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에 갇힌 여자 스토리콜렉터 63
로버트 브린자 지음, 서지희 옮김 / 북로드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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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가 미친년 취급받는 것쯤은 감수할 수 있어요. 제가 못 참겠는 건 말입니다, 이 여자애들한테 일어난 일이에요. 아무런 노력도 안 해보고, 오늘 밤에 발 뻗고 주무실 수 있겠어요? 우리가 처음 경찰이 됐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젠장, 수색에 드는 비용은 저한테 청구하세요. 인사 위원회에 회부해서 저를 해고하셔도 돼요, 지금 그딴 건 아무 상관 없어요."

주말 내내 내린 눈이 눈보라가 되어 흩날리는 한겨울, 런던의 차가운 호수 아래 얼음 속에서 젊은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절대적인 힘을 지닌 상류 노동 귀족의 딸로 사교계의 명사로 소개되던 아름다운 앤드리아였다. 마쉬 총경은 이 중대한 사건을 위해 경시청 소속 에리카 경감을 소환해 수사를 맡긴다. 스물 셋의 앤드리아는 오는 여름 약혼자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억만장자의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 왔던 그녀가 외딴 호수에서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에리카 경감은 기존 수사팀의 책임자였던 스팍스 경감의 적의와 사사건건 간섭하려 드는 앤드리아의 아버지 사이먼 경의 압박 사이에서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사실 에리카 경감은 과거 여섯 명의 소녀를 살해한 공으로 서른아홉밖에 안 된 나이에 경감으로 승진했던 스타 경찰로 주목받았다. 경찰이던 남편을 작전 수행 중에 잃고 나서 죄책감과 슬픔으로 한 동안 일을 쉬었고, 아직도 그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하지만 그녀는 뛰어난 직감과 올곧은 원칙으로 사건을 파헤치고, 주위의 어떤 방해나 제약에도 굴하지 않고 집요하게 범인을 쫓는다. 아직도 먼저 떠난 남편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범죄 피해자들의 애달픈 삶에 마음이 흔들리는 감상적인 면도 가지고 있지만, 사건 해결을 위해서는 윗선과의 충돌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강한 면모도 보여 주고 있다.

 

모스는 거의 매일 목숨을 걸고 칼과 총, 복수심과 원한으로 무장한 미치광이들을 상대했다. 반면 제이콥이 아는 세상은 두 엄마와 장난감, 머리 위에서 느릿느릿 돌아가는 모빌과 점점 사그라드는 편안한 노랫소리가 다일 터였다. 에리카는 처음으로 자기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는 일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나쁜 놈 하나를 잡는 동안 열 놈이 더 생기는 현실에 살고 있었으니까.

에리카는 사건을 조사하다 미결로 묻혔던 매춘부 세 명의 죽음과 앤드리아의 죽음이 닮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를 목격한 증인이라고 생각했던 여인마저 시체로 발견되고, 조사를 위해 방문한 술집에선 주인이 공식 항의서를 제출하고, 윗선에선 그녀의 과거 이력을 들먹이며 정신감정을 의뢰하겠다고, 면직 조치를 내리고 만다. 그리고 그날 밤, 범인으로부터 메시지를 받게 되는데, 과연 에리카 경감은 범인의 경고와 경찰관 정직이라는 최후의 통첩으로부터 어떻게 사건을 해결할 것인가.

시리즈로 이어지는 스릴러 작품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으라고 한다면 캐릭터일 것이다.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해 페이지 바깥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올 것 같은 현실성을 부여해야만, 독자는 이야기에 빠져 들 수 있다. 왜냐하면 피가 난무하고, 잔인한 사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지는 현장이야말로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비현실성'의 표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완벽하진 않더라도 어딘가 사람냄새 물씬 나는, 그래서 정말 살아 숨쉬는 인물처럼 느껴지는 캐릭터가 등장해야 우리는 이야기에 비로소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로버트 브린자의 범죄 소설 데뷔작인 이 작품은 그야말로 시리즈로 갈 수밖에 없는, 성공적인 캐릭터를 탄생시킨 것 같다. 스릴러에서 흔치 않은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 덕분에 피해자에게 공감하고, 사회 기득권층에 분노하고 맞서는 그녀의 모습에서 깊은 공감과 짜릿한 통쾌함마저 느끼게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에리카 경감 시리즈는 <밤의 스토커>, <어두운 바다>, <마지막 호흡>, 그리고 최근 출간된 <콜드 블러드>로 이어지고 있다. 어서 빨리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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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도서관
김이경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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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보다 좋은 불쏘시개는 없느니!"

