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내 것이었던
앨리스 피니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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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실과 꿈을 분리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현실도, 꿈도 다 무섭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나도, 지금이 언제인지는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아침이 왔다는 구분이 깨지자 오후도, 저녁도 다 깨진다. 내게서 도망간 시간을 되찾고 싶다. 시간에는 고유한 냄새가 있다. 친숙한 방처럼.   P.91

 

앰버는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 병원에서 코마 상태로 깨어 난다. 뭔가 아주 안 좋은 일이 일어났던 모양인데 그게 무슨 일인지, 언제 있었던 일인지 기억할 수가 없다. 그녀는 눈을 뜰 수도,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의식과 감각은 살아 있었다. 그래서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렸지만, 아무도 그걸 알지 못했다.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야기는 사고가 일어나기 일주일 전과 코마 상태로 병원에 있는 현재 시점을 오가며 진행된다. 그리고 이십오 년 전에 쓰인 열살 소녀의 일기장이 교차로 보여지는데, 일기장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알 수 없다.

앰버는 청취율 1위 프로그램인 <커피 모닝>의 보조 진행자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인 진행자인 매들린과 사이가 불편했는데, 급기야 크리스마스 며칠 전 매들린이 더 이상 그녀와 일하지 않겠다고 피디에게 통보를 한다. 게다가 그녀는 남편인 폴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였다. 동생인 클레어와 폴과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었고, 그들은 최근 들어 다투기만 했다. TV리포터였던 앰버는 첫 작품으로 엄청난 성공을 한 소설가 폴과 결혼했는데, 이후 폴은 더 이상 소설을 써내지 못했고, 그녀는 함께 일하던 편집자의 추근거림에 방송 일을 그만뒀다. 폴은 아이를 원했지만 그들은 계속 실패했고, 더 이상 앰버와 폴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의문의 사고, 게다가 앰버는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실수를 하지. 중요한 건 그런 실수를 통해 배우는 거야. 이제 당신을 돌보는 일을 훨씬 잘할 수 있어."

이건 꿈이 아니야.

"돌아와서 다행이야. 당신도 나한테 고마워하고 있을 거란 걸 알아."

난 이 남자를 알아.   P.181

 

저자인 앨리스 피니는 BBC에서 15년간 리포터, 뉴스 에디터, 프로듀서로 일했고, 이 작품으로 작가로 데뷔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놀라운 데뷔작이 아닐 수 없는 작품이었다. 초반부터 몰입감이 대단한 작품이었고, 탄탄한 구성과 독창성 있는 전개가 그야말로 탁월했다. 읽는 내내 이 이야기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너무도 기대가 되어 두근두근 설레어 하며 푹 빠져들었다. 과거의 시간이 흘러 가면서 대체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추측하게 만드는 스토리도 흥미진진했고, 코마 상태인 녀가 주변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하나씩 받아들이는 상황도 너무도 긴장감 넘쳤다. 앰버가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과속을 하다 사고가 났다고 하는데, 그녀는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운전을 한 적이 전혀 없다. 게다가 남편 손에 심각한 상처가 생겼다고 하는데, 크리스마스 전까지 남편이 손을 크게 다친 적은 없다. 코마 상태인 앰버는 마치 타인처럼 느껴지는 남편의 진술을 그저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왜 그녀에게 사고가 생긴 걸까. 그녀가 기억을 되짚어 가는 과정은 정말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서스펜스와 탁월한 심리 묘사로 인해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이 책의 원제는 'Sometimes I Lie'이다. '원래 내 것이었던'이라는 제목은 의역이라고 볼 수도 없을 만큼 완전히 다른 의미로 번역되어, 책을 읽기 전부터 궁금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제목을 이렇게 했는데 저절로 이해가 된다. 탁월한 제목이고, 작품을 다 읽고 나면 목덜미가 서늘해지게 만드는 제목이기도 하다. 사실 유사한 장르의 작품들을 많이 읽다 보면, 초반 어느 정도만 이야기가 전개되어도 이후에 펼쳐질 스토리의 방향이 대충 짐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간단해 보이는 스토리는 알고 보면 굉장히 복잡하게 얽히고 뒤틀린 플롯으로 만들어 졌고, 후반부에 몰아치는 반전 또한 그야말로 묵직한 충격을 선사한다. 더 이상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건지, 누구의 기억을 믿어야 하는 건지, 뭐가 현실이고 아닌 건지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 되어서야 이야기 끝이 난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완전한 끝이 아니기도 하다. 정말 영리하게 잘 쓰인 작품이고, 올해 읽은 심리 스릴러 중에 단연코 최고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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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탐정 -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집장의 37년 단어 추적기
존 심프슨 지음, 정지현 옮김 / 지식너머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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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전이 누군가가 쓴 책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다. 책상과 부모님의 책장, 컴퓨터 안에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전은 그저 어떤 단어의 뜻에 대해 조금만 모르는 것 같으면 거쳐야 하는 성가신 단계쯤인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사전을 썼다. 매일 출근해서 알파벳의 다음 단어를 정의하는 계획을 세우는 직업이 세상에 있다면 믿겠는가?    p.21

