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사람이면 어때서
유정아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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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지금까지 살아 온 모든 순간이 그런 풍경과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것들은 그 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지만, 그 길을 지나쳐 오며 보고 느낀 것들은 끝에 무엇이 있든 기억에 새겨지니까. 어쩌면 사람은 길의 끝에 놓은 결과가 아니라, 눈에 담은 길가의 풍경들을 곱씹으면서 깊어지는 게 아닐까.

결혼 후 육아에 전념하느라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주부로 살다 보니, 정말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남들은 다 잘나가는데 나만 제자리에 있는 건 아닐까. 아직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동료들,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오로지 아이에게만 모든 걸 쏟아 붓고 있는 나는 그들처럼 커리어가 쌓이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내 젊음이 다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제목부터 그냥 호감이 가고, 내용을 읽지 않아도 위로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내가 시시할 정도로 흔한 사람이라는 걸 내 입으로 이야기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그런 기분, '더 이상 애써 무엇이 되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고, 굳이 어떤 가능성을 보여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반드시 뭔가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자 되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고, 그 실체가 더 잘 보였다는 저자의 말에도 공감 이백퍼센트였다. 조금 시시해지면 뭐 어떻단 말인가. 다들 이루고 얻는 것보다 버리고 포기하는 게 더 많은 시시한 삶을 살고 있을 텐데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비로소 내 보잘것없음에 애정을 갖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모든 것을 목격한 순간부터 나는젊은이스럽기를 그만두었다. 의지든 패기든 발랄함이든, 딱 내가 버겁지 않을 만큼만 내놓기로 했다. 타고난 게으름이나 소심함 같은 것들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젊음은 누군가에게 보답해야 하는 선물이 아니라 삶의 한 구간일 뿐이니까. 모든 나이가 그렇듯.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저자는 마음이 지친 날이면 자기 전 과자를 한 봉지 뜯어 놓고 착한 주인공들과 우스꽝스러운 악당들이 등장하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을 본다고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결국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이런 작품들을 보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어차피 해피 엔딩이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속으로 외우게 되었다고. 이런 만화들처럼 삶의 결말이 해피 엔딩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다면 지금의 일상이 조금 덜 버겁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하는데, 너무 좋은 방법 같았다. 나도 그녀처럼 내 삶이 해피 엔딩일 것을 믿고 싶어 졌다. 어쨌든 결국 행복해질 거라고. 그 과정이야 얼마나 복잡하고 어렵더라도, 미래의 행복을 믿는다면, 현재의 고통쯤이야 충분히 견딜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그야말로 평범한 30대 초반의 직장인이 할 법한 고민들과 현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어, 청춘이기를 포기하고 사는 요즘의 젊은 세대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에세이이기도 하다. 그녀가 그려내는 '실패로 끝났기에 이야기는커녕 추억으로도 남기지 못했던 내 삶의 가장 찌질하고 구질구질한 순간들'은 우리가 살면서 누구나 경험해봤을 만한 것들이라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안겨 준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생각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줄 수 없는 커다란 안도감을 주니까 말이다.

 

'소비에 실패할 여유'라는 글로 작년 큰 화제가 됐던 유정아 작가의 첫 번째 에세이는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로 가슴 한 가득 위안을 안겨 주고 있다. 그녀의 삶도, 나의 삶도 결국에는 모두 해피 엔딩이 되기를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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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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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오늘 아침 이전까지 녹화된 영상은 삭제돼 있었다. 나는 나를 믿으면 안 된다. 내가 의논하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은 남편뿐이다. 근데 남편을 믿어도 될까?

어둠의 방에 혼자 갇힌 듯이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고 십육 년 동안 가정주부로 여태껏 살아온 주란. 그녀는 친구들과 달리 한 번도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의사 남편에 똑똑한 아들까지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녀는 최근에 판교 신도시로 이사를 했는데, 원하는 설계대로 주택을 짓고 정원까지 있는 마당을 가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당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하면서, 완벽했던 그녀의 생활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백화점 침대 코너에서 일하는 상은은 결혼 사 년 만에 임신을 했지만,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신혼 초부터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 이혼을 하기 위해 변호사와 상담까지 받았지만, 임신 이후로 남편은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그와 헤어지기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남편이 저수지에서 밤낚시 약속이 있어 가는 길에 친정에 들른 상은은 다음 날 아침 전화를 한 통 받게 된다. 남편이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니 병원으로 와서 신원 확인을 해달라는 경찰의 연락이었다.

