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의인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2
에드거 월리스 지음, 전행선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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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런던 시민이 익히 보아왔던 것과는 매우 다른 독특한 범죄 공보였다. 지명수배자들에 관한 추가적인 묘사는 없었고, 그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초상화도 없었으며,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을 때, 짙은 파란색 서지 정장에 천 재질의 모자와 체크무늬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같은 전형적인 묘사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적어도 그런 것은 있어야 지나가는 행인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법이다.    p.45

에드거 월리스는 영화킹콩의 원작자이자 코난 도일, 애거서 크리스티와 동시대에 사랑 받은 작가라고 한다. 생전 17편의 희곡과 957편의 단편, 그리고 170여 편의 소설을 남겼을 뿐 아니라, 160여 편은 영화로 제작되었고, TV시리즈로도 방영된 유명 작가라.. 국내에 이렇게 뒤늦게 소개된 것이 의아할 정도이다.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이라는 타이틀로 <트위스티드 캔들>에 이어 두 번째로 국내에 소개되는 작품은 <네 명의 의인>이다. 지금의 세련된 추리, 스릴러 소설 작법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추리의 빈도가 그렇게 높지 않고, 20세기 초반의 대중작가들이 만든 작품 특유의 맛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그런 부분 때문에 더 흥미롭게 읽히기도 한다.

<네 명의 의인>이라는 작품이 1905년에 발표되었다는 점을 인지하고 이야기를 읽는 다면 더욱 그렇다. 제목 그대로 이 작품은 정의를 실현시키려고 하는 네 명의 남자들이 벌이는 일들이 주요 플롯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극중에 신문 칼럼에 등장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은 이 땅에 내린 정의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서 자신들이 직접 법을 고쳐 정의를 실현하려 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들이 처벌받지 않고 번성하는 세상에 환멸을 느껴, 일종의 자경단을 경성하여 스스로 악을 처단하고 정의를 실현한다는 얘기이다. 사실 이는 마블 영화의 슈퍼 히어로들을 비롯해서 현대에 우리가 만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작품 속 영웅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들의 방식이 조금 덜 세련되었을 뿐이다.

 

경찰은 그들이 평범한 범죄자가 아니며, 한 번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면, 현재 그들이 레이먼 경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기울이는 세심한 주의는 전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정직함이 네 명의 의인의 가장 끔찍한 특징이었다.   p.111

네 명의 의인이라고 불리는 레온 곤살레스, 포이카르트, 조지 맨프레드, 그리고 테리는 영국의 외무부 장관 필립 레이먼 경 앞으로 여러 통의 협박 편지를 보낸다.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의로운 정치 난민을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외국인 본국 송환법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법안을 제출한 외무부 장관을 암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외무부 장관은 이를 신문사에 제보하고, 기사를 통해 이들 4인조가 그 동안 저지른 범죄들의 목록이 밝혀진다. 2년 전 총격 사건 후 4인 중 한 명이 살해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4인 체제로 운영 중이었는데, 테리가 바로 새로 영입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테리는 나머지 세 명과 의견을 좁히기가 좀처럼 쉽지만은 않다. 개인의 이익이 아닌 정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네 명의 의인의 정체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게 되는데, 사실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네 명의 남자를 찾는 일은 경찰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와중에 자신을 네 명의 의인 중 한 사람이라 밝히며 사면과 보상금을 요구하는 자가 신문사를 찾아가게 되는데.. 과연 협박을 받은 외무부 장관은 어떻게 될 것이며, 네 명의 의인은 무사히 자신들의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을까. 이야기는 생각보다 술술 잘 읽힌다. 고전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지루하다는 편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말이다. 지금이야 이런 주인공들의 설정이 특별하지 않게 느껴지지만, 이 작품이 무려 백 년 전에 발표되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놀랍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이후 속편이 계속 출간되어 전체 6편의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다음 시리즈에서는 이들이 또 어떤 활약을 펼치게 될 지 궁금해진다. 투박하지만 정직한, 촌스럽지만 당시의 시대상이 느껴지는, 그런 고전 추리소설이 궁금하다면 에드거 월리스의 작품을 만나보길. 엄청난 다작을 했던 작가답게 결코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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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지 -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
리처드 H. 탈러 & 카스 R. 선스타인 지음, 안진환 옮김, 최정규 감수 / 리더스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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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지는 선택 설계자가 취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을 금지하거나 그들의 경제적 인센티브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고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그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넛지 형태의 간섭은 쉽게 피할 수 있는 동시에 그렇게 하는 데 비용도 적게 들어야 한다. 넛지는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다. 과일을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놓는 것은 넛지다. 그러나 정크 푸드를 금지하는 것은 넛지가 아니다.   p.21