몇 년 전에 미우라 시온의 <배를 엮다>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다. 대형출판사의 사전편집부를 중심으로 팀원들이 각자의 개성과 성격을 드러내며, 모두가 한 권의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상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었다. 묵묵히, 성실하게 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시종일관 따뜻하고 유쾌한 필치로 그려진 그 작품을 잃으면서, '성실'이라는 단어가 좀 멋없고,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런 성실함이 쌓여야 비로소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사전' 편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요즘이야 워낙 전자 사전이나, 스마트폰 등을 통해서 사전 검색 기능을 활용할 수가 있어서, 종이 사전은 보기가 힘들어 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빽빽한 종이 사전을 뒤져가면서 단어의 뜻풀이를 하던 시기를 떠올려 오면 그 얇은 종이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디를 넘겨도 빽빽하게 인쇄된 문자의 행렬들이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전부 담고 있을 거라는 기대감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고 말이다. 이번에 만난 <단어 탐정>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사전인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는 대단히 놀라운 작품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존 심프슨은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사 사전부에서 37년 동안 사전을 만드는 일을 해왔다. 그가 사전 편찬자로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어의 탄생과 생존, 소멸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엄청난 기록이기도 하다.

 

사전 편찬자들이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무엇인가?"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질문이지만 우리는 괴롭다. 나는 항상 없다고 대답한다. 역사 사전 편찬자는 편애하면 안 되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모든 단어는 저마다 다른 의미에서 중요하다. 사전 편찬자의 전형에 인간적인 요소를 넣고 싶어 하는 저널리스트들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운 대답이다.   p.120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 1884년에 초판 1권이 출간되었고, 1928년 초판 12권이 완간되었으며, 이후 개정판 2판으로 20권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온라인 사전도 출범되었으며, 2037년에는 개정판 3판이 출간될 예정인 방대한 분량의 사전으로 전체 21,728페이지에 60여만 어휘를 담고 있는 사전이다. 게다가 이 사전은 단순한 단어의 의미뿐만 아니라 단어의 역사적인 발달 순서와 용법을 참고할 수 있는 문헌 자료도 제공하고 있어, 그야말로 단어의 역사를 기록한 사전이기도 하다. 저자는 독자들이 직접 적어 보낸 단어 카드로 문헌 조사를 하던 종이책 시대의 OED부터 방대하고 체계적인 구조를 갖춘 온라인 OED로 변화하기까지, 한 사전의 의미 있는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역사 사전을 만드는 작업의 재미와 흥분감은 수백 년 동안 잊힌 단어를 되찾고 문화와 사회 속에서 단어가 발생하는 모습을 살펴보는, 마치 탐정 같은 사전 편찬자의 일에서 나온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 이 책을 읽다 보면 왜 '탐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 저절로 수긍이 갔다.

