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디블 가족 - 2029년~2047년의 기록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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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감정의 영향을 받아. 모든 값어치는 주관적이야. 따라서 돈은 사람들이 느끼는 딱 그만큼의 가치를 갖지. 사람들이 재화와 서비스의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은 돈을 믿기 때문이야. 경제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종교에 가까워. 수백만 시민들이 통화를 믿지 않으면 돈은 그저 색을 입힌 종잇장에 불과해. 마찬가지로 채권자들 역시 미국 정부에 돈을 빌려주면 그 돈을 결국 받는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돈을 빌려주지 않겠지. 그러니까 믿음은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야. 유일한 문제라고."

이야기의 배경은 세계 대공황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2029년의 미국이다. 서민들은 심각한 물 부족 사태와 실업난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들은 샤워를 일주일에 한 번으로 제한하고, 그나마도 초절수 샤워기를 이용해 안개처럼 분사되는 물로 씻어야 했다. 그렇게 물 부족으로 인해 평상시에도 재활용수를 사용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그렇게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뉴욕의 식당들은 붐볐고, 증권시장은 활황이었으니까.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미국은 그 동안 숱한 위기를 겪어 왔다. 2001년의 911테러로 미국의 심장부를 공격받았고,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뒤이은 세계경기 침체, 그리고 2024년에는 스톤에이지 사건으로 주요 인터넷 인프라가 마비되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사회는 예상보다 빨리 안정세로 회복되었지만, 이번에는 엄청난 일이 발생한다. 바로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한 금융 쿠테타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2029년의 어느 날, 미국 대통령은 중국, 러시아 동맹국을 상대로 무혈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하룻밤 사이에 달러의 가치가 폭락하고, 새로운 기축통화가 이를 대체하면서 정부는 보복성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게 되는데... 고삐 풀린 인플레이션은 국가의 위기를 넘어 시민들 모두의 돈도 순식간에 집어삼키면서 위기를 겪게 된다. 이야기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에, 저작권사를 운영하며 저명한 소설가들을 유치하여 큰돈을 벌어 들인 더글러스 맨디블의 가족들이 이 위기 상황을 겪어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더글러스의 장녀는 베스트셀러 소설가인 장녀 에놀라와 뉴욕 타임스의 저널리스트 카터, 그리고 카터의 두 딸과 막내아들, 그들의 가족들이 있다. 주요 스토리는 카터의 큰딸로 노숙자 보호소에서 일하는 플로렌스와 그녀의 가족, 사설 클리닉에서 환자를 돌보며 풍족한 삶을 영위하는 둘째 딸 에이버리와 그녀의 가족들이 보여 주고 있다.

 

