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컬렉션 -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을 단 하나의 보물
KBS 천상의컬렉션 제작팀 지음, 탁현규 해설.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19세기 조선에 파격적인 매화 그림 하나가 등장합니다. 이 매화 그림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문자 향기가 느껴지기는커녕 위험할 정도로 화려합니다. 금방이라도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그 강렬함으로 인해 매향이 그림 밖까지 진동할 것만 같습니다. 그림에 어찌나 힘이 넘치는지, 신기 들린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문자향서권기라는 주류의 정신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그림. 조선 화단을 발칵 뒤집은, 장승업의 〈붉은 매화 흰 매화 열 폭 병풍〉입니다.

사실 문화재에 대해서는 학창 시절 박물관으로 견학을 가거나, 교과서에 실려 있어 시험을 위해 공부할 때를 제외하고 그다지 일상에서 접할 기회가 없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느 날 티비를 보다가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하나 발견했다. 수많은 세월을 지나 기적처럼 전해진 문화재의 아름다움과 가치, 그에 얽힌 살아있는 역사 이야기를 호스트의 생생한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살펴보고, 현장 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대한민국을 매혹시킬 단 하나의 보물을 선정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문화재라는 다소 접근하기 어려운 대상을 그에 얽힌 흥미로운 배경 이야기를 들려 줌으로써 현실로 다가오게 만들어 누구라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작년부터 방송되고 있는 KBS 교양 프로그램 <천상의 컬렉션>이라는 방송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방송에서 소개되었던 보물 중에서도 반드시 알아야 할 한국 예술의 걸작 25점을 엄선해 멋진 화보로 소장할 수 있도록 책으로 출간되었다.

 

방송에 소개되었던 보물만 해도 100여가지가 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 중에 선정된 25점이라고 하니 더 기대가 되었다. 회화, 공예, 도자, 조각, 전적이라는 5가지 테마로 구분해 각각의 보물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소개되고 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라던가 김홍도의 <사계풍속도>, 백자 달항아리,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등 몇 가지를 제외하면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문화재는 거의 없었다. 그만큼 살면서 문화재를 가까이에서 만날 기회나 접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현대의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문화재란 그 가치에 비해 그다지 와 닿지 않는 과거의 유산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런 방송을 통해서, 그리고 이제는 책을 통해서 사람들이 우리의 고유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최고의 작품들에 대해서 알아 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유려한 곡선을 이루는 몸체와 화려한 장식을 자랑하는 이 주전자는 장인이 손으로 일일이 두들겨서 만들었습니다. 두께가 있는 은판을 안팎에서 두들겨 입체적인 문양을 만드는 타출 기법입니다. 은으로 만든 뒤 도금했는데 도금이 아주 잘 되어 마치 금 주전자처럼 보입니다.

엄청난 크기의 스케일로 조선을 들썩이게 했던 대작 <강산무진도>에는 등장하는 사람만 360명이 넘는다. 게다가 어느 한 사람도 가만히 있지 않고 저마다 분주하게 살아 움직이며, 그 묘사가 매우 정밀하다. 이인문은 왜 산수화에 그토록 많은 인물과 그들의 생활상을 상세히 그려 넣었던 것일까. 조선 시대 왕의 뒤에는 늘 같은 그림, 일월오봉도가 걸려 있었는데, 조선 왕조가 400년 넘게 이어져 오는 동안 한결같이 왕의 곁을 지켰던 그림을 바꿔버린 왕이 있었다. 바로 정조인데, 그는 책을 꽂아둔 서가를 그린 책가도를 일월오봉도 대신 세웠다고 한다. 실제 서가처럼 보이도록 정교하게 그려진 이 그림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여기 담긴 군주의 의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이 외에도 가득하다. 고종이 목숨을 걸고 숨겼던 비밀의 도장에 얽힌 이야기며, 국내에 있었다면 분명히 국보로 지정되고도 남았을고려 은제도금주전자에 얽힌 사연, 금동반가사유상처럼 한 번 해외에 전시될 때마다 수백억 원에 달하는 보험액을 책정해야 하는 대체 불가능한 보물에 관한 이야기 등등 우리 문화재에 얽힌 사연들은 보물의 화려한 자태를 사진을 통해서 직접 보며 한국사의 주요 장면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전체 200여 장에 달하는 사진이 수록되어 있고, 특별히 자세히 들여다봐야 할 작품들은 책 뒷부분에 별도로 원색 화보 38페이지로 담겨져 있다. 덕분에 이제 역사책과 박물관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문화재를 조금 더 친숙하게, 가까이서 느끼고 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어서 아이와 함께 읽어도 좋을 것 같고, 이 책을 토대로 주말에 박물관 나들이를 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문화재에 관심이 별로 없던 이들이라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배경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너무도 흥미로워 금방 마음을 사로잡히고 말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 출간 30주년 기념판
로버트 풀검 지음, 최정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때 나는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게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이미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는 것과 아는 대로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제 나의 신조를 소개한다.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나는 유치원에서 배웠다. 지혜는 대학원의 상아탑 꼭대기에 있지 않았다. 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었다.

