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누가 할래 - 오래오래 행복하게, 집안일은 공평하게
야마우치 마리코 지음, 황혜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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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를 입고 모두에게 축복받으며 최고로 행복해하던 순진무구한 여자는 어느새 "나는 당신의 가정부가 아니야!"라며 분노하는 주부가 됐고, 가정에 무관심한 남편("누구 돈으로 밥 먹고 사는데?"가 입버릇)에게 방치된 나머지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되찾고자 섹시한 남자(대부분이 놈팡이)와의 불륜에 빠져 자멸하고 만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틀에 박힌 스토리가 더 이상 드라마가 아닌 현실로 자리 잡게 됐다.   p.6

 

내가 조금 어렸을 때, 그러니까 결혼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을 때는 막연히 가족이라는 개념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수십 년을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타인과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매 순간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가끔은 무조건 희생해야 하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공유해야 하는, 사실은 엄청난 노력이 바탕이 되어 유지되는 공동체가 바로 가족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결혼은 사랑의 문제가 아닌 책임의 영역이었고, 일상을 공유한다는 것은 숨 쉬는 순간까지 서로 맞추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한 과정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완벽하게 다른 환경에서 수십 년 동안 살아왔던 남자와 여자가 동거에서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남녀가 연애가 아니라 일상이라는 현실을 함께한다는 것의 중심에는 '집안일이라는 좀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저자는 아오이 유우 주연의 [재패니스 걸스 네버 다이]라는 영화의 원작 <아즈미 하루코는 행방불명>이라는 소설로 유명한 작가이다. 그녀는 20대 후반부터 결혼에 대해 고민하다, 30대의 문턱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 도호쿠대지진을 계기로 피붙이 하나 없는 도쿄에서 혼자 생활한다는 것이 무서워 시작한 동거 생활은, 예상만큼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파악하게 되는 남자의 실태가 매우 신랄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각 장의 끝에는 귀엽게도 남자 친구의 항변이 담겨 있는 페이지가 수록되어 있다. 대부분 여성의 입장에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이런 부분들 때문에  '공평하게' 각자의 입장을 들어볼 수 있다는 점도 매우 흥미로웠던 책이었다. 이 책은 결혼한 여성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을 것 같고, 결혼을 앞두고 있는 커플은 물론 미혼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남편이 쓸모 없다고 처음으로 느낀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이사 때였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진짜 아무것도 안 하네. 입만 살았어.....'라며 충격을 받았던 그날로부터 벌써 4년이 되어간다. 다음 달에 또 한 번의 이사가 있을 예정인데, 이번에 남편은 대기 선수처럼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 하지만 아무것도 맡기지 않을 테다. 다 내 마음대로 할 거다. 제발 시키는 거나 제대로 해주길.....     p.188

 

갈수록 비혼, 저출산 경향이 강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실제로 최근 조사에서 4명 중 1명은결혼을 하지 않고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또 여성을 중심으로 연령이 낮을수록 '결혼을 해야 한다', '자녀가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낮다고 한다. 아직은 자녀를 낳기 위해서는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지만, 미혼이나 청년층은 자녀출산을 위해 결혼이 전제돼야 한다는 인식이 차츰 변하는 추세이고,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도 겨우 과반수를 넘을 정도였다. 성별로 나눠보면 상대적으로 남자는 해야 한다는 비율이 높은 반면, 여자는 과반수도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있었다. 사실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나라에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아직까지는 여자에게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연애할 때는 서로에게 배려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하기 싫은 것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 순간만큼은 상대를 위해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다. 그리고 서로에게서 자신이 보고 싶은 면만 보려고 하기 때문에, 단점은 쉽게 눈에 띄지 않고, 주위에서 뭐라고 얘기를 하든 흘려 듣게 마련이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함께 살게 되면서 우리는 그 비현실적인 필터링에서 벗어나, 서로의 원래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민낯까지 공유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 사람이 내가 알던 그 혹은 그녀가 맞는지 혼란스럽고, 뭔가 속은 것 같아 억울하기도 하고, 사소한 일로 분하고 서운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와 남자는 완벽하게 다른 존재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은 존재이다. 사실은 더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고, 서로에게 어리광부리고 싶은 것이며, 각자 자기 편한 대로만 생각하는, 아내와 남편은 둘 다 거기서 거기라는 얘기다. 각자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한다면, 가정 내 여남평등은 물론 두 사람 모두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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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게 산다는 것 - 불필요한 감정에 의연해지는 삶의 태도
양창순 지음 / 다산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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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너무 애쓰며 살아가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누구나 심리적으로 슈퍼맨 혹은 슈퍼우먼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조금만 살아보면 그것이 이룰 수 없는 꿈임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환상을 버리지 못한 채 매사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p.45

