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는 말은 차마 못했어도 슬로북 Slow Book 3
함정임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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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 책이 왜 좋은지 몰랐다. 한 페이지를 읽는 데도 몇 시간씩 고투해야 했고, 시험 때에는 통째로 외워야 했고, 정신을 집중해 낭독을 듣고 또박또박 써내야 했다. 대학 3학년 봄에서 여름까지 소설 전공 강독 수업은 그렇게 지독하게 흘러갔다. 세월이 지난 뒤 다시 그 책을 펼쳐보리라고, 소설을 쓸 때마다 숨을 쉬듯 함께하리라고 그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괜찮아?'라는 말만큼 뭉클하고, 먹먹한 표현이 또 있을까. 이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안위를 걱정하고, 입장을 배려하는 따뜻한 말이다. 누군가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올 때, 사실 나는 괜찮지 않은 적이 더 많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을 때, 사실 마음으로 먼저 짐작이 되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 적이 더 많았다. 매주, 매달 사건이 터지고,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재난과 재앙이 닥쳤던 작년, 그리고 올해를 우리는 견뎌왔다. 함정임 작가는 바닷가 서재에서 추모의 마음으로 애도 일기를 쓰듯, 혀끝에 맴돌던 말들을 여름의 안부로 건넨다. 당신의 여름은 괜찮습니까. 라고.

작가는 일주일 중 하루 이틀은 온종일 서재에 머무는데, 그때 창밖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늘과 바다와 언덕, 그리고 그들 풍경 속을 들고 나는 구름과 새와 배들이라고 한다. 바다가 보이는 달맞이 언덕의 서재에서 글을 쓰는 작가를 상상하니, 글 속에서도 바다 내음이 나는 것 같아 설레인다. 이 책에는 다양한 작가의 사유가 담겨 있는데, '소설가'라는 작가의 일상이 고스란히 보여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녀가 읽었던 책에 대한 소개나, 책 속의 문장들이 옮겨져 있기도 하고, 그녀가 대학에서 가르치는 창작 수업에 대한 이야기도 있으며,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났던 날의 기록들도 담겨 있다. 다양한 장소에서, 전부 다른 사유가 펼쳐지고 있지만, 그 처음과 끝은 모두 글쓰기와 작가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하찮지만 고유한 삶의 편린들'은 수십 년 동안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아온 이의 그것이기에 매혹적이다.

현대의 속성은 견고한 것들이 촛농처럼 녹아 내리고, 깃털처럼 부유하는 세계이다. 21세기의 시공간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기에 어떤 것도 고유하지 않다.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신문 지면의 힘은 인터넷 매체 환경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오로지 문학만이 덧없음에 맞서 내가 겨우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이 때로 아름답다는 것을 되새겨줄 뿐이다.