타인의 선택을 적극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이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리처드 탈러의 <넛지> 99그램 에디션으로 출간되었다. 책 한 권을 나눠서 99그램으로 만든 특별판이다. 보통의 핸드폰이 130그램이라고 하면, 무려 핸드폰보다 가벼운 책인 셈이다. 428페이지였던 책이 99그램 에디션으로 나오면서 4권짜리 책으로 분권이 되었다. 기존의 두꺼웠던 합본보다 확연하게 얇아진 두께는 너무도 가벼워서 부담스럽지 않고, 4권이다 보니 각각의 표지가 색상이 달라서 각 장을 읽을 때마다 느낌도 새로워진 것 같다.

 

'팔꿈치로 쿡쿡 찌르다'라는 뜻의 '넛지Nudge'는 일종의 자유주의적인 개입, 혹은 간섭을 말한다. 예를 들어 보자. 학교 급식 메뉴에 변화를 주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음식의 진열이나 배열만 바꾸는 것으로 과연 학생들의 음식 선택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실험 결과 단지 구내식당의 음식을 재배열하는 것만으로도 특정 음식의 소비량을 올리거나 내릴 수 있었다. 이에 따르면 건강에 이로운 음식의 소비량은 늘리고, 건강에 해로운 음식은 덜 먹게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각각의 학생들이 음식을 먹고, 안 먹고는 선택의 자유이다. 이처럼 넛지는 사람들의 선택에 부드럽게 간섭하지만 여전히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가 열려 있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를 뜻한다. 교 급식을 하며 몸에 좋은 과일을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놓는 것은 넛지지만, 정크푸드를 금지하는 것은 넛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소변기에 파리 모양 스티커를 붙여놓는 아이디어만으로 소변기 밖으로 새어나가는 소변량을 줄여 깨끗하고 쾌적한 화장실을 만들 수 있고, 단지 단지 '내일 투표할 거냐?'고 묻는 것만으로도 실제 투표율을 높일 수도 있다. 새로 구입한 휴대폰에 미리 설정되어 있는 디폴트 옵션(지정하지 않았을 때 자동으로 선택되는 옵션)의 설계, 위험한 커브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도로에 그려진 감속 경고 표시 등...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일상에서 넛지를 당하고 있다. 

 

 

혹시 화가 머리끝가지 난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이메일을 보낸 뒤 바로 후회해본 적이 있는가? 'sdnd' 버튼을 누르는 순간 '메일의 상당 부분이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진짜 보내겠습니까' 하는 메시지를 한번 노출하는 것만으로 몇 시간 후 우리의 괜한 후회와 자책, 무엇보다 더 큰 갈등을 없앨 수 있다. 이처럼 일상 속의 사소한 넛지가 우리 안의 좀 더 선한 본성을 깨워줄 수도 있다. 이처럼 넛지는 보이지 않는 듯해도 어디에나 존재한다.   p.332

우리는 매일 뭔가는 선택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개인적인 선택이 사실은 선택 설계자들이 만들어 놓은 대로였다면, 얼마나 놀라운가.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는 배경이 되는 정황이나 맥락을 따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지만, 매우 흥미롭다. 이 책에서 말하는 행동 경제학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사회의 작동원리에 대해서 알려 준다. 그리고 편견 때문에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들을 부드럽게 '넛지'함으로써 현명한 선택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책을 읽고 나면, 뭐든 읽기 전의 상황보다 훨씬 나은 쪽으로 개선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오바마 전 대통령을 비롯해서 수많은 정책 결정자들이 왜 그토록 넛지에 열광했는지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책을 자주 읽지 않는 사람들의 핑계란 대개 비슷하다. 책을 읽을만한 시간이 없다. 읽고 싶은 책이 있어도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 너무 무겁다. 읽으려고 샀지만 막상 시작하기까지가 참 어렵다. 등등...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것이 99그램 에디션이다. 책 한 권을 읽는 데 단 10분이면 충분하다는 문구가 과장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게가 가벼워 시작하기에 전혀 부담이 없으니 말이다.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친구와 약속 시간이 되기 전에, 혹은 화장실에서 잠깐씩 틈틈이 읽기에 너무 좋다. 가방에 쓱 넣어 가지고 다니기에도 가벼워서 좋고, 가까운 곳으로 외출할 때 그냥 막 들고 다니기에도 좋다.

