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
구스미 마사유키 지음, 최윤영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돈가스에 비하면 스테이크는 갱단 같다. 언뜻 보기에도 악역 느낌이다.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듯하다. 그 속에 큰 금반지도 끼고 있는 듯하다. 반면에 돈가스는 새하얀 목장갑이 어울릴 만한 좋은 사람 같다.

요전 날, 밤새 일하기에 앞서 주저 없이 돈가스 정식으로 배를 채웠다. 배를 채우다. 이 얼마나 남자다운 말인가. 가게는 이미 정해져 있다. 카운터 자리로만 된 돈가스 정식집이다. 드르륵(격렬하게 미닫이를 여는 소리).  P.30

하루 종일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쳤던 마음과 온갖 스트레스들이 저절로 사라지는 기분도 드는 순간이란 바로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달콤한 무스 케잌과 바삭한 크루아상, 뜨끈한 갈비탕과 칼칼한 김치찌개, 시원한 생맥주에 바삭한 군만두.. 뭐라도 좋을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침샘이 고이는 그 음식들을 한 움큼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무슨 일이 있었든 상관없어. 괜찮아. 라는 마음이 들테니 말이다. 그렇게 음식은 우리를 잠시나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곤 한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 거리들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일이 또 오늘 같이 반복될 거라는 거라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지루한가. 거기다 오늘도, 내일도 늘 비슷한 반찬에 끼니를 때우기 위한 식사가 된다면 일상을 버티게 해주는 유일한 낙이 사라지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런 책이 필요하다.

이 책은 <고독한 미식가> <낮의 목욕탕과 술> 등으로 먹는 행위의 즐거움을 재미있게 알려 주었던 구스마 마사유키의 본격 '식욕 자극 에세이'이다. 특별한 음식들이 아니라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들이라 더욱 와닿고, 아는 맛이라 더 군침이 돌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고기구이, 라면, 돈가스, 샌드위치, 카레라이스, 오니기리, 단팥빵, 튀김덮밥, 메밀국수 등등... 26가지 일상의 음식들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스스로를 매일 먹는 생각만 하는식탐 아재라고 소개할 정도라서, 그가 음식을 대하는 자세에서 묻어나는 순수한 즐거움이 글에도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식재료가 가장 맛있는 계절.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자신만의 순서, 잘 어울리는 음식 조합, 음식에 얽힌 추억까지... 애정 넘치는 그의 입담에 읽는 내내 군침이 돌고 배가 고파지고 말았다. 저자 역시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배가 고파 온다며, 그런 창피스러운 자신의 식탐을 숨김없이 글로 담았다고 한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나왔다. , 먹어 보자. 뭐부터 먹을까. 나는 대체로 오징어 먼저. 앞니로 충분히 잘리는 이 부드러움. 통통하니 두껍다. 그리고 밥. 그렇지. 폭신폭신하다. , 맛있다. 다음 보리멸. 이게 또 가볍고 담백하니 기가 막힌다. 매콤한 양념과 튀김옷이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새우. , 이건 탱탱한 게 좋은 새우군. 맛있네. 그래도 딱히 특별 대접하지 않는다. 나는 평등하게 먹어 나간다. 절임채소로 입가심 그리고 된장국 한 모금. 여기서 처음으로 한숨을 돌린다. 무의식중에 앞으로 고꾸라져 있던 허리를 편다. , 행복하다.  P.181