 

나는 피곤할 따름이었다. 잠이 자고 싶었다. 푹 자고 일어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 테고, 내 삶도 그대로일 게 분명했다. 김주란의 말대로 모두가 불행할 테고, 나의 내일도 불행할 거다. 하지만 이상하게 김주란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이 세상에 쉬운 삶은 없어요. 자신을 특별히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우린 모두 다 평범하게 불행한 거예요.'

이야기는 완벽했던 일상에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한 의심이 커져 가는 주란과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상은의 시점에서 교차 서술된다. 결혼과 함께 모두가 꿈꾸는 집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는 여자와 남편과 맞벌이하며 근근이 삶을 살아내는 여자의 삶이란 얼핏 교집합이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란의 남편이 일하는 병원에 제약 회사의 영업직원인 상은의 남편이 들락거리던 사이였고, 사고가 나던 날 밤에도 두 사람이 밤낚시 약속이 있었던 참이었다. 주란의 남편은 그날 밤에 마음이 바뀌어 약속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그의 말을 주란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벌어진다. 하지만 극 초반에 상은이 직접 자신이 남편을 죽인 살인자라고 고백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주란의 의심은 사실상 크게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주란은 이사오기 전에도 오해로 타인을 의심했던 전력이 있었고, 오래 전 언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에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주란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화자로 서술되는 방식이라 심리 서스펜스의 분위기를 띠고 있고,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그에 대한 완벽한 범죄를 꿈꾸는 상은의 이야기는 미스터리의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이야기가 교집합을 이루게 되고 주란과 상은이 만나 그들이 협력해서 같은 비밀을 추적하게 되는 순간, 작품은 또 다른 색채를 띠게 된다. 과연 두 주인공의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궁금증을 풀어나가는 과정은 영미권에서 한참 인기였던 가정 스릴러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면서 극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가정 폭력에서 비롯된 살인 사건이라는 소재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지만,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식이 매우 흥미로웠던 작품이었다. 소설 집필 경험이 없는 작가의 첫 작품이지만, 영화 연출을 했고, 장편 시나리오를 썼던 작가라 그런지 놀라운 데뷔작을 써낸 것 같다.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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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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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경애가 그 '봉인'이라는 말을 얼마나 필사적으로 붙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에는 육체 너머의 것이 있다는 것, 어떤 사랑은 멈춰진 기억을 밀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 사라진 누군가는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의 인생에서 다시 한번 살게 된다는 것.

팀장 대리라는 어색한 직함을 단 채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상수. 팀장 대리란 팀장은 팀장인데 팀원이 한 명도 없는 사람을 일컬었다. 반도미싱에서 영업 일을 하는 상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열심히는 했지만 융통성이 없고, 거래처 사장들과 다투거나, 정치 얘기를 하다가 불화를 만든다거나 하는 등 동료를 비롯해 공장주들에게도 별로 인기가 없었다. 결혼은커녕 연애라도 하는지 알 수 없고, 동료 팀장을 짝사랑하는 한심한 그를 회사에서 어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부친이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인데다, 회장의 재수학원 동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렇게 10년을 흘러오던 상수는 팀장 대리라는 직함에 조금 익숙해지자 자신에게 팀원을 배정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총무부에 있던 경애가 오게 된다.