정신을 좀 슬게 하는 책들을 불살라 왕국의 난방까지 해결한다면 그보다 좋을 수 있으랴. 광장에는 거대한 용광로가 놓이고, 사람들은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 책들을 던져 넣었다. 골수에까지 좀이슨 자들은 불길을 피하기 위해 몰래 책을 감췄다. 그자들에겐 철퇴가 필요하다. 철퇴는... 활자판을 녹이면 되었다. 왕은 기꺼이 재활용을 허락했다. 문자의 시절은 끝났다. 이제 칼의 시대였다.  

-'분서' 중에서

만약 저승이 커다란 도서관이라면 어떨까.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 저승에서 할 일이란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이고, 그걸 잘 써서 통과가 되면 니르바나의 세계에 들지만 안 되면 될 때까지 계속 써야 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과연 내 삶은 책으로 쓸 만큼 특별하고, 감동적인 뭔가가 있었던 걸까.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극중 누군가는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니르바나에 가지 못하고 저승에서 자서전 쓰기를 하고 있었다. 주인공 역시 지극히 평범하고 평범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쉽게 글을 쓰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태어나서 살고 죽는 것, 그것이 시작이고 끝이었다. 모든 은유를 무색케 하는.' 이라고 말이다.

이 책 <살아 있는 도서관>은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던 <순례자의 책>이 무려 9년 만에 개정판으로 출간된 것이다. 초판에는 책에 관한 단편 10편이 실려 있었고, 이번 개정판에는 처음과 끝에 2편의 이야기가 덧붙었다. 추가된 처음 프롤로그는 애초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었던 동화 같은 짧은 상상, 이라고 작가가 밝히고 있으며, 마지막 에필로그는 오랫동안 작가가 마음속에서 궁글려온 이야기로 지난해 발표한 최신작이다. ‘책에 관한 소설집이라는 전무후무한 형식도 놀랍지만, 이 소설집 속에 실린 단편 이야기 하나하나가 너무도 다양하고, 흥미진진하고, 기발하고, 매력적이어서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마치 어린 시절 막 세계 명작 동화에 입문했을 때의 그런 기분이랄까. 책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는 페이지들에서 느껴지는 이야기의 힘이란, 그야말로 굉장했다.

"길을 잃었소?"

"아니오. 책을 구하러 가는 길이오."

흰 수염을 늘어뜨린 대상이 물었다.

"책이라고? 그게 무어요?"

"거짓은 죽이고 진실은 영원히 살아남게 적어두는 거라오. 내 혀가 죽은 다음에도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건 책이 있기 때문이오."                           

                 -'순례자의 책' 중에서

세상에 없는 책을 상상하고, 그런 책들이 꽂힌 도서관을 꿈꾸는 마음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저승의 도서관'이라는 그림을 완성시켰고, 고대 서구사회에서 책의 주재료였던 파피루스와 양피지를 넘어 13세기부터 시작되어 16세기 이후 유행했던 인피로 제본한 책도 등장한다. 조선시대 패설에 얽힌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와 일본 에도 시대의 책 대여상 가시혼야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너무도 흥미진진해서, 하나의 소재로 발전시켜 장편으로 발전시켜도 좋을 만한 이야기들이었다. 거기다 책을 독점하려는 욕망이 책을 어떻게 훼손하고 통제하는지 보여주는 분서의 역사에서 끄집어낸 이야기도 있고, 덴마크에서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 도서관'에서 모티브를 얻은 표제작도 매우 재미있었다.

시대도, 소재도, 방식도 너무 다양한 단편들이 마치 선물 상자처럼 느껴지는 이 단편집은 그 뿐 아니라 ''에 관한 방대한 지식까지 함께 전해 주고 있어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들이 끝나고 나서는 '소설 속 책 이야기'라고 해서 각각의 이야기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한 지식들이 실려 있다. 인류의 놀라운 발명품인에 관한 인문학적 주제를 '이야기'로 재탄생시키게 된 계기가 된 정보들이라 소설만큼이나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의 누드 제본 방식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책에 관한 백과사전 급 단편 모음집'이라는 주제에 가장 어울리는 제본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 자체로도 아름답고, 360도 쫙 펴지는 제본이라 읽기에도 너무 좋고, ''이라는 것의 본질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방식이라 이 작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제본이라는 생각도 든다. 짧고 술술 읽히는 이야기들이지만,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멋진 작품이라 오래된 도서관의 운치만큼 여운을 남겨주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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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3
진 웹스터 지음, 김지혁 그림, 김양미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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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요람에 누워 있던 귀여운 아기를 도둑맞은 적 없으세요?