이 책은 작가정신의 '슬로북' 시리즈 세 번째 책이다. 백민석의 쿠바 여행 에세이 <아바나의 시민들>, 박상의 본격 음악 에세이 <사랑은 달아서 끈적한 것>에 이어 그 세 번째 시리즈를 읽게 되었다. 속도지상주의 시대에느려질 수 있음의 가능성을 누리면서,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내는 발상의 전환을 꾀할 것을 권하는 것이 '슬로북' 시리즈의 목적이라고 하는데, 느리게 읽는 독서의 진정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해준다. 각기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들은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해서 '마음의 속도'로 읽는 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소설가란 단 한 순간도 쓰지 않으면 사는 데 의미가 없다고 자각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작가만의 운명이 아니라고 그녀는 말한다. 모든 인간의 속성이되, 대부분 쓰지 않을 뿐이라고. 왜냐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사랑하는 존재,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싶고, 듣고 싶은 호모 나랜스들이니 말이다. 그러니 긴긴 여름 끝자락, 폭풍우와 뙤약볕을 견뎌낸 붉은 열매 같은 책들을 통해 충만한 에너지를 얻어 보면 어떨까. 여기서 작가가 소개하고 있는 책들도 좋고, 살면서 읽어 왔던, 혹은 지나쳐 왔던 책들도 좋을 것이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마음을 들여다보고 보듬어 안아주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필요한지 말해주는 작가의 목소리가 책장을 덮은 뒤에도 귓가에서 들리는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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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괴물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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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의실로 이동할 때, 여학생들이 야노의 눈앞에서 기운차게 밀어내기 벌칙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다. , 오늘은 여학생 수가 짝수구나. 체육 선생님은 여학생 수가 홀수일 때, 유연체조의 짝 만들기에서 번번이 야노 혼자만 남아버리는 게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른들은 자기들이 중학생이었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우리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잔혹한 마음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중학교 3학년 아다치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밤만 되면 괴물로 변한다. 어느 때는 손가락 끝에서부터, 어느 때는 배꼽에서부터, 그리고 어느 때는 입에서부터, 한밤중에 느닷없이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검은 알갱이가 눈물 방울의 모습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우글우글 꿈틀거리는 그것이 얼굴을 더고 목에서 가슴, 허리, 손가락까지 흘러가 온몸을 뒤덮어 버린다. 마치 검정 색깔의 숯 검댕이처럼. 처음 크기는 대형견 정도인데, 의지에 따라 검은 알갱이를 흔들면 산처럼 커질 수도 있다. 그 날은 깜빡 잊고 숙제를 사물함 안에 두고 왔던 터라, 괴물이 된 모습으로 늦은 밤에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그 곳에서 한 여자애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반에서 친구들로부터 왕따인 야노 사쓰키였다. 게다가 무슨 영문인지 야노는 괴물 모습을 한 앗치를 알아 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하며, 자신은 '밤의 쉬는 시간'을 갖기 위해 이 시간마다 학교에 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와 야노 둘만의 밤의 쉬는 시간이 시작된다.

이야기는 앗치가 괴물로 변해 있는 밤의 시간과, 평범한 중학생으로 생활하는 낮의 시간이 교차로 진행된다. 야노는 독특한 말투에 아무리 무시당해도 친구들에게 말을 걸고, 인사를 하는 등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한다. 그래서 반 아이들이 야노를 따돌리고 괴롭히고 무시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고 보일 정도로 말이다. 앗치는 야노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지만, 딱히 친구들의 괴롭힘이 옳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은 갖고 있다. 다만 야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그런 괴롭힘을 당하는 건 자업자득이 아닐까 생각했고, 또 괜히 야노의 편을 들어 친구들 무리에서 소외되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저 방관하는 소년이었다. 그랬던 그의 비밀을 야노가 알아버린 것이다. 다리가 여섯 개, 눈이 여덟 개, 꼬리는 네 개인 모습으로 변해 버리는 밤의 내 모습을 말이다.

 

 

 

교실에는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주는 친구가 있고 어제의 텔레비전 방송에 대해 열나게 얘기하고 있는 친구가 있고 책상에 엎드려 자는 친구도 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괴물이 앉아 있는데. 여기에 교활한 내가 앉아 있는데.

진짜 모습 같은 거, 겉으로만 봐서는 알지 못한다.

 