경애는 원래 홍보부에 있다가 총무부로, 이번에는 다시 영업부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유는 그녀가 3년 전 농성 때 불법 해고 처단 등을 목 놓아 외쳤던 이력때문이다. 당시에 파업 기간 동안 일어난 성희롱을 노조 측에 항의한 탓에 파업이 흐지부지 되었고, 덕분에 그녀는 여지껏 회사에서 버텨오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차라리 회사를 나갈까 싶기도 했지만, 엄마가 유방암 판정을 받고 미용실을 닫고 항암치료를 했던 탓에 도망가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 왔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삐딱하게 볼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분명하게 의사 표시를 하는 그녀와 상수는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운전하면서 클랙슨도 한번 안 누르고 규칙을 잘 지키는 남자와 운전대만 잡으면 세상의 모든 욕설을 내뱉는 여자가 그렇게 한 팀이 되었다.

상수의 인생에서는 늘 그가 예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져 낭패감 속으로 몰아넣었다. 인생의 대부분의 날들이 상수에게 실패라는 결론을 선언하기 위해 준비되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공상수 너 실패, 메뉴 선택 실패, 이메일 보안 실패, 언니로 살기 실패, 짝사랑 실패, 해외파견 실패, 팀장 실패, 아주 다 실패.

이렇게 너무도 달라 보이는 두 사람에겐 사실 그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삶의 교집합이 있었다. 경애는 고등학교 시절 하이텔 영화동호회 활동을 하며 학창 시절 유일하게 친구들을 사귀었었다. 그런데 호프집에서 화재 사건이 일어났고 무려 56명의 아이들이 그곳에서 죽었다. 마침 그곳에 있던 경애는 잠시 전화를 하러 나온 덕분에 사고 현장에서 살아남았지만,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 E를 사고로 잃고 만다. 상수 역시 같은 사고 현장에서 단 한 명의 소중한 친구를 잃었고, 그 친구가 바로 경애의 친구 E였던 것이다. 그리고 상수는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페이스북 연애상담 페이지를 7년째 운영하고 있었다. 팔로워가 2만명에 이르는 곳으로, 상수는 그 계정에서 언니, 라고 불렸고 그렇게 온라인 상에서 오랫동안 언니로 살았다. 경애는 대학 시절 연인이었던 산주 선배가 결혼을 한 뒤에도 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지 못하고, 연애상담 페이지에 편지를 쓰곤 했다. 물론 그에 대한 답장을 하는 '언니'가 상수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인상적인 이야기로 만났던 김금희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작년 봄부터 겨울까지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재하며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라고 해서 더욱 기대를 했었다. 이야기는 너무도 달라 보이는 두 남녀의 현재 이야기를 따라 가면서 그들 자신을 몰랐지만 한때 공유했던 과거의 시간을 함께 풀어 낸다. 반도 미싱에서 한 팀이 되어 근무하다 베트남에 파견되어 현지에서 일을 하게 되는 상황과 '언죄다' 페이지의 언니들이 상수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사랑의 여러 유형과 그들의 마음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여준다. 살다 보면 끝장난 사랑 때문에 마음까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뭔가를 잃어 버리고 세상의 끝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극중 모두의 '언니'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폐기하지 말라고.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 되지 않았다고 말이다. 슬프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한 작품이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어 어느 방향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시각에서 읽어낼 수 있는 다채로움도 가지고 있어 더욱 특별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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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물리학
림태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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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생겨난 모든 사이를 관계의 우주라고 부른다. 우주는서로가 있음으로 성립한다. 서로라는 말은 당신과 내가 고유하고 독립적인 하나의 행성이라는 의미다. 동등과 존중의 거리를 품고 있는 존재들이 서로 사이를 가질 때 그것을 우주라고 한다. 사이와 서로는우리라는 말처럼, 인류가 발명해낸 아름답고 황홀한 천체물리학 개념어다.