<넛지>라는 작품이야 워낙 유명해서 읽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제목은 다들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경제학을 다루고 있지만 전혀 어렵지 않고, 2009년에 출간되었지만 2018년 현재 읽어도 여전히 새롭고 유익한 내용이니, 이번 기회에 시작해보시길. 이 책을 읽고 나면 분명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 혹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조금은 달라질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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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우주인
야로슬라프 칼파르시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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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까봐 보험을 들어두는 거지." 내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

"글쎄, 그건 중요한 사람이라는 말의 반대겠지. 사람들이 묻고 싶은 대상인 몸을 갖는 것."

"너희 언어로 쓰인 기록으로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겠군. 모든 인간은 중요한 사람 아닌가?"    p.132

이 작품은 굉장히 독특한 SF 소설이다. 기존 SF 장르에서 흔히 등장할 법한 그 어떤 클리셰도 없으며, 분명 한 남자가 우주로 향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동안 만나왔던 유사 장르의 그 어떤 작품과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제목과 표지 이미지, 그리고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그리고 <마션> <아르테미스>를 잇는 또 하나의 SF 소설이라는 문구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되는 스토리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체코계 미국인 작가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대담하게 개척해서 독창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우선 배경은 이렇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관측된 적 없었던 혜성 하나가 태양계로 진입하면서 우주 먼지 모래 폭풍이 일었다. 이 특이한 현상에 사람들은 '초프라'라는 이름을 붙였고, 초프라는 지구의 밤을 자주색 황도광으로 물들인다. 지구에서 관측한 우주의 밤은 더 이상 검정색이 아니었으며 움직이지 않은 채 자리를 잡은 초프라 구름의 모습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며 끔찍한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하여 세계 각국은 초프라의 입자를 채취해 우주를 연구하겠다며 무인 왕복선을 발사하지만 모두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오고 만다. 그렇다면 인간 조종사가 초프라 속에 들어가 직접 관찰하고 견본을 분석해야 한다는 얘긴데, 과연 어느 나라가 지구로부터 넉 달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고 치명적일지도 모르는 입자로 이루어진 우주먼지 속으로 사람들을 보낼 수 있겠느냐가 문제였다. 그리고 마침내, 체코의 외딴 마을에서 살던 야쿠프가 세계의 이목이 쏠린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된다.

 

 

나는 앞쪽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뭔가가 있었다. 어쩌면 내 죽음은 삶보다 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우주에 내놓을 다른 것이라고는 생각해낼 수가 없다. 나는 이기적인 남편이었다. 천재적인 아이를 낳지도 세계 평화를 이루지도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지도 못했다. 어쩌면 나는 살면서 뭐라도 만들려면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 남자들에 속했는지도 몰랐다.

"모든 걸 끝내기에 여기도 나쁘지 않군." 내가 말했다.   p.199

야쿠프는 카렐대학교 천체물리학과의 종신 교수로 우주 먼지 연구자였다. 하지만 체코공화국 항공우주국이 그에게 우주에 가는 첫 번째 체코인이 되어주기를 바란 이유는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충성스러운 공산주의자의 아들이었던 야쿠프의 아버지가 저질렀던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라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야쿠프는 체코가 공산주의국가가 되는 데 일조했던 아버지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이웃들의 눈총과 따돌림을 겪으며 자랐고, 이번 기회를 통해 무너진 집안을 일으키고 영웅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선택에는 위험하고 고독한 여정이라는 점 외에도,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아내 렌카를 떠나야 한다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영웅이 되는 걸 선택했고, 그로 인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걸 잃어 버리게 된다.

