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항설백물어 - 상 - 항간에 떠도는 기묘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8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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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스케는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있는 곳이 그 환상의 섬이 아닌 걸까?

뉴도자키의 깎아지른 절벽에 뚫린 석굴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는, 동네 사람들도 모르는 수수께끼의 섬이 아니던가? 깊은 안개에 덮여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보이지 않고 불가사의한 해류가 주위를 지키고 있는, 배도 다가가지 않고 새들도 오가지 않는 외딴섬이 아닌가? 모모스케는 현실 감각을 잃어버렸다.   P.63~64

다다미 열 장 정도 되는 방에 젊은 사내 네 명이 얼굴을 맞대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밥상이 나와 있지도 않고 술 그릇이 눈에 띄지도 않는, 격식을 차린 자리 같지는 않지만 스스럼없다는 느낌도 없는, 참으로 희한한 회합이다. 이들 네 명은 한문 서적에 정통한 도쿄 경시청의 순사인 겐노신,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괴짜 요지로, 에도 막부 중신의 아들로 서양에도 다녀온 멋쟁이지만 일하지 않고 빈둥대는 쇼마, 검을 배운 호걸로 마을 도장을 하며 순사들을 상대로 검술을 가르치는 소베이다. 이들은 모두 오래된 이야기, 기괴한 전설 등에 관심이 많아 누군가에게 들은 진기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던 참이었다. 이번에 요지로가 붉은 얼굴 에비스, 가라앉은 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겐노신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했지만, 쇼마와 소베는 문명개화 시대에 그런 비합리적인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며 강하게 부정했다. 이들은 결국 야겐보리의 은거 영감에서 의견을 구해 보기로 하고, 그를 찾아 간다.

야겐보리의 은거 영감이란, 여든하고도 몇 살이 된 학처럼 홀쭉하게 여위고 피부가 흰 늙은이이다. 어디를 어떻게 봐도 상민처럼 보이는, 신분이나 직분이 있어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오래 전 번주의 총애를 받아 번에서 공로금까지 받았다고 한다. 요지로가 그 돈을 매달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던 인연으로 현재까지 교류를 하게 된 것이다. 노인은 매우 박식했고, 기묘하기 짝이 없는 체험담을 아주 많이 갖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불신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요지로에게 노인이 들려주는 에도 시절 이야기는 정겹고 편안했으며, 겐노신은 순사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진기한 이야기나 괴담 종류를 별나게 좋아했기에 노인이 들려주는 각 지방의 괴이한 이야기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생김새나 생업과 어울리지 않는 합리주의자인 소베는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해 노인과 의견을 나누는 것이 즐거웠고, 약간 서양 물이 든 쇼마는 노인과 같이 사는 먼 친척 처자에게 마음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네 명은 소문에 대한 진위나 기이한 전설에 대해 상담을 하기 위해 노인을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그 노인은 바로 기존 항설백물어 시리즈에서 괴담을 탐문하고 수집했던 모모스케이다. 귀신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물로 언젠가 백 가지 괴담을 모아 책으로 엮어낼 생각으로 일본 각지를 여행했던 그가 사십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것이다.

 

"마음속에 켕기는 구석이 있는 사람에게는 얼굴이 보였다......"

"맞습니다.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본 겁니다." 요지로가 대답했다.

보이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다. 거기서 무엇을 보는지는 보는 사람 마음에 달렸다. 이도 저도 다 노인이 이야기한 셋쓰의 괴이한 불 이야기에서 얻은 교훈이다.   P.290