"도덕적 해이에 대해선 아버님 말씀이 맞는 것 같다. 미국인들 가운데 가장 손해를 많이 본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이잖아. 미래를 위해 저축한 사람들. 미래를 믿은 사람들. 자기 자신을, 그리고 미래를 믿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사기 당한 기분을 느끼고 있거든. 거대한 몹쓸 장난에 당한 기분이라고."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누구나 생각했지만 아무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 가장 시니컬하고 강렬하게 사회를 비판하는 작가이다. <케빈에 대하여>에서는 소시오패스 아들을 둔 엄마의 모성애를 다뤘고, <내 아내에 대하여>에서는 의료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가치에 대해, <빅 브러더>에서는 사회적 문제인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 문제인비만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이번 작품 <맨디블 가족>에서는 금융 쿠테타로 인한 통화의 위기로 인한 서민의 삶을 통해 정부와 사회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가장으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을 날을 각자의 입장에서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맨디블 가족에게 통화의 위기란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꿈처럼 현실로 다가온다. 오랫동안 부를 축적해 왔고, 미국에서 가장 호화로운 노인 원호 생활시설에서 여생을 즐기던 더글러스부터, 플로렌스의 외동아들로 어른보다 더 경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관심이 많은 열세 살 윌링에 이르기까지 맨디블 가족들은 4대에 걸쳐 각자 다양한 모습과 방식으로 재정적 파탄을 경험하게 된다. 중요한 인프라나 금융을 포함해 모든 거래는 오프라인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법이 제정되어 종이 계좌 내역서와 수표책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민간 대중교통이 사라지고, 국가는 개인이 보유한 모든 금을 회수하겠다고 선언한다. 주식 시장이 붕괴되고, 자본가들의 연금이 날아가 버리고, 군인들이 집들을 다니며 숨겨둔 금을 찾아 개별 수색을 하기 시작한다. 담보대출 이자는 계속 치솟았고, 월급의 물가 수당이 올랐지만 실제 물가 상승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시작에 불과했다.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이 작품을 집필하기 위해 엄청난 연구 조사를 했고, 그 철저한 자료 조사와 치밀한 논리를 토대로 경제적 디스토피아 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해내고 있다.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지만, 너무도 리얼하게 현재를 반영하고 있어 더 오싹하고, 공감되는 무서운 작품이기도 하다. 맨디블이라는 한 가족의 삶을 통해 패권전쟁으로 생존 위기에 직면한 서민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 과연 돈이란 무엇인가, 그 돈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고 있다. 등장 인물들에겐 하나 같이 대사가 빽빽하게 주어져 있고, 마치 경제학 책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경제와 관련된 전문적인 이론들이 난무하는 작품이라, 읽기에 수월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라이오넬 슈라이버가 이 작품 속에서 그려내고 있는 세계는 그저 허구의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현재를 너무도 소름 끼치게 반영하고 있다. 라이오넬 슈라이버 만큼 현대 사회를 예리하게 읽어내고, 시대를 탁월하게 포착해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다. 2018년 현재, 우리가 이 작품을 꼭 읽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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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1 0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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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2 2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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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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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각자의 스무 살 생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이 어떤 하루였는가, 라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스무 살 생일에 대해 잘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한 것은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옛날 일이다.

 

당신은 스무 살 생일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는가. 하루키는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르바이트로 커피점 점원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일을 바꿔줄 사람을 찾지 못해 결국 생일날도 종일 즐거운 일 따위는 하나도 없이 보냈다고. 하루키의 신작 단편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역시 고독한 스무 살 생일을 맞이하게 된다.

웨이트리스 일을 하는 그녀는 생일날 밤을 함께 보냈어야 할 남자친구와 며칠 전에 심각한 말다툼을 했고, 아르바이트 친구가 날짜를 바꿔주기로 했지만 감기가 도져 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급히 일하러 나오게 된다. 어차피 스무 살 생일이라고 딱히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녀는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일하는 곳은 롯폰기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플로어 매니저는 가게가 있는 빌딩의 육층에 자신의 방을 가지고 있는 사장의 방에 저녁식사를 가져다 주는 일을 했는데, 갑작스런 복통으로 그 일을 그녀가 맡게 된다. 정확히 8시에, 604호실로 식사를 가져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8시가 되어 사장의 식사가 차려지자 그녀는 왜건을 밀려 육층으로 올라갔고, 방에 있던 노인에게 요리를 전달한다. 그런데 노인은 그녀에게 의외의 제안을 한다.

"아가씨, 오 분쯤만 자네 시간을 내줘도 괜찮겠는가? 자네와 이야기하고 싶네." 라고.

 

 

인생에 단 한 번밖에 없는 스무 살 생일을 이제 막 맞이한 그녀와 노인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사실 식당 직원들 사이에서 사장은 조금 미스터리한 존재였다. 그 동안 플로어 매니저 외에는 누구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고, 원하는 요리 또한 항상 치킨으로 정해져 있었다. 조리법과 곁들이는 채소는 그날그날 조금씩 달라졌지만,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치킨 요리였다.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의문의 노인과 하필 생일날 아무런 특별한 일을 갖지 못한 고독한 여주인공. 세차게 내리는 비로 인해 공기 중엔 비 냄새가 섞여 있었다.  과연 그녀의 스무 살 생일날 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생일 축하하네." 노인은 말했다. "아가씨, 자네의 인생이 보람 있는 풍성한 것이 되기를. 어떤 것도 거기에 어두운 그림자를 떨구는 일이 없기를."