바쁘게 앞만 보면서 살다 보니 가끔은 지칠 때가 있다. 매일 같이 챙겨야 할 것들, 내가 해야 하는 것들을 빠짐없이 해내야 하고, 그러다 보니 가족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엄격해지기 일쑤였으며, 실수와 단점들이 눈에 띄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일도 인간관계도 완벽해지고자 하니 늘 기대감이 못 미치는 것 같은 기분에 초조해지기도 했다. 수십 년간 인간관계를 분석해 온 정신과 정문의 양창순 박사는 나처럼 아둥바둥 여유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담백함'이라는 처방을 내린다. 그녀가 말하는 담백한 삶이란 한마디로 말해 덜 감정적이고 덜 반응적인, 의연한 삶을 뜻한다. 물론 음식에서 담백한 맛을 매기가 어려운 것처럼 우리의 삶이나 인간관계에서도 담백해지기란 쉽지 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담백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

담백함은 '지나친 기대치를 내려놓을 때 느끼는 기분'이라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자신의 실수와 단점에 대해 여유로워진다면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있다. 남이 나를 괴롭히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 것만으로도 삶이 조금은 가벼워질 테니 말이다. 마음이 억울하고 힘들수록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한 걸음 물러나 현재 내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반응을 조절하는 것이 바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실 힘든 일 자체가 스트레스가 아니라, 그 일에 대한 나의 생각이 가장 나를 힘들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여유를 갖는 건 삶의 어느 순간에서든 정말로 중요하다. 인간관계도 담백해지므로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다. 우린 너 나 할 것 없이 담백하고 편안한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리고 호감을 느끼는 상대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게 인지상정이다. 결과적으로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인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내 인복은 내가 만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p.163

살면서 가장 많은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관계에서 비롯될 것이다. 이 책은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던 양창순 박사의 관계 심리학 결정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관계에 대한 훌륭한 팁들이 많이 담겨 있다. 실제로 인간관계가 힘들다는 사람일수록 관계 속에서 바라는 것이 많은 편이다. 언제나 모든 사람과 잘 지내야 하고, 내가 모임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 나를 최고로 좋아해야 한다는 바로 그 '높은 기대치'는 그야말로 환상에 가깝다. 과연 누가 세상 모든 사람과 다 잘 지낼 수 있겠느냔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언제부턴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 더 익숙해진다. 그리고 상대방이 내가 바라는 것을 주지 않으면 혼자 실망하고 상처받는다. 그것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욕구와 기대치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한탄한다.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왜 나에게만 이런 힘든 일이 생기는 걸까. 나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 필요한 마음은 '딱 한 걸음 물러서기'이다. 딱 한 걸음만 물러서서 보면 대부분의 상황이 똑바로 보이기 시작하니 말이다. 똑바로 볼 수 있다면, 인생의 많은 부분이 달라질 수 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잘한 것은 잘한 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자세로 나의 열등감과 자만심을 치유하도록 노력해보자. 마음에 여유를 갖는 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저자가 알려 주는 담백한 마음 처방전을 읽다 보면 누구라도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걸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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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게 (반양장)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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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눈앞에 있는 바꿀 수 있는 것을 직시한다.'

노년을 행복하게 사는 힌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남은 인생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이 사실은 바꿀 수 없습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식뿐입니다.

늙어가는 용기, 나이 든 '지금'을 행복하게 사는 용기란 인생을 바라보는 눈을 아주 조금 바꾸는 용기인지도 모릅니다.    p.92~93

‘산다’는 건 다시 말해나이를 먹는다는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 겪게 되는 것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지만, 나이든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문제는 사람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젊을 때는 나이 든다는 게 어떤 것인지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고,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커다랗게만 보였던 부모님이 늙어가고, 나 또한 나이를 먹게 되면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이란 내가 상상했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말한다.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라고. 하지만, 살아온 인생보다 살아갈 인생이 더 짧아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에도 그렇게 의연한 마음 가짐으로 남은 인생을 대할 수 있을 것인가.

 

<미움받을 용기>로 인상적이었던 기시미 이치로가 이번에 나이 듦의 가치를 생각해보게 하는 책으로 돌아왔다. ‘아들러 심리학 1인자이자플라톤 철학의 대가인 기시미 이치로. 왕성한 활동으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일생일대의 사건이 닥친다. 나이 오십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것이다. 글쓰기는목숨을 부지한 제 사명이라고 말하는 기시미 이치로는 이 책을 통해나이 들어가는 삶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도, 존경 받는 노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되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이 들수록 더욱 다양한 것을 배워야 합니다. 또 책을 읽고 꾸준히 사색해야 인간으로서의 성장을 바랄 수 있습니다.

