집에 들어오는 남편과 성장기 아이를 위해 꼬박꼬박 저녁을 해야 하는 주부였다. 당연히 오후 6시 이후와 주말은 내 시간이 아니기에 글을 쓸 시간과 에너지를 도저히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꾸준히 해보지 못한, 시작도 하지 못하고 묻어둔 꿈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이가 누가 있을까. 이 책은 더 이상 '머리로만 책을 쓰고' 싶지 않았던, 글을 쓰지 못해 만성 욕구불만이었던 문학소녀가 드디어 자신의 꿈에 첫 발을 내딛게 된 순간이자, 그녀와 같은 수많은 이들에게 아직 늦지 않았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다정한 마음이다. '먹고 살고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행복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다'는 걸 아는 당신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뭉클하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하고, 격려 받는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잠재력, 'potential'이란 보통 성취나 재능의 영역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다. 아직은 가능성이다. 본인의 노력 여하와 기회와 행운 여부에 따라 펼쳐질 수도 있고 영원히 잠재력으로 머무르거나 조그만 점이 되었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

가끔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청소기를 밀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이번 달에 번역할 책을 넘겨보면서 이 생활도 나쁘지는 않지만 '무언가 더 있지 않았을까?'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가 갈 수도 있었지만 가지 못한 길을 하나하나 헤아려본다.   p.127

이 책은 솔직하고, 재미있고, 맛깔 나는 에세이라 술술 읽혀서 좋았지만, 번역가로서의 장점을 살려 매 챕터를 영어 단어에서 시작한다는 점이 더 매력적이었다. 영어와 한국어의 경계에서 분투한 15년의 세월이 남긴 단어들을 그녀만의 독특한 시선과 감성으로 재해석된 단어들에 대한 에피소드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성공하다' 라는 뜻으로 쓰이는 ' go places'에 대한 챕터에서는 동네 마트를 벗어나고픈 주부로서의 열망이 그려져 있고, '소박한, 허세가 없는'의 뜻을 가진 'down to earth'의 챕터에서는 가족과 부모님에 대한 뭉클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스스로 자초해 비참하게 만들다'는 뜻으로 쓰이는 'embarrass'에 대한 챕터에서는 영화 <라라랜드>의 주인공 미아를 통해서 '간절함과 포기 안 되는 마음'이야말로 진짜 재능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그녀가 살아오면서 크고 작게 자존심을 다쳤던 수많은 실패의 경험들을 들려 준다.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해 궁금했던 이들이라면, 너무도 가감 없이 솔직하게 들려주는 번역이라는 일에 대해 속 시원히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미 이름이 알려진 중견 번역가이면서도, 자신의 번연가로서의 단점과 구차한 뒷이야기들과 일상에서의 허점투성이인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인간 노지양으로서의 매력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번역가 노지양이 아닌, 인간 노지양에게 관심이 생겼다. 까딱하면 좌절하기와 무턱대고 희망 품기를 무한 반복하는 특유의 철없음을 응원하고 싶어 졌고, 산책과 몽상을 즐기며 아름다운 단어에 매료되는 소녀 같은 모습들이 글속에 그대로 담겨 있어 사랑스러웠다. 언젠가 만나게 될 그녀의 '소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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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은모든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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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여기저기 아프고 힘들어서 나 죽겠다, 못 살겠다, 하는 사람도 차분하게 자기가 딱딱 계획 세워서 저세상 갈 수 있도록 허락을 해준다는 얘기야. 얼마나 좋아그래."