두 사람은 잔을 마주쳤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아트' 프로젝트, 그 네 번째 작품이다. <>, <이상한 도서관>, <빵가게를 습격하다>에 이어 독일의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카트 멘시크의 그림과 함께하는 이 작품은 일본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단편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짧은 분량의 이야기이지만, 독특한 분위기의 일러스트와 함께 보여지는 스토리는 꽤나 매혹적이다. 카트 멘시크의 일러스트들은 삽화 정도의 느낌이 아니라 하루키의 글을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짧은 단편이지만, 그림책으로도 소장 가치가 있을 것 같은 예쁜 책이기도 하고 말이다. 빨강, 주황, 핑크, 강렬한 세 가지 색과 과감한 클로즈업 컷 등 선명하면서도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일러스트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하루키는 "모든 사람이 일 년 중에 딱 하루, 시간으로 치면 딱 스물네 시간, 자신에게는 특별한 하루를 소유하게 된다."고 생일의 의미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생일이라는 것은 당신에게 일 년에 딱 하나밖에 없는 정말로 특별한 날이니까 이건 좀 더 소중하게 여겨야지요. 그리고 유례를 찾기 힘든 그 공평함을 축복해야지요." 라고.

이 작품 속 그녀처럼, 누군가 나에게 생일이니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단 그 소원은 하나여야 하고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도 도로 물릴 수 없다. 어떤 소원을 선택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소원은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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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함은 분만실에 두고 왔습니다
야마다 모모코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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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클로 속옷 위에 줄무늬 티셔츠, 육아에 허덕이는 좌충우돌의 나날. 짬이 나면 스마트폰과 눈싸움을 벌이거나 과자 먹기..... 나의 심신도 여성스러움도 깨끗이 말라버렸습니다. 여성 호르몬의 사하라 사막인가?!

하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태평양보다 넓고 깊습니다.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일이 바로 '육아'라 가끔은 누구나 하는 걸 과연 힘들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고 어려운 건 어쩔 수가 없다. 돈과 경력을 포기할 수 없어 눈물겨운 워킹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엄마도, 종일 집에서 아이만 돌봐야 하는 전업 주부인 엄마에게도 말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모자라 퇴근 하자마자 집에 와서 제2의 일을 시작해야 하는 워킹맘의 고달픔이야 실제 엄마가 아닌 사람들도 어느 정도 알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24시간 아이와 함께 지내느라 온 마음과 시간을 다 투자해야 하는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맘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오죽하면 매일같이 그만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던 직장 생활을 다시 하는 게 아이를 종일 돌보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겠는가.

 

나도 엄마는 당연히 처음이다 보니,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매일매일이 새롭고, 매 순간이 실수투성이에 정신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말이다. 육아에 관련된 책도 읽을 만큼 읽었고, 주변 친구나 선배맘들에게 노하우도 많이 전수받았고, 이 정도면 엄마로서 준비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 부딪히는 육아의 세계란, 책을 통해 만나고, 사람들의 경험담을 통해 짐작했던 그 수준이 아니었다.

그 스트레스를 해소 하기 위해, 공감하고, 위 받고 싶어서 숱한 육아와 관련된 에세이들을 죄다 찾아 읽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유쾌하고, 공감되는 책을 만났으니, 바로 인기 일러스트레이터야마다 모모코의 리얼 엄마 데뷔전을 그리고 있는 이 책이다. 이름하여 '섹시함은 분만실에 두고 왔습니다'!! 이런 제목으로, 이렇게나 충격적인 비주얼의 일러스트가 어울리나 싶은 생각은 잠시 접어 두시길. 그야말로 유쾌한 자학이 작열하는 폭소 육아일기는 당신에게 엄청난 공감과 위로와 유쾌함을 안겨줄 테니 말이다.