특히나 재미있었던 부분은 펜과 색인 카드, , 사람들에 둘러싸여 손으로 써내려 가던 시절이었다. 엄청난 독서를 통해서 사전에 수록된 것들보다 훨씬 앞서는 단어와 의미의 용례를 수없이 찾고, 카드철에 넣으며 자료를 만드는 과정도, 현대 OED에 가장 많은 인용문 자료를 제공한 독자였던 나이 지긋한 노부인에 관한 일화도 흥미로웠다. 책을 읽다 발견한 단어 정보를 보내는 걸로 시작해, 이후 그녀가 제공한 정보의 분량이 색인 카드 약 25만 개에 이르렀다고 하니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전을 만드는 일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 보다 '사전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를 다루는 데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어 더 의미가 있었고, 그 중 몇몇 단어를 추려내어 그 역사와 용법을 제시해주고 있어 영어의 어원과 활용에 대한 팁도 얻을 수 있는 두 배의 즐거움을 준다. 사전 편찬이라는 엄격하고 강직한 직업에 관한 너무도 흥미진진한 이 책은 언어와 언어의 기원, 그리고 그것의 의미와 사용 방식 등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매혹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이 보여 주는 것은 위대한 사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를 넘어서 그 이상의 모든 배경과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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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낙관주의자 - 심플하고 유능하게 사는 법에 대하여
옌스 바이드너 지음, 이지윤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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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면, 장밋빛 미래를 그릴 수도 없다. 어떤 힘든 일을 견뎌내야 할 때, 우리는 상황을 바꾸어 생각함으로써 훗날의 보상을 눈앞에 그려본다. 정신적 시간여행의 능력이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선택 받아 온 이유가 금방 이해될 것이다. 우리가 백 년 후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면 누가 지구온난화 문제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P.130

토머스 에디슨은 이런 말을 했다. "마술은 마음속에 있다. 마음이 지옥을 천국으로 만들 수도 있고,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라고. 뭐든 마음 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이다. 모두들 행복하기 위해서 살지, 일부러 불행하기 위해서 뭔가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마음과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거다. 낙관주의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신념과 태도, 사고방식을 뜻한다. 하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낙관주의자란, 모든 것을 긍정만 하는 것과는 차별된 개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낙관주의자란 대체 어떻게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심리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옌스 바이드너는 삶에 좋은 영향을 주는 긍정적 감정에 대해 평생 동안 연구했다. 그는 이 책에서 "낙관주의자라고 다 같은 낙관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당신은 낙관적인 사람인가, 비관적인 사람인가. 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에 속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일상에서 '낙관주의'라는 단어는 어딘가 현실 감각이 없어 보이고, 대책 없이 모든 일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거나, 그다지 지적이지 못하다는 의심을 받아왔으니 말이다. 세계적인 심리학자인 옌스 바이드너는 이 책에서 낙관주의자에 대한 편견과 상식을 완전히 뒤집고 있다.

 

낙관주의를 겉으로 표현하는 행위의 대표는 뭐니 뭐니 해도 웃음이다. 웃음의 효과를 연구해온 웃음치료사들은 웃음을 보고 진짜 낙관주의자를 판별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웃음은 비행기 승무원들이 짓는 인위적 미소가 아니다. 이른바 '뒤센의 미소'라고 알려진 진짜 웃음을 말한다. 눈 아래 작은 주름이 진짜와 가짜를 판가름하는 단서다. 그 웃음은 자연스럽기 때문에 진정한 효과를 발휘한다.   P.183

저자에 따르면 낙관주의자에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비참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면에 집중하는 목적 낙관주의자, 대체적으로 장밋빛 미래를 믿는 순진한 낙관주의자, 최악을 가정하고 작은 행복에 안주하는 숨은 낙관주의자, 모두의 안녕과 공동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이타적 낙관주의자, 그리고 기회와 한계를 알고 최상의 미래를 그리는 지적인 낙관주의자이다. 그 중 최고의 낙관주의자 유형으로 구분되는 '지적인 낙관주의자'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검증하고, 결과를 긍정적으로 예측할 수 있도록 행동하기 때문에 항상 남들보다 멀리 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마음 편히 살고, 잘 자고, 남들보다 행복하며 심지어 사회적으로 성공할 가능성까지 높다고 한다.

사실 낙관주의라고 하면, 그저 다 잘 될 거야.라는 식의 무한 긍정주의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불평과 비관으로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책 없는 긍정보다는 현실적인 시선이 삶아가는 데 더 필요한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한 마디로 나는 '낙관주의자'라는 단어에 대해 다소의 불신과 못미더움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낙관주의라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비관주의자로 사는 것보다는 어떤 유형이든 낙관주의자가 되는 것이 보다 나은 삶을 보장한다는 저자의 말에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행복해지려고 마음먹은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이 책은 당신의 그런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구체적인 태도와 방법에 대해 알려주는 놀라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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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비행 夜間飛行 - 홍콩을 날다
이소정 지음 / 바른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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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7. 홍콩이 중국에 영구 귀속되는 해이다.