'항설백물어' 시리즈를 기다려온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항설백물어> 2009, <속 항설백물어> 2011년에 나왔었으니 무려 7년 만에 만나게 되는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항성백물어> 시리즈는 일본 에도시대 괴담집에 등장하는 설화를 모티프로 인간의 슬프고도 추한 본성을 다채롭게 해석해낸 작품이다. 이번에 출간된 <후 항설백물어> <항설백물어>, <속 항설백물어>에 이은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자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원고지 3000여 매 분량의 작품이라 상하권 두 권으로 나누어 출간되었다. 상권에는 하룻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섬에 얽힌 이야기인 '붉은 가오리', 원인 모를 작은 불소동이 벌어지면서 괴이한 불을 둘러싼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하늘불', 그리고 뱀을 수호신으로 모시는 집안의 무덤 위 사당에서 독사에 물려 사람이 죽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에 얽힌 전설을 들려주는 '상처 입은 뱀' 세 편이 실려 있다. 제 발로 각 지방을 두루 다니며 기기묘묘한 일을 찾아 다니는 삶을 살았던 모모스케가 지금은 볼품없이 쪼그라들어서 마음 좋은 할아버지처럼 등장하니 어쩐지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가 들려주는 고금의 괴담과 기담, 동서의 진기한 이야기들은 전작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극중 노인은 '무슨 일이든 세상 이치를 알지 못하고 그저 그냥 이상하다, 희한하다 하면서 무서워한다면 괴담이 되겠지만, 이는 이러저러한 이치로 일어나는 일이다, 하고 설명할 수 있으면 더는 괴담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 그래서인지 <항설백물어> 시리즈에 등장하는, 항간에 떠도는 기묘한 이야기들은 그저 괴담으로 그치지 않고 있다는 느낌도 들어 더욱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두툼한 페이지를 자랑했던 <속 항설백물어>에서 6편의 단편이 각각 한 편으로 완결되다가 각 이야기들이 미묘하게 얽히면서 모든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로 연결되었던 놀라운 구성을 떠올려보자면, 이번 작품 역시 하권까지 함께 읽어야 이야기가 완결될 것 같다는 기분도 든다. 그래서 드디어 출간된 <후 항설백물어> 하권을 바로 이어서 읽어 보려고 한다. 고전 설화를 재해석한 전혀 새로운 미스터리를 만나보고 싶다면, 모두들 교고쿠 나츠히코의 특별한 세계로 함께 여행을 떠나 보시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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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수를 죽이고 - 환몽 컬렉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0
오쓰이치 외 지음, 김선영 옮김, 아다치 히로타카 / 비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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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쓰키 나오토를 다시 만났을 때, 그날은 마침 내 생일이었다. 가을은 이미 지났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추위에 떨며 코트를 껴입고 있었다.

"세상에는 비현실적인 일도 일어날 수 있어. 마쓰다하고 함께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 왠지 구원받는 기분이야. 네게 바람 이야기를 들으면 그 순간만큼은 괴로운 일을 잊을 수 있어. 소설이나 만화를 읽었을 때처럼. 그래서 혼조는 너하고 표류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던 거야."   - '염소자리 친구' 중에서, p.115

마쓰다의 집은 언덕 위에 있어 2층 창문으로 마을이 한 눈에 보인다. 하지만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 있어, 마을에 바람 한 점 불지 않을 때도 마쓰다의 집 2층에는 어째선지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마쓰다의 방 베란다에는 매일 낙엽이 수북이 쌓이는데, 가끔은 바람을 타고 다른 물건들도 떨어지곤 했다. 사진이나 잡지, 헌 옷이나 수건, 외국에서 바람에 날려온 듯한 물건까지 섞여 있었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오래된 물건들이 베란다 격자에 걸려 있었던 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찢어진 신문 조각이 날아왔고, 날짜는 무려 두 달 후로 표기가 되어 있었다. 미래의 어느 날에 발행된 신문이 온 것이다. 신문에 실린 기사 중에 고1 사망 사건의 참고인으로 신문을 받던 고등학생이 경찰서 화장실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얼마 뒤 실제 마쓰다의 반에서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동급생 친구가 가해자를 죽게 만드는 일이 벌어진다. 평소에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를 모른 척 했기에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죄책감이 든 마쓰다는,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처지가 된 친구를 도와주기로 한다. 그리고 엿새 후에 벌어지게 될 신문 기사에 실린 상황을 피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하는데, 과연 마쓰다는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염소자리 친구'는 학교 폭력이라는 현실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오쓰이치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판타지를 사용해서 풀어낸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학교 폭력이나 왕따를 다루고 있는 작품 중에 단연코 돋보이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 외에도 은둔형 외톨이로 살던 인물이 아버지의 유품인 잉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생활 방식이 달라지고, 성격이 바뀌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 친구들에게 도둑으로 오인 받아 학교생활이 어려워진 인물이 친구가 없어 반에서 고립되어 있는 소년의 도움을 받게 되는 '소년 무나카타와 만년필 사건', 쓰나미로 인해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어버린 인물이 술에 절어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죽은 아들의 장난감을 통해서 아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는 '트랜스시버' 등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어디서 만났던가요?”

