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뉴욕의 맛
제시카 톰 지음, 노지양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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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식업계? 쿨하지.” 멜린다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옥이지. , 너도 미래를 찾으러 뉴욕에 왔구나. 세계를 재발명해주는 도시에 온 걸 환영해. 네가 원하는 게 뭐든 꼭 되길. 알았지?”

티아는 예일대를 졸업한 뒤 NYU의 음식학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그녀의 우상은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기자인 헬렌으로 <뉴욕타임스>에 실린 날카로운 비평과 저널리즘의 딱딱함을 벗어나 자유롭게 써 내려간 회고록과 요리책을 너무도 사랑했다. 그녀는 대학원 인턴쉽 과정으로 헬렌의 인턴이 되기를 목표했지만, 대학원 입학 환영회에서 우연히 <뉴욕타임스> 레스토랑 평론가인 마이클 잘츠를 만나게 되면서 엉뚱한 곳에 배치되고 만다. 티아는 고급 레스토랑매디슨 파크 타번’ 물품보관소에 배치되어 일하게 된 그녀는, 그곳에서 마이클 잘츠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에게서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푸드 칼럼니스트인 마이클 잘츠는 자신이 미각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단 맛, 강한 향신료 맛, 신 맛, 쓴 맛 등.. 그 맛이라는 게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 버렸다고. 그래서 티아의 그 예민한 미각이 필요하다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한다. 그의 제자가 되어 최고의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어보고, 평가하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쓰라는 것이었다. 대신 이 모든 사실은 비밀로 해야만 했다. 사실이 밝혀지면 자신의 명성이 바닥으로 떨어질 게 뻔했으니 말이다. 티아는 '푸드 고스르 라이터'역할을 하겠다고 대답한다. 평소에 갈 수 없었던 최고급 파인 다이닝에서의 식사, 장소에 맞춰 입을 수 있는 명품 의상들.. 무엇보다 자신이 맛보고 평가한 글에 따라 뉴욕의 레스토랑이 사라질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 미남 셰프와의 로맨스까지 시작되어 티아에겐 남자친구와 룸메이트를 비롯해서 세상에 숨겨야 하는 비밀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이 도시는 이제 내 놀이터가 될 것이다. 내 말이 세상에 퍼질 것이다. 이보다 더 나은 시나리오는 상상할 수 없었다. 지하철로 걸어가면서 내가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불협화음의 도시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화려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도 기죽지 않았다...가능성이라는 파도가 내 가슴에 밀려들었고 나는 그 파도를 타고 집까지 걸어갔다.

이 책의 저자인 제시카 톰은 작가이자 푸드 블로거로 소설 창작을 전공했지만, 실제 레스토랑 리뷰를 기고한 이력도 있다. 덕분에 화려한 뉴욕의 미식 업계를 완벽하게 페이지 속에 재현해내고 있다. 특히나 고급 레스토랑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음식들의 맛을 표현하는 부분들이 정말 기가 막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클레멘타인과 엔다이브가 들어간 에다마메 퓨레는 밝고 쓰고 깊으면서 명랑하다. 가을 배우들이 등장하는 여름 요리처럼.' 혹은 '캐비어 알을 하나씩 터뜨려보았다. , 하나 먹는다. 실크처럼 부드럽고 상큼해, . 이건 짜릿하고 톡 쏘네. 또다시 톡, 이건 유혹적인 맛이야. 어둡고 신비롭고 깊어' 등등... 실제로 이렇게 창의적인 요리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운 묘사들이다. 덕분에 평범할 수도 있는 스토리라인이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다.