그러므로 홍콩이라는 유통기한 짧은 단편영화를 하루라도 빨리 보길 원한다면, 서둘러야 한다. 홍콩은 수천 개의 유기물이 용솟음치는 작은 용암이며, 거대한 비디오아트이며, 온갖 언어와 냄새와 표정과 추억이 떠다니는 섬이다.   P.7

홍콩, 어느 골목에서는 <중경삼림>을 만나고, 어느 식당에서는 <화양연화>, 어느 밤거리에서는 <천장지구>가 떠오르는 나라이다. 내가 홍콩에 여행을 다녀온 지 어느 새 십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홍콩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에서 홍콩까지의 거리는 1,292마일, 세 시간 반 조금 넘는 비행시간, 한 시간의 시차. 한 번쯤의 터뷸런스를 견디고 열 번쯤의 건조함을 이겨내면 후덥지근한 공기와 마주하게 되는 그 곳. 홍콩이라는 가깝고도 먼 나라에 내가 알고 있던 것들, 내가 미처 몰랐던 것들이 쌓여 책을 덮자 마자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저자는 오랜 시간 홀로 홍콩을 다니며 여행 일기를 쌓아 왔다고 한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 수집한 정보들은 그녀의 홍콩에 대한 애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수년 간 취재한 홍콩에 대한 정보와 감상으로 탄생한 이 책은 여느 여행 에세이와는 전혀 다른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화양연화, 아비정전, 희극지왕, 타락천사, 캐리비안의 홍콩섬, 열혈남아 등... 홍콩의 옛 영화들을 거리로 불러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있는 이 책은 '여행 가이드'가 아니라서 더 매력적이었다. 

 

홍콩을 생각하면 몰려드는 거대한 이미지들. 그건 어느 오래된 단편영화 같기도 하고, 미숙한 바느질로 엮어놓은 천쪼가리 같다. 사자성어를 영어로 풀이해 놓은 작은 책의 페이지, 코카콜라 박스를 뒤집어 식탁으로 스는 사람들, 빙글빙글 손잡이를 돌려 열어야 하는 빨간 택시와 창문으로 보이는 금빛 빌딩들.... 이 모든 걸 찢고 오리고 붙이고 매달아서 거대한 콜라주를 만들고 싶다.   p.85~86

계획 없이 무작정 홍콩에 왔던 날,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는 침사추이였지만 적당한 가격의 숙소를 찾기가 어려웠다. 결국 돌고 돌아 어느 허름한 건물 5층에 있는 숙소를 찾았는데, 창문 하나 제대로 없는 답답한 방과 족히 30년은 되어 보이는 엘리베이터를 보면서도 저자는 생각한다. 꼭 홍콩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고급 호텔이 줄 수 없는 이런 불안한 느낌이 자신을 영화 주인공이 된 것처럼 만든다고 말이다. 그리고는 언젠가 너무나 지쳐 창 밖을 볼 힘도 없을 때, 사진 속 왕페이와 양조위의 눈빛이 나를 구원해 주겠지, 하고 가져온 사진들을 꺼낸다. 감기 때문에 쓰러져 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그녀는 양조위가 거닐었을 법한 거리를 찾기 위해 또 한 번 기운을 내서 밖으로 나간다.

대부분의 이러한 에피소드들이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도 정말 영화 같다는 느낌이 물씬 풍겨서 너무 설레었다. 사실 홍콩은 여행지로서는 이미 너무 많이 알려진 나라이고,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가본 곳이다. 대충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홍콩에 관련된 수많은 정보들이 뜨고, 주변에 홍콩 한 번 안 가본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 책 속에서 보여지는 홍콩은 완전히 새롭다. 저자의 애정 넘치는 시선으로 바라본 홍콩은 너무도 매력적이고, 너무도 깊이 있고, 향수에 빠지게 만들고, 영화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그야말로 책을 덮자 마자 홍콩행 티켓을 끊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런 책이다. 다시, 홍콩에 가야겠다. 저자처럼 새벽의 고요한 홍콩을 맞이하기 위해, 야간비행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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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편지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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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나는 아기를 가졌어요.