어느 유치원 입학식에서 삶의 기본이 되는 진리에 관해 이야기한 소소한 연설이 사람들의 뜨거운 공감과 호응을 얻어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더니, 결국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렇게 세대와 국적을 초월해 찬사를 받아온 이 책이 이번에 출간 30주년을 맞아 새로운 표지로 다시 출간되었다. 나도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읽어 보니 시간이 흐른 딱 그만큼 더 좋았던 것 같다. 나도 그만큼 어른이 되었고, 그래서 저자의 말처럼 '인생의 지혜는 상아탑 꼭대기가 아닌 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쉽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우리가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들, 무엇이든 나누어 가지라, 공정하게 행동하라, 남을 때리지 말라,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에 놓으라, 내 것이 아니면 가져가지 말라 등등... 일상에서 타인과 함께 지내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규칙들 말이다. 별 것 아닌 것 같고,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이런 것들이야말로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니, 믿겨 지는가. 이 단순한 규칙과 배려 속에 '황금률과 사랑과 기본적인 위생, 그리고 환경과 정치와 평등과 건강한 삶'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저 어린이를 위한 말인지, 어른들을 위한 표현인지 그 차이만 있을 뿐이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크리스마스 선물로 정말 정말 정말 바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한 시간만이라도 다시 다섯 살짜리 아이가 되고 싶다.

많이 웃고 많이 울고 싶다.

꼭 한 번만이라도 누군가 나를 품에 안은 채 잠들 때까지 흔들어주고 침대까지 안아다 주면 좋겠다.

아이를 키우면서 깨닫게 되는 많은 것들이 이 책 속에 담겨 있었다. 물웅덩이가 주는 기회라는 에피소드를 보자. 비옷을 입고 장화를 신은 꼬마가 웅덩이로 들어가 첨벙거리자, 엄마가 안 된다고 야단을 친다. 아이는 더 놀겠다고 떼를 쓰고, 엄마는 마른 땅 쪽으로 잡아 끌고,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런데 옷을 잘 차려 입은 중년 신사가 벤치에 앉아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일어서서 웅덩이로 들어간다. 구두를 신은 채로, 싱긋 웃으며. 그러자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신발과 양말을 신은 채로 웅덩이로 함께 들어가고, 아이도 웃으며 엄마 손을 놓고 웅덩이로 향한다. 사람들의 눈길이 엄마에게 모인다. 좋은 엄마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는 주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장화를 신었으니 웅덩이에 들어간다고 해도 크게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엄마 역시 아이였다면 벌써 웅덩이에 들어갔을 텐데, 어른이 되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일까. 아이는 어른이 될 때까지 어른이 얼마나 이상한 존재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른들이란 이상한 존재이니 말이다.

로버트 풀검이 이야기하는 에피소드들은 대부분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들에서 시작한다. 빨래, 화장실, 거미줄, 야생화, 숨바꼭질, 낙엽, 먼지덩어리, 샐러드 등등... 이런 소소한 일상 속에서 삶의 진실이 숨겨져 있으니, 우리는 잠시 멈추고, 감동하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그걸 잊어 버리고 살거나,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아는 것과 아는 대로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들어주는 멋진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쿄 100배 즐기기 - 요코하마. 하코네. 닛코. 카마쿠라, '18~'19 개정판 100배 즐기기
RHK 여행연구소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 가이드북하면 제일 먼저 떠올랐던 오렌지색 〈100배 즐기기〉 시리즈가 화이트 컬러로 새롭게 옷을 갈아 입었다.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버전이 14~15년 버전이었는데, 이번에 만나게 된 것은 18~19년 최신 버전이다. 기존의 오렌지색 가이드북을 여러 권 가지고 있기도 하고, 오랜 시간 보아와서 익숙하긴 하지만, 이번에 바뀐 표지가 한층 세련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화이트 컬러에 심플하게 상징적인 장소가 이미지로 삽입되어 있는 표지는 여행 가이드북인데도, 여행 에세이처럼 예쁘다.