스미노 요루는 학교 문제 중에서도 가장 이야기 속에서 많이 다루어진 '왕따'라는 문제를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괴물로 변하는 소년과 외톨이 소녀를 만나게 해서, 그들을 바로 친구로 만들어 버리지 않고 서로 다른 대상을 관찰하게 하는 것이다. 앗치는 야노의 말투와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따돌린다는 의식도 없이 너무도 당연하게 그녀를 괴롭히는 것을 보며 특별히 그걸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대부분의 친구들과는 너무도 달랐으니까. 다르다는 것이 꼭 틀리다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어린 이들에게는 이물을 배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속에 옳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지만, 그저 눈에 띄고 싶지 않고, 그저 소외되고 싶지 않아서 친구들에게 억지로 맞춰주는 소년이 있다. 아마 대부분 전자의 경험은 없더라도, 후자의 입장에 있었던 적은 많을 것이다.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안삼지만, 사실 그것은 비겁함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극중 야노의 2학년 때 짝꿍이었던 이구치가 토토로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이상한 것이 이상한 그대로 이상해서 토토로를 정말 좋아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왜 그렇게 이상한 것은 이상한 것 그대로, 좀 달라 보이는 건 다른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고, 좋아해줄 수 없을까. 앗치는 점점 낮과 밤의 경계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한다. 괴물의 모습을 한 나와 인간의 모습을 한 나 중에 어느 쪽이 진짜인가. 흉측한 모습으로 그 누구도 무서울 것 없는 밤의 나와 친구의 소중한 물건을 밟아 부수는 낮의 나 중에 과연 진짜 괴물은 어느 쪽일까. 자신과 다른 존재를 향한 아이들의 악의, 학교라는 공간의 잔인함과 폐쇄성을 판타지를 통해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스미노 요루만의 독특한 감성이 더해져 평범한 학원물과는 다른 차별성을 띠고 있다. 왕따와 학급 내 갈등이라는 평범한 소재도 스미노 요루를 만나게 되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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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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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존재한 곳에서는 언제나 추방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원시 부족에서 가장 앞선 사회에 이르기까지, 같은 구성원들로부터 짐을 꾸려 변경을 넘어가서 다시는 자신이 살던 땅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 터였다. 추방은 인간 희극의 제1장에서 하느님이 아담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그리고 몇 페이지 뒤에서 하느님은 카인에게도 그 벌을 내렸다. 그렇다, 추방은 인류의 탄생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은 국외가 아니라 자국 땅으로 추방하는 개념을 터득한 최초의 민족이었다.

러시아는 한 세대도 안 되는 기간에 세계대전과 내전, 두 번의 기근, 그리고 적색 테러를 겪으며 격변기를 거쳐 오고 있었다. 1922, 서른세 살의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은 내무 인민위원회 소속 긴급 위원회에 출두해 '종신 연금형'을 선고 받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가 4년 동안 거주해 온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 호텔을 벗어나면 바로 총살될 거라는 말이었다.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 경마 클럽 회원이고, 사냥의 명인인 백작은 어린 시절부터 방이 스무 개나 되고 집안 일을 해주는 사람이 열 네 명이나 되는 대저택에서 자라온 유서 깊은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어떤 상황 때문에 전쟁 전에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 있었지만, 혁명 후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했을 때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이제 그는 메트로폴 호텔 스위트룸에서 허름한 하인용 다락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귀족으로서 누리던 모든 특혜를 회수당한다. 이제 백작에게 호텔은 감옥이자 세상의 전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평생을 연금 상태로 지내야 하는 형을 선고 받는 다면 어떨까. 그게 아무리 호화찬란한 호텔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주어진 공간이란 9제곱미터 정도에 불과하다면 말이다. 게다가 태어나서 평생을 당연한 듯이 누리던 세련되고 고상한 취향들을 더 이상 유지시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백작은 우울해하거나, 의기소침해 있지 않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보란 듯이 새 삶에 적응해 나간다. 아홉 살 여자 아이 니나의 친구가 되어 호텔의 이곳 저곳을 누비고 다니며 모험을 하기도 하고, 유명한 여배우의 연인이 되어 그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날마다 새로운 손님과 사건이 끊이지 않는 호텔을 배경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무튼 바로 얼마 전에 호텔 로비에서 잠깐 동안 만난 사람에 관한 첫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아니, 그 누구든 간에 그 사람에 관한 첫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첫인상이라는 것은 단지 하나의 화음이 우리에게 베토벤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 또는 하나의 붓 터치가 우리에게 보티첼리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너무 변덕스럽고 너무 복잡하고 엄청나게 모순적이어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듭 숙고해야 하는 존재다.