 

이 작품에는 전문 용어나 공식,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관이나 낯선 캐릭터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홀로 우주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남자가 겪어야 하는 극한의 고독감과 외로움, 그리고 그의 어린 시절과 가족을 다루며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서던 체코의 시대상이다. 당시의 사회적인 혼란과 사람들의 심리적 갈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과거의 그 시간들이 현재 우주에 떠 있는 남자의 심리에 고스란히 반영이 되고 있기 때문에 텍스트가 더욱 풍부해지고, 복잡해지고, 흥미로워지고 있다. 게다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밝히진 않겠지만, 우주에서 그가 홀로 겪는 시간이 매우 특별해지는 순간이 생기는데, 바로 그런 부분들이 이 작품에서 가장 재미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특별한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면, 어렵지 않은 SF소설을 읽어 보고 싶다면,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굉장히 색다른 경험을 안겨주는 우주 오디세이를 만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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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하이웨이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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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끼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펭귄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펭귄은 우리가 있건 말건 개의치 않고 아장아장 저수지 가장자리까지 다가와서는 그리스 철학자같이 서서 가만히 있었다.

"뭘 하는 거지? 우치다가 말했다. "저 펭귄들은 어디서 온 걸까?"

"몰라." 나는 우치다에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p.71~72

<펭귄 하이웨이>는 오늘 동명의 애니메이션이 극장판으로 개봉되었다. 그에 맞추어 원작 소설도 이번에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는데,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표지로 하고 있어 더욱 산뜻하고 귀엽다. 게다가 이야기의 주인공 아오야마는 초등학교 4학년생으로, 매일같이 노트에 많은 것을 기록하는 메모광에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자칭이지만) 어른스러운 소년이다. 아오야마는 교외에 있는 작은 도시에 살았는데,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가는 길에 갑작스럽게 펭귄 무리들을 만나게 된다.

아니, 우리 동네에 어떻게 펭귄이?

아이들은 누구 하나 꼼짝하지 않았고, 뜬금없이 나타난 펭귄들은 왠지 먼 혹성에서 이제 막 지구에 도착한 우주 생명체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들은 진짜 펭귄이었고, 나중에 알아보니 남극과 그 주변 섬에 서식하는 종이었다. 당연히 교외의 주택가에서 서식하는 새가 나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어떻게 펭귄들이 주택가 한가운데 나타나게 된 것이며, 어디에서 온 것일까. 떼거리로 나타난 펭귄은 곧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그러다 아오야마는 '펭귄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펭귄 하이웨이' 연구에 착수해 펭귄에 대한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된다. 조용하고 평화롭던 마을은 펭귄이 나타난 이후 시끌 벅적, 믿기 어려운 일들이 하나씩 생겨나면서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판타지의 무대로 변하게 된다.

 

나는 무척 일찍 일어나서 이제 막 날이 밝은 거리를 홀로 탐험한다. 그럴 때, 우리 도시는 텅 비어 있어서 나는 당장이라도 세계의 끝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세계의 끝을 향해 매우 빠르게 달려갈 작정이다. 사람들이 도저히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빨리. 세계의 끝으로 통하는 길은 펭귄 하이웨이다. 그 길을 따라가면 다시 한 번 누나를 만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가설이 아니다. 나의 신념이다.   p.419

치과 누나의 가슴에 대한 호기심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단것을 좋아하며 아홉 시만 되면 졸음을 참을 수 없는 소년과 이유 없이 며칠씩 연락이 두절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기도 하는 쿨하고 신비로운 누나를 비롯해서 펭귄 사건 이후 아오야마와 함께 마을을 탐험하는 친구들까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모두 당장이라도 페이지 바깥으로 걸어나올 것처럼 생생하다. 체스 판에서 박쥐가 피어 오르고, 우산에서 망고가 열리고, 흰긴수염고래가 수로를 헤엄치고, 숲 속에서 '바다'가 발견되는 등 말도 안 되는 온갖 판타지가 난무하는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아기자기하고 유머스러운 코드를 잃지 않아 어느 정도 현실에 발을 내딛고 있는 기분이 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이야기는 언제나 교토를 배경으로 펼쳐졌는데, 이번 작품은 이례적으로,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아기자기한 교외 도시를 배경으로 그려지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그의 대표작인 <유정천 가족>,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등과 최근작인 <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 등의 작품들 모두 어딘가 유쾌하면서도 기묘한, 그리고 현실을 넘나드는 매혹적인 판타지와 특유의 이야기꾼다운 문체와 스토리를 선보였었다. 이번 작품 역시 모리미 도미히코 특유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종횡무진 마구 달려가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읽어 왔던 SF소설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전개되는 판타지라 풋풋한 성장 소설 같기도 하고, 따뜻한 판타지로 읽히기도 한다. 줄거리만 보자면 조금 이상하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뭉클하고 여운이 남는, 그래서 잊지 못할 잔상을 만들어 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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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아이를 차로 치고 말았어
그렉 올슨 지음, 공보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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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미쳤구나." 오웬은 리즈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말도 안돼, 리즈. 당신이 그랬을 리 없어."