특히나 이번 개정판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국내 1위 어학 브랜드 [시원스쿨]과 함께 한 별책부록 '여행 일본어'이다. 현지에 가서 일본어를 굳이 쓰지 않더라도 의사 소통에 크게 무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간단한 일본어들은 미리 찾아 왔더라면 좋았을 걸 싶었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여행 가기 전에 가이드 북 외에 여행용 외국어 책을 따로 찾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렇게 가이드 북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닌가. 따로 떼어내어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휴대할 수 있는 책인데도 70페이지나 되어 꼭 필요한 표현들은 꽤 많이 수록되어 있다. 제일 중요한 '일본어 메뉴판'이 가장 유용하게 쓰일 것 같고, 그 외에도 공항에서, 숙소, 식당에서, 관광, 쇼핑할 때 필요한 말과 교통수단 이용 시에 필요한 것들로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역시 콤팩트한 사이즈로 떼어내어 휴대하기 간편하게 만들어 놓은 맵북 또한 지하철 노선도부터 본책에 소개한 스폿을 꼼꼼하게 담은 도쿄 하이라이트 지역 지도 20개와 요코하마, 하코네, 닛코, 카마쿠라 근교 지역 지도 12개가 담겨 있어 현지에서 활용하기에 좋을 것 같다. 맵북 페이지 상단에 있는 QR 코드를 스캔하면 구글맵으로 연결되어 위치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더욱 좋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2017년 오픈한 긴자 식스, 오다이바 유니콘 건담 등 지금 도쿄에서 가장핫한여행 키워드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츠타야 서점과 블루 보틀 커피 등 도쿄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핵심 포인트들이 테마 콘텐츠로 구성되어 있다. 도쿄 미슐랭 맛집 리스트도 흥미로웠다. 합리적인 가격에 훌륭한 요리로 미슐랭 가이드에 선정된 맛집 중 지하철을 타고 직접 찾아가 맛보고 검증한 베스트 맛집 9이라서 그런지, 더욱 믿음직스러운 정보이기도 하다. 그외에도 도쿄 편의점 간식 베스트 리스트도 체크해두고 싶은 정보였고, 도쿄의 패스트푸드 체인점의 먹음직스러운 음식들도 체크해두었다.

해외에 갈 때마다 꼭 현지의 맛집과 카페를 찾아서 가보곤 하는데, 도쿄의 베이커리와 디저트들도 워낙 유명해서 다양한 맛집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쇼핑 리스트와 일본 인기 쇼핑몰 투탑, 돈키호테와 빅카메라의 초특가 할인 쿠폰도 포함되어 있다. 면세 혜택 이외에 추가 할인이 가능한 쿠폰이라 빼놓지 말고 혜택을 챙겨야 한다.

그리고 현지인도 헤맬 정도로 복잡한 도쿄 교통편을 완전히 정복하는 방법도 수록되어 있다.  도쿄 100배 교통 가이드를 따라 가다 보면 티켓 사는 곳, 열차 타는 곳, 열차 외관까지 하나하나 사진으로 정리되어 있어, 초행길이라도 쉽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곧 여름 휴가철이 다가오니 올해는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새로 출간된 100배 즐기기 시리즈 덕분에 선택에 도움이 될 것 같다. 가까운 일본이야 부담 없이 다녀오기도 좋고, 현지 음식도 항상 성공적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가이드북과 함께 가벼운 일본어 회화북도 가져갈 수 있으니, 더 든든한 여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갈증
후카마치 아키오 지음, 양억관 옮김 / 잔(도서출판)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건 말이 안 돼. 그는 뭔가를 향해 중얼거렸다. 이제야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하려는데. 아버지답게 살아가리라 맹세했는데. 자기중심적인 연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안다. 딸이 각성제를 남겨 두고 모습을 감추지 않았더라면 아마 얼굴도 마주하지 않고 평생을 지냈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딸을 만나고 싶었다. 아버지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후지시마 아키히로는 아내의 불륜 상대를 폭행하고 경찰을 퇴직한 후 경비 회사에 자리를 얻어 일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헤어진 아내 기리코에게서 연락이 온다. 딸 가나코가 어제 아침 이후로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집으로 와달라는 거였다. 고등학생인 딸과는 이혼 후 1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딸의 방에서는 100여개나 되는 각성제 봉지가 발견되는데, 이건 여고생 신분에 잠깐 즐기는 기분으로 소유할 만한 양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경찰에 딸의 실종을 알릴 수가 없었다. 대체 가나코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가나코는 사건에 휘말린 걸까.