주인공이 하룻밤에 신데렐라로 변신하게 된다는 기본 플롯은 얼핏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화려한 도시 속 미식 세계의 권력, 그리고 그 속에서 재능은 뛰어나지만 순진한 우리의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너무도 흥미진진하다. 티아가 허영심에 들뜬 속 빈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갓 사회에 진출해서 세상과 부딪히게 될 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공감이 무엇보다 이야기에 매력을 부여한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가면서 티아의 앞날이 그려지면서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 지 독자들은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도 티아의 입장이었다면 그녀와 똑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에 그녀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꿈꾸던 그 분야에서, 간절히,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말이다. 특히나 그것이, 모델, 디자이너, 백만장자 셀러브리티들이 잔뜩 모여 있는 욕망의 도시, 뉴욕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악마의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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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It Up! - Music Craft Studio, 남무성·장기호의 만화로 보는 대중음악만들기
남무성.장기호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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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만드는 일, 즉 작곡을 한다는 건 마치 집을 짓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설계도를 만드는 것이다. 설계도는 집의 규모와 구조를 미리 따져보는 계획이다. 그리고 집의 모양이 완성되면 외부 장식과 내부 장식을 하는데 이 과정은 음악으로 치자면 편곡에 해당한다. 어떻게 치장하느냐에 따라 집의 모양은 제각각 개성을 갖게 된다.

아마 요즘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직업 중 하나가 연예인, 혹은 가수일 것이다. K-POP의 인기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강타하고 있고, 국내 가요가 빌보드나 해외 아이튠즈 앨범 차트에 올랐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려 온다. 그러다 보니 작곡으로 발생한 저작료로 거액의 수익을 올린 뮤지션, 프로듀서를 꿈꾸는 지망생들이 늘어 대학에서 실용음악과의 인기도 나날이 치솟고 있다고 하니 말이다.

재즈의 역사를 그린 JAZZ IT UP!과 록의 역사를 그린 《PAINT IT ROCK 1·2·3》으로 음악 마니아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작가이자 재즈평론가 남무성의 새로운 음악 만화이다. 대중음악의 기초 화성과 작곡의 기술을 만화로 배울 수 있다니, 듣고 즐기기만 하던 차원에서 직접 음악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되었다.

재즈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뮤지션 지망생을 주인공으로 가게 단골인 재즈 뮤지션에게 받은 음악 이론 만화를 읽으며, 자신의 곡을 실제로 만들어 보는 스토리로 만화가 진행된다. 그리고 틈틈이 대중음악을 실제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핵심 지식과 세계적 팝 히트곡들을 분석하고, 주요 음악 이론과 용어 해설까지 곁들여져 있다.

 

 

음악 공부가 어려운 이유? 다른 나라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와 그 맥이 같다. 예를 들어 영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파벳을 알아야 하고, 영어로 말하는 것을 들어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실제 대화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음악가는 리듬, 멜로디, 화성을 동시에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방대한 영역인 코드(화성)의 원리와 이치를 이해하는 게 필수조건이다.

음악의자도 모르는 쌩 초보자라도 만화의 스토리를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음악 이론을 터득할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하겠다. 실용음악을 공부하는 지망생은 물론 그저 취미로 음악을 듣거나 연주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유용한 팁들이 가득하다.

가사로 나뉘어져 강 항목의 포인트를 짚어 주는데, 한 번 들으면 귀에 꽂히는 HOOK을 가져야 한다는 것, 전부 부분, 인트로를 10~15초로 유지해야 하고, 악기로 연주되는 간주 부분을 최소화하고 효과적이지 못한 경우는 아예 빼야 한다고. 가사의 경우에는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하고, 느린 템포의 곡일수록 가사의 의미가 중요해진다고 한다. 그러니 경우에 따라 가사가 멜로디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며 가사도 문학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바로 밥 딜런이 떠올랐다. 가수인 그가 노벨문학상을 했다는 사실은 시와 노래가 본래 하나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니 말이다.

이 외에도 대중음악의 3가지 형식, 작곡의 핵심이 되는 화성학과 스케일, 실전기본화성을 바탕으로 실용음악 따라잡기, 광고나 영화음악 등으로 쓰임새가 많은 현대의 모드음악과 요즘도 여전히 문제가 되는 표절에 대한 판단 근거, 그리고 반드시 알아야 할 실용음악 용어들까지 총망라되어 있다. 이 책은 누구에게나 친근한 대중음악을 보다 깊이 있게 즐기기 위해서도, 장차 음악 관련 직업을 꿈꾸는 이들에게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교양 만화이다. 딱하고 어려운 이론도 쉽게 풀어내는 탁월함을 보여주는 독보적인 실용음악 만화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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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것에 대한 분노
베키 매스터먼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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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여성으로서의 내 모습들을 후회할 때가 종종 있다.