나는 물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소녀의 눈은 양쪽의 색이 달랐다. 오른쪽 눈동자는 검은색이지만 왼쪽 눈동자는 붉은색. 오드아이.

“벌써 잊었어? 네가 나를 죽였잖아.”

소녀가 미소를 머금었다.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보였다. 사람들이 무조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표정이다. 하지만 나는 그 놀라운 고백을 듣고 동요하지 않았다.  - 메리 수 죽이기' 중에서, p.202

이 책은 청춘소설에서 호러, SF, 판타지, 미스터리에 이르기까지 다섯 명의 작가가 펼치는 다채롭고 환상적인 단편 모음집이다. 전혀 다른 매력의 일곱 편의 단편으로 만들어진 한 권의 환몽 컬렉션인 셈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일본 현대 문단의 천재 오쓰이치, 청춘·연애소설로 잘 알려진 나카타 에이이치, 괴담 작가로 유명한 야마시로 아사코, 복면작가 에치젠 마타로, 해설을 맡은 아다치 히로타카까지. 사실 이들 다섯 명의 작가 모두 한 사람, 오쓰이치이다. 작품 스타일에 따라 필명을 바꾸는 방식과 각 작품에 본인이 직접 해설을 붙인다는 설정만으로도 충격적인데, 엄연히 다섯 작가들의 이력도 책 표지에 실려 있어 당황스러운 책이었다. 이들 다섯 작가들은 오쓰이치의 다섯 페르소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창적인 구성과 방식으로 쓰여진 이 작품들은, 사실 전혀 정보 없이 읽는다면 모두 다른 작가가 썼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개성과 색채가 뚜렷하다. 한 작가에게 이렇게나 다양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오츠이치의 작품은 국내에도 꽤 많이 출간된 편이다. 그의 작품은 크게 섬세함과 안타까움을 기조로 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퓨어 계열'의 화이트 오쓰이치와 잔혹함과 처참함을 기조로 하는 '다크 계열'의 어두운 블랙 오쓰이치로 나누기도 한다. 그만큼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보여주는 작가이고, 작품 스타일에 따라 필명을 바꾸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거기에 더해 각 작품에 본인이 직접 해설을 붙인 이 작품집은 마치 종합선물세트 같은 느낌도 든다. '오쓰이치의 오쓰이치에 의한 오쓰이치 팬을 위한 압도적인 소설집'이라는 평가가 제격이라는 느낌이 드는 정말 색다르고 매혹적인 작품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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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톰 말름퀴스트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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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은 반쯤 잠든 것 같은 상태다.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가끔 눈을 떠서 산소마스크 안쪽을 긁어댄다. 내가 부채질을 멈추면 그녀는 금방 내 손을 찾는다. 카린, 내 팔에 감각이 없어. 내가 말한다. 이 망할 부채질을 계속할 수가 없다고. 카린이 산소마스크를 벗는데도 나는 제지할 힘이 없다. 카린이 단숨에 말한다.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해. 간호사가 뛰어 들어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카린은 그녀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마스크를 벗으면 안 돼요. 간호사가 말한다. 이 사람도 압니다. 내가 간호사에게 말한다.   p.17

이 책은 스웨덴에서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하며 평단의 호평을 받은 시인  톰 말름퀴스트가 자전전 이야기를 써 내려간 첫 소설이다. 이야기는 임신 33주인 아내 카린 호흡곤란으로 병원에 실려 가면서 시작된다. 다행히 태아의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고 하는데, 가벼운 독감 증상으로 시작되었던 아내의 상태는 점점 심하게 악화되고 있었다. 급성 호흡부전으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카린의 증상은 심한 폐렴처럼 보였으나, 여러 검사 결과 급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한 뒤, 항암치료를 시작해야 했다. 카린은 심각한 상태였고,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어 시간이 없었다. 바로 1주일 전만 해도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피검사를 했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다. 이틀 전만 해도 함께 영화를 봤고, 그들은 아직 하지 못했던 결혼도 계획 중이었다. 이 모든 평화로운 일상이 한 순간 산산조각이 나버린 것이다.