할머니는 끙, 하는 소리를 내고 일어나더니 함께 축배를 들자며 찬장에서 살구주를 꺼내왔다. 언니는 할머니의 과실주가 최고라며 잔을 날랐다. 위스키처럼 뿌연 금빛 술은 달콤한 향기가 났지만 온더록스로 마시기에는 묵직한 뒷맛이 부담스러웠다.  p.48

지금으로부터 10년 뒤의 근미래, 대한민국에는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었고, 결국 국민 투표를 통해 법안이 통과하게 된다. 이는 사망이 임박한 상태의 환자가 심폐소생술이나 인공 호흡기 착용 같은 인위적인 연명 치료를 거부하는 것을 넘어서, 임종 과정에 돌입한 환자만을 대상으로 했던 기존의 제한이 완화된다는 의미였다.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죽을 수 있도록 국가가 법적으로 허락을 하고, 그 과정을 돕는 다는 것이었다. 극중 지혜의 가족은 갑작스럽게 할아버지를 보낸 할머니의 폭탄 선언으로 이러한 안락사 문제를 고스란히 체감하게 된다.

"난 못해도 앞으로 오 년 안에, 나머지 싹 정리하고 개운하게 갈 거야."

할머니는 앞으로 오 년간 차근히 준비해서 개운하게 떠나고 싶다고 가족들에게 선언을 하고는, 스스로 신변 정리를 시작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죽음이라는 것에 당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이해가 되긴 하지만, 한 편으로는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죽음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해야 하냐고 가족들 입장에선 화가 나고, 서운하기도 할 것이다. 이 작품은 할머니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엄마와 이를 지켜보는 딸 지혜를 비롯해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죽음 앞에 선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할머니의 죽음을 맞이하는 가족들의 생각과 방식이 다양하게 보여지고 있어, 더욱 죽음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던져주는 작품이다.

 

"널더러 잘못했다는 게 아니야. 걱정이 된다는 거지. 봐라, 부모 자식 사이라도 이렇게 내 맘 같지 않은데 남의 속을, 그걸 어떻게 다 헤아리겠니."

할머니의 말은 나무라는 투가 아니라 따뜻했고, 나는 괜히 코끝이 시큰거려서 고개만 끄덕였을 뿐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잠시 뒤에 할머니는 이제 그만하면 됐다는 듯 내 손을 물리더니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내게 실망할 것 없다고 했다. 무슨 얘긴가 싶어 돌아보니 원래 담금주는 숙성시켜서 먹어야 진가가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p.121

인간은 도대체 왜 죽어야 하는 걸까.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글쎄, 거기에 대해 누구나 수긍할 만한 이성적인 답변이 있을까. 단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이라는 것은 오게 마련이며, 그것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는 것 정도는 다들 인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할 때라고, 죽음도 삶의 중요한 한 순간이라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사실 죽음이란 이십 대의 젊은이에게나 여든여섯의 노인에게나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같은 크기의 두려움과 같은 크기의 절망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 바로 죽음인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란 무자비하지만, 그만큼 또 누구에게나 공정한 것이기도 하다. 어차피 죽음이 누구라도 피할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것이고, 언젠가는 마땅히 치러내야 할 일이라면 제대로 죽을 수 있도록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선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르테 한국 소설선작은책시리즈 두 번째 작품은 은모든 작가의 <안락>이다. 가볍게 지니지만 무겁게 나누며 오래 기억될작은책시리즈에 담긴 소설은 e-북과 함께 오디오북으로도 제공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책을 읽고 나니 오디오북도 궁금해진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박솔뫼 작가의 <인터내셔널의 밤>은 배우 김새벽이 함께 하고, 은모든 작가의 <안락>은 배우 한예리가 함께 한다고 한다. 오디오북을 통해, 배우의 목소리로 들려지는 이야기는 텍스트로만 만나게 되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와 느낌을 자아낼 것 같아 궁금하다. 그리고 이어 출간 예정인작은책시리즈의 라인업 또한 그 이름만으로 기대감이 들게 하는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강화길, 정지돈, 김솔, 백민석, 정용준, 박민정.. 요즘 가장 핫하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작가들의 신작들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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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의 밤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박솔뫼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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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은 이제 못 보게 된 아이들은 영영 못 보게 될 아이들처럼 여겨졌다. 아이는 사람의 인생에서 너무 짧은 시기여서 못 보게 된 아이들은 영영 만날 수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는 어른이 되고 뭔가 빼먹은 얼굴이 돼서 만난다. 그건 못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전혀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사람으로 다음 장면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겠지.   p.26