수많은 모습들이 있었다. , 언니 혹은 누나, 경찰, 거친 동료, 다양한 종류의 나쁜 년, 버림받은 연인, 이상적인 아내, 영웅, 살인자. 난 진실을 말하는 데 능숙하므로, 그 모든 모습들에 대한 사실을 곧 말해주겠다. 비밀을 지키는 것과 거짓말을 하는 것은 똑같은 기술을 필요로 한다. 둘 모두 습관이 되고 거의 중독이 되어서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상대할 때도 그 중독성을 피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자신의 나이를 스스럼없이 알려주는 여자는 절대 믿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런 비밀조차 지킬 수 없다면, 당신의 비밀도 지키지 못할 테니.

브리짓 퀸, 59, 그녀는 전직 FBI 요원으로 현재는 결혼 후 남편과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녀가 특수 요원으로 일하던 당시, 160센티미터의 키에 금발머리, 10대 치어리더와 같은 몸매로 인신매매범이나 성범죄자들의 미끼 역할을 하는 위장 업무를 주로 했었다. 하지만 척추 몇 개를 접합해야 했던 사고로 인해 위장 업무를 더 이상 할 수 없었고, 은퇴가 가까워질 무렵 비무장 상태의 범인을 죽이는 바람에 윤리 위원회의 내사와 범인의 가족들과의 소송까지 겪어야 했다. 퇴직 후 생활 역시 평탄하지 못했지만, 상담사의 조언으로 대학에서 불교학 수업을 청강하다 만난 지금의 남편으로 인해 결혼과 함께 과거는 묻어두고 이상적인 아내로 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과거는 결코 그녀를 놔두지 않는다.

66번 고속도로 살인마로 불린 연쇄살인범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66번 고속도로 살인사건은 그녀가 맡았던 사건들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사건이자, 결국 미제로 남았던 사건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지시했던 젊은 FBI 요원이 범인의 마지막 희생자였고, 아직까지 그녀의 시체조자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잡힌 용의자 플로이드 린치의 자백에 미심쩍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 FBI 특수 요원 로라 콜먼은 당시 사건 지휘자였던 브리짓 퀸에게 도움을 청한다. 우연히 잡혀서 연쇄살인마임을 자백한 남자, 과연 그가 정말 66번 고속도로 살인마일까? 혹은 모방범일까? 아니라면 어떻게 그가 진범밖에 알 수 없는 사실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다수의 피해자 유족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사건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잦아들고 영화가 끝난 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당신이 보지 못하는 부분들 말이다. 나쁜 사람이 잡히면 가족들 역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마침내 정의가 실현되었다며 일을 종결짓고, 형사 역을 연기한 배우들은 뒤돌아 멋지게 카메라 밖으로 사라진다. 또한 극을 보고 있던 관객들은 들고 있던 팝콘을 버리고 기름기 묻은 손가락을 옷자락에 닦으며 집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어둠이 내린 뒤 자신의 집 차고로 들어서며 혹시라도 차 뒤에 누군가 숨어 있지 않을까 상상하며 약간의 공포감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삶은 전과 똑같이 이어진다. 랄랄라.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중년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전직 FBI 요원 브리짓 퀸은 은퇴한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맨 손으로 건장한 남자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남편인 카를로에게 자신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애써 평범한 일상을 살아왔다. 그런데 나이 든 여성들만을 노리는 성범죄자에 맞서다 우발적으로 그만 그를 죽이고 만다. 물론 정당방위였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인다. 범죄 현장과는 전혀 상관없는 평화로운 세계에서 살아온 남편의 삶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시체를 사고처럼 위장하고 현장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운다. 그리고 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인해 그녀의 삶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꼬이게 된다.

저자인 베키 매스터먼은 과학수사 분야에 관한 원고를 검토하는 편집자로 활동했던 이력 때문인지 이 작품이 데뷔작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탄탄하다. 연쇄 살인범 사건 수사에 대한 플롯은 스릴 넘치고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나이 든 전직 수사관의 내적 갈등이 섬세하고 리얼하게 그려져 있어 스토리에 깊이를 더해준다. 그리고 끔찍한 범죄가 지나가고 난 뒤의 시간들과 범죄 피해자들의 남겨진 삶에 대해서도 객관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작품 속에 담아 내고 있다. 브리짓 퀸이 등장하는 시리즈가 이후에도 더 출간되었다고 하니, 국내에서도 이어서 계속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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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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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인생은 모든 게 엉망이야."