수많은 심리학 서적들과 에세이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이유는 대부분 위로나 공감을 얻기 위함이다. 그것은 아마도 삭막한 인간 관계, 팍팍한 일상의 고단함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길이 딱히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매일 같이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당신 때문에 내가, 나 때문에 당신이, 우리는 더불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말이다. 인간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은 구성원들과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장점이지만, 바로 그것이 누군가는 지옥을 경험하고, 삶의 벼랑 끝으로 몰게 하는 무서운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람 사이에 필요한 최적의 거리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내 생각과 당신의 이해 사이에서, 불필요한 오해 없이 우리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림태주 시인은 말한다. 살아보니 삶의 전부가 관계였다고. 어쩌면 지구는, 관계의 힘으로 돌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관계의 비밀스러운 원리와 은유법을 알고 싶어 별과 사막과 날씨와 천체물리학을 참고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나와 당신의 사이를 관계의 우주, 관계의 물리학에 빗대어 풀어내는 은유는 표현 자체도 참신했지만, 무엇보다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공감하고 위로 받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는 수많은 책들을 읽어 왔지만, 이 책에서 표현하는 색다른 접근 방식은 굉장히 신선했고,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새로운 시각도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는 자주 잊는다. 나에게 나의 입장이 있듯이 당신에게는 당신의 입장이 있다는 사실을. 삶은 관계의 총합이고, 관계는 입장들의 교집합이다. 상대방이 없는 관계란 성립 불가능하고, 모든 상대방은 각자의 입장으로 존립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행성이라면, 저 별빛 하나하나가 다 입장들이다. 별빛이 반짝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 어둠 속에 별이 있는 줄 알아보겠는가.

'당신과 나의 만남이 우연처럼 쉽고 사소해 보이지만, 사실은 지난하고 지극한 운동의 결과'라는 말은 굉장히 로맨틱하게 들리기도 한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당신을 만나기 위해 부단히 애쓴 필연과 두려움을 이겨낸 행운의 결과였다'고 생각한다면, 사실 관계가 조금 삐걱거리거나 위기에 처하게 되더라도 가뿐하게 이겨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렇게나 어렵게 이어진 관계였는데, 내가 지금 이 사소한 걸로 흔들리면 안 되겠다고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지구별에는 수많은 관계가 있고, 그 관계의 힘으로 지구는 자전하고, 태양의 둘레를 공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계의 우주에서 알게 된다. 세상에 생겨난 모든 관계는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를 증명한다고. 어떤 물리적 관계는 우아하게 도약해서 관계의 화학으로 나아간다고.

여타의 심리학서나 에세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바로 저자가 시인이라는 점에서 오는 특별한 감성이 아닐까 싶다. 절절한 감정을 자아내려는 문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뭉클해지거나, 담백하게 관계에 대한 철학을 풀어내는 글에서도 설레임이 느껴지곤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쉽게 술술 읽히지만, 자꾸 페이지를 들춰서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기도 했다. 세상에 생겨난 모든 사이들을 우주에 비유하고, 사람을 얻고 또 잃는 말과 태도의 얄궂음을 이야기하고, 세상과의 관계에서 취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사유하고, 스스로에 대한 오해와 마주하며 외로움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이 책은 그 동안 만나왔던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다룬 책들 중에서도 단연코 최고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 이런 류의 책들이야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지만 놓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기에 대부분 한 번 읽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이 책은 곁에 두고 자꾸 펼쳐서 읽고 싶은 책이다. 문장도 좋고, 은유도 색다르고, 사유도 깊이가 있어 에세이지만 마치 시처럼 읽히는 책이기도 하다. 맺고 끊고 적당한 거리를 주는, 사이의 균형에 서툰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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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야 하는 밤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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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이아나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독일 국민 8,000만 명이 8N8 사냥감의 적이다. 어린이, 노인, 환자, 교도소 수감자를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수천만 명이 대대손손 편하게 먹고 살 거액의 상금을 타기 위해 8N8 사냥감을 죽이려 들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이 이런 황당한 얘기를 진지하게 믿는다면 그렇겠지.

시청자 절반이 팩션 드라마를 다큐멘터리로 여기는 나라라면 안 될 것도 없다.

누군가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을 바꿔 놓을 아주 중요한 질문이라고.

"자유롭게 딱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누구를 죽이고 싶으세요?

 

당신이라면 누가 떠오르는가. 그리고 만약 정말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실행해 옮길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바로 거기서 출발한다.