고기구이에는 반드시 흰 쌀밥과 함께 여야 하고, 고깃집에서는 맥주를 무조건 병으로 주문해야 한다. 생맥주잔처럼 무거운 걸 들고는 움직임이 둔해서 고기를 대할 수 없다나. 라면을 먹을 때는 테이블 자리보다는 카운터 자리가 좋고, 돈가스를 맛있게 먹으려면 돈가스 양의 최소 다섯 배 이상의 양배추가 필요하다고 한다. 양배추를 인색하게 아끼는 돈가스집은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는 말도 서슴치 않는다. 카레라이스는 본격적으로 먹기 전 후각으로 매콤한 감칠맛을 먼저 느껴보면 좋고, 식은 카레와 뜨거운 밥의 조합은 야식으로도 그만이다. 오니기리는 역시 바깥에서 먹어야 제맛인데, 청명하게 펼쳐진 풍경이 보이는 장소를 찾아 먹으면 더할 나위 없단다. 가끔 나 자신만을 위한 호사를 누리고 싶은 날에는, 무리해서 비싼 장어찬합을 뻔뻔스럽게 먹으러 간다고. 거기다 그런 무리함을 비웃지 않고 정중히 받아들여 주는 것이 장어찬합이라는 음식의 용기가 지닌 도량이라며, 그래서 고급 레스토랑에서와는 달리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굉장히 진지한데 유머러스하고, 마치 음식이 내 눈앞에 놓여 있는 것처럼 생생하면서도 상상의 여지를 주는 풍경이 그려져 마음을 쏙 빼앗기게 만드는 책이다. 솔직하다 못해 거침없는 식탐에 대한 고백이 너무도 절절해서 공감, 또 공감하며 읽었던 것 같다. 음식에 대한 글 위주로 풀어낸 에세이 형식이지만, 곳곳에 해당 음식의 일러스트가 있고, 각 장마다 네 컷 만화가 수록되어 있어 더욱 흥미진진했다. 정신 없이 가족들 뒷바라지를 하고 난 후 한숨 돌리며 마시는 커피 한 잔, 직장인들에게는 이런 저런 스트레스를 털어낼 수 있는 유일한 낙인 점심, 그리고 오늘 하루도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저녁까지.. 우리의 일상은 매 순간 먹고, 마시는 행위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우리를 내일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자 위로와 응원이기도 하고 말이다. 저자는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일이야말로 일상 속최고의 힐링이라고 이야기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식탐 만세!!' 다른 걸 조금 양보하고,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먹는 즐거움은 절대 포기하지 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세계가 끝나고 있어요. 이 메시지는 아이에게서 어른으로, 아이에게서 어른으로, 천 년 후 미래의 세대로부터 거슬러 전달된 거예요. 세계가 끝나고 있고 우리는 종말을 막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박사님께 달려 있어요.”

......내가 조합해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였다.

, 세계가 끝나느냐는 말이 아니라, 라고 서둘러 덧붙여 말해야 했다.

왜 그게 중요하지?   P.10

죽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떨까. 태어나서 살다가 죽고, 또다시 사는 것이다. 같은 삶을 수천 번 다시 사는, 무한히 노회하고 무한히 현명한 존재들. 이야기는 주인공 해리 오거스트가 열한 번째 삶에서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시작된다. 일흔여덟의 해리는 환자복 차림으로 가슴에 심전도 모니터를 연결한 상태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때 일곱 살짜리 여자애가 등장해서는 말한다. 자신은 시간을 거슬러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데, 자신의 말을 박사님의 클럽들에 전해달라고.

"언제나 그래야 하듯이 세계는 끝나고 있어요. 하지만 세계의 종말이 더 빨라지고 있답니다."

 

그것은 끝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해리의 거듭되는 삶 속에서 제2차 지각 변동을 일으키게 된다. 소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는 채로 해리는 열한 번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이후 열두 번째 삶부터 그의 인생은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진짜 이야기는 그때부터 다시 시작된다. 세계 종말의 음모란 대체 무엇이며, 그 배후는 누구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생애에서 우리는 매번 죽음을 거치지만." 나는 말했다. "우리 주위의 세계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1917년에는 항상 혁명이 일어납니다. 1939년에는 항상 전쟁이 발발합니다. 케네디는 항상 암살당하고 기차는 언제나 제시간에 오지 않습니다. 생애를 거듭 살아가면서 우리가 관찰하는 한, 이것들은 상수로 존재하는 선형 역사의 사건들입니다. 유일한 변수는 우리입니다. 세계가 변화한다면 세계를 변화시키는 건 우리입니다."   P.199