최근 한국 소설의 트렌드는 아무래도 경장편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한 두 시간이면 완독할 수 있는 가벼운 분량과 부담 없는 저렴한 가격, 그리고 가지고 다니기 편한 작은 판형까지 여러 모로 소설에 대한 접근성이 쉬워졌다고 하겠다.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은행나무의 '노벨라', 작가정신의 '소설향',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에 이어 이번에는 아르테의 '작은 책'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아르테 한국 소설선작은책시리즈는 이름 그대로 판형이 가장 '작은 책'이라서 주머니에 쓱 들어가는 크기라 휴대성에서는 가장 돋보이는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작은책’ 시리즈 그 첫 번째 작품은 박솔뫼 작가의 <인터내셔널의 밤>이다. 올해로 등단 10년을 맞은 박솔뫼 작가의 여덟 번째 작품집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에 탄 한솔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기차가 광명역에 도착하자 누군가 급하게 와 그의 옆자리에 앉았고, 앉자마자 자리를 바꾸자고 부탁을 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기차에서 만나게 된 한솔과 나미, 두 여행자로 시작된다. 한솔은 한 달 전 졸업 후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가 보낸 청첩장을 받았다. 그는 결혼식에 가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들을 생각하며, 그곳에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친구에게 거절의 연락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미는 이년 넘게 책을 전혀 읽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 속해 있다가 교단에서 도망치고, 이모네 집에서 한 달간 숨어 살았다. 한솔과 나미 모두 각각 자신이 속해있던 곳으로부터 도망치듯 떠나왔다.

 

책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사라지고 지나간다. 어떤 함께하던 책들은 시간이 지나면 헤어지게 되는데 그걸 슬퍼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어떤 것들은 이미 변해버려 흔적이 없어졌을 수도 있다. 그래도 헤어짐은 있다. 한솔은 열여섯 열일곱에 읽던 책들을 지나가며 아 이미 헤어졌군 우리는 헤어지고 다시 만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만나지 않게 된 사람들도 가끔 생각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p.89

어떻게 주민등록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어떻게 모르는 사람으로 사라질 수 있을까.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되는 고유의 정체성이 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만들게 되는 정체성 말고, 처음부터 주어진 것들 말이다. 남성, 여성 등의 성정체성과 종교를 비롯하여 일상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 같은 것들로부터 벗어나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벗어나기 위해서 도망치거나, 떠나야 한다면, 살아온 모든 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야기는 가벼운 분량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게 읽힌다. 평범한 서사 구조 대신 인물들의 생각들이 드문드문 펼쳐지고, 해체되고, 두서없이 이리저리 보여지고 있으니 말이다. 인물들의 혼잣말을 천천히 따라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면의 풍경들이 손에 잡힐 듯 구체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사라질 생각은 없지만, 큰 잘못을 아직 저지르지 않았지만 어떻게 한국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대해서 말이다.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 지금의 정체성을 던져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그런 생각들. 그리하여 어딘가 불안하게 시작되었던 이 여행에서 어느 순간 안도와 같은 기분이 들게 된다. 어떤 면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는 필요한 것이다. 필요하지 않아도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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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홀릭 1 - 내가 제일 좋아하는것은 몬스터
에밀 페리스 지음, 최지원 옮김 / 사일런스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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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깨긴 했지만 저 밖에 '군중'이 실제로 있으며, 언젠가는 그들이 나를 정말로 끝장낼 수 있다는 걸 안다. 군중이 나를 '죽일까봐' 두려운 게 아니다. 먼 훗날 나까지 자기들처럼 만들까 봐 끔찍한 거다. '못되고 평범하고 따분하게'. 그들의 직업 때문에, 즉 튀김 전문 요리사나 간호사, 농부라서 못되고 평범하고 따분하다는 게 아니다! 그들 대다수는 자기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사는 것만 믿는다. 그래서 "괴물 같은 게 실제로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건 진짜가 아니야."라고 내뱉는다...하지만 코앞에 있는데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얼마든지 있다.   - 1권 중에서-