한 때 잘나가는 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며 자작곡을 연주했었던 벤은 현재 커버 밴드에도 못 끼는 곳에서 해고 당한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 해고였고, 술이나 마시려고 가려던 차에 어디선가 젊은 여자의 비명이 들린다. 남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해가며 구해줬더니 소녀는 아저씨 때문에 다 망쳤다며 돈이 날아갔다고 소리친다. 그리고 찾아간 딸의 병원에서 전부인인 제니퍼는 딸이 자살을 시도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사실 벤의 딸 율레는 4년 전 자신이 운전하던 차로 교통 사고가 나 두 다리를 잃었고, 일주일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현재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미심쩍은 상황들 때문에 딸이 살인미수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굳어 지려는데, 갑자기 건너편 호텔 옥상의 대형 스크린에 벤의 사진이 뜬다. 아까 자신이 구해줬던 여자의 이마에서 본 것처럼 얼굴에 8자가 그려진 채로 말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정부에서 살인 복권을 발행한다. 단돈 10유로만 내면 누구나 죽이고 싶은 한 사람을 추천할 수 있고, 88일 저녁 88분에 추천된 모든 후보자들 중에서 한 명을 뽑는다. 제비 뽑기로 선정된 8N8 사냥감은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약 12시간 동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 사람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더라도 절대 처벌받지 않는다. 대통령이 살인을 포함한 모든 위법행위를 용서하겠다고 공표하고, 사냥감을 포획하여 죽이는 데 성공한 사냥꾼은 상금 1,000유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독일 국민 전체, 수천만 명이 거액의 상금을 타기 위해 사냥감을 죽이려 들 수 있다는 얘기다. 벤은 생각한다. 이런 쓰레기 같은 상황이 진짜일 리 없어. 장난일 거야. 하지만 올해의 살인 복권이 추첨되고, 그 대상자로 베를린에 사는 심리학과 여대생과 벤이 지목된 것이다. 과연 벤은 온 세상이 참여하고 있는 살인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까. 모두가 그를 죽이려고 들텐데, 그는 누구를 믿고 믿지 말아야 할까.

 

“벤, 만나서 반가워요. 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당신의 삶을 바꿔놓을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준비되셨나요?”

벤은 끄덕였다. 그런 다음 다이아나의 요구를 알아차리고 얼른를 터치했다.

“고마워요, . , 그럼 물을게요. 자유롭게 딱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누구를 죽이고 싶으세요?”

벤은 스마트폰을 내리고 주위를 살폈다.

만약 오늘, 지금, 현재, 하룻밤 동안 범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추방자 한 명을 추천할 수 있다면 나는 누구를 추천할까? 당신이라면 이런 살인 복권에 누군가를 추천하겠는가? 혹은 당신이 사냥감으로 선출된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믿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의 상금을 마다하고 당신을 숨겨줄 그런 사람이 있을까.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이 주는 가장 큰 재미는 무엇보다 '예측할 수 없음'에 있다. 그 동안 만나왔던 전작들에서도 그랬지만, 두툼한 페이지를 숨쉴 틈 없이 달려가 범인이 밝혀지고 난 다음에도 해결과 해소의 안도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그 어떤 예정된 것에 대한 불안감, 그러나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한 기대감까지 차오르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들은 오직 피체크의 작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의 전매특허나 다름 없다. 이번 작품 역시 초반부터 온 세상이 지목한 살인 게임의 사냥꾼이 된 남자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는 과정은 심장이 쫄깃해지도록 긴장감을 부여하고, 숨 막히는 도심 속 추격전은 흡사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제바스티안 피체크는 영화 <더 퍼지>를 보고 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는 미국 정부가 하루 동안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를 허락하는 미래 세계가 등장하는데, '미래에 모두가 모두의 적이 된다'는 비현실적인 아이디어에 매력을 느꼈다고. 거기서 그는 '현재 모두가 한 사람의 적이 된다'는 현실적 아이디어로 이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누가 당신을 해치고 모욕하고 화나게 했나요?

혹시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마녀사냥이 먼 이야기가 아닌 요즘, 살인 복권이라는 작품 속 설정이 허구의 그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당신은 과연 누구의 이름을 적을 것인가. 혹시 누가 내 이름을 적지는 않을까. '내가 죽어야 하는 밤'이라니, 상상만해도 오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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