해리 오거스트는 기차역 화장실에서 태어났다. 하녀였던 엄마는 그를 낳다 죽었고, 그녀를 강간한 주인의 가문은 해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관리인 부부에게 입양되었고, 청년들이 다 그랬듯 징집되어 2차 대전에 참전했고, 평범하게 살았다. 그리고 아내와 이혼하고 슬하에 자식도 없이 공적 연금에 의지해 살다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어느 종합병원에서 70세의 나이로 홀로 숨을 거둔다. 하지만 그는 1919년 새해 첫날 기차역 여자화장실에서 다시 태어난다. 성인의 의식을 온전히 간직한 채로 아이의 몸으로 돌아간 그는 혼란에 빠졌다가, 고뇌에 휩싸였고, 의혹과 절망에 빠져 일곱 살 나이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여섯 달 만에 3층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데 성공한다. 세 번째 삶부터는 조금씩 달라진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알았고, 대비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반복되는 인생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한 생을 거듭하게 된다. 그리고 세계의 종말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러 온 소녀와의 만남 이후로 뭔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휴고상, 네뷸러상과 함께 세계 3 SF문학상으로 불리는 존 캠벨상 최연소 수상작이다. 작가인 클레어 노스는 여러 필명으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해 왔다. 캐서린 웹이라는 본명으로 YA소설을, 케이트 그리핀이라는 필명으로 판타지 소설을, 클레어 노스라는 필명으로는 SF 소설을 발표하고 있다. 이미 청소년 판타지 소설로 두 번이나 카네기 메달 후보에 오르며 주목 받아온 작가이긴 하지만, 어린 나이에 비해 정말 왕성한 창작력을 지닌 작가가 아닐 수 없다. 이야기는 현대 세계사와 양자물리학에 관한 해박한 이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단 하나의 삶을 사는 대부분의 선형적 인간들과 이들처럼 여러 번 생을 거듭해 모든 것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인간들이 있을 때, 세대와 시대를 넘어 선형적으로 계속되는 역사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얼핏 전지전능해보이는 이들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 세계가 끝나가고 있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면, 누군가 나서서 뭔가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걸로 인해 선형적 시간성의 궤적이 달라지게 된다면, 그 결과는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하는 것일까. 여타의 타임루프 물에 비해서 철학적인 질문들을 묵직하게 제기하는 작품이라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럼에도 주인공의 반복되는 삶들을 통한 드라마도 지루하지 않았고, 여러 생각할 거리들도 던져주는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재를 떠나보내며 - 상자에 갇힌 책들에게 바치는 비가
알베르토 망겔 지음, 이종인 옮김 / 더난출판사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책은 그걸 읽는 순간 속에 존재하고, 그 후에는 읽은 페이지들에 대한 기억으로서 존재하며, 책이라는 구체적 형태는 얼마든지 처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다. 가령 보르헤스가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보르헤스의 수수한 집을 방문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의 개인 도서관이 바벨탑처럼 어마어마할 것으로 상상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실제로는 수백 권의 책들만 보관했고 그것들조차 방문객들에게 선물로 줘버리곤 했다. 가끔 어떤 책들은 그에게 감상적인 혹은 미신적인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가 기억하는 몇 줄의 문장이었지, 그 문장이 수록되어 있는 책이라는 구체적 형태는 아니었다.  p.87

 

이 책은 현재 아르헨티나 국립 도서관장으로 재직 중이며, 작가이자 번역가, 편집자, 국제펜클럽 회원이자 '책의 수호자' '도서관의 돈 후안' 등으로 불리며 명실공히 세계 최고 수준의 독서가이자 장서가로 평가 받는 알레르토 망겔이 70여 개의 상자에 3 5천여 권의 책을 포장하며 느낀 소회와 단상을 담은 에세이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누구도 모든 책을 읽을 수 없고 그걸 바랄 수도 없기에, 우리는 어떤 사람의 애독서 목록을 살펴봄으로써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그래서 모든 서재는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말이다. 어떤 책을 읽느냐, 또는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느냐는 독서 목록에 따라 누가 우리의 친구이고 또 누가 우리의 친구가 아닌지를 말해준다는 그의 말에 괜시리 뭉클해졌다. 책이야말로 내가 살아온 역사이고, 내가 생각하는 세계의 바탕이며,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 역시 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어 왔기 때문이다.