그렇게 톰은 갑작스럽게, 한달 반이나 일찍 아빠가 된다. 그리고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백혈병으로 인한 아내의 죽음을 맞닥뜨리게 된다. 사실 모든 죽음은 갑작스럽다. 그러니 애초에 마음의 준비 같은 건 불가능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날들에 사실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지만 잊고 싶어 하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그 사건은 늘 불시에 일어나곤 한다. 가족의 예기치 못한 죽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언제나 남의 일 같지가 않게 느껴진다. 당장 내일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상실과 슬픔이니 말이다.

 

내 이름은 이제 아빠다. 아이가 또 나를 부르고 있으니 내게는 생각에 잠길 시간도 뭔가를 느낄 시간도 없다. 너처럼 리비아도 삶의 작은 것들을 눈에 담는다. 이를테면 쏟아진 기름의 다양한 색깔, 빗자루 손잡이 끝에 붙어 있는 벌레, 내 팔꿈치의 긁힌 상처,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의 크리스털 공들 사이에 걸쳐 있는 거미줄 같은 것들. 심지어 녹슨 병뚜껑조차 리비아에게는 마법이 된다. 아이는 네 사진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그 사진들을 침대의 내 옆자리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건네기 때문이다.    p.372~373

누군가의 삶이 멈추고 끝장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슬픈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지만, 저자의 문장은 시종일관 담백하고 건조하다. [뉴욕타임스]지금까지의 자전소설은과거의 회상을 의미했으나 말름퀴스트는 이러한자전의 의미를 완전히 전복시켰다고 평가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고통스러운 상실의 순간을 회상하는 과거의 시제가 아니라 모두 현재시제로 서술하고 있다. 마치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생생하게. 그러나 격한 감정의 폭발이나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이 모든 상황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드라마처럼 극적인 상황에서조차 그의 문장들은 담담하고, 사실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감정에 공감되고, 이해되고, 안타까웠다. 이미 벌어진 과거의 상황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모습들이 모두 현재시제로 그려져 있어 그가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더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게 마련이며, 따라서 우리는 늘 누군가를 잃고, 떠나 보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지만, 그럼에도 바보 같은 삶은 계속된다. 그렇게 인간이란 상실을 숙명으로 삼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에, 이러한 작품이 전해주는 감정과 여운이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슬픔이라는 파도가 우리를 집어 삼켰을 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 그리고 살아가야만 하는 그 모든 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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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론도 스토리콜렉터 70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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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시 우리 중에 도를 넘은 사람들이 있었어.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되는 법이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야.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날 거라고."

"꼭 그렇진 않아. 우리 모두가 계속 입다물고 맞서 싸우면 돼.

슈나이더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맞서 싸운다고? 미안하지만 승산이 없을 텐데."

"있잖아.... 어제저녁부터 쭉 생각해봤는데, 우리에게 승산이 있을까? 어느 정도 희생을 치러야 이길 수 있을까?"    p.78

안드레아스 그루버의 마르틴 슈나이더와 자비네 시리즈 그 네 번째 작품이다. 전작이었던 <죽음을 사랑한 소년>이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 슈나이더의 충격적인 선택으로 끝이 났었기 때문에, 더욱 그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했었다. 원래 이 시리즈는 삼부작으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하니,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을 파격적인 결말로 마무리했던 것도 이해가 되긴 하지만, 그래서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다행히도 후속작 출간을 요청하는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시리즈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 그렇다면 과연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사람을 총으로 쐈던 슈나이더는 어떻게 됐을까.