세계대전도 히틀러도 사라진 1960년대 말 시카고, 세상은 여전히 폭력과 차별이 난무한다. 늑대소녀가 실재한다는 환상 속에 사는 소녀 캐런은 매일 밤 자신이 진짜 괴물로 변신하는 것을 상상한다. 사람들은 괴물 같은 것이 진짜로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캐런은 어쩌면 괴물이 우리 코앞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캐런의 집 위층에 사는 앙카 실버버그 부인이 아주 기이한 죽음을 맞게 된다. 가슴 부위에 총을 맞았고, 집의 앞문과 뒷문이 전부 안에서 잠겨 있었다며 경찰은 자살로 결론을 내리지만, 캐런은 믿을 수 없었다. 앙카 아줌마는 언제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우울해 보였지만, 캐런이 본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기도 했다. 앙카 아줌마는 캐런이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거의 매일 아침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호밀빵 두 쪽을 손에 쥐여 주곤 했었다.

 

아버지 없이 편모슬하에 사는데다, 독특한 외모와 성격 덕분에 캐런은 학교에서 친구가 전혀 없었다. 수업시간에는 괴물을 그리다가 공책을 압수당했고, 집에서 만들어 간 밸런타인데이가 너무 섬뜩하고 잔인하다고 야단을 맞는다. 그리고 돌아간 집에서 아침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던 앙카 아줌마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캐런은 밸런타인데이에 가슴에 총을 맞은 앙카 아줌마의 자살 사건에 대한 진상을 파헤치기로 한다. 꼬마 예술가 캐런은 오빠와 엄마를 포함해서 앙카 아줌마의 남편과 주변 이웃들에 대한 알리바이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남들과 다른 걸 두려워하지 않는 캐런은 오빠에게 빌린 트렌치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쓰자 자신이 진짜 탐정 같다고 느낀다. 주위의 모든 것이 단서로 느껴졌고,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에 도시 구석구석을 관찰한다. 앙카의 남편인 실버버그 씨를 찾아 갔다가 앙카가 남긴 녹음 테이프를 듣게 되고, 앙카 아줌마가 1920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유태인이라는 걸을 알게 된다. 앙카는 나치 독일의 홀로 코스트 생존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앙카의 목소리를 통해 2차 대전 당시 유태인으로 학대 받던 한 여성의 삶과 여전히 인종, 여성 차별이 난무하는 60년대 미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놀라울 정도로 기괴하게 펼쳐진다.

 

 

난 어른들의 진실을 안다. 애들의 눈에 어른은 자유로워 보인다. 하지만 대다수의 어른들은 감옥에 갇혀 살아간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을 가둬놓고 있는지 궁금할 거다. 내가 살펴본 바로는, 10명 증 9명은 자기 자신의 유령에게 속박돼 있다.   - 2권 중에서-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가 문학성과 예술성이 강한 형식과 양식을 갖추고 나타난 만화라고 할 때, 아마도 에밀 페리스의 이 작품은 그 이름에 가장 걸 맞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장르가 만화책의 한 형태이긴 하지만 보통 소설만큼 길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어 어른을 위한 만화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역시 그러한 표현에 걸맞게 선정적이고, 파격적인 그림과 스토리로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에밀 페리스의 그림은 기괴하고, 공포스럽지만,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스토리로서의 재미와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는 문장으로 파격적인 이미지가 주는 충격을 시각적으로 부담스럽지 않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최고의 그래픽 노블에 수여하는이그나츠 어워드’ 2개 부문을 수상했고, 만화계의 오스카상이라고 불리는 '아이스너 어워드'에서도 2개 부분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폭력적인 세상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괴물이 되는 방법 밖에 없는 것일까.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몬스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어린 소녀 캐런의 이야기는 공감보다는 이해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편한 이야기에 홀린 듯이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이렇게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파격적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슬픈, 시각적인 충격으로 인해 한 동안 머리 속을 떠나지 않을 것 같은 그래픽 노블은 만나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괴물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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