알베르토 망겔은 십대 후반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났고, 시력을 잃어가던 그에게 4년 동안 책을 읽어주면서 큰 영향을 받은 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와 보르헤스가 책을 소유하는 방식은 완전히 정반대이다. 보르헤스는 책을 읽고 난 뒤 그것은 기억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책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는 처분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반면, 망겔은 언어의 구체적 물질성, 책의 단단한 현존, 그 형체, 크기, 질감을 원했다. 그랬기에 망겔에게 책을 상자에 넣어 창고에 처박아두는 일은 생매장처럼 느껴졌고, 서재의 해체 후 긴 애도의 기간을 견뎌야 했던 것이다. 그러했으니 서재를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마침내 모든 책을 포장한 후 텅 빈 서재의 한가운데서 그가 느꼈을 부재의 무게란 어땠을 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나는 그 책을 집어 들고 페이지를 넘기며 여기저기 한 줄씩 읽어본다. 이 책은 내가 오래 전 손에 들고 펴 보았던 바로 그 책인가? 이 책은 내가 처음으로 헤세의 싯다르타 왕자 이야기와 마거릿 미드의 사모아인 이야기를 읽었던 때 갖고 있었던 책과 동일한가? 분신의 전설에 따르면 우리의 분신은 그림자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곧바로 그를 알아본다고 한다. 여기 브로드웨이에서도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의 도플갱어는 그림자가 없고 과거도 없다. 각각의 독서 체험은 독특한 장소와 시간을 갖고 있기에 복제될 수 없다. 나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도서관도 완벽하게 부활할 수는 없는 것이다.  p.132

 

현재 내 서재에는 이천 권 정도의 책이 있는데.. 워낙 좁은 방이라 책이 늘어날 때마다 책장에 이중으로 넣다 보니.. 나중에는 필요한 책을 찾느라 애를 먹기도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기적으로 책들을 정리하게 된다. 보관할 책인지 다시 읽지 않을 책인지 구분해서, 필요 없는 책은 선물을 하거나 중고서점에 판매를 하는 식으로 정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책을 정리할 때마다 나 역시 망겔 처럼 추억과 명상에 잠기곤 한다. 왜냐하면 각각의 책 속에는 책을 읽었을 당시의 내 시간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고, 그리고 그때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으며, 날씨며 풍경들이 고스란히 함께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춰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망겔의 말처럼, 모든 서재는 일종의 자서전일 수밖에 없다. 나는 한 번이라도 더 읽을 만한, 분명 언젠가 다시 페이지를 들추게 될 책들 위주로 서재에 보관을 하는데, 그렇게 책장을 채우고 있는 목록들이야말로 나라는 인간의 이루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이니 말이다.