 

산휴, 육휴 기간은, 뚜껑을 열어보니 정말 눈 깜짝할 새였다. 휴직 전에 예상했던 생활이나 외모와는 많이 다른 결과가 된 것도 아쉽다. 전혀 살이 빠지지 않았고, 옷으로 가려지지도 않는다. 스마트폰이나 기성 유아식에 의지한 채 아무렴 어때 하고 생각해버린 적도 있었다. 나는 전혀, 절대로, 완벽한 엄마가 아니었다.

야마다 모모코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라는 18개월의 대장정 동안 좌충우돌하는 진풍경을 담은 육아 카툰 에세이는 예쁜 엄마는 도시전설에 불과하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실제 저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일러스트로 그려내고 있는 모습은 전 프로레슬러 '라이오네스 아스카'랑 닮은, 섹시함은 원래 없었지만 출산 후 완전히 상실했다고 표현되는 모습이다. 자세히 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릴 정도로 일부러 못생겨 보이도록 그려낸 인물이지만, 이상하게도 자꾸 눈이 가고, 자꾸 웃음이 나고, 이해되고, 공감되는 캐릭터이다. 임신 하고 자신의 모습을 보며.. 달걀형 얼굴이 되고 싶었는데, 달걀형 몸매가 되고 말았다는 그녀의 한탄은 아마 대부분의 임신부들이 경험해본 이야기일 것이다. 날씬하게 임신 전 원래의 몸매 그대로 배만 볼록 나온 임신부도 참 많더만, 전체적으로 거대해져버려 마치 험프티 덤프티 같은 모습이 되어 버린 모습에 그만 빵 터져 버리고 말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의 하루는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새에 밤이 왔다!'의 느낌.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루가 다 가버린 기분이다. 매일매일 아기가 중심인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아기가 낮잠을 자고, 밤에는 덜 보채고, 수유를 주기적으로 하고, 때 맞춰 병원에 가서 예방 접종을 하고 등등... 잠시도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아이 때문에 샤워할 때 욕실 문을 열어두고 하는 건 기본, 잦은 수유 때문에 노브라에 구질구질한 옷을 입고, 화장은커녕 얼굴 상태가 말이 아닌 그 모습들이 너무도 리얼하게 그려져 있어 엄마들의 폭풍 공감을 불러올 것 같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내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궁극의 못생김에 가까워져 가는 낯선 얼굴에, 출산 후에 수유만 열심히 해도 원래 몸무게로 돌아간다고 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은 다 거짓말인 걸로, 나도 경험했고, 당신고 경험했을 그 모든 구질구질하고, 불쌍한 사연들이 특유의 자학형 유머로 유쾌하게 소개되고 있다. 정신 없이 웃으면서 읽히는 카툰 에세이지만, 촌철살인의 문장들이 가슴 속에 콕콕 남아 찡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집안 일, 청소해놓아도 바로 난장판이 되어 버리는 집, 한 번에 너무 많은 일을 한 꺼 번에 감당해야 하는 우리의 엄마들.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잊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엄마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멋지고, 행복한 일인지 충분히 느끼고, 그 상황을 즐기며 누리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그다지 녹록치 않으니 말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지만,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끌어 안고 살아야 한다는 굴레와도 같다. 자신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감수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매 순간 자신이 잘 하고 있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그리고 곧 엄마가 될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그리고 엄마들의 고충을 알 수 없는 세상 모든 남자들에게도. 이게 바로 진짜 '현실 엄마'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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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심리학 - 너의 마음속이 보여
송형석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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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다시피 선입견이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상을 보고 자기 멋대로 내린 판단이다. 그러니 선입견이라는 게 좋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제법 쓸 만한 견해일 수는 있다. 어차피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추정할 때 그것이 100퍼센트 맞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이미 감안하고 있지 않은가. 적어도 50퍼센트 이상의 확률만 있다면 일단 선입견을 가설로 인정하고 적용해도 좋다. 틀리면 "아님 말고" 하면서 없던 일로 하면 된다.