하지 못하는 일이 늘어도 책을 읽을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이를 먹고 지식과 경험을 쌓아서 다양한 의미에서 사람들의 본보기가 될 수 있게 꾸준히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31~232

저자의 어머니는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거의 누워만 있어야 했는데, 그 상태로 독일어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의식 수준이 저하되고 학습이 어려워지자 이번에는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대부분은 그런 상태에서 애써봤자 소용없다고 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어머니의 '무언가를 배우려는 마음과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는 기력과 의욕을 잃지 않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저자는 예순 살에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강연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한 지 두 해 정도 되었고, 여전히 실력이 신통치는 않지만, 그럼에도 한국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기회가 와도 갖가지 이유를 들어 못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불완전한 자신과 마주하고,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불가능이란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 나이 듦의 긍정적인 면을 체감하기 위해, 젊은 시절에 했던 일을 다시 한번 해보거나, 해보고 싶었는데 여태까지 해보지 못한 일에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 오래 전에 읽고 어렵다고 느꼈던 책이나 언젠간 읽으려고 책장에 고이 모셔두었던 책을 펼쳐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기시미 이치로는 열 명에 두 명은 죽게 된다는 큰 병을 겪으면서,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보다는 '오늘을 산다'는 건 참으로 멋진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가 알려주는 '지금을 잘 살기 위한 현명하고 현실적인 방법'들이 와 닿는 걸 보면, 나도 이제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시작도 끝도 아닌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라는 것을 자각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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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번리의 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7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정지현 옮김, 김지혁 그림 / 인디고(글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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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을 하고 싶어. 물론 학문적 업적을 남기는 일이 고귀한 꿈이라고 생각하지만, 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걸 알려 주기보다는 나로 인해서 사람들이 더 즐거워졌으면 좋겠어. 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자그만 즐거움이나 행복한 생각들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 앤이 꿈꾸듯 말했다.

"난 네가 그 꿈을 매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해." 길버트가 감탄하며 말했다.   p.96

우아한 패턴과 앤티크한 프레임이 아름답고 고혹적인 분위기의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일곱 번째 작품이다. 주근깨 빼빼 마른 소녀에서 어여쁜 숙녀가 되어 초록 지붕으로 다시 돌아온 앤의 이야기로, 자신의 모교인 에이번리 학교에서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성장해 나가는 앤의 모습이 사랑스럽게 그려져 있다.

'빨간 머리 앤'은 빨간 머리의 주근깨투성이 고아 소녀 앤이 실수로 커스버트 남매에게 입양되면서 생기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성장소설인데,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으로 '에이번리의 앤'을 비롯하여 9권의 후속편들이 이어지는 시리즈이다. 이번 작품에서 선생님이 된 앤의 첫번째 부임지에서의 삶이 펼쳐지고, 이어지는 후속편들에서는 길버트와의 사랑과 결혼 생활, 아이들의 삶 등 앤의 일생이 그려진다. 이 시리즈는 저자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자전적 성향이 반영된 소설로, 몽고메리 역시 주인공 앤처럼 어린 시절 상상력으로 외로움을 달랬고, 대학을 졸업한 뒤 선생님이 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앤은 엄밀하게 말해서는 결코 미인이 아니었지만, 앤의 외모에는 뭔가 형언할 수 없는 매력과 특별함이 있었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앤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앤의 가장 큰 매력은 앤을 감싸고 있는 가능성과 내면에 있는 잠재력이라고 느꼈다. 마치 앤은 무슨 일이 곧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p.415

사실 어린 시절에 '빨간 머리 앤'이라는 작품을 읽었을 때만 해도, 이 작품이 시리즈로 이어져서 앤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어른이 되어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를 통해서 다시 '빨간 머리 앤'을 읽고, 이번에 '에이번리의 앤'을 읽고 있자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빨간 머리에 콤플렉스가 있었던, 하지만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초록지붕의 생활에 적응했던 앤이 어느 새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걸 보니 흘러가는 시간들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주근깨 빼빼 마른 소녀를 읽던 당시의 어린 소녀에서 지금은 어여쁜 숙녀가 되어 다시 돌아온 앤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은 어른이 되었으니 말이다.