어쩜 제가 그 아이인지도 몰라요! 소설 속 이야기라면 이쯤에서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겠죠?

자신의 근본을 모른다는 건 정말이지 말도 못하게 찜찜한 일이지만, 흥미롭고 낭만적인 면도 있답니다.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는 고아 소녀가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대학에 진학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한 소녀의 성장 소설이자, 풋풋한 연애편지로 된 서간체 소설이기도 하다. 아마 꿈 많던 소녀 시절에 나만의 키다리 아저씨를 꿈꾸며 설레는 기분을 느껴보지 않았던 여성 독자들이 있을까 싶다. 그 이유로 이 고전 적인 플롯은 아직도 애니메이션과 영화, 뮤지컬, 드라마 등으로 변주되어 현대에도 꾸준히 사랑 받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기도 하다.

열정적이고 모험심 강한 고아 소녀 제루샤는 올해 열일곱 이다. 보통 열여섯 살이 넘으면 고아원을 나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제루샤는 고등학교에 다니며 규정보다 2년이나 더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덕분에 손님들이 올 때면 마룻바닥이며, 침대며 청소를 하고, 아흔일곱 명의 어린 고아들을 깨끗이 씻기고, 빗질하고, 제대로 옷을 갈아 입히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장 선생님의 부름을 받게 된 그녀는 상상도 못했던 제안을 받게 된다. 주로 고아원의 남자아이들에게 지원을 했던 한 신사분이 제루샤가 쓴 수필을 읽고는 그녀를 대학에 보내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학비는 물론 용돈까지 제안한 그의 조건은 단 하나, 답례로 한 달에 한 번 감사 편지를 써달라는 거였다. 그렇게 해서 제루샤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학업 진행 상황과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익명의 키다리 아저씨게에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어쨌든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갈게요. 최근에 알게 된 비밀 한 가지 알려 드릴까요? 절 허영덩어리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실 거죠? 그럼 말씀드릴게요.

전 예뻐요.

정말이라니까요. 방에 거울을 세 개나 두고도 그걸 모른다면 완전 바보게요?

그리하여 이 동화의 주요 스토리는 제루샤가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한 쪽에서 보내는 편지로 진행되는 스토리이지만 흥미진진한 이유는 바로 발랄하고, 긍정적이고, 고아라는 처지와 후원을 받는 입장 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할 말은 하는 여 주인공의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키다리 아저씨라는 인물에 대한 미스터리함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녀가 새로운 생활을 겪고, 새로운 인물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설레임이 묻어나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 또한 매력이다. 거기다 키다리 아저씨라는 존재에 대한 일본의 반전까지 더해 지면, 그야말로 소녀들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완벽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고전 명작을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함께 다시 읽는 즐거움을 주는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가 리커북으로 출간되었다. <키다리아저씨>는 그 세 번째 리커버북이다. 기존의 시리즈에 비해 서정적이고 따뜻한 색감의 예쁜 일러스트는 그대로, 거기에 고전적 프레임의 더 커진 판형과 빈티지한 색감으로 클래식한 느낌을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나 삽입되어 있는 일러스트는 따로 한 장씩 떼어놓고 보더라도 작품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답다. 따스하고 포근한 색감과 터치로 그려낸 세밀한 이미지들은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쳐도 바로 현실을 잊고 추억에 빠져 들도록 만들어 준다.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는 소장용으로도, 누군가를 위한 선물용으로도 최고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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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들의 조용한 맹세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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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면서 예쁘다, 아름다워, 하며 계속 말을 걸었다.

그것은 아주 어렸을 때 겐야가 할머니에게 배운 비밀 의식이었다.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단다. 거짓말 같으면 진심으로 말을 걸어보렴. 식물들은 칭찬받고 싶어 한단다. 그러니 마음을 담아 칭찬해주는 거야. 그러면 반드시 응해올 거야.