리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단어들이 무딘 스테이크 나이프처럼 목 안에 콱콱 박혔다. 한 번 더 말했다간 피를 토하고 말 것이다.   p.123

리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커피와 각성제를 섞어 마시며 밤새 책과 컴퓨터를 보고, 다음 날 힘겹게 일어 났다. 그녀는 스물아홉 이었고, 더 이상 젊지 않았으며, 이번이 두 번째 변호사가 되기 위한 시험이었다. 이 시험은 그녀에게 전부나 다름없었고, 그녀가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남편에게 증명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험을 몇 시간 앞둔 아침, 그녀는 각성제를 먹어 흥분 상태인데다 밤새 꼬박 공부한 탓에 머리까지 멍했다. 그 상태로 급하게 차고를 빠져나가려고 후진을 하는데, 쿵 소리가 나면서 뭔가 들이받은 느낌이 나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개나 고양이라고 생각했지만, 차에 치인 것은 옆집의 세 살 짜리 소년 찰리였다. 천사 같은 아이였고, 캐롤과 데이비드 부부 역시 리즈와 오웬부부와 친분이 있었다. 특히 리즈와 캐롤은 언니, 동생처럼 서로를 대하며 의지하는 사이였다. 대체 이제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누구나 이런 상황이라면 눈 앞이 캄캄하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가장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고, 각정제를 먹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데다, 늦어서 허둥지둥 나가는 길이었다.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나쁜 방식으로 그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다.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차고에 그대로 두고 방수포로 덮어놓은 뒤 변호사 시험을 치르기 위해 운전해서 그 자리를 피해 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사고가 사건으로 바뀌었고, 그녀는 이제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고 만다.

 

 

리즈는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에 경악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생각도 못 했는데 그녀가 저지른 짓은 점점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얼음 덩어리처럼 산비탈을 굴러 내려온 거짓말이 점점 커지면서 죄 없는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는 눈사태가 되었다.

그 사람들은 지금 어떤 일이 닥쳐오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p.325

한편, 전화를 받느라 아주 잠깐 아이에게 눈을 떼고 있었던 캐롤은 찰리의 실종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다. 그녀는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고, 에스더 반장과 젊은 순경 제이크가 조사를 시작한다. 아내 때문에 자신의 성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남편 오웬은 리즈를 대신에 시체를 처리하고, 끊임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리즈는 정신적으로 점점 무너져 간다.  이야기는 완전범죄를 꾀하는 오웬과 그의 곁에서 미칠 것 같은 리즈, 아이를 잃고 절망에 빠진 캐롤과 자식의 실종보다 레스토랑의 위기에 더 신경 쓰는 데이비드, 그리고 용의자와 목격자를 만나며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사실 이야기가 시작할 때만 해도, 플롯이 단순하니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전개로 진행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페이지가 한 장씩 넘어 가면서,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감정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누구도 겉만 봐서는 모르는 게 사람이니 말이다. 사람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외모나 재산, 교육수준 등 보여지는 모습과 행동, 말투, 관계를 대하는 방식과 주위 사람들의 평판 등을 놓고 봐도 마찬가지이다. 완벽해 보이는 모습 이면에 추악함이 감춰져 있는 경우도 종종 있으며,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문을 닫은 뒤 각자의 집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리즈와 오웬, 캐롤과 데이비드 부부에게도 역시나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비밀이 있었고, 그것들은 우발적인 교통 사고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과 더불어 점점 사태를 예상할 수 없는 곳으로 치닫게 만든다. 그렇게 수십 년간 묻혀 있던 과거와 갈등이 드러나고, 교통사고를 기폭제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비극은 놀라운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며 뛰어난 가독성을 보여준다. 특히나 리즈와 오웬, 캐롤과 데이비드라는 네 명의 캐릭터들이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고, 그들의 심리 묘사 또한 매우 섬세하게 보여지고 있어 생생한 현실감을 부여하고 있다.

범죄스릴러의 대가 그렉 올슨이 작가 생활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발표한 심리스릴러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완벽한 페이지터너가 아닌가 싶다. 그의 다른 작품도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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