이 작품은 슈나이더가 체포되어 정직 처분을 당하고 9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된다. 슈나이더가 아카데미 교단에 서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대신 수업을 맡았던 동료가 출장을 가게 되면서 자비네가 여름방학까지 남은 한 달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자비네는 슈나이더의 공판에 주요 증인으로 참석했었고, 이후에는 그와 전혀 만나지 못했다. 만나기는커녕 조언을 구한 적도 없었으며 모든 사건을 혼자서 해결해왔다. 실제로 이 작품의 초반부에는 슈나이더가 사건에 거의 개입하지 않고, 그의 두 제자인 젊은 수사관 자비네와 티나가 주도적으로 수사에 나서는 모습이 그려진다. 거의 300여페이지가 지나서야 슈나이더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으니 말이다. 무모하리만큼 호기심 많고 고집스러운 자비네가 아무리 사건을 재구성하는 능력이 뛰어 나고, 이해할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시리즈의 진짜 주인공은 사실 슈나이더이다. 그는 범죄 분석에만 25년 경력을 가진 전문가로, 법의학과 범죄심리학 공부도 했으며 유럽공동경찰기구의 멤버이기도 하지만, 마리화나를 피우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기를 죽이고 스트레스를 주는 독특한 캐릭터이다. 그는 현장에 가서 사건을 다시 분석하고, 사건을 가능한 세분화하면서 마리화나를 피우고 살인범의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수사를 해왔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만큼 능력 또한 독보적이니 말이다.

 

 

당신, 왜 그랬지?

불현듯 그는 이레네와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떠나기 전에 할 말이 있었다. 이레네의 영혼이 아직 방에 있음을 알았다. 게다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따뜻한 말 몇 마디 해주기를 바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차갑고 생명이 없는 몸을 이 방에서, 이 집에서, 그리고 이 지역에서 떠나기 전에.    p.409

한 남자가 고속도로 위를 전속력으로 역주행해서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단순 실수라고 보기엔 정황상 운전자는 아예 죽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사망자는 연방 범죄수사국 경정으로 다섯 살 된 아들을 혼자 키워왔다. 대체 그는 왜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자택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목이 목이 부러져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여자가 슈나이더 대신 수업을 맡았던 안나 하게나의 친언니로 밝혀진다. 그리고 얼마 뒤 안나 하게나는 철로 위에 차를 세워둔 채 자살한다. 이어 만찬석상에서 나와 다리 밑 철로로 뛰어내린 여자, 그리고 욕실에서 자신의 턱을 총으로 쏜 남자 등 자살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는데, 모두 연방 범죄수사국 수사관과 그 가족들이었다. 자비네는 동료들이 연이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사건의 발단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슈나이더에게 수년간 지겹게 들어왔던 말처럼, 우연이란 절대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무엇이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사건을 추적할수록 모든 단서와 연결고리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이들 모두 20년 전 마약전담반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비네는 슈나이더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지만, 그는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즉각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순순히 사건을 포기할만한 자비네가 아니었다. 극중 슈나이더가 자비네에게 "당신은 과거의 작은 다람쥐가 아니야. 야생 고양이가 됐소."라고 말할 정도로 기존 시리즈에 비해 자비네는 이번 작품에서 독립적으로 수사를 펼치기 시작한다. 과연 20년 전 과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이유라면 대체 왜 이제야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리고 죽은 수사관들과 슈나이더와의 관계는 무엇이며, 슈나이더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이야기를 읽는 내내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페이지 끝까지 달려가는 작품이었다. 특히나 이번 작품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존 시리즈에서 거만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며 결코 속마음이라고는 보여주지 않았던 슈나이더가 처음으로 조금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태도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면, 이번 작품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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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 - 14년 차 번역가 노지양의 마음 번역 에세이
노지양 지음 / 북라이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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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가끔은 나의 수많은 하루 중 어떤 하루나 어떤 순간을 일부러 기억하기 위해서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번역은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내 안에 영원히 남는다. 오래도록 나를 떠나지 않고 나만의 이미지가 되고 문장이 되고 내 인생의 일부가 된다. "그날 기억해?"라고 묻는 친구가 되고 과거의 한 시절을 함께 겪은 동지가 된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박제한 사진이 되고 영상이 된다.    p.75