오늘 새벽에는 초승달을 보며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빌고 빌었어요. 변소에 가려고 마당에 나왔다가요. 초승달에 낀 흰 달무리가 몽글몽글 떠오르는 순두부 같아 나도 모르게 입을 벙긋 벌렸어요. 그것을 먹으려고요. 어머니, 나는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빌어요.

눈동자가 생기기 전에……. 심장이 생기기 전에…….  p.7

잠잠히 흐르는 물결 위에 열다섯 소녀가 편지를 쓴다. 아기를 가졌지만,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빌고 빌었다고. 글자를 배우지 못해 자신의 이름조차 쓸 줄 모르지만 물결로 검지를 가져가면 글자가 저절로 써진다. 그만큼 간절하고, 막막하고, 무서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오늘이 며칠인지 날짜를 모른다. 해가 뜨면 낮이고, 지면 밤이라는 것만 안다. 밤이 되면 송장놀이를 해야 한다. 나는 죽었어, 나는 죽었어, 나는 죽었어... 자신이 죽어 땅속에 누워 있다고 생각하려 애쓰며, 배릿한 흙냄새가 맡아질 때까지 소녀는 주문을 외우고 또 외운다. 낮이 되면 함께 있는 언니들과 함께 삿쿠(일제강점기 군용 콘돔)을 강물에 씻는다. 그리고는 끊임없이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과 역사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속상할 만큼 미약했다. 나는 김숨의 이 작품을 읽으면서 속이 상했다. 마음이 아프고, 분했고, 화가 났다. 이들이 겪어야 했던 시간들은 단어 그대로 끔찍했고, 고통스러웠고, 치욕스러웠다. 작가 역시 취재한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위안소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쓸 '용기'를 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고 하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처참한 지옥의 풍경을 정확하게 글로 묘사해내기란 차마 힘들다는 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을 테니까. 나 역시 그저 독자의 입장에서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외면하고 싶은 진실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입으로 삼킨 것은 토할 수 있는데, 눈으로 삼킨 것은 토할 수 없다. 눈도 입처럼 토할 수 있다면, 나는 내 몸에 다녀간 군인들의 얼굴을 토하고 싶다. 가장 처음 내 몸에 다녀간 군인의 얼굴을 가장 먼저. 처음 내 몸에 다녀간 군인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얼굴이 쓰고 있던 뿔테 안경은 기억난다. 그 얼굴을 토하다 안경이 부러지고 깨지면 어쩌지? 깨진 뿔테 안경 조각이 내 눈동자를 찌르면?

나는 얼마나 많은 얼굴을 토해야 할까. 너무 많은 얼굴을 토해야 해서 눈가가 짓무르고 눈동자가 터져버릴지 모른다.   p.101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일본 군인에게 납치를 당해, 직업소개소로부터 사기를 당해, 부모나 양부모가 팔아 넘겨서 위안소까지 오게 된 10여 명의 조선인위안부들의 삶이란 너무도 끔찍했다. 열세 살 때 중국으로 끌려와 열다섯 살인 지금 위안소에서 아기를 갖게 된 일본군 위안부 소녀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눈을 부릅뜨고, 마음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부여 잡아야만 겨우 읽을 수 있었다. 김숨 작가는 2016년 출간된 장편소설 <한 명>에서 '위안부' 피해자가 세상에 한 명뿐인 상황을 가정해 이야기를 그려 냈었다. 당시 생존자는 40. 2018년인 지금 <흐르는 편지>가 출간된 시점, 27명의 피해자가 생존해 있다. 이는 우리가 이 처참한 비극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저질러진 극단적이고 유례없는 성폭력'이라는 점에서 너무도 참담하고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이다. 어느 정도 미루어 짐작했던 고통보다 이 작품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실상이란 예상을 훨씬 넘어서는 무시무시한 지옥이었다. 특히나 죽음과 그리도 가까이 살고 있는 어린 소녀가 그 속에서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강력한 삶에의 의지가 나를 이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외면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듯한 기분도 든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우리는 절대 이 부끄러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현실과 너무도 먼 이야기라 전혀 실감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그들의 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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