에이미 토울스의 첫 작품이었던 <우아한 연인>을 너무 좋아했던 터라, 정말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그의 두 번째 작품에 굉장히 설레었다. 724페이지라는 두툼함도 기다림에 대한 보상 같은 느낌이었고 말이다. 전작이 세계 대공황의 그림자가 드리운 1938년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했다면, 이번 작품은 20세기 초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고전 문학을 연상시키는 작품과 분위기가 매혹적이고,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등장인물들 역시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우아한 연인>에서 케이트와 팅커가 우연히 식당에서 만나 처음으로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누던 장면은 지금도 내 가슴을 쿵 내려앉게 만든다.

 

<모스크바의 신사>에서도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았는데,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순간은 이것이다. 백작이 자신이 지내던 옛 스위트룸을 찾아 갔다 와서는 오후의 차 한잔을 누릴 수 없는 공간이 되지 않는 자신의 새로운 방에 우울해 하다가, 옷장과 벽이 만나는 곳에서 숨겨진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방과 똑같은 구조를 지닌 그 방에는 사용하지 않는 침대 틀이 보관되어 있었고, 백작은 방 안의 모든 것을 밖으로 끌어내고 직접 수리를 해서 자신만의 비밀 서재를 만들어 낸다. 그는 그곳을 꾸미기 위해 지하실에 가서 손님이 버리고 간 두꺼운 소설책 중에서 열 권을 챙겨 와 그 중의 한 권을 펼쳐 든다. 그리하여 백작은 통제와 관리와 타인의 의도 아래 존재하는 방 외에 비밀리에 존재하는 자신만의 서재를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너무도 뭉클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백작은 다시 의자에 앉아서 한 발을 커피 탁자 모서리에 올린 채 의자가 뒷다리 두 개로 균형을 잡을 때까지 뒤로 기울인 다음 첫 문장으로 눈을 돌렸다.

 

아홉 살 꼬마 숙녀도 어엿한 어른처럼 대할 수 있고, 나이든 잡역부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며 여전히 세련되고 우아한 태도를 잃지 않는 백작은 점차 호텔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 간다. 이야기의 주요 배경인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은크렘린 궁전붉은광장’, ‘볼쇼이 극장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실재하는 장소이다. 특권 계층,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던 시대에 러시아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메트로폴 호텔은 외교의 장소이자 체제의 건재함과 풍요로움을 대외에 선전하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곳이기도 했다. 호텔 바깥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실재하는 러시아 역사이지만, 호텔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에이미 토울스가 상상력으로 그려낸 허구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반짝 반짝 빛나는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 만들어 진다.

에이미 토울스는 한 작품의 완성에 4년의 집필과 1년의 독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발표한 데뷔작 <우아한 연인> 2011년 작이고, 두 번째 작품인 <모스크바의 신사> 2016년 작이다. 그러니 지금 집필 중인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아마도 2020년 이후에나 만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그 시간만큼을 고스란히 보상해 주는 작가이기에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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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는 순간
안드레아스 알트만 지음, 전은경 옮김 / 책세상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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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누군가를 끝장낼 수 있다. 그러나 열정의 부재 역시 마찬가지다. 이 경우에는 파멸이 그저 오래 걸릴 뿐이다. 파멸은 시한부 사형선고처럼 다가온다. 그러니 '영광스러운 다섯 명'에게 못 이기는 척 떠밀리는 게 더 현명하지 않을까? 단 한 번뿐인 삶 속으로.

삶이 선물이라고, 살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하루를 버텨내기에 급급하느라,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여력이 없는 게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바닥까지 떨어져 본 적이 있는 사람들, 모든 것을 잃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삶의 선물에 걸 맞는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삶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온 몸으로 깨닫게 되면 세상이 전과 같을 수 없으니까.