문학소녀였다가 영문학을 전공하고 방송 작가가 되었다가 현재는 번역가로 14년 넘게 일하며 80여 권의 책을 번역한 노지양 번역가의 첫 번째 에세이이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 <헝거>를 비롯해 누구나 알만한 작품들을 꽤 많이 번역한 그녀는 이제 중견 번역가이다. 대표작이라 할 만한 번역서도 있고, 먹고 사는 데 별문제 없다고 봐도 무방할 만한, 그녀는 오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방송 작가 시절에는 원고를 쓰고 청취자 사연을 정리하느라 내 글을 쓸 시간과 여유가 없었고, 번역을 할 때는 종일 모니터 앞에서 문장을 다듬느라 지쳐서 일하는 시간 외에는 절대 노트북 문서창을 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매일 일정 시간 가사 노동을 하고 7시 반이면 집에 들어오는 남편과 성장기 아이를 위해 꼬박꼬박 저녁을 해야 하는 주부였다. 당연히 오후 6시 이후와 주말은 내 시간이 아니기에 글을 쓸 시간과 에너지를 도저히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꾸준히 해보지 못한, 시작도 하지 못하고 묻어둔 꿈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이가 누가 있을까. 이 책은 더 이상 '머리로만 책을 쓰고' 싶지 않았던, 글을 쓰지 못해 만성 욕구불만이었던 문학소녀가 드디어 자신의 꿈에 첫 발을 내딛게 된 순간이자, 그녀와 같은 수많은 이들에게 아직 늦지 않았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다정한 마음이다. '먹고 살고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행복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다'는 걸 아는 당신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뭉클하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하고, 격려 받는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잠재력, 'potential'이란 보통 성취나 재능의 영역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다. 아직은 가능성이다. 본인의 노력 여하와 기회와 행운 여부에 따라 펼쳐질 수도 있고 영원히 잠재력으로 머무르거나 조그만 점이 되었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

가끔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청소기를 밀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이번 달에 번역할 책을 넘겨보면서 이 생활도 나쁘지는 않지만 '무언가 더 있지 않았을까?'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가 갈 수도 있었지만 가지 못한 길을 하나하나 헤아려본다.   p.127

이 책은 솔직하고, 재미있고, 맛깔 나는 에세이라 술술 읽혀서 좋았지만, 번역가로서의 장점을 살려 매 챕터를 영어 단어에서 시작한다는 점이 더 매력적이었다. 영어와 한국어의 경계에서 분투한 15년의 세월이 남긴 단어들을 그녀만의 독특한 시선과 감성으로 재해석된 단어들에 대한 에피소드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성공하다' 라는 뜻으로 쓰이는 ' go places'에 대한 챕터에서는 동네 마트를 벗어나고픈 주부로서의 열망이 그려져 있고, '소박한, 허세가 없는'의 뜻을 가진 'down to earth'의 챕터에서는 가족과 부모님에 대한 뭉클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스스로 자초해 비참하게 만들다'는 뜻으로 쓰이는 'embarrass'에 대한 챕터에서는 영화 <라라랜드>의 주인공 미아를 통해서 '간절함과 포기 안 되는 마음'이야말로 진짜 재능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그녀가 살아오면서 크고 작게 자존심을 다쳤던 수많은 실패의 경험들을 들려 준다.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해 궁금했던 이들이라면, 너무도 가감 없이 솔직하게 들려주는 번역이라는 일에 대해 속 시원히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미 이름이 알려진 중견 번역가이면서도, 자신의 번연가로서의 단점과 구차한 뒷이야기들과 일상에서의 허점투성이인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인간 노지양으로서의 매력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번역가 노지양이 아닌, 인간 노지양에게 관심이 생겼다. 까딱하면 좌절하기와 무턱대고 희망 품기를 무한 반복하는 특유의 철없음을 응원하고 싶어 졌고, 산책과 몽상을 즐기며 아름다운 단어에 매료되는 소녀 같은 모습들이 글속에 그대로 담겨 있어 사랑스러웠다. 언젠가 만나게 될 그녀의 '소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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