나는 반박했다.

"나는 아무것도 끝까지 해내지 못했고 남자와도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어. 게다가 이미 몇 년 전에 대학을 그만둔 사실을 부모님한테 말할 용기조차 없어. 난 술도 마시고 담배도 너무 많이 피워. 남성 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한두 가지는 잊고 싶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소위 흑역사라고 불리는 그것.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 하지 않을 그런 행동들. 그런데 만약 이 모든 과거를 지워주는 회사가 존재한다면 어떨까. 잊고 싶은 기억을 깨끗하게 지워준다고 하면 당신은 과연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살 것인가. 이 작품은 바로 거기서 시작한다.

스물아홉 찰리는 부모님 몰래 대학을 그만두고, 술집에서 7년째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고 있다.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부모님이 알게 된다면 마음이 찢어질 거라고 걱정하지만, 그럼에도 거침없는 성격과 제멋대로인 생활 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게다가 과거에 저지른 창피하고 민망한 실수들 때문에 스트레스인데, 절친인 줄리의 남자 친구와 잠자리를 하는 바람에 가장 친했던 친구를 잃어 버렸고, 운전면허 시험 도중 속도 측정 장치를 들이받고 도망치거나, 취해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 넘어졌을 때 출동한 경찰한테 반항을 하거나, 애도 있는 유부남과 사귄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그녀가 저지른 과거의 실수들이 너무 많아 후회가 많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헤드헌팅 회사로부터 과거를 지워주겠다는 은밀한 제안을 받게 된다.

 

“지금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제가 제대로 들은 건가요?”

여자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싶어서 이곳에 찾아왔죠.”

“그렇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나요?”

“사이비 종교예요?”

엘리자는 크게 웃었고 그녀의 눈 주위에 수백만 개의 주름이 잡혔다.

지금의 내 삶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행복하지 않고, 그러다 가끔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 인생을 완전히 바꾸고 싶다라고 생각해본 적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실패했던 일들, 민망하고 창피했던 모든 사건들,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전혀 일어나지 않은 일로 만들 수 있다면? 만약 그런 모든 일을 우리의 인생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 있다면 말이다. 마치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지워진다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 이 작품 속 주인공 찰리의 삶은 그 선택 이후로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 흥미로운 것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삭제하면서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사람들과의 관계도 모두 달라지지만, 찰리라는 인물 자체는 그대로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환경이 달라진 것일 뿐 사람이 바뀐 것은 아니니, 당연히 찰리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달라져 버린, 자신도 알 수 없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의 회사에서 일을 해야 하고, 사랑한 기억이 전혀 없는 남자와 결혼식장에 가기 직전이었고, 헤픈 여자로서 살아왔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조신한 여자로 대접받고 있는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6년 전에 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 작품은 이번에 더 달콤하고 예쁜 표지로 개정판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개정판의 세련된 표지가 작품의 분위기와도 더 잘 어울려 좋았던 것 같다. 이 작품은 마치 한 편의 로맨틴 코미디 영화처럼 지루할 틈 없이, 유쾌하게 읽힌다. 부담 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깨닫게 만들어 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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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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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가 그 아이들한테 바라는 게 뭘까요, 라모나? 그 스포츠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게 뭘까요? 거기에 평생을 바쳐서 얻을 수 있는 게 기껏해야 뭘까요? 찰나의 순간들........ 몇 번의 승리, 우리가 실제보다 더 위대해 보이는 몇 초의 시간, 우리가 불멸의 존재가 된 것처럼 상상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에요.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조그만 도시 베어타운은 해마다 점점 일자리가 사라지고, 인구도 줄고, 매 계절마다 숲이 혜가를 집어삼키는 곳이다. 이 곳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아이스 하키라는 스포츠에 대한 사랑이다. 주목할 만한 게 거의 없는 곳이지만 이곳이 하키 타운이라는 것만은 모든 주민들의 자랑이자 그들을 유일하게 흥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청소년팀의 준결승을 앞두고 있다. 아이들의 하키 경기가 중요해봤자 어느 정도겠냐 싶지만, 그 경기에 이긴다면 온 국민에게 이 도시의 존재를 다시 일깨울 수 있다. 정부에서 이곳에 하키 스쿨을 설립할 수도 있고, 주변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아이들이 대도시가 아니라 베어타운으로 몰려들 것이고, 그러다 보면 후원사들이 늘어나고, 도로는 물론이고 컨퍼렌스 센터와 쇼핑몰들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시합은 중요하다. 이 도시의 경제가 걸려 있고, 자존심이 걸려 있으며, 무엇보다 주민들의 생존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배크만은 <오베라는 남자> <브릿마리 여기있다>에서 매력 만점 노년의 주인공을 그려냈었고,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에서는 애어른 같은 일곱 살 소녀를 매혹적으로 탄생시켰었다. 그리고 마치 동화와도 같은 짧은 단편 소설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에서는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과 천천히 헤어짐을 배워가는 손자의 세상에서 가장 느린 작별 인사를 아름답게 그려냈었다. 이번 작품은 그 중 가장 두툼한 페이지를 자랑하는 묵직한 이야기를 들고 왔다. 게다가 첫 장부터 매우 강렬하게 시작한다. 어느 날 한 십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게 된 사연에 대한 이야기라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 주민들이 하키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쳐 있는 이곳, 베어타운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신기하다. 어떤 사람이건 사랑을 시작하게 된 기점이 있는데, 이 사랑만큼은 아니다. 항상 사랑했고 심지어 아이가 존재하기 전부터 그랬다. 아무리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도 엄마와 아빠들은 감정의 파도가 그들을 치고 지나가서 완전히 나가떨어지는 충격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 사랑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기에 불가사의하다. 평생 암실에서 지낸 사람에게 발가락 사이로 들어온 모래나 혀끝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그 사랑은 영혼을 비행하게 만든다.