독일을 대표하는 여행 작가 안드레아스 알트만은 전쟁 후 미치광이가 되어 돌아와 학대를 일삼는 아버지와 납작 엎드린 개처럼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어머니, 전쟁터로 변해버린 집에서 생존을 건 투쟁을 벌여야 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자비한 인생은 국내에도 출간되었던 자전소설 <개 같은 시절>에 처절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는인생은 언제나 당신보다 크다!”라는 말로 포문을 열면서 이런 삶에도 온기와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야말로 지옥 끝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히스토리를 가지고 있기에, 그가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진심일 수밖에 없다. 고통과 아픔, 패배와 파, 광기로 얼룩진 삶을 거쳤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었던 것들은 허세이거나 가짜일 수 없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 시간을 도둑맞을 수 없는 활기찬 삶으로 도망치는 일, 이런 삶은 값비싸지 않고 많은 투자도 필요하지 않지만 입장료는 내야 한다. 엉덩이를 들어 움직이고, 어느 정도 용기가 있어야 하고, 혼자 있는 상태를 견디고, 길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 창피함을 극복하고, 실패를 이정표로 인식하고, 도움을 청할 줄 알고,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고, 실수를 인정하고, 더 현명한 새로운 실수를 시도하고, "모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하고.....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대 잊지 않는 것, 이것이 입장료다.

안드레아스 알트만은 열여덟에 집을 나와 택시기사, 건설현장 관리, 북클럽 운영자, 주차장 경비, 연극배우 등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그 숱한 경험들과 그가 거쳐온 여행과 그곳에서 만나고 겪었던 것들이 결국 그의 삶을 구원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여행과 글쓰기가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구원했는지에 대한 여정이기도 하다. 스무 개 이상의 직업과 세 개 이상의 학위와 열세 번의 심리치료로도 실패했던 그것을 어떻게 삶에서 찾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목표 없이 떠다니는 루저의 삶이라는 늪에서 지금의 그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짧지 않았다. 거의 마흔이 다 되어서야 언어로부터 위로를 받고, 자유를 찾게 되었으니 말이다.

특히 '인생의 한 순간'이라는 챕터로 진행되는 짧은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보스턴 지하철 안에서 다리가 하나뿐인 남자에게 배웠던 뭉클한 예의, 야간 버스에서 라디오를 통해 비평가의 독설을 듣다가, 자신의 책을 읽고 있는 여성에게 위로 받았던 순간, 절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조문을 가서 느꼈던 마음, 시내버스에서 만난 난민 여자가 버스 기사 때문에 구원받는 느낌이 들었다는 이야기, 열세 살 체육시간에 자신을 다치게 했던 친구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느꼈던 뭉클한 따뜻함 등등.. 비루하고 처참한 우리네 삶을 온기 가득한 순간들로 바꿔주는 기적 같은 힘을 보여주는 순간들이다. 누구에게나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아름답게, 온기 가득한 순간으로 바꿔주는 기적 같은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신만의 그 순간을 찾아 보기를. 인생은 생각보다 살만하다고 느끼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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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코노히 1 - 시무룩 고양이
큐라이스 지음, 손나영 옮김 / 재미주의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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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 떴다 하면 수많은 리트윗과 하트 세례를 받는 일본에서 지금 가장 핫한 고양이네코노히'를 단행본으로 만났다. 뚱뚱하고 소심한 고양이네코노히의 시무룩한 표정이 매력인 네컷만화로 대사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마다 공감! 을 외치게 되는 너무 재미있는 책이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표정의 고양이들이 많지만, 네코노히는 독특하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힐링을 안겨주어 사랑받 는 고양이가 아닌가 싶다.

 

휴대폰 배터리가 빨간 색으로 변하면.. 딱히 급한 연락이 올 게 있는 게 아니더라도 안절부절, 쭈뼛쭈뼛, 뭔가 불안해해 지곤 한다. 만두를 먹다가 제일 중요한 소만 홀랑 간장에 빠질 때라던지, 열심히 피망완자전을 구웠는데 피망 따로, 속 따로 분리되어서 결국 따로 먹게 된다던가, 핫도그를 먹는데 계속 소시지가 뒤로 쑥 빠져서 빵만 먹게 되는 그런 경우.. 누구나 살면서 한 두 번쯤 겪어 봤을 법한 상황들이다.