망겔은 스스로를 위로할 목적으로 침대 맡에 놔둔 물건이 언제나 책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의 서재는 그 자체로 위로와 조용한 안식의 장소였을 것이다. 망겔 처럼 모든 문제의 해답이 책 안에 있다고 믿는 사람, 삶을 견디게 해주고 돌파하게 해주는 것이 책의 힘이라고 믿는 사람, 서재야말로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며 자신의 일부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야만 한다. 단테, 보르헤스, 카프카, 셰익스피어, 플라톤, 장자 등 동서고금의 책들을 종횡무진 아우르는 망겔의 해박함과 통찰, 그리고 책에 관한 절절한 애정 고백이 당신의 마음을 단 번에 사로잡을 테니 말이다. 책과 도서관, 그리고 문장들과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로 가득한 마법 같은 작품이다. 알베르토 망겔의 책들이 전부 좋았지만, 이 책은 그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많은 경우에 감정 이입은 슬픔을 견딜 수 있는 위안을 주고 기쁨을 배가해주는 대단히 훌륭한 성품이다. 이상적으로 볼 때 감정 이입은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외로움을 덜 느끼게 도와주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소통이 잘 된다고 느끼게 해주는 전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감정 이입은 간혹 덫이 될 수 있다.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바로 그 자질 때문에 가스라이팅에 쉽게 노출되기도 한다.  p.88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면서 타인에 대한 지배를 하는 것을 가스라이팅이라고 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는 심리스릴러 장르에서 특히나 자주 만날 수 있는데, 얼마 전에 읽었던 B. A. 패리스의 <브레이크 다운> 역시 가스라이팅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그 작품에서 여주인공은 최근에 자꾸 사소한 일들을 잊어 버리기 시작했는데, 돌아가신 엄마가 마지막에 치매로 고생하셨기에 자신도 혹시 그런 건 아닐까 걱정한다. 게다가 그녀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상황들은 남편을 비롯해 주변 지인들이 점차 그녀의 기억력을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는 <가스등>이라는 연극에서 비롯된 정신적 학대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이다. 이 연극에서도 남편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황에 대해 아내를 탓하고, 아내는 점자 자신의 현실인지능력을 의심하면서 판단력이 흐려지고, 남편에게 의존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학대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가스라이팅에는 항상 두 사람이 존재한다. 가해자는 배우자 또는 연인, 상사 또는 동료, 부모 또는 형제자매처럼 가까운 관계가 대부분이다. 피해자는 자신의 행동과 외부의 자극을 사실과 다르게 기억하거나 자신이 오해 또는 오인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믿지 못해 혼란스러운 상태가 된다. 이 책의 저자는 가스라이팅이 단순한 정서 학대가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관계'라고 말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가스라이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낭만적인 관계를 끝낸다는 것을 세상의 종말처럼 여긴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가해자와의 관계가 얼마나 불쾌하고 불만족스러운가를 직시하기보다, 가해자를 이상화하고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p.232

가스라이팅의 창시자이자 30년 넘게 정신분석가, 심리치료사로 활동한 심리전문가 로빈 스턴 박사는 이 책에서 가스라이팅을 세계 최초로 정립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던 10년 전만 하더라도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일상에서, 뉴스에서 쉽게 사용되는 시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성범죄, 데이트 폭력의 일환으로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되기도 하고, 가정폭력의 새로운 유형으로도 조명받고 있는 현실이다. 이번에 개정판으로 이 책이 다시 출간되면서 딱딱한 느낌의 표지에서 마치 에세이처럼 느껴지는 듯한 부드러운 분위기의 표지로 바뀐 이유도 그 이유일 것이다. 이제 가스라이팅은 심리학 용어로 딱딱한 이론으로만 설명되는 단어가 아니라, 흔한 연인 관계부터 부부 관계나 가족 관계에서 등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한 번씩은 해봤을 법한 일상적인 현상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니 요즘이야말로 이런 책이 꼭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왜 가스라이팅이 만연해 있을까? 왜 그토록 똑똑하고 강한 수많은 여성들이 1950년대 코미디를 보는 것과 같은 병적인 관계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왜 이러한 현상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일까? 이 책은 가스라이팅이란 대체 무엇이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단계별로,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매일 다투지만 헤어지지 못하는 연인,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가족, 나를 무능한 사람으로 만드는 직장상사 등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자존감을 훔쳐가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법에 대해서 수많은 실제 사례들을 바탕으로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는 현실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들의 사연들을 하나씩 떼어 보면 모두 웬만한 심리스릴러 한 편은 쓸 수 있을 만한 에피소드들이다. 그만큼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이해되고, 공감이 되는 사연들이라 더 오싹하다. 왜냐하면 내가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도 예외일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옭아매는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 책이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헬리콥터 하이스트
요나스 본니에르 지음, 이지혜 옮김 / 생각의날개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계획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헬리콥터가 필요했다. 지붕에 올라갈 방법은 수만 가지가 있겠지만, 내려올 방법은 현실적으로 단 한 가지뿐이었다. 소란과 이야기한 이후, 미셸은 크레인이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을지 알아봤다. 그러나 그 계획은 곧 포기해야 했다. 못이나 밧줄, 회반죽을 써서 등산하듯 올라가는 방법도 고민해봤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우아하게 열기구나 행글라이더를 타고 가는 방법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 뿐 현실적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작가와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온 스웨덴 작가 요나스 본니에르의 첫 장편소설이다. 타임즈 선정 세계 10대 강도 사건으로 꼽히는 스웨덴에서 실제 발생했던 사건을 토대로 쓰인 이 작품은 출간 직후 넷플릭스와 전격적으로 영화 판권을 계약했고, '제이크 질렌할'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로도 제작되고 있다. 작가는 실존 인물과의 수많은 인터뷰와 면밀한 조사를 통해 6개월간의 사건 공모에서 탈주까지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했다. 이 전대미문의 '헬리콥터 강도 사건'은 추후 도망친 범인들이 잡히긴 했지만 돈의 행방은 결국 미궁에 빠지고 만다.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 작가적 상상력을 입혀 새롭게 탄생한 이 범죄 스릴러는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미셸은 세계적인 보안 회사인 G4S와의 미팅을 앞두고 있다. 소란과 함께 자신들이 개발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안 가방을 판매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반응은 성공적이었고, 곧 거래할 하기 직전까지 상황이 진행되지만, G4S에서는 현재 사용 중인 보안 가방의 계약이 무려 15년이나 남았기 때문에 그 이후에나 계약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미셸은 낙담한 심정이 되고 만다. 열다섯에 첫사랑과 결혼해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사미는 이제 그만 범죄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 새로운 삶을 위해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빌린 돈을 모두 모아 냉동 새우 사업에 투자를 하지만, 그만 사기를 당해 돈을 모두 잃고 만다. 어쩔 수 없이 미셸과 사미는 마지막으로 크게 한 방을 위해 함께 일을 꾸미게 된다. 바로 세계 최대 보안업체인 G4S에 근무하는 알렉산드라 스벤손에게 접근해 정보를 얻은 뒤, 그곳에 있는 어마어마한 현금을 털기로 한다.