 

키도 작고 근육도 없지만 그 누구보다 빠른 하키 신동 열다섯 아맛, 아이스링크 청소부로 일하며 아맛을 홀로 키우는 파티마, 체격과 손재주와 머리와 심장을 모두 갖춘 하키 팀의 에이스 열일곱 케빈, 하키팀의 거물급 후원자인 케빈의 부모, 케빈의 단짝이자 그를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잘생긴 얼굴과 슬픈 눈빛을 가진 싸움꾼 벤야민, 베어타운 하키단 단장 아빠를 두고 있는 열다섯 소녀 마야는 하키보다 기타를 더 좋아한다. 마야의 아빠 페테르는 이곳이 배출한 스타로 NHL까지 진출했던 하키 선수였다. 은퇴 후에 이곳으로 가족들과 함께 이곳으로 와 단장으로 일하고 있다. 페테르의 아내 미라는 변호사로 일하는 워킹맘으로 매사에 논리적이고 똑부러지지만,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하키에 평생을 바친 늙은 코치 수네, 곧 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젊고 패기 넘치는 다비드 코치 등등..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가장 큰 매력이 바로 캐릭터의 힘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작품이야말로 그의 장기가 유감없이 드러난 작품이라 하겠다. 그야말로 페이지 바깥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올 것만 같은 인물들로 가득한 베어타운에서 벌어진 비극이 더 가슴아프고, 와닿는 이유 또한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하키를 왜 좋아하느냐고? 하키에는 사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프레드릭 배크만을 왜 좋아하느냐고?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사연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오베라는 남자>에 등장했던 밉지만 짠한, 무섭지만 뭉클했던 쉰 아홉의 까칠한 오베,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의 나이에 비해 너무 성숙한데다 얄밉도록 지나치게 똑똑해서 왕따를 당하는 일곱 살 엘사, <브릿마리 여기있다>의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예순 셋 할머니 브릿마리.. 그리고 이번 작품 <베어타운>에 등장하는 페테르와 미라, 그리고 아맛과 마야에 이르기까지... 프레드릭 매크만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완벽하게 이야기 속으로 독자들의 손을 잡아 끈다. <베어타운>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 입에 척척 달라붙는 음식처럼 눈에 쏙쏙 들어오는 문장들,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노련한 구성과 스토리의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이제 프레드릭 배크만의 대표작은 <오베라는 남자>가 아니라 <베어타운>이 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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