삭막한 인간 관계, 팍팍한 일상의 고단함, 매일같이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현대인들은 누군가의 위로나 공감을 필요로 한다. 아마도 그 어느 때보다 심리학 서적들과 에세이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심리학 서적들도 요즘에는 딱딱한 이론이나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에세이처럼 가볍고 친근하게 풀어내는 경우가 많아 읽기에 좋은 것 같다. 심리학 서적들이 주로 '나 사진을 알라'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은데, 이번에 만난 책은 '타인의 심리를 읽어라'는 색다른 방향이어서 흥미로웠다.

이 책의 저자 송형석 박사는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정신 감정 편에 출연해 멤버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행동 패턴을 예측하면서 뜨거운 호응을 샀다. 이 책도 당시 2009년 출간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았었고, 이번에 개정증보판이 새롭게 출간되었다. 10여 년의 내공이 더 쌓인 저자가 당시 제시할 수 없었던 해결책을 대폭 보강했다고 하니, 기존에 만났던 이들도 새로운 버전으로 읽는 다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특별 부록으로 심리학이 알려주는 '문제 인간' 감별법과 대처법을 담은 미니북을 받을 수 있어, 더욱 실용적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상한 사람, 불편한 사람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이 책은 사람으로 스트레스 받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어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가? 확 짜증이 나는가? 한 대 패주고 싶은가? 그런 감정은 다 나중에야 갖게 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 비교적 인상이 좋다. 특히 노는 스타일이 서로 비슷한 경우에는 이들이 화통하고 자유로운 성격의 소유자란 느낌도 받는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개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온다.

1장에서는 우선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처음 만난 사람을 파악하는 방법부터 알려주고 있다. 여러 가지 단서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흥미로운 것은 바로 '선입견'이다. 저자는 선입견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선입견을 최대한 활용해, 정반대의 가능성도 고려하고, 자신이 세운 선입견들 간에 모순되는 부분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을 파악하고, 숨어 있는 심리를 찾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실전처럼 이어진다. 2장이 시작되면 심리를 읽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도구를 심리학 이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대상관계 이론, 자기 심리학, 융의 인격 분류 등 정신 분석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론들을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준다. 이렇게 첫 번째 파트가 끝나고, 두 번째 파트가 시작되면 본격적으로 여러 사람의 유형이 성격 별로 보여지고 있다. 관심에 목마른 사람들, 타인에게는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 그리고 타인에게 자신을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과 성격 별로 구분되어 있어 이야기 자체로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사람의 마음은 초능력자가 아닌 다음에야 쉽사리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므로 반드시 누군가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관계를 맺고 살아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타인은 자기 자신을 보기 위한 거울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타인에 대해서 관심 있게 지켜보고 알아갈 수록 나 자신도 그만큼 충분히 이해하고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또한 이른바 '문제 인간' 유형을 만났을 때 상대를 어떻게 대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를 위해 너를 배운다는 심정으로, 이 책을 가이드 삼아 한번 읽어 보자. 분명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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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항목을 참조하라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황가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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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홀로코스트에서 끔찍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모든 개인성의 흔적이 말소된 방식이야. 한 사람의 독특함, 그의 생각, 과거, 성격, 사랑, 결점, 비밀이......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어. 그냥 존재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지. 피와 살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그 사실에 화가 나. 그래서 <브루노>를 쓴 거고." "그리고 브루노가 당신한테 말소자들과 싸울 방법을 가르쳐 줬고?" "그래. 가상의 세계에서. 일상생활에서 브루노가 날 위해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브루노는 멋진 꿈이야. 하지만 그 이상이기도 해."