또래 여자애들보다 너무 어른스러웠던 가나코. 후지시마와 기리코는 딸에게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건지, 아르바이트를 했던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옷장 안에 값비싼 옷들이 가득했고, 책상 서랍에는 신경과 병원 이름이 적힌 약봉투가 있었는데도, 부모들은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후지시마는 경비 회사에 휴가를 내고 딸의 친구들을 찾아 만나며 가나코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착실하게 학교에 다니고 쉬는 날은 학원에 가며 국립 대학을 목표로 하는 우등생이었던 딸의 모습은, 실상과 전혀 달랐다. 부모들은 자신의 딸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그들이 마주해야 하는 딸의 본 모습은 무엇일까. 그들은 과연 딸을 찾을 수 있을까. 이번에야말로 가나코의 아버지이며, 기리코의 남편으로 살고 싶었던 후지시마는 과연 그의 바램대로 평온한 가정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아냐,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누구든 사람을 죽여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있지. 숨기고 싶은 것이 있고. 가족이나 자기 자신. 자존심과 어둠에 감싸인 비밀. 당신도 그렇잖아?”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사키야마의 멍한 눈길이 자신의 혼 저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이야기는 가나코가 사라지고 딸을 찾는 아빠 후지시마의 현재와 3년 전 과거 시점이 교차 진행된다. 과거 시점에서 이야기의 주체는 가나코가 아니라 그녀에게 도움을 받게 된 왕따 소년이다. 운동부를 그만뒀다는 이유로 반 친구 모두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소년은 자신을 도와준 가나코를 동경하게 된다. 양쪽 이야기에서 딸인 가나코와 친구인 가나코는 모두 타인에 의해 해석되고, 설명되고, 보여진다. 어떤 모습이 그녀의 실체인지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얘기다. 후지시마가 만나는 친구들, 선생님, 신경과 의사마저도 가나코에 대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버지인 자신이고 싶었는데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수많은 것들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종종 있다.  특히나 부모, 혹은 형제 혹은 자식에 대해서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의문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란 사실 무시무시하다. 가족이란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존재이니, 거의 무조건 믿어야 하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부부와 닮은 아이들은 점점 자라면서 낯선 타인처럼 이질적이고 불가해한 존재로 변해가고, 어느 순간 아이는 친근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니 부모라면 누구나 한번쯤 과연 내가 알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진짜일까 생각해보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후카마치 아키오의 이 작품에서는 바로 그런 순간 부모에게 악몽이 시작된다. 가장 끔찍하고, 잔인하고, 어두운 방식으로, 그렇게 소설 속 인물들은 이야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인간의 본성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참담하고, 지저분하고, 무시무시하다. 이 이야기를 감당해내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양방랑
후지와라 신야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게해 서쪽에서는 발효되고 썩어가는 것들이 눈가림되고 포장되어 건전하고 행복한 시민들 앞에서 말살된다. 썩은 오렌지 껍질, 돼지 머리, 송장, 광인, 전염병 환자, 만취한 사람, 그 모든 것들은 시민 생활의 큰길에서 격리된다.

여자가 짐승처럼 킁킁대며 몸을 뒤척였다. 영문 모를 냄새의 씨앗들이 꿈틀거린다.