 

“이 계획이 말도 안 된다는 건 나도 동의해. 헬기를 훔쳐서 코앞에 경찰서가 있는 보안 업체까지 날아가겠다니. 더구나 지붕 아래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문을 폭파하고 스웨덴 역사상 가장 어마어마한 강도짓을 벌이겠다는 거잖아. 우리가 세세한 계획을 세우는 동안 경찰이 소란을 면밀하게 감시했다는 걸 아는 상황에서 말이야.”

사미가 두 사람을 설득시키려는 듯 말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일이 될 거야. 혹시 알아? 전 세계가 이 이야길 하게 될지.”

그들이 돈을 훔치기로 한 곳은 스웨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금고로, 그야말로 북유럽에서 가장 안전한 금고였다. 전설적인 보안으로 유명해서, 군대 하나를 끌고 간다면 몰라도 차라리 시도를 안 하는 편이 낫다고 다들 생각했을 만큼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노리는 것은 문이며 자물쇠에 카메라 수백 수천 대가 지키고 있는 금고가 아니라, 알렉산드라 스벤손이 근무하고 있는 회계부였다. 이곳에는 현금만 수억 크로나가 있는데다 근처에는 보안 요원도 없었다. 그러니까 굳이 금고를 털려고 애쓸 필요 없이 지붕에 구멍만 뚫으면 바로 맨 꼭대기 층에 있는 회계부로 들어올 수 있다는 거다. 말로는 엄청 간단해 보인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지붕을 뚫고 현금을 가지고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지붕에 올라갈 방법이야 수만 가지가 있겠지만, 내려올 방법은 시간 제약 상 현실적으로 단 한 가지뿐이었다. 해답은 헬리콥터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황당무계한 강도 사건이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어두운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면서 살아 왔던 네 명의 남자, 그들은 국적도 사는 환경도 다른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그들이 6개월간에 걸쳐 모의한 세계에서 가장 대범하고도 놀라운 희대의 강도 사건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들이 사건을 공모하고, 구체화시키는 과정부터 긴장감 넘치는 사건 당일의 현장 풍경을 놀라우리만치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사건에 대처하는 경찰과 검찰, 국가 고위 관계자들의 대처 과정까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어 더욱 이야기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과연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까 의심이 되는 순간이 있었을 정도로 사건 자체는 황당무계하지만, 이것을 둘러싼 인물 군상들의 드라마는 마치 한 편의 블랙 코미디 같기도 하고, 뛰어난 범죄 스릴러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기도 해서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