책을 읽기도 전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무려 74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것도 홀로코스트 문학이라고 하니 말이다. 우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홀로코스트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뭘까.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과거를 되풀이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새겨진 글귀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픈 역사를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억해야만 아픈 역사를 극복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는 영화, 연극, 문학, 음악, 미술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런데 그 중 내가 어떤 경로로 그것을 접해 본 적이 있었나 떠올려보니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그리고 문학으로는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전부였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낯선 이스라엘의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의 이 작품이 굉장히 기대가 되었다.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강제수용소와 1950년대 건국 초창기의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전체 4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스토리를 단 몇 줄로 요약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기존 소설의 형식과 문법, 그 어떤 걸로도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와 그 현실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환상과 은유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작가의 상상력은 그야말로 엄청나다. 잠시만 집중을 놓쳐도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는 이야기이고,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어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상상력의 내적 지평을 무한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은유라고 하면, 그것을 고스란히 문장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가 이야기를 써야 할 공책의 텅 빈 페이지 위로, 잠 못 이루는 밤에 하나의 단어가 번개처럼 스쳐 갔다. "조심해." 하지만 그가 무엇을 조심해야 했던 걸까? 그리고 그는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무슨 목적으로 주위에 그렇게 능숙하게 요새를 쌓았던 걸까? 엄마 아빠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들은 명령을 남겼다. 조심해. 그래야 네가 살아 남을 거다. 그리고 나중에 모든 전쟁이 끝나고 나면 네가 그토록 맹렬하게 지켰던 삶이 가진 모든 함의에 대해 차분히 앉아서 얘기할 시간이 있을 거야.

이야기는 아홉 살 소년 모미크의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한다. 어느 날 모미크에게 갑작스럽게 할아버지가 생긴다. '역사에서 이름을 지워 버려야 마땅한' 나치에게 살해당했다고 생각했던 안셸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던 것이다. 역시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부모님들의 침묵은 더욱 깊어지고, 모미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망치는 괴물나치 짐승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애쓴다. 모미크는 비밀 공책에 몰래 발견한 책의 이야기를 베껴 쓰고, 길에서 데려온 작은 동물들로 나치 짐승을 길러내는 실험을 한다. 그래도 읽을 만했던 1부가 지나고 2부가 시작되면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기 시작한다. 3인칭으로 전개되던 소년 모미크의 이야기에 비해, 갑작스럽게 1인칭으로 전개되는 2부는 이야기를 따라 잡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야말로 환상과 은유로 뒤범벅된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된 모미크는 실존 인물인 유대계 작가 브루노 슐스의 책을 우연히 읽고 나서 그에게 푹 빠진다. 실제로 브루노는 나치에게 살해되었지만, 이야기 속 그는 그곳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3부에서 작가인 모미크는 안셸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수용소에서 밤마다 수용소장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가로 자신의 처형을 요구한다. 그야말로 천일야화의 홀로코스트 버전인 셈이다. 소장은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 주인공인 카지크에 관한 전기가 바로 4부로 이 작품의 후반부를 장식하고 있다. 이 거대한 이야기를 읽는 내내 홀로코스트가 개인에게 남긴 비극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백만 개의 비극 중 하나의 비극, 살아남은 자들의 삶에 집중한 이 묵직한 이야기는 홀로코스트 문학의 새로운 한 지점을 그리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무엇보다 매 페이지마다 밑줄 긋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들이 인상적이었는데, 그것이 평범한 독자로서는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작가의 상상력에 힘겨웠지만 그 시간들을 견디게 해준 독보적인 매력이기도 했다. 다비드 그로스만은 한강 작가의 수상 이후로 국내에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의 작년 수상 작가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이렇게 그의 초기작을 국내에서 만날 수 있게 되어 굉장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은유'라는 장치를 가장 아름답게 문학 속에서 구현해내고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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