 

겐야는 고모 기쿠에가 여행 중 온천지의 여관에서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기쿠에 고모는 남편이 1년 전에 죽었고, 딸도 여섯 살 때 죽어, 로스앤젤레스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가족도, 친척도 딱히 없었기에 화장 절차는 일본에서 진행하기로 하고, 유골을 남편 묘 옆에 묻어주기 위해 겐야는 고모의 집으로 향한다. 미국에서 고모의 변호사를 만나게 되는데, 고모가 겐야에게 42억 엔이 넘는 유산을 남겼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유언장에서 여섯 살때 백혈병으로 죽었다고 알고 있었던 레일라가 사실은 유괴를 당해 행방불명 된 것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고모는 만약 레일라를 찾게 되면 겐에게 물려준 유산의 70퍼센트를 레일라에게 주었으면 좋겠지만, 찾지 못하면 레일라 같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회운동에 유용하게 썼으면 좋겠다는 문구를 썼었다.

겐야는 애초에 42억 엔이나 되는 유산을 상속받을 생각도, 그 돈으로 편하게 살아보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그보다 27년 동안이나 딸의 생사를 모르고 살았을 고모의 괴롭고 힘든 나날에 마음이 쓰여, 되든 안 되든 레일라를 찾아 보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고모가 홀로 생활했던 커다란 저택에서 비밀 상자에 있던 의문의 편지를 비롯해 작은 단서들을 발견하고, 사립탐정을 고용해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미국에는 행방불명인 채 생사도 모르고 몇 년이나 지난 아이들만도 수만 명이었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레일라를 찾는 일은 그야말로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비밀을 감춘 채 생을 마감한 고모의 일생을 돌아보며, 과거에 있었던 그 날의 진실에 점점 다가갈 수록,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한다. 시종일관 잔잔하게 흘러가던 이야기가 도달한 것은 그야말로 반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파격적인 진실이었다.

 

 

 

 

겐야는 끓기 시작한 브로도에 잘 저은 달걀과 소시지를 넣어 충분히 섞고, 다시 한 번 끓었을 때 바로 가스 불을 끄고는 로잔느가 놓은 수프용 접시 두 개에 담았다.

"이건 굉장해요. 오늘 이렇게 호화로운 저녁을 먹을 수 있다니...... 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면 인생에는 살아보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행복이 무진장 흘러 넘친단다, 하고 늘 말해주었어요. 주술처럼 말이에요."

 

미야모토 테루는 일본 서정문학의 거장이라 불린다. 국내에 소개된 <환상의 빛> <금수>라는 작품 역시 그에 걸 맞는 작품이었고 말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어느 정도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고 해서 더 기대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야모토 테루 특유의 담백하고, 잔잔한 감성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죽은 고모에게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된 남자가 숨겨진 비밀을 찾게 되는 과정 자체는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형식이지만, 이 작품에 긴장감이나 서스펜스 같은 요소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남겨진 이들이 겪게 되는 상실의 아픔을 그렸던 전작처럼, 이 작품 또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선택과 그로 인해 달라져 버린 삶과 운명에 대해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는 수수께끼 자체가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미야모토 테루가 왜 서정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겐야의 고모가 살던 대저택에는 여러가지 꽃과 나무들이 가득했고, 넓은 정원이 숲을 이루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겐야는 경찰도 수사를 포기해버린 지 이미 20수년이나 지난 사건을 조사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건지 고민하거나, 레일라의 생사를 비롯해 자신에게 닥친 미래 등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질 때 정원을 거닐었다. 그리고 풀꽃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꽃과 풀들에게 말을 건넨다. 너희들이 레일라를 위해 기적을 일으켜달라고. 겐야는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꽃에도, 풀에도, 나무에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식물에게도 마음을 담아 칭찬하면, 반드시 응해오는 법이라고 말이다. 후반부에 숨겨졌던 비밀이 밝혀지고 나면 정원의 꽃들은 또 다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이 작품의 제목이 풀꽃들의 조용한 맹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도 하고 말이다. 잔잔하고, 아름답고, 기품 있게 흘러가는 이야기지만, 그 속에 품고 있는 미스터리를 놓지 않고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있어 더욱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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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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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은 자기 위로 함정의 입구가 철커덩 닫히는 게 느껴진다. 다시금 눈물이 솟구친다. 난 끝장이야!