수다쟁이에 공상을 좋아하는 여자 아이는, 회초리 대신 애정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포부를 굽히지 않을 만큼의 어른이 되었다. 물론 아직은 실패하는 것이 두렵고, 여전히 실수투성이에 덤벙대기도 하고, 여전히 혼잣말하는 어린 시절의 버릇도 고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소녀에서 숙녀로 성장해 가는 앤의 이야기는 다이애나, 길버트 등 주변 인물들과 함께 계속 이어질 것이다. 우리의 삶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나 이번 리커버 에디션은 표지가 초록색이라서 더 산뜻하고 예쁘게 느껴졌다. 초록 지붕 집에 사는 빨간 머리 여자아이 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니 말이다. 기존 고전 명작 시리즈의 아담한 느낌에서 벗어나 조금 더 커진 판형으로 가독성이 높아진 점 또한 매력적이다.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는 소장용으로, 선물용으로도 많이들 구입하는데, 그만큼 표지와 일러스트들이 너무도 아름다운 책이다. 게다가 앤의 주옥같은 긍정 어록들은 생의 경이로움을 새삼 깨닫게 만들어 준다. 이 책을 통해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주인공 앤을 통해서 소박하지만 따뜻한 위로도 받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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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문장 수업 - 하루 한 문장으로 배우는 품격 있는 삶
김동섭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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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속에는 한 민족이 수천 년 동안 걸어온 발자취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런 까닭에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민족의 역사, 문화, 신화, 생활 방식, 세계관 등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라틴어는 천 년 동안 번성한 로마 제국의 언어였다. 왕정에서 시작하여 공화정의 장년기를 보내고, 제정을 통해 전 유럽과 중동 그리고 이집트를 손아귀에 넣었던 로마의 모든 역사가 라틴어 속에 들어 있다.   p.5

라틴어는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제국 중 하나인 로마 제국에서 사용되던 언어이다. 로마 제국은 천 년 이상 지속되었고, 온 유럽을 자신들의 기준, 즉 자신들의 언어와 제도로 재편했다. 그런 점에서 로마 제국의 언어인 라틴어는 서양인들의 정신세계를 투영하는 거울과도 같다. 학자들은 라틴어가 인류가 사용한 언어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논리적인 언어라고 말한다. 그런 이유에서 혹자는 라틴어의 문법이 너무 어렵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책은 10년 넘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는 김동섭 교수가 그간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누구나 쉽게 라틴어를 배우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도록 쓰였다. 라틴어로 기록된 경구, 속담, 격언 등을 소개하며 그 유래와 역사적 배경이 설명되어 있는데, 다소 복잡한 라틴어 문법도 쉽게 설명되어 있어 전혀 어렵지 않게 읽히는 점이 장점이다.

사실 현대인들 중에서 라틴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대부분 자신도 모르게 라틴어 문장 한 두 개쯤은 어디선가 들어봤거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일곱 가지의 큰 카테고리 아래 80여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을 살아라, 사랑 받고 싶으면 사랑하라, 지혜가 모든 것을 이긴다, 로마인들의 문장, 신의 뜻대로, 마지막을 기억하는 것, 모두는 하나를 위해서, 라는 항목으로 테마가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기본적인 라틴어의 알파벳과 발음도 소개되어 있고 영어와 라틴어의 공통점과 다른 점도 설명되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낯설게 느껴질 법도 한 라틴어 원문들이 생각보다 우리에게 친숙한 단어들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불안해서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신을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은 신이 제시한 길을 따라가며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미국의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미국에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이유를 미국인에게 신화가 없다는 데에서 찾았다. 정신세계가 피폐해지는 이유를 신화의 부재에서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로마인들은 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p.196

Festina Lente. 페스티나 렌테. '천천히 서둘러라' 라는 뜻이다. 모순적인 의미를 지닌 이 경구는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좌우명이었다고 한다. Nihil novum sub sole.  니힐 노붐 숩 솔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이는 고대 로마인들의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우주 만물이 마치 불교의 윤회사상처럼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으며, 새로운 것도 과거에 존재했던 것의 또 다른 존재라고 역설하는 이 말이 고대 로마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니 흥미로웠다.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이 경구는 모든 인간은 죽기 마련이고, 이승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도 한낱 먼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항상 죽음을 대비하고 있으라는 말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를 통해 더 알려진 라틴어 Memento는 영어에서는 '시간이나 사람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품'이란 뜻이기도 하다.

언어를 배우는 것은 다시 산다는 것이라는 프랑스 속담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언어 속에는 한 민족이 수천 년 동안 걸어온 발자취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뜻일 것이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민족의 역사, 문화, 신화, 생활 방식, 세계관 등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천 년 동안 번성한 로마 제국의 언어인 라틴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만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책에 소개된 문장들을 하루에 한 문장씩만 따라 읽어도 좋을 것 같다. 라틴어 원문을 직접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기초 문법부터 차근차근 알려주고 있어 어렵지 않고, 그에 얽힌 유래와 역사적 배경이 설명되어 있어 지루할 틈도 없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면 라틴어 문구는 물론이고 고대 로마인들의 문학, 신화, 종교에 대해 구석구석 알 수 있어 인문학적 교양도 풍부해질 것이다. 평소 영화나 소설 속에서만 만나왔던 라틴어의 세계가 궁금했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서 쉽고 재미있게 라틴어 문장들을 배워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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