그때 문득 머나먼 이국의 하늘과 한 줄기 피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스탄불의 겨울, 바다 냄새에 섞여 코를 찌르는 썩은 냄새가 풍겨오고, 파리한 불빛 속에서 길바닥에 널브러진 양파 껍질이 바닷바람에 떨고 있다. 쿠르드족 쿨리의 성난 목소리, 비웃는 통행인들, 길바닥에는 밑동까지 타 들어간 담배꽁초들이 나뒹굴고 있다. 영하 16도의 찬바람 속에서 담배 한 갑을 사기 위해 50미터씩 줄을 서는 사람들. 나는 터키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오로지 묘사만으로 그곳의 냄새가 느껴지고, 풍경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현지의 삶과 그곳 인간들의 모습을 이렇게나 생생하게 담아낸 여행에세이는 만나본 적이 없다. 그 동안 읽어왔던 여행 에세이들은 모두 뭐였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글과 사진들이 시작부터 눈길을 사로 잡는다.

 

작가이자 사진가, 사상가, 평론가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해온 후지와라 신야는 1969년 여름 스물다섯 살 때에 떠난 인도 여행을 시작으로 10여 년간 인도, 티베트, 중근동, 유럽과 미국 등을 방랑했다. 이 책 <동양방랑> <인도방랑>, <티베트방랑>에 이은 동양 여행기’ 3부작의 결정판이다. 이스탄불을 시작으로 지중해 앙카라, 흑해, 시리아, 이란, , 티베트, 치앙마이, 홍콩, 한반도 등에 이르기까지 그가 400일 동안 느끼고, 체험하고, 생각한 모든 풍경들이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이 지역에서 우기의 비는 일본의 장맛비처럼 지루하게 내리지 않고 잠깐 퍼붓고 지나간다. 억수같이 쏟아지다가 이내 쨍하게 햇빛이 비친다. 그러면 지하수와 물웅덩이가 세균이 번식하기 딱 좋은 온도로 데워진다. 그 더러운 물을 보고 있으면 세균과 박테리아, 그 밖의 하등생물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몇 시간만 지나면 물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비릿하고 음울하고 불쾌한 냄새다. 그 냄새가 비 온 뒤의 거리에 충만하다.

무엇보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바로 여행을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가 묘사하는 풍경은 냄새부터 시작해서 길거리에 놓여진 사소한 것들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현지의 사람들, 그가 만나고, 경험하고, 이야기를 들어온 사람들이야말로 현지의 일상을 고스란히 페이지 위로 불러내고 있다.  특히 낯선 곳의 냄새, 후각에 대한 묘사가 그야말로 인상적이었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관찰하거나 이해하고 묘사하고자 할 때 후각을 먼저 사용하는데,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었지만 덕분에 낯선 세계가 한번에 와락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렇게 싸구려 호텔 방의 사막 냄새, 콜카타 특유의 정액 냄새, 산양의 날고기 냄새, 코를 찌르는 향신료 냄새, 향냄새와 시큼한 지폐 냄새, 여자 냄새, 거리와 사람을 뒤덮은 인간 세상의 온갖 냄새들의 향연이 이어진다.

그리고 후지와라 신야는 날카로운 언어와 사유를 통해 인간성을 발견하고, 현지의 기후나 지형 같은 환경적 영향을 통해 문명의 특징을 통찰한다. 그의 사진 속에 종종 인물들이 담겨 있곤 하는데, 그들의 표정 너머에서 단순한 일상의 흔적 너머 역사성과 사회성 또한 함께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사람이 살면서 몇 번의 고비를 만나듯이 여행에도 빙점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계 여러 곳을 여행했던 그도, 어느 순간 눈이 흐려지고, 혀가 기뻐하지 않고, 귀가 들으려 하지 않고, 코가 냄새 맡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을 피해 풍경만 보고 다니며, 얼어붙은 채 무의미한 여행을 계속하다, 기사회생의 여행을 나선 것이 바로 이 책의 결과물이다. 그는 400일이라는 긴 여행의 시간 동안 인간을 만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변두리 유곽의 창녀에서 심산에 틀어박힌 스님까지,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인간을 인연으로 여기고 소중히 대했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얼어붙은 여행이 녹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간의 빙점을 녹이는 것이 바로 인간의 체온이라는 그의 말에 뭉클했다.

 

나도 여행을 워낙 좋아하고, 그에 대한 글을 읽는 걸 좋아해서 관련 에세이들을 꽤 읽어 본 편인데,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한 느낌이었다. 이런 여행에세이는 그 어디서도 만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마치 40년 전 동양의 그곳으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도 들었다. 특별한 여행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놓치지 마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