시체를 감춰야 한다. 하지만 어디에? 어떻게? 만일 오두막을 부수지 않았다면, 레미를 그 위로 올려놓으면 아무도 거기까지 올라가서 찾을 생각을 하지 않을 텐데...

프랑스의 시골 마을인 보말에 사는 열두 살 소년 앙투안은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6년 전 이혼한 아버지는 한 번도 보발로 돌아오지 않았고, 앙투안은 고독한 어머니에 대해 책임간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별로 외향적이지 못한 천성이라 약간 우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친구들이 새로운 게임기에 정신이 빠져 있어 그의 친구는 옆집 데스메트 가족의 윌리스라는 개가 유일했다. 그런데 어느 날 윌리스가 자동차에 치였고, 앙투안은 데스메트 씨가 죽어가는 개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엽총으로 쏴 폐기물 담는 자루에 넣는 걸 보게 된다. 앙투안은 너무나도 괴로웠고, 그 마음을 가눌 수 없어 자신을 따르던 데스메트 씨의 여섯 살 아들에게 순간적으로 화풀이를 하고 만다. 분노에 휩싸여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오른 앙투안은 윌리스의 죽음이 가져온 쇼크와 분노로 들고 있던 작대기로 아이를 후려치고 만다.

그렇게 단 몇 초 사이에 앙투안의 삶의 방향이 달라져 버린다. 열두 살짜리 소년이 살인범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겁에 질린 그는 아이의 시체를 숲에 있는 나무 둥치 구멍에 숨기고, 이후 실종수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지지만 시체는 발견되지 않는다. 12년 후, 의사가 되어 파리에서 살던 앙투안은 가급적 고향과 멀리 하며 살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요청으로 고향을 방문하게 되는데,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이야기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사건이 벌어지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열두 살 소년 시절의 비중이 가장 많다. 죄를 지었지만 그것이 발각되지 않았을 때, 결코 죄 지은 자는 편하게 발 뻗고 잠을 잘 수 없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책하고, 발생할 수 있는 미래의 경우 수를 떠올리며 불안감에 떨고, 그냥 붙잡혀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과 그저 이곳을 피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고민하게 마련이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이 작품에서 서스펜스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그리는 데 더 치중하고 있다. 인물을 지배하던 죄책감과 불안감을 결국 현실로 만들어 내는 것이 무심코 저지른 아주 사소한 행동이라는 아이러니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세월과 함께 변한 것, 그리고 앙투안을 슬프게 하는 것은 이제 여기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중요성의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사실, 이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그가 죽인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의 모든 노력, 그의 모든 정신은 자기 자신에게로, 안전과 무사함에 대한 자신의 열망으로 향해져 있었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추리, 스릴러 작품으로 더 많이 알려진 작가이다. <오르부아르>가 공쿠르상을 수상하면서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공쿠르상과 추리 소설 관련 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가란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그의 위치가 독특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올해 <오르부아르>의 후속작인 <화재의 색깔>을 발표했고, 이는 '전쟁 3부작'으로 연결된다. 이번 신작 <사흘 그리고 한 인생>은 이 두 작품 사이에 위치한 작품으로 분량 때문인지 일종의 간주곡과도 같은 작품이라 평가 받기도 한다.

 

무대를 옮겨 다시 추리, 스릴러 작가로서 르메트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설명에 기대를 했지만, 다 읽고 나니 이 작품을 추리, 스릴러라는 카테고리에 넣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문학성 넘치는 스릴러' 내지는 '문학적 추리 소설'이라는 평도 있지만, 글쎄 이 작품은 <오르부아르> 이후 완전히 달라진 그의 작품 세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어 기존 그의 미스터리들을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작품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르부아르> 이전에 보여줬던 그의 작품 스타일이 더 좋았던 것 같다. 플롯과 구성, 캐릭터 모두 엄청나게 정교하고 치밀하게 짜여 있었던 '카미유 베르호벤' 시리즈를 좋아했다. 각 권이 모두 꽤나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부분 전혀 없이 모든 요소들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과정에서 변화 무쌍한 플롯으로 인한 반전까지 훌륭한 시리즈였으니 말이다. 그의 '전쟁 3부작'이 기대가 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카미유 베르호벤' 시리즈 같은 작품을 더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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