 

멋진 날씨를 기대하고 간 여행지에서 비가 와서 숙소와 실내를 벗어나지 못한다거나, 식당에 갔는데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 때문에 불안감과 압박감으로 급하게 먹어야 했거나, 캔을 따려는데 고리만 톡 떨어져버려서 난감하거나, 랩을 뜯는데 자꾸 한쪽으로만 뜯어져 결국에는 랩을 뜯지도 쓰지도 못하게 된다거나 그런 상황들.. 뭐 이리 간단한 일 하나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지 화가 나거나, 혹은 어이없어 헛웃음 짓게 되는 그런 상황들이 이 책 속에 가득하다.

고양이 네코노히가 그려내는 일상 속 소소한 실패들이 내 얘기 같아서 깔깔 대고 웃으면서 읽다 보니, 사실 그리 심각하게 볼 것도 아니었는데 싶은 생각도 든다. 남이 겪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보고 읽으니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특히나 이 작품은 독특한 것이 대부분 일본 만화가들이 거치는 과정(잡지 연재 후 단행본으로 엮어서 내는)이 아닌, 트위터라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SNS를 플랫폼 삼아 성공한 케이스라는 것이다. 트위터 연재로 성공한 사례는 일본 만화계에서는 보기 드문 사례라 업계의 변화를 이끄는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만화이기도 한데, 보통의 네 컷 만화들과는 다르게 짧은 네 컷 안에서 대사라고 할 만한 것은 의성어, 의태어 정도 밖에 없다. 대사 없이 상황에 대한 모든 것을 단 네 컷의 그림 안에 다 표현해내면서도, 메시지가 한번에 확 다가오는 그림들이라 몰입감도 뛰어 나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멈출 수가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 작품은 출간 전에 여러 국내 대형 커뮤니티에서 짤방으로 돌며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만화이기도 하다. 한국어판 단행본을 기다리다 원서를 사서 보거나, 몇몇 에피소드를 직접 번역하여 공유하는 현상까지 있었다고 하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단행본에서는 큐라이스 작가 트위터에서 공개하지 않은 에피소드가 가득 실려 있다고 하니, 기다렸던 분들은 꼭 단행본으로 만나보셔야 할 것 같다. 사소한 실패들이 이어지며 되는 일이 없어 언제나 울상인, 그럼에도 너무 귀여운 시무룩 고양이 네코노히. 일본에서는 그 인기를 증명하듯 웬만한 굿즈들은 다 나왔을 정도로 캐릭터 상품이 많이 출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여행을 가게 되면 몇 개 사와야 할 것 같다. 작년에 일본에 갔을 때만 해도 쿠마몬 캐릭터 상품들이 대세였는데, 올해는 네코노히가 장악하고 있나 보다.

 

네코노히의 소소한 일상들을 따라 가면서, 이번엔 꼭 성공해서 ‘SUCCESS’라고 외치기를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고양이의 삶도 이런데 우리 인생도 소소한 실패에 연연하지 말자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한다. 되는 일 없어 세상 억울한 네코노히의 석세스 도전기가 어느 순간 내 모습에 이입이 되는 것이다. 

 

사실 어떤 상황에서도 그 순간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결과와 상관없는 마음이 아닐까. 인생은 언제나 흐림 뒤 맑음! 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번에 실패했으니 그걸 바탕으로 다음에는 잘 될 거야. 라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혹은 내가 생각했던 대로는 아니지만, 다른 방향으로 해도 크게 상관없구나. 라는 긍정적인 마인드도 좋고 말이다. 스트레스가 목까지 차 올랐을 때, 정말 뭘 해도 다 내 마음 같지 않아 잘 안 될 때, 대체 나는 왜 이모양이냐고 자책하지 말고 네코노히를 만나보자. 당신의 인생에도 ‘SUCCESS